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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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혜왕은 고려의 제28대 왕으로, 1330년과 1339년 두 차례 즉위했다. 그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부왕의 후비와 외숙의 처를 강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로 인해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원나라의 간섭 속에서 왕위 계승과 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방탕한 생활과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국정을 문란하게 했다. 결국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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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충혜왕 (忠惠王) |
| 휘 | 왕정 (王禎) |
| 몽골 이름 | 부다시리 (Putashiri, 寶塔實里) |
| 시호 | 고려: 헌효대왕 (獻孝大王) 원: 충혜왕 (忠惠王) |
| 생애 | |
| 출생 | 1315년 2월 22일 |
| 출생지 | 고려 개경 |
| 사망 | 1344년 1월 30일 |
| 사망지 | 원나라 악양현 (웨양시) |
| 능묘 | 영릉 (永陵) |
| 정치 | |
| 왕위 계승 | 1차 즉위: 1330년 2월 18일 ~ 1332년 3월 21일 2차 즉위: 1339년 12월 2일 ~ 1344년 1월 30일 |
| 재위 기간 | 1차: 1330년 ~ 1332년 2차: 1339년 ~ 1343년 |
| 즉위 | 1차: 1330년 2차: 1339년 |
| 전임 | 충숙왕 |
| 후임 | 충목왕 |
| 가족 관계 | |
| 부왕 | 충숙왕 |
| 모후 | 공원왕후 홍씨 |
| 형제자매 | 용산원자, 공민왕 |
| 배우자 | 덕녕공주 (1330년 결혼, 1344년 사별) 희비 윤씨 (1380년 사별) 화비 홍씨 (1342년 결혼, 1344년 사별) 은천옹주 (1340년 결혼, 1343년 폐위) 경화옹주 (1344년 사별) |
| 자녀 | 충목왕 충정왕 왕석기 장녕공주 |
| 기타 정보 | |
| 종교 | 불교 |
2. 생애
충혜왕(忠惠王)의 휘(이름)는 정(禎)이며, Putashiri|보탑실리mn라는 몽골 이름을 가졌다.[25]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혜(忠惠)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이다.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의 아들이다.
1330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지만, 1332년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충숙왕이 복위되면서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9년 충숙왕이 사망하자 유조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심양왕 왕고를 고려 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의 반대로 원나라로부터 정식 책봉을 받지 못했다.
1343년 8월,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중국어을 비롯한 고려의 친원파 세력은 충혜왕의 "탐음불도(貪淫不道)"를 지적하며,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세워 직할령으로 해 줄 것을 원나라 중서성에 요청했다.[19] 같은 해 11월, 원나라 사신이 잇따라 파견되어 조서 반포를 구실로 충혜왕을 정동행성으로 유인한 후 체포하여 압송했다. 순제의 명령에 따라 광동의 게양현으로 유배되던 중, 호광의 악양현에서 병사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돌봐줄 사람조차 없어, 짐까지 스스로 챙겨 가야 할 정도로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개경 근교 개풍구역의 영릉|영릉 (고려 충혜왕)한국어에 묻혔다. 영릉은 일제 강점기까지 고적 조사로 위치가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잊혀졌다.
2. 1. 즉위 이전
그는 방탕한 생활 방식, 특히 여성을 납치, 강간, 살해하는 습관으로 인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1]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아들이었다. 그는 때때로 그의 몽골어 이름인 '''부타시리'''[2]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한자로 ''보탑실리''(보탑실리|寶塔實里한국어)로 표기된다.1328년, 세자로서 척로화(인질)가 되어 연경에서 숙위했다. 당시 권신이었던 중서우승상 엘 테무르와 친교를 맺은 것에 힘입어 1330년에 충숙왕의 선위로 고려왕으로 책립되었다.[9] 엘 테무르의 중재로 덕녕공주와 결혼했으며, 귀국 후에는 고려를 직할령으로 편입시키려던 원나라 내부의 논의에 강력하게 탄원하여 이를 저지했다.[10]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몽골의 왕공들과 어울려 환락에 빠지는 습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정사를 포기한 채 사냥과 유흥에 빠져 지냈다.
1332년, 대청도에 유배된 토곤 테무르의 신변을 둘러싸고 요양행성과 고려가 모반을 꾀한다는 참언이 보고되자, 원나라 문종은 그 책임을 물어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다시 연경으로 소환되어 이전처럼 숙위의 임무를 맡았지만, 엘 테무르 일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태보 바얀에게 미움을 받았다. 엘 테무르가 죽은 후, 그 일족까지 숙청되어 후견인을 잃은 충혜왕은 바얀이 원나라의 대권을 잡자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1336년에 숙위 임무를 게을리 했다는 이유로 강제 귀국하게 되었다.
