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마량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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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마량산 전투는 1951년 10월, 한국 전쟁 중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해임 이후 매슈 리지웨이가 UN군 사령관이 되었고,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제8군 및 UN 지상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38선 북쪽 10km까지 진격하려는 코만도 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제1연방 사단, 미 제1기병사단, 대한민국 제9보병사단이 참여했으며, 제1연방 사단은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을 점령한 중공군 제64군 제191사단과 대치했다. 주요 목표는 고왕산과 마량산을 점령하는 것이었고, 제3호주 왕립 연대, 로열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연대 등이 투입되었다. 전투 결과 호주군은 마량산을 점령했으나, 217고지를 완전히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터널전술 사용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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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량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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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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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한국 전쟁의 일부 |
날짜 | 1951년 10월 3일 ~ 1951년 10월 8일 |
장소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인근 마량산 |
결과 | 유엔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유엔 |
참가국 1 |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
교전국 2 | 중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매튜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제임스 카셀즈 조지 테일러 J. M. 로킹엄 프랜시스 해세트 |
지휘관 2 | 펑더화이 양더즈 쩡쓰위 셰정룽 |
병력 규모 | |
병력 1 | 320명 |
병력 2 | 1,200명 |
부대 | |
부대 1 | 영국 연방 제1사단 영국 연방 제28보병여단 캐나다 제25보병여단 영국 제29보병여단 3 RAR 2 PPCLI |
부대 2 | 제571여단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20명 사망, 104명 부상 |
사상자 2 | 283명 사망, 50명 포로 |
위치 정보 |
2. 배경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 육군 대장 더글러스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후, 매슈 리지웨이 대장으로 교체되었다. 이에 따라 1951년 4월 14일,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이 리지웨이를 대신하여 미군 제8군과 한국의 UN 지상군 사령관이 되었다.[1] 1951년 4월과 5월에 있었던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UN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1951년 7월부터 캔자스 선과 와이오밍 선이 강화되었고, 동부-중앙 지역에서 제한적인 공세가 이어졌다.[2]
한편, 임진강 전투와 가평 전투 이후 한국에서 싸우는 영국 연방 지상군의 조직에 큰 변화가 있었다. 제27 영국 보병 여단은 제28 영국 연방 여단으로 재편되었다. 호주, 영국, 캐나다,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 간의 협상을 통해, 각 연방 군의 물류 및 작전 문제를 해결하고 정치적 중요성을 높이기 위해 통합된 부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3] 1951년 7월 28일, 제1 연방 사단이 창설되었고, 제25 캐나다 보병 여단, 제28 영국 연방 여단, 제29 영국 보병 여단이 제임스 카셀스 소장의 지휘 하에 미군 제1 군단에 배속되었다. 제1 연방 사단은 서울 북방 약 48km 지점의 서부-중앙 지역 전선을 점령했다.[4] 1951년 7월부터 9월까지 개성에서 평화 회담이 열리면서 전투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5]
2. 1. 작전 구상
1951년 9월 말에서 10월 초, 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서부 지역에서 제한적인 공세인 코만도 작전을 계획했다. 코만도 작전은 38선 북쪽 10km까지 진격하여 중공군을 밀어내고, 판문점 휴전 협상에서 UN군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미 제1군단장 존 오다니엘 중장은 4개 사단 중 3개 사단(제1영국 연방 사단, 미 제1기병사단, 대한민국 제9사단)이 넓은 전선으로 진격하여 잼스타운 선을 점령하는 작전 개념을 구상했다.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참호를 구축하고 있던 중공군은 제1영국 연방 사단이 점령한 지역에서 셰정룽 사령관 휘하의 제64군 제191사단 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8영국 연방 여단은 571연대와 마주했는데, 571연대는 1개 대대가 355고지에, 2개 대대가 217고지와 317고지에 걸쳐 배치되었고, 3개 대대는 서쪽에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제1영국 연방 사단에게 할당된 임무는 임진강 남쪽 제방에서 북쪽 언덕까지의 선을 15km 이상 진격시키는 것이었다. 진격의 주요 목표는 고왕산(355고지)과 마량산(317고지)을 점령하는 것이었고, 이 임무는 제28영국 연방 여단에 할당되었다.
