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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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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의 아들로, 1600년에 태어났다. 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된 아버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1625년 왕위에 올랐다. 찰스 1세는 의회와의 갈등, 특히 세금 징수 문제로 인해 11년간 의회를 열지 않는 전제 정치를 펼쳤다. 이후 스코틀랜드와의 주교 전쟁으로 의회를 소집했으나, 아일랜드 반란과 대립으로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1649년 처형되었으며, 그의 사후 왕당파는 그를 순교자로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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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기본 정보
녹색 예복을 입은 찰스. 왕관 보석이 그의 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찰스 1세
이름찰스 1세
원어 이름Charles I
직책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재위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대관식1626년 2월 2일 (잉글랜드)
대관식1633년 6월 18일 (스코틀랜드)
이전 군주제임스 1세
후임 군주찰스 2세 (법적으로)
잉글랜드 국가평의회 (사실상)
배우자헨리에타 마리아 (1625년 결혼)
종교개신교
왕가스튜어트 가문
아버지제임스 1세/6세
어머니
출생일1600년 11월 19일
출생지스코틀랜드 왕국 던펌린 던펌린 궁전
사망일1649년 1월 30일
사망지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민스터 화이트홀 궁전
사망 원인처형 (참수형)
매장일1649년 2월 9일
매장지잉글랜드 왕국 윈저 세인트 조지 예배당
서명
자녀
자녀찰스 2세
메리 공주
제임스 2세
엘리자베스

헨리, 글로스터 공작
앙리에타, 오를레앙 공작 부인

2. 유년기

1600년 11월 19일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던펌린 궁전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덴마크의 앤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21] 12월 23일 에든버러홀리루드 궁전 왕실예배당에서 개신교 의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 제임스 6세는 이를 기념하여 새로 태어난 찰스를 올버니 공작으로 삼았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었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4월 제임스 1세가, 6월에는 가족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하였지만, 허약하였던 찰스는 여행 중에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임스의 총신인 던펌린 백작 알렉산더 세튼을 후견인으로 삼아 스코틀랜드에 남겨졌다.

1604년 세 살이 된 찰스가 홀로 던펌린궁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잉글랜드로 떠날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고 7월 중순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였다.[222] 찰스 1세의 보육은 몬머스 백작 로버트 캐리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트레버니언에게 맡겨졌다. 찰스 1세는 성장이 더뎠고 평생 말을 더듬었다.

1605년 1월 찰스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 대한 관례적 작위인 요크 공작에 봉해졌고 바스 기사 수훈이 주어졌다.[223] 찰스 1세의 훈육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토머스 머레이가 맡았다. 머레이는 찰스 1세에게 당시 인문주의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었던 고전, 언어, 수학 및 종교의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쳤다. 1611년 가터 기사의 수훈이 더해졌다.

자라나면서 찰스 1세는 신체적 허약함을 극복하였다. 오늘날의 의학으로 보면 찰스 1세는 구루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마술과 총격술, 검술 등에 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형 헨리 프레더릭에 비해 키나 강인함 모두 미치지 못하였고 찰스 1세는 형을 따라가려고 애썼다.[224] 1612년 11월 초 헨리 프레더릭은 18세의 나이에 장티프스로 의심되는 질병을 앓다 사망하면서 찰스 1세가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2. 1. 왕세자 시절

1600년 11월 19일 파이프의 던펌린궁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덴마크의 앤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21] 12월 23일 에든버러홀리루드 궁전 왕실예배당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신교 의례에 따라 세례받았다. 제임스 6세는 이를 기념하여 새로 태어난 찰스를 올버니 공작으로 삼았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었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4월에는 제임스 1세가, 6월에는 가족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하였지만, 허약하였던 찰스는 여행 중에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임스의 총신인 던펌린 백작 알렉산더 세튼을 후견인으로 삼아 스코틀랜드에 남겨졌다.

1604년 세 살이 된 찰스가 홀로 던펌린궁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잉글랜드로 떠날 수 있겠다고 판단되었고 7월 중순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하였다.[222] 찰스 1세의 보육은 몬머스 백작 로버트 캐리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트레버니언에게 맡겨졌다. 찰스 1세는 성장이 더뎠고 평생 말을 더듬었다.