2. 2. 제1차 재위 (1330년 ~ 1332년)
그는 방탕한 생활 방식, 특히 여성을 납치, 강간, 살해하는 습관으로 인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1] 몽골어 이름은 '''부타시리'''[2]이며, 이는 한자로 ''보탑실리''寶塔實里|보탑실리중국어로 표기된다.1328년, 세자로서 척로화(인질)가 되어 연경에서 숙위했다. 당시 권신이었던 중서우승상 엘 테무르와 친교를 맺은 것에 힘입어 1330년에 충숙왕의 선위로 고려 왕으로 책립되었다.[9] 엘 테무르의 중재로 덕녕공주와 결혼했으며, 귀국 후에는 고려를 직할령으로 편입시키려던 원나라 내부의 논의에 강력하게 탄원하여 이를 저지했다.[10]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몽골의 왕공들과 어울려 환락에 빠지는 습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정사를 포기한 채 사냥과 유흥에 빠져 지냈다.
1332년, 대청도에 유배된 토곤 테무르의 신변을 둘러싸고 요양행성과 고려가 모반을 꾀한다는 참언이 보고되자, 원나라 문종은 그 책임을 물어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다시 연경으로 소환되어 이전처럼 숙위의 임무를 맡았지만, 엘 테무르 일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태보 바얀에게 미움을 받았다.
2. 3. 즉위 사이의 기간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져 연경에서 숙위 생활을 했다. 당시 권신이었던 중서성 우승상 엘 테무르와 친분을 맺어, 1330년 충숙왕이 양위하자 고려 왕으로 책봉되었다.[9] 엘 테무르의 중재로 덕녕공주와 결혼했으며, 귀국 후 원나라가 고려를 직할령으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다.[10]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몽골 왕공들과 어울려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과 유흥에 몰두했다.1332년 대청도에 유배된 토곤 테무르를 둘러싸고 요양행성과 고려가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이 있자, 원나라 문종은 충혜왕을 폐위하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충혜왕은 다시 연경으로 소환되어 숙위 임무를 맡았으나, 엘 테무르 일족과 가까운 탓에 정치적 എതി수인 태보 바얀의 미움을 샀다. 엘 테무르 사후 그 일족이 숙청되면서 후견인을 잃은 충혜왕은 바얀이 원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자 1336년 숙위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강제 귀국당했다. 3년 후 충숙왕이 사망하여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심왕 왕고를 옹립하려는 바얀의 반대로 원나라의 정식 책봉을 받지 못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필요한 책봉을 받지 못해 초조해진 충혜왕은 금은보화를 원나라 유력자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동행성을 통해 복위를 호소하는 등 지지를 얻기 위해 애썼다.[11][12] 이 무렵 충숙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강간하는 사건까지 일으켰다.[13][14] 경화공주 강간 사건은 충혜왕의 음란하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낸 패륜적 행위로, 역사가들의 비난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원나라 황족 출신이자 계모인 공주를 범함으로써 몽골계 유목민의 수계혼 풍습을 빌려 자신이 충숙왕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려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견해도 있다.[15]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심왕 왕고는 정승 조익과 함께 충혜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몄다.[16]
2. 4. 제2차 재위 (1339년 ~ 1344년)
1339년(충숙왕 후7년)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사촌 심양왕 왕고(王暠)를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曺頔) 등의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했다. 즉위 후에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았다.[1]그해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를, 8월에는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 충혜왕은 서모인 권씨나 경화공주 뿐만 아니라, 외숙 홍융(洪戎)의 처까지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전혀 없고 패륜을 일삼았다.[13][14] 장인인 홍탁의 후처 황씨가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 이는 충혜왕에게 옮아서 그렇다는 소수의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343년(충혜왕 후4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강간과 음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였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1]
왕권의 정통성에 필수적인 책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초조해진 충혜왕은 금은과 왕실의 보물을 원나라 유력자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동행성을 통해 복위를 호소하는 등 지지를 얻는 데 급급했다.[11][12]
경화공주에 대한 간음 사건은 충혜왕의 황음하고 광폭한 성정을 드러낸 파륜 행위로, 역사가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원나라 황족 출신이며 계모이기도 한 공주를 범함으로써, 몽골계 유목민의 관습인 수계혼의 형식을 빌려, 자신이 충숙왕의 계승자임을 확실하게 하려는 조바심의 발로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15] 이러한 유동적인 정국의 흐름을 틈타 심왕 왕고는 정승 조익과 함께 충혜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16]
1339년 8월, 경화공주와 심왕 왕고의 사주를 받은 조익이 개경의 왕궁을 기습하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충혜왕의 친위군에 제압되었다. 같은 해 11월, 원나라는 고려왕의 인장(도장)을 전달하며 복위를 인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불과 10일 만에 충혜왕을 압송하여 연경의 형부에 수감시켜 처분을 기다리게 했다.[17] 이듬해 3월, 토크토의 주도로 바얀이 실각한 정변이 발생하자, 분위기가 반전되어 우여곡절 끝에 복위가 승인되었다.[18]
