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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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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어 전쟁은 1880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 제국과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1차 보어 전쟁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하려는 영국의 시도로 시작되었고, 보어인들의 승리로 트란스발의 독립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2차 보어 전쟁은 트란스발과 오라녜 자유국에서 금광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영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로 발발했으며, 영국이 승리하여 두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전쟁은 영국의 강제 수용소 정책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전쟁 범죄 논란을 일으켰고, 영국은 승리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보어 전쟁은 국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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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 전쟁
지도
기본 정보
명칭보어 전쟁
다른 이름앵글로-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
로마자 표기Boeo Jeonjaeng
영어 명칭Boer Wars
아프리칸스어 명칭Anglo-Boereoorloë
제1차 보어 전쟁
시기1880년 12월 16일 ~ 1881년 3월 23일
주요 전투브론크호르스트스프루이트 전투
라잉스네크 전투
스카인스힐 전투
마주바 힐 전투
결과보어 공화국의 승리
영국과 보어 공화국 간의 협정 체결
제2차 보어 전쟁
시기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주요 전투탈라나 힐 전투
엘란즈라그테 전투
레이디스미스 전투
마거스폰테인 전투
콜렌소 전투
스피온콥 전투
파르데베르크 전투
베르겐달 전투
결과영국의 승리
보어 공화국은 영국에 합병
교전 세력
영국영국군
케냐 연대
캐나다 군
오스트레일리아 군
뉴질랜드 군
인도 군
나탈 식민지
케이프 식민지
보어인트란스발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나탈 공화국
주요 지휘관
영국레드버스 불러
로버츠 경
키치너 경
보어인폴 크뤼거
마르티누스 스테인
피트 주베르트
크리스티안 데베트
루이스 보타
야코부스 드 라 레이
병력
영국448,000명
보어인88,000명
피해 규모
영국사망자: 22,000명
부상자: 22,829명
보어인사망자: 7,000명
포로: 28,000명
민간인사망자: 26,000명 (주로 수용소에서)
배경
원인금광 발견과 통제권 분쟁
보어인 자치권 요구
영국 제국주의 확장 정책
결과 및 영향
결과영국은 남아프리카 지역 장악
보어인 공화국 소멸
남아프리카 연방 형성
식민지 지배 강화
영국 내 전쟁 반대 여론 확산
영향제국주의 시대 종말 촉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요인 중 하나
인종 차별 문제 심화
기타
관련 인물세실 로즈
조지프 체임벌린
밀리센트 포셋
에밀리 홉하우스
관련 사건제임슨 습격
블랙 위크

2. 배경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이었다. 1795년 영국은 프랑스 혁명 와중에 네덜란드로부터 보어의 땅을 빼앗으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2] 1857년경 남아프리카에는 유럽인이 통치하는 8개의 정치적 통합체가 존재했는데, 오라녜 자유국, 트랜스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5개는 보어인들의 국가였고, 케이프 식민지, 나탈 등 3개 지역은 영국인들이 통치하였다. 1860년에는 작은 공화국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통합되었으나, 케이프 식민지 총독 조지 그레이의 독단적인 연방화 추진은 영국 정부의 통합 정책 실패를 야기했다.[3][4]

나탈 지역에서 영국 정부는 보어인들을 차별하고 약속을 불이행하여 많은 보어인들이 실망하고 떠났다.[3] 1877년 영국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합병은 보어인들의 불안과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3] 1879년 12월, 6000명 이상의 보어인들은 반데르폰테인에서 영국 당국에 대한 반대 등을 결의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와 보어인들의 억압 통치에 대한 우려로 불만이 심화되었다.[3]

1895년, 세실 로즈는 제임슨(Jameson Raid)의 무장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영국인 광산 기술자들이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는 슬럼으로 변했다. 보어인 정부는 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금 산업에 중과세를 부과하여 외국인과 영국인 광산주들의 불만을 샀다.

영국 식민지의 알프레드 밀너 경, 영국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 등은 보어 공화국 병합을 지지하며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1899년 5월 30일 블룸폰테인 회담이 결렬된 후, 체임벌린은 트란스발 공화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크루거 대통령 또한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이었다. 1795년 영국은 프랑스혁명 중에 네덜란드로부터 보어의 땅을 빼앗았다.[2] 영국과 보어인들의 관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합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877년 4월 정식 합병이 이루어지자 보어인들은 더욱 불안해했다.[3] 1879년 12월 6000명 이상의 보어인들은 반데르폰테인에서 영국 당국과 협력한 자에 대한 반대, 합병 전 공화 국기 게양, 국민 의회 개최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3]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통치 지역 포기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당의 박애주의자들이 아프리카인들이 보어인들의 억압과 통치를 받는 것을 반대하며 보어인들의 불만이 심화되었다.[3] 결국 1880년 트란스발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보어 전쟁이 발발하였다.

