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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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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하이드, 제1대 클래런던 백작은 1609년 윌트셔주 딘턴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가, 역사가, 법률가이다. 그는 1640년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에서 서민원 의원을 지냈으며, 청교도 혁명 시기에는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과 추밀원 의원을 역임했다. 1645년 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했으며, 왕정 복고 후 잉글랜드 수석 장관, 클래런던 백작,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앤 하이드와의 결혼으로 왕실과 가까워졌으나, 외교 정책 실패와 흑사병, 런던 대화재 등으로 몰락하여 프랑스로 망명, 1674년 루앙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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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터 릴리 경이 그린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초상화
피터 릴리가 그린 에드워드 하이드 경의 초상화
본명에드워드 하이드
출생1609년 2월 18일
출생지잉글랜드, 윌트셔주, 디톤 (윌트셔)
사망1674년 12월 9일
사망지프랑스, 루앙
안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국적잉글랜드
직업정치가
변호사
외교관
역사가
정치 경력
재무부 제1대신임기 시작: 1660년 6월 19일
임기 종료: 1660년 9월 8일
군주: 찰스 2세
이전: 코팅턴 남작 프랜시스 코팅턴 (재무장관)
다음: 사우샘프턴 백작 토머스 리오슬리
대법관임기 시작: 1660년
임기 종료: 1667년
이전: 공석 (마지막: 에드워드 허버트 경)
다음: 올랜도 브리지먼 경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임기 시작: 1660년
임기 종료: 1667년
의회 의원
선거구솔타시
의회장기 의회
임기 시작1640년 11월
임기 종료1642년 8월 (자격 박탈)
선거구우튼 바셋
의회단기 의회
임기 시작1640년 4월
임기 종료1640년 5월
개인 정보
배우자
자녀헨리 하이드, 제2대 클래런던 백작
로렌스 하이드, 제1대 로체스터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
제임스 하이드
앤, 요크 공작 부인
프랜시스 하이드
부모헨리 하이드
메리 랭퍼드
친척메리 2세 (손녀)
앤, 영국 여왕 (손녀)
모교옥스퍼드 대학교 하트퍼드 칼리지
기타 정보
서명
작위
작위초대 클래런던 백작
참고

2. 생애

에드워드 하이드는 1609년 2월 18일 윌트셔주 딘턴에서 헨리 하이드와 메리 랭퍼드 부부의 아홉 자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8][19] 그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변호사였는데, 니콜라스 하이드는 대법원장을, 로렌스는 제임스 1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앤의 법무 고문을 역임했다.[19] 하이드는 길링엄 학교를 거쳐 1622년 옥스퍼드 대학교 허트퍼드 칼리지에 입학하여 1626년에 졸업했다.[19] 원래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가 되려 했으나, 형들의 사망으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면서 미들 템플에서 법학을 공부, 1633년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9]

1626년 에드워드 하이드의 초상화 ( 코르넬리스 얀센스 반 시울렌 작)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1629년에 결혼 후 6개월 만에 천연두로 사망한 앤 아일립이고, 두 번째 부인은 1634년에 결혼한 프랜시스 에일스버리이다. 프랜시스는 소액 채권 법원 주임이자 조폐국 장관이었던 토머스 에일즈버리의 딸이었다. 1634년 아버지 헨리 하이드가 사망하면서 하이드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아버지는 유언을 통해 "국가의 법률과 자유를 자신의 이익이나 군주의 뜻을 위해 희생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유아기를 넘긴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헨리(1638–1709), 로렌스(1642–1711), 에드워드(1645–1665), 제임스(1650–1681), 앤 하이드(1637–1671), 그리고 토머스 케이트리와 결혼한 프랜시스였다. 앤은 두 명의 여왕을 낳아 가장 기억에 남지만, 헨리와 로렌스 모두 중요한 정치 경력을 쌓았으며, 특히 로렌스는 "매우 유능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에드워드 하이드는 법률가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벤 존슨, 존 셀던, 에드먼드 월러, 존 헤일스, 팔클랜드 경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식과 소양을 쌓았다.[3] 특히 팔클랜드 경의 시골집인 그레이트 테우에 모인 지식인 집단 그레이트 테우 서클의 저명한 구성원이었다.[4]

1633년 11월 22일 변호사가 된 하이드는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삼촌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두 번의 결혼으로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얻었으며, 1634년 12월에는 대법원 문서 및 기록 보관관으로 임명되었다. 런던 상인들의 탄원을 성공적으로 처리하여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인정을 받았고, 로드와 우정을 쌓았다. 하이드는 로드의 청렴함과 품위를 존경했지만, 그의 비열함과 심술궂은 성격은 미천한 출신 때문이라고 보았다.

|200px|thumb|제2대 폴클랜드 자작루셔스 캐리 (존 호스킨스 그림)]]

장인(아내의 아버지)의 연줄로 국왕 찰스 1세의 측근인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신임을 얻어 법률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민사소송 재판소 문서 보관 계에도 임명되었다. 폴클랜드 자작 루셔스 캐리의 저택에서 열린 존 셀던 등 진보파 지식인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법률, 철학, 종교 등을 토론하며 진보적 논객으로 성장했다.

1629년부터 찰스 1세는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추밀원령에 의존한 정치를 펼치며 국민의 민의를 무시했다. 하이드는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고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국왕 권한의 확대를 반대했다.

