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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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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준남작은 세습 작위의 일종으로, 기사 작위보다는 높고 남작보다는 낮은 서열을 갖는다. 1611년 제임스 1세가 재정 확보를 위해 창설했으며,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노바스코샤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준남작은 "경" 칭호를 사용하며, 세습되는 특징을 갖는다. 현재는 준남작 상임 회의에서 관리하며, 공식 명부에 등재된 사람만이 준남작으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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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남작 - Sir
    Sir는 남성에 대한 존칭으로, 기사 작위나 준남작 작위를 받은 남성에게 사용되며,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으며, 'Sir' 칭호의 사용법은 칭호 사용 자격, 여성형 칭호인 '데임(Dame)' 및 '레이디(Lady)'의 사용법과 관련되어 있다.
  • 준남작 - 로버트 하트
    로버트 하트는 아일랜드 출신 영국인으로, 청나라 말기 해관총세무사를 지내며 중국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중국인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준남작
작위 정보
작위명준남작
영어 명칭Baronet
여성형Baronetess (준남작 부인)
약칭Bart 또는 Bt (남성), Btss (여성)
수여 국가영국
작위 유형세습 작위
계급귀족 (젠트리)
서열귀족 작위 중 최하위
기사 (Knight) 보다 상위
헤러디터리 나이트 보다 상위
라틴어 명칭Nobiles minores (하급 귀족)
창설1611년 (잉글랜드 준남작)
특징세습 작위이나 귀족원 의석 없음
작위 소유자 이름 뒤에 "Bt" 또는 "Bart"를 붙임
방패 문장에 준남작 문장 추가 가능
역사
기원제임스 1세가 아일랜드 식민지 지원 명목으로 창설
작위 구매자에게 세습 작위와 사회적 지위 부여
호칭 및 예우
경칭"경 (Sir)" (남성), "여사 (Dame)" (여성)
배우자 경칭"레이디 (Lady)" (준남작 부인), "경 (Sir)" (남편)
존칭"폐하 (Your Majesty)" 또는 "전하 (Your Royal Highness)" (왕족 앞에서)
경례(상황에 따라 다름)
기타
관련 용어귀족
작위
영국 귀족 제도
나이트
관련 이미지
준남작 배지 리본
준남작 배지 리본

2. 역사

준남작이라는 용어는 중세 시대부터 사용되었다. 토머스 드 라 모어 경은 1322년 버러브리지 전투에 대해 기술하면서 준남작이 남작, 기사와 함께 참전했다고 언급했다.[6] 1328년 에드워드 3세는 8명의 준남작을 임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초기의 준남작 작위는 귀족 중에서도 의회 소환에 대한 개별 권리를 잃은 이들에게 주어졌으며, 리처드 2세법령에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사장 역시 이와 유사한, 더 낮은 계급의 작위였다.

준남작위를 창설한 잉글랜드 국왕이자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 1세(6세)( 그림)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준남작은 1611년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16세기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한 부채와 왕실 소유 토지 매각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일랜드 이주민에게 세습 신분 계급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로버트 코튼은 이를 참고하여 세습 신분 계급을 판매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1611년 대계약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코튼의 제안은 제임스 1세와 추밀원에 의해 채택되었다.

제임스 1세는 1611년 5월 22일 칙허장을 통해 준남작 작위 판매를 시작했다.[28] 연간 1000GBP 이상의 소득을 가진 명문가 출신 200명에게 특허장을 수여하고, 그 대가로 각자 30명의 병사를 3년간 유지할 수 있는 비용(1095GBP)을 징수했다. 이 자금은 얼스터 플랜테이션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7] 초기에는 구매 희망자들이 1095GBP를 3회 분할 납부했지만, 금액과 결제 방법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1611년부터 1614년까지 재무부에 납부된 준남작 구매 금액은 90885GBP였으며, 이는 아일랜드 주둔 잉글랜드군 비용의 약 70%를 충당했다.

1612년에는 준남작의 서열이 남작의 영거 선 아래, 기사 위로 정해졌고, 준남작에게는 얼스터의 붉은 손 문장 사용이 허용되었다. 1614년 의회에서는 준남작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폐지되지는 않았다.

1618년 조지 빌리어스(후의 버킹엄 공작)는 준남작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가격을 폭락시켰다. 1619년에는 700GBP, 1622년에는 220GBP에 준남작위를 구매하는 사례도 있었다.[31] 찰스 1세는 30년 전쟁 전비 마련을 위해 준남작 제도를 활용했지만, 잉글랜드 내전 시기에는 왕당파 지지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1619년에는 아일랜드 준남작이, 1625년에는 스코틀랜드 준남작과 노바스코샤 준남작이 설립되었다. 스코틀랜드 준남작은 2000마르크를 지불하거나 2년간 6명의 식민지 정착민을 지원해야 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 이후에는 대영 준남작이, 1801년 대영 제국과 아일랜드 연합 이후에는 연합 왕국 준남작이 창설되었다.

