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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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로, 단성론 논쟁과 삼장 문제를 다루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국 내 종교적 화합을 위해 이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서방 교회의 반발을 샀다. 공의회는 삼장을 유죄로 판결하고 교황 비질리오의 승인을 얻었지만, 서방 교회 일부는 이를 거부하여 분열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칼케돈 그리스도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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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
---|---|
공의회 정보 | |
![]() | |
공식 명칭 |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시기 | 553년 |
이전 공의회 | 칼케돈 공의회 |
다음 공의회 |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소집자 |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의장 | 에우티키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
참석자 수 | 152명 |
주제 | 네스토리우스주의 오리게네스주의 |
문서 | 기독론에 관한 14개의 교령과 세 개의 장에 반대함.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15개의 교령. |
인정하는 교단 | 가톨릭교회 정교회 성공회 고 가톨릭교회 일부 개신교 교회 |
배경 | |
관련 용어 | (하느님의 어머니) (인간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 |
2. 배경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부정되었지만, 로마 제국 전역, 특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단성론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국 통합을 위해 단성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서방 교회와의 갈등이 발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삼장 문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비질리오는 칼케돈으로 피신하였다. 553년 5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오스의 주도로 삼장이 유죄로 배척되었다. 비질리오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승인했다. 그러나 서방 지역 주교들 중 일부는 이에 불복했고, 신학 논쟁은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졌다.
2. 1. 단성론의 확산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합 정책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제국의 중요 도시이자 크리스트교 5대 총주교좌 중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단성론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으로 뿌리가 깊었다.지중해 연안의 옛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꾀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가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임으로써 문제 해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제국 서부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불화를 초래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자신의 복심(腹心)이라고 여겨 로마 교황의 지위를 주었다고 여겨지는 비질리오도 황제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연결된 세 개의 저작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삼장문제(三章問題)」이다. 여기서 배척되었던 저작은 다음과 같다.
# 키루스의 주교 테오도레토스의 저작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규탄하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저작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지지한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페르시아의 마리스에게 보내는 편지
2. 2. 삼장 문제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적 사상은 로마 제국 영토 전체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제국의 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과 결합하여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지중해 연안의 구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꾀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가 제국의 통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제국 서방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복심이라고 생각하고 로마 교황의 지위에 앉혀주었던 비길리우스조차 그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세 개의 저작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삼장 문제"이다. 여기서 배척된 저작은 다음과 같다.
# 키루스의 테오도레토스 저작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규탄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저작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지지한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페르시아의 마리스에게 보내는 서신
로마 교황 비길리우스도 참가를 강요받았지만, 자신의 입장이 위태롭다고 보고 칼케돈으로 도망쳤다. 553년 5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카테드랄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참가자는 주교 (감독) 등 150명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회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테키오스가 지도하여 진행되었다. 공의회는 6월에 종료되었고, 먼저 제시된 세 장을 유죄로 배척했다. 교황 비길리우스는 처음에 이를 인정하는 데 난색을 표했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서방 지역의 주교(감독)들 중에는 이를 불복하는 자도 있었다.
결국, 이 신학 논쟁은 결착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3. 공의회 진행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적 사상은 로마 제국 영토 전체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제국의 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과 결합하여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지중해 연안의 구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꾀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가 제국의 통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반대로 제국 서방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불화가 생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복심으로 생각하고 로마 교황의 지위에 앉혀주었던 비길리우스조차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혔다.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세 개의 저작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삼장 문제"이다. 여기서 배척된 저작은 다음과 같다.
# 키루스의 테오도레토스 저작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규탄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저작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지지한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페르시아의 마리스에게 보내는 서신
로마 교황 비길리우스도 참가를 강요받았지만, 자신의 입장이 위태롭다고 보고 칼케돈으로 도망쳤다. 553년 5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카테드랄에서 주교 (감독) 등 150명 정도가 참가한 가운데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테키오스가 지도하여 진행되었으며, 6월에 종료되었다. 공의회는 먼저 제시된 세 장을 유죄로 배척했다. 교황 비길리우스는 처음에 이를 인정하는 데 난색을 표했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서방 지역의 주교(감독)들 중에는 이를 불복하는 자도 있었다.