1640년 4월 13일 소집된 단기 의회에서 하이드는 에서 선출되어 서민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법의 지배, 국왕과 의회의 권력 균형,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기반한 강력한 잉글랜드 국교회 확립을 요구했다. 의회는 3주 만에 해산되었지만, 하이드는 로드에게 의회 속행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40년 8월 스코틀랜드 군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찰스 1세는 리폰 조약을 체결하고 배상금 지불을 위해 장기 의회를 소집했다. 하이드는 에서 서민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8] 국왕과 측근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하이드는 전제 정치를 비판하며 여러 위원회에 소속되어 압정을 조사했다.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6]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고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하며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7]

1640년 4월, 하이드는 단기 의회에서 샤프츠베리와 우턴 배싯 두 곳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우턴 배싯을 선택하여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장기 의회에서는 솔트애시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찰스 1세를 온건하게 비판했으나, 의회의 개혁 법안을 수용하면서 국왕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국왕의 조언자 임명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에 반대하며 왕의 대권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왕당파로 기울면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옹호하고, 스트래퍼드 백작의 처형에 반대했다. 1641년 대항의서 이후 국왕의 비공식 고문이 되었으며, 1642년 5월 런던을 떠나 요크에서 국왕과 재회했다. 1643년 2월 기사 작위를 받고 추밀원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달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6]

윌리엄 돕슨이 그린 에드워드 하이드, 클래런던 백작, 1643년경


과거 국왕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용서하기 어려워했고, 많은 개인적인 우정을 끊었다. 존 핌을 제외한 모든 의회 지도자들을 혐오했으며, 올리버 크롬웰을 "용감하지만 나쁜 남자", 존 햄든을 위선자라고 묘사했다. 1643년 9월 뉴버리 1차 전투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폴클랜드 자작 루셔스 캐리의 죽음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644년, 왕당파가 통제하는 서부 지방은 웨일스 공 찰스 2세 아래 별도의 정부로 창설되었고, 하이드는 그의 일반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그는 군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당파가 패배한 후, 1646년 저지 섬으로 도망쳤다.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에 대한 반대로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16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그는 찰스 1세를 훌륭한 이해력을 가졌지만, 자신감이 부족하여 종종 더 나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는 인물로 묘사했다.

1641년 2월에는 국왕 측근 스트래퍼드 백작에 대한 탄핵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이드도 "스트래퍼드를 고발하는 문서 작성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하이드에게 스트래퍼드 백작은 북부 평의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그 지역을 "전제적 권력의 바다에 침몰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용서 없이 추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때부터 하이드는 급진적 진보파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스트래퍼드 백작 탄핵이 진행되는 동안,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이 웨스트민스터로 몰려와 스트래퍼드 백작 처형을 요구하는 시위 행동을 일으키고, 처형에 동의를 망설이는 국왕과 귀족원 의원을 매도했는데, 하이드는 그것을 보고 혐오했다. 의회는 5월 12일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함과 동시에 1640년부터 1641년에 걸쳐 의회 권한을 회복·강화하는 법안을 잇따라 가결시켰다.

찰스 1세를 그린 초상화(안토니 반 다이크 작)


1642년 6월에 의회는 요크에 있는 국왕에게 19개 조항 제안을 보내, 국왕의 고관·재판관 임명권, 군 통수권, 교회 개혁권을 의회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하이드와 폴클랜드 자작 루셔스 캐리에게 반론문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이 반론문을 선전포고로 본 의회는 7월 초에 제3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를 지휘관으로 하는 의회군을 조직했고, 이에 맞서 국왕도 8월에 노팅엄에 국왕군 집결을 명령했다. 이렇게 내란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1643년 2월에는 재무장관과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었다. 하이드 등 입헌 국왕파는 내란 발발 후에도 "의회에 규제된 왕정"의 존속을 기치로 내걸고 의회와의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1644년 1월에 소집된 옥스퍼드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와의 평화를 추구했지만, 성과 없이 끝났다. 하이드가 마지막으로 평화 교섭에 참여한 것은 164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억스브리지에서의 회담이었지만, 이때는 의회파가 완전히 항전파에 장악되어 평화파는 더 이상 의회 내에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하이드는 ''반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지만, 1651년 제3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후, 찰스 2세의 고문으로 복귀했고, 1658년 1월 13일 재상으로 임명되었다.[7]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지냈다.[6] 청교도 혁명으로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했다.[5]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하며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7]

1644년, 왕당파가 통제하는 서부 지방은 웨일스 공 아래 별도의 정부로 창설되었고, 하이드는 그의 일반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국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이드는 조지 고링, 고링 경을 비롯한 그의 군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당파가 패배한 후, 하이드는 1646년 저지 섬으로 도망쳤다.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에 반대하여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16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1649년부터 1653년경에 그려진 하이드의 초상화(야코프 판 레스브로에크)


|200px|thumb|1653년경의 찰스 2세를 그린 그림 (필리프 드 샹파뉴 화)]]