1605년 1월 찰스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 대한 관례적 작위인 요크 공작에 봉해졌고 바스 기사 수훈이 주어졌다.[223] 찰스 1세의 훈육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토머스 머레이가 맡았다. 머레이는 찰스 1세에게 당시 인문주의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었던 고전, 언어, 수학 및 종교의 일반적인 과목을 가르쳤다. 1611년 가터 기사의 수훈이 더해졌다.

자라나면서 찰스 1세는 신체적 허약함을 극복하였다. 오늘날의 의학으로 보면 찰스 1세는 구루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마술과 총격술, 검술 등에 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형 헨리 프레더릭에 비해 키나 강인함 모두 미치지 못하였고 찰스 1세는 형을 따라가려고 애썼다.[224] 1612년 11월 초 헨리 프레더릭은 18세의 나이에 장티프스로 의심되는 질병을 앓다 사망하였다. 장남이 사망하자 차남이었던 찰스 1세가 왕위계승권자가 되어 형이 지니고 있었던 웨일스공, 콘월 공작, 로스시 공작, 체스터 백작 등의 여러 작위를 계승하였다.

1613년 찰스 1세의 누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하이델베르크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혼인하여 떠났다. 1617년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이듬해 보헤미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1619년 개신교 제후동맹이 주도하던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축출하고 새 국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종교를 명분으로 한 둘 사이의 갈등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비화하였다.[225] 잉글랜드 의회를 비롯한 잉글랜드 사회는 이를 두 세계관의 정면 충돌로 인식하였다.[226] 전쟁 초기 전황은 개신교군에 유리하였으나 1620년 백산 전투에서 가톨릭군이 승리하자 전쟁은 장기화 되어 사태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팔츠 선제후국은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군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22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왕세자 찰스 1세와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아나의 혼사를 추진하여 이를 장기화 된 전쟁의 평화 조약을 위한 구실로 삼고자 하였다.[228]

웨일스 공 시절의 찰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이러한 계획은 궁정과 잉글랜드 대중들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다. 1621년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항하는 해군의 참전과 잉글랜드 내의 성공회 기피에 대한 강제 개종, 그리고 왕세자의 결혼 대상은 개신교도로 할 것을 요청하였다.[229] 의회는 당시 상원 의장 겸 대법관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을 국왕의 동의 없이 부패 혐의로 탄핵하면서 사권박탈법을 적용하여 모든 권리를 몰수하였는데, 이는 훗날 의회가 같은 방법으로 찰스 1세의 지지자인 버킹엄 공작, 윌리엄 로드 대주교, 스트라포드 백작 등을 축출하는 선례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왕세자의 결혼에 대해 하원이 의견을 내는 것을 군주의 특권에 대한 침해라고 보아 하원은 내정에 대해서만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맞서 하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서민의 방벽으로서 스페인과 개신교가 전쟁을 벌이는 이 시기에 웨일스 공의 결혼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찰스 1세 역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결혼을 하원이 거론하는 것을 특권 침해로 불쾌해 하였다. 결국 제임스 1세는 1622년 군주에 대해 무례하다는 이유로 의회를 해산하였다.[231]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는 제임스 1세의 총신으로,[232] 찰스 1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1623년 버킹엄 공작과 찰스는 오랫동안 미뤄지던 스페인 여정에 함께하였다.[233] 그러나 둘의 여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234] 왕녀는 찰스 1세를 그저 이교도 가운데 한 명 정도로 대했고 스페인 왕실의 첫 요구는 가톨릭 개종이었다. 그에 덧붙여 스페인은 잉글랜드 형법의 가톨릭 박해 조항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잉글랜드 의회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었고, 왕녀는 결혼 후에도 잉글랜드가 실제로 약속을 지키는 지 확인하기 위해 1년 간 스페인 왕궁에 머물것이라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굴욕에 가까운 결혼 조건을 거부하고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런던으로 돌아오자 대중은 이를 환영하였다.[235] 수모를 당한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과 함께 제임스 1세에게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236]

개신교도 고문들의 지지를 받으며 제임스 1세는 전쟁 자금의 확보를 위해 의회를 소집하였다. 재무장관 라이오넬 크랜필드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반대하자 찰스와 버킹엄 공작은 베이컨의 탄핵 때 사용하였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를 축출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제임스 1세는 버킹엄 공작에게 이 일은 향후 의회가 국왕을 무시하는 선례를 만드는 것이라며 어리석다 비난하였는데, 이는 훗날을 예견한 경고가 되었다.[237] 잉글랜드는 가톨릭교도였으나 팔츠 선제후의 편에 있던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를 지원하였지만 그의 군대는 네덜란드 해안을 넘지 못하고 고립된 채 보급품이 고갈되었다.[238]

