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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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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페소스 공의회는 431년에 열린 기독교 공의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주요 배경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네스토리우스 간의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 대신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로 선포했으며,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성과 신성을 모두 가진 한 위격이라고 선언했다. 에페소스 공의회는 이후 기독교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2. 공의회 이전의 배경

4세기에서 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론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오스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다.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것이었다.[41]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자립존재)로 병존한다고 주장하며,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grc)보다는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41]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예수의 신성을 부정함) 및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는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않고 신의 영혼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에 논박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의 교설은 테오토코스의 양자 그리스도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1]

이에 대해 키릴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휘포스타시스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반박하며, '테오토코스' 칭호를 지지했다.[41] 그는 휘포스타시스는 본성이 아닌 위격(位格)에 있다는 것은 사벨리우스주의를 배척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미 교리로 확정된 것이며,[42] 「로고스(언어)」나 「독생자」 같은 신성을 나타내는 명사(名詞)의 주어와 인성을 나타내는 술어로 이루어진 명제가 성경 및 전례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존 맥거킨은 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타고난 경쟁"을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5]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리옹 푸르비에르 대성당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도 로마-알렉산드리아 파와 네스토리우스 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풀케리아는 로마-알렉산드리아 교황들을 지지했고 황제와 그의 아내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다.[7]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고,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몰아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고자 했다.

2. 1. 신학적 배경

4세기에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론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오스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다.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 비롯된 뿌리깊은 것이었다.[41]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자립존재)로 병존한다고 주장하며,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스어: 테오토코스)보다는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41]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예수의 신성을 부정함) 및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는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않고 신의 영혼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에 논박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의 교설은 테오토코스의 양자 그리스도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1]

이에 대해 키릴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휘포스타시스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반박하며, '테오토코스' 칭호를 지지했다.[41] 그는 휘포스타시스는 본성이 아닌 위격(位格)에 있다는 것은 사벨리우스주의를 배척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미 교리로 확정된 것이며,[42] 「로고스(언어)」나 「독생자」 같은 신성을 나타내는 명사(名詞)의 주어와 인성을 나타내는 술어로 이루어진 명제가 성경 및 전례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교황 켈레스티누스 1세는 키릴루스를 지지하며 네스토리우스에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43]

2. 2. 정치적 배경

4세기에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루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고, 기독교를 양분시킨 이 논쟁은 과거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된 뿌리깊은 것이었다.[41] 존 맥거킨은 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타고난 경쟁"을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5]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도 로마-알렉산드리아 파와 네스토리우스 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풀케리아는 로마-알렉산드리아 교황들을 지지했고 황제와 그의 아내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다.[7]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의회 소집을 결정했다.[11] 네스토리우스는 이 공의회를 통해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고자 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대교구 주교들에게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특별한 장소이자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널리 사용되던 에페소스에 모이라고 지시하는 칙령(Sacra)을 발표했다.[11]

3. 에페소스 공의회 (431년)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 논쟁은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43] 키릴루스는 '테오토코스'를 주장했고,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토코스'를 주장했다.[41]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가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회의 기간 동안 혼란은 지속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이 올 때까지 회의 참가를 거부했다. 키릴루스는 먼저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공의회를 주도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교리 논쟁에서 패하고 배척당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키릴루스 일파를 탄핵했고,[30][31] 첼레스티노 1세가 보낸 로마 교황 사절단은 요한네스 일파를 파문하는 등[43] 혼란스러웠다.

주교들은 몇 주에 걸쳐 에페소에 도착했다. 다른 주교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비공식적인 토론을 벌였다.[14]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16명의 주교는 부활절 직후 가장 먼저 도착했다.[15] 키릴로스는 오순절 며칠 전에 50명의 주교와 함께 도착했다.[19]

키릴로스는 공의회를 열 의사를 발표했지만, 칸디디안은 로마와 안티오크 대표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지했다.[10]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그의 주교들의 도착이 지연되자,[24] 키릴은 6월 22일 월요일에 공식적으로 공의회를 개회했다.[26] 네스토리우스는 세 차례의 소환에도 불구하고 키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10][25] 공의회 개회를 반대하는 68명의 주교들은 항의하며 교회로 들어갔다.[27]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그의 시리아 주교들이 공의회 닷새 후에 에페소에 도착했을 때,[30] 그들은 키릴로스가 그들 없이 공의회를 시작했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한과 시리아 주교들은 자체 공의회를 열어[30][31] 키릴로스와 멤논을 모두 파면했다.[10]

교황 사절 필리포는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현안이 이미 교황 첼레스티노 1세의 서한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언급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교황 사절들은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내용이 그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낭독되기만 하면 된다고 밝혔다. 세 명의 사절은 각각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고 회의록에 서명했다.

