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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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정의 확장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치가 어려워지면서 발생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분할 통치 체제를 거쳐,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3세기 위기, 로마 제국의 분열, 야만족의 침입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쇠퇴했으며,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해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했다. 멸망 이후에도 로마법, 라틴어, 가톨릭교회 등 다양한 유산을 남겼으며,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등에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시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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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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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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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통칭 | 서로마 제국 |
공식 명칭 | Imperium Romanum (로마 제국) |
존속 기간 | 395년 – 476년/480년 |
이전 국가 | 로마 제국 |
이후 국가 | 이탈리아 왕국 (476년-493년) 로마 달마티아 수아송 왕국 무어와 로마 왕국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수에비 왕국 아르모리카 알레만니아 로마 치하 브리튼 |
시대 | 후기 고대 |
지위 | 제국 |
소속 제국 | 로마 제국 |
지위 설명 | 로마 제국의 서방 행정 구역 |
정치 체제 | 전제정 |
건국일 | 395년 1월 17일 |
건국 사건 |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망 |
멸망일 | 476년 9월 4일 |
멸망 사건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 퇴위 |
멸망 후 사건 |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
멸망 후 날짜 | 480년 5월 9일 |
수도 | 메디오라눔 (395년–401년) 라벤나 (401년–403년, 408년–450년, 457년–461년, 475년–476년) 로마 (403년–408년, 450년–457년, 461년–475년) 살로나/스팔라툼 (475년–480년) |
공용어 | 라틴어 |
일반 언어 | 속 라틴어 및 기타 지역 언어 |
종교 | 기독교 (국가 종교) |
화폐 | 로마 화폐 |
국가 원수 | 주요 황제 |
입법부 | 로마 원로원 |
면적 | 2,500,000 km² (395년) |
민족 | 로마인 |
주요 황제 | |
황제 | 호노리우스 |
재위 기간 | 395년–423년 |
황제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재위 기간 | 425년–455년 |
황제 | 마요리아누스 |
재위 기간 | 457년–461년 |
황제 | 율리우스 네포스 |
재위 기간 | 474년–480년 |
황제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
재위 기간 | 475년–476년 |
역사 | |
분할 통치 시작 |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할 통치 시작 (285년) |
분할 통치 시작 |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분할 통치 시작 (395년)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퇴위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퇴위 (476년) |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480년) |
기타 | |
주석 | '서로마 제국'의 가장 일반적인 종료일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의 퇴위(476년)이다. 마지막 서방 로마 황제인 율리우스 네포스는 480년에 암살되었고, 이때 서방 제국이라는 개념과 명칭은 폐지되었다. 또 다른 제안된 종료일은 6세기 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하에 이탈리아 반도 재편과 서방 로마 행정 기구 폐지 시점이다. |
2. 배경
로마 공화정은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로마에 위치한 중앙 정부가 원거리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당시 통신과 교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침략, 반란, 자연재해, 전염병 등의 소식은 배나 마상 우편 서비스를 통해 전달되었는데, 로마에 도착하여 명령이 내려지고 실행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1] 따라서 각 주의 총독들은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며 군대 지휘, 세금 처리, 사법 등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제국이 수립되기 전,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 구성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이에 로마 공화정의 영토가 분할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부의 주들을 차지했는데, 이 지역은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에피루스(대략 현대 그리스,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해안), 비티니아, 폰투스, 아시아(대략 현대 터키), 시리아, 키프로스, 키레나이카 등이었다. 이 지역들은 이전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귀족의 상당수가 그리스 출신이었으며,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의 로마 속주를 얻었는데, 이탈리아(현대 이탈리아), 갈리아(현대 프랑스), 갈리아 벨기카(현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일부), 히스파니아(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었다. 이 지역에는 해안 지역에 그리스와 카르타고 식민지도 있었지만, 켈트 부족인 갈리아인과 켈티베리아인이 문화적으로 지배적이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대략 현대 튀니지)의 작은 속주를 받았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곧 레피두스로부터 아프리카를 빼앗고 시칠리아를 자신의 영토에 추가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패배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통일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 내에는 여러 문화가 존재했고, 점진적인 로마화를 경험했다. 동부의 그리스 문화와 서부의 라틴 문화는 통합적으로 기능했지만, 정치적, 군사적 발전으로 인해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따라 제국이 재편성되었다.
2. 1. 로마 제국의 분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4등분한 첫 황제였다. 286년,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정제(Augustus)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맡았다. 293년에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의 부제(Caesar)로 임명되었다. 이 사두정 체제는 초기에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나누었고,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3세기의 대혼란과 내전에서 일부 벗어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그의 남성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황제의 세 번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노플, 소아시아, 이집트, 트라키아 등을 포함한 로마 제국의 동부를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타니아, 골, 히스파니아 등을, 막내아들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일리리쿰,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등을 물려받았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율리아누스가 황위를 물려받았으나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비아누스가 뒤를 이었지만 9개월 만에 사망했다. 36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즉위 직후 제국을 둘로 나누어 형제 발렌스에게 동부를 맡겼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권으로는 로마 제국을 혼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을, 호노리우스는 서방을 물려받았다.
로마 공화정이 확장되면서 로마 중앙 정부는 먼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어려워졌다. 제국의 광대한 영토 때문에 통신과 교통이 특히 문제였다. 제국 수립 전,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 구성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이에 영토가 분할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부 지역(아카이아, 마케도니아, 에피루스, 비티니아, 폰투스, 아시아, 시리아, 키프로스, 키레나이카)을 차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로마 속주(이탈리아, 갈리아, 갈리아 벨기카, 히스파니아)를 얻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패배시킨 후, 옥타비아누스는 통일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권력을 분할, 자신을 동방 담당 정제,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담당 정제로 삼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 동서 부제로 임명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306년 급사하고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로마 황제로 선포되자, 사두정 체제는 붕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는 로마 제국이 한 명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337년 그가 사망하자 세 아들이 공동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국은 다시 분할 통치 시대를 맞았다.
