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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어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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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페어팩스는 1612년에 태어난 잉글랜드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를 이끌었고, 마스턴 무어 전투와 네이즈비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1650년에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반대하여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잉글랜드 왕정복고에 기여했다. 그는 찰스 2세의 즉위에 기여했으며, 말년에는 저택에서 은퇴 생활을 하며 저술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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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페어팩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토머스 페어팩스, 로버트 워커 그림 (1649년 ~ 1658년)
별칭'검은 톰(Black Tom)'
'백마의 기사(Rider of the White Horse)'
출생일1612년 1월 17일
출생지덴턴 홀, 덴턴, 웨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 잉글랜드
사망일1671년 11월 12일
사망지넌 애플턴, 웨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 잉글랜드
매장지세인트 제임스 교회, 요크셔
토머스 페어팩스 3세, 페어팩스 오브 캐머런 경 서명
군사 정보
소속잉글랜드 왕국
잉글랜드 의회
복무 기간알 수 없음
계급총사령관 (Lord General)
부대알 수 없음
지휘알 수 없음
주요 전투낸트위치 전투
마스턴 무어 전투
옥스포드 공성전
네이즈비 전투
메이드스톤 전투
콜체스터 공성전
레벨러 반란 진압
수상알 수 없음
정치 경력
작위페어팩스 오브 캐머런 경
가족 관계
배우자앤 베르 (결혼: 1637년)
자녀메리 페어팩스, 버킹엄 공작 부인
부모페르디난도 페어팩스, 제2대 페어팩스 오브 캐머런 경
기타
관련 인물알 수 없음

2. 초기 경력

1612년 1월 17일,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의 일클리와 오틀리 사이에 위치한 덴턴 홀에서 퍼디난도 페어팩스, 제2대 캐머론 영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2] 그의 가문 칭호인 캐머론 영주는 당시 잉글랜드로부터 독립된 상태였던 스코틀랜드 귀족에 속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 거무스름한 안색 때문에 '검은 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2]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3][20][21][30]와 그레이스 인(1626–1628)에서 공부했다. 이후 호레이스 베어 경의 원정대에 자원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건너가 개신교 신앙을 위해 싸웠고,[30] 1629년부터 1631년까지 팔십 년 전쟁(30년 전쟁)에 참전했다. 1637년에는 호레이스 베어 경의 딸 앤 베어와 결혼했다.

1639년 요크셔 용기병 부대를 지휘하여 찰스 1세를 따라 제1차 주교 전쟁에 참전했으나, 전투 없이 버윅 평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듬해 1640년 제2차 주교 전쟁에 참전하여 뉴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패배했을 때 함께 후퇴했지만, 이전의 공로로 1641년 1월 기사 작위를 받았다.

3. 잉글랜드 내전 이전

《토머스 페어팩스 경》, 선 조각, 1680년.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페어팩스 부자는 처음에는 찰스 1세 국왕 휘하에서 복무했지만, 왕권의 자의적인 특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토머스 페어팩스는 "그의 판단은 왕과 왕국의 가장 위대하고 안전한 의회인 의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의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찰스 1세가 자신의 경호를 명분으로 요크에서 군대를 모으려 했을 때, 이는 사실상 군대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어팩스는 국왕에게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청원서를 통해 국왕에게 의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군대 모집을 중단할 것을 간청하고자 했다.

이 사건은 요크셔의 자유 보유자들과 농부들이 대규모로 모인 헤워스 무어 회의에서 일어났다. 찰스 1세는 페어팩스가 전달하려는 청원서를 무시하고 말을 몰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페어팩스는 포기하지 않고 국왕을 따라가 말 안장의 손잡이에 청원서를 직접 올려놓았다.