최악의 사태를 각오한 찰스 1세는 1645년 3월, 하이드에게 황태자 찰스(후일의 찰스 2세)를 맡기고, 옥스퍼드를 떠나 대륙으로 망명할 것을 명했다. 이후 하이드는 15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했다. 황태자는 파리에 망명 궁정을 세웠지만, 하이드는 3년 동안 저지 섬에서 역사서(『잉글랜드 반란과 내전의 역사/The History of the Rebellion and Civil Wars in England영어』) 집필에 전념했다. 1648년 6월, 찰스 황태자가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했을 때, 하이드는 이를 보좌하기 위해 저지 섬을 떠났지만, 항해 중 해적에게 습격당해 황태자 곁에 합류하지 못했고, 황태자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하이드는 망명 궁정에서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수년을 보냈다. 1651년 11월, 찰스가 스코틀랜드에서 패배하고 파리로 돌아온 후, 하이드를 측근으로 삼았다. 1654년 '국왕 비서실장', 1658년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국왕 측근이 된 하이드는 망명 궁정이 잉글랜드 국민의 심정에서 벗어난 독선적인 존재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2. 1. 초기 생애

에드워드 하이드는 1609년 2월 18일 윌트셔주 딘턴에서 헨리 하이드 (1563–1634)와 메리 랭퍼드 (1578–1661)의 아홉 자녀 중 여섯째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8][19] 그의 형제자매로는 앤 (1597–?), 엘리자베스 (1599–?), 로렌스 (1600–?), 헨리 (1601–1627), 메리 (1603–?), 시블 (1605–?), 수잔 (1607–1656)과 니콜라스 (1610–1611)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변호사였다. 헨리는 결혼 후 은퇴했지만, 니콜라스 하이드는 대법원장이 되었고, 로렌스는 제임스 1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앤의 법무 고문이었다.[19] 길링엄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하이드는 1622년 당시 매그달렌 홀로 알려진 옥스퍼드 대학교 허트퍼드 칼리지에 입학하여 1626년에 졸업했다.[19] 그는 원래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경력을 쌓을 예정이었지만, 그의 형들이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고, 대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들 템플에 입학했다.[19] 1633년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1629년에 앤 아일립과 결혼했지만 6개월 후 천연두로 사망했고, 두 번째는 1634년에 프랜시스 에일스버리와 결혼했다. 1634년 7월에 소액 채권 법원 주임, 조폐국 장관 토머스 에일즈버리의 딸 프란세스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아버지 헨리가 사망하여 하이드 가문을 상속받았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국가의 법률과 자유를 자신의 이익이나 군주의 뜻을 위해 희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유아기를 넘긴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헨리 (1638–1709), 로렌스 (1642–1711), 에드워드 (1645–1665), 제임스 (1650–1681), (1637–1671), 그리고 토머스 케이트리와 결혼한 프랜시스가 있었다. 두 명의 여왕의 어머니인 앤이 가장 기억에 남지만, 헨리와 로렌스 모두 중요한 정치 경력을 쌓았으며, 로렌스는 "매우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2. 2. 청교도 혁명 이전의 경력

에드워드 하이드는 법률가로서 경력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벤 존슨, 존 셀던, 에드먼드 월러, 존 헤일스, 팔클랜드 경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의 우정과 교류를 통해 지식과 소양을 쌓았다.[3] 특히 팔클랜드 경의 시골집인 그레이트 테우에 모인 지식인 집단 그레이트 테우 서클의 저명한 구성원이었다.[4]

1633년 11월 22일 변호사가 된 하이드는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삼촌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두 번의 결혼으로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얻었으며, 1634년 12월에는 대법원 문서 및 기록 보관관으로 임명되었다. 런던 상인들의 탄원을 성공적으로 처리하여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인정을 받았고, 로드와 우정을 쌓았다. 하이드는 로드의 청렴함과 품위를 존경했지만, 그의 비열함과 심술궂은 성격은 미천한 출신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200px|thumb|제2대 폴클랜드 자작루셔스 캐리 (존 호스킨스 그림)]]

장인(아내의 아버지)의 연줄로 국왕 찰스 1세의 측근인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신임을 얻어 법률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민사소송 재판소 문서 보관 계에도 임명되었다. 폴클랜드 자작 루셔스 캐리의 저택에서 열린 존 셀던 등 진보파 지식인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법률, 철학, 종교 등을 토론하며 진보적 논객으로 성장했다.

1629년부터 찰스 1세는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추밀원령에 의존한 정치를 펼치며 국민의 민의를 무시했다. 하이드는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고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국왕 권한의 확대를 반대했다.

1640년 4월 13일 소집된 단기 의회에서 하이드는 에서 선출되어 서민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법의 지배, 국왕과 의회의 권력 균형,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기반한 강력한 잉글랜드 국교회 확립을 요구했다. 의회는 3주 만에 해산되었지만, 하이드는 로드에게 의회 속행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40년 8월 스코틀랜드 군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찰스 1세는 리폰 조약을 체결하고 배상금 지불을 위해 장기 의회를 소집했다. 하이드는 에서 서민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8] 국왕과 측근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하이드는 전제 정치를 비판하며 여러 위원회에 소속되어 압정을 조사했다.

