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헤이그 백작 더글러스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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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글러스 헤이그는 1861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885년 제7 (여왕 친위) 기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마흐디 전쟁, 보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외 파견군 사령관으로 솜 전투와 파스샹달 전투를 지휘하여 "솜의 백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18년 연합군의 최종 공세 성공에 기여했으며, 전후에는 전직 군인들의 복지에 헌신하다 1928년 사망했다. 그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정치적 수완과 행정 능력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헤이그는 에든버러 샬럿 광장의 한 집에서 태어났다.[11] 옥스퍼드 대학교 브레이즈노즈 칼리지에서 정치 경제, 고대사,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19] 학부생 시절 프리메이슨에 입회하기도 했다.[20] 그는 옥스퍼드에서 최종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질병으로 한 학기를 결석하여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22]
2. 초기 생애 및 교육
헤이그는 에든버러 샬럿 광장의 한 집에서 태어났다.[11] 그의 아버지 존 리처드 헤이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가문의 성공적인 헤이그 & 헤이그 위스키 증류소의 대표였다. 그는 당시 엄청난 액수인 연간 10000GBP(2018년 기준 116만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다.[12] 그의 어머니 레이첼(스튜어트필드의 휴 베이치의 딸)[13]은 가난한 젠트리 가문 출신이었다.[14] 그의 가족의 집은 파이프 주 윈디게이츠의 헤이그 하우스였다.[15]
헤이그는 1869년 세인트앤드루스의 베이슨 씨 학교에 기숙사생으로 입학하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1869년 후반, 그는 에든버러 컬리지 학교로 전학했고, 1871년에는 워릭셔의 예비 학교인 오웰 하우스로 옮겼다. 그 후 그는 클리프턴 칼리지에 다녔다.[16][17] 헤이그는 18세가 되기 전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다.[18]
형과 함께 미국 여행을 다녀온 후, 헤이그는 1880년부터 1883년까지 브래즈노즈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정치 경제, 고대사,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사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불링던 클럽의 회원이었고, 승마를 즐겼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기수 중 한 명이었고, 대학교 폴로 팀의 일원이었다.[19] 학부생 시절 그는 파이프 주 레번의 엘긴 롯지에서 프리메이슨에 입회하여 프리메이슨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밟았다.[20] 1920년 에글린턴 백작은 헤이그에게 그의 프리메이슨 진척을 완료하도록 권유했고, 그는 롯지로 돌아가 세 번째 단계를 밟았으며,[20]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롯지의 워십풀 마스터로 활동했다.[21] 그는 스코틀랜드 그랜드 롯지의 임원이 되었다.[20]
그는 옥스퍼드에서 최종 시험에 합격했지만(샌드허스트 입학 지원자 자격 요건), 질병으로 인해 한 학기를 결석했기 때문에 학위를 받을 자격이 없었고, 더 오래 머물렀다면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시작하기 위한 연령 제한(23세)을 초과했을 것이다. 그는 1884년 1월 샌드허스트에 입학했다. 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헤이그는 샌드허스트에서 같은 반 학생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그는 수석 부사관이었고, 앤슨 검을 받았으며, 성적 우수 순위에서 1등으로 졸업했다.[22] 그는 1885년 2월 7일 제7 (여왕 친위) 기병대의 소위로 임관했다.[23]
3. 군 경력
1884년 1월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85년 2월 제7 (여왕 친위) 기병대 소위로 임관했다.[23] 샌드허스트에서 그는 수석 부사관이었고, 앤슨 검을 받았으며, 성적 우수 순위에서 1등으로 졸업했다.[22]
마흐디 전쟁과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하여 기병 장교로 활약했다. 제2차 보어 전쟁에서는 존 프렌치 휘하에서 참모장교로 복무하며 엘란스라아게 전투 등에 참전했고, 레이디스미스 포위전에서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탈출하기도 했다.[49] 종전 후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부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59]
1903년 영국령 인도 기병 감찰관,[60] 1906년 육군성 군사 훈련 국장,[74] 1909년 인도 참모총장을 역임했다.[74] 1904년에는 당시 영국 육군에서 가장 젊은 소장으로, 1910년 1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61]