1612년과 1613년 왕실 영장에 따라 준남작에게는 몇 가지 특권이 부여되었다. 준남작과 귀족 차남 사이에는 서열을 가질 수 없었고, 준남작 장남은 기사 작위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1827년 조지 4세에 의해 폐지). 또한 준남작은 문장에 얼스터 문장을 추가할 수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준남작은 노바스코샤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2. 1. 용어의 기원

토머스 드 라 모어 경 (1322)은 버러브리지 전투를 묘사하면서, 준남작이 남작 및 기사와 함께 참여했다고 언급했다.[6] 에드워드 3세는 1328년에 8명의 준남작을 임명했다.

준남작의 작위는 처음에는 귀족에게 부여되었는데, 이들은 의회 소환에 대한 개별 권리를 잃었고, 이 의미로 리처드 2세법령에 사용되었다. 이와 유사한 더 낮은 계급의 작위는 기사장이었다.

오늘날의 준남작은 제임스 1세가 연간 최소 1000GBP (2024년 기준)의 소득을 가진 200명의 명문 출신에게 특허장을 수여한 1611년부터 시작되었다. 명예에 대한 대가로, 각자는 30명의 병사 유지비로 하루에 1GBP씩(1095일) 지불해야 했으며, 이는 총 1095GBP (2024년 기준)였다. 당시에는 매우 큰 액수였다. 이 자금은 얼스터 플랜테이션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7]

1619년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준남작을 설립했고, 찰스 1세는 1625년에 스코틀랜드 준남작과 노바스코샤 준남작을 만들었다. 새로운 준남작들은 각각 2000마르크(통화) (2024년 기준)를 지불하거나 2년 동안 6명의 식민지 정착민을 지원해야 했다. 현재 스코틀랜드 준남작으로 잘 알려진 100개 이상의 준남작위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의 결과로, 모든 미래의 작위는 대영 준남작으로 칭해졌다. 1801년 대영 제국과 아일랜드의 연합 이후, 새로운 작위는 연합 왕국 준남작으로 칭해졌다.

1612년과 1613년의 왕실 영장에 따라, 특정 특권이 준남작에게 부여되었다. 첫째, 준남작과 귀족의 차남 사이에는 그 어떤 사람도 서열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 준남작의 장남에게 기사 작위를 받을 권리가 부여되었으며(이는 나중에 조지 4세에 의해 1827년에 폐지되었다), 셋째, 준남작은 문장에 얼스터문장을 방패형 문장에 추가할 수 있었다: "은색 바탕에 붉은 손(또는 피 묻은 손)". 이러한 특권은 아일랜드 준남작에게도 확대되었으며, 스코틀랜드 준남작에게는 명예의 증표로 노바스코샤의 문장을 묘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전자는 이후에 창설된 대영 제국 및 연합 왕국의 모든 준남작에게 오늘날까지 적용된다.

스튜어트 왕조 초기의 17세기 초, 잉글랜드 왕실은 재정 파탄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6세기 말부터의 대스페인 전쟁의 부채가 무겁게 짓눌렀을 뿐만 아니라, 왕령지의 매각도 거의 종료되었기 때문에 왕령지 매각에 의한 일시금도 지대 수입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 개혁안이 제시되었고, 그중 하나로 구상된 것이 세습 신분 계급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처음 신분 계급의 창설을 고안한 것은 철학자이자 하원 의원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이었지만, 그의 구상은 판매가 아닌, 아일랜드 이주를 추진하기 위해 이주자에게 주는 것을 상정했다. 이 베이컨의 구상에서 힌트를 얻어 신분 계급을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고고학자이자 하원 의원인 Sir Robert Cotton, 1st Baronet, of Connington영어이었다. 1611년에 "대계약"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코튼의 제안은 거의 수정 없이 잉글랜드 국왕이자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와 추밀원에 채택되었다.

2. 2. 제도의 창설과 발전



준남작이라는 용어는 중세 시대에서 유래되었다. 토머스 드 라 모어 경 (1322)는 버러브리지 전투를 묘사하면서, 준남작이 남작 및 기사와 함께 참여했다고 언급했다.[6] 에드워드 3세는 1328년에 8명의 준남작을 임명했다. 준남작의 작위는 처음에는 귀족에게 부여되었는데, 이들은 의회 소환에 대한 개별 권리를 잃었고, 이 의미로 리처드 2세법령에 사용되었다. 이와 유사한 더 낮은 계급의 작위는 기사장이었다.

