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부인
1. 개요
장화부인은 소성왕의 딸이자 흥덕왕의 비로, 흥덕왕 원년(826년)에 사망했다. 흥덕왕은 장화부인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고, 장화부인과 합장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의 태자비 정교가 등장하는데, 권근 등은 정교와 장화부인이 동일인물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모순된다는 반론도 있으며, 헌덕왕의 태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흥덕왕의 비는 박씨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권근 등은 장화부인이 김씨였으나 신라의 동성혼 풍습 때문에 박씨로 칭해졌다고 주장했다.
-
826년 사망 -
헌덕왕
헌덕왕은 신라의 제42대 왕으로서,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여 당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며 김헌창의 난과 같은 국내 혼란을 겪다가 826년에 사망했다. -
826년 사망 -
당 경종
당 경종은 당나라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국정을 소홀히 하고 잦은 반란과 암살 시도에 시달리다 환관에게 살해되어 환관 정치의 폐해를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신라의 왕비 -
미실
미실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시대 인물로, 여러 왕과 관계를 맺으며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의 삶은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었으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신라의 왕비 -
만월부인
만월부인은 신라 경덕왕의 왕비이자 혜공왕의 어머니로, 아들이 없던 중 불국사 승려 표훈의 도움으로 혜공왕을 낳았으며 혜공왕 즉위 후 태후로서 섭정을 맡았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장화부인을 소성왕의 딸이라고 언급하였으며, 흥덕왕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흥덕왕 원년(826년) 겨울 12월에 사망하였다.
장화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흥덕왕은 후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권고를 두고 "새도 제 짝을 잃으면 슬퍼할 줄 아는데 사람이 되어 자기 짝을 잃고 어찌 무정하게 다시 재혼하겠느냐"라며 이를 거절했고, 시녀도 가까이 하지 않아 옆에 시중드는 이는 환관밖에 없었다고 한다.
흥덕왕은 사망한 후에 장화부인과 합장되었다.
3. 계보
3.1. 장화부인과 정교 동일인물설
《삼국사기》에는 헌덕왕 14년(822년) 정월에 왕의 동복동생인 수종(秀宗, 흥덕왕)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였고, 각간(角干) 충공(忠恭)의 딸 정교(貞嬌)를 맞아들여 태자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헌덕왕의 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정교가 장화부인과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조선 시대 권근은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정교가 혼인했다는 '헌덕왕의 태자'를 흥덕왕으로 비정하고 장화부인과 정교가 동일인물이라고 서술하였으며, 《동국통감》도 같은 입장이었다.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권근의 설을 따라 헌덕왕의 태자를 흥덕왕으로 비정하고 태자비 정교를 장화부인과 동일인물로 서술하였다.
수승, 즉 흥덕왕이 헌덕왕 14년(822년)에 부군(副君) 또는 저이(儲貳)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부군'이나 '저이'가 왕위 계승자인 '태자'를 표현하는 동의어라고 한다면, 헌덕왕이 '태자'로 삼은 것은 친동생인 수승, 즉 흥덕왕이 된다. 하지만 김충공의 딸이라고 언급된 정교를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과 동일인물이라고 한다면, 《삼국사기》에서 장화부인을 소성왕의 딸이라고 한 언급과는 모순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부군'을 발해에서 국왕(가독부)의 장남을 가리켜 부르던 '부왕'(副王)이라는 말이나, 당에서 헌덕왕 2년(810년)에 신라에 보낸 《여신라왕김중희서》(與新羅王金重熙書)에 언급된 '부왕'(副王)을 김언승으로 간주하는 견지에서 부군은 '태자' 그 자체라기보다는 태자를 보좌하는 역할이고 태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아 김수승은 부군일 뿐 태자가 아니며 정교와 혼인한 '헌덕왕의 태자'는 기록에서 빠진 제3의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흥덕왕릉비편》 판독에 따르면 흥덕왕은 신라 혜공왕(惠恭王) 13년(777년)생으로 《삼국사기》에서 부군(저이)가 되었다고 하는 헌덕왕 14년(822년)에는 46세였다.
근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해당 기사에 언급한 '헌덕왕의 태자'에 대해 기존의 학설대로 김수승(흥덕왕)이라고 비정하는 설 외에도 헌덕왕이 재취한 것이라는 설, 헌덕왕의 다른 태자설, 또는 김균정(金均貞)으로 비정하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3.2. 흥덕왕의 비 박씨
《구당서(舊唐書)》에는 흥덕왕 6년(831년)인 당 문종(唐文宗) 대화(大和) 5년에 당에서 김언승(헌덕왕)에 대한 조문과 함께 김경휘(흥덕왕)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녕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할 때 경휘의 어머니 박씨(朴氏)를 태비(太妃), 아내 박씨를 왕비(王妃)로 책봉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은 흥덕왕은 왕비가 죽은 뒤에 다시 왕비를 맞지 않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신라에서 동성(同姓)과 혼인한 것을 숨겨서 왕비의 성을 박씨로 알린 것이고 실제로는 김씨이며 장화부인이 맞다고 하였으며 안정복도 이에 동의하여 흥덕왕에게는 장화부인 외에 다른 정비(正妃)가 없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