1912년 3월부터 알더숏 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했다.[77] 1912년 육군 기동 훈련에서는 제임스 그리슨 중장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 훈련을 통해 개혁된 육군의 효율성이 입증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78]
3. 1. 초기 군 경력
헤이그는 1885년 2월 7일 제7 (여왕 친위) 기병대 소위로 임관했다.[23] 1886년에는 미국 투어 중 잉글랜드 대표로 폴로 경기를 했다.[24]
1886년 11월, 인도에서 해외 근무를 시작했고, 1888년에는 연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26] 그는 규율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지만,[27] 행정 능력과 훈련 분석으로 상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891년 1월 23일 대위로 진급했다.[28]
1892년 11월, 인도를 떠나 1893년 6월에 치른 참모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했다. 상위 28위 안에 들었지만, 필수 수학 시험에서 낙제하여 자리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 실패를 평생 숨겼으며,[29] 1910년에는 수학 시험을 요구 사항에서 제외할 것을 권고했다.[30] 부관장 레드버스 불러 경은 헤이그가 독일 안과 의사에게 시력을 재검사받고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색맹을 이유로 4개의 지명된 자리 중 하나를 그에게 수여하는 것을 거부했다.[31]
1892년, 자신이 지휘했던 비행대의 부관으로 잠시 인도에 돌아온 후, 기병 감찰관 키스 프레이저 경의 부관으로 영국으로 돌아왔다.[32] 프레이저는 헤이그가 참모대학에 입학하도록 로비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1894년 말에 지명되었다.[11]
1896년, 캠벌리 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동료들은 헤이그가 더 나은 기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앨런비를 드래그 헌트 관리인으로 선택했다.[33] 헤이그는 수석 강사인 G. F. R. 헨더슨 중령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1897년에 과정을 마쳤다. 캠벌리의 구식 커리큘럼은[34] 헤이그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독창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교리를 흡수하는 사람이었다. 헤이그는 승리는 주요 적군을 전투에서 격파해야 얻을 수 있으며, 소모전("소모전")은 결정적인 전장 승리를 위해 예비군을 투입하는 것에 대한 서곡일 뿐이라고 배웠다.[35]
3. 2. 마흐디 전쟁 (1898)
1898년 초, 헤이그는 참모총장이었던 이벌린 우드에 의해 수단에서 벌어진 마흐디 전쟁에 참전했다. 이벌린 우드는 헤이그에게 비밀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헤이그가 키치너를 감시하기 위해 선택되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헤이그는 상관을 비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특히 키치너의 독재적인 습관을 비판했다.[37] 헤이그는 이집트인들이 제대로 훈련받고 지휘받으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39]
헤이그는 아트바라 남쪽의 작은 전투(3월 21일)에서 첫 실전을 경험했다. 그는 이 전투에 대해 우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영국 기관총의 부족에 대해 언급했다. 헤이그는 맥심 기관총을 연구했으며, 캠페인 내내 그 가치에 대해 언급했다.[40]
헤이그는 누케일라 전투(4월 6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아트바라 전투 (4월 8일)에 참전했다.[41] 아트바라 전투 후반, 헤이그는 부상당한 이집트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42] 이 행동으로 인해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아야 한다는 추천을 받기도 했다.[42] 옴두르만 전투에서 자신의 기병대를 지휘했으며(전투 중에는 예비대로 있었고, 그 후에는 마을로 측면 행군을 했다), 1898년 11월 15일에 명예 진급 소령으로 진급했다.[43]
3. 3. 제2차 보어 전쟁 (1899-1902)
존 프렌치 휘하의 여단급 부대 참모장(수석 참모 장교)으로 임명된 헤이그는 1899년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48] 엘란스라아게 전투(10월 21일)에 프렌치와 함께 참전했고, 레이디스미스 포위전(1899년 11월 2일)에서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함께 탈출했다.[49]
헤이그는 포병의 중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했다.[50] 프레데릭 로버츠, 로버츠 백작 신임 사령관은 에롤 백작을 기병 사단 부참모장으로, 헤이그를 그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헤이그는 킴벌리 구원(1900년 2월 15일)에서 기병대 돌격을 이끌었고, 잠시(1900년 2월 21일) 제3기병 여단을 지휘했다. 에롤 백작이 다른 직책으로 이동하면서 기병 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프렌치 휘하 사단은 블룸폰테인(1900년 3월 13일)과 프리토리아(1900년 6월 5일) 점령에 참여했다.[51]
로버츠가 정규전에서 승리한 후, 키치너가 게릴라전에 돌입한 보어인과 전투를 책임졌다. 1901년 1월, 헤이그는 지방 계급 준장 계급으로 2,500명 규모 부대를 이끌고 케이프 식민지를 순찰, 초토화 정책의 일환으로 농가를 불태우고 보어인 여성과 아이들을 수용소에 수용했다.[52]
1901년 5월, 제17 란서스 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53] 전쟁 막바지, 얀 크리스티안 스머츠를 베레니징 평화 협상으로 호송했다.