4. 잉글랜드 내전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토머스 페어팩스는 아버지 페르디난도 페어팩스 경과 함께 의회파에 가담하여 북부 잉글랜드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북부 의회군 총사령관, 토머스는 기병대 중장으로 임명되어 요크셔를 중심으로 왕당파와 맞섰다. 초기에는 시크로프트 무어 전투와 같은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31][32][4][5] 부자는 끈질기게 항전했다.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을 떨쳐 북부 전세 역전에 기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북부 잉글랜드 대부분이 의회파의 수중에 들어왔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기존 군 지휘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의회는 1645년 자기 부인 조례를 통과시키고 여러 부대를 통합한 신식 군대(New Model Army)를 창설했다. 토머스 페어팩스는 이 새로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이 그의 부관이 되었다. 페어팩스가 이끄는 신식 군대는 네이즈비 전투(1645년 6월 14일)에서 찰스 1세의 왕당파 주력군을 격파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페어팩스는 서부 지역의 왕당파 거점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1646년 옥스퍼드 포위전에서 승리하며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을 의회파의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 포로가 된 찰스 1세를 호송하는 과정에서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1차 내전 종결 후, 의회와 군대 사이, 그리고 장로파와 독립파 사이에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불거졌다. 페어팩스는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점차 정치적으로 급진화되는 군 장교들과 의회 사이에서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그는 정치적 활동보다는 군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크롬웰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갔다.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페어팩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콜체스터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전쟁 이후 군부 내에서 찰스 1세 처벌 요구가 거세지자, 페어팩스는 처벌 자체에는 동의했으나 국왕을 재판하는 특별 재판소에는 불참하며 처형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33][6]

1649년 왕정 폐지 이후, 페어팩스는 버퍼드에서 일어난 레벨러의 반란을 진압하며 군 내부의 질서를 다잡았다. 그는 새로운 잉글랜드 공화국 체제에 순응하여 총사령관직을 유지했지만,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650년 스코틀랜드가 찰스 2세를 지지하며 제3차 잉글랜드 내전이 임박하자, 국무원은 스코틀랜드 침공을 결정했다. 그러나 페어팩스는 과거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올리버 크롬웰이 임명되었다.

4. 1. 군사적 업적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그의 아버지 페르디난도 페어팩스 경은 북부 의회군의 장군으로 임명되었고, 토머스 페어팩스는 아버지 휘하에서 기병대 중장으로 임명되었다. 부자 모두 요크셔에서의 군사 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643년 시크로프트 무어 전투에서는 왕당파에게 패배하여 후퇴하기도 했으나,[31][32][4][5] 부자는 계속해서 의회파를 위해 싸웠다. 10월 11일에는 윈스비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 등과 함께 왕당파를 격파하고 링컨셔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22]

1644년 1월 25일 낸트위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스코틀랜드 언약도 군대와 연합하여 요크를 포위했다. 7월 2일, 루퍼트 공이 이끄는 왕당파 구원군과 맞붙은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페어팩스는 뛰어난 용맹을 발휘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기병대와 합류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그의 동생 찰스 페어팩스 대령이 전사했다. 마스턴 무어 전투의 승리로 요크가 함락되었고, 북부 잉글랜드 대부분이 의회파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군 지휘관들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1645년 의회는 자기 부인 조례를 통과시켜 기존 지휘관들을 해임하고, 여러 지역 연대를 통합하여 신식 군대(New Model Army)를 창설했다. 토머스 페어팩스는 이 새로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올리버 크롬웰은 부사령관 겸 기병대장이 되었다. 페어팩스가 이끄는 신식 군대는 잘 훈련되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춰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1645년 6월 14일, 페어팩스는 네이즈비 전투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왕당파 주력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총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전투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왕당파의 패배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페어팩스는 서부 지역으로 진격하여 레스터, 토턴, 브리지워터, 브리스톨 등 왕당파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9월 10일에는 브리스톨에 고립된 루퍼트 공의 항복을 받아냈다.

1648년 메이드스톤 전투에서 페어팩스가 입었던 더블릿. 더블릿은 서양에서 14~17세기 남성들이 입던 짧고 몸에 꼭 끼는 상의를 말한다.


1645년 11월 페어팩스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의회파의 영웅으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의회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값비싼 선물과 포상금을 수여했다. 1646년에는 남서부 지역을 평정하고 왕당파 부대 지휘관 랄프 홉턴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6월에는 왕당파의 마지막 주요 거점이었던 옥스퍼드를 포위하여 항복시켰다(옥스퍼드 포위전). 9월에는 월링퍼드 성마저 함락되면서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은 사실상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페어팩스는 포로가 된 찰스 1세를 홀덴비까지 호송하며 정중하게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찰스 1세는 페어팩스를 "명예로운 사람이며, 약속을 지키는 자"라고 평가했다.

토머스 페어팩스를 묘사한 금메달, 1645년 제작.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 소장.


