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사리아의 바실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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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사리아의 바실리오스는 330년경 폰토스에서 태어나 379년경 사망한 기독교 성직자이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 주교로서,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정통 신앙을 옹호하고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젊은 시절 아테네에서 공부하며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우정을 쌓았으며, 이후 수도 생활을 통해 동방 교회의 수도 전통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바실리아드라 불리는 구빈원, 구제원, 병원 등을 건립하여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저술과 사상은 동서방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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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9년 사망 - 샤푸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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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사리아의 바실리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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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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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바실리오스 |
출생 | 330년경,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 |
사망 | 379년 1월 1일,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 |
공경 | 성인 |
축일 | 1월 2일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터교) |
수호 | 러시아 카파도키아 병원 관리자 수사 교육자 구마 사제 전례학자 |
직함 | |
주교 | 카이사레아 마자카 주교 |
신학적 중요성 | |
주요 업적 | 삼위일체 교리 옹호 수도 생활 개혁 자선 활동 강조 |
생애 | |
출생 | 바실리우스는 부유하고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 막리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쳤고, 그의 형제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의 베드로, 그리고 그의 여동생 막리나 또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
교육 | 카이사레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아테네 |
성직 생활 | 370년 카이사레아의 주교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정통 신앙 옹호 |
저서 | |
주요 저서 | 성령론 수도 규칙 강해설교 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 |
영향 | |
영향 | 동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 삼위일체 교리 발전에 기여 사회 정의와 자선 강조 |
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성 대 바실리오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 우라노판도르 |
라틴어 이름 | 상투스 바실리우스 마뉴스 |
그리스어 이름 | Βασίλειος Καισαρείας (바실리오스 카이사레아스) Άγιος Βασίλειος ο Μέγας (아요스 바실리오스 오 메가스) |
2. 생애
바실리오스는 330년경 폰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수사학자 대 바실리오스였고, 어머니는 카이사레아의 에멜리아였다.[3]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4] 외할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내리기 전 처형된 순교자였고, 친할머니 대 마크리나는 네오카이사레아의 그레고리오스를 따르던 사람이었다.[5] 소 마크리나, 나우크라시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등 네 형제는 모두 신앙심이 깊어 훗날 바실리오스처럼 시성되었다.
350년 또는 351년경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 마자카(현재 튀르키예 카이세리)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6] 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7]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리바니우스의 문학 등을 공부하고, 349년경 아테네에서 6년 가까이 함께 공부하며 훗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동문수학했다.[8][9] 356년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거쳐 카이사레아로 돌아온 그는 1년간 법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10] 이후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 주교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11]
357년 세례를 받은 바실리오스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며 금욕과 수도생활을 배웠다.[13][14]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리스의 네오카이사레아 인근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다,[13] 358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안네시 인근 가문 사유지에 수도원을 세웠다.[17]
360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처음에는 유사본질주의 편에 섰으나, 결국 니케아 신경의 강력한 지지자로 변모했다.[22] 362년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에게 부제로,[13] 365년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게 사제로 서품받았다.[13] 이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아리우스파에 맞서 신학 토론을 벌였다.[23]
370년 에우세비오의 뒤를 이어 카이사레아 교구장 주교로 착좌한[24] 그는, 흉년에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가산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는 등 자선 활동에 힘썼다.[25] 도적과 매춘부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고, 카이사레아 외곽에 구빈원, 구제원, 병원 등이 포함된 바실리아드를 건립했다.[25]
발렌스 황제가 아리우스파로 전향을 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했고, 황제는 그의 용기에 감탄하여 예수 공현 대축일 성찬예배에 참례하고 별장지를 하사하며 자선 활동을 도왔다.[26] 아리우스주의 확산을 우려한 그는 아타나시오의 도움을 받아 정통 신앙을 옹호했다.[27]
2. 1. 젊은 시절과 공부

바실리오스는 330년경 폰토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수사학자인 대 바실리오스였고, 어머니는 카이사레아의 에멜리아였다.[3] 바실리오스의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4] 외할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리기 전에 처형당한 기독교 순교자였으며, 친할머니 대 마크리나는 네오카이사레아의 그레고리오스를 따르던 사람이었다.[5] 바실리오스에게는 소 마크리나, 나우크라시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등 네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신앙심이 깊었으며 나중에 바실리오스와 마찬가지로 시성되었다.