오늘날의 준남작은 제임스 1세가 연간 최소 1000GBP의 소득을 가진 200명의 명문 출신에게 특허장을 수여한 1611년부터 시작되었다. 명예에 대한 대가로, 각자는 30명의 병사 유지비로 하루에 1파운드씩(1095일) 지불해야 했으며, 이는 총 1095GBP였다. 당시에는 매우 큰 액수였다. 이 자금은 얼스터 플랜테이션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7]

스튜어트 왕조 초기인 17세기 초, 잉글랜드 왕실은 재정 파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6세기 말부터의 대스페인 전쟁 부채가 무겁게 짓눌렀을 뿐만 아니라, 왕령지 매각도 거의 종료되었기 때문에 왕령지 매각에 의한 일시금이나 지대 수입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 개혁안이 제시되었고, 그중 하나로 구상된 것이 세습 신분 계급 판매였다.

처음 신분 계급 창설을 고안한 것은 철학자이자 하원 의원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이었지만, 그의 구상은 판매가 아닌 아일랜드 이주를 추진하기 위해 이주자에게 주는 것을 상정했다. 이 베이컨의 구상에서 힌트를 얻어 신분 계급을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고고학자이자 하원 의원인 로버트 코튼이었다. 1611년 대계약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코튼의 제안은 거의 수정 없이 잉글랜드 국왕이자 스코틀랜드 국왕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와 추밀원에 채택되었다.

제임스 1세는 1611년 5월 22일 칙허장을 공포하고, 준남작 작위 판매를 시작했다.[28] 이 칙허장은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로의 식민을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병사 30명을 3년간 부양할 수 있는 비용(1095GBP)을 헌납한 지주들에게 적합한 명예를 주기 위해 남계 계승되는 세습 칭호인 준남작을 창설한다고 선언하며, 향후 비슷한 기여를 한 사람에게도 수여할 것을 보이면서, 가치 폭락을 억제하기 위해 200명으로 제한할 것을 정했다.[29]

또한 칙허장에 첨부된 문서에 따르면, 연간 1000GBP 이상의 지대가 있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부계 조부가 문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지만, 이러한 제한은 이내 폐지되었다.[30] 이 문서는 준남작과 다른 작위와의 관계에 대해, 다른 작위를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있어서 모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이 문서는 모인 금의 사용처에 대해, 첫째로 얼스터 식민과 군대 경비에 충당하지만, 그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다른 재원으로 충당할 수 없는 문제 대처에 쓴다고 정하고 있다.

초기 구매 희망자는 1095GBP를 재무부에 통상 3회 분할 납부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금액과 결제 방법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그럼에도 준남작 설치 후 수년간은 거의 규정대로 액수가 지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1년 3월부터 1614년 3월까지 재무부에 준남작 구매 금액으로 90885GBP가 납부되었는데, 이 자금은 아일랜드의 잉글랜드군 주둔비 약 70%를 충족했다.

칙허장으로 애매했던 준남작 서열에 대해 남작 아래인지, 남작의 영거 선 아래인지에 대해 1612년 4월 추밀원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국왕의 재가로 남작의 영거 선 아래, 기사 위로 정해졌고, 준남작에게는 얼스터 문장 「얼스터의 붉은 손」 사용이 인정되었다.

1614년 의회에서는 준남작 창설에 불안감을 느낀 남작과 기사 칭호를 가진 자들이 준남작 폐지를 요구했다. 실제로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준남작에 대한 비판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1614년 의회 실패로 의회로부터 보조금을 얻지 못해 왕고가 더욱 불안정해지자, 정부는 귀족 작위 판매를 시작했고, 유일하게 구매 가능한 위계라는 위치였던 준남작이 미지수가 되었다.

게다가 1618년 국왕 측근 조지 빌리어스(후의 버킹엄 공작)가 준남작을 기사와 동격으로 격하시키고, 1095GBP 조건도 사실상 파기하여 궁정이 임의로 수여하게 되었다.

구매 가격은 급격한 폭락을 일으켜, 1619년에는 700GBP, 1622년에는 220GBP로 구매하는 자가 있었다.[31] 1619년 이후 준남작은 급증하여, 1622년까지 198가에 달했다. 200가로 한정한다는 공약이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는 1623년 플레이터스 준남작을 창설했을 때 이것이 마지막 창설임을 선언하고, 1624년에는 1가를 추가했을 뿐, 그 후 붕어할 때까지 준남작 신설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 1세 즉위 후, 30년 전쟁 전비 증가로 왕고가 더욱 곤궁해졌기 때문에, 버킹엄 공작 주도로 준남작 최초 규정은 파기되었고, 버킹엄 공작 파에 85개 준남작위 창설권이 주어졌다. 1626년부터 1629년에 걸쳐 87가가 준남작을 구매했지만, 그 대부분은 버킹엄 공작 파 알선이었다. 이 시기에는 싼 경우 200GBP를 밑도는 경우도 있었다.