내전 종결 후 군대와 의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페어팩스는 양측을 중재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군대의 정치 개입에는 소극적이었지만, 군대의 급진파(예: 평등파)를 통제하고 군 기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648년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페어팩스는 다시 한번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켄트와 에식스에서 일어난 왕당파 반란을 진압했으며, 특히 콜체스터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콜체스터 항복 후, 그는 항복 조건을 어겼다는 이유로 왕당파 지휘관 찰스 루카스 경과 조지 리슬 경의 처형을 승인했다. 이는 전쟁 법규를 엄격히 적용한 조치였다.

페어팩스는 찰스 1세의 처형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군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프라이드의 숙청 등 군대의 정치적 행동을 묵인하거나 승인했다. 1649년 5월에는 버퍼드에서 일어난 레벨러의 반란(밴버리 반란)을 진압하여 군 내부의 급진 세력을 제거하고 군 통수권을 확립했다.

1650년, 스코틀랜드가 찰스 2세를 지지하며 제3차 잉글랜드 내전의 조짐이 보이자, 국무원은 스코틀랜드 침공을 결정했다. 그러나 페어팩스는 과거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 언약도와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총사령관직 사임을 결심했다. 크롬웰 등은 그의 잔류를 설득했지만, 페어팩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크롬웰이 그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것이 페어팩스의 마지막 군사적 활동이었다.

4. 2. 찰스 1세와의 관계

페어팩스 부자는 처음에는 찰스 1세 국왕 휘하에서 복무했지만, 왕권의 자의적인 특권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토머스 페어팩스는 "그의 판단은 왕과 왕국의 가장 위대하고 안전한 의회인 의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의회 중심의 국정 운영을 지지했다. 찰스 1세가 자신의 경호를 명분으로 요크에서 군대를 모으려 하자(이는 사실상 군대의 핵심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페어팩스는 국왕에게 청원서를 전달하여 의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군대 모집을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요크 근처 헤워스 무어에서 국왕이 소집한 요크셔의 자유 보유자들과 농부들의 대규모 헤워스 무어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찰스 1세는 청원서를 무시하려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지만, 페어팩스는 그를 따라가 국왕 안장의 손잡이에 청원서를 올려놓았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그의 아버지 퍼디난도 페어팩스 경은 북부 의회파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고, 토머스 페어팩스는 아버지 밑에서 기병 중장으로 임명되어 함께 요크셔에서의 군사 작전에서 활약했다.

자기 부인 조례와 뉴 모델 조례에 따라 신식 군대가 창설되자, 페어팩스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네이즈비 전투(1645년 6월 14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했고, 이 전투 이후 찰스 1세는 웨일스로 도망쳤다. 이후 페어팩스는 서부 지역의 왕당파 세력을 격파하며 내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언약도 군대에 의탁했으나, 1647년 1월 언약도는 그를 잉글랜드 의회 위원들에게 넘겼다. 페어팩스는 노팅엄 너머에서 찰스 1세를 만나 홀덴비까지 호송하는 여정을 동행하며 모든 면에서 최대한의 배려를 베풀었다. 이에 찰스 1세는 페어팩스를 가리켜 "장군은 명예로운 사람이며, 나에게 약속한 그의 말을 지킨다"라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잉글랜드 내전 이후, 군대 내에서는 찰스 1세 처벌 요구가 거세졌다. 페어팩스는 크롬웰 등 군 지휘관들과 함께 찰스 처벌 요구에는 동의했으나, 프라이드의 숙청(1648년 12월 6일)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왕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재판관들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법원의 예비 심리에는 참석했지만, 이후 재판에는 불참했다. 이는 재판관들이 국왕 처형을 진지하게 추진하는 것을 확인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력하다.[6] 재판 과정에서 그의 아내 앤 페어팩스는 방청석에서 공개적으로 재판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는 여기에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다", "아니, 당신들은 (잉글랜드의 모든 선량한 국민들 중) 백분의 일도 대표하지 않아요!"라고 외쳐 법정에서 퇴장당하기도 했다.[7][6] 앤 페어팩스는 왕의 처형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7]

4. 3. 찰스 1세 처형에 대한 입장

올리버 크롬웰과 군 지휘관들이 찰스 1세의 처벌을 요구했을 때, 페어팩스는 처음에는 이에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프라이드의 숙청을 승인하기도 했다.[6] 그러나 왕을 처형하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장교들의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페어팩스는 왕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특별 재판소의 재판관 명단 가장 위에 이름이 올랐으며, 예비 심리에도 참석했으나 이후 재판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왕을 사형에 처하려는 군부의 의도를 명확히 인지하고 이에 동참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6]