2. 1. 영국-보어 관계 악화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이었다. 1795년 영국은 프랑스 혁명 와중에 네덜란드로부터 보어의 땅을 빼앗으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2] 1857년경 남아프리카에는 유럽인이 통치하는 8개의 정치적 통합체가 존재했는데, 오라녜 자유국, 트랜스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5개는 보어인들의 국가였고, 케이프 식민지, 나탈 등 3개 지역은 영국인들이 통치하였다. 1860년에는 작은 공화국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통합되었으나, 케이프 식민지 총독 조지 그레이의 독단적인 연방화 추진은 영국 정부의 통합 정책 실패를 야기했다.[3][4]

나탈 지역에서 영국 정부는 보어인들을 차별하고 약속을 불이행하여 많은 보어인들이 실망하고 떠났다.[3] 1877년 영국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합병은 보어인들의 불안과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3] 1879년 12월, 6000명 이상의 보어인들은 반데르폰테인에서 영국 당국에 대한 반대 등을 결의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와 보어인들의 억압 통치에 대한 우려로 불만이 심화되었다.[3]

1895년, 세실 로즈는 제임슨(Jameson Raid)의 무장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영국인 광산 기술자들이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는 슬럼으로 변했다. 보어인 정부는 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금 산업에 중과세를 부과하여 외국인과 영국인 광산주들의 불만을 샀다.

영국 식민지의 알프레드 밀너 경, 영국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 등은 보어 공화국 병합을 지지하며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1899년 5월 30일 블룸폰테인 회담이 결렬된 후, 체임벌린은 트란스발 공화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크루거 대통령 또한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2. 2. 트란스발 독립 전쟁 발발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이주해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이었다. 1795년 영국은 프랑스혁명 중에 네덜란드로부터 보어의 땅을 빼앗았다.[2] 영국과 보어인들의 관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합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877년 4월 정식 합병이 이루어지자 보어인들은 더욱 불안해했다.[3] 1879년 12월 6000명 이상의 보어인들은 반데르폰테인에서 영국 당국과 협력한 자에 대한 반대, 합병 전 공화 국기 게양, 국민 의회 개최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3]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통치 지역 포기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당의 박애주의자들이 아프리카인들이 보어인들의 억압과 통치를 받는 것을 반대하며 보어인들의 불만이 심화되었다.[3] 결국 1880년 트란스발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보어 전쟁이 발발하였다.

3. 보어 전쟁의 진행

제1차 보어 전쟁(1880년~1881년)은 영국 제국과 보어족 간의 첫 번째 분쟁으로, 트란스발 전쟁으로도 불린다.[3] 1880년 12월 16일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하려는 영국의 시도에 맞서 보어인들이 포체프스트룸의 낡은 요새에 틀어박히며 시작되었다.[3] 19세기 케이프에 정착했던 네덜란드계 이민자 후손인 보어인들은 아프리카 대륙 내륙으로 이주하여 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 1854년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 1860년대 이후 트란스발 동부에서 광,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영국은 이 기술자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오렌지 자유국을 점유했다. 내륙에 있던 트란스발 공화국은 바다로 진출하고자 줄루 왕국 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영국은 이를 경계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의 병합을 선언했다. 1880년 12월 16일, 보어인들은 폴 크뢰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보어인들은 카키색 옷을 입어 저격에 유리했던 반면, 영국군은 붉은색 군복을 입어 피해가 컸다. 12월 20일 에서 프레토리아로 향하던 영국군 부대가 보어인들에게 항복했다. 1881년 1월 28일 에서 영국군은 기병 돌격 전술을 사용했으나 지형을 이용한 보어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2월 8일 에서도 영국군이 패배했다. 2월 27일 에서 영국군은 조지 포머로이 콜리 소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레토리아 협정(en:Pretoria Convention)이 체결되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승인하고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대영제국의 체면은 크게 손상되었다.[3]

마주바 전투


제2차 보어 전쟁은 1차 보어 전쟁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던 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 연합군과 영국 제국 간의 전쟁이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했다. 1899년 10월 11일 보어인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하여 1902년 5월 31일 영국 제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은 영국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1단계: 보어군의 공세 (1899년 10월-12월)'''

1차 보어 전쟁 이후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연합군이 1899년 10월 11일 선제 공격을 하였다.

