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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동-독석동 철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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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사동-독석동 철수 작전은 1950년 8월, 한국군 제3사단이 북한군의 포위 위협을 피해 해상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북한군의 공세로 제3사단이 고립되자 육군본부는 미 제8군과 협력하여 해상 철수를 결정했다. 철수 작전은 1950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었으며, 기만 작전과 은밀한 준비를 통해 성공적으로 병력과 민간인을 구룡포로 철수시켰다. 이 작전을 통해 한국군 제3사단은 주력을 보존하여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으며, 약 9,000명의 병력과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안전하게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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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동-독석동 철수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작전 정보
전투 이름장사동 철수 작전
캠페인한국 전쟁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8월 16일 - 17일
장소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결과국군/유엔군의 작전 성공
교전 세력
교전국 1국제연합군

지휘관
지휘관 1김석원 준장
지휘관 2김창덕 소장
병력 규모
병력 19,000여명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규모
사상자 1부상 125
사상자 2알 수 없음

2. 배경

1950년 8월 초, 동해안선을 따라 철수하던 한국군 제3사단은 영덕 남쪽 10km 지점인 장사동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1] 8월 4일, 청송에 주둔 중이던 한국군 부대가 북한군 제12사단에 포위되면서 한국군 수도사단은 의성으로 철수했다.[1] 이로 인해 8월 5일부터 제3사단의 좌측 방어선인 청송 일대에 공백이 생겼고, 북한군 제12사단과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766부대는 기계 방면으로 빠르게 남하했다.[1]

8월 7일, 현동에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이 나타났고,[1] 8월 11일에는 766부대의 선도 부대가 포항에 진입했다.[1]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7번 국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1]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한국군 제3사단은 8월 13일, 하송동에서 부대 정비를 마친 제22연대의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남겨두고, 2개 대대를 제23연대의 좌측 방어 지역인 462고지 일대에 배치했다.[1]

8월 1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의 일부 병력이 흥해읍 북쪽에 나타나면서 제3사단은 장사리 일대에 완전히 고립되었다.[1] 기계-포항 지구의 전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육군본부 제8군과 협조하여 제3사단의 해상 철수 명령을 내렸다.[1]

2. 1. 8월 초, 한국군의 후퇴

1950년 8월 초, 동해안선을 따라 철수하던 한국군 제3사단은 영덕 남쪽 10km 지점인 장사동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1] 8월 4일, 청송에 주둔 중이던 한국군 부대가 북한군 제12사단에 포위되면서 한국군 수도사단은 의성으로 철수했다.[1] 이로 인해 8월 5일부터 제3사단의 좌측 방어선인 청송 일대에 공백이 생겼고, 북한군 제12사단과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766부대는 기계 방면으로 빠르게 남하했다.[1]

8월 7일, 현동에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이 나타났고,[1] 8월 11일에는 766부대의 선도 부대가 포항에 진입했다.[1]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7번 국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1] 이러한 북한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한국군 제3사단은 8월 13일, 하송동에서 부대 정비를 마친 제22연대의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남겨두고, 2개 대대를 제23연대의 좌측 방어 지역인 462고지 일대에 배치했다.[1]

8월 1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의 일부 병력이 흥해읍 북쪽에 나타나면서 제3사단은 장사리 일대에 완전히 고립되었다.[1] 기계-포항 지구의 전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육군본부 제8군과 협조하여 제3사단의 해상 철수 명령을 내렸다.[1]

2. 2. 북한군의 포위 위협

1950년 8월 초, 동해안선을 따라 철수하던 한국군 제3사단영덕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장사동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1] 8월 4일, 청송에 주둔하던 한국군 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북한군 12사단이 포위하면서 수도사단은 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 8월 5일부터 제3사단의 좌측 방어선인 청송 일대에 광대한 공백 지대가 형성되었고, 북한군 12사단과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766부대는 기계 방면으로 빠르게 남하하였다.

8월 7일, 현동에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이 나타났고,[1] 8월 11일에는 766부대의 선도 부대가 포항에 진입했다.[1] 같은 날, 북한군 제5사단은 제3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7번 국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1] 북한군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 해군미 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태백산맥 기슭을 따라 남진하여 제3사단의 좌측 배후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1]

8월 13일, 북한군 제5사단의 우회를 감지한 제3사단은 하송동에서 부대 정비를 마친 22연대의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남겨둔 채, 2개 대대를 23연대의 좌측 방어선인 462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8월 1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의 일부 병력이 흥해읍 북쪽에 출현하면서 제3사단은 장사리 일대에 완전히 고립되었다.[1] 10일에는 북한군 경무장 부대가 흥해에 침투하여 제3사단의 퇴로를 차단했고, 11일에는 후방의 포항을 점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 김석원 준장은 포항 탈환을 시도하려 했으나, 고문관 에머리치 중령의 반대로 중지되었다.[2] 순양함 헬레나와 구축함 3척, 제40전투폭격대대가 지원했지만, 야간에는 효과가 없었고, 보급도 끊기기 쉬워 제3사단의 진지는 점차 좁혀져 갔다.[3]

2. 3. 육군본부의 해상 철수 명령

1950년 8월 초, 동해안을 따라 철수하던 한국군 제3사단은 영덕군 남쪽 10km 지점인 장사동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1] 8월 4일, 청송군에 주둔 중이던 한국군 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가 북한군 12사단에 포위되면서 수도사단은 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로 인해 8월 5일부터 제3사단의 좌측 방어선인 청송 일대에 광대한 공백 지대가 형성되었고, 북한군 12사단과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766부대는 기계 방면으로 빠르게 남하하였다.