페어팩스가 불참한 재판정에서는 그의 아내 앤 페어팩스가 재판의 정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정 관리인이 페어팩스의 이름을 부르자 앤은 갤러리에서 "그는 여기 있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He had more wit than to be there)"고 외쳤다. 또한, 법정이 기소장이 '잉글랜드 국민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people of England)' 제기되었다고 말하자 "아니, 그들의 100분의 1도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동으로 인해 앤은 법정에서 퇴장당했다.[7][6] 그녀는 나중에 왕의 처형을 막기 위해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7]

찰스 1세가 처형된 후인 1649년 2월, 페어팩스는 럼프 의회에서 시렌세스터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8]

5. 전쟁 이후

1650년 제3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페어팩스는 참전을 거부하고 크롬웰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는 과거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 서약파와 싸우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설과, 아내와 목사의 설득으로 장로교회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27]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에는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으나,[27] 1654년 잉글랜드 연방 시기에 제1차 보호 의회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간 5000GBP의 연금을 받았으며, 1658년 호국경이 사망할 때까지 요크셔의 누나플턴 저택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 이 시기 누나플턴 저택과 페어팩스의 은둔 생활은 앤드루 마벨의 시 ''애플턴 하우스에 부쳐''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후 잉글랜드 연방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페어팩스는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1659년 그는 제3차 보호 의회에서 요크셔 지역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공화국 해체를 추진하던 조지 몽크에게 협력하여 잉글랜드 왕정복고를 지지했다.[27]

만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며 조용한 삶을 보냈고,[27] 167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에게는 외동딸만 있었기 때문에, 페어팩스 경 작위는 사촌인 헨리 페어팩스가 계승했다.

6. 찰스 2세의 복위

페어팩스는 다시 한번 군사적으로 나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 몽크는 존 램버트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페어팩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659년 12월, 페어팩스가 요크셔의 젠트리들을 이끌고 나서자, 그의 이름과 명성에 힘입어 1,200명의 기병이 램버트를 버리고 페어팩스에게 합류했다. 이 사건은 램버트 군대의 급격한 붕괴를 가져왔으며, 왕정복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행동과 더불어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보여준 명예로운 처신 덕분에 페어팩스는 왕정복고 이후 왕당파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1660년 4월, 페어팩스는 소집 의회에서 요크셔 대표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35][8] 그는 영국 하원헤이그에 있는 찰스 2세를 맞이하고 그의 조속한 귀환을 촉구하기 위해 파견한 위원회의 대표를 맡았다. 페어팩스는 찰스 2세의 대관식에 사용될 말을 제공하기도 했다.

7. 말년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다. 이후 공화국 해체를 추진하던 조지 몽크에게 협력하여 잉글랜드 왕정복고를 지지했으며, 만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며 조용히 살았다고 전해진다.[27] 요크셔의 애플턴 하우스(Appleton House)라는 저택과 정원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는데, 당시 그의 딸 가정교사였던 시인 앤드루 마블이 이 시기의 페어팩스와 정원의 모습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28] 167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64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페어팩스 경 작위를 상속받았으나 외동딸만 있었기 때문에, 작위는 사촌인 헨리 페어팩스가 계승했다.

8. 저작

토머스 페어팩스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성경시편 중 일부를 번역했으며, 고독, 기독교적 전쟁, 인생의 짧음 등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 생애 마지막 1~2년 동안 두 편의 중요한 기록을 집필했는데, 하나는 1642년부터 1644년까지 자신이 참여했던 잉글랜드 북부에서의 군사 활동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의 서신들은 G.W. 존슨(G.W. Johnson)이 편집하여 1848년부터 1849년까지 총 4권으로 출판되었다.

9. 가족

페어팩스는 1637년 6월 20일 앤 드 베어(Anne de Vere, 1617년/1618년 ~ 1665년)와 결혼했다. 앤은 호레이스 베어 경과 메리 트레이시(Mary Tracy)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메리 페어팩스(Mary Fairfax, 1638년 7월 30일 ~ 1704년 10월 20일)가 있었는데,[10] 그녀는 훗날 2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 결혼했다.

토머스 페어팩스 경이 지니고 있던 카메론의 페어팩스 경 작위는 사촌인 헨리 페어팩스(Henry Fairfax, 4대)가 계승했다.[11]

10. 평가

군인으로서 토머스 페어팩스는 정확하고 계획적이었으며, 치열한 전투 중에는 "너무도 활발하게 움직이느라 그에게 말을 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평가받을 만큼 용맹했다.[38][12] 그는 부하와 적 모두에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며 꼼꼼하게 대했고, 명예와 양심을 중시하는 성격은 공적인 활동과 사적인 생활 모두에서 드러났다.

