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SS의용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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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2SS의용기병사단은 1944년 4월에 창설된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 기병 사단이다. 헝가리계 독일인 징집병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를 기려 명명되었다. 루마니아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1944년 10월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를 축출하는 '판처파우스트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4년 11월 부다페스트 방어전에 참여했으나, 소련군의 포위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해체되었다. 생존자들은 제37SS 의용 기병사단에 편입되었다.

제22SS의용기병사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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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SS의용기병사단 문양 (1944년 10월부터 사용)
명칭22. SS-프라이빌리겐-카발레리-디비전
헝가리어 명칭22. SS-욀ön트es-로바슈하도쉬탈리
표어나의 명예는 충성!
별칭'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어: '마리아 테레지아')
별칭 (독일어)'분더바페 디비전' ('경이로운 무기 사단')
역사
활동 기간1944년 4월 29일 – 1945년 2월 14일
창설1944년 4월
해체1945년 2월
규모
1944년 9월 20일12,453명
1944년 10월 25일13,911명
1944년 12월 26일11,345명
국가
소속
23px
23px
무장친위대
충성 맹세나치 독일
역할 및 구조
종류기병
역할척탄병
지휘 구조IX SS 산악 군단
제3 기갑 군단
주둔지
위치비치케
부다페스트
죄르
키슈베르
레트샤그
자姆베크
지휘관
주요 지휘관SS-Brigadeführer, 아우구스트 체헨더 (1944년 4월 21일 – 1945년 2월 11일)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독소 전쟁
판처파우스트 작전
부다페스트 공세
부다페스트 포위전
콘라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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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성 및 초기 활동

1943년 12월, 제8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제17SS기병연대는 새로운 SS 기병 사단의 골격을 형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4년 4월 29일, SS-지도본부(SS-Führungshauptamt)는 제17SS기병연대를 기반으로 사단을 창설하도록 승인했다. 이 부대는 새로운 사단 편성을 시작하기 위해 헝가리키슈베르로 보내졌다. 플로리안 가이어의 병력이 사단의 핵심을 형성하는 동안, 병력의 대부분은 독일과 헝가리 간의 합의에 따라 무장친위대로 전출된 헝가리계 독일계 주민(민족 독일인) 징집병이었다.

사단은 제22SS 의용 기병 사단 마리아 테레지아로 명명되었다. 이 명칭은 18세기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를 통치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사단의 상징인 수레국화는 사단 방패에 새겨졌다. 그러나 일부 저자는 사단이 공식 문서에서 항상 제22SS 의용 기병 사단으로 불렸으며,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기록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 후 몇 달 동안, 사단은 주로 헝가리제 무기, 차량 및 장비를 갖추고 키슈베르, 죄르, 부다페스트에서 조직 및 훈련을 계속했다. 1944년 6월까지 사단의 병력은 4,900명에 달했다.

2.1. 루마니아 전선

1944년 8월,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훈련 중인 사단에서 제52SS의용기병연대를 루마니아 전선으로 추출하기로 결정했다. 제52SS의용기병연대는 포병, Flak, 정찰 부대가 배속되어 비데만 전투단(Kampfgruppe Wiedemann)으로 편성되었다. 이 전투단은 헝가리 귈러-살론터에서 루마니아 아라드로 수송되어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의 제3기갑군단에 배속되었다.

9월 30일, 사단 병력은 헝가리 제9보병사단과 함께 아라드 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같은 날 비데만 전투단장이 전사했다. 10월 2일,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선봉대가 아라드를 향해 진격했고, 10월 6일, 데브레첸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단 부대는 빠르게 포위되었고, 10월 8일에는 두 부분으로 쪼개졌다.

한 부대는 하르마스 강을 건너 탈출에 성공했고, 10월 30일, 남은 생존자 48명은 적진을 가로질러 320km를 이동한 후, 부다페스트 남쪽 두나푈드바르 마을에서 독일군과 합류했다. 이 공로로 아마이저는 1944년 11월 1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3. 판처파우스트 작전

1944년 10월 중순, 헝가리 왕국군 장교들은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소련과 비밀리에 항복 협상을 벌이고 있음을 폭로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S-Obersturmbannführer 오토 스코르체니를 파견했다. 스코르체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든 가용 병력을 동원하여 10월 15일 0600시에 시작된 판처파우스트 작전에 투입했다.

4대의 티거 II 전차를 선두로 하는 독일군은 다수의 마리아 테레지아 병력과 함께 30분 만에 부다 성을 습격하여 호르티를 퇴위시켰다. 동시에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호르티의 막내아들인 친평화주의자 호르티 미클로시 주니어가 강제로 구금되었다. 친독일 살러시 페렌츠가 호르티를 대신하여 협상은 중단되었고, 헝가리는 전쟁에 남게 되었다.

이 작전은 나치 독일이 동맹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장시킨 사건으로 볼 수 있다.

4. 부다페스트 포위전

1944년 11월, 제22SS의용기병사단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방어를 위해 제9SS 산악 군단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소련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독일 제23, 24 기갑사단을 격파하고 부다페스트 남부에서 도나우강 도하에 성공하면서 전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12월 25일,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도 부다페스트 북쪽에 접근하여 제9SS 산악군단(제8SS 기병사단, 제22SS 의용 기병사단, 제23 기갑사단, 펠트헤른할레 기갑척탄병사단 등)을 포함한 독일군 50,000명, 헝가리군 30,000명, 그리고 800,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부다페스트 시내에 포위되었다.

독일군은 1945년 1월 1일 폴란드 전선에서 빼낸 제4SS 기갑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구출 작전(콘라트 작전)을 개시했다. 구출 작전 동안 부다페스트 시내에서는 소련군의 4개 포병사단, 로켓포 여단, 박격포 여단 등이 퍼부은 포탄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월 18일, 수비 측은 페스트(도나우강 동쪽)를 포기했다. 구출 부대는 도나우강까지 도달했으나, 소련군의 저항과 얇은 측면 방비로 인해 돌파에 실패했다. 제9SS 산악군단장 카를 페퍼 빌덴부르흐는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 따라 자력 탈출 요청을 거부했다.

1월 27일, 소련군이 구출 부대의 측면을 공격하자, 구출 부대는 부다페스트 진입을 포기하고 발라톤 호까지 철수했다. 2월 13일, 히틀러는 탈출을 허가했지만, 이미 늦어 탈출을 시도한 2000명 중 700여 명만이 아군 전선에 도달했다. 2월 14일, 부다페스트는 함락되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생환한 제22SS 의용 기병사단 소속 장병은 170여 명에 불과했다. 부대 재건은 포기되었고, 생존자들은 제37SS 의용 기병사단 뤼초 편성에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