350년 또는 351년경, 바실리오스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 마자카(오늘날 튀르키예의 카이세리)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6] 그곳에서 그는 평생 친구가 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를 만났다.[7]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는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을 가서 리바니우스의 문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공부하였다. 349년 무렵, 두 사람은 아테네로 가서 6년 가까이 함께 공부했는데, 이때 훗날 로마 황제이자 배교자가 되는 율리아누스도 그들과 함께 공부했다.[8][9] 356년에 바실리오스는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와 시리아를 여행하다가 카이사레아로 돌아와 1년 동안 법학과 수사학을 가르쳤다.[10]
바실리오스는 카리스마적이고 금욕적인 성향의 주교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11] 그는 기존에 가르치던 학문을 버리고 하느님에게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2. 2. 안네시에서의 수도 생활
357년 바실리오스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어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지를 여행하며 금욕과 수도 생활을 배웠다.[13][14]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이리스의 네오카이사레아 인근에서 고독하게 생활했다.[13] 그는 금욕적인 생활과 묵상을 통해 마음속 고독을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15] 당시 폰토스 인근에는 바실리오스의 멘토였던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가 있었으나, 교리 이해 차이로 결국 결별했다.[16]바실리오스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모여 수도 생활을 하는 것에 이끌려, 358년 형제 베드로를 포함한 동료들과 함께 안네시 인근 가문의 사유지에 수도원을 설립했다.[17] 어머니 에멜리아와 누이 마크리나를 포함한 여인들도 기도와 자선 활동에 헌신했으며, 마크리나는 별도의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는 주장도 있다.[18]
이 시기에 바실리오스는 수도 공동체 생활에 관한 글을 썼으며, 이는 동방 교회 수도 전통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19] 358년, 바실리오스는 안네시에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재회하여 함께 수도 생활을 했다.[20] 두 사람은 오리게네스의 글을 모아 《오리게네스의 필로칼리아》를 공동 작업했다.[21] 이후 그레고리오스는 나지안조스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2. 3. 카이사레아 주교 시절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 주교는 362년에 바실리오스를 부제로 서품했다.[13] 365년에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주교가 바실리오스를 사제로 서품했다.[13]바실리오스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아리우스파 이단자들과 신학 논쟁을 벌였다.[23] 발렌스 황제의 대리인들이 주재한 공개 토론에서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는 아리우스파의 오류를 논박하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여 승리했다.[23]
370년 에우세비오 주교가 사망하자 바실리오스는 카이사레아의 교구장으로 착좌했다.[24] 카이사레아 교구장은 폰토스의 총독이자 다섯 관하 교구를 둔 관구장이었다. 바실리오스는 흉년에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산을 사용했다.[25]
바실리오스는 서간을 통해 도적과 매춘부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고, 사제들의 청렴을 강조하며, 공직자들의 법 집행을 독려했다.[25] 매일 아침과 저녁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했으며, 카이사레아 외곽에 구빈원, 구제원, 병원 등을 포함한 바실리아드를 건립했다.[25]
발렌스 황제는 바실리오스를 아리우스파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바실리오스는 재산 몰수, 매질, 귀양, 사형 등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26] 발렌스 황제는 바실리오스의 용기에 감탄하여 그를 찾아가 예수 공현 대축일 성찬예배에 참례하고, 자선 활동을 위해 별장지를 하사했다.[26] 황태자가 병에 걸리자 바실리오스의 기도로 치유되었고, 황제는 유배형을 파기했다.[26]
바실리오스는 아리우스주의의 확산을 우려하며 아타나시오 주교의 도움을 받아 정통 신앙을 옹호했다.[27]
2. 4. 죽음
바실리오스는 교리 논쟁을 둘러싼 교회 내 분란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간 질환을 앓았고 극단적인 금욕 생활은 그의 죽음을 재촉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바실리오스가 언제 선종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끼리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28]3. 신학 사상
바실리오스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아리우스파에 맞서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다.[23][27] 또한 수도 생활을 통해 금욕과 묵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동체 수도 생활을 장려하여 동방 교회의 수도 전통 발전에 기여했다.[13][14][15][17][18][19] 오리게네스의 저술을 모은 《오리게네스의 필로칼리아》를 공동 작업하기도 했다.[20][21]
3. 1. 삼위일체론
바실리오스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수년 동안 아리우스파 이단자들과 맞서 싸웠다. 당시 카파도키아 교회는 아리우스파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는 아리우스파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교회 상층부로 진입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23]바실리오스는 아리우스주의가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 교회의 일치가 깨질 것을 우려했다.[27] 과거 유사본질주의자들과 결별할 때 서방의 아타나시오 주교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아타나시오는 바실리오스에게 유사본질주의의 오류를 가르쳐 주어 그가 정통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였다. 바실리오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371년에 정통 기독교 신앙의 열성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아타나시오가 나서서 바실리오스를 변호해 주었다.
