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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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은행 사건은 1948년 1월 26일 일본 제국은행 시이나마치 지점에서 발생한 대규모 독살 사건이다. 후생성 기술관을 사칭한 남성이 은행 직원과 가족 16명에게 청산가리로 추정되는 독극물을 마시게 하여 12명이 사망하고 현금과 수표를 강탈했다. 수사 과정에서 범인이 구 일본군 731부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템페라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히라사와는 고문과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요구했으나 1987년 옥사했다. 사건의 진범과 GHQ의 개입 의혹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잔혹 행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재조명되었다.

제국은행 사건
사건 개요
명칭제국은행 사건
영어 명칭Teigin Incident
사건 정보
발생 장소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
위도알 수 없음
경도알 수 없음
발생 날짜1948년 (쇼와) 23년 1월 26일
사건 유형독극물 살인 사건
피해 정보
사망자12명
부상자알 수 없음
실종자알 수 없음
피해자알 수 없음
피해 규모알 수 없음
용의자 정보
범인히라사와 사다미치로 추정
혐의알 수 없음
동기알 수 없음
연루알 수 없음
사건 대응
방어알 수 없음
대처알 수 없음
사과알 수 없음
배상알 수 없음
추가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사건 발생 직후 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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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일본 - 후쿠이 지진

2. 사건 발생

1948년 1월 26일 오후 3시경, 은행이 문을 닫은 직후 도쿄도 방역반 완장을 찬 중년 남성이 후생성 직원 명찰을 제시하며 제국은행 시이나마치 지점에 나타났다. 그는 "근처 가택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했고, GHQ가 은행을 소독하기 전에 예방약을 마셔야 한다"고 은행원과 용무원 가족 16명(8세 ~ 49세)을 속였다.

범인은 치밀한 수법을 사용했다. 희생자 전원이 충분히 마실 수 있도록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약물을 사용했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또한 "치아의 에나멜질이 손상되지 않도록 혀를 내밀어 마셔달라"는 등 구체적인 복용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16명 전원이 첫 번째 약을 마시자 위스키를 마셨을 때처럼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1분 후, 범인이 두 번째 약을 건네자 씁쓸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급히 약을 마셨다.

은행원 중 한 명이 "입을 헹구고 싶다"고 요청하자 범인은 이를 허락했다. 희생자들이 부엌 싱크대에서 입을 헹구려 할 때, 여성 한 명이 실신을 반복하면서 범행이 발각되었다. 이들은 청산가리를 복용한 것으로, 그 결과 1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병원으로 옮겨진 1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범인은 현금 16만 과 야스다 은행 이타바시 지점의 수표 1만 7450엔어치를 훔쳐 도주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하여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고, 혼란스러운 현장 상황으로 인해 경찰의 초동 수사가 지연되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훔친 수표는 사건 다음 날부터 현금으로 환전되었지만, 관계자가 수표 도난을 확인한 것은 사건 발생 이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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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16명 중 1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했다. 사망자 중에는 사무원 가족 4명(부부, 딸, 아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개월 된 태아도 있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은 35세 2인 가족 기준 세후 5200엔, 여성 사무원은 평균 2000엔이었다. 범인이 훔쳐간 18만 엔이 넘는 금액은 신엔 전환이 이루어진 전후 혼란기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0배 정도 되는 거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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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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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이름성별나이비고
시이나마치 지점 내 사망 | W43세
N39세
S29세
A23세
U19세
K16세
T자와49세
T자와49세
T자와19세
T자와8세
병원 이송 후 사망 | S22세
T자와47세
병원 이송 후 생존 | Y43세
A19세
T20세
M22세

2.1. 유사 사건

* 1947년 10월 14일,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서 "후생기관 의학박사 마츠이 시게루, 후생성 예방국"이라는 명함을 제시한 남자가 "이질 감염 환자가 오전에 예금하러 왔으므로, 은행 직원들과 돈을 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점장은 그를 기다리게 하고 순경을 불러 문의했고, 그 사이 남자는 제국은행 사건과 같은 수법으로 직원들에게 약을 먹였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으며, 명함은 진짜였지만 마츠이 박사는 알리바이가 있어 범인이 아니었다.
* 1948년 1월 19일, 미쓰비시 은행 나카이 지점에서 "후생성 기관 의학박사 야마구치 지로, 도쿄도 방역과"라는 명함을 제시한 남자가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 사건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은행원들에게 약을 먹이고 돈을 소독하려 했으나, 미심쩍게 생각한 지점장이 현금 수송은 없었다고 하자 남자는 소액환에 소독약이라는 액체를 뿌리고 나갔다. 명함은 가짜였다.