''The Most Excellent Thomas Fairfax, Captin Generall of the Armyes etc'', 에칭, 1640년대.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그러나 그의 겸손함과 권력 및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은 정치가로서는 한계로 작용했다. 특히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동료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될 때 이러한 약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크롬웰은 찰스 1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이용하여 그의 처형을 이끌어낼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보였으나, 페어팩스는 이러한 방식의 정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페어팩스는 전쟁 시기와 평화 시기 모두에서 크롬웰의 그늘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11. 대중문화

토머스 페어팩스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영화에서는 여러 배우가 페어팩스를 연기했다. 2003년 영화 ''왕을 죽여라''에서는 배우 더그레이 스콧이 페어팩스를 연기했으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13] 1970년 켄 휴즈 감독의 영화 ''크롬웰''에서는 더글러스 윌머가,[16] 1975년 역사 영화 ''윈스턴리''에서는 제롬 윌리스가 페어팩스 역을 맡았다.[17]
소설에서도 페어팩스는 비중 있게 등장한다. 로즈메리 서트클리프는 자신의 역사 소설에서 페어팩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1953년작 ''사이먼''에서는 영감을 주고 공정한 인물로 그려졌으며,[14] 1959년작 ''백마의 기수''에서는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그의 아내 시점에서 잉글랜드 내전 초기 단계가 묘사된다. 마이클 아놀드의 소설 ''마스턴 무어''는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페어팩스가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18]
연극 무대에서도 페어팩스를 만날 수 있다. 하워드 브렌턴의 2012년 연극 ''55일''에 등장한다.[15] 또한, 1988년 BBC 라디오에서 제작된 돈 테일러의 라디오 연극 ''신의 혁명''에서는 나이젤 앤서니가 연기한 중심 인물로 등장했다.[19]

참조

[1] 기타
[2] 웹사이트 Thomas Fairfax: The Forgotten Leader https://www.cromwell[...] 2024-01-16
[3] 기타
[4] 서적 The Civil War in Yorkshire: Fairfax Versus Newcastle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9-08-03
[5] 뉴스 A - Z of Leeds https://www.yorkshir[...] Yorkshire Evening Post 2019-06-11
[6] 기타 The Trial of Charles I
[7] ODNB Fairfax [née Vere], Anne, Lady Fairfax
[8] 기타
[9] 웹사이트 Upon Appleton House, to my Lord Fairfax http://www.luminariu[...] Luminarium 2017-08-06
[10] 기타
[11] 웹사이트 Henry Fairfax, 4th Lord Of Cameron http://freepages.gen[...] Harrison Genealogy Repository 2017-08-06
[12] 기타
[13] 웹사이트 To Kill A King http://film-director[...] British Council 2024-02-22
[14] 웹사이트 Books by Rosemary Sutcliff https://rosemarysutc[...] 2017-08-06
[15] 웹사이트 55 Days http://www.hampstead[...] 2017-08-06
[16] 웹사이트 Douglas Wilmer https://www.sherlock[...] The Sherlock Holmes Society 2024-02-22
[17] 뉴스 Jerome Willis obituary https://www.theguard[...] 2024-02-22
[18] 서적 Marston Moor: Book 6 of The Civil War Chronicles London: Hodder & Stoughton
[19] 웹사이트 God's Revolution http://www.bbc.co.uk[...] BBC 2017-08-06
[20] 기타
[21] 기타
[22] 기타
[23] 기타
[24] 기타
[25] 기타
[26] 기타
[27] 기타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서적 The Civil War in Yorkshire: Fairfax Versus Newcastle https://books.google[...] Casemate Publishers 2019-08-03
[32] 뉴스 A - Z of Leeds https://www.yorkshir[...] Yorkshire Evening Post 2019-06-11
[33] 기타 The Trial of Charles I
[34] 기타 Fairfax , Anne, Lady Fairfax (1617/18–1665)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7-04-10
[35] 기타
[36] 웹인용 Upon Appleton House, to my Lord Fairfax http://www.luminariu[...] Luminarium 2017-08-06
[37] 웹인용 Henry Fairfax, 4th Lord Of Cameron http://freepages.gen[...] Harrison Genealogy Repository 2017-08-06
[3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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