3. 2. 수도원 규칙
바실리오스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후, 357년에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을 여행하며 금욕과 수도 생활을 배웠다.[13][14] 그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리스의 네오카이사레아 인근에서 고독하게 지냈다.[13] 바실리오스는 금욕적인 생활과 묵상을 통해 마음속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15]혼자보다는 여럿이 모여 수도 생활을 하는 것에 더 끌렸던 바실리오스는 358년, 형제 베드로를 포함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안네시 인근의 바실리오스 가문 소유지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세웠다.[17] 바실리오스의 어머니 에멜리아와 누이 마크리나를 포함한 몇몇 여인들도 기도와 자선 활동에 헌신하기로 서원했다.[18]
이 시기에 바실리오스는 수도 공동체 생활에 관한 글을 썼으며, 이는 동방 교회의 수도 전통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9] 358년, 바실리오스는 안네시에서 오랜 친구인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를 다시 만났고, 그레고리오스도 바실리오스와 함께 수도 공동체 생활을 했다.[20]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는 함께 오리게네스의 글들을 모은 《오리게네스의 필로칼리아》를 공동으로 작업했다.[21]
4. 저술
바실리오스는 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의 주요 저술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대한 9편의 설교를 모아놓은 '헥사메론'과 성령의 신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령에 대하여' 등이 있다.
4. 1. 서간집
바실리오스의 서간집에는 그가 도적과 매춘부들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25] 또한 사제들이 부와 안락함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을 일깨우고, 사제 서품 후보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25] 바실리오스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할 공직자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용감하게 비판하기도 했다.[25] 그는 매일 아침과 저녁, 자신의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를 했는데, 많은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25]5. 영향
바실리오스는 당대와 후대에 걸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에 헌신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바실리오스는 발렌스 황제의 아리우스파 전향 강요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이러한 용기는 황제를 감탄시켜 예수 공현 대축일 성찬예배에 참례하게 하고, 카이사레아 인근 별장지를 하사받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황태자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통해 유배형을 파기시키고 교회에 대한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데에도 일조하였다.[26]
그는 아리우스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 우려하며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서방의 아타나시오 주교와의 교류를 통해 정통 신앙을 확립하고, 동방 교회에서 유사본질주의를 거부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를 주장하는 정통 교리를 옹호했다.
5. 1. 동방 교회
362년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 주교 주재로 바실리오스가 부제로 서품받았다. 365년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주교는 바실리오스를 자신의 교구로 불러들여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후 바실리오스는 개인적 영달이 아닌 교회의 필요에 의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13]바실리오스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수년 동안 아리우스파 이단자들과 싸웠다. 당시 카파도키아 교회는 아리우스파로 인해 내홍을 겪어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는 긴밀히 협력하여 아리우스파 신학자 및 수사학자들에게 신학 공개 토론을 제안하였다.[23] 발렌스 황제의 대리인들 주재 아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가 아리우스파의 오류를 논박하고 전통 신앙을 옹호함으로써 승리하였다. 이는 바실리오스와 그레고리오스가 장차 교회의 상층부로 진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23] 바실리오스는 카이사레아 교구의 행정직을 맡게 되었고, 에우세비오는 바실리오스의 빠른 승진과 명성에 시기심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리오스에게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돌아올 것을 설득하였고, 바실리오스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가 떠난 후 수년 동안 에우세비오는 교구의 유능한 관리자가 되었다.
