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장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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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국장공주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위왕 에무게의 딸이다. 1324년 고려 충숙왕에게 시집와 왕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아들을 낳고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훗날 원나라에서 조국장공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에게는 고모가 된다. 충숙왕의 여러 왕비 중 원나라 황족 출신으로 복국장공주 다음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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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장공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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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조국장공주 |
한자 표기 | 曹國長公主 |
로마자 표기 | Joguk Janggongju |
휘 | 금동(金童) |
출생 | 1308년 |
출생지 | 원나라 |
사망 | 1325년 11월 26일 (향년 약 16/7세) |
사망지 | 한양 용산, 고려 |
가문 | 보르지긴 가문(출생) 왕씨(혼인) |
중국어 이름 (원 이름) | 보르지긴 진통 (孛兒只斤 金童) |
한국어 (음차) | 패아지근 금동 (패아지근 금동)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무가 |
고조부 | 원 세조 |
배우자 | 충숙왕 (1325년 결혼) |
자녀 | 용산원자 |
왕비 정보 | |
왕비 칭호 | 고려 왕후 |
재위 기간 | 1324년 – 1325년 |
즉위 | 1324년 |
이전 | 복국장공주 |
이후 | 경화옹주 |
2. 생애
조국장공주는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친킴의 아들 보르지긴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위왕 에무게의 딸이다. 이름은 금동(金童)이며, 1324년(충숙왕 11년) 음력 8월 5일[7]에 원나라에 있던 14세 연상의 충숙왕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인 1325년(충숙왕 12년) 남편을 따라 고려에 왔으며, 그해 10월 한양의 용산에서 아들 용산원자를 낳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음력 10월 20일 용산 행궁에서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훗날 공민왕의 왕비가 되는 노국대장공주는 위왕 에무게의 손녀로, 조국장공주는 노국대장공주의 고모가 된다. 1343년(충혜왕 4년) 원나라에서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로 추봉되었다.
『고려사』에는 조국장공주가 원나라 황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복국장공주에 이어 충숙왕의 제2비로 기록되어 있으며, 충숙왕과 가장 먼저 혼인한 공원왕후는 제4비로 기록되어 있다.
2. 1. 원나라 황족 출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친킴의 아들 보르지긴 다르마발라의 아들이자 위왕 에무게의 딸이다. 이름은 금동(金童)이다. 1324년(충숙왕 11년) 음력 8월 5일[7]에 원나라에 입조해있던 14세 연상의 충숙왕에게 시집을 와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인 1325년(충숙왕 12년)에 남편을 따라 고려에 왔다.훗날 공민왕의 왕비가 되는 노국대장공주는 에무게의 손녀로, 조국장공주는 노국대장공주에게 고모가 된다. 1343년(충혜왕 4년) 원나라에서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에 추봉하였다.
조국장공주는 1308년 원나라에서 아묵의 딸이자 다르마발라의 손녀로 태어났으며, 바얀후타그의 자매였다.[2] 한편 충숙왕과 가장 먼저 혼인한 왕비는 공원왕후이나, 『고려사』에는 조국장공주가 원나라 황족 출신인 까닭에 복국장공주에 이어 충숙왕의 제2비로 기록되어 있다. 공원왕후는 제4비로 기록되어 있다.
2. 2. 충숙왕과의 혼인
조국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친킴의 아들이자 보르지긴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위왕 에무게의 딸이며, 이름은 금동(金童)이다. 1324년(충숙왕 11년) 음력 8월 5일[7]에 원나라에 입조해있던 14세 연상의 충숙왕에게 시집을 와 왕비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325년(충숙왕 12년)에 남편을 따라 고려에 왔다.1325년, 조국장공주는 자신보다 14살 연상인 충숙왕과 베이징에서 결혼했다.[3]
한편, 충숙왕과 가장 먼저 혼인한 왕비는 공원왕후이나, 『고려사』에는 조국장공주가 원나라 황족 출신인 까닭에 복국장공주에 이어 충숙왕의 제2비로 기록되어 있고, 공원왕후는 제4비로 기록되어 있다.
2. 3. 이른 죽음과 사후
1324년(충숙왕 11년) 음력 8월 5일[7]에 원나라에 입조해있던 14세 연상의 충숙왕에게 시집을 와 왕비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325년(충숙왕 12년)에 남편을 따라 고려에 왔다. 그 해 10월에 충숙왕을 따라 한양의 용산에 갔다가 아들 용산원자를 낳았으나, 얼마 안된 음력 10월 20일 용산 행궁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6] 이후 원나라는 탈필알(脫必歹|탈필알중국어)을 보내 그녀의 제사를 돌보게 했다.1343년(충혜왕 4년) 원나라 토곤 테무르 황제는 그녀에게 사후 시호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라는 원나라 황실 칭호를 내렸다.[2] 훗날 공민왕의 왕비가 되는 노국대장공주는 조국장공주의 고모이다.
3. 가족 관계
참조
[1]
문서
Goryeosa recorded that Joguk was Chungsuk's 2nd wife
[2]
서적
高麗王家とモンゴル皇族の通婚関係に閲する覚書
http://repository.ku[...]
Kyoto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http://db.history.go[...]
2021-09-01
[4]
Harvnb
[5]
문서
《고려사》 권89 〈열전〉권2 후비 열전 - 충숙왕 후비 조국장공주
[6]
문서
《고려사》 권35 〈세가〉 권35 - 충숙왕 12년 10월 정유(丁酉) 기사
[7]
문서
《고려사》권35〈세가〉권35 - 충숙왕 11년 8월 - 왕이 위왕의 딸과 결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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