제4차 회의에서 키릴로스와 멤논은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별도의 공의회를 소집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공의회는 그에게 출두 소환장을 발부했지만, 그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섯 번째 회기가 열렸다. 요한은 공의회를 아폴리나리우스 이단으로 비난하는 현수막을 도시에 내걸었다. 그는 다시 소환되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의회는 그와 그의 편에 선 34명의 주교를 정직시키고 파문했다.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한 이 회의에서 '테오토코스'를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어, 잠정 조치로나마 네스토리우스는 배척당했다. 433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3. 1. 공의회 진행 과정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 논쟁은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43] 키릴루스는 '테오토코스'를 주장했고, 네스토리우스는 '크리스토토코스'를 주장했다.[41]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가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회의 기간 동안 혼란은 지속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이 올 때까지 회의 참가를 거부했다. 키릴루스는 먼저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공의회를 주도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교리 논쟁에서 패하고 배척당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키릴루스 일파를 탄핵했고,[30][31] 첼레스티노 1세가 보낸 로마 교황 사절단은 요한네스 일파를 파문하는 등[43] 혼란스러웠다.

주교들은 몇 주에 걸쳐 에페소에 도착했다. 다른 주교들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비공식적인 토론을 벌였다.[14]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16명의 주교는 부활절 직후 가장 먼저 도착했다.[15] 키릴로스는 오순절 며칠 전에 50명의 주교와 함께 도착했다.[19]

키릴로스는 공의회를 열 의사를 발표했지만, 칸디디안은 로마와 안티오크 대표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지했다.[10]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그의 주교들의 도착이 지연되자,[24] 키릴은 6월 22일 월요일에 공식적으로 공의회를 개회했다.[26] 네스토리우스는 세 차례의 소환에도 불구하고 키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10][25] 공의회 개회를 반대하는 68명의 주교들은 항의하며 교회로 들어갔다.[27]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그의 시리아 주교들이 공의회 닷새 후에 에페소에 도착했을 때,[30] 그들은 키릴로스가 그들 없이 공의회를 시작했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한과 시리아 주교들은 자체 공의회를 열어[30][31] 키릴로스와 멤논을 모두 파면했다.[10]

교황 사절 필리포는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현안이 이미 교황 첼레스티노 1세의 서한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언급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교황 사절들은 공의회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내용이 그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낭독되기만 하면 된다고 밝혔다. 세 명의 사절은 각각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고 회의록에 서명했다.

제4차 회의에서 키릴로스와 멤논은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별도의 공의회를 소집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공의회는 그에게 출두 소환장을 발부했지만, 그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섯 번째 회기가 열렸다. 요한은 공의회를 아폴리나리우스 이단으로 비난하는 현수막을 도시에 내걸었다. 그는 다시 소환되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의회는 그와 그의 편에 선 34명의 주교를 정직시키고 파문했다.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한 이 회의에서 '테오토코스'를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어, 잠정 조치로나마 네스토리우스는 배척당했다. 433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3. 2. 공의회의 결정

에페소스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했다.[43]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32]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개의 분리된 인격이 아니라, 인간성과 신성을 모두 가진 한 인격이라고 선언했다.[41]

4세기에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론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중심이었다.[41]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키릴로스는 아리우스주의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하나로 합쳐진 휘포스타시스라고 주장했다.

공의회는 8개의 교령을 통과시켰다.

  • 교령 1~5는 네스토리우스와 켈레스티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 교령 6은 공의회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성직에서 해임하거나 파문하도록 규정했다.
  • 교령 7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에서 정립된 신조에서 벗어나는 것을 정죄했다.
  • 교령 8은 키프로스 교회 문제에 대한 안티오키아 주교의 간섭을 정죄하고, 일반적으로 어떠한 주교도 "과거, 또는 그의 선임자들에 의해 처음부터 관할되지 않은 지역을 관할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교부들의 교령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논 황제의 칙령에 따라 키프로스 정교회의 독립이 승인되었다.[32]

4. 공의회 이후

433년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다.[43]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고 451년 수도원에서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었다.[43] 그의 신학을 따르는 중동 등 동방 지역에서 선교 활동과 신학 교육을 벌였으며,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다.

오늘날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라크의 아시리아 동방 교회 및 그 분파인 인도의 토머스 교회(마라발파)로 계승되고 있다.[43]

4. 1. 네스토리우스파의 분열과 동방 교회의 확산

5~7세기 기독론적 스펙트럼으로 동방 교회(하늘색), 단성론파(연분홍색)와 서방 교회, 즉 동방 정교회가톨릭(연보라색)의 견해를 보여준다.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과는 다양한 공의회 버전을 따르는 추종자들 사이에 심각한 교파 분열을 초래했다.[39]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지지하는 파벌들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는 데 동의했고, 추가적인 해명이 있은 후 키릴로스의 공의회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 분열은 칼케돈 공의회로 이어지는 논쟁 과정에서 다시 발생했다.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다수의 페르시아인으로부터 로마에 기울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박해를 받아온 기독교 공동체의 고향이었다. 424년, 페르시아 교회는 외세에 대한 충성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잔틴과 다른 모든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네스토리우스 분열 이후,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와 점차적으로 연대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지배 계급의 장려에 따른 조치였다. 페르시아 교회는 수십 년 동안 교리상 점점 더 네스토리우스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페르시아와 로마 제국 내 기독교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486년, 니시비스의 대주교인 바르사우마는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인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를 영적 권위자로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489년, 메소포타미아의 에데사 학원이 네스토리우스주의 가르침으로 인해 비잔틴 황제 제논에 의해 폐쇄되자, 학원은 본래의 고향인 니시비스로 이전하여 다시 니시비스 학원이 되었고, 이로 인해 네스토리우스파의 페르시아 이민이 증가했다. 페르시아 총대주교 마르 바바이 1세 (497–502)는 교회가 테오도르를 존경하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확대하여 교회의 네스토리우스주의 채택을 굳혔다.[39]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지만, 동방에서 존속하여, 지금도 중동이나 인도의 일부에서 믿어지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라크의 아시리아 동방 교회 및 그 분파인 인도의 토마스파 교회(말라바르파)와 관련이 있다.