8월 7일 현동에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이 출현하였고,[1] 8월 11일에는 766부대의 선도 부대가 포항에 진입했다.[1] 같은 날,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7번 국도를 우회하기 시작하였다. 8월 13일, 북한군 제5사단의 우회를 감지한 한국군 제3사단은 하송동에서 부대 정비를 마친 22연대의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남겨둔 채, 2개 대대를 23연대의 좌측 방어인 462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8월 15일 새벽, 북한군 제5사단의 일부 병력이 흥해읍 북쪽에 출현하면서 제3사단은 장사리 일대에 완전히 고립되었다.[3] 기계-포항 지구의 전황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육군본부 제8군과 협조하여 제3사단의 해상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3]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제3사단의 해상 철수를 결심하고[3], 8월 14일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제3사단에 해상 철수 준비를 지시했다.[3]

3. 작전 개시

철수명령을 하달받은 한국군 제3사단은 15일 저녁에 23연대를 지경리,화진리에 배치하고 462고지에서 철수한 22연대를 화진리, 독석동에 배치하였다.

8월 16일 한국군 제3사단은 21:00시에 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접안할 것이라는 육군본부의 전문을 받았다.

김석원 준장은 철수작전을 극비에 부치는 한편 각 연대장과 참모진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해상철수작전 계획을 하달하였다.

독석동~조사리 해안철수작전



작전명령은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에게만 전달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에게 해변에서 사단장 연설이 있을 것이라 알려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그대로 배에 태워 버리는 등, 작전에 있어서 최대한의 기도비닉을 유지하였다.

적을 끝까지 기만하기 위해 포4문으로 일제히 사격하였으며 17일 04:00 최후까지 엄호한 중대가 철수 신호에 따라 승선하였다.

한편 북한군 제5사단은 날이 밝아짐에 따라 한국군 제3사단의 철수를 알아차리고 06:00부터 독석동 뒷산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시작하였다. 그 무렵 주력 병력을 태운 3척의 LST는 해안을 떠나고 있었고, 07:00에 부대승선을 확인한 사단장과 참모진이 탑승한 마지막 LST가 해안을 떠났다.

이후 LST 4척은 미군 순양함 헤레나 호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17일 10:30 구룡포에 도착함으로써 작전은 종료되었다.

3. 1. 철수 준비

8월 15일, 철수 명령을 받은 제3사단은 23연대를 지경리와 화진리에, 22연대를 화진리와 독석동에 배치하였다.

8월 16일, 육군본부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21시에 접안할 것이라는 전문을 제3사단에 보냈다. 같은 날 아침, 제3사단에 연락기가 날아와 "LST를 오늘 밤 파견한다. … LST의 도착 해안을 보고하라. 30분 후에 다시 날아오겠다"라고 적힌 통신통을 투하했다[3]。제3사단은 수심과 해안의 상황을 감안하여 철수 지점을 독석리-조사리 사이 1킬로미터의 모래사장에 결정하고, 연락기에 그 뜻을 통지하자 "오후 9시에 LST 4척이 착안한다. 필요한 준비를 서둘러라"라고 통보했다[3]

김석원 준장은 극비리에 해상 철수 작전 계획을 하달했다. 작전명령은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에게만 전달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에게는 해변에서 사단장 연설이 있을 것이라 알려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그대로 배에 태우는 등, 작전에 있어서 최대한의 기도비닉을 유지하였다.

해상철수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독석동~조사리 해안철수작전



같은 날 밤, 제3사단은 야포 4문을 해안에 배치하여 맹사격을 가하고, 그 외 10여 대의 차량을 헤드라이트를 켠 채 장사동 남쪽의 언덕을 오르게 하고, 돌아올 때는 미광등을 켜고 돌아오게 하는 작업을 밤새도록 반복했다.[5] 더욱이 제1선에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두고 오후 10시에 이탈시키고, 잔류 부대는 일제히 사격하여 공격을 가장했다. 이로 인해 증원을 받아 반격으로 전환하는 것처럼 위장했다.[5]

3. 2. 기도비닉 유지

작전명령은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에게만 전달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에게는 해변에서 사단장 연설이 있을 것이라 알려 주민들을 해변에 모이게 한 후 그대로 배에 태워 피난시키는 등 최대한의 기도비닉을 유지하였다.[5] 적을 끝까지 기만하기 위해 포 4문으로 일제히 사격하였으며 17일 04:00 최후까지 엄호한 중대가 철수 신호에 따라 승선하였다.