1624년 제임스 1세는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사실상 잉글랜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1625년 3월 제임스 1세가 사망하자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613년 찰스의 누이인 엘리자베스(보헤미아의 왕비)가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여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다. 1617년 가톨릭 신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보헤미아 반란) 가톨릭 총독들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 1619년 8월, 보헤미아 의회는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이끌던 프리드리히를 국왕으로 선출했고, 페르디난트는 1619년 황제 선거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가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왕관을 받아들인 것은 30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될 혼란의 시작을 알렸다. 처음에는 보헤미아에 국한되었던 갈등은 더 넓은 유럽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잉글랜드 의회와 국민들은 이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대립된 대륙 투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5] 1620년 프리드리히 왕은 프라하 근처 백산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의 세습지인 선제후 팔츠는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온 합스부르크 군의 침략(팔츠 원정)을 받았다.[6]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찰스 왕자와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마리아 안나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었고, 스페인과의 결혼(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을 유럽 평화 달성을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다.[7]

1623년 2월 찰스는 아버지의 총신이었던 버킹엄 공작의 권유로, 아버지의 허락 없이 스스로 스페인 여행을 떠나, 3월에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찰스와 버킹엄 공작 두 사람은 펠리페 4세(펠리페 3세의 아들로 마리아의 형)의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과 협상했다. 그러나 펠리페 4세는 여동생을 프로테스탄트 영국에 시집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올리바레스 백작은 협상을 질질 끌어 영국을 전쟁의 범위 밖에 두거나, 혹은 결혼으로 영국 내 가톨릭 신자에 대한 관용을 얻어내려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헛되이 시간을 보낸 끝에, 6월에 가톨릭에 대한 관용과 태어날 아이들을 가톨릭으로 키운다는 조건을 비밀리에 승낙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 팔츠를 회복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겨우 알아채고 분개하여 협상을 결렬시키고 9월에 귀국했다. 외교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두 사람의 외교는 반년이 허비되었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일 지경에 이르러 실패로 끝났다.[193][194][195]

1624년 2월에 개회된 의회의 호의적인 태도에 힘입어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위해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그래서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여동생인 헨리에타 마리아와 찰스의 결혼이 추진되었지만, 외교의 아마추어 버킹엄 공작은 스페인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와의 협상에서 양보를 강요당하고, 아이들을 가톨릭으로 교육하고, 가톨릭 신자에 대한 관용 등 스페인과 같은 조건을 승낙했다. 동맹은 성립했지만 영국의 어중간한 대응으로 프랑스가 영국군 상륙을 금지하고, 군대는 전염병으로 괴멸 직전에 이르렀고 동맹의 전망은 일찍부터 불투명해졌으며, 영국 국민은 가톨릭 관용을 경계하여 왕가와 국민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196][197][198]

3. 재위 초기

1628년의 찰스 1세


1613년 찰스 1세의 누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하이델베르크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혼인하여 떠났다. 이후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잉글랜드 사회는 이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두 세계관의 정면 충돌로 인식하였다.[22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왕세자 찰스 1세를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아나와 혼인시키려 하였으나, 궁정과 잉글랜드 대중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다.

버킹엄 공작은 제임스 1세의 총신으로[232] 찰스 1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623년 버킹엄 공작과 찰스는 스페인 왕녀와의 혼사를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으나, 이 여정은 실패로 끝났다.[234] 왕녀는 찰스 1세를 이교도로 여겼고, 스페인 왕실은 찰스 1세의 가톨릭 개종을 요구했다.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런던으로 돌아오자 대중은 이를 환영하였다.[235]

1624년 제임스 1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1625년 3월 사망하자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찰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 왕위에 올랐다.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에 실패한 찰스 1세는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를 왕비로 맞이하였다.[239] 찰스 1세는 1625년 6월 13일 캔터베리에서 앙리에트 마리를 만났다.

찰스 1세는 칼뱅주의를 반대하는 신학자 리처드 몬터그를 지지하여 대중의 의심을 샀다. 몬터그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을 비판하고 자유의지에 의한 운명 변화를 지지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찰스 1세는 몬터그를 왕실 예배당 담임 성직자로 임명하여 청교도들의 주장에 빌미를 제공하였다.