2. 3. 청교도 혁명 시기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6]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고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하며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7]

1640년 4월, 하이드는 단기 의회에서 샤프츠베리와 우턴 배싯 두 곳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우턴 배싯을 선택하여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장기 의회에서는 솔트애시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찰스 1세를 온건하게 비판했으나, 의회의 개혁 법안을 수용하면서 국왕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국왕의 조언자 임명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에 반대하며 왕의 대권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왕당파로 기울면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옹호하고, 스트래퍼드 백작의 처형에 반대했다. 1641년 대항의서 이후 국왕의 비공식 고문이 되었으며, 1642년 5월 런던을 떠나 요크에서 국왕과 재회했다. 1643년 2월 기사 작위를 받고 추밀원에 임명되었으며, 다음 달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6]

과거 국왕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용서하기 어려워했고, 많은 개인적인 우정을 끊었다. 존 핌을 제외한 모든 의회 지도자들을 혐오했으며, 올리버 크롬웰을 "용감하지만 나쁜 남자", 존 햄든을 위선자라고 묘사했다. 1643년 9월 뉴버리 1차 전투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폴클랜드 경의 죽음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644년, 왕당파가 통제하는 서부 지방은 웨일스 공 찰스 2세 아래 별도의 정부로 창설되었고, 하이드는 그의 일반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그는 군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당파가 패배한 후, 1646년 저지 섬으로 도망쳤다.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에 대한 반대로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16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그는 찰스 1세를 훌륭한 이해력을 가졌지만, 자신감이 부족하여 종종 더 나쁜 방향으로 의견을 바꾸는 인물로 묘사했다.

1641년 2월에는 국왕 측근 스트래퍼드 백작에 대한 탄핵 재판이 시작되었다. 하이드도 "스트래퍼드를 고발하는 문서 작성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하이드에게 스트래퍼드 백작은 북부 평의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그 지역을 "전제적 권력의 바다에 침몰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용서 없이 추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때부터 하이드는 급진적 진보파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스트래퍼드 백작 탄핵이 진행되는 동안, 수천 명의 런던 시민들이 웨스트민스터로 몰려와 스트래퍼드 백작 처형을 요구하는 시위 행동을 일으키고, 처형에 동의를 망설이는 국왕과 귀족원 의원을 매도했는데, 하이드는 그것을 보고 혐오했다. 의회는 5월 12일 스트래퍼드 백작을 처형함과 동시에 1640년부터 1641년에 걸쳐 의회 권한을 회복·강화하는 법안을 잇따라 가결시켰다.

1642년 6월에 의회는 요크에 있는 국왕에게 19개 조항 제안을 보내, 국왕의 고관·재판관 임명권, 군 통수권, 교회 개혁권을 의회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하이드와 폴클랜드 자작에게 반론문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이 반론문을 선전포고로 본 의회는 7월 초에 제3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를 지휘관으로 하는 의회군을 조직했고, 이에 맞서 국왕도 8월에 노팅엄에 국왕군 집결을 명령했다. 이렇게 내란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고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1643년 2월에는 재무장관과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었다. 하이드 등 입헌 국왕파는 내란 발발 후에도 "의회에 규제된 왕정"의 존속을 기치로 내걸고 의회와의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1644년 1월에 소집된 옥스퍼드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와의 평화를 추구했지만, 성과 없이 끝났다. 하이드가 마지막으로 평화 교섭에 참여한 것은 164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억스브리지에서의 회담이었지만, 이때는 의회파가 완전히 항전파에 장악되어 평화파는 더 이상 의회 내에서 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하이드는 ''반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지만, 1651년 제3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후, 찰스 2세의 고문으로 복귀했고, 1658년 1월 13일 재상으로 임명되었다.[7]

2. 4. 망명 시기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지냈다.[6] 청교도 혁명으로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했다.[5] 그는 망명 기간 동안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하며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7]

1644년, 왕당파가 통제하는 서부 지방은 웨일스 공 아래 별도의 정부로 창설되었고, 하이드는 그의 일반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반대자들이 그를 국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이드는 조지 고링, 고링 경을 비롯한 그의 군 지휘관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당파가 패배한 후, 하이드는 1646년 저지 섬으로 도망쳤다.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에 반대하여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16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200px|thumb|1653년경의 찰스 2세를 그린 그림 (필리프 드 샹파뉴 화)]]

최악의 사태를 각오한 찰스 1세는 1645년 3월, 하이드에게 황태자 찰스(후일의 찰스 2세)를 맡기고, 옥스퍼드를 떠나 대륙으로 망명할 것을 명했다. 이후 하이드는 15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했다. 황태자는 파리에 망명 궁정을 세웠지만, 하이드는 3년 동안 저지 섬에서 역사서(『잉글랜드 반란과 내전의 역사/The History of the Rebellion and Civil Wars in England영어』) 집필에 전념했다. 1648년 6월, 찰스 황태자가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했을 때, 하이드는 이를 보좌하기 위해 저지 섬을 떠났지만, 항해 중 해적에게 습격당해 황태자 곁에 합류하지 못했고, 황태자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하이드는 망명 궁정에서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수년을 보냈다. 1651년 11월, 찰스가 스코틀랜드에서 패배하고 파리로 돌아온 후, 하이드를 측근으로 삼았다. 1654년 '국왕 비서실장', 1658년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국왕 측근이 된 하이드는 망명 궁정이 잉글랜드 국민의 심정에서 벗어난 독선적인 존재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3. 왕정복고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지냈다. 청교도 혁명으로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 망명 중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했다.

1660년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하이드는 딸 이 국왕의 동생 제임스와 결혼하면서 왕실과 더욱 가까워졌다. 현대 역사가들은 하이드가 이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마자랭 추기경은 이 결혼이 하이드의 정치적 명성에 손상을 입혔다고 언급했다. 1660년 11월 3일, 하이드는 윌트셔주 힌든의 하이드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고, 1661년 4월 20일 대관식에서 콘베리 자작과 클라렌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1660년부터 1667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하이드의 딸 앤, 제임스, 그리고 그들의 두 딸인 레이디 메리와 레이디 앤.