1899년 10월 12일 선전포고 이후, 보어군은 1900년 1월까지 케이프 식민지나탈 식민지에 대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보어군은 레디스미스, 로버트 배든-파웰이 지휘하는 부대가 방어하고 있던 마페킹, 킴벌리를 포위했다. 몇 주간의 포위 공성전으로 인해 이 도시들의 병사와 시민들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포위된 도시들은 지속적인 포격에 시달렸고, 거리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12월 중순은 영국군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으며, 특히 1899년 12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암흑의 한 주"(Black Week)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은 마거스폰테인 전투, 스톰버그 전투, 콜렌소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를 당했다.

12월 10일의 스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포브스 가타크레는 오렌지 강 남쪽 50마일 지점의 철도 교차점을 탈환하려 했으나, 오렌지 자유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사상자 135명, 포로 600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영국군을 포함한 당시 세계 정규군의 일반적인 공격 방식은 보병들이 밀집한 횡대(橫隊)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는 것이었다. 반면 보어군은 대부분 특정 편제를 갖추지 않은 민병 부대였으며, 연발 소총을 장비한 기병보병이 주축이었다. 특정 대형을 갖추지 않고 분산 배치하여 적에게 접근하면 말에서 내려, 덤불과 지형의 고저차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은폐하고 정확도 높은 사격을 가했다.

12월 11일의 마거스폰테인 전투에서는 폴 샌포드 메슈엔 남작이 지휘하는 14,000명의 영국군이 킴벌리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했다. 보어군 지휘관 데 라 레이와 크론예는 영국군의 전형적인 작전 행동을 역이용하여, 군사 교범에 얽매이지 않는 장소에 참호를 파고 사수(라이플맨)를 배치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킴벌리와 마페킹을 구출하려던 영국군은 사망자 120명, 부상자 69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암흑의 한 주"의 최악의 날은 12월 15일의 콜렌소 전투였다.

레디스미스 구출을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려던 레드버스 불러가 지휘하는 21,000명의 영국군은 루이스 보타가 지휘하는 8,000명의 트란스발 공화국군의 매복에 걸렸다. 포격과 정확한 라이플 사격의 조합으로 보어군은 강을 건너려는 모든 영국군을 격퇴했다. 보어군의 사상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영국군은 1,127명의 사상자를 냈고, 더욱이 후퇴 과정에서 10문의 대포를 놓치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제2단계: 영국군의 공세 (1900년 1월-9월)'''

영국군은 증원군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1900년 2월 15일, 존 프렌치 장군의 기병대가 킴벌리를 해방시켰다.

파르데베르크 전투(en)(1900년 2월 18일~27일)에서 영국군은 보어군을 격파하고 피트 크로니에 장군과 4,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1900년 3월 13일, 오라녜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이 함락되었다. 1900년 6월 5일,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가 점령되었다.

다이아몬드 힐 전투(en)(6월 11일~12일)는 마지막 "정규" 전투였다. 영국군이 승리했지만, 보어군 사령관 보타는 보어군이 게릴라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패배로 보지 않았다.

'''제3단계: 게릴라전 (1900년 9월-1902년 5월)'''

1900년 9월, 영국군은 트란스발 북부를 제외한 두 공화국(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분견대가 주둔하는 지역만 통제할 수 있었고, 분견대가 떠나면 통제력을 상실했다. 25만 명의 영국군 병력으로는 광대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고, 분견대 간 거리가 멀어 보어 특수 공격대(코만도 부대)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보어 지휘관들은 게릴라전을 채택했다.

보어 특수 공격대는 영국군을 공격하고 증원 전에 이동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서부 트란스발의 보어 특수 공격대는 1901년 9월 이후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1년 9월 30일 Moedwil, 10월 24일 드리에폰테인(Driefontein)에서 데 라 레이(De La Rey) 장군의 군대가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1902년 2월 25일, 데 라 레이는 Wolmaranstad 근처 Ysterspruit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많은 탄약을 노획했다. 1902년 3월 7일 아침, 보어군은 Tweebosch에서 메슈엔 경(Lord Methuen)이 이끄는 영국군 후위를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메슈엔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영국군의 더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02년 3월 하순, 영국군 대규모 증원이 서부 트란스발에 파병되었다. 1902년 4월 11일, Rooiwal에서 영국군은 케프(Kemp) 장군의 군대와 접촉, 보어군의 기병 공격을 막아내고 격퇴했다. 이것은 보어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투였다.

