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영원성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영원성 전투는 1626년 명나라와 후금 간에 벌어진 전투로, 명나라가 후금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중요한 사건이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연패를 거듭하며 산해관 밖의 영토를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위안충환은 닝위안을 요새화하여 방어하려 했다. 누르하치는 닝위안을 공격했으나, 위안충환의 청야 작전과 홍이포를 비롯한 강력한 방어에 막혀 패배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사망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명나라는 사기를 높이고 후금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으며, 위안충환은 승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26년 분쟁 - 루터 전투
루터 전투는 1626년 30년 전쟁 중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이끄는 덴마크-독일 연합군이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에게 패배한 전투로, 덴마크의 유럽 강대국 지위 상실과 뤼벡 조약의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영원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전투명 | 영원성 전투 |
관련 전쟁 | 명-청 전쟁 |
시기 | 1626년 2월 10일 - 2월 22일 |
장소 | 랴오닝성 영원 |
결과 | 명나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명나라 |
교전국 2 | 후금 |
지휘관 및 지도자 | |
명나라 | 원숭환 (총지휘관), 만계, 조대수, 주매, 주보 |
후금 | 누르하치 (칸) , 홍타이지, 다이샨, 망굴타이, 우네게 |
병력 규모 | |
명나라 | 영원: 20,000명, 각화도: 7,000명 |
후금 | 60,000–130,000명 (누르하치에 따르면 200,000여 명) |
사상자 및 피해 | |
명나라 | 400명 전사 (각화도: 16,000명, 일반인 포함) |
후금 | 2,750명 이상 전사, 누르하치 부상 후 사망 |
2. 배경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후금에 대패를 거듭하였다. 이에 명군은 새로운 방어 전략의 일부로 영원성을 강력한 요새로 개축하였다. 원숭환은 쑨청종의 지원으로 후금의 공격을 예상하고 홍이포를 설치하는 등 영원성의 방비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
원숭환은 영원성 밖의 모든 것을 태우는 청야 작전을 펼쳤고, 후금에 대항하는 도전의 글을 썼다. 또한 만리장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영원성에서 탈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베라고 명령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4] 만구이, 쭤푸, 주다서우, 주메이 등 휘하 장수들을 모아 결사 항전을 맹세하고, "필사즉생 행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라는 격언을 인용하며 결의를 다졌다.[2]
2. 1. 명나라의 전략 변화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후금에 연패를 거듭했다. 1621년에는 주요 도시인 선양을, 1625년에는 항구 도시인 뤼순을 잃었다.[4]1622년 병부상서로 임명된 쑨청종은 직접 후금에 대비하여 산하이관 이서의 축성을 계획했고, 원숭환은 닝위안을 요새화하여 후금의 공격에 대비하였다.[1] 그러나 동림당을 탄압하는 웨이충셴과 쑨청종의 대립이 격화되고, 부하인 마스롱이 류허 전투에서 패배하자 비판을 받아 쑨청종은 사임했다.[1]
후임 랴오둥 경략(랴오둥을 담당하는 사령관)인 가오디는 만리장성 밖의 모든 명나라 군대에 철수와 산하이관 밖의 포기를 명령했다. 원숭환은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지휘 하의 부대만으로 닝위안을 지키게 되었다. 원숭환의 지휘 하에는 2만 명이 남았다.[1]
2. 2. 후금의 닝위안 공격 결정
누르하치는 명나라 군대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리융팡의 조언을 받아 닝위안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닝위안 공략을 위해 누르하치는 직접 10만에서 13만(최소 6만)의 병력을 이끌었다.[4] 누르하치는 닝위안의 방어자들을 쉽게 항복시키기 위해 20만 군세임을 과장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원숭환은 이를 믿지 않고 약 13만 명밖에 안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2]3. 전투 과정
1626년 1월 14일[5], 누르하치가 직접 이끄는 후금군이 영원성을 공격했다. 후금군은 영원성 주변에 진을 쳤지만, 명나라 대포의 사거리를 잘못 판단하여 포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다.[4]
누르하치는 성의 남서쪽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공격을 지휘했다. 명나라 대포는 후금 기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5]