헤이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공로로 네 차례 보고서에 언급되었고(1900년 3월 31일 로버츠 경[54], 1902년 6월 23일 키치너 경[55]), 1900년 11월 목욕 기사단 동반자 (CB)로 임명되었다.[56] 1901년 7월 17일 중령으로 정식 진급했다.[57]
전후 1902년 10월, 에드워드 7세 국왕의 부관으로 임명, 대령 명예 계급을 받았다.[59]
3. 4. 인도 기병 감찰관 (1903-1906)
헤이그는 1903년까지 에든버러에 주둔하며 제17 랜서의 지휘관으로 계속 복무했다. 그 후 영국령 인도에서 기병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알더숏에서 당시 존 프렌치가 지휘관으로 있던 기병 여단의 지휘를 선호했지만, 전임자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에든버러에서 1년 동안 수비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60]
헤이그는 전쟁에서 얻은 공로로 늦었지만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7세까지 대위였던 그는 1904년 당시 영국 육군에서 가장 젊은 소장이 되었다. 그는 1905년 라왈핀디 열병식에 참석하여 조지 5세와 웨일스 공비의 인도 방문을 기념했다. 이때 영국 최고위 장성들은 기병이 여전히 칼과 창으로 돌격하도록 훈련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프렌치와 헤이그의 견해). 당시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츠 경은 키치너(당시 인도 총사령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헤이그에게 매우 단호하게 대하라"고 경고했으며, 헤이그가 존 프렌치 경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리하고 유능한 친구"라고 적었다.[61]
3. 5. 결혼 및 자녀 (1905)
헤이그는 1905년 7월 11일, 허시 비비안, 제3대 비비안 남작과 루이자 더프의 딸인 도로시 모드 비비안과 결혼했다.[62]자녀 이름 출생일 사망일 기타 레이디 알렉산드라 헨리에타 루이자 헤이그[63] 1907년 3월 9일 1997년 해군 소장 클래런스 딘스모어 하워드-존스턴과 첫 번째 결혼을 하여 제임스 하워드-존스턴, 제니아, 피터를 낳았다. 1954년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와 두 번째 결혼했으며, 그는 나중에 글랜턴의 데이커 남작으로 임명되었다. 레이디 빅토리아 도리스 레이첼 헤이그 1908년 11월 7일 1993년 1929년 8월 10일 클로드 앤드루 몬태규 더글러스 스콧 대령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며 (1951년 이혼).[62] 조지 알렉산더 유진 더글러스 헤이그, 제2대 헤이그 백작 1918년 3월 15일 2009년 7월 10일 레이디 아이린 바이올렛 프리시아 자넷 오거스타 헤이그 1919년 10월 7일 2001년 개빈 아스터, 제2대 헤버의 아스터 남작의 아내
3. 6. 육군성 (1906-1909)
1906년, 헤이그는 육군성 군사 훈련 국장으로 임명되었다.[74] 그는 민병대, 요먼리, 자원병을 새로운 영토군으로 재편성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07년에는 참모 임무 국장으로 전보되어 "야전 근무 규정" 출판을 감독했다.[74]
3. 7. 인도 참모총장 (1909-1911)
1909년, 헤이그는 인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74] 하딩 경 부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인도 참모부를 발전시키고 미래의 유럽 전쟁에 영국령 인도군을 파견하는 것을 조직하기를 희망했다.[76] 1910년 11월, 헤이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75]
3. 8. 알더숏 사령부 (1912-1914)
1912년 3월 알더숏 사령부 (제1 및 제2 사단, 제1 기병 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7]
1912년 육군 기동 훈련에서 그는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중 정찰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한 제임스 그리슨 중장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 후 만찬에서 헤이그는 준비된 연설문을 버렸고, 그의 발언이 "호평을 받았다"고 썼지만, 존 카터리스는 그 발언이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다"고 기록했으며, 방문한 고위 인사들은 잠이 들었다. 헤이그의 형편없는 연설 능력과는 별개로, 그 기동 훈련은 개혁된 육군의 효율성을 보여준 것으로 여겨졌다.[78] 1913년 6월 그는 1913년 생일 서훈에서 바스 훈장 기사단장 (KCB)으로 임명되었다.[79]
4. 제1차 세계 대전
커라 반란(1914년 3월) 당시 헤이그는 참모총장 존 고프에게 신중함을 촉구했다. 그의 형 허버트 고프는 얼스터인들을 반독립적인 아일랜드로 강요하기보다는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헤이그는 군의 임무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H. H. 애스퀴스에 의해 존 프렌치 경은 장교들이 얼스터를 강요하도록 요구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서면으로 작성한 후 참모총장(CIGS)직에서 물러나야 했다.[80]
