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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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성천은 1913년 경상북도 예천군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0년 조선신학원 교수를 시작으로, 남대문교회와 서울가리봉장로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와 기독교교육협회 총무를 지냈으며, 1959년 서울신문사 회장, 자유당 중앙정치위원회 부원장, 공보실장을 거쳤다. 4.19 혁명 이후 목회 활동과 사회 활동에 헌신하며, 경기도지평교회 목사, 광주대단지 사건 중재, 한국방송협회 회장, 기독교방송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 사망했으며, 저서로 《낙동강 소금배》, 《전성천 회고록:십자가 그늘에서》 등이 있다.

전성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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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천 박사의 미국 예일대학교 재학 시절 사진
이름전성천
원어 이름全聖天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예천
국적대한민국
종교기독교
배우자김옥
학력
학사아오야마 가쿠인 대학교
석사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및 박사예일 대학교
경력
대학교수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
한국신학대학 (前 조선신학원) 교수
언론기독교방송 (CBS) 사장
서울신문사 회장
한국방송협회 회장
관료제3대 대한민국 공보실장(문공부 장관) 및 정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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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하은(霞隱) 전성천은 1913년 경상북도 예천군 상락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일본으로 유학, 1934년 아오야마가쿠인에 입학했다.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갔으며, 아오야마가쿠인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재미한인학생회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0년 조선신학원(한국신학대학의 전신)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1942년까지 사역했다. 1942년 남대문교회 목사,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서울가리봉장로교회 목사로 재직하며 조선신학원 교수로도 활동했다.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와 기독교교육협회 총무를 맡다가 1955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1년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및 대학원 대우교수와 강사로 있었다.

1959년 서울신문사 회장을 거쳐 자유당 중앙정치위원회 부원장, 한국아세아반공연합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1월 공보실장(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정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로 함께 일하게 되었으나, 경향신문 폐간을 막지 못하고 자유당 인사들과의 마찰로 1960년 4월 7일 사퇴했다. 같은 해 5월 자유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1년 5월 3.15 부정선거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고, 1962년 경향신문 폐간 관련 구속되었다가 2년 만에 출감했다. 민주공화당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1964년 공덕동교회 목사와 한신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경기도 지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1970년 10월까지 시무하였다.

1970년 미국 대학의 교수 초빙을 사양하고, 1970년 12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대단지(현 성남시)의 성남장로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71년 광주대단지 폭동 당시 시위대와 서울특별시 사이의 중재를 맡았고, '광주대단지 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양측 중재를 담당했다. 이후 판자촌 영세민 권익 보호를 위한 구호사업에 앞장섰다.

한국방송협회 회장, 1975년 기독교방송사 사장, 1976년 정신박약자보호회 회장, 1976년 기독교세진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장로교신학대학 강사, 1981년 장애자복지회 이사장을 지냈다. 1991년 진부령을 개척, 그해 8월 진부령교회를 열고 초대 목사가 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하은(霞隱) 전성천은 1913년 경상북도 예천군 상락에서 출생했다. 1929년 2월 일본으로 유학, 1934년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大學)에 입학했다.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고학으로 학업을 시작하여 아오야마(靑山) 대학 신학부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석사, 예일 대학교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때 그는 재미한인학생회 총회장을 맡기도 했다.

1940년 조선신학원(한국신학대학의 전신) 교수가 되고, 그해 남대문교회 심방 담당 전도사가 되어 1942년까지 시무했다. 1942년 남대문교회 목사,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서울가리봉장로교회 목사로 재직하며 동시에 조선신학원 교수로 출강했다. 1947년 8월 14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그해 8월 28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 다녔다. 이후, 서울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와 기독교교육협회 총무를 맡다가 1955년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고 그 해부터 1년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과 문리과대학원 대우교수와 강사로 출강하였다.

2.2. 정치 활동과 4.19 혁명

1959년 서울신문사 회장을 거쳐 자유당 중앙정치위원회 부원장, 한국아세아반공연합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1월 13일 제3대 공보실장(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정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공보실장 재직 중 경향신문 폐간을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자유당 인사들과의 마찰 끝에 1960년 4월 7일 사퇴했다. 그해 5월 자유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민관식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2.3. 4.19 혁명 이후 목회 및 사회 활동

1961년 5월 3.15 부정선거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제소당했다. 1962년 경향신문 폐간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2년 만에 출감했으며, 민주공화당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64년 공덕동교회 목사와 한신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그해 10월 경기도 지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1970년 10월까지 시무하였다.

1970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받았지만 사양하고, 1970년 12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대단지(현 성남시)의 성남장로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71년 광주대단지 폭동 당시 시위대와 서울특별시 사이의 중재를 담당하다가 시위대의 대표자로 추대되어 '광주대단지 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양측의 중재를 담당했다. 이후 판자촌 영세민의 권익을 위한 구호사업에 앞장섰다.

그 뒤 한국방송협회 회장, 1975년 기독교방송사 사장, 1976년 정신박약자보호회 회장, 1976년 기독교세진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장로교신학대학에 강사로 출강하였고, 1981년 장애자복지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1년 진부령을 개척하여 그해 8월 15일 진부령교회를 열고 초대 목사가 되었다.

3. 사후

시신은 성남교회에서 장례를 마친 뒤 경기도 용인시 기흥면의 선산에 안장되었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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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
아버지전옥영
어머니김남이
배우자김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동양화가)
아들전영일 (미국 뉴욕갤러리 사장)
아들전영민 (미국 아름다운교회 장로)
전영희
사위원의종 (주식회사 선리 부회장)
전영란
사위남종원 (전 매경 부국장)
전영주
사위이준수 (SKC 상무)
전영백 (홍익대 교수)
조카전광우 (금융위원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역임)
다섯째 동생전상근 (1927년 10월 18일 - ), 과학기술처 종합상황실장, 삼전복지재단 이사장 역임

5. 저서

* 《낙동강 소금배》 (현대문학사, 1976(초판)/1986(8판))
* 《전성천 회고록: 십자가 그늘에서》 (동영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