2. 2. 3세기 위기
235년 3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자신의 군대에 의해 암살되면서 로마 제국은 50년간의 내전으로 몰락하였는데, 이는 현재 3세기 위기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 제국은 야만인 침입과 로마 영토로의 이주, 내전, 농민 반란,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복합적인 압력을 받았으며, 여러 찬탈자들이 권력을 놓고 경쟁하였다. 제국 분할이라는 개념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발레리아누스(발레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제국을 서로 나누어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는 동부를, 갈리에누스는 서부를 통치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는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히면서 갈리에누스가 유일한 황제로 남게 되었다.[1]갈리에누스의 어린 아들 살로니누스와 프라이토리안 수호대장 실바누스는 현지 군단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콜로니아 아그리피나(현재 쾰른)에 거주했다. 그러나 게르만 속주 총독 포스투무스(포스투무스)는 반란을 일으켰고, 콜로니아 아그리피나 공격으로 살로니누스와 수호대장이 사망했다. 이후 혼란 속에서 갈리아 제국(갈리아 제국)이라는 독립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2]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268~270) 재위 시기에 갈리아 제국의 광대한 영토가 로마의 지배하에 회복되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부의 여러 속주가 팔미라 제국(팔미라 제국)으로 독립하여 여왕 제노비아(제노비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4]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마침내 팔미라와 그 영토를 제국에 복속시켰다. 동부를 안정시킨 그는 서부로 눈을 돌려 1년 후 갈리아 제국을 침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샤롱 전투(샤롱 전투)에서 테트리쿠스 1세(테트리쿠스 1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곧 테트리쿠스 1세와 그의 아들 테트리쿠스 2세(테트리쿠스 2세)를 사로잡았다. 제노비아와 테트리쿠스 부자는 사면받았지만, 먼저 개선식에서 행렬을 했다.[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6년 막시미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임명하고 그에게 서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넘겨줌으로써 로마 제국을 분할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계속 통치했다.[7][8][9] 293년에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그들의 부하(카이사르)로 임명되어 3세기 동안 로마 제국을 괴롭혔던 내전을 피하려는 시도였다. 이 체제는 제국을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효과적으로 분할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1 테트라르키아이다. 서쪽에서는 막시미아누스가 메디오라눔(현재 밀라노)을 수도로 삼았고, 콘스탄티우스는 트리어를 수도로 삼았다. 동쪽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시르미움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를 수도로 삼았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퇴위했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그들의 뒤를 이었다. 그들은 다시 막시미누스 2세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각각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제2 테트라르키아를 만들었다.[10]
콘스탄티우스가 306년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테트라르키아는 붕괴되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영국 레기온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선포되었다.[11][12][13][14] 하지만 서로마 제국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에 서로마 제국을 분할함으로써 테트라르키아를 부활시켰다.[15]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전체를 정복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314년부터 리키니우스와 경쟁하기 시작하여 324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16]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통일한 후, 그는 오늘날 터키에 있는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로 재건하여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고, 그것을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17] 테트라르키아는 끝났지만,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에도 로마 제국을 동서로 물리적으로 분할하는 개념은 계속되었다.[18][19]
3. 서로마 제국의 역사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4개로 나누어 통치한 첫 황제였다. 286년에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정제(Augustus)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맡았다. 293년에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 부제(Caesar)로 임명되어 제국은 효율적으로 나누어졌다. 막시미아누스는 메디올라눔을, 클로루스는 트리어를 수도로 삼았다. 동쪽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시르미움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를 수도로 삼았다. 305년에 두 정제는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클로루스가 새로운 정제가 되었으며, 막시미누스 2세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부제로 임명되어 2차 사두정이 성립되었다.
2차 사두정은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사망으로 끝났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방의 새 정제로 즉위했으나, 다른 부제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했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카눈툼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서방을 나누어 가지는 합의안을 내놓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4년에 리키니우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324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리키니우스를 꺾고, 테살로니아에 감금했다가 살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통합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사두정은 끝났지만,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한다는 개념은 남아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나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부를,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타니아, 골, 히스파니아 등을,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을 물려받았다. 달마티우스는 트라키아와 아카이아 등을 받았으나 337년에 암살되었다. 340년에 콘스탄스가 제국 서부를 통합했으나, 찬탈자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350년에 콘스탄스를 죽였다. 마그넨티우스는 3년 후 콘스탄티우스에게 패배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번영시켰고, 로마는 쇠락해 갔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율리아누스가 황위를 물려받았으나,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비아누스가 후임이었으나 9달 만에 사망했다. 36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어 제국을 2개로 나누어 형제 발렌스에게 동부를 맡겼다. 376년에 서고트인들이 동고트인들을 피해 제국 내부로 침입했고, 발렌스 황제는 이들을 발칸 반도 내에 거주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를 크게 이기고 발렌스 황제도 전사했다.
서부에서는 친기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를 거절하고, 승리의 여신 제단을 포로 로마노에서 치웠으며,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우위에 두었다.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금지되면서 반발이 더 심해졌다.
383년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동부로 쫓아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도움으로 다시 서부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392년에 프랑크족 장교에게 암살당했다. 유게니우스가 황제로 올랐으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다시 서부를 침공하여 승리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동시에 다스린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을, 호노리우스는 서방을 물려받았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최고 사령관으로, 루피누스에게 내정을 맡겼다. 스틸리코와 루피누스는 권력 경쟁을 벌였고, 알라리크 1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등이 터져 나왔다. 동서 로마 제국 모두 알라리크 1세의 군대에 맞설 군대가 없었고, 서로를 치게 하려는 생각만 했다. 알라리크 1세가 이탈리아 반도로 남진하자, 스틸리코는 라인 강 군단을 이탈리아 반도로 끌어와 막아냈다. 그러나 라인 강 군단이 철수하자, 야만족들이 국경을 넘어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고, 스틸리코는 408년에 처형당했다. 알라리크 1세와의 전쟁은 서로마 제국을 탈진 상태로 만들었고, 410년에는 로마 약탈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하락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를 죽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살해당하고,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끝났다. 페트로니우스는 황제로 즉위했으나, 제국의 내부 불안정은 증폭되었다.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발렌티니우스 3세의 딸의 약혼을 파기했는데, 이는 가이세리크에게 전쟁 빌미를 주었다. 가이세리크는 로마로 진군했고, 페트로니우스는 탈출하려다 로마 시민들에게 제압되어 사망했다. 로마 약탈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이 피해를 입었고, 제국의 상징적 수도인 로마가 약탈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페트로니우스 사후, 아비투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리키메르가 아비투스를 살해했다. 레오 1세는 새 황제를 지명하지 않았고, 마요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를 주장하게 되었다. 레오 1세도 그를 새 서로마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마요리아누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게르만족을 병사로 영입했다. 또한 함대를 꾸려 반달 왕국과 맞섰다. 마요리아누스는 아렐라테 전투에서 서고트 족과 테오도릭 2세를 꺾고 갈리아 지방을 안정화시켰다. 히스파니아 북서부 지방을 평정하고 반달 왕국과 협상을 하려 했으나, 반달족에게 돈을 받은 반역자들이 함대를 침몰시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체포되어 461년에 목이 베였다.