3. 초동 수사

사건 발생 후, 경찰은 지점장의 기억, 유사 사건들의 증거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몽타주, 사건 다음 날 현금으로 바뀐 수표를 단서로 수사를 진행했다. 일본 경시청은 용의자를 다음과 같이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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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세 사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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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건의 공통점


731부대 단지 전경.
731부대 단지 전경.


시체에서 청산 화합물이 검출되자, 경찰은 그 취급법을 알고 있는 구 일본군 세균부대(731부대) 관계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육군 제9연구소(노보리토 연구소) 소속 반 시게오(伴繁雄)에게서 유력한 정보를 얻어,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6월 25일 수사 방향을 군 관계자 일부, 육군의 특수임무 관계자로 좁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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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군 관계자라는 근거


범행에 사용된 독극물은 단순한 청산가리가 아니라, 노보리토 연구소에서 개발했던 아세톤 시안하이드린(니트릴)과 비슷했다. 경시청은 만주에서 각종 전쟁용 세균을 연구한 이시이 시로731부대 전역자 중에 범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수사 요강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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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요강


한편, 명함반은 유사 사건에서 악용되었던 마츠이 시게루의 명함을 중심으로 수사했다. 명함을 건넨 날짜, 장소, 상대가 기록되어 있었고, 100장의 명함 중 62장을 회수, 22장은 분실되어 사건과 관계없음을 확인했다. 행방불명된 8장 중 1장이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돌연 일본 미 군정이 육군 관계자에 대한 수사 중단을 명령했다.

4. 히라사와 사다미치 체포와 재판

8월 21일, 마쓰이 시게루와 명함을 교환한 사람 중 한 명인 템페라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체포되었다.

히라사와를 체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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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내용
명함‘마쓰이 시게루의 명함’을 받은 사람 중, 히라사와는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히라사와는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도난계를 내보내고 있었다).
알리바이히라사와는 “사건 발생 시각에 현장 부근을 걷고 있었다” 고 진술했지만, 그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전과과거 수표 사기를 한 전과가 있었다.
돈의 출처사건 직후에 피해 총액과 거의 같은 금액의 돈을 예금했고, 그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경찰은 히라사와와 피해자들을 대질했지만, 히라사와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체포될 때부터 히라사와는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지만, 이후 자백과 부인을 반복했다. 1950년 7월 2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1심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51년 9월 29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1955년 4월 7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5월 7일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등 지원자들이 히라사와의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원자들은 히라사와의 진술이 고문에 가까운 취조와 광견병 예방 접종의 부작용에 의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후유증인 정신질환(허언증)에 의한 것이기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1954년(쇼와 29년), 이바라키현에서 보건소 직원으로 속여 사람들에게 청산을 먹인 대량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수법이 제국은행 사건과 매우 유사하여 히라사와의 변호인이 조사를 위해 현지에 잠입했지만, 체포된 용의자가 음독자살하여 소득이 없었다.

히라사와는 1962년(쇼와 37년) 미야기 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타임》지는 환경이 좋지 않은 토호쿠로 히라사와를 보내 자연사시키려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1968년(쇼와 43년) 재심특례법안이 제출되었고, 1969년(쇼와 44년) 법무대신이 사형수 7명에게 개별 특사를 검토했을 때 히라사와도 대상이었지만, 특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대 법무대신들이 히라사와의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가운데, 1987년(쇼와 62년) 5월 10일, 히라사와는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9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히라사와 옥사 직후, 수사본부에 협력했던 반 시게오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범인은 히라사와가 아닌, 전 일제 육군 관계자라고 강조했다. 수사에 참가했던 나루치 히데오는 수기에서 “제국은행 사건은, 히라사와처럼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인물은 불가능하며, 진범은 원래 비밀 부대에 있던 인물이다”라고 썼다.