1914년 8월 전쟁 발발 당시 헤이그는 존 프렌치 경 육군 원수가 지휘하는 영국 원정군(BEF)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계획대로 헤이그의 올더숏 사령부는 제1군단으로 편성되었다. 헤이그는 할데인에게 보낸 편지(8월 4일)에서 전쟁이 몇 달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테리토리얼 육군이 동원되어 통합될 때까지 BEF를 프랑스로 보내는 것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81]
헤이그는 육군 회의(8월 5일)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영국군의 동원이 프랑스와 독일보다 사흘이나 늦어졌기 때문에 벨기에 국경 근처의 모뵈주에서 프랑스 전방으로 동원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다른 비상 계획은 없었다. 헤이그와 키치너는 BEF가 아미앵에서 반격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존 프렌치 경은 앤트워프에 상륙할 것을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왕립 해군이 안전한 통행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한 비평가는 헤이그가 "그의 동료들보다 더 명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82]
프렌치는 자신의 회고록 ''1914''에서 헤이그가 BEF 파견을 연기하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헤이그가 할데인에게 보낸 내용으로 볼 때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헤이그는 이 주장에 너무 분노하여 내각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프렌치의 "오류"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이 시기의 일기를 다시 썼는데, 아마도 자신을 더 좋게, 프렌치를 나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원래의 원고 일기는 남아 있지 않지만 파괴되었다는 긍정적인 증거는 없으며, 현존하는 타이핑된 버전이 이제는 사라진 받아쓰기나 메모에서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83] 회의록에 따르면, 헤이그는 지연하거나 더 적은 병력을 보낼 것을 제안했지만 프랑스가 패배할 위험에 처하거나 프랑스가 원한다면 (실제로 그랬다) 병력을 보낼 의향이 있었다. 그는 전쟁이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BEF에서 철수한 장교와 부사관이 훈련시킨 1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82]
헤이그는 1914년 2월 조지 5세 국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84] 올더숏에서 열린 왕실 사열(8월 11일) 동안 헤이그는 국왕에게 프렌치의 성미와 군사적 지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의문이 보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나중의 과장된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이그는 실제로 보어 전쟁 동안 프렌치를 칭찬했고 1911년 그가 CIGS로 임명된 것을 환영했다.[85]
4. 1. 1914년
커라 반란(1914년 3월) 동안 헤이그는 참모총장 존 고프에게 신중함을 촉구했다. 헤이그는 군의 임무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H. H. 애스퀴스에 의해 존 프렌치 경은 장교들이 얼스터를 강요하도록 요구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서면으로 작성한 후 참모총장(CIGS)직에서 물러나야 했다.[80]1914년 8월 전쟁 발발 당시 헤이그는 존 프렌치 경 육군 원수가 지휘하는 영국 원정군(BEF)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계획대로 헤이그의 올더숏 사령부는 제1군단으로 편성되었다. 헤이그는 할데인에게 보낸 편지(8월 4일)에서 전쟁이 몇 달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헤이그는 육군 회의(8월 5일)에 참석했고, 회의에서는 영국군의 동원이 프랑스와 독일보다 사흘이나 늦어졌기 때문에 벨기에 국경 근처의 모뵈주에서 프랑스 전방으로 동원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헤이그와 키치너는 BEF가 아미앵에서 반격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존 프렌치 경은 앤트워프에 상륙할 것을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왕립 해군이 안전한 통행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82]
프렌치는 자신의 회고록 ''1914''에서 헤이그가 BEF 파견을 연기하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헤이그가 할데인에게 보낸 내용으로 볼 때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헤이그는 이 주장에 너무 분노하여 내각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프렌치의 "오류"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또한 이 시기의 일기를 다시 썼는데, 아마도 자신을 더 좋게, 프렌치를 나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83] 헤이그는 전쟁이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BEF에서 철수한 장교와 부사관이 훈련시킨 1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82]