4. 2. 가톨릭 교회와 아시리아 동방 교회 간의 화해

1994년, 가톨릭교회와 동방 아시리아 교회 간의 공동 기독론 선언은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두 교회 사이에 존재했던 논쟁의 해결을 기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표명했으며, 아시리아 측의 "우리 하느님이자 구세주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각자의 설명과 가톨릭 측의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설명을 정당하고 옳다고 인정했다.[40]

5. 공의회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5. 1. 한국 기독교에 미친 영향

5. 2. 현대 사회에 주는 교훈

참조

[1] 서적 The Story of Christian Theology: Twenty Centuries of Tradition Reform InterVarsity Press 1999-04-01
[2] 서적 Papacy
[3] 간행물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https://archive.org/[...] Wm. B. Eerdmans 1890
[4] 서적 Mary, Mother of God
[5] 문서 McGuckin, p. 12
[6] 문서 McGuckin, pp. 19–21
[7] 서적 The A to Z of the Coptic Church Scarecrow Press
[8] 문서 McGuckin, p. 21
[9] 문서 McGuckin, pp. 22–23
[10] 서적 The ecumenical councils of the Catholic Church: a history https://books.google[...] Liturgical Press
[11] 문서 McGuckin, p. 53–54
[12] 문서 McGuckin, p. 53
[13] 웹사이트 Saint Cyril of Alexandria and the Council of Ephesus http://www.lacopts.o[...] 2011-09-25
[14] 서적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https://archive.org/[...] John Murray 2015-11-09
[15] 문서 McGuckin, p. 54
[16] 간행물 The Council of Ephesus https://books.google[...]
[17] 문서 McGuckin, p. 55
[18] 문서 McGuckin, pp. 57–58
[19] 문서 McGuckin, pp. 54–56
[20] 문서 McGuckin, p. 57
[21] 문서 McGuckin, p. 78; Nonetheless he must have been acutely aware that he could claim no legal status for his synod under imperial law until the official reading of the Emperor's Sacra had taken place.
[22] 문서 McGuckin, p. 60
[23] 문서 McGuckin, pp. 60–65
[24] 문서 McGuckin, pp. 58–59
[25] 백과사전 Council of Ephesus http://www.catholic.[...]
[26] 문서 McGuckin, p. 77
[27] 문서 McGuckin, pp. 77–78
[28]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29] 문서 McGuckin, p. 79; When Candidian finished reading the Sacra he surely realised the full extent of his mistake. The Bishops acclaimed long life to the Emperor in demonstrative professions of loyalty, but now with the text officially declaimed in the symbolic presence of the whole Episcopal gathering the Synod of Ephesus was in formal session, legally as well as canonically sanctioned.
[30] 문서 McGuckin, p. 59
[31] 서적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the death of Theodosius I to the death of Justinian https://books.google[...] Courier Dover Publications 2011-10-08
[32] 서적 The Council of Ephesus of 431: Documents and Proceedings Liverpool Press 2020
[33] 웹사이트 Extracts from the Acts of the Council of Ephesus, The Epistle of Cyril to Nestorius http://www.newadvent[...]
[34] 서적 The Church in the Age of Constantine https://books.google[...]
[35] 서적 The Encyclopedia of Eastern Orthodox Theology https://books.google[...]
[36] 서적 The Orthodox Eastern Church https://books.google[...] Kessinger 2004
[37] 간행물 The Phantom Heresy: Did the Council of Ephesus (431) Condemn Chiliasm? https://bible.org/ar[...] 2020-05-30
[38] 간행물 Millennialism and the Early Church Councils: Was Chiliasm Condemned at Constantinople? http://francisgumerl[...] 2020-05-30
[39] 웹사이트 Nestorian https://www.britanni[...] 2010-01-28
[40] 웹사이트 Common Christological Declaration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th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https://www.vatican.[...]
[41] 웹사이트 ネストリオス問題とエフェソ公会議 http://www.febcjp.co[...] キリスト教放送局 日本FEBC 2008-12-23
[42] 웹사이트 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 - 381 http://www.piar.hu/c[...] 2008-12-17
[43] 서적 教義史綱要 久島千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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