1629년 버킹엄 공작 암살 후, 찰스 1세는 준남작 창설을 엄격하게 억제하게 되었고, 1630년부터 1640년 사이에 준남작에 서위된 것은 4가뿐이다(그중 1632년부터 1639년까지는 0). 그러나 1640년 이후에는 다시 급증하여, 1641년과 1642년 사이에는 129가가 준남작에 서위되었다. 이것은 국왕과 의회 대립이 깊어져, 잉글랜드 내전으로 향하는 정치 정세 속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지주를 왕당파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찰스 1세의 고육지책이었다. 재원 확보라는 본래 목적은 이 단계에서 거의 잃어버렸다.

1619년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준남작을 설립했고, 찰스 1세는 1625년에 스코틀랜드 준남작과 노바스코샤 준남작을 만들었다. 새로운 준남작들은 각각 2000마르크를 지불하거나 2년 동안 6명 식민지 정착민을 지원해야 했다. 현재 스코틀랜드 준남작으로 잘 알려진 100개 이상 준남작위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잉글랜드 준남작 작위가 창설된 지 8년 후인 1619년 9월 30일에는 아일랜드 준남작 작위가 창설되었다.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준남작 작위를 1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30] 제임스는 아일랜드 준남작 작위 서열에 대해 남작 아들보다 낮고 기사보다 상위로 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지만, 신청자가 없어지자 1616년에는 일정 연령이 된 준남작 상속자는 기사 작위를 받는다는 새로운 특권을 인정했다.[30]

스코틀랜드 북아메리카 식민지 노바스코샤 플랜테이션을 추진하기 위해 1624년에는 스코틀랜드 준남작 작위인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가 구상되었다. 수여받기 위해서는 2년 동안 6명 이주민을 지원하거나 (혹은 그 대신 2000마르크 지불)해야 했으며, 게다가 1621년 칙허장으로 노바스코샤를 부여받았던 윌리엄 알렉산더에게 1000마르크를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다.[30] 제임스 1세는 이 구상을 실행하기 전에 사망했지만, 다음 왕 찰스 1세 아래에서 1625년 5월 28일 최초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가 창설되었다. 이 준남작 작위에 대해서는 창설 칙허장에서 15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정해져 있었다.[30] 그들 상속인은 특정 연령이 되면 기사 작위를 받아야 하며, 플랜테이션을 위해 3000마르크 이상을 지불하지 않은 자는 작위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30] 1638년 이전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에는 노바스코샤 토지(그 이전에는 프랑스인 수중에 있었다)가 부속되었지만,[27] 1638년에는 토지 부여가 중단되었다.[30] 찰스 1세 치세 후기에는 스코틀랜드와 무관한 신사에게도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가 서임되는 경우도 있었다.[27] 대부분 노바스코샤 준남작 작위는 남계 남성 상속에 한정된다.[27]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 결과로, 모든 미래 작위는 대영 준남작으로 칭해졌다. 1801년 대영 제국과 아일랜드 연합 이후, 새로운 작위는 연합 왕국 준남작으로 칭해졌다.

1612년과 1613년 왕실 영장에 따라, 특정 특권이 준남작에게 부여되었다. 첫째, 준남작과 귀족 차남 사이에는 그 어떤 사람도 서열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 준남작 장남에게 기사 작위를 받을 권리가 부여되었으며(이는 나중에 조지 4세에 의해 1827년에 폐지되었다), 셋째, 준남작은 문장에 얼스터 문장을 방패형 문장에 추가할 수 있었다: "은색 바탕에 붉은 손(또는 피 묻은 손)". 이러한 특권은 아일랜드 준남작에게도 확대되었으며, 스코틀랜드 준남작에게는 명예 증표로 노바스코샤 문장을 묘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전자는 이후 창설된 대영 제국 및 연합 왕국 모든 준남작에게 오늘날까지 적용된다.

2. 3. 현대의 준남작

1707년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자 잉글랜드 준남작위와 노바스코샤 준남작위는 더 이상 창설되지 않고, 대신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이 창설되었다. 이어서 1801년 아일랜드 왕국도 합병하여 연합 왕국이 성립되자 아일랜드 준남작과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은 더 이상 창설되지 않고, 연합왕국 준남작이 창설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준남작위를 노동자층을 세습 계급에 편입시키는 유용한 수단으로 간주했다는 설이 있다[28].

1898년 1월, 준남작 명예 협회(Honourable Society of the Baronetage)가 설치되었고, 1903년 7월에는 준남작에 관한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한 상임 조직으로 개편되었다[27]. 1910년 2월 8일 에드워드 7세는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통해 내무부에 보관되는 준남작 공식 명부(Official Roll of the Baronetage)를 창설하고,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준남작으로 취급하지 않음을 선언했다. 공식 명부는 현재 법무부에서 관리하고 있다[27].