하이드 백작은 통치 초기 영국 수석 장관으로서 브레다 선언에 약속된 사항, 특히 왕족 살해자를 제외한 모든 왕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대부분 사면 및 망각법에서 달성되었다. 그는 다른 대부분의 문제들을 의회에 맡겼고, 귀족의 복귀를 환영하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그는 찰스 2세와 브라간사 여왕 캐서린의 결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캐서린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하이드 백작의 손자녀들이 왕위에 가까워졌기에, 결과적으로 그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하이드 백작은 재상으로서 잉글랜드 교회의 우위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클라렌던 법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법전 초안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

1663년, 하이드 백작은 캐롤라이나주가 된 북미의 광대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받은 여덟 명의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조지 디그비, 제2대 브리스톨 백작에 의해 탄핵 시도가 있었고, 피카딜리에 있는 그의 호화로운 저택 클라렌던 하우스는 부패의 증거로 인용되었다. 그는 덩케르크 매각, 영국령 탕헤르 식민지와 봄베이 지원 비용에 대해서도 비난을 받았다.

|thumb|right|upright=0.8|클라렌던 백작, 1666년 데이비드 로그갠의 판화]]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군사적 실패, 1665년의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는 그의 몰락을 초래했고, 1667년 6월의 메드웨 급습은 그의 경력에 결정타를 가했다. 그는 ''인신 보호 영장''을 위반하고 죄수를 저지섬과 같은 곳으로 보내 재판 없이 가두었다는 이유로 탄핵되었고, 1667년 11월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다. 국왕은 그를 변호하지 않았고, 그의 추방을 규정하는 법률(19 & 20 Cha. 2. c. 2)이 통과되어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1658년 9월 크롬웰 사망으로 공화정 체제가 동요하자 하이드는 공화국 내 분열을 조장했다. 조지 몽크는 1660년 2월 3일 런던에 입성하여 하이드와 협상했고, "광범위한 사면, 국왕과 교회의 토지에 대한 의회 결정 수용, 양심의 자유 보장"을 왕정복고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이드는 4월에 브레다 선언을 기초하여 국왕에게 발포하게 했다.

1660년 4월 25일 소집된 임시 의회는 브레다 선언 수용을 결의했고, 5월 29일 찰스 2세는 하이드를 동반하여 런던으로 귀환했다. 하이드는 국왕의 최대 측근으로서 잉글랜드 국정을 주도했다.

1660년 11월 하이드 남작, 1661년 4월 클래런던 백작에 서임되었고, 1662년 대법관에 임명되어 피카딜리에 광대한 토지를 받았다.

왕정복고를 안정시키기 위해 클래런던 백작은 혁명파에 대한 복수를 억제했다. 1660년 8월 사면 및 일반 사면법이 결의되어 찰스 1세 시역자 등을 예외로 하여 혁명기의 행동에 대해 원칙적으로 면책이 되었다. 시역자 외에는 헨리 베인이 처형되었다. 1661년 기사 의회에서 공화국 지도자 13명이 엄벌 리스트에 추가되었을 때, 클래런던 백작은 국왕과 함께 법안 통과를 저지했다.

공화정 시기의 토지 변동에 대해서는 몰수된 교회령·왕령·왕당파 소유지는 무조건 회복했지만, 벌금 지불을 위해 자발적으로 토지를 팔았던 경우에는 반환하지 않았다. 이는 공화파·왕당파 양측의 지지를 얻기 위한 타협책이었으나, 토지 매각에 내몰린 왕당파는 불만을 품고 클래런던 백작에 대한 최초의 불만이 되었다.

=== 클래런던 법전 ===

청교도 혁명 이후 프랑스에 망명했던 에드워드 하이드는 왕정복고 후 정치 지도자로서 국교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법률 개정을 주도했다. 이 법률들은 그의 이름을 따 '클래런던 법전'이라 불린다.

1661년 제정된 자치제법은 비국교도가 도시 자치체의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1662년에는 예배 통일법이 제정되어 2000명의 국교회 성직자가 성직록을 박탈당했다. 1665년까지 "비밀 예배 집회 금지법"과 "5마일 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비국교도 탄압 법규는 '클래런던 법전'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클래런던 백작 자신은 브레다 선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관용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이 법규들에 비판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법전 초안 작성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 그가 핵심 구성원이었던 "위대한 테우 서클"은 관용과 종교적 차이에 대한 존중을 중시했다.

1660년 10월, 국왕 찰스 2세는 "우스타 하우스 선언"을 발표하여 장로회를 포함한 완화된 국교회 체제를 만들고자 했으나, 의회 내 왕당파는 엄격한 국교회 체제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종교 정책을 국왕 대권으로 하여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국왕과, 국교회를 국가 통일의 끈으로 지켜나가려는 의회의 대립은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치세에도 계속되어 명예 혁명의 복선이 되었다.