마요리아누스 사후, 서로마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리키메르는 꼭두각시 황제들을 내세우며 막후의 실세로 남았고, 제국은 몰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서로마 제국은 마요리아누스가 회복한 영토들을 다시 잃었으며, 고위층들의 부정부패는 심각해졌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 밖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떨어졌고, 동로마의 황제였던 레오 1세와 갈리아, 일리리아 등의 총독들은 그를 정식 황제로 인정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세베루스는 465년에 죽었고, 레오 1세는 리키메르와 협상 끝에 안테미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였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아프리카 속주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로마 군대와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고트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황제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인한 마지막 서로마 황제였다.
안테미우스는 리키메르와 갈등을 겪었고, 472년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죽이고 올리브리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 올리브리우스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않아 리키메르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조카인 군도바드가 그의 지위를 이었다. 올리브리우스는 7개월 만에 죽었고, 군도바드는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은 올리브리우스와 글리케리우스 모두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달마티아의 율리우스 네포스를 독자적으로 새로운 황제로 공인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474년에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제위를 물려받았다.
네포스 통치는 475년에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끝난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달아났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들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새 황제로 즉위시켰다. 동로마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율리우스 네포스만을 공식 황제로 인정했다.
476년 9월 4일에는 오도아케르가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위시켰다. 로물루스가 퇴위당한 이후에도 율리우스 네포스는 라벤나로 돌아오지 않았고, 달마티아에서 동로마 지원을 받으며 서로마 황제로 군림했다. 오도아케르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주장했고,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협상 사절단을 보내 정통성을 허락받으려 하였다. 제논은 오도아케르의 권위를 인정해주었고, 원로원 작위를 주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다만 정당한 서로마 황제인 율리우스 네포스를 황제로 인정하고,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만 한다는 내용도 함께 약속받았다. 오도아케르는 네포스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여 전 이탈리아에 유통시켰으나 네포스에게 실질적인 영토나 권력은 넘겨주지 않았다. 480년에 율리우스 네포스가 살해당하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침공하였으며, 오도아케르 왕국에 편입시켰다.
3. 1. 호노리우스의 통치 (395년-423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국을 동서로 나눠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는데, 이로서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더 나이가 많은 자식이었던 아르카디우스는 제국의 동방을 물려받았고, 상대적으로 어렸던 호노리우스는 제국의 서방을 물려받았다.[15] 호노리우스는 반은 로마인 혈통이고 반은 야만족 혈통이었던 스틸리코를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사권을 맡게 하였고, 정치인 루피누스에게 내정을 일임하면서 거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스틸리코와 루피누스는 자연히 최고 권력자 지위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이 둘의 갈등은 로마 군단이 제국 국경 내부로 이민해들어오려는 야만족 수 천명을 대학살한 이후에 이에 반발한 알라리크 1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대대적으로 터져나오게 된다.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모두 알라리크 1세의 군대에 맞설 충분한 군대가 없었고, 오히려 알라리크 1세를 끌여들여 서로를 치게 하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한편 이와중에 알라리크 1세가 이탈리아 반도로 남진해 들어오자, 군사를 책임지고 있던 스틸리코는 라인 강에 주둔하던 군단들을 이탈리아 반도로 끌어와 겨우 이를 막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나 라인 강 군단이 철수하자,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야만족들이 대대적으로 국경을 넘어 약탈과 학살을 일삼자 갈리아 지방의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고, 결국 스틸리코는 이에 책임을 지고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408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느리게나마 회복을 하면서 힘을 수복하고 있었던 반면, 알라리크 1세와의 전쟁은 서로마 제국을 거의 탈진 상태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410년에는 로마의 대약탈이 일어나면서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국력이 하락세로 들어서고 말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들인 호노리우스는 393년 1월 23일에 아버지와 함께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호노리우스는 10세의 어린 나이로 제국의 서부 지방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서로마 제국의 초기 수도는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듯이 메디올라눔이었으나, 알라리크 1세가 이탈리아 반도 내부까지 들어오면서 나중에는 라벤나로 천도하였다. 라벤나는 상대적으로 습지에 둘러싸여 있고, 성벽도 견고하며 항구와 가까워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지원 함대와도 연락이 용이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수비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라벤나는 이후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합법적으로 최후의 황제는 율리우스 네포스로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지원을 받으며 480년까지 버텼고 또한 갈리아 북부에선 서로마 장군 출신 시아그리우스가 '로마인의 왕'을 자처하며 486년까지 버티고 있었다.)가 74년 후에 쫓겨날 때까지 계속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남았고, 그 후에도 동고트 왕국과 라벤나 총독부의 수도로 남았다.