결국, 이 신학 논쟁은 결착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3. 1. 소집과 진행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적 사상은 로마 제국 영토 전체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제국의 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과 결합하여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23]지중해 연안의 구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꾀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가 제국의 통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반대로 제국 서방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불화가 생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자신의 복심이라고 생각하고 로마 교황의 지위에 앉혀주었던 비길리우스조차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세 개의 저작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삼장 문제"이다. 여기서 배척된 저작은 다음과 같다.[23]
# 키루스의 테오도레토스 저작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규탄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저작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지지한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페르시아의 마리스에게 보내는 서신
로마 교황 비길리우스도 참가를 강요받았지만, 자신의 입장이 위태롭다고 보고 칼케돈으로 도망쳤다. 공의회는 553년 5월 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카테드랄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자는 주교 (감독) 등 150명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회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테키오스가 지도하여 진행되었다. 공의회는 6월에 종료되었고, 먼저 제시된 세 장을 유죄로 배척했다. 교황 비길리우스는 처음에 이를 인정하는 데 난색을 표했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서방 지역의 주교(감독)들 중에는 이를 불복하는 자도 있었다.[23]
3. 2. 비질리오의 파문과 굴복
공의회는 교황 없이 세 장을 정죄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공의회 일곱 번째 회기에서 주교들은 공의회에 출석하여 그 진행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한 비질리우스를 디프티크에서 삭제하여 그를 개인적으로 파문했지만, 나머지 서방 교회는 파문하지 않았다.[4] 이후 비질리우스는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갇히고 그의 고문들은 추방되었다. 6개월 후인 553년 12월, 비질리우스는 자신의 망설임이 고문들에 의해 오도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세 장을 정죄하는 데 동의했다.[4] 그의 공의회 승인은 두 개의 문서(553년 12월 8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티키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아마도 서방 주교단에게 보낸 두 번째 "헌장"인 554년 2월 23일)로 표현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로 공의회를 언급하지 않고 세 장을 정죄했다.[5][6]4. 공의회의 결과 및 영향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 사상은 로마 제국 영토 전체, 특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4] 지중해 연안의 옛 서로마 제국 영토를 회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꿈꾸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러한 상황이 제국 통치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제국 서방 지역 교회 지도자들과의 불화를 야기했다.[4]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이 신뢰하던 비길리우스 교황마저 자신의 뜻에 반대하자,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세 가지 저작, 즉 '삼장(三章)'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이 삼장은 다음과 같다.[4]
# 키루스의 테오도레토스 저작
#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규탄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저작
#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를 지지한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페르시아의 마리스에게 보내는 서신
553년 5월 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테키오스의 주도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비길리우스 교황은 참석을 강요받았으나 칼케돈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세 장을 유죄로 배척하는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서방 지역의 일부 주교들은 이에 불복했고, 이 신학 논쟁은 결국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졌다.[4]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공의회를 통해 제국 동부 지역의 비-칼케돈파와 칼케돈파 간의 재결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4세기 동안 여러 황제들이 화해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했다. 세 장을 단죄하고 테오도르를 사후에 파문하는 등의 조치는 세 개의 장 분열, 단일에너지설, 단의설과 같은 더 큰 분열과 이단을 초래했다.[4]