3. 3. 기만 작전

한국군 제3사단은 철수 작전을 최대한 비밀리에 부치면서, 적을 끝까지 속이기 위해 다양한 기만 작전을 펼쳤다.[5] 우선, 8월 16일 밤 4문의 포를 해안에 배치하여 일제 사격을 가하여 적의 주의를 분산시켰다.[5] 또한, 트럭 6대를 동원하여 17일 00:00부터 1시간 30분 동안 독석동과 방화동 사이 2km 구간을 왕복 운행하며, 헤드라이트를 켜고 증원 병력이 상륙한 것처럼 위장했다. 차량 10여 대를 동원하여 헤드라이트를 켠 채 장사동 남쪽 언덕을 오르내리게 하여 적을 혼란시켰다.[5]

각 연대별로 1개 중대 규모의 "잔류접촉분견대"를 편성하여 8월 16일 21시에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대치 중인 북한군을 격퇴한 후 지정된 해안 지대로 철수하는 기만 전술을 펼쳤다. 이들은 17일 04시까지 엄호 임무를 수행하고 철수 신호에 따라 승선했다. 제11야전포병부대의 1개 중대는 잔류접촉분견대가 철수할 때까지 독석동 해안에서 요란 사격을 계속하여 아군 철수를 엄호했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해변에서 사단장 연설이 있을 것이라고 알린 후, 모인 주민들을 그대로 배에 태워 피난시키는 등 최대한의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작전을 수행했다.[5]

3. 4. 철수

8월 17일 새벽, 잔류 접촉 분견대가 철수 신호에 따라 승선하였다.[5] 북한군 제5사단은 날이 밝자 한국군 제3사단의 철수를 알아채고 독석동 뒷산에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주력 병력을 태운 LST 3척은 해안을 떠난 후였다.[4][5] 사단장 김석원과 참모진이 탑승한 마지막 LST가 07:00에 해안을 떠났다. LST 4척은 미군 순양함 헤레나 호와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17일 10:30 구룡포에 도착함으로써 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한국군 제3사단은 철수 하루 전인 8월 16일, 야포 4문을 해안에 배치하여 맹렬하게 사격하고, 10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헤드라이트를 켠 채 장사동 남쪽 언덕을 오르내리게 하여 증원군이 오는 것처럼 위장했다.[5] 또한, 제1선에는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오후 10시에 이탈시켰으며, 잔류 부대는 일제히 사격하여 공격하는 척하며 적을 기만했다.[5] 피난민들에게는 새벽에 사단장이 연설할 예정이니 해안에 모이라고 알린 후, 모인 피난민들을 신속하게 배에 승선시켰다.[5]

8월 17일 오전 6시까지, 장병 9,000명(부상자 125명 포함), 경찰대 1,200명, 지방 공무원, 노무자, 피난민 등 1,000여 명과 차량, 군수품은 물론 송아지까지 모두 승선 완료하였다.[5] 날이 밝으면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미군 공군이 이를 제압하였다.[4][5] 마지막 LST에 탑승하려던 일본인 선원들이 포격을 이유로 출항을 거부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헌병의 설득으로 해결되고 원호 중대까지 무사히 탑승 후 이함했다.[6][5]

구룡포에 도착한 제3사단은 20일까지 신병을 보충받아 부대를 재편성하고, 민기식 대령이 이끄는 민지대와 교대하여 다시 제5사단과 교전했다.[4][7]

4. 결과

철수 작전 결과 부상자 125명을 포함, 한국군 제3사단 병력 9,000여 명이 철수에 성공했다.[8] 경찰 1,200여 명, 지방 공무원 및 민간인 10,000여 명도 함께 철수했다.[8]

철수 작전 결과 부상자 125명을 포함한 사단 병력 9000여 명과 경찰 1200여 명, 지방 공무원 및 반공투사 등 민간인 1만여 명이 철수에 성공하였다.[8] 결과적으로 한국군 제3사단은 주력 병력을 보존하여 다시 포항 방어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철수 작전의 성공이 한국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4. 1. 인적 피해

철수 작전 결과 부상자 125명을 포함, 한국군 제3사단 병력 9,000여 명이 철수에 성공했다.[8] 경찰 1,200여 명, 지방 공무원 및 민간인 10,000여 명도 함께 철수했다.[8]

4. 2. 전략적 의의

철수 작전 결과 부상자 125명을 포함한 사단 병력 9000여 명과 경찰 1200여 명, 지방 공무원 및 반공투사 등 민간인 1만여 명이 철수에 성공하였다.[8] 결과적으로 한국군 제3사단은 주력 병력을 보존하여 다시 포항 방어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철수 작전의 성공이 한국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5. 논란

5. 1. 김석원 장군에 대한 비판

5. 2. 작전 성공에 대한 반론

참조

[1]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2]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3]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4] 서적 韓国戦争第2巻
[5]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6]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7]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下巻
[8] 문서 모든 장비와 피난민의 송아지까지도 싣게하는 여유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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