1625년 소집된 의회에 찰스 1세는 팔츠 선제후국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요구하였으나 의회는 14만 파운드 만을 전쟁 예산으로 책정하였다.[246] 의회는 헨리 6세 이후 국왕의 권한으로 인정되던 해운조세권에 대해[247] 의결을 미루었다.[248] 찰스 1세는 의회 동의 없이 해운조세권을 행사하였다.

스페인의 신대륙 함대에 대한 사략이 실패하자 의회는 버킹엄 공작에 대한 탄핵 절차에 착수하였다.[250]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하고 탄핵을 추진하던 하원 의원 둘을 체포하였으나, 하원의 항의로 1주일 뒤 석방하였다.[251] 1626년 6월 12일 하원은 버킹엄 공작의 탄핵을 결의하였지만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였다.[252]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의 신혼 생활은 과부급여[253] 책정, 가사 고용인 지정, 종교적 관습 등으로 갈등을 빚었고, 1626년 8월 찰스 1세가 프랑스에서 온 앙리에트 마리의 수행원 전원을 추방하며 갈등이 극에 달했다.[254]

찰스 1세는 "강제 채권"을 통해 전쟁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다. 1627년 11월 다섯 기사 사건이 일어나 강제 채권을 거부할 경우 재판 없이 투옥될 수 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255] 1628년 3월 소집된 의회는 권리청원을 통해 의회 동의 없는 세금 징수, 민간인에 대한 군사법 적용, 정당한 절차 없는 투옥이나 가택 연금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6월 7일 권리청원에 동의하였으나[256] 한 달이 못가 다시 자신의 독자적인 관세 취수권을 주장하였다.[257]

1628년 8월 23일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자[258] 찰스 1세는 깊은 우울감을 보였다.[259] 버킹엄 공작의 죽음으로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전쟁은 사실상 종료되었으나 국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261] 앙리에트 마리와의 관계가 개선되자 1628년 11월 의회와의 오랜 갈등도 일단락짓게 되었다.[262]

반 다이크가 그린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 1632년

3. 1. 의회와의 갈등



1621년 소집된 잉글랜드 의회는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항하는 해군의 참전, 잉글랜드 내 성공회 기피자에 대한 강제 개종, 왕세자의 개신교도와의 결혼을 요청하였다.[229] 당시 상원 의장 겸 대법관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을 부패 혐의로 탄핵하면서 사권박탈법을 적용하여 모든 권리를 몰수하였는데, 이는 훗날 의회가 같은 방법으로 찰스 1세의 지지자인 버킹엄 공작, 윌리엄 로드 대주교, 스트라포드 백작 등을 축출하는 선례가 되었다.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찰스 1세의 초상화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와 같이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의회와 대립했다. 제임스 1세는 왕세자의 결혼에 대해 하원이 의견을 내는 것을 군주의 특권에 대한 침해라고 보아 하원은 내정에 대해서만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맞서 하원 의원들은 자신들이 서민[230]의 방벽으로서 스페인과 개신교가 전쟁을 벌이는 이 시기에 웨일스 공의 결혼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찰스 1세 역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결혼을 하원이 거론하는 것을 특권 침해로 불쾌해 하였다. 결국 제임스 1세는 1622년 군주에 대해 무례하다는 이유로 의회를 해산하였다.[231]

1625년 3월, 아버지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 되었다. 버킹엄 공작의 보좌를 받아 6월에는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가톨릭 신자를 왕비로 맞이한 것은 반가톨릭파의 반감을 샀다.[199] 버킹엄 공작에 대해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한 열의가 식은 의회가 비난을 시작했고, 같은 달 열린 의회는 전쟁 지원금을 승인했지만 추가 지원은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 국교회가 따르는 칼뱅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한 것도 의회의 비판을 높이는 원인이 되어,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보호하기 위해 8월에 의회를 해산했다.

1626년 2월에 소집한 의회에서 버킹엄 공작은 전 의회부터 이어진 무분별한 외교와 권력 남용으로 비난을 받았다. 과거 버킹엄 공작의 부하였던 존 엘리엇이 그에 대한 부정부패, 편애, 외교 실패를 열거하며 탄핵했지만,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비호하고 엘리엇을 투옥하여 의회 해산을 명령했다.