4. 1. 신학적 기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칼케돈 그리스도론을 더욱 명확하게 정의하는 데 중요한 신학적 기여를 했다. 공의회는 세 장을 정죄하는 규정에 앞서 열 개의 교리적 규정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인간적 본성과 신성한 본성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밝혔다.[13] 이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의된 '두 본성'이 삼위일체의 제2위인 그리스도, 즉 단일 인격이 가진 두 가지 속성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13] 이러한 해석은 이후 막시무스 고백자와 다마스쿠스의 요한으로 대표되는 후기 비잔틴 그리스도론의 기반이 되었다.[13]4. 2. 서방 교회의 반발과 분열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유티키우스가 주재했으며, 다른 세 명의 동방 총대주교 또는 그들의 대표가 보좌했다.[3] 교황 비질리우스도 초청받았지만, 당시 동고트족과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에서의 위험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을 거부했으며, 심지어 공의회가 그 없이 진행되는 것을 금지하는 문서(그의 '첫 번째 헌장')를 발표했다.[3]그러나 공의회는 교황 없이 세 장을 정죄하는 것을 진행했다. 공의회의 일곱 번째 회기 동안, 주교들은 공의회에 출석하여 그 진행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한 비질리우스를 디프티크에서 삭제하여 그를 개인적으로 파문했지만, 나머지 서방 교회는 파문하지 않았다. 비질리우스는 이후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갇히고 그의 고문들은 추방되었다. 6개월 후, 553년 12월에 그는 자신의 망설임이 그의 고문들에 의해 오도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세 장을 정죄하는 데 동의했다.[4] 그의 공의회 승인은 두 개의 문서(553년 12월 8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티키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아마도 서방 주교단에게 보낸 두 번째 "헌장"인 554년 2월 23일)로 표현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로 공의회에 언급하지 않고 세 장을 정죄했다.[5][6]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와 아퀼레이아의 교회 관구가 로마와의 분열을 일으켰다. 밀라노는 6세기 말에 가서야 이 정죄를 받아들였고, 아퀼레이아는 약 700년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6][7] 나머지 서방 교회는 공의회의 법령을 받아들였지만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공의회 중 하나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는 니케아나 칼케돈 공의회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서고트 스페인(레카레드가 얼마 전에 개종했음)에서는 교회들이 결코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8] 나중에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대한 소식이 로마로부터 그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것은 여섯 번째가 아닌 ''다섯 번째'' 공의회로 받아들여졌다.[9]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의 ''연대기''와 ''De Viris Illustribus''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폭군이자 정통의 박해자[10]이자 이단의 숭배자로 판단했으며,[11] 에르미안의 파쿤두스와 순교자로 여겨진 툰누나의 빅토르와 대조했다.[12]
4. 3. 단성론 문제의 지속과 단의설 논쟁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공의회가 제국 동부 지역의 비-칼케돈파와 칼케돈파 간의 재결합에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4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 내에서 양측 간의 화해 시도가 여러 황제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 공의회와 같이, 세 개의 장을 단죄하고 한때 정통 신앙의 기둥으로 널리 존경받았던 테오도르를 사후에 전례 없는 파문을 하는 것과 같은 몇몇 화해 시도는, 앞서 언급한 세 개의 장 분열과 단일에너지설 및 단의설의 출현과 같이, 더 많은 분열과 이단을 초래했다. 이러한 제안들은 각각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에너지를 가지지 않고 오직 신성한 기능이나 작용 원리만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애매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황제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르기우스 1세 총대주교의 조언 하에 610년에서 622년 사이에 공포되었다),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고 오직 신성한 의지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의지"는 본성에 따른 욕망과 식욕을 의미한다 (638년에 동일 인물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특히 고해자 막시무스에 의해 반대받았다).[4]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적 사상은 로마 제국 영토 전체에 퍼져 있었다. 특히 제국의 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과 결합하여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지중해 연안의 구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의 부흥을 꾀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문제가 제국의 통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단성론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반대로 제국 서방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불화가 생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복심이라고 생각하고 로마 교황의 지위에 앉혀주었던 비길리우스조차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는 세 개의 저작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삼장 문제"이다.
결국, 이 신학 논쟁은 결착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단의설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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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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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Conciliengeschicht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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