히라사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이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헤이세이 20년) 현재, 도쿄 고등법원에 19번째 재심 청구가 신청 중이다.

경찰이 작성한 범인의 몽타주.
경찰이 작성한 범인의 몽타주.

제국은행 사건 1심(도쿄지방재판소) 제1회 공판에서의 히라사와.
제국은행 사건 1심(도쿄지방재판소) 제1회 공판에서의 히라사와.

4.1. 자백을 둘러싼 논란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체포 당시부터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했지만, 1948년 9월 23일부터 자백을 시작하여 10월 12일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12월 20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자백을 번복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1950년 7월 24일, 도쿄 지방재판소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고, 1951년 9월 29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 1955년 4월 7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여 5월 7일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히라사와의 자백은 여러 차례 번복되었다. 8월 21일 체포된 후, 경시청 송치 전 조사에서 한 번 자백했으나("환상의 자백"), 송치 후 검사 조사에서는 처음에는 부인, 이후 자백, 다시 부인하는 등 번복했다.

* 환상의 자백: 8월 23일 밤, 도쿄 도착 직후 히라사와는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담당 형사 이키이 고고로는 자백 조서를 작성하지 않아, 이 자백은 "환상의 자백"이 되었다.
* 송치 후 부인: 검사 다카기 하지메의 조사에서 히라사와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다.
* 자백의 시작: 1948년 9월 23일부터 히라사와는 자백을 시작했다. 10월 8일과 9일, 검사 이데이 요시오가 조서를 작성했다.
* 재차 부인: 재판 시작 직전, 히라사와는 자백을 철회하고 다시 부인했다. 그는 "최면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히라사와의 변호인단은 다카기 하지메의 조사가 고문에 가까웠고, 히라사와의 자백은 강요 또는 유도된 것이므로 증거 능력이 없으며, 이데이 요시오의 검면 조서는 날조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히라사와는 1948년 8월 25일 유치장 안에서 유리 펜으로 왼쪽 손목 정맥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히라사와는 UPI 통신사의 어네스트 호브렉트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자신을 예의 바르게 대했고, 자백을 위한 고문은 없었으며, 자신을 조사한 검사 다카기 하지메를 "최고 수준의 신사(하이스트 클래스 제트먼)"라고 칭찬했다. 또한, 정신 감정서에는 히라사와의 정신 상태가 자백 후 평온해지고 숙면을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라사와의 변호인 야마다 요시오는 히라사와가 고스게 구치소 이관 후 "밤이 되면 부처님이 매일 와서 노래를 하고 놉니다. 저는 이제 현신이 아니라 불신입니다."라고 말하는 등, 그가 미쳤다고 직감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히라사와는 옥사할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5. 사형 판결 이후

마쓰모토 세이초, 고미야마 유시로 등 지원자들이 히라사와 사다미치의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히라사와의 지원자들은 히라사와의 진술이 고문에 가까운 취조와 광견병 예방 접종의 부작용에 의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의 후유증인 허언증에 의한 것이기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무라 도쿠조 박사의 감정에 따르면, 사형 판결의 결정적 수단이 된 자백 조서 3통은 조사에 관여하지 않은 이데 요시오 검사가 백지에 히라사와의 지문을 찍게 한 것이었다.