수도를 로마에서부터 메디올라눔이나 라벤나로 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의 경제적 중심은 단연히 로마와 부유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지방이었다. 3세기 중반에 원로원 의원들이 사병들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된 이후, 원로원 고위 계급들은 군사 생활에 관심을 잃어버렸고 5세기 즈음에 이르자 자신들이 소유한 농노들을 징집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제국의 군사력을 갈수록 깎아나갔다. 또한 서로마 제국 시기 들어서는 제국군을 유지하기 위하여 세금을 추가적으로 더 내는 것도 거부하면서 재정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때문에 서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이탈리아가 아닌 갈리아 지방과 히스파니아 지방에 크게 의존했고, 특히 트리어 지방은 나중에 군사 수도 역할도 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갈수록 군대에 흥미를 잃으며 군사 지휘관들이 대거 과거의 야만족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호노리우스의 재위기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도 가히 내우외환이 겹친 최악의 시대였다. 395년에는 알라리크 1세가 이끈 서고트족이 일리리아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며, 2년 후에는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길도가 반란을 일으켜 아프리카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당대 군지휘관이었던 스틸리코는 길도를 꺾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전투를 벌이던 도중 알라리크 1세가 이탈리아 본토 내부로 진입했다는 급보를 받고 급히 라인 강 유역과 브리타니아 지방에서 대부분의 군대를 빼내어 이탈리아 반도로 향했다. 그는 알라리크 1세를 두 번이나 꺾는 데에 성공했고, 일리리아로 퇴각하도록 몰아붙였다.

스틸리코가 라인 강 유역에서 빼낸 군대로 그나마 알라리크 1세를 격퇴하고 있던 사이, 방어군이 사라진 국경 지대는 그야말로 대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시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라인 강 북부의 야만족들은 즉시 남하하여 갈리아 지방을 약탈하였으며, 주둔군이 사라진 브리타니아 지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 3세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반란자들이 일어나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거나 브리타니아를 자신의 영향력 내에 넣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은 더 이상 브리튼 섬과 같은 벽지에까지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고, 이때문에 410년에 이르자 브리타니아 지방은 거의 제국의 손이 닿지 않는 지방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라인 강 접경지도 갈수록 군사력이 약화되어 수에비 족, 반달족, 알란족 등이 침입하게 되었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이와중에 스틸리코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재상 올림피우스의 꼬임에 설득당한다. 결국 황제는 408년에 스틸리코를 반역죄로 체포, 처형해버렸으며, 이는 스틸리코를 믿고 따랐던 수많은 군사들이 변심하여 알라리크 1세의 편에 서도록 만들었다. 알라리크 1세는 409년에 이탈리아 반도로 재진군했고,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6개 군단은 지원병으로 요청하고 나름대로 군을 운용하는 등 최선을 다해 막아보지만, 결국 협상도 410년에 결렬되었고 알라리크 1세는 로마를 약탈해버렸다. 이때의 약탈은 이후의 약탈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하였으며, 피해도 크지 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상징적 수도라는 로마가 기원전 4세기 이후 처음으로 약탈당했다는 사실만으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때문에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외세의 침입을 막아왔던 스틸리코가 처형당하자, 서로마 제국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었다. 브리튼 섬에서 봉기한 콘스탄티누스 3세는 황제를 참칭하고 브리타니아 지방을 약탈하였고, 407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갈리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 440년 이후에는 색슨족 여러 이민족들이 제국의 국경을 넘어와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를 도저히 막을 힘이 없었던 호노리우스가 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자 서로마 제국의 기강은 무너져만 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3세의 히스파니아 지방의 장군인 게론티우스가 황위를 찬탈하고자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호노리우스는 당시 휘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도움을 받아 게론티우스를 물리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3세도 숙청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탈리아 반도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자, 갈리아 지방에서는 원로원 의원인 요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참칭하였다. 직후 호노리우스는 서고트족의 아타울프에게 원병을 청했고, 아타울프는 413년에 요비누스의 군대를 꺾었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진입하려 들었으나, 이 시도도 실패하였다.
수많은 반란들을 거치며 로마 군단의 힘이 갈수록 깎여나가자, 갈리아 북부 지방은 갈수록 프랑크족의 영향권 내부로 편입되어갔다. 프랑크족이 점차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기 시작하였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418년에 남서부 갈리아 지방을 서고트인들에게 봉토로 주면서 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호노리우스는 이전의 황제가 임명한 총독들을 소환하고 대신 이민족 족장들과 왕들이 스스로 자치를 하도록 허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첫 야만왕국인 서고트 왕국이 건국되었다.
3. 2.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통치와 훈족의 침입 (425년-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즉위 이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경쟁자들을 꺾고 서로마 제국의 최고 군사령관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훈족 동맹의 힘을 빌려 서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일부나마 회복했으며, 갈리아 지방에서 대대적인 원정을 펼쳐 437년과 438년에 서고트족을 진압했다.[15] 그러나 439년에는 서고트족에게 패배하여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15]아에티우스가 갈리아를 평정하는 동안, 아프리카 총독 보니파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반달족이 스페인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모로코에 잠시 머문 뒤 동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서로마 제국은 군대 대부분을 갈리아 원정에 보내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가장 부유한 아프리카 지방을 모두 잃었다. 439년 10월, 북아프리카 최대 거점인 카르타고가 함락되고 반달 왕국이 세워졌다.[15] 400년대 이래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시는 북아프리카의 세금과 곡물에 의존했기에, 북아프리카 상실은 서로마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 반달 왕국은 함대를 조직해 지중해 해상 무역을 위협했고, 아에티우스는 440년부터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려 했다.[15]
그러나 444년 아틸라 휘하의 훈족이 침입하면서 북아프리카 재정복 계획은 중단되었다. 훈족을 동맹으로 여겼던 서로마 제국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아에티우스는 시칠리아 주둔군을 다뉴브 강 유역으로 이동시켰다.[15] 아틸라는 초기에 동로마 제국 발칸 반도의 도시들을 약탈했고, 서로마 제국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449년, 발렌티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는 권력 투쟁에서 밀리자 아틸라에게 청혼하며 자신을 구해주면 서로마 제국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451년 초 라인 강을 건너 서로마 제국으로 진군했다.[15] 훈족의 대군에 맞서 아에티우스는 게르만족과 로마 군사를 모아 방어전을 벌였고,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아틸라를 헝가리로 쫓아냈다.[15]
452년, 아틸라는 군대를 재결집하여 이탈리아를 재침공했다. 아에티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로마로 가는 길은 아틸라에게 열렸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황 레오 1세와 원로원 의원들을 보내 협상했고, 훈족은 전염병, 동로마 제국 원군 소식, 다뉴브 강 지역 반란 등 악재가 겹치자 협상 후 본거지로 돌아갔다. 453년 아틸라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다툼을 벌였고 훈족의 세력은 약화되어 더 이상 서로마 제국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15]