카셀스 소장은 잼스타운 선을 3단계로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고왕산은 제1스코틀랜드 왕립 국경 수비대, 제1킹스 쇼프셔 경보병 연대, 제3호주 왕립 연대의 지원을 받아 1단계에서 공격을 받을 예정이었다. 마량산은 제3호주 왕립 연대와 제1로열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연대가 작전의 3단계에서 점령할 예정이었다. 제16야전포병연대, 로열 뉴질랜드 포병대의 25파운더 야포와 사단 및 군단 자산인 4.2인치 박격포, 3인치 곡사포, 155mm 중포 등 총 120문 이상의 포와 박격포가 지원했다. 제8로열 아일랜드 후사르 연대의 센추리온 전차 2개 소대가 지원했다.[1]
3. 전투 경과
제1차 마량산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을 38선 북쪽으로 밀어내고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진행된 코만도 작전의 일환이었다. 영국 연방군 제28여단은 임진강 남쪽 제방에서 북쪽 언덕까지 진격하여 고왕산(355고지)과 마량산(317고지)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3]
중공군은 소규모 부대만 언덕에 배치하여 유엔군 공격을 지연시키고, 주력 부대는 유엔군이 진지를 굳히기 전에 반격하는 "이동식 진지 방어" 전술을 시험했다.[3]
제3호주 왕립 연대(3 RAR) 대대장 프랜시스 해싯 중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뉴기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개발된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전술을 활용하여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중공군을 공격하고자 했다.[3]
작전은 제16야전포병연대의 25파운더 야포와 사단 및 군단 자산인 박격포, 곡사포, 중포 등 총 120문 이상의 포와 박격포, 그리고 제8로열 아일랜드 후사르의 센추리온 전차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았다.[3]
3. 1. 355고지 (고왕산) 전투 (1951년 10월 3일 ~ 4일)
高旺山|고왕산중국어 전투는 1951년 10월 3일부터 4일까지 벌어졌다. 10월 3일 새벽 3시, 영국군 제3왕립호주연대(3 RAR) B 중대는 어둠과 짙은 안개 속에서 199고지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오전 8시까지 B 중대는 북쪽의 고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순찰하여 중공군 5명을 사살하고 1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3명이 부상을 입었다.[3] 오전 중반까지 영국군 슈롭셔 연대와 호주군은 목표를 점령했다. 오전 10시에 A 중대가 199고지의 방어를 맡았고, B 중대는 예비대로 이동했다. 영국군 센추리온 전차 1개 소대와 중기관총 소대가 199고지로 이동하여 355고지 북쪽 사면에 사격을 가해 보더러스를 지원했다. 오전 7시 15분에 포병과 박격포 사격 준비를 마치고 영국 공격 중대가 355고지를 공격했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철수해야 했다. 오후 2시 15분에 두 번째 공격이 낮은 사면의 목표에 도달했고, 밤이 되면서 이 진지는 굳혀졌다. 355고지는 10월 4일 오후까지 확보되지 못했다. 355고지 북동쪽 사면의 220고지로 알려진 두 개의 진지가 공격을 지연시켰다. 제3왕립호주연대 C 중대는 다음 날 아침 고왕산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될 예정이었으며, 호주군은 중공군 방어를 우회하여 이 진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3]3. 2. 마량산 전투 (1951년 10월 5일 ~ 8일)
10월 3일 새벽,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 B 중대는 199고지를 향해 북쪽으로 2000m 이동했고, A 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포병과 박격포 사격은 대포병 사격으로 중국인민지원군 포병 진지를 겨냥한 후, 355고지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전환되었다.[1] 같은 날, 슈롭셔 연대는 208고지를 공격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진지를 점령했다.[2][3] 오전 중반까지 슈롭셔 연대와 호주군은 목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4]199고지에 도착한 호주군은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D 중대가 C 중대와 보더러스 사이에 위치를 할당받았다. C 중대와 B 중대는 포격을 받아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5] A 중대가 199고지의 방어를 맡았고, B 중대는 예비대로 이동했다. 센추리온 전차 1개 소대와 중(重)기관총 소대가 199고지로 이동하여 355고지의 북쪽 사면에 사격을 가했다.[6] 한편, 영국 공격 중대가 355고지를 공격했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철수 후 재정비해야 했다. 이후 두 번째 공격으로 낮은 사면의 목표를 점령하고, 밤이 되면서 방어 태세를 굳혔다.