=== 외교 정책과 몰락 ===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는 영국으로 돌아와 딸 앤 하이드가 국왕의 동생 제임스와 결혼하면서 왕실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는 1660년 11월 3일, 윌트셔주 힌든의 하이드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고, 다음 해 4월 20일 대관식에서 콘베리 자작과 클라렌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1660년부터 1667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실질적인 영국 수석 장관으로서 브레다 선언에 약속된 대부분의 사항을 이행하고자 했다. 특히 왕족 살해자를 제외한 모든 왕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면 및 망각법을 통해 이를 달성하려 노력했다. 그는 찰스 2세와 브라간사 여왕 캐서린의 결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캐서린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그의 손자녀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져 정치적으로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thumb|right|upright=0.8|클라렌던 백작, 1666년 데이비드 로그갠의 판화]]

재상으로서, 클라렌던은 잉글랜드 교회의 우위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클라렌던 법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초안에 많이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 1663년, 그는 북미 캐롤라이나주의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이 되었다.

1662년 됭케르크를 매각하여 런던 시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1665년 영란 전쟁이 발발하자, 클래런던 백작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주전파에 밀려났다. 전쟁의 실패와 1665년 흑사병, 1666년 런던 대화재는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조지 디그비, 제2대 브리스톨 백작은 그를 탄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피카딜리에 있는 클라렌던 하우스와 영국령 탕헤르, 봄베이 식민지 지원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권위는 건강 악화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군사적 실패로 약화되었다. 특히 1667년 6월 네덜란드의 메드웨 급습은 그의 경력에 결정타를 가했다.

그는 아내의 사망으로 큰 개인적인 타격을 입었다. 잉글랜드 하원은 그를 ''인신 보호 영장'' 위반 혐의로 탄핵했고, 그는 1667년 11월 프랑스로 도망쳤다. 국왕은 그를 변호하지 않았고, 그의 추방을 규정하는 법률(19 & 20 Cha. 2. c. 2)이 통과되었다. 그는 프랑스 루앙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3. 1. 왕정복고

에드워드 하이드는 장기 의회에서 왕당파로 활동하며 재무상, 추밀원 의원 등을 지냈다. 청교도 혁명으로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8] 망명 중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했다.

1660년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하이드는 딸 이 국왕의 동생 제임스와 결혼하면서 왕실과 더욱 가까워졌다.[8] 현대 역사가들은 하이드가 이 결혼에 관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8] 마자랭 추기경은 이 결혼이 하이드의 정치적 명성에 손상을 입혔다고 언급했다.[8] 1660년 11월 3일, 하이드는 윌트셔주 힌든의 하이드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고, 1661년 4월 20일 대관식에서 콘베리 자작과 클라렌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8] 1660년부터 1667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9]

하이드 백작은 통치 초기 영국 수석 장관으로서 브레다 선언에 약속된 사항, 특히 왕족 살해자를 제외한 모든 왕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10] 이는 대부분 사면 및 망각법에서 달성되었다. 그는 다른 대부분의 문제들을 의회에 맡겼고, 귀족의 복귀를 환영하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10]

그는 찰스 2세와 브라간사 여왕 캐서린의 결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캐서린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하이드 백작의 손자녀들이 왕위에 가까워졌기에, 결과적으로 그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10]

하이드 백작은 재상으로서 잉글랜드 교회의 우위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클라렌던 법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법전 초안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11]

1663년, 하이드 백작은 캐롤라이나주가 된 북미의 광대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받은 여덟 명의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이었다.[11] 그러나 조지 디그비, 제2대 브리스톨 백작에 의해 탄핵 시도가 있었고, 피카딜리에 있는 그의 호화로운 저택 클라렌던 하우스는 부패의 증거로 인용되었다.[11] 그는 덩케르크 매각, 영국령 탕헤르 식민지와 봄베이 지원 비용에 대해서도 비난을 받았다.[11]

|thumb|right|upright=0.8|클라렌던 백작, 1666년 데이비드 로그갠의 판화]]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군사적 실패, 1665년의 흑사병과 런던 대화재는 그의 몰락을 초래했고, 1667년 6월의 메드웨 급습은 그의 경력에 결정타를 가했다.[15] 그는 ''인신 보호 영장''을 위반하고 죄수를 저지섬과 같은 곳으로 보내 재판 없이 가두었다는 이유로 탄핵되었고, 1667년 11월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다.[16] 국왕은 그를 변호하지 않았고, 그의 추방을 규정하는 법률(19 & 20 Cha. 2. c. 2)이 통과되어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1658년 9월 크롬웰 사망으로 공화정 체제가 동요하자 하이드는 공화국 내 분열을 조장했다.[17] 조지 몽크는 1660년 2월 3일 런던에 입성하여 하이드와 협상했고, "광범위한 사면, 국왕과 교회의 토지에 대한 의회 결정 수용, 양심의 자유 보장"을 왕정복고 조건으로 내걸었다.[17] 하이드는 4월에 브레다 선언을 기초하여 국왕에게 발포하게 했다.[17]

1660년 4월 25일 소집된 임시 의회는 브레다 선언 수용을 결의했고, 5월 29일 찰스 2세는 하이드를 동반하여 런던으로 귀환했다.[17] 하이드는 국왕의 최대 측근으로서 잉글랜드 국정을 주도했다.

1660년 11월 하이드 남작, 1661년 4월 클래런던 백작에 서임되었고,[18][19] 1662년 대법관에 임명되어 피카딜리에 광대한 토지를 받았다.