3. 3. 서로마 제국의 멸망 (455년-47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4개로 나누어 통치한 첫 황제였다. 286년에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정제(Augustus)로 임명하고, 자신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맡았다. 293년에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 부제(Caesar)로 임명되어 제국은 효율적으로 나누어졌다. 막시미아누스는 메디올라눔을, 클로루스는 트리어를 수도로 삼았다. 동쪽에서는 갈레리우스가 시르미움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를 수도로 삼았다. 305년에 두 정제는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클로루스가 새로운 정제가 되었으며, 막시미누스 2세와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부제로 임명되어 2차 사두정이 성립되었다.2차 사두정은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사망으로 끝났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방의 새 정제로 즉위했으나, 다른 부제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했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카눈툼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서방을 나누어 가지는 합의안을 내놓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4년에 리키니우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324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리키니우스를 꺾고, 테살로니아에 감금했다가 살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을 통합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사두정은 끝났지만,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한다는 개념은 남아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나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부를,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타니아, 골, 히스파니아 등을,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을 물려받았다. 달마티우스는 트라키아와 아카이아 등을 받았으나 337년에 암살되었다. 340년에 콘스탄스가 제국 서부를 통합했으나, 찬탈자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350년에 콘스탄스를 죽였다. 마그넨티우스는 3년 후 콘스탄티우스에게 패배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번영시켰고, 로마는 쇠락해 갔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율리아누스가 황위를 물려받았으나,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요비아누스가 후임이었으나 9달 만에 사망했다. 36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어 제국을 2개로 나누어 형제 발렌스에게 동부를 맡겼다. 376년에 서고트인들이 동고트인들을 피해 제국 내부로 침입했고, 발렌스 황제는 이들을 발칸 반도 내에 거주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를 크게 이기고 발렌스 황제도 전사했다.
서부에서는 친기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를 거절하고, 승리의 여신 제단을 포로 로마노에서 치웠으며,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우위에 두었다.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금지되면서 반발이 더 심해졌다.
383년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동부로 쫓아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도움으로 다시 서부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392년에 프랑크족 장교에게 암살당했다. 유게니우스가 황제로 올랐으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다시 서부를 침공하여 승리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동시에 다스린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을, 호노리우스는 서방을 물려받았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최고 사령관으로, 루피누스에게 내정을 맡겼다. 스틸리코와 루피누스는 권력 경쟁을 벌였고, 알라리크 1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등이 터져 나왔다.
동서 로마 제국 모두 알라리크 1세의 군대에 맞설 군대가 없었고, 서로를 치게 하려는 생각만 했다. 알라리크 1세가 이탈리아 반도로 남진하자, 스틸리코는 라인 강 군단을 이탈리아 반도로 끌어와 막아냈다. 그러나 라인 강 군단이 철수하자, 야만족들이 국경을 넘어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고, 스틸리코는 408년에 처형당했다. 알라리크 1세와의 전쟁은 서로마 제국을 탈진 상태로 만들었고, 410년에는 로마 약탈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하락했다.
발렌티아누스 3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등 주위의 꼬드김을 받아 아에티우스를 죽였다. 그러나 발렌티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를 죽인 후 얼마 되지 않아 페트로니우스를 추종하는 군 장교에 의해 살해당하고,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끝났다. 페트로니우스는 황제로 즉위했으나, 제국의 내부 불안정은 증폭되었다.
페트로니우스는 가이세리크의 아들과 발렌티니우스 3세의 딸의 약혼을 파기했는데, 이는 가이세리크에게 전쟁 빌미를 주었다. 가이세리크는 로마로 진군했고, 페트로니우스는 탈출하려다 로마 시민들에게 제압되어 사망했다. 페트로니우스는 11주 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로마 약탈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이 피해를 입었고, 제국의 상징적 수도인 로마가 약탈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페트로니우스 사후, 아비투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리키메르가 아비투스를 살해했다. 레오 1세는 새 황제를 지명하지 않았고, 마요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를 주장하게 되었다. 레오 1세도 그를 새 서로마의 황제로 인정하였다.
마요리아누스는 로마군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게르만족을 병사로 영입했다. 또한 함대를 꾸려 반달 왕국과 맞섰다. 마요리아누스는 아렐라테 전투에서 서고트 족과 테오도릭 2세를 꺾고 갈리아 지방을 안정화시켰다. 히스파니아 북서부 지방을 평정하고 반달 왕국과 협상을 하려 했으나, 반달족에게 돈을 받은 반역자들이 함대를 침몰시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체포되어 461년에 목이 베였다.
마요리아누스 사후, 서로마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리키메르는 꼭두각시 황제들을 내세우며 막후의 실세로 남았고, 제국은 몰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서로마 제국은 마요리아누스가 회복한 영토들을 다시 잃었으며, 고위층들의 부정부패는 심각해졌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 밖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떨어졌고, 동로마의 황제였던 레오 1세와 갈리아, 일리리아 등의 총독들은 그를 정식 황제로 인정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세베루스는 465년에 죽었고, 레오 1세는 리키메르와 협상 끝에 안테미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였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아프리카 속주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로마 군대와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고트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황제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인한 마지막 서로마 황제였다.
안테미우스는 리키메르와 갈등을 겪었고, 472년에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죽이고 올리브리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세웠다. 올리브리우스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않아 리키메르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조카인 군도바드가 그의 지위를 이었다. 올리브리우스는 7개월 만에 죽었고, 군도바드는 글리케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은 올리브리우스와 글리케리우스 모두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달마티아의 율리우스 네포스를 독자적으로 새로운 황제로 공인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474년에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제위를 물려받았다.
네포스 통치는 475년에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끝난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달마티아로 달아났고,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들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새 황제로 즉위시켰다. 동로마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율리우스 네포스만을 공식 황제로 인정했다.