준남작에 서임되는 자는 처음에는 지주가 많았지만, 근대 이후에는 상업, 과학, 문학,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공적을 통해서도 서임되었다[27]. 특히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상공업계 성공자도 귀족에 편입되는 경우가 늘었다. 이 때, 준남작위가 부유한 양조업자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준남작은 "비어리지(Beerage)"라고 불리기도 했다[28]. 이 무렵, 준남작위를 포함한 작위 매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28].

20세기에 들어 1958년 일대 귀족 제도가 창설되면서 준남작 서임은 감소했다. 1964년 이후에는 서임 예가 없어졌지만, 1991년 데니스 대처 (총리 마거릿 대처의 남편)가 아내를 보좌한 공적으로 (스코트니의 대처)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현재까지 이것이 준남작위의 마지막 서임이다[27].

2023년 1월 1일 기준 추정 준남작 수[17]
창설총계준남작귀족
잉글랜드 준남작1348450
아일랜드 준남작573423
노바스코샤 준남작1037330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1219031
연합왕국 준남작777671106
총계1192952240



2000년 기준으로, 승계가 휴면 상태이거나 증명되지 않은 준남작을 포함하여, 《준남작 공식 명부》에 등재된 총 1,314개의 준남작이 있었다. 이는 창설 종류별로 잉글랜드 146개, 아일랜드 63개, 스코틀랜드 119개, 그레이트브리튼 133개, 연합왕국 853개로 나뉜다.

오늘날 준남작의 총수는 약 1,204명이며, 약 1,020명만이 《준남작 공식 명부》에 등재되어 있다.[18] 일부 준남작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 또는 아무도 실제 상속자임을 증명할 수 없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00명 이상의 준남작은 현재 귀족이 소유하고 있으며, 녹스 가문과 같은 다른 가문은 내부 가족 분쟁으로 인해 그 지위가 불확실해졌다. 법무부에 따르면, 칭호를 사용하기 위해 준남작의 승계를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이름이 《공식 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공식적인 자격으로도 준남작으로 언급될 수 없다.[19]

1965년 1월 1일 기준으로 1,490개의 준남작 작위가 존재했다. 그 이후로 소멸 또는 휴지 상태로 인해 286개가 줄어들어 총 19.2% 감소했다(2017년까지). 2015년에는 약 1,236개,[20] 2017년에는 1,204개의 준남작 작위가 존재했다.

연합 왕국 준남작의 마지막 신규 창설을 받은 초대 준남작 서 데니스 대처


196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준남작 작위는 1990년 12월 7일,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이후 대처 남작 부인)의 남편인 데니스 대처 경에게 수여된 것이 유일하다. 그들의 외아들인 마크 대처 경은 2003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2대 준남작 작위를 계승했다.[21]

1965년에 휴지 상태였던 일곱 개의 준남작 작위가 이후 부활했다: 인네스 준남작(''of Coxton'') (1686), 니콜슨 준남작(Ilk 및 Lasswade) (1629), 호프 준남작(''of Kirkliston'') (1698), 세인트 존(''이후'' 세인트 존-마일드메이) 준남작(''of Farley'') (1772), 맥스웰-맥도날드 준남작(Pollok) (1682),[20] 잉글리스 준남작(''of Cramond, Edinburgh'') (1687) 및 폰 프리젠도르프 준남작(''of Hirdech, Sweden'') (1661).

3. 특징 및 관례

기사 작위와 마찬가지로 준남작은 이름 앞에 "" 칭호를 사용한다. 여성 준남작은 "데임"을, 준남작의 아내는 남편의 성씨를 사용하여 "레이디"라고 부른다. 준남작위는 자신의 권리로 소유한 여성만이 준남작 부인으로 불린다.[9]

준남작위는 일반적으로 직계 남성 상속인을 통해 상속되지만, 특별 잔여 재산권으로 창설되지 않는 한 여성이나 방계 친족에게 상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스코틀랜드 또는 노바스코샤 준남작은 문장에 노바스코샤 문장을 추가하고, "노바스코샤 출신"을 의미하는 목 뱃지를 착용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준남작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뱃지 착용을 요청했고, 조지 5세 국왕이 1929년에 모든 준남작(스코틀랜드 제외)에게 얼스터의 붉은 손을 문장 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13]

준남작(노바스코샤 준남작 제외)이 문장 배지로 사용하는 얼스터의 붉은 손(좌측 손 버전)

3. 1. 칭호 및 호칭

기사 작위와 마찬가지로 준남작은 이름 앞에 "" 칭호를 사용한다. 여성 준남작은 자신의 권리로 "데임"을 사용하며, 이 역시 이름 앞에 붙는다. 준남작의 아내는 남편의 (결혼) 성씨만을 사용하여 "레이디"라고 불린다. 이는 오랫동안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준남작의 아내는 준남작 부인이 아니며, 준남작위를 자신의 권리로 소유한 여성만이 그렇게 불린다.[9]

준남작은 "조셉 경"(이름 사용)과 같이 호칭되며, 지칭된다. 다른 칭호가 없는 준남작의 경우, 봉투에 적절한 표기는 "조셉 블로그스 경, Bt." 또는 "조셉 블로그스 경, Bart."이다. 공식적인 편지는 "조셉 경께"라는 인사말로 시작한다.