'''영국의 강경 대응과 전쟁 범죄'''

1차 보어 전쟁으로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Oranje Vrystaat) 연합군이 영국 제국과 싸운 전쟁이다. 영국 제국은 1차 보어 전쟁을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에 대해 독립을 인정하였는데,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과 광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하고, 보어인이 선제 공격한 1899년 10월 11일에 발발하여 1902년 5월 31일에 영국 제국이 승리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영토는 영국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보어 전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규모로 치러진 전쟁이며 파급 효과도 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어 전쟁'은 이 전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제2차 보어 전쟁에서는 영국의 보어인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가 나타난다. 영국은 초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강제수용소를 설치한다. 초토화 정책으로 인하여 보어인들의 거주 및 보급 기반을 제거하였고 더불어서 집에 남아있던 보어인 부녀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이다. 에밀리 홉하우스는 강제수용소의 열악함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영국에 퍼뜨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리지 판 자일이라는 어린 소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담게되었고 영국을 비롯해 국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지 판 자일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아프리카너 여성과 아이


1900년 6월경부터 영국군 사령관 호레이쇼 키치너는 보어군 지배 지역에서 강제수용소(교정 캠프)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2만 명의 보어인과 원주민 흑인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더 나아가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광대한 농지와 농가가 불타 없어졌다. 이 수용소에서 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타버린 보어인의 가옥

3. 1. 제1차 보어 전쟁 (1880년-1881년)

제1차 보어 전쟁(1880년~1881년)은 영국 제국과 보어족 간의 첫 번째 분쟁으로, 트란스발 전쟁으로도 불린다.[3] 1880년 12월 16일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하려는 영국의 시도에 맞서 보어인들이 포체프스트룸의 낡은 요새에 틀어박히며 시작되었다.[3] 전쟁은 1881년 3월 23일 평화조약 체결로 종전되었으며,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3]

19세기 케이프에 정착했던 네덜란드계 이민자 후손인 보어인들은 아프리카 대륙 내륙으로 이주하여 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 1854년 오렌지 자유국을 세웠다. 1860년대 이후 트란스발 동부에서 광,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영국은 이 기술자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오렌지 자유국을 점유했다.

내륙에 있던 트란스발 공화국은 바다로 진출하고자 줄루 왕국 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영국은 이를 경계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의 병합을 선언했다. 1880년 12월 16일, 보어인들은 폴 크뢰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보어인들은 카키색 옷을 입어 저격에 유리했던 반면, 영국군은 붉은색 군복을 입어 피해가 컸다. 12월 20일 에서 프레토리아로 향하던 영국군 부대가 보어인들에게 항복했다. 1881년 1월 28일 에서 영국군은 기병 돌격 전술을 사용했으나 지형을 이용한 보어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2월 8일 에서도 영국군이 패배했다. 2월 27일 에서 영국군은 조지 포머로이 콜리 소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레토리아 협정(en:Pretoria Convention)이 체결되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승인하고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대영제국의 체면은 크게 손상되었다.[3]

3. 2. 제2차 보어 전쟁 (1899년-1902년)

제2차 보어 전쟁은 1차 보어 전쟁으로 독립이 인정되었던 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 연합군과 영국 제국 간의 전쟁이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했다. 1899년 10월 11일 보어인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하여 1902년 5월 31일 영국 제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은 영국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보어 전쟁은 독립 보어 공화국인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 그리고 대영 제국 간의 전쟁(1899년10월 11일 - 1902년5월 31일)이다.

영국은 수용소 전략과 황무지 전술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으면서도 장기전을 수행하여 1902년 5월 마지막 보어인들을 항복시켰다. 같은 달 베르리네팅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영국은 두 나라를 병합했다. 이후에도 영국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분단했다.

'''제1단계: 보어군의 공세 (1899년 10월-12월)'''

1차 보어 전쟁 이후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연합군이 1899년 10월 11일 선제 공격을 하였다.

1899년 10월 12일 선전포고 이후, 보어군은 1900년 1월까지 케이프 식민지나탈 식민지에 대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보어군은 레디스미스, 로버트 배든-파웰이 지휘하는 부대가 방어하고 있던 마페킹, 킴벌리를 포위했다. 몇 주간의 포위 공성전으로 인해 이 도시들의 병사와 시민들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포위된 도시들은 지속적인 포격에 시달렸고, 거리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12월 중순은 영국군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으며, 특히 1899년 12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암흑의 한 주"(Black Week)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은 마거스폰테인 전투, 스톰버그 전투, 콜렌소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를 당했다.