헤이그는 1914년 2월 조지 5세 국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84] 올더숏에서 열린 왕실 사열(8월 11일) 동안 헤이그는 국왕에게 프렌치의 성미와 군사적 지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의문이 보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나중의 과장된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이그는 실제로 보어 전쟁 동안 프렌치를 칭찬했고 1911년 그가 CIGS로 임명된 것을 환영했다.[85]
헤이그는 르 아브르로 건너갔다.[86] 영국 원정군(BEF)은 8월 14일 프랑스에 상륙하여 벨기에로 진격했다. 헤이그는 브뤼셀에서 서쪽으로 쏟아져 나와 영국군의 좌익에서 포위하려는 독일군의 정보 보고서를 무시한 존 프렌치 경에게 짜증을 냈다. 8월 23일 몬스에서 제2군단이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영국 원정군은 철수해야 했다.[87]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철수는 모르말 숲 때문에 별도로 수행해야 했다. 두 군단은 르 카토-캉브레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헤이그 휘하의 제1군단은 랑드르시에서 멈춰 섰고, 두 군단 사이에 큰 틈이 생겼다. 헤이그는 랑드르시에서 독일군과의 교전(헤이그가 참모진을 이끌고 거리에 나가 권총을 꺼내들고 "우리 목숨을 비싸게 팔겠다"고 약속했다)에 대한 반응으로 과장된 보고서를 프렌치에게 보냈고, 이로 인해 프렌치는 당황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호레이스 스미스-도리엔 장군의 제2군단은 헤이그의 지원 없이 르 카토 전투에서 적과 교전했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진격을 늦췄다.[88]
8월 25일, 프랑스 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그의 병력에게 마른 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영국 원정군에게 추가 철수를 강요했다. 헤이그는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사용을 약속한 도로를 점유하고 영국군 우익을 엄호하겠다는 약속을 거부하는 등 프랑스군의 거만한 행동에 짜증을 냈다. 그는 프렌치의 신뢰할 수 없음과 전투 능력 부족에 대해 사적으로 불평했고, 이는 그 후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8월 4일 전쟁 회의에서 존 프렌치 경이 제안했을 때 "무모하다"고 거부했던 앤트워프에서 영국군이 독립적으로 작전하기를 바란다고 썼다.[89]
이 철수로 인해 존 프렌치 경은 동맹국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영국 원정군을 센 강 남쪽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9월 1일, 키치너 경은 프렌치를 방문하여 그에게 전투에 다시 참여하고 조프르의 군대와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는 9월 5일에 시작되었고, 마른 강 제1차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 헤이그는 그의 군단을 쉬게 하고 싶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공격을 재개하게 되어 기뻤다. 그는 부하들이 "투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을 압박했다. 존 프렌치 경은 헤이그의 군단 지휘를 칭찬했지만, 헤이그는 사적으로 몬스 이전의 프렌치의 과신과 그 이후의 과도한 신중함에 대해 경멸했다.[90]
4. 2. 1915년
커라 반란(1914년 3월) 당시, 헤이그는 군의 임무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H. H. 애스퀴스에 의해 존 프렌치 경은 장교들이 얼스터를 강요하도록 요구받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서면으로 작성한 후 참모총장(CIGS)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헤이그는 허버트 고프의 원칙적인 입장을 존중했지만, 프렌치가 자신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생각했다.[80]1914년 8월 전쟁 발발 당시, 헤이그는 존 프렌치 경 육군 원수가 지휘하는 영국 원정군(BEF)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계획대로 헤이그의 올더숏 사령부는 제1군단으로 편성되었다. 헤이그는 할데인에게 보낸 편지(8월 4일)에서 전쟁이 몇 년이 아니라면 몇 달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헤이그는 테리토리얼 육군이 동원되어 통합될 때까지 BEF를 프랑스로 보내는 것을 지연시키기를 원했다.[81] 헤이그는 육군 회의(8월 5일)에 참석했고, 회의에서는 영국군의 동원이 프랑스와 독일보다 사흘이나 늦어졌기 때문에 벨기에 국경 근처의 모뵈주에서 프랑스 전방으로 동원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다른 비상 계획은 없었다. 헤이그와 키치너는 BEF가 아미앵에서 반격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존 프렌치 경은 앤트워프에 상륙할 것을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왕립 해군이 안전한 통행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한 비평가는 헤이그가 "그의 동료들보다 더 명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82]