1628년 3월,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의 요청으로 특별세를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반 버킹엄 공작으로 굳어진 의회, 특히 엘리엇과 에드워드 코크 등 지도층으로부터 "권리 청원"이 제출되어 징세에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대해 찰스 1세는 일단 청원에 서명했지만, 여전히 버킹엄 공작을 비판하는 의회로부터 측근을 보호하기 위해 6월에 의회를 정회시켰다. 이듬해 1629년 1월에 의회는 재개되었지만, 3월에 의회를 해산하고 엘리엇을 다시 투옥하여 1632년에 사망할 때까지 감금했다. 그러나 그 사이 버킹엄 공작은 1628년 8월에 원한으로 암살당하여 찰스 1세는 측근을 잃었다.[203]

4.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의 처형


찰스 1세는 의회에 대항하기 위해 1641년 8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지만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찰스 1세는 이듬해 1642년 1월 4일, 병사를 이끌고 존 핌, 존 햄든, 아서 헤이즐리지, 덴질 홀리스, 윌리엄 스트로드 등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의회파와 왕당파의 대립이 결정적이 되었다. 찰스 1세는 의회가 요구한 민병 조례와 19개조 제안을 대권 제한으로 보고 거부했다. 1642년 8월 22일, 찰스 1세는 노팅엄에서 왕기를 게양하여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다.[207]

햄프턴 코트 궁전에 유폐되었던 찰스 1세는 1647년 11월 와이트 섬으로 탈출하여, 해밀턴 공 등 스코틀랜드 왕당파와 화해 협정을 맺고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1648년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해밀턴 공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올리버 크롬웰의 의회군에 대패하고 해밀턴 공이 포로로 잡히면서 제2차 내전도 패배로 끝났다(해밀턴 공은 이후 처형됨). 11월 찰스 1세는 다시 의회군에 항복했다.

한편, 의회파는 전쟁 종결을 둘러싸고 국왕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장로파와 완전 항전을 주장하는 독립파가 대립했다. 12월 6일 프라이드의 추방으로 장로파가 의회에서 추방되고, 독립파가 남은 잔부 의회가 찰스 1세 처형 재판을 진행했다.[216]

1649년 1월 27일, 재판에 의해 찰스 1세의 처형이 선고되었다. 1월 30일, 화이트홀 궁전의 뱅케팅 하우스 앞에서 공개 처형되어 참수되었다.[217]

4. 1. 단기의회와 장기의회

1628년 6월 정회되었던 의회는 1629년 1월 재개되었고, 찰스 1세는 자신의 해운조세권 강행을 옹호하였다.[266] 그러나 하원은 해운조세권에 따른 세금을 내지 않을 경우 선박과 화물이 몰수되는 것을 근거로 반대하였고, 권리청원이 명시하는 의회의 동의 없는 세금 부과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1629년 3월 2일 찰스 1세가 다시 의회를 해산시키자 하원 의장 존 핀치는 가톨릭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해운조세권 강행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낭독하였고, 하원 의원들은 이를 열렬히 지지하였다.[266] 찰스 1세는 존 엘리엇을 비롯한 9명의 의원을 투옥하였고,[267] 하원은 이를 언론의 자유를 위한 순교로 받아들이며[268] 항의하였다.

이후 찰스 1세는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고 통치하였다. 찰스 1세의 전제통치는 대외 관계의 안정이 필수적이었고,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스페인과 밀약을 통해 화평을 맺고자 하였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어업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고, 찰스 1세는 자신의 조카인 카를 루트비히팔츠 선제후국 탈환을 저버리고 스페인과의 밀약을 우선시 하였다.[249] 11년의 전제정치 기간 동안[269] 찰스 1세는 세금 강제 징수와 재판없는 투옥을 이어갔다. 그러나 세금 신설과 인상 등은 관습적으로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였고 조세저항이 거셌기 때문에 찰스 1세의 전제통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639년, 스코틀랜드 귀족 계층이 국민 동맹을 결성하여 주교 전쟁이 발생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출병했지만 자군이 불리했기 때문에 측근인 제임스 해밀턴의 공작으로 일단 휴전했다(베릭 조약). 이후 반란 진압을 위한 전비를 얻기 위해 1640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지만, 회의는 국왕 비판의 장이 되었다. 이를 단기 의회라 한다. 4월의 단기 의회에서는 존 핌을 선두로 전제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에 5월에 해산되었다. 전비는 얻지 못했고, 스코틀랜드는 국민 동맹이 주도권을 쥐고, 8월의 뉴번 전투에서 왕군이 패배했다. 찰스 1세는 동맹파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리폰 조약). 화해 협정 체결까지 북잉글랜드에 주둔하는 스코틀랜드 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재정난 때문에 11월에 장기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205]