왕정복고를 안정시키기 위해 클래런던 백작은 혁명파에 대한 복수를 억제했다. 1660년 8월 사면 및 일반 사면법이 결의되어 찰스 1세 시역자 등을 예외로 하여 혁명기의 행동에 대해 원칙적으로 면책이 되었다. 시역자 외에는 헨리 베인이 처형되었다. 1661년 기사 의회에서 공화국 지도자 13명이 엄벌 리스트에 추가되었을 때, 클래런던 백작은 국왕과 함께 법안 통과를 저지했다.

공화정 시기의 토지 변동에 대해서는 몰수된 교회령·왕령·왕당파 소유지는 무조건 회복했지만, 벌금 지불을 위해 자발적으로 토지를 팔았던 경우에는 반환하지 않았다. 이는 공화파·왕당파 양측의 지지를 얻기 위한 타협책이었으나, 토지 매각에 내몰린 왕당파는 불만을 품고 클래런던 백작에 대한 최초의 불만이 되었다.

3. 2. 클래런던 법전

청교도 혁명 이후 프랑스에 망명했던 에드워드 하이드는 왕정복고 후 정치 지도자로서 국교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법률 개정을 주도했다. 이 법률들은 그의 이름을 따 '클래런던 법전'이라 불린다.

1661년 제정된 자치제법은 비국교도가 도시 자치체의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1662년에는 예배 통일법이 제정되어 2000명의 국교회 성직자가 성직록을 박탈당했다. 1665년까지 "비밀 예배 집회 금지법"과 "5마일 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비국교도 탄압 법규는 '클래런던 법전'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클래런던 백작 자신은 브레다 선언에서 나타난 것처럼 관용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이 법규들에 비판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법전 초안 작성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 그가 핵심 구성원이었던 "위대한 테우 서클"은 관용과 종교적 차이에 대한 존중을 중시했다.

1660년 10월, 국왕 찰스 2세는 "우스타 하우스 선언"을 발표하여 장로회를 포함한 완화된 국교회 체제를 만들고자 했으나, 의회 내 왕당파는 엄격한 국교회 체제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종교 정책을 국왕 대권으로 하여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국왕과, 국교회를 국가 통일의 끈으로 지켜나가려는 의회의 대립은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치세에도 계속되어 명예 혁명의 복선이 되었다.

3. 3. 외교 정책과 몰락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는 영국으로 돌아와 딸 앤 하이드가 국왕의 동생 제임스와 결혼하면서 왕실과 더욱 가까워졌다.[8] 그는 1660년 11월 3일, 윌트셔주 힌든의 하이드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고, 다음 해 4월 20일 대관식에서 콘베리 자작과 클라렌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8] 1660년부터 1667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9]

그는 실질적인 영국 수석 장관으로서 브레다 선언에 약속된 대부분의 사항을 이행하고자 했다. 특히 왕족 살해자를 제외한 모든 왕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면 및 망각법을 통해 이를 달성하려 노력했다.[8] 그는 찰스 2세와 브라간사 여왕 캐서린의 결혼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캐서린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그의 손자녀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져 정치적으로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10]

|thumb|right|upright=0.8|클라렌던 백작, 1666년 데이비드 로그갠의 판화]]

재상으로서, 클라렌던은 잉글랜드 교회의 우위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클라렌던 법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초안에 많이 관여하지 않았고 내용의 많은 부분에 반대했다.[8] 1663년, 그는 북미 캐롤라이나주의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이 되었다.[8]

1662년 됭케르크를 매각하여 런던 시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11] 1665년 영란 전쟁이 발발하자, 클래런던 백작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주전파에 밀려났다.[11] 전쟁의 실패와 1665년 흑사병, 1666년 런던 대화재는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15]

조지 디그비, 제2대 브리스톨 백작은 그를 탄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1] 그는 피카딜리에 있는 클라렌던 하우스와 영국령 탕헤르, 봄베이 식민지 지원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11] 그의 권위는 건강 악화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군사적 실패로 약화되었다.[13][15] 특히 1667년 6월 네덜란드의 메드웨 급습은 그의 경력에 결정타를 가했다.[15]

그는 아내의 사망으로 큰 개인적인 타격을 입었다.[14] 잉글랜드 하원은 그를 ''인신 보호 영장'' 위반 혐의로 탄핵했고, 그는 1667년 11월 프랑스로 도망쳤다.[16] 국왕은 그를 변호하지 않았고, 그의 추방을 규정하는 법률(19 & 20 Cha. 2. c. 2)이 통과되었다.[16] 그는 프랑스 루앙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4. 망명과 죽음

에드워드 하이드, 제1대 클래런던 백작은 청교도 혁명으로 왕당파가 불리해지자 1645년 찰스 황태자(찰스 2세)를 따라 프랑스에 망명하여 《영국의 반란과 내란의 역사》를 집필하며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는 국교주의를 중심으로 '클래런던 법전'을 개정하였으나, 영국·네덜란드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다시 프랑스 루앙으로 망명하였다.

1667년 11월 29일, 제2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주도로 대역죄 고소를 당하고 국왕마저 등을 돌리자, 클래런던 백작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의 실각 이후 국정은 국왕 찰스 2세와 그의 총신 집단인 "Cabal(카발)"이 주도하게 되었다.