1962년 미야기 형무소로 이감된 히라사와를 두고 《타임》지는 환경이 좋지 않은 토호쿠로 보내 그를 자연사시키려는 것이 아니냐고 힐문했다. 1968년 재심특례법안이 제출되었고 1969년 폐안되었는데, 법무대신이 사형수 7명에게 개별 특사를 검토했을 때 히라사와도 그 대상이었지만, 결국 특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대 법무대신들이 모두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가운데, 1987년 5월 10일, 히라사와는 폐렴으로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향년 95세였다. 히라사와 옥사 직후인 5월 25일, 수사본부에 협력해 왔던 반 시게오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범인은 히라사와가 아닌, 전 일제 육군 관계자라고 강조했다. 수사에 참가했던 나루치 히데오는 후에 수기에서 “제국은행 사건은, 히라사와처럼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인물은 불가능하며, 진범은 원래 비밀 부대에 있던 인물이다”라고 썼으며, “731부대원 중 50여 명을 조사한 결과, 경력·알리바이·인상이 일치하는 것은 ㅅ모 중령(사건 당시 51세, 사건 이듬해 병사)밖에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731부대에서 ‘ㅅ 중령’과 성과 이름이 모두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성씨에 이름은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 두 명 있었다는 증언이 있어, 나루치가 두 사람 이상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라사와가 죽은 뒤에도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도쿄 고등법원에 19번째 재심 청구가 신청 중이다.

6. 독극물에 대한 의문점

시체 해부와 토사물, 그릇에 남은 액체 성분을 도쿄 대학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분석했지만, 액체의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청산 화합물이라는 사실만 밝혀졌다. 도쿄 대학의 후루하타 다네모토와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나카다테 규헤이( 中舘久平일본어)의 감정이 서로 엇갈려 100% 정확한 감정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 기자는 육군 제9연구소에서 아세톤 시안히드린(청산나이트릴)이라는 약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석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보통의 청산가리와 달리, 청산나이트릴은 마시고 1, 2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지효성이 있다. 그러나 시체 해부 결과 청산화물이라는 것까지만 밝혀진 상황에서, 경찰 수사가 731부대에서 크게 멀어지자 보도와 취재도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731부대에 대한 취재도 정지되었다.

후루하타 다네모토는 제국은행 사건의 범인이 사용한 것은 "오래되어 풍화된 청산칼륨"이었다고 추정했다. 피해자는 구토하는 등 순수한 청산칼륨 중독과는 다른 증상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청산칼륨의 일부가 공기와 반응하여 탄산칼륨이 되었기 때문이다.

7. 진범 논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범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러 가지 주장과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수사 과정에서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개입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주요 진범 관련 주장:

* 구 일본군 관계자 설: 범인은 독극물 사용에 능숙한 전문가이며, 구 일본군, 특히 731부대나 육군 제9연구소(노보리토 연구소) 관련자라는 주장이다.
* 범인이 사용한 독극물이 일반적인 청산가리가 아니라, 지효성(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을 가진 아세톤 시안하이드린(일명 니트릴)과 유사하다는 점.
* 범인이 사용한 피펫이 세균 연구소나 군에서 사용되던 고마고메 형 피펫이라는 점.
* 범인이 약물 투여 시 매우 침착했다는 점.
* 수사 과정에서 731부대 관계자 ㅅ모 중령(사건 이듬해 병사)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동일 인물이 없다는 증언이 있다는 점.
* GHQ 개입설: GHQ가 731부대의 정보와 인력을 독점하기 위해 수사에 개입하여, 731부대 관련 수사를 중단시키고 히라사와에게 혐의를 씌웠다는 주장이다.
* 1948년 3월, 미 군정이 731부대 관련 수사와 보도를 금지했다는 사실이 1985년 요미우리 신문 보도로 밝혀졌다.
* 히라사와의 셋째 딸의 남자친구였던 연합군 군인 엘리 하사가 히라사와의 알리바이를 증언할 수 있었으나, 법원이 증인 신청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점.
* 기타 주장:
* 히라사와가 종범이거나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설.
* 히라사와가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범행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
* 1954년 발생한 유사 사건(도쿠주쿠 마을 일가 9명 독살 방화 사건)의 용의자가 자살하면서 진상 규명이 어려워졌다는 점.

GHQ 개입에 대한 반론:

* GHQ는 일본 경찰의 수사에 협력했지만, 압력이나 개입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 수사본부는 히라사와 체포 후에도 구 육군 특무기관 계통 수사를 계속했다는 증언이 있다.
* 히라사와 체포 당시에도 수사본부는 구군 관계자 범인설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처럼 진범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옥사했지만, 그의 양자와 지원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청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