공격은 당초 일정보다 늦어졌고, 355고지는 10월 4일 오후까지 확보되지 못했다. 355고지 북동쪽 사면의 220고지에서 중공군이 영국군의 측면을 사격하면서 공격이 지연되었다. 다음 날 아침 고왕산(Kowang-San)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제3 왕립 호주 연대 C 중대가 투입될 예정이었으며, 호주군은 중공군의 방어를 우회하여 220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공군의 강력한 포병 사격 또한 진격을 늦추는 요인이 되었다. 사단 좌익에서의 지연으로 인해, 캐나다군의 공격은 11:00까지 연기되어야 했다.
3. 2. 1. 217고지 전투 (10월 5일)
제공된 소스 자료에는 '217고지 전투 (10월 5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주어진 소스 자료의 범위를 벗어나는 내용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3. 2. 2. 317고지 (마량산) 전투 (10월 5일)
10월 5일 오전 4시 45분, 영국 육군 제3왕립연대(3 RAR) B 중대와 D 중대는 계곡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원래 3 RAR은 동쪽에서 공격하고, 제1왕립노섬벌랜드퓨질리어스연대(1 RNF)는 언덕 217을 통해 남서쪽에서 공격할 예정이었지만, 퓨질리어스 연대가 언덕 217에서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여 지원을 위해 전진할 수 없었다.[3] 호주군은 어둠 속에서 계곡을 건너 산기슭에 있는 중공군 측면에 자리를 잡은 다음 동이 트자 진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A 중대는 좌익에서 기만전을 펼치고, B 중대는 하단 경사면을 정리한 다음, D 중대가 '빅터'로 알려진 중공군 주 방어 진지를 한 부대 투입 방식으로 공격하기 위해 통과할 예정이었다.[3]헨리 니콜스 대위가 지휘하는 B 중대는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진격을 시작했고, 짙은 초목으로 시야가 제한되면서 방향을 잃고 의도한 진격 축에서 오른쪽으로 쏠려 퓨질리어스 연대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3] 방향 감각을 상실한 공격 중대는 분리되었고, 대대 공격은 일련의 독립적인 중대 공격으로 바뀌었다.[3] D 중대는 천천히 계속 전진했고, 오전 11시 20분에 안개가 갑자기 걷히면서 목표물을 향해 경사면의 절반밖에 올라가지 못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호주군의 접근 방식은 중공군을 놀라게 했는데, 그들은 북쪽에서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D 중대는 '빅터'에서 중공군과 수류탄 사정거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20분간의 격렬한 교전에서 호주군은 지원 전차의 직사 화력과 포병의 간접 지원을 받아 첫 번째 목표물을 정리했고, 3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입었다.[3] 중공군의 피해는 3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나타났다.[3]
A 중대는 언덕 317로 이어지는 지맥을 따라 남서쪽으로 공격하여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3] 그러나 기만은 대체로 성공하여 중공군이 주 공세라고 믿는 공격에 대비하여 증원하게 만들었다.[3] D 중대는 자동 화기가 포함된 깊숙한 참호에 있는 중공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고지대를 따라 '유니폼' 진지를 향해 계속 공격했다. 오후 4시까지 할당된 중간 목표물을 모두 점령했다. C 중대가 그 뒤로 이동했고, 최종 목표를 점령하면서 즉시 언덕 317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10명의 포로를 잡고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3] 오후 5시까지 마량산은 호주군에게 함락되었고, 중공군은 맹렬한 포병, 박격포, 기관총 사격을 받으며 철수했다.[3] 언덕 217에서 퓨질리어스 연대는 하루 종일 중공군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지만, 여전히 진지를 점령할 수 없었다.[3]
3. 2. 3. 힌지 고지 전투 (1951년 10월 6일 ~ 8일)