후금군은 강화된 공성 무기를 사용하여 다른 쪽에서도 공격을 시도했고, 궁수들의 엄호 사격을 통해 명군을 유인하여 "철기병"으로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명군은 통상적인 포격 외에도 독성 폭탄을 사용해 후금군의 진격을 막았고, 공성 무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일부 병력이 성벽에 도달했지만, 명나라가 미리 설치해둔 염초에 불이 붙어 방어적인 불 장벽이 만들어졌다. 원숭환은 "소모대"를 투입하여 남은 공성 무기를 처리했다. 후금군은 성의 다른 쪽도 공격했지만, 불타는 기름과 소이탄 공격에 격퇴되었다. 화약과 기름으로 덮인 침대 시트가 그들에게 떨어졌다. 후금군은 그날 밤 후퇴했다.[5]
공성전이 잘 풀리지 않자, 누르하치는 여진족 장군 우나게(武讷格)가 이끄는 몽골 기병대를 닝위안의 주요 곡창 지대인 각화도로 보내 공격하게 했다. 각화도는 방어가 허술했는데, 이는 후금군이 배가 없어 섬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각화도 주변의 물이 얼어붙어 후금군은 기병대를 이끌고 건너갈 수 있었다. 이 공격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많은 곡물 창고가 파괴되었지만, 섬 자체는 당분간 버텼다.[5]
며칠 동안 공격했으나 닝위안은 함락되지 않았고,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누르하치는 포탄에 맞아 부상당하고[5] 무크덴(Mukden)(선양)으로 철수했다.[4]
3. 1. 닝위안 방어 준비
1626년 명나라 군은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계속해서 크게 패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닝위안을 강력한 요새로 만드는 새로운 방어 전략을 추진했다. 원숭환은 쑨청종의 지원을 받아 홍이포를 설치하는 등 닝위안의 방어 시설을 최대한 강화했다.[4]그러나 쑨청종이 새 사령관으로 교체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새 사령관은 산해관 밖의 땅을 포기하고 만리장성 밖의 모든 명나라 군대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원숭환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혼자 닝위안을 방어하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5]
원숭환은 닝위안 밖의 모든 것을 태우는 청야 전술을 실시하여 후금 군대가 아무것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홍이포 등 신식 무기를 성벽에 설치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또한 탈영병을 처형하는 등 군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도시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3] 그는 "삶을 찾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음을 환영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고대 격언을 인용하며 병사들과 혈맹을 맺었다고 전해진다.[2]
3. 2. 전투 경과
1626년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는 후금에 계속 패배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방어 전략으로 영원성을 요새화하였다. 원숭환은 홍이포를 설치하는 등 영원성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새 사령관은 산해관 밖의 땅을 포기하고 만리장성 밖의 모든 명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원숭환은 이에 반발하여 영원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누르하치는 명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영원성 공격을 결심, 10만~13만 명(누르하치는 20만 명이라고 주장)의 병력을 이끌고 진격했다.[4] 원숭환은 6,800명의 병력으로 영원성 밖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청야 전술을 펼치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월 14일 후금군은 금주, 송산 등 7개 성을 공략하였으나, 영원성에서 명군에 큰 피해를 입고 누르하치도 부상당해 후퇴했다.[5] 원숭환은 후금군을 추격하여 더 큰 타격을 주었다.
후금군은 영원성 주변에 진을 쳤지만, 명나라 대포 사거리를 잘못 판단하여 포격을 받고 후퇴했다.
누르하치는 성의 남서쪽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공격을 지휘했다. 그러나 명나라 대포는 후금 기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후금군은 공성 무기를 사용하여 다른 쪽에서도 공격을 시도했고, 궁수들의 엄호 사격을 통해 명군을 유인하여 기병으로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명군은 독성 폭탄을 사용해 후금군의 진격을 막았고, 공성 무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일부 병력이 성벽에 도달했지만, 명나라가 설치해둔 염초에 불이 붙어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원숭환은 특공대를 투입하여 남은 공성 무기를 처리했다. 후금군은 다른 쪽에서도 공격했지만, 불타는 기름과 소이탄 공격에 격퇴되었다.