준남작의 부인은 결혼한 성으로 "블로그스 부인"으로 지칭되고 호칭되며, 인사말은 "블로그스 부인께"가 된다. 그녀의 이름은 동일한 칭호를 가진 두 사람을 구별해야 할 때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준남작이 사망하고 칭호가 그의 아들에게 넘어간 경우, 미망인(새로운 준남작의 어머니)은 그가 결혼하지 않은 동안 "블로그스 부인"으로 남아있지만, 그가 결혼했거나 결혼하게 되면 그의 아내가 "블로그스 부인"이 되고 그의 어머니는 "앨리스, 블로그스 부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또는 어머니는 "과부 블로그스 부인"으로 알려지기를 선호할 수 있다. 이전 부인 또한 현직 준남작의 현 부인과 구별하기 위해 "앨리스, 블로그스 부인"이 될 것이다. 그녀는 공작, 후작 및 백작의 딸들을 위해 예약된 스타일인 "앨리스 블로그스 부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현재 가터 훈작 부인과 엉겅퀴 훈작 부인은 더 높은 스타일이 없다).

준남작의 자녀들은 어떤 예우 칭호도 사용할 자격이 없다.

여성 준남작에게는, 예를 들어 봉투에 "데이지 스미스 여사, 여성 준남작"이라고 써야 한다. 편지 머리에는 "데어 데이지 여사"라고 쓰고, 그녀를 지칭할 때는 "데이지 여사" 또는 "데이지 스미스 여사"라고 한다(절대로 "스미스 여사"라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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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준남작의 경칭은 서(Sir)이며, "서"는 이름 또는 이름 + 성과 함께 붙이며, 성만으로는 붙이지 않는다. 총리를 역임한 제2대 준남작 서 로버트 필의 경우 "서 로버트" 또는 "서 로버트 필"이라고 불리지만 "서 필"이라고는 불리지 않는다.

표기 시에는 이름 뒤에 "Bart." 또는 "Bt."를 붙인다. 예를 들어 "Sir Robert Peel, Bt."와 같이 표기된다.

남성 준남작의 배우자의 경칭은 레이디 뒤에 성만 붙여 사용한다(예: 레이디 필). 단, 2명 이상이 같은 경칭을 사용할 경우에는 이름을 붙인다(예: 레이디 앤 필과 레이디 로즈 필).

여준남작의 경칭은 데임 (Dame)이며, "데임"은 이름 또는 이름+성씨와 함께 사용되며, 성씨만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데이지 덤바 준남작의 경우, "데임 데이지" 또는 "데임 데이지 덤바"라고 불리지만 "데임 덤바"라고 불리지 않는다.

표기 시에는 이름 뒤에 "Btss"를 붙인다. 예를 들어 데이지 덤바 준남작의 경우, "Dame Daisy Dumber Btss"와 같이 표기된다.

여준남작의 배우자에게는 경칭이 사용되지 않는다.

역사상 단 4명의 여성 준남작이 있었다.

이름출생-사망수여일비고
메리 볼스 여사1579–16621635년유일하게 여성 준남작으로 서임된 인물(노바스코샤)[9]
엘리너 데일리엘 여사1895–19721685년더 빈스 영지는 아들인 노동당 정치인 탐 데일리엘에게 상속(작위 미사용)
데이지 던바 여사1906–19971706년[10]
앤 크리스찬 맥스웰 맥도날드 여사1906–20111707년2005년 리옹 궁정에서 11대 소유주로 인정, 1956년 부친 작위 승계[11]



1976년, 문장관 리옹 왕은 모든 스코틀랜드 준남작의 특허를 검토하지 않고는 이 4명의 작위 창설만이 여성 계승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지 확인할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다.