10월 5일/6일 밤, 양측 모두 전투로 지쳐 있었기에 예상보다 조용했고, 호주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했다.[1] 테일러 준장은 호주군에게 다음날 마량산 정상과 힌지(The Hinge) 사이 중간 지점에 있는 숲이 우거진 작은 언덕인 시에라(Sierra) 지형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2][3] 한편, 퓨질리어스 연대는 217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예정이었다.[4] 217고지 남쪽 접근로는 중공군에 의해 너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었고, 테일러가 이 고지를 점령하려면 방어 병력의 화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를 위해 마량산 북서쪽에 있는 힌지(The Hinge)로 알려진 고지가 중요했다.[5]10월 6일 07:00, 아서 펨브로크 중위가 지휘하는 C 중대 9 소대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은밀하게 이동하며 시에라로 진격했다.[6] 병력이 부족했고 그 지형이 점령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호주군은 대신 잘 준비된 방어 위치에 많은 수의 중공군을 발견했다. 화력 지원 없이 수적으로 열세였던 호주군은 즉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수류탄과 총검을 사용하여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9 소대는 이후 13시간 동안 여러 차례의 반격을 격퇴했고, 정확한 소총과 기관총 사격으로 각 공격을 격퇴하여 중공군이 죽거나 부상당한 채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호주군 1명이 시에라에 대한 초기 공격에서 사망했고, 여러 명이 방어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중공군 사상자는 사망 19명, 부상 30명, 포로 7명이었다.

이날 퓨질리어스 연대는 남쪽에서 다시 217고지를 공격했고, 지형의 동쪽과 서쪽 측면을 우회하려 시도했다. 1 RNF는 이틀간의 전투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오후가 되자 전력이 소진되었다. 217고지를 최종적으로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힌지를 거쳐 317고지에서 능선을 따라가는 것 같았고, 따라서 호주군은 다음 날 힌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B 중대가 이후 공격을 담당하게 되었다.
10월 7일 이른 시간, 연합군 포병과 박격포 포격이 시작되어 힌지의 중공군 진지를 타격했다. 해셋 중령은 공격 부대가 출발선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3 RAR 전술 본부를 317고지로 이동시켜, 전방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화력 지원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포병이 안전한 마지막 순간까지 사격할 수 있도록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면서 공격은 마침내 08:00에 시작되었다. B 중대는 2열 종대로 능선을 따라 내려갔고, 은폐를 위해 나무와 긴 풀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중공군이 밤 사이에 철수한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선두 호주 소대가 후방에서 소화기 사격을 받았다. 호주군이 반격하면서 일련의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고, 09:20에 힌지는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호주군은 2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당했다. 중공군 사상자는 20명 이상이 사망했다.
나머지 날 동안 B 중대는 힌지에서 격렬한 간접 사격을 받았고, C 중대는 317고지에서 동일한 사격을 받았다. 20:00에 힌지와 317고지는 45분 동안 다시 집중 포격을 받았고, 이는 불가피한 중공군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 짙은 안개는 중공군의 진격을 은폐했고, 이로 인해 많은 병력이 호주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월 7일/8일 밤 동안 힌지는 대대 규모의 병력에 의해 정면과 측면에서 세 차례 공격을 받았지만 호주군은 필사적인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격퇴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방어 부대 내에서 탄약 부족이 심각해졌고, 호주군에 대한 재보급 시도는 격렬한 포격에 시달렸다. 결국, B 중대는 밤새도록, 그리고 10월 8일 05:00까지 간신히 구축한 방어선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중공군은 포기했다. 남은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중공군 제191사단은 3km 후퇴해야 했고, 전투 없이 217고지의 통제권을 포기했다. 새벽에 호주군 방어선 주변에는 120명 이상의 중공군 사망자와 부상자가 흩어져 있었다.