찰스 1세는 1641년 8월에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동맹파의 간부인 알렉산더 레즐리와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을 리븐 백작, 아가일 후작에 서작하고, 제임스 그레이엄을 석방시키고,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인정하는 등의 양보로 동맹을 얻으려고 했지만, 아가일 후작은 적대적인 태도를 계속했기 때문에 실패했다.[206]

장기 의회에서는 핌이 전제 정치 비난을 계속하고, 국왕의 대권을 제한하기 위해 개혁 법안을 입법화했다. 통세, 파운드세, 선박세, 별실법정, 고등종무관재판소 등이 폐지되고 왕권은 제한을 받게 되었으며, 스트래퍼드 백작과 윌리엄 로드도 의회에 책임을 추궁당해 탄핵·투옥·처형되었다(스트래퍼드 백작은 1641년 5월, 로드는 1645년 1월).

4. 2. 아일랜드 반란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나 아일랜드 가톨릭 동맹(Irish Catholic Confederacy)이 결성되었다. 잉글랜드가 정정 불안에 휩싸이는 가운데, 11월 22일 의회의 대간원(Grand Remonstrance)(대항의문)이 가결되었다.[207]

5. 재판과 처형

화이트홀의 연회장 앞에서 찰스 1세의 참수를 묘사한 당시 독일 판화


찰스 1세의 처형은 1649년 1월 30일 화요일로 예정되었다. 의회파의 통제하에 영국에 남아 있던 그의 두 자녀, 엘리자베스와 글로스터 공작 헨리는 1월 29일에 그를 방문하여 눈물겨운 작별 인사를 했다.[152] 다음날 아침, 찰스 1세는 추위 때문에 떨리는 모습이 마치 두려움으로 인한 것으로 오해될까 봐 두 겹의 셔츠를 요구했다.[153][154]

그는 감금되어 있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화이트홀 궁전으로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고, 거기서 연회장 앞에 처형대가 설치되었다.[155] 찰스 1세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많은 대열에 의해 관중들과 분리되었고, 그의 마지막 연설은 처형대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만 들렸다.[156] 그는 자신의 운명을 충실한 신하 스트래퍼드의 처형을 막지 못한 자신의 실패 탓으로 돌렸다. "내가 실행하도록 허용한 부당한 판결이 이제 나에게 가해진 부당한 판결로 응징받고 있습니다."[157] 그는 어느 누구보다 백성의 자유를 원했지만, "그러나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정부를 갖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하와 군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권신수설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158] 그는 계속해서 "저는 부패할 수 있는 왕관에서 부패할 수 없는 왕관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방해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59]

오후 2시경,[160] 찰스 1세는 기도를 마친 후 단두대에 머리를 얹고 손을 뻗어 사형 집행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단칼에 참수되었다.[161] 목격자인 필립 헨리에 따르면, "전에 들어본 적도 없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신음 소리가 모인 군중으로부터 터져 나왔고, 그중 일부는 기념품으로 왕의 피에 손수건을 적셨다.[162]

사형 집행인은 가면을 쓰고 변장했으며, 그의 신원에 대한 논쟁이 있다. 위원들은 런던의 공공 교수대 사형 집행인인 리처드 브랜든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적어도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가 사형 위협을 받고 나서야 그 일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조지 조이스, 윌리엄 휴렛, 휴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잠재적인 후보로 거론되었다. 1813년 윈저에서 왕의 시신을 검사한 결과 확인된 깨끗한 절단면은 숙련된 참수인이 처형을 집행했음을 시사한다.

반역자의 잘린 머리를 군중에게 들어 보이며 "반역자의 머리를 보라!"라고 외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찰스 1세의 머리는 전시되었지만,[165] 그 말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사형 집행인이 자신의 목소리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형 다음 날, 왕의 머리는 시신에 다시 꿰매어졌고, 방부 처리된 후 납관에 넣어졌다.

위원회는 찰스 1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시신은 2월 7일 밤 윈저로 옮겨졌다.[166] 그는 1649년 2월 9일 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의 관 옆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헨리 8세 납골당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167] 그의 아들인 찰스 2세는 나중에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정교한 왕가 납골당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지만, 결코 건설되지 않았다.