12월 10일의 스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포브스 가타크레는 오렌지 강 남쪽 50마일 지점의 철도 교차점을 탈환하려 했으나, 오렌지 자유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사상자 135명, 포로 600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영국군을 포함한 당시 세계 정규군의 일반적인 공격 방식은 보병들이 밀집한 횡대(橫隊)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는 것이었다. 반면 보어군은 대부분 특정 편제를 갖추지 않은 민병 부대였으며, 연발 소총을 장비한 기병보병이 주축이었다. 특정 대형을 갖추지 않고 분산 배치하여 적에게 접근하면 말에서 내려, 덤불과 지형의 고저차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은폐하고 정확도 높은 사격을 가했다.

12월 11일의 마거스폰테인 전투에서는 폴 샌포드 메슈엔 남작이 지휘하는 14,000명의 영국군이 킴벌리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했다. 보어군 지휘관 데 라 레이와 크론예는 영국군의 전형적인 작전 행동을 역이용하여, 군사 교범에 얽매이지 않는 장소에 참호를 파고 사수(라이플맨)를 배치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킴벌리와 마페킹을 구출하려던 영국군은 사망자 120명, 부상자 69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암흑의 한 주"의 최악의 날은 12월 15일의 콜렌소 전투였다.

레디스미스 구출을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려던 레드버스 불러가 지휘하는 21,000명의 영국군은 루이스 보타가 지휘하는 8,000명의 트란스발 공화국군의 매복에 걸렸다. 포격과 정확한 라이플 사격의 조합으로 보어군은 강을 건너려는 모든 영국군을 격퇴했다. 보어군의 사상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영국군은 1,127명의 사상자를 냈고, 더욱이 후퇴 과정에서 10문의 대포를 놓치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제2단계: 영국군의 공세 (1900년 1월-9월)'''

영국군은 증원군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1900년 2월 15일, 존 프렌치 장군의 기병대가 킴벌리를 해방시켰다.

파르데베르크 전투(en)(1900년 2월 18일~27일)에서 영국군은 보어군을 격파하고 피트 크로니에 장군과 4,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1900년 3월 13일, 오라녜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이 함락되었다. 1900년 6월 5일,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가 점령되었다.

다이아몬드 힐 전투(en)(6월 11일~12일)는 마지막 "정규" 전투였다. 영국군이 승리했지만, 보어군 사령관 보타는 보어군이 게릴라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패배로 보지 않았다.

'''제3단계: 게릴라전 (1900년 9월-1902년 5월)'''

1900년 9월, 영국군은 트란스발 북부를 제외한 두 공화국(트란스발 공화국 , 오라녜 자유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분견대가 주둔하는 지역만 통제할 수 있었고, 분견대가 떠나면 통제력을 상실했다. 25만 명의 영국군 병력으로는 광대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고, 분견대 간 거리가 멀어 보어 특수 공격대(코만도 부대)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보어 지휘관들은 게릴라전을 채택했다.

보어 특수 공격대는 영국군을 공격하고 증원 전에 이동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서부 트란스발의 보어 특수 공격대는 1901년 9월 이후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1년 9월 30일 Moedwil, 10월 24일 드리에폰테인(Driefontein)에서 데 라 레이(De La Rey) 장군의 군대가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1902년 2월 25일, 데 라 레이는 Wolmaranstad 근처 Ysterspruit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많은 탄약을 노획했다. 1902년 3월 7일 아침, 보어군은 Tweebosch에서 메슈엔 경(Lord Methuen)이 이끄는 영국군 후위를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메슈엔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영국군의 더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02년 3월 하순, 영국군 대규모 증원이 서부 트란스발에 파병되었다. 1902년 4월 11일, Rooiwal에서 영국군은 케프(Kemp) 장군의 군대와 접촉, 보어군의 기병 공격을 막아내고 격퇴했다. 이것은 보어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투였다.