4. 결과
1951년 10월 8일 오전 9시, 제3왕립 호주 연대는 20명이 사망하고 104명이 부상당한 채 마량산과 힌지에서 보더러스에게 교대되었다.[2] 중공군은 317고지에서 283명이 사망(시체 수로 확인)하고 5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2] 호주군은 5일간의 전투에서 최소 2개의 중공군 대대를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2] 제1노섬벌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저항 없이 217고지를 향해 진격하여 중공군의 철수를 확인하기 위해 순찰대를 보냈고, 힌지에서 제1스코틀랜드 국왕 연대 순찰대와 만났다. 보더러스는 오전 11시에 해당 지역을 장악했으며, 217고지는 10월 9일에 점령되었다.[2]
코만도 작전은 10월 15일에 종료되었고, 미 제1군단은 제임스타운 선을 점령하고 중공군 제42, 47, 64, 65군을 격파했다. 중공군은 21,000명, 유엔군은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대부분은 미 제1기병사단에서 발생했다. 폴차지 작전은 제임스타운 선 남쪽에 남아있는 중공군/북한군 점령하의 몇몇 언덕을 10월 19일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UN의 서울 인근 보급선은 중공군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평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이 작전들은 지난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기동전의 마지막이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연상시키는 고정 방어선, 참호선, 벙커, 초소, 철조망, 지뢰밭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체된 전쟁으로 대체되었다. 코만도 작전 중 제1영연방사단은 총 58명이 전사하고 262명이 부상당했다. 3 RAR 외에도, 1 RNF는 16명이 전사하고 94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마량산은 한 달 후 제2차 마량산 전투에서 보더러스가 중공군에게 탈환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공군 수중에 남아 있었다.
4. 1. 의의
이 전투에서 영국 연방의 물류 시스템은 큰 문제없이 전투를 지원할 만큼 튼튼했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었다. 탄약, 장비, 식량, 물은 충분히 공급되었지만, 때때로 호주군은 갈증과 배고픔을 겪어야 했다.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는 5일 동안 소총탄 90만 발, 수류탄 5,000개, 박격포탄 7,000발을 사용했는데, 이 모든 것은 한국군 군무원과 호주 군인들이 먼 거리와 험한 지형을 넘어,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직접 운반했다. 이러한 재보급 작전은 큰 노력과 용기가 필요했으며, 마량산에서 많은 한국 군무원들이 죽거나 다쳤다. 사상자 후송과 탄약 재보급은 때때로 문제가 되었고, 잦은 포격과 저격으로 들것 운반조와 운반인들의 활동이 방해받아, 최전방 부대가 탄약을 소진하기도 했다.한편, 포병과 전차가 영국군과 호주 보병에게 제공한 지원은 매우 훌륭했으며, 이는 결정적인 승리 요인이었다. 전차는 종종 부적절한 지형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뉴질랜드 포병은 제3 왕립 호주 연대를 직접 지원하기 위해 5만 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포신의 페인트가 벗겨질 정도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군의 머스탱(Mustangs)을 포함한 항공 지원도 전투 내내 중요했다.
이 전투는 또한 한국 전쟁에서 중국 인민지원군(PVA)이 터널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투 중, 인민지원군 1개 중대는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U자형 터널을 방어했는데, 이 터널은 폭탄 대피소이자 반격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 중대장은 나중에 이 터널 덕분에 방어군이 UN군에게 700명의 사상자를 입히면서 자신들은 21명의 사상자만 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이후 전선 전체에 30m 깊이의 터널을 건설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교착 상태 기간 동안 UN군이 극복해야 할 강력한 장애물이 되었다.[4]
제1차 마량산 전투는 호주 육군이 한국 전쟁에서 거둔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3]
참조
[1]
간행물
Honours to Canadian Army Awards
https://www.blatherw[...]
[2]
웹사이트
Kowang-San
http://www.awm.gov.a[...]
The Australian War Memorial
2009-12-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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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ang 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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