현재 생존해 있는 여성 준남작은 없다.[12]

3. 2. 상속

기사 작위와 달리 준남작위는 세습된다.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준남작의 장남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준남작위를 물려받지만, 그의 이름이 공식 명부에 등재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9] 특별 잔여 조항과 함께 특허장으로 부여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준남작위는 남성 혈통을 통해 상속된다.[9]

준남작위는 일반적으로 직계 남성 상속인을 통해 상속되며, 특별 잔여 재산권으로 창설되지 않는 한 여성이나 방계 친족에게 상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잔여 재산권 유형해당 준남작위 (년도)
영구적으로 남성 상속인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콜스톤의 브라운 준남작위 (1686), 앨더스턴의 헤이 준남작위 (1703) 등
수여자의 딸들의 아들, 그리고 그들의 남성 상속인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사우스웰의 히킹 (나중에는 노스) 준남작위 (1920) 등
수여자의 딸의 아들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케틀소프의 앰코츠 준남작위 (1796) 등
수여자의 사위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해군의 미들턴 (나중에는 노엘) 준남작위 (1781), 런던의 리치 준남작위 (1676) 등
수여자의 형제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킬루아 성의 채프먼 준남작위 (1782), 패트셜의 피곳 준남작위 (1764), 턱스포드와 웰링웰스의 화이트 준남작위 (1802) 등
수여자의 남성 자손이 없을 경우, 수여자의 형제와 수여자의 아버지의 사촌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 그리고 그들의 남성 상속인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로키비 공원의 로빈슨 준남작위 (1730)
수여자를 이어 재산을 상속하는 테일지에게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빈스의 댈리엘 준남작위 (1685)
수여자의 장남을 특별히 제외하는 잔여 재산권이 있는 경우래들리의 스톤하우스 준남작위 (1628)


3. 3. 문장 및 배지

기사 작위와 마찬가지로 준남작은 이름 앞에 "" 칭호를 사용한다. 여성 준남작은 "데임"을 사용하며, 이 역시 이름 앞에 붙는다. 준남작의 아내는 남편의 성씨를 사용하여 "레이디"라고 불린다. 준남작위는 자신의 권리로 소유한 여성만이 준남작 부인으로 불린다.

스코틀랜드 또는 노바스코샤 준남작은 문장에 노바스코샤의 문장을 추가하고, "노바스코샤 출신"을 의미하는 목 뱃지를 착용할 특권을 가졌다. 이 뱃지는 방패 은색에 성 안드레 십자 청색이 있고, 그 안에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작은 방패가 있으며, 방패 위에는 황실 왕관이 있고, "Fax Mentis Honestae Gloria"라는 모토로 둘러싸여 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준남작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뱃지 착용을 요청했고, 조지 5세 국왕이 1929년에 모든 준남작(스코틀랜드 제외)에게 뱃지 착용을 허가했다. 얼스터 왕의 문장인 얼스터의 붉은 손(좌수 버전)을 문장 배지로 사용할 수 있다.[13] 이 배지는 ''은색 바탕에 손목에서 잘린 붉은 손이 똑바로 뻗어 있다''라고 설명된다.[14] 1929년 이후 이러한 준남작은 문장 방패 아래 리본으로 매달아 얼스터의 붉은 손을 배지 자체로 사용할 수도 있다.[16]

노바스코샤 준남작은 다른 준남작과는 달리 준남작 배지(얼스터)를 사용하지 않고, 노바스코샤 문장을 보여주는 자체 배지를 사용한다. 1929년 이전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준남작은 문장의 방패 아래 기사단 리본에 매달아 이 배지만을 표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잉글랜드 준남작, 아일랜드 준남작,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 연합 왕국 준남작은 "얼스터의 붉은 손"을 인에스커션으로 문장에 넣는 것이 허용되었다.[27] 노바스코샤 준남작은 "얼스터의 붉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Coat of arms of Nova Scotia|노바스코샤 문장영어 (Argent|아젠트영어, 성 안드레 십자, Royal Arms of Scotland|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영어의 인에스커션)을 사용할 수 있다.[27] 노바스코샤 준남작 이외의 준남작에게는 1929년까지 목에 걸어 패용하는 휘장이 주어졌다. 이 휘장은 "얼스터의 붉은 손" 문장과 왕관, 그 주위를 금박 소용돌이 장식으로 테두리한 디자인이다. 소용돌이 장식 부분은 잉글랜드 준남작은 장미, 아일랜드 준남작은 샤무록,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은 장미와 엉겅퀴, 연합 왕국 준남작위는 장미와 엉겅퀴와 샤무록이 그려져 있다.[27] 이 휘장은 오렌지 또는 노란색 (가장자리는 감색) 리본으로 매달린다.[27]

연합 왕국 준남작의 휘장. "얼스터의 붉은 손"이 그려져 있다.

3. 4. 준남작 상임 회의와 공식 명부

기사 작위와 마찬가지로 준남작은 이름 앞에 "" 칭호를 사용한다. 여성 준남작은 자신의 권리로 "데임"을 사용하며, 이 역시 이름 앞에 붙는다. 준남작의 아내는 남편의 (결혼) 성씨만을 사용하여 "레이디"라고 불린다. 이는 오랫동안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준남작의 아내는 준남작 부인이 아니며, 준남작위를 자신의 권리로 소유한 여성만이 그렇게 불린다.