476년 9월 4일에는 오도아케르가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퇴위시켰다. 로물루스가 퇴위당한 이후에도 율리우스 네포스는 라벤나로 돌아오지 않았고, 달마티아에서 동로마 지원을 받으며 서로마 황제로 군림했다. 오도아케르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주장했고,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협상 사절단을 보내 정통성을 허락받으려 하였다. 제논은 오도아케르의 권위를 인정해주었고, 원로원 작위를 주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다만 정당한 서로마 황제인 율리우스 네포스를 황제로 인정하고,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만 한다는 내용도 함께 약속받았다. 오도아케르는 네포스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여 전 이탈리아에 유통시켰으나 네포스에게 실질적인 영토나 권력은 넘겨주지 않았다. 480년에 율리우스 네포스가 살해당하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침공하였으며, 오도아케르 왕국에 편입시켰다.
4. 서로마 제국의 유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에도, 그 자리를 차지한 게르만족 왕들은 로마법을 따르고 로마 문화를 선진 문화로 여겨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아리우스파를 따르기도 했지만, 결국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교황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러한 개종은 로마인들과의 융합을 촉진했고, 교회는 게르만 왕국들과 협력하여 안정을 찾는 데 기여했다. 게르만족들은 초기에는 부족법과 관습법을 따랐으나, 점차 체계적인 로마법을 받아들였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집대성되어 현재 약 150여 개국에서 사용되는 대륙법으로 발전했다.
라틴어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군으로 발전하여 현재 약 9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는 영어와 독일어 같은 게르만계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가톨릭 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제례용 언어로 사용하여 고전기의 형태로 보존했다. 1969년까지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미사를 보았고, 18세기까지는 외교, 학문 분야에서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라틴 알파벳은 I가 I와 J로, V가 V와 U로, 일부 게르만어권에서는 W로 분화되었다. 로마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에 밀려났지만, 여전히 일부 사용되고 있다.
서로마 제국의 가장 큰 문화적 유산은 가톨릭 교회였다. 제국 멸망 후에도 가톨릭은 서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라 국가 간 분쟁을 조절하고 왕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랐다. 로마가 여러 차례 침략당했을 때에도 서부, 중부, 북부 유럽인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신봉하고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인정했다. 최초로 로마 교회로 개종한 야만족 국왕은 프랑크족의 클로도베쿠스 1세이며, 서고트족도 교황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충성을 맹세했다.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면서 교황의 권위를 높였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반발을 샀고,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레오 3세는 유럽의 황제는 교황의 인정 없이는 즉위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바티칸 시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교황령을 설치하고 통치했다. 교황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에까지 이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 원로원은 제국 멸망 이후에도 살아남아 오도아케르와 서고트 국왕들의 시기에도 권력을 유지했다. 498년에는 심마쿠스를 교황으로 옹립하기도 했다. 원로원은 최소 6세기까지 존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교황 호노리오 1세의 명령으로 원로원 건물은 성당으로 전환되었다.
4. 1. 정치와 법
발렌티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업적에 위협을 느껴 그를 살해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암살당하며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막을 내렸다. 이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무능함과 가이세리크와의 갈등으로 인해 로마는 약탈당하고 제국은 더욱 불안정해졌다.[15]페트로니우스 사후 아비투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반로마적인 정책으로 인해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제국의 부흥을 꾀했으나, 그 역시 리키메르에게 암살당했다.[15]
마요리아누스 사후, 리키메르는 꼭두각시 황제들을 내세우며 권력을 휘둘렀고,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했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외부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과 협력했으나 리키메르와의 갈등 끝에 살해당했다.[15]
올리브리우스와 글리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율리우스 네포스가 동로마 제국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으나, 오레스테스에게 쫓겨나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즉위했다. 그러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결국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했다.[15]
서로마 제국의 최종 붕괴는 게르만계 군사령관의 지배를 받는 무능한 꼭두각시 황제들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리키메르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어 꼭두각시 황제들을 임명했고, 이들은 로마의 권위 붕괴와 영토 상실을 막지 못했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 외부에서 인정받지 못했다.[21]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리키메르와의 갈등 끝에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올리브리우스의 짧은 통치 후 군도바드가 리키메르의 뒤를 이었고, 글리세리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거부하고 율리우스 네포스를 지지했다.[21]
네포스는 글리케리우스를 폐위했지만, 오레스테스에게 쫓겨났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네포스만을 인정했다.[21]
오도아케르는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로물루스를 폐위했지만, 네포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지만, 네포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지 않았다. 네포스의 살해 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정복했다.[21]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과의 영토 분쟁, 야만족의 침입, 로마 약탈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시대에는 동서 로마 제국의 법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교황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황제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황제가 아닌 야만족 출신 장군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16][17][18][19][20]
리키메르 시대에는 황제가 부재한 채 방치되는 일도 있었고, 서로마에서 황제는 꼭두각시로서조차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21]
4. 2. 언어와 문화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영토는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분할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서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서로마 제국 시대의 종말은 오도아케르에 의한 476년 9월 4일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살해까지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 서방 황제의 멸망을 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학문 분야에서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후술).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중세에도 그리스화를 면하고, 고대 로마식의 문화와 전통이 보존되었다.[3][4]