공성전이 잘 풀리지 않자, 누르하치는 우나게(武讷格)가 이끄는 몽골 기병대를 닝위안의 주요 곡창 지대인 각화도로 보내 공격하게 했다. 각화도는 방어가 허술했는데, 이는 후금군이 배가 없어 섬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각화도 주변의 물이 얼어붙어 후금군은 기병대를 이끌고 건너갈 수 있었다. 이 공격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많은 곡물 창고가 파괴되었지만, 섬 자체는 당분간 버텼다.
며칠 동안 공격했으나 닝위안은 함락되지 않았고,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누르하치는 포탄에 맞아 부상당하고 무크덴(Mukden)(선양)으로 철수했다.
4. 결과 및 영향
원숭환의 군대는 269개의 머리를 베어 베이징에 승전보를 알렸고, 원숭환은 우첨도어사로 승진했다.[5] 천계제는 원숭환의 주요 도시 요새화 전략을 지원하기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4]
누르하치는 부상으로 8개월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의 대칸 자리를 이었으나, 홍타이지 역시 닝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닝위안 점령 실패로 후금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발해만과 조선에 대한 압박은 강화되었다.[4]
1644년, 명나라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군에 맞서 베이징을 방어하기 위해 닝위안 수비대에 철수를 명령했지만, 수비대는 베이징 함락 전에 도착하지 못했고 숭정제는 자결했다. 이후, 만주족은 반군을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4. 1. 명나라의 승리
원숭환은 닝위안 전투의 승리로 우첨도어사로 승진했다.[5] 천계제는 원숭환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주요 도시 요새화 전략과 진저우 방어 시설 건설 사업을 돕기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닝위안 전투의 승리는 명나라의 사기를 높이고, 후금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4]4. 2. 누르하치의 죽음과 후금의 변화
누르하치는 닝위안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1626년 9월 30일 심양에서 사망했다.[5]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후금의 대칸 지위를 계승하였다.[4]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1년 후 닝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닝위안 점령에 실패하면서 후금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후금은 발해만과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5. 최후
홍타이지는 원숭환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원숭환 문서 참고)
원숭환이 죽은 이후에도 후금은 좀처럼 영원성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러나 1644년 명나라 숭정제는 영원성을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와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원성의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베이징은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숭정제는 자결했다. 그 후 후금이 반란군을 토벌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이 새롭게 세워진 제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6. 평가
제1차 영원성 전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으로 나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원숭환이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격퇴할 수 있음을 보여준 뛰어난 지휘력과 전략, 그리고 홍이포와 같은 신무기의 효과적인 활용이 돋보인다.[4] 또한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정신도 국방력 강화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명나라 조정 내부의 권력 다툼과 전략 부재가 원숭환과 같은 유능한 장수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지적된다. 닝위안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명나라는 후금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사실은 부정적 평가의 근거로 작용한다.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닝위안 수비대에 베이징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수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베이징은 함락되었고 숭정제는 자결했다.[1]
6. 1. 긍정적 평가
원숭환은 뛰어난 지휘력과 전략으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격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홍이포 등 신무기의 효과적인 활용은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4]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정신은 국방력 강화의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6. 2. 부정적 평가
명나라 조정의 권력 다툼과 전략 부재는 유능한 장수였던 원숭환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닝위안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결국 후금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1644년, 숭정제는 이자성의 반란군에 맞서 베이징을 방어하기 위해 닝위안 수비대에 베이징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닝위안 수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베이징은 반란군에 함락되었고, 숭정제는 자결했다.[1]참조
[1]
서적
明史
[2]
서적
明史
[3]
문서
公示された挑戦状は袁崇煥の血で書かれた
[4]
간행물
明熹宗实录
[5]
간행물
明季北略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