프렌치는 비판이 많은 자신의 회고록 ''1914''에서 헤이그가 BEF 파견을 연기하고 싶어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헤이그가 할데인에게 보낸 내용으로 볼 때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헤이그는 이 주장에 너무 분노하여 내각 서기 모리스 헨키에게 프렌치의 "오류"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또한 이 시기의 일기를 다시 썼는데, 아마도 자신을 더 좋게, 프렌치를 나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원래의 원고 일기는 남아 있지 않지만 파괴되었다는 긍정적인 증거는 없으며, 현존하는 타이핑된 버전이 이제는 사라진 받아쓰기나 메모에서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83] 회의록에 따르면, 헤이그는 지연하거나 더 적은 병력을 보낼 것을 제안했지만 프랑스가 패배할 위험에 처하거나 프랑스가 원한다면 (실제로 그랬다) 병력을 보낼 의향이 있었다. 헤이그는 전쟁이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BEF에서 철수한 장교와 부사관이 훈련시킨 1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82]
헤이그는 1914년 2월 조지 5세 국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84] 올더숏에서 열린 왕실 사열(8월 11일) 동안 헤이그는 국왕에게 프렌치의 성미와 군사적 지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의문이 보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나중의 과장된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헤이그는 실제로 보어 전쟁 동안 프렌치를 칭찬했고 1911년 그가 CIGS로 임명된 것을 환영했다.[85]
헤이그는 르 아브르로 건너갔다.[86] 영국 원정군(BEF)은 8월 14일 프랑스에 상륙하여 벨기에로 진격했다. 헤이그는 브뤼셀에서 서쪽으로 쏟아져 나와 영국군의 좌익에서 포위하려는 독일군의 정보 보고서를 무시한 존 프렌치 경에게 짜증을 냈다. 8월 23일 몬스에서 제2군단이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영국 원정군은 철수해야 했다.[87]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철수는 모르말 숲 때문에 별도로 수행해야 했다. 두 군단은 르 카토-캉브레지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헤이그 휘하의 제1군단은 랑드르시에서 멈춰 섰고, 두 군단 사이에 큰 틈이 생겼다. 헤이그는 랑드르시에서 독일군과의 교전(헤이그가 참모진을 이끌고 거리에 나가 권총을 꺼내들고 "우리 목숨을 비싸게 팔겠다"고 약속했다)에 대한 반응으로 과장된 보고서를 프렌치에게 보냈고, 이로 인해 프렌치는 당황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호레이스 스미스-도리엔 장군의 제2군단은 헤이그의 지원 없이 르 카토 전투에서 적과 교전했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진격을 늦췄다. 그러나 한 비평가는 랑드르시에서의 "공황의 순간"에 대해 너무 과장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에 달하는 13일간의 철수는 헤이그와 스미스-도리엔의 "침착하고 유능한 리더십"에 대한 찬사라고 썼다.[88]
8월 25일, 프랑스 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그의 병력에게 마른 강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영국 원정군에게 추가 철수를 강요했다. 헤이그는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사용을 약속한 도로를 점유하고 영국군 우익을 엄호하겠다는 약속을 거부하는 등 프랑스군의 거만한 행동에 짜증을 냈다. 그는 프렌치의 신뢰할 수 없음과 전투 능력 부족에 대해 사적으로 불평했고, 이는 그 후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8월 4일 전쟁 회의에서 존 프렌치 경이 제안했을 때 "무모하다"고 거부했던 앤트워프에서 영국군이 독립적으로 작전하기를 바란다고 썼다.[89]
이 철수로 인해 존 프렌치 경은 동맹국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영국 원정군을 센 강 남쪽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9월 1일, 키치너 경은 프렌치를 방문하여 그에게 전투에 다시 참여하고 조프르의 군대와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는 9월 5일에 시작되었고, 마른 강 제1차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 헤이그는 그의 군단을 쉬게 하고 싶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공격을 재개하게 되어 기뻤다. 그는 부하들이 "투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을 압박했다. 존 프렌치 경은 헤이그의 군단 지휘를 칭찬했지만, 헤이그는 사적으로 몬스 이전의 프렌치의 과신과 그 이후의 과도한 신중함에 대해 경멸했다.[90]
4. 3.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 (1915-1918)
1915년 10월, 영국군과 프랑스군 장군들 간의 갈등 끝에 헤이그의 제1군단은 바다로의 경주의 일환으로 플랑드르의 이프르로 이동했다.[91] 헤이그는 벨기에 서부 지역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 제1군단은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과 정면으로 맞붙었다.[92]독일군은 250문의 중포를 동원해 제1군단을 압도했고, 한때 헤이그는 우스터셔 연대가 탈환한 겔루벨트 주변에서 병사들을 격려하기도 했다.[92] 이 전투에서 헤이그는 명성을 얻었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93] 격렬한 전투 끝에 제1군단은 병력이 크게 줄었고,[94] 프랑스군에 의해 교체되었다. 헤이그는 헨리 윌슨의 친(親)프랑스적인 성향을 의심했다.[95]