기사 작위와 달리 - 수여 대상자에게만 적용 - 준남작위는 세습된다.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준남작의 장남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준남작위를 물려받지만, 그의 이름이 공식 명부에 등재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특별 잔여 조항과 함께 특허장으로 부여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준남작위는 남성 혈통을 통해 상속된다.

현존하는 준남작의 전체 목록은 ''버크의 귀족 및 준남작''에 수록되어 있으며, 멸족된 준남작의 기록도 함께 게재되어 있다.

준남작위는 귀족 작위가 아니므로, 준남작은 기사 및 귀족 가문의 하위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평민이며, 왕국의 귀족이 아니다. 원래 모든 최초의 준남작은 기사 작위를 받았다. 준남작은 또한 장남이 21세가 되는 날 기사 작위를 수여받을 권리 등 다른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지 4세 통치 초기에 이러한 권리는 선왕의 행위에 군주가 반드시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추밀원 명령에 의해 약화되었다. 문장이 자동으로 지지자를 가질 자격은 없었지만, 19세기 전반기에 준남작은 작위 소유자가 왕관 훈장의 기사단 대십자장이기도 한 경우 이를 세습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또는 노바스코샤 준남작은 문장에 노바스코샤의 문장을 추가하고, "노바스코샤 출신"을 의미하는 목 뱃지를 착용할 특권을 가졌다. 이 뱃지는 오렌지색과 황갈색 리본으로 매달려 있으며, 방패 은색에 성 안드레 십자 청색이 있고, 그 안에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작은 방패가 있으며, 방패 위에는 황실 왕관이 있고, "Fax Mentis Honestae Gloria"라는 모토로 둘러싸여 있다. 이 뱃지는 방패 아래 리본으로 매달린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준남작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뱃지를 착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17세기에 뱃지가 착용되었지만, 조지 5세 국왕이 모든 준남작(스코틀랜드 제외)에게 뱃지 착용을 허가한 것은 1929년이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aronet http://www.collinsdi[...] Collins Dictionary 2014-09-23
[2] 웹사이트 Baronetess http://www.dictionar[...] Dictionary.com Unabridged 2016-08-15
[3] OED baronetess
[4] 웹사이트 Baronetess http://www.collinsdi[...] Collins Dictionary 2014-09-23
[5] 서적 The Book of the Court Henry G. Bohn, York Street, Covent Garden 1844
[6] 문서 Stubbs, Vol. II, Part IV, p 303
[7] 서적 The Honourable the Irish Society and the Plantation of Ulster, 1608-2000: The City of London and the Colonisation of County Londonderry in the Province of Ulster in Ireland : a History and Critique Phillimore 2000
[8] 웹사이트 Debrett's Correct Form. Addressing the family of a Baronet. http://www.debretts.[...]
[9] 웹사이트 Cokayne's Complete Baronetage https://archive.org/[...]
[10] 웹사이트 Leigh Rayment's baronetage: Draper to Dymoke https://web.archive.[...]
[11] 문서 (See page B 599 of the Baronetage section of the latest edition of Debrett.)
[12] 웹사이트 Official Roll of the Baronetage (as at 3 March 2020)» The Standing Council of the Baronetage - https://www.baroneta[...]
[13] 문서 Collins, 1741, p.287
[14] 서적 The English Baronetage: Containing a Genealogical and Historical Account of all the English Baronets now Existing https://books.google[...] London 1741
[15] 문서 Collins, 1741, vol.4, p.287
[16] 서적 Debrett's Peerage 1968
[17] 웹사이트 Baronets of England, Scotland, Ireland,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Kingdom https://www.baroneta[...] The Standing Council of the Baronetage 2023-01-02
[18] 서적 The Baronetage, 2nd edition
[19] 웹사이트 Guidance Notes on Succession to a Baronetcy other than of Nova Scotia https://www.baroneta[...] Ministry of Justice (UK) 2023-01
[20] 웹사이트 Baronetage decline since 1965 https://groups.googl[...] 2015-09-21
[21] 웹사이트 The Baronetage http://www.debretts.[...] Debretts 2013-04-13
[22] 문서 Cokayne, vol ii, pp277-280
[23] 문서 Cokayne, vol ii, p 280
[24] 문서 Cokayne, vol i, pp223-224
[25] 문서 Cokayne, vol ii, p 224
[26] 웹사이트 バロネット
[27] 웹사이트 The Baronetage http://www.cracrofts[...] 2019-12-24
[28] 서적 【図説】紋章学事典 創元社 2019-09-30
[29] 서적 小川賢治
[30] 웹사이트 Baronet https://en.wikisourc[...]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 2019-12-24
[31] 서적 松村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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