370년 에우세비오 주교가 선종하자, 바실리오스가 뒤를 이어 370년 6월 14일 주교품에 올라 카이사레아의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24] 카이사레아 교구장직은 카이사레아 교구의 교회 지도자이자 폰토스의 총독이었으며, 휘하에 다섯 곳의 관하 교구가 있는 관구장이었다. 많은 사람은 에우세비오의 후임자 선거에서 바실리오스를 반대했는데, 이는 카이사레아 교구장직의 막강한 권력 때문이었다. 바실리오스는 혈기왕성하고 다소 고압적이면서도,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이듬해 흉년이 닥치자 그는 자비로 무료 급식소를 차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자기 집안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원조금으로 사용하였다.
바실리오스의 서간에는 그가 도적들과 매춘부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사제들이 부유함과 안락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정신을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사제 서품 후보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바실리오스는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공직자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했는데, 많은 군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는 카이사레아 외곽에 구빈원, 구제원, 병원 등이 포함된 바실리아드라는 큰 복합 건물을 지었다.[25]
바실리오스의 정통 신앙에 대한 열정은 그의 적대자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발렌스 황제는 바실리오스를 아리우스파로 끌어들이기 위해 총독 모데스투스를 시켜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는 모데스투스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모데스투스는 재산 몰수, 매질, 귀양, 사형 등의 위협을 가했지만, 바실리오스는 수도자로서 재산이 없고, 고행에 익숙하며, 천국이 고향이므로 귀양도 두렵지 않고, 사형은 오히려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원한다고 답했다. 총독은 발렌스 황제에게 “바실리오스의 신앙의 견고함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발렌스 황제는 바실리오스의 용기에 감탄하여 그를 탄압하지 않고, 직접 찾아가 예수 공현 대축일 성찬예배에 참례한 후, 자선 활동을 돕기 위해 카이사레아 인근의 별장지를 하사하였다. 아리우스파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황제에게 바실리오스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황제는 유배형 교서를 작성했지만, 서명할 때마다 펜이 부러지고 황태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발렌스는 이를 천벌이라 생각하고 바실리오스에게 황태자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다. 바실리오스가 기도하자 황태자의 병이 완치되었고, 황제는 뉘우치며 유배형을 파기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교회에 대한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데 일조하였다.[26]
바실리오스는 아리우스주의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성부와 성자가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는 급속도로 지지자를 확보했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에 널리 확산되었다. 바실리오스는 교회의 일치가 깨질 것을 우려하였다.[27] 바실리오스는 과거 유사본질주의자들과 결별할 때 서방의 아타나시오 주교로부터 도움을 받아 정통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바실리오스는 동방 교회의 기독교인으로서 유사본질주의를 거부하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몸을 이룬다는 정통 교리를 지지했음에도, 371년에 정통 기독교 신앙의 열성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아타나시오는 바실리오스를 변호해 주었다. 바실리오스는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시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5. 2. 서방 교회
바실리오스는 서방 교회의 아타나시오 주교로부터 유사본질주의의 오류를 가르침 받고 정통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371년에는 정통 기독교 신앙의 열성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아타나시오가 그를 변호해 주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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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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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St Basil the Great the Archbishop of Caesarea, in Cappado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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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tio 43.4, PG 36. 500B, tr. p.30, as presented in Rousseau (1994),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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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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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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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 Ep. 223, 2, as quoted in Quasten (1986),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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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Basil the Great
http://www.newad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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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1994),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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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sseau (1994), pp. 360–363, ''Appendix III: The Date of Basil's Death and of the Hexaem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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