서로마 제국 내에 정착한 야만족들도 점차 가톨릭 교회에 감화되어 로마화되었고, 가톨릭 신앙과 로마의 문화, 로마법을 채택하여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식했다.[5]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모두 후대 사람들의 명칭이며, 당시 국가 법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했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2][3]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라는 두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방 영토에서 라틴어가 사어가 된 후에도, 서로마 제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라틴어가 수세기에 걸쳐 유지되었다.[52] 게르만어 등으로부터의 영향은 군사 관련 몇몇 차용어에 국한되었다.[52][53][54] 시대가 내려오면서, 라틴어는 8세기경부터 12세기경까지 완만하게 변화하였고, 지역별 분화가 명확해졌다.[55] 이렇게 지역별로 분화된 라틴어 방언이 현대의 로망스어족[56][52][55]이며, 중세에는 단순히 "서투른 라틴어" 중 하나였다.[55]
읽고 쓰는 능력은 크게 저하되었지만, 공식 문서와 학술 관련 서적은 계속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서방에서 그리스어의 지위가 상실됨에 따라,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라틴어 지위는 향상되었다. 라틴 문자에는 J, K, W, Z가 추가되어 문자 수가 증가했다. 10세기가 되면 유럽에 아라비아 숫자가 전해졌고, 로마 숫자는 시계의 문자판이나 책의 장 구분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16세기경에는 대부분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되었다. 라틴어는 오늘날에도 의학, 법학, 외교의 전문가와 연구자에게 이용되고 있으며, 학명의 대부분이 라틴어이다. 미사 집례에는 1970년까지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라틴어는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의 게르만어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3. 종교
가톨릭 교회는 서로마 제국에서 로마의 여러 기관들을 서서히 대체해 나가면서, 5세기 후반에는 야만족의 위협 앞에서 로마 시의 안전을 위해 중재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게르만계 민족들은 대개 아리우스파 신자였지만, 그들도 곧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중세 중엽(9세기 - 10세기)까지 중앙유럽, 서유럽, 북유럽의 대부분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칭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제국으로서의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한 후에도, 교회의 지원을 받은 선교사들은 북쪽 끝까지 파견되어 유럽 전역에 남아 있던 이교를 몰아냈다.[2][3]5. 서로마 제국 부활 시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로마법은 게르만족 왕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로마 문화는 선진 문화로 여겨져 적극 수용되었다.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를 따랐지만 기독교로 개종했고, 로마 교황의 권위에 복종했다. 이는 로마인들과의 융합을 촉진하고 교회를 통해 게르만 왕국의 안정을 가져왔다. 게르만족은 로마법을 받아들였고,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집대성되어 현대 대륙법으로 발전했다.[24]
라틴어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로망스어군으로 발전하여 약 9억 명이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는 영어와 독일어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가톨릭 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제례용 언어로 보존했다. 1969년까지 라틴어 미사가 진행되었고, 18세기까지 학문 분야에서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라틴 알파벳은 I가 I와 J로, V가 V와 U로 분화되었고, 일부 게르만어권에서는 W도 분화되었다. 로마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에 밀려 사용이 줄었다.[25]
가톨릭은 서로마 제국의 가장 큰 문화적 유산으로, 제국 멸망 후에도 서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라 국가 간 분쟁을 조절하고 왕들을 지배했다. 대부분의 서부, 중부, 북부 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믿고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인정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로마 교회로 개종한 최초의 야만족 국왕이며, 서고트족도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6]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에게 서로마 황제 관을 씌워주면서 교황의 권위는 정점에 달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반발을 샀고, 동서 유럽의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레오 3세는 교황의 인정 없이는 황제 즉위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바티칸 시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교황령을 설치했다. 교황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로마 최고 종교 지도자 직함을 현대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 칭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가졌던 영예로운 칭호이다.[27]
로마 원로원은 제국 멸망 후에도 오도아케르와 서고트 왕들 치하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498년에는 교황 후보를 반대하고 심마쿠스를 교황으로 옹립하기도 했다. 원로원은 최소 6세기까지 존속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원로원 건물은 630년에 교황 호노리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전환되었다.[28]
동로마 제국의 제논은 480년에 서로마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후 황제 직위를 폐지하고 유일한 로마 황제를 주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재정복 전쟁을 통해 서부 영토를 되찾았으나, 통치의 한계와 전염병, 반군으로 인해 후퇴했다.[29]
서로마 황제위 부활 시도는 고트 전쟁 시기 벨리사리우스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제안한 서고트족에 의해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기만 전술로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라벤나를 점령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를 의심하여 동부로 소환했다.[30]
582년 티베리우스 2세는 두 명의 부제를 선정하여 제국을 동서로 나누려 했으나, 부제 중 한 명이 황위를 거부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총독부라는 행정 단위가 만들어져 라벤나 총독부와 북아프리카 총독부로 서부 지역을 관할했다.[31]
'통일된 기독교 제국'이라는 로마 제국의 이상은 서유럽 지배자들에게 로망을 불러일으켰다. 800년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에 의해 '로마인들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을 새로운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888년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하고, 924년 베렌가리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황제' 칭호는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32]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생겨나면서 '로마 황제' 칭호가 부활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라고 칭했다. 이 칭호는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33]
샤를마뉴 대제와 레오 3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 전체의 유일하고 정당한 황제라고 불렀다. 레오 3세는 이레네 여황을 역적이라고 비판하고 동로마 황제를 공허한 명칭이라고 폄하했다. 레오 3세는 샤를마뉴 대제를 콘스탄티노스 6세의 계승자로 임명하여 동로마 황제의 정통성을 빌리려 했다. 니키포로스 1세는 샤를마뉴 대제의 황제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미카엘 1세는 '프랑크족의 황제'로만 인정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동로마 제국은 서로를 비판하며 스스로를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칭했고, 동로마 제국은 카롤링거 왕조를 '프랑크족의 황제', 카롤링거 왕조는 동로마 제국을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불렀다.[34]