6. 사후

찰스 1세 사후 잉글랜드는 공화국인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상원을 폐지하고 국무원회를 통해 집행권을 행사하였다.[169]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스코틀랜드 전쟁과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내 왕당파의 저항을 진압하였다.[170]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보호령을 선포하여 스스로 호국경이 되었다.[171][172] 1658년 크롬웰 사후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무능력하여 오래가지 못했다.[173] 결국 의회가 복원되었고, 1660년 찰스 1세의 장남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174]

찰스 1세 처형 10일 후, 그의 매장일에 출간된 회고록 《아이콘 바실리케(Eikon Basilike)》(그리스어로 "왕의 초상")는 왕실 정책을 변호하며 왕당파 선전에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168] 존 밀턴은 의회 입장에서 반박문 《아이코노클라스테스(Eikonoklastes)》("우상 파괴자")를 썼지만, 왕당파 책의 감동을 넘어서지는 못했다.[168]

성공회 신자들과 왕당파들은 찰스 1세를 순교자로 여겼다.[168] 1660년 캔터베리와 요크의 공의회는 순교자왕 찰스를 잉글랜드 성공회 성인력에 추가하였다.[168] 고교파 성공회 신자들은 그의 사망 기념일에 특별 예배를 드렸으며, 폴머스와 터브리지웰스와 같은 교회, 순교자왕 찰스 협회 같은 성공회 단체들이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168]

찰스 1세가 1642년 의사당에 침입하여 의회 자유를 침해하고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은 매년 의회 개원식에서 기념된다.[175]

6. 1. 가족

제임스 1세덴마크의 앤 사이에서 태어난 찰스 1세는 1600년 11월 19일 파이프의 던펌린궁에서 태어났다.[221] 형인 헨리 프레더릭이 1612년 사망하자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1613년 누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하이델베르크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혼인하였다. 찰스 1세는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들 4명과 딸 5명을 두었다.

6. 1. 1. 형제자매


  • 아버지: 제임스 1세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
  • 어머니: 덴마크의 앤 (1574년 12월 12일 ~ 1619년 3월 2일)
  • 형: 웨일스 공 헨리 (1594년 2월 19일 ~ 1612년 11월 6일)
  • 누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1596년 8월 19일 ~ 1662년 2월 13일)
  • 누나: 마거릿 스튜어트 (1598년 12월 24일 ~ 1600년 3월)
  • 본인: '''찰스 1세'''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남동생: 로버트 스튜어트 (1602년 1월 18일 ~ 1602년 5월 27일)
  • 여동생: 메리 스튜어트 (1605년 4월 8일 ~ 1607년 12월 16일)
  • 여동생: 소피아 스튜어트 (1607년 6월)

6. 1. 2. 자녀

앤 하이드와 결혼, 사별
모데나의 메리와 결혼
엘리자베스1635년 12월 29일1650년 9월 8일(14세)요절.앤1637년 3월 17일1640년 11월 5일(3세)요절.캐서린1639년 6월 29일1639년 6월 29일태어나자마자 사망.
헨리1640년 7월 8일1660년 9월 13일(20세)글로스터 공작, 요절.
헨리에타1644년 6월 16일1670년 6월 30일(26세)요절.


7. 평가

찰스 1세는 존 필립스 케니언의 말처럼 "모순과 논쟁의 인물"이다.[180] 고위 토리당원들은 그를 성스러운 순교자로 존경했지만,[180] 사무엘 로슨 가디너와 같은 휘그 역사가들은 그를 기만적이고 망상적인 인물로 비난했다.[180] 최근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비판해 왔지만,[181] 케빈 샤프는 찰스 1세를 양심적인 역동적인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며 더욱 동정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182] 배리 카워드는 찰스를 "헨리 6세 이후 영국에서 가장 무능한 군주"라고 평가했고,[181] 로널드 허튼도 그를 "중세 이후 우리가 가졌던 최악의 국왕"이라고 불렀다.[183]

의회가 전쟁 중에 처형한 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찰스를 "위대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위대해지도록 만들어지지도 않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왕자"라고 묘사했다.[184] 찰스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더 차분하고 세련되었지만,[185] 완고했다. 그는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온 인기 없는 정책을 의도적으로 추진했다.[185] 찰스와 제임스 모두 신권 왕권을 주장했지만, 제임스의 절대적 권한에 대한 야망은 신하들과의 타협과 합의로 누그러졌던 반면, 찰스는 타협할 필요도,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다.[186] 그는 자신이 오직 하나님께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군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책임이 있다"고 썼다.[1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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