프랑스는 헤이그를 장군으로 진급시키고, 영국 원정군(BEF)을 확장하는 계획을 논의했다.[96] 12월, 헤이그는 프랑스를 만나 BEF 참모장 아치볼드 머레이를 해임하고 “윌리” 로버트슨을 추천했다. 로버트슨이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97] 헤이그는 1914년 11월 16일에 장군으로 진급했다.[98] 1915년 12월, 존 프렌치의 뒤를 이어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에 임명되었다.[97]
4. 3. 1. 1916년
헤이그는 1915년 12월에 존 프렌치의 뒤를 이어 영국 원정군(BEF) 사령관에 임명되었다.[97] 1916년, 헤이그는 솜 전투(7월 1일-11월 18일)를 지휘했다.4. 3. 2. 1917년
1917년 1월 1일, 헤이그는 원수로 진급했다.[99] 그해, 파스샹달 전투(제3차 이프르 전투)를 수행했다.4. 3. 3. 캉브레 전투 (1917년 말)
(출력 없음)설명: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캉브레 전투 (1917년 말)"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대한 위키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본 소스는 주로 1915년 이전의 사건과 헤이그의 초기 경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캉브레 전투'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이전과 같이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응답입니다.
4. 3. 4. 1918년
Douglas Haig영어는 1918년 독일군의 춘계 공세("미카엘 작전", "조르제트 작전", "블뤼허 작전")를 막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8년 3월, 둘랑 회의에서 페르디낭 포슈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데 동의했다. 1918년 4월에는 "벽을 등지고" 싸워야 한다는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1918년 8월, 아미앵 전투에서 승리하며 연합군의 반격을 주도했다. 1918년 9월에는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하며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영국군을 지휘했다.
5. 전후 활동 및 사망 (1919-1928)
1919년, 헤이그는 헤이그 백작, 데이윅 자작, 베르위크 카운티의 베머시드의 헤이그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양원으로부터 감사와 함께 100000GBP의 지원금을 받았다.[210][220] 그는 전임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이 받은 자작 작위는 거절했는데, 이는 그에게 모욕으로 느껴졌고, 제대 군인들을 위한 더 나은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한 협상의 일환이었다.[219]
군에서 은퇴한 후, 헤이그는 전직 군인들의 복지에 헌신했다.[225] 그는 단체 통합을 추진하여 1921년 6월 영국 군인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전직 군인들의 재정 지원을 위한 헤이그 기금과 주거 안정을 위한 헤이그 홈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225] 1921년 남아프리카, 1924년 뉴펀들랜드, 1925년 캐나다를 방문하여 전직 군인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호주와 뉴질랜드 방문이 계획되어 있었다.)[225]
헤이그는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세인트앤드루스 왕립 고대 골프 클럽의 회장을 역임했다.[226] 그는 사망할 때까지 영국 군인회 회장 및 연합 서비스 기금의 회장이었다.[227]
헤이그는 은퇴 후에도 영국 육군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제17/21 랜서, 런던 스코티시, 킹스 오운 스코티시 보더러스,[228] 로열 호스 가드의 명예 대령을 역임했다.[229]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230]
헤이그는 1928년 1월 29일 심장 마비로 런던에서 사망했다.[231][232] 그의 장례식은 2월 3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수많은 인파가 거리에 늘어서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4] 그의 시신은 세인트 콜럼바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운송되었고, 세 명의 왕자와 두 명의 프랑스 원수(포슈와 페탱)를 포함한 영구차 운반자들이 운구했다.[4] 장례 행렬에는 영국 해군, 아일랜드 근위대, 영국 공군, 제1 프랑스군단, 벨기에 척탄병 연대 대표 5개의 명예 호위대가 동행했다.[4] 사원에서의 예배 후, 시신은 에든버러로 운송되어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4]
헤이그는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는 드라이버러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무덤은 제국 전쟁 묘지 위원회의 표준 묘비 스타일로 표시되었다.[233]