'''영국의 강경 대응과 전쟁 범죄'''

1차 보어 전쟁으로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Oranje Vrystaat) 연합군이 영국 제국과 싸운 전쟁이다. 영국 제국은 1차 보어 전쟁을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에 대해 독립을 인정하였는데,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과 광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하고, 보어인이 선제 공격한 1899년 10월 11일에 발발하여 1902년 5월 31일에 영국 제국이 승리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영토는 영국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보어 전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규모로 치러진 전쟁이며 파급 효과도 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어 전쟁'은 이 전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제2차 보어 전쟁에서는 영국의 보어인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가 나타난다. 영국은 초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강제수용소를 설치한다. 초토화 정책으로 인하여 보어인들의 거주 및 보급 기반을 제거하였고 더불어서 집에 남아있던 보어인 부녀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이다. 에밀리 홉하우스는 강제수용소의 열악함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영국에 퍼뜨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리지 판 자일이라는 어린 소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담게되었고 영국을 비롯해 국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0년 6월경부터 영국군 사령관 호레이쇼 키치너는 보어군 지배 지역에서 강제수용소(교정 캠프)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2만 명의 보어인과 원주민 흑인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더 나아가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광대한 농지와 농가가 불타 없어졌다. 이 수용소에서 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2. 1. 제1단계: 보어군의 공세 (1899년 10월-12월)

1차 보어 전쟁 이후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연합군이 1899년 10월 11일 선제 공격을 하였다.

1899년 10월 12일 선전포고 이후, 보어군은 1900년 1월까지 케이프 식민지나탈 식민지에 대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보어군은 레디스미스, 로버트 배든-파웰이 지휘하는 부대가 방어하고 있던 마페킹, 킴벌리를 포위했다. 몇 주간의 포위 공성전으로 인해 이 도시들의 병사와 시민들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포위된 도시들은 지속적인 포격에 시달렸고, 거리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12월 중순은 영국군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으며, 특히 1899년 12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암흑의 한 주"(Black Week)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은 마거스폰테인 전투, 스톰버그 전투, 콜렌소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를 당했다.

12월 10일의 스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포브스 가타크레는 오렌지 강 남쪽 50마일 지점의 철도 교차점을 탈환하려 했으나, 오렌지 자유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사상자 135명, 포로 600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었다.

영국군을 포함한 당시 세계 정규군의 일반적인 공격 방식은 보병들이 밀집한 횡대(橫隊)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는 것이었다. 반면 보어군은 대부분 특정 편제를 갖추지 않은 민병 부대였으며, 연발 소총을 장비한 기병보병이 주축이었다. 특정 대형을 갖추지 않고 분산 배치하여 적에게 접근하면 말에서 내려, 덤불과 지형의 고저차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은폐하고 정확도 높은 사격을 가했다.

12월 11일의 마거스폰테인 전투에서는 폴 샌포드 메슈엔 남작이 지휘하는 14,000명의 영국군이 킴벌리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했다. 보어군 지휘관 데 라 레이와 크론예는 영국군의 전형적인 작전 행동을 역이용하여, 군사 교범에 얽매이지 않는 장소에 참호를 파고 사수(라이플맨)를 배치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킴벌리와 마페킹을 구출하려던 영국군은 사망자 120명, 부상자 69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암흑의 한 주"의 최악의 날은 12월 15일의 콜렌소 전투였다.

레디스미스 구출을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려던 레드버스 불러가 지휘하는 21,000명의 영국군은 루이스 보타가 지휘하는 8,000명의 트란스발 공화국군의 매복에 걸렸다. 포격과 정확한 라이플 사격의 조합으로 보어군은 강을 건너려는 모든 영국군을 격퇴했다. 보어군의 사상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영국군은 1,127명의 사상자를 냈고, 더욱이 후퇴 과정에서 10문의 대포를 놓치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3. 2. 2. 제2단계: 영국군의 공세 (1900년 1월-9월)

영국군은 증원군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1900년 2월 15일, 존 프렌치 장군의 기병대가 킴벌리를 해방시켰다.

파르데베르크 전투(en)(1900년 2월 18일~27일)에서 영국군은 보어군을 격파하고 피트 크로니에 장군과 4,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1900년 3월 13일, 오라녜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이 함락되었다. 1900년 6월 5일,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가 점령되었다.

다이아몬드 힐 전투(en)(6월 11일~12일)는 마지막 "정규" 전투였다. 영국군이 승리했지만, 보어군 사령관 보타는 보어군이 게릴라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패배로 보지 않았다.