1453년 동로마 제국, 1805년 신성로마제국 멸망 후, '황제' 칭호는 서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자를 칭했으며, 독일 제국도 황제를 주장했다. 이 제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했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멸망하여 유럽에서 황제위는 사라졌다.[35]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의 폐위와 오도아케르의 등장은 백성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오도아케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황제에게 복종했고, 로마 제국의 전통 안에서 통치했다. 그는 로마 행정 시스템을 사용했고, 동로마 황제의 이름과 초상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했다.[36]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 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에 자신의 통치를 확립했다.[37] 오도아케르는 로마 상원의 지지로 권력을 확립했고, 상원의 권력은 오도아케르 치하에서 증가했다. 'S C'(Senatus Consulto) 명문이 새겨진 구리 주화가 발행되었고, 이는 아나스타시우스의 화폐 개혁 기반이 되었다.[38]
오도아케르 치하에서 서로마 집정관이 계속 임명되었고, 동로마 궁정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카이키나 데키우스 막시무스 바실루스가 첫 집정관이었고, 483년에 이탈리아 총독이 되었다. 480년부터 493년까지 11명의 집정관이 더 임명되었다.[39]
오도아케르는 로마 총독처럼 통치했지만, 동로마 황제 제논은 그를 라이벌로 여겼다. 제논은 테오도릭 대왕에게 오도아케르를 물리치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40]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를 두 번 전투에서 물리쳤고, 493년 라벤나와 이탈리아를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를 살해했다.[41]
테오도릭은 오도아케르의 역할을 이어받아 이탈리아의 대리 총독이자 명목상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신하인 *파트리키우스*로 통치했다. 테오도릭은 로마 행정 시스템을 계속 사용했고, 행정직은 로마인들로 채워졌다. 상원은 기능을 계속했고, 제국의 법은 로마 인구를 다스리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테오도릭은 법을 제정할 권리가 없었고, 포고령이나 해석만 내릴 수 있었다. 군대와 군사 직책은 고트족이 독점했다.[42]
테오도릭은 외교 정책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딸들을 서고트 왕 알라리크 2세와 부르군트 왕자 지기스문트와 결혼시켰다. 그의 여동생은 반달 왕 트라사문드와 결혼했고, 그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의 누이와 결혼했다.[43] 6세기 초 테오도릭의 지배는 서쪽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었다. 476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관되어 있던 서로마 제국의 옥새는 497년에 라벤나로 반환되었다. 테오도릭은 황제 칭호를 취할 수 없었는데, 서로마 궁정 개념이 폐지되었고, "야만인" 유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44]
526년 테오도릭이 죽자 그의 동맹 네트워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고트족은 자치권을 되찾았고, 오스트로고트족과 반달족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했다.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가장 강력한 야만인 왕국으로 부상했다.[45]
아말라순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지지하고 그가 반달 전쟁 중 시칠리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534년 아탈라리크가 죽자, 아말라순타는 테오다하드를 왕으로 즉위시켰지만, 아말라순타는 투옥되었고 처형되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하고 되찾기 위한 *카수스 벨리*가 되었다.[46]
6. 역대 황제
황제 | 재위 기간 |
---|---|
호노리우스 | 395년~423년 |
요하네스 | 423년~425년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425년~455년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455년 |
아비투스 | 456년~457년 |
마요리아누스 | 457년~461년 |
리비우스 세베루스 | 461년~465년 |
안테미우스 | 467년~472년 |
올리브리우스 | 472년 |
글리케리우스 | 473년~474년 |
율리우스 네포스 | 474년~475년 |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 475년~476년 |
황제 | 재위 기간 |
---|---|
막시미아누스 | 286년–305년[1] |
콘스탄티우스 1세 | 293년–305년[2] |
콘스탄티우스 1세 | 305년–306년[3] |
세베루스 2세 | 305년–306년[4] |
세베루스 2세 | 306년–307년[4] |
콘스탄티누스 1세 | 306년–307년[4] |
막센티우스 | 306년–312년[4] |
막시미아누스 | 306년–308년[5] (두 번째 통치) |
리키니우스 | 308년–313년[4] |
발렌스 1세 | 317년 (서로마의 명목상 황제, 동로마에서만 통치) |
마르티니아누스 | 324년 (서로마의 명목상 황제, 동로마에서만 통치) |
황제 | 재위 기간 |
---|---|
콘스탄티누스 1세 | 306년–337년 (단독 황제: 324년–337년)[4] |
크리스푸스 | 317년–326년 |
콘스탄티누스 2세 | 337년–340년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황제: 337년–340년)[4] |
콘스탄스 1세 | 337년–350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황제: 337년–340년, 서로마 황제: 340년–350년)[4] |
마그넨티우스 | 350년–353년[6] (동방에서 인정받지 못함) |
베트라니우스 | 350년[7] (경쟁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인정됨) |
네포티아누스 | 350년[8] (경쟁 황제; 로마 원로원에 의해 인정됨) |
콘스탄티우스 2세 | 351년–361년 (동로마 황제: 337년–351년, 단독 황제: 351년–361년)[4]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 351년–354년 |
율리아누스 | 355년–361년[4] |
율리아누스 | 361년–363년 (단독 황제)[4] |
요비아누스 | 363년–364년 (단독 황제)[4] |
황제 | 재위 기간 |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364년–375년[4] |
그라티아누스 | 367년–375년[4] |
그라티아누스 | 375년–383년[4]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375년–383년[4]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383년–392년[4] |
마그누스 막시무스 | 383년–388년[9][10] |
빅토르 | 383/384년–388년[9][11][12] |
황제 | 재위 기간 |
---|---|
테오도시우스 1세 | 394년–395년 (동로마 황제: 379년–394년, 단독 황제: 394년–395년)[4] |
호노리우스 | 395년–423년[4] |
콘스탄티누스 3세 | 409년–411년[4] (동로마 황제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호노리우스에게는 인정받았으며, 원로원에서도 받아들였음) |
콘스탄스 2세 | 409년–411년[4] (호노리우스와 동로마 황제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만 인정받았고 원로원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음) |
프리스쿠스 아탈루스 | 409년–410년[13] (호노리우스와 동로마 황제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원로원에서 받아들였음) |
콘스탄티우스 3세 | 421년[4] |
요안네스 | 423년–425년[13] (동로마 황제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원로원에서 받아들였음)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425년–455년[4]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455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4] |
아비투스 | 455년–456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14] |
마요리아누스 | 457년–461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15] |
리비우스 세베루스 | 461년–465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4] |
안테미우스 | 467년–472년[4] |
올리브리우스 | 472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4] |
글리케리우스 | 473년–474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4] |
율리우스 네포스 | 474년–475년 (망명 475년–480년)[16]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 475년–476년 (동로마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함)[16] |
참조
[1]
백과사전
서로마 제국
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
[2]
백과사전
서로마 제국
세계대백과사전
[3]
백과사전
서로마 제국
일본대백과전서
[4]
백과사전
서로마 제국
백과사전 마이페디아
[5]
서적
파랑크 1976
[6]
서적
라틴어 비문으로 즐기는 고대 로마
[7]
서적
남천 2015
[8]
서적
남천 2015
[9]
서적
상수 1999
[10]
서적
상수 1999
[11]
서적
오스트로고르스키 2001
[12]
웹사이트
Pontifex Maximus
http://www.bartleby.[...]
Columbia Encyclopedia Sixth Edition
2006-08-15
[13]
서적
상수 1999
[14]
서적
남천 2013
[15]
서적
상수 1999
[16]
서적
오스트로고르스키 20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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