6. 유산 및 평가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여 "솜의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5] 특히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막대한 사상자는 그에 대한 비판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리델 하트와 같은 군사 역사가는 헤이그가 과도한 야망을 위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했다.[245] 호주의 군사 역사가 존 라핀은 헤이그를 고의적인 실수와 사악한 학살로 기소하며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246] 앨런 클라크의 책 《당나귀들》(1961)은 영국 장군들을 '당나귀가 이끄는 사자'라는 구절로 묘사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했다.[269]
그러나 헤이그를 옹호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존 테레인은 1963년에 출판한 헤이그의 전기(''교육받은 군인'')에서 헤이그를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이나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와 같은 "위대한 장군"으로 묘사했다. 테레인은 헤이그가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전략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1] 윈스턴 처칠은 헤이그가 "불길한 천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지만,[243] 전쟁에 대한 후속 연구를 통해 헤이그를 더 좋게 평가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241][242]
헤이그는 군인으로서의 재능은 거의 없었지만, 정치적 수완과 행정 능력은 뛰어났다. 그는 사전 교섭과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능숙했다. 존 J. 퍼싱은 헤이그를 "전쟁을 승리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237] 그의 일기는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억 유산에 등재되었다.[328]
7. 기타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치통으로 고생하여 파리 출신 치과의사를 불렀다. 그 결과, 영국 육군은 치과의사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1921년 영국 육군 치의병단의 창설로 이어졌다.[328]
8. 훈장 및 명예
헤이그는 영국과 여러 나라로부터 다양한 훈장과 명예를 받았다.
국가 | 수여일 | 훈장 | 리본 | 약자 | 비고 |
---|---|---|---|---|---|
영국 훈장 | |||||
영국 | 1901년 9월 27일 | 바스 훈장 동반 기사 | CB | [273] | |
1904년 | 로열 빅토리아 훈장 사령관 | ![]() | CVO | [62] | |
1909년 6월 25일 | 로열 빅토리아 훈장 기사단장 | KCVO | [274] | ||
1911년 12월 | 델리 두르바 메달 (은) | [275] | |||
1911년 12월 12일 | 인도 제국 훈장 기사단장 | KCIE | [276] | ||
1913년 6월 3일 | 바스 훈장 기사단장 | -- | KCB | [277] | |
1915년 6월 3일 | 바스 훈장 대십자 기사 | GCB | [278] | ||
1916년 8월 15일 | 로열 빅토리아 훈장 대십자 기사 | -- | GCVO | [279] | |
1917년 7월 31일 | 엉겅퀴 훈장 기사 | KT | [62] | ||
1919년 6월 3일 | 공로 훈장 회원 | OM | [280] | ||
수단 여왕 메달 | [281] | ||||
남아프리카 여왕 메달 | ![]() | [282] | |||
남아프리카 왕 메달 | [283] | ||||
1914 스타 및 클래스프 | [284] | ||||
영국 전쟁 메달 | [284] | ||||
제1차 세계 대전 전승 메달 | ![]() | [284] | |||
외국 훈장 | |||||
이집트 헤디베이트 | 1898년 | 헤디베의 수단 메달 | ![]() | [281] | |
프랑스 | 1915년 5월 15일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랜드 오피서 | [285] | ||
1916년 2월 24일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랜드 크로스 | [286] | |||
벨기에 | 레오폴드 훈장 그랜드 코르동 | ![]() | [287] | ||
이탈리아 | 1916년 9월 14일 |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훈장 기사 대십자 | [288] | ||
몬테네그로 | 1916년 10월 31일 | 다닐로 1세 훈장 1등급 | [289] | ||
오빌리치 메달 금장 | [289] | ||||
프랑스 | 1917년 4월 21일 | 십자 훈장 | [290] | ||
러시아 | 1917년 6월 1일 |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 [291] | ||
벨기에 | 1918년 3월 11일 | 십자 훈장 | [292] | ||
세르비아 | 1918년 9월 10일 | 칼을 든 카라조르제 별 훈장 기사 대십자 | ![]() | 군사 부문 | |
일본 | 1918년 11월 9일 | 욱일대수장 | [294] | ||
시암 왕국 | 1918년 11월 16일 | 라마 훈장 기사장 | [295] | ||
미국 | 1918년 | 육군 공로 훈장 | [296][297] | ||
루마니아 | 1919년 9월 20일 | 미하이 용감공 훈장 1등급 | [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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