3. 2. 3. 제3단계: 게릴라전 (1900년 9월-1902년 5월)

1900년 9월, 영국군은 트란스발 북부를 제외한 두 공화국( 트란스발 공화국 , 오라녜 자유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분견대가 주둔하는 지역만 통제할 수 있었고, 분견대가 떠나면 통제력을 상실했다. 25만 명의 영국군 병력으로는 광대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고, 분견대 간 거리가 멀어 보어 특수 공격대(코만도 부대)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보어 지휘관들은 게릴라전을 채택했다.

보어 특수 공격대는 영국군을 공격하고 증원 전에 이동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서부 트란스발의 보어 특수 공격대는 1901년 9월 이후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1년 9월 30일 Moedwil, 10월 24일 드리에폰테인(Driefontein)에서 데 라 레이(De La Rey) 장군의 군대가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1902년 2월 25일, 데 라 레이는 Wolmaranstad 근처 Ysterspruit에서 영국군을 기습하여 많은 탄약을 노획했다. 1902년 3월 7일 아침, 보어군은 Tweebosch에서 메슈엔 경(Lord Methuen)이 이끄는 영국군 후위를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메슈엔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영국군의 더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02년 3월 하순, 영국군 대규모 증원이 서부 트란스발에 파병되었다. 1902년 4월 11일, Rooiwal에서 영국군은 케프(Kemp) 장군의 군대와 접촉, 보어군의 기병 공격을 막아내고 격퇴했다. 이것은 보어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큰 전투였다.

3. 2. 4. 영국의 강경 대응과 전쟁 범죄

1차 보어 전쟁으로 독립이 인정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Oranje Vrystaat) 연합군이 영국 제국과 싸운 전쟁이다. 영국 제국은 1차 보어 전쟁을 통해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에 대해 독립을 인정하였는데,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과 광이 발견되면서 영국과 분쟁이 발생하고, 보어인이 선제 공격한 1899년 10월 11일에 발발하여 1902년 5월 31일에 영국 제국이 승리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트란스발 공화국오라녜 자유국의 영토는 영국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보어 전쟁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규모로 치러진 전쟁이며 파급 효과도 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어 전쟁'은 이 전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제2차 보어 전쟁에서는 영국의 보어인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가 나타난다. 영국은 초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강제수용소를 설치한다. 초토화 정책으로 인하여 보어인들의 거주 및 보급 기반을 제거하였고 더불어서 집에 남아있던 보어인 부녀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은 것이다. 에밀리 홉하우스는 강제수용소의 열악함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영국에 퍼뜨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리지 판 자일이라는 어린 소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담게되었고 영국을 비롯해 국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0년 6월경부터 영국군 사령관 호레이쇼 키치너는 보어군 지배 지역에서 강제수용소(교정 캠프)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2만 명의 보어인과 원주민 흑인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더 나아가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광대한 농지와 농가가 불타 없어졌다. 이 수용소에서 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결과 및 의의

보어 전쟁으로 인해서 결국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 모두 영국에게 병합된다.[5]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지만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결과였다.[5] 영국은 보어 전쟁을 승리했지만 엄청난 사상자와 자본 지출이라는 대가를 치뤘다.[5] 나아가 영국 병사들의 초라한 성과는 본국에서 영국인의 신체적 건강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5] 이 걱정은 1904년 의회가 체력 저하를 다룰 부처 간 합동 위원회를 설치할 정도로 심각했다.[5]

보어 전쟁 자체는 남아프리카 변경에서 종족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5] 그러나 영국과 아프리카너의 충돌이 단순히 국지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않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충돌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했다.[5]

이 전쟁을 영국 연방의 국가들은 대체로 영국 제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로 여겼다.[5] 실제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 병사들은 영국군과 함께 싸웠다.[5]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자신들을 연방의 일부가 아닌 식민지로 인식했기 때문에 영국의 병력모집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5] 게다가 남아프리카에 거주했던 아일랜드인들 다수는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웠다.[5] 이러한 아프리카너의 민족주의는 명백히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토대를 지녔음에도 1920년대와 그 이후까지도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영향을 준 중요한 준거점이었다.[5]

영국에 저항한 아프리카너의 분투는 러시아와 독일의 민족주의자,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분리주의자, 카를 카우츠키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지를 얻었다.[5] 러시아는 1899년 첩보원을 남아프리카로 파견했고 아프리카너 군대에 대해 러시아 장교들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다.[5] 또한 중국에도 아프리카너의 열망이 큰 영향을 미쳤다.[5] 이러한 투쟁은 중국인 관찰자들이 만주국의 성격과 중국인다움의 민족적 성격, 정치와 국가 간의 관계를 숙고할 수 있는 정치적 거울 역할을 하였다.[5]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5]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세실 로즈의 백인 우월주의를 이어받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유지했다.[5]