망명 생활 동안 클래런던 백작은 건강 악화와 루이 14세의 추방 명령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668년 4월 23일에는 에브뢰에서 잉글랜드 선원들에게 공격받아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통풍으로 고통받았으며, 망명 기간 대부분 두 사람의 도움 없이는 걷기 힘들 정도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클래런던 백작은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자신의 ''역사''를 업데이트하고 확장했으며, 이는 세 왕국 전쟁에 대한 고전적인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의 판매 수익금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의 클래런던 빌딩과 클래런던 기금 건설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자서전, 에세이, 다윗의 시편에 관한 작품,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비평 등을 저술했다.

새뮤얼 페피스는 30년 후 하이드만큼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1674년 12월 9일 루앙에서 사망한 클래런던 백작의 시신은 잉글랜드로 돌아와 1675년 1월 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작위는 장남 헨리 하이드에게 계승되었으며, 차남 로렌스 하이드 또한 로체스터 백작에 서임되었다.[18][19]

에드워드 하이드, 클래런던 백작의 문장: 4분할, 제1 및 제4: ''청색 바탕에 금색 마름모 3개 사이의 갈매기형'' (하이드); 제2: ''금색과 적색 6줄 교차, 청색 굽이 있음'' (랭포드); 제3: ''청색 바탕에 은색 십자가'' (에일즈버리).

5. 저작

에드워드 하이드는 역사가, 자서전 작가, 정치 사상가로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잉글랜드 반란과 내전의 역사''가 있으며, 1641년에 시작된 잉글랜드 내전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02년부터 1704년까지 출판되었다.


  • ''아일랜드 반란과 내전의 역사''(1720)
  • ''에드워드 클래런던 백작의 여러 논문집''(1727)
  • ''종교와 정책, 그리고 서로에게 주어야 할 격려와 지원, 다른 군주들의 영토 내 교황의 권력과 관할권 검토''(옥스퍼드, 1811, 2권)
  • ''에세이, 도덕적이고 즐거운'' (J. 샤프, 1819)
  • ''에드워드 클래런던 백작의 생애, 잉글랜드 대법관 및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포함''
  • ''I 에드워드 클래런던 백작의 생애: 1660년 복위까지의 대법관의 생애에 대한 설명''
  • ''II 에드워드 클래런던 백작의 생애: 1667년 추방까지의 복위 이후와 대반란의 역사에 대한 연속''
  • ''미스터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교회와 국가에 대한 위험하고 파괴적인 오류에 대한 간략한 견해 및 조사''(사후 1676년 출판)


''잉글랜드 반란과 내전의 역사''는 여러 판본이 존재하며, 1807년 신판도 출간되었다.

6. 유산 및 평가

19세기 휘그 사관에서는 청교도 혁명을 진보의 중요한 계기로 평가하기 때문에, 왕정 복고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 클래런던 백작은 반동 분자로 취급되어 평가가 좋지 않다.

20세기 역사가 G.M. 트레벨리언도 클래런던 백작에 대해, 장기 의회 초기의 1640년에 제정된 '국왕과 의회의 균형' 개념을 '정치적 지혜의 정점, 국정의 최종적 지혜'라고 믿고, 거기에 얽매여 있던 뒤떨어진 정치인으로 평가하였다. 이미 입법부와 행정부의 균형만으로는 부족하며, 의회가 국왕과 그 정부를 지배하는 의원 내각제로 이행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그의 한계라고 평가했다.

동시에 트레벨리언은 클래런던 백작이 혁명파에 대한 복수를 허용하지 않았던 점을 높이 평가하며, 그 덕분에 영국 왕좌는 모든 당파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국민적 제도로 다시 정착했다고 평가했다.

7. 가족

에드워드 하이드는 1609년 2월 18일 윌트셔주 딘턴에서 헨리 하이드 (1563–1634)와 메리 랭퍼드 (1578–1661)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두 삼촌은 변호사였는데, 니콜라스 하이드는 대법원장을 역임했고, 로렌스는 덴마크의 앤의 법무 고문이었다.

하이드는 두 번 결혼했는데, 1629년 앤 아일립과 처음 결혼했지만 6개월 후 천연두로 사망했다. 1632년에는 윌트셔의 유력자 조지 아이리페의 딸 앤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결혼 5개월 만에 병사했다.[19] 1634년에는 프랜시스 에일스버리와 재혼했다. 1634년에는 소액 채권 법원 주사·조폐국 장관인 초대 준남작 토마스 에일즈버리의 딸 프란세스와 재혼했다.[19]

그들은 유아기를 넘긴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장녀 앤 하이드는 제임스 2세와 결혼하여 메리 2세와 앤 여왕의 어머니가 되었다.[19] 장남 헨리와 차남 로렌스는 모두 중요한 정치 경력을 쌓았다.

참조

[1] 웹사이트 Edward Hyde & family https://www.westmins[...] 2020-03-24
[2] 웹사이트 Henry Hyde, MP https://www.geni.com[...] 2020-03-24
[3] 서적
[4] 서적 The Great Tew Circle Secker and Warburg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Round about Piccadilly and Pall Mal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서적
[12] 서적 King Charles II
[13] 문서 Diary of Samuel Pepys 1667-09-02
[14] 서적 Clarendon and his Friends
[15] 서적 King Charles II
[16] 서적
[17] 웹사이트 Sir Edward Hyde, 1st Earl of Clarendon, 1609-74 https://bcw-project.[...]
[18] 웹사이트 Clarendon, Earl of (E, 1661 - 1753) http://www.cracrofts[...] 2015-12-25
[19] 웹사이트 Edward Hyde, 1st Earl of Clarendon http://thepeerage.co[...]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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