4. 1. 영국의 승리와 피로스의 승리

보어 전쟁으로 인해서 결국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 모두 영국에게 병합된다.[5]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지만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결과였다.[5] 영국은 보어 전쟁을 승리했지만 엄청난 사상자와 자본 지출이라는 대가를 치뤘다.[5] 나아가 영국 병사들의 초라한 성과는 본국에서 영국인의 신체적 건강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5] 이 걱정은 1904년 의회가 체력 저하를 다룰 부처 간 합동 위원회를 설치할 정도로 심각했다.[5]

보어 전쟁 자체는 남아프리카 변경에서 종족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5] 그러나 영국과 아프리카너의 충돌이 단순히 국지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않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충돌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했다.[5]

이 전쟁을 영국 연방의 국가들은 대체로 영국 제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로 여겼다.[5] 실제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 병사들은 영국군과 함께 싸웠다.[5]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자신들을 연방의 일부가 아닌 식민지로 인식했기 때문에 영국의 병력모집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5] 게다가 남아프리카에 거주했던 아일랜드인들 다수는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웠다.[5] 이러한 아프리카너의 민족주의는 명백히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토대를 지녔음에도 1920년대와 그 이후까지도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영향을 준 중요한 준거점이었다.[5]

영국에 저항한 아프리카너의 분투는 러시아와 독일의 민족주의자,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분리주의자, 카를 카우츠키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지를 얻었다.[5] 러시아는 1899년 첩보원을 남아프리카로 파견했고 아프리카너 군대에 대해 러시아 장교들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다.[5] 또한 중국에도 아프리카너의 열망이 큰 영향을 미쳤다.[5] 이러한 투쟁은 중국인 관찰자들이 만주국의 성격과 중국인다움의 민족적 성격, 정치와 국가 간의 관계를 숙고할 수 있는 정치적 거울 역할을 하였다.[5]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5]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세실 로즈의 백인 우월주의를 이어받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유지했다.[5]

4. 2. 국제 사회의 반응

영국 연방의 국가들은 대체로 영국 제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로 여겼고, 실제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 병사들은 영국군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자신들을 연방의 일부가 아닌 식민지로 인식했기 때문에 영국의 병력모집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5] 남아프리카에 거주했던 아일랜드인들 다수는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웠으며, 이러한 아프리카너의 민족주의는 1920년대와 그 이후까지도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영향을 준 중요한 준거점이었다.[5]

영국에 저항한 아프리카너의 분투는 러시아와 독일의 민족주의자,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분리주의자, 카를 카우츠키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지지를 얻었다.[5] 러시아는 1899년 첩보원을 남아프리카로 파견했고 아프리카너 군대에 대해 러시아 장교들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다.[5] 또한 중국에도 아프리카너의 열망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러한 투쟁은 중국인 관찰자들이 만주국의 성격과 중국인다움의 민족적 성격, 정치와 국가 간의 관계를 숙고할 수 있는 정치적 거울 역할을 하였다.[5]

4. 3.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영국은 보어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5]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세실 로즈의 백인 우월주의를 이어받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했다.

5. 기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보어 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배를 거쳐 독립하였으며,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심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 역사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마풍구웨 왕국(1075-1220)부터 시작하여,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1652-1806), 케이프 식민지(1795-1910), 줄루 왕국(1816-97) 등 다양한 정체들이 존재했다. 특히 보어인들이 세운 나탈리아 공화국(1839-43), 오라녜 자유국(1854-1902), 남아프리카 공화국(1852-77, 1881-1902, 1914-15) 등은 보어 전쟁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1910-61) 수립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1948년 총선거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내부 저항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졌다. 샤프빌 학살, 리보니아 재판 등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주요 사건으로 기록된다.

1990년대 협상과 국민투표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는 종식되었고, 1994년 총선거를 통해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집권하면서 민주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여전히 인종차별 문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참조

[1] 웹사이트 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0
[2] 웹인용 보어전쟁 화염 뒤에서 웃은 ‘죽음의 무기상인’ https://www.hankooki[...] 2022-10-20
[3] 서적 남아프리카의 역사 명지출판사 2006-03-13
[4] 웹인용 Sir George Grey South African History Online https://www.sahistor[...] 2022-10-20
[5] 서적 A World Connecting: 1870–1945 (A History of the World) Belknap Press: 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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