고생 끝에 왕위를 되찾았지만, 동모제인 강릉대군 왕기가 원나라 궁정에 입조하고, 고려인 공녀 기씨가 차기 황후로 책립되면서, 충혜왕의 입지는 결코 안정되지 않았다. 특히 기씨는 엘 테무르의 딸 다나시리 황후로부터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엘 테무르와 친했던 충혜왕에 대해서도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혜왕은 반성하는 기색 없이, 절제 없는 사생활을 계속한 것은 물론, 재정 개혁을 명분으로 국왕 개인의 내탕고를 보충하거나, 신궁 건설을 위해 수탈을 강화하는 등 실정을 반복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른바 '비행(嬖幸)'과 '악소배(惡小輩)'라고 불리는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방자한 횡포를 부린 점도 기성 지배층 사이에서 평판을 저하시키는 동시에 국정의 문란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1343년 8월, 기황후의 오빠를 비롯한 고려의 친원파 세력은 충혜왕의 "탐음불도(貪淫不道)"를 지적하며,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세워 직할령으로 해 줄 것을 원나라 중서성에 요청했다.[19] 같은 해 11월에는 원나라에서 사신이 잇따라 파견되어 조서 반포를 구실로 충혜왕을 정동행성으로 유인한 후, 주변의 호위병을 물리고 체포하여 압송해 버렸다. 순제의 명령에 따라 광동의 게양현으로 유배되어 남하하던 중, 호광의 악양현에서 병사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돌봐줄 사람조차 없어, 짐까지 스스로 챙겨 가야 할 정도로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3. 최후
Будашири|보탑실리mn라고도 불린 충혜왕은 방탕한 생활과 여성 편력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었다.[1] 1343년 11월 22일, 원나라는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측근들을 잡아갔다. 그해 12월 21일, 게양현으로 유배가라는 명을 받고 가던 도중 1344년 1월 15일 악양현(岳陽縣, 현재의 중국 후난성 웨양시)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거나 귤을 먹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3]
1343년 8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비롯한 고려의 친원파 세력은 충혜왕의 "탐음불도(貪淫不道)"를 지적하며,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세워 직할령으로 해 줄 것을 원나라 중서성에 요청했다.[19] 같은 해 11월에는 원나라에서 사신이 잇따라 파견되어 조서 반포를 구실로 충혜왕을 정동행성으로 유인한 후, 주변의 호위병을 물리고 체포하여 압송해 버렸다. 순제의 명령에 따라 광동의 게양현으로 유배되어 남하하던 중, 호광의 악양현에서 병사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돌봐줄 사람조차 없어, 짐까지 스스로 챙겨 가야 할 정도로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개경 근교의 개풍구역의 영릉에 묻혔다. 영릉은 일본 통치 시대까지 고적 조사에 의해 소재가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잊혀졌다.
4. 가족 관계
5. 평가
《고려사》에서는 충혜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충혜왕은 방탕한 생활 방식, 특히 여성을 납치, 강간, 살해하는 습관으로 인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1] 그는 때때로 그의 몽골어 이름인 '''부다시리'''(Будшир|보탑실리mn)로 알려져 있다.[2]
"성격이 호탕하고, 승마와 궁술을 즐기며 재물을 다루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난폭하고 방탕했다. 소인배들은 뜻을 얻었지만, 충직한 자들은 배척되었다"라는 비평처럼,[20] 충혜왕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즉위 전, 원나라에서 숙위하던 시절부터 몽골과 회흘 귀족 자제들과 교류하며 퇴폐적인 일상에 익숙해진 영향이 컸기에 품행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충혜왕을 싫어했던 승상 바얀은 몽골어로 건달을 뜻하는 '바르피(撥皮)'라고 조롱하며 경멸했다.[21]
상식 밖의 난행, 즉 간음 행위가 충혜왕이 가장 비난받는 이유로 꼽힌다. 《고려사》에는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기세로 경화공주와 억지로 정을 통했다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선왕 충숙왕의 왕비 수비 권씨나 외삼촌 홍융의 후처를 포함해, 용모가 아름다운 여성이면 근친 관계, 혼인 여부, 신분 등에 상관없이 함부로 빼앗아 강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항상 정력에 좋은 약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 중 임질에 걸린 자가 많았다.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도중에 체포되었을 당시, 사신단을 이끌었던 인물은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였다. 충혜왕은 고용보가 "황제는 항상 국왕이 불경하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혹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라고 경고하여, 마지못해 나갔다가 체포되었다. 함정에 빠진 충혜왕이 자신을 부르자, 고용보는 오히려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22]
유배지로 떠나기 전 "너는 국왕이 되었음에도 백성을 심하게 착취했으니, 네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니, 너를 게양으로 보낼 것이니, 짐을 원망하지 말고 떠나라"라는 순제의 유시를 받았다.[23]
6. 기타
충혜왕은 방탕한 생활 방식, 특히 여성을 납치, 강간, 살해하는 습관으로 인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1] 충혜왕은 때때로 그의 몽골어 이름인 '''부타시리'''[2]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한자로 ''보탑실리''(寶塔實里|보탑실리중국어)로 표기된다.
"성격이 호탕하고, 승마와 궁술을 즐기며 재물을 다루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난폭하고 방탕했다. 소인배들은 뜻을 얻었지만, 충직한 자들은 배척되었다"는 비평처럼,[20] 충혜왕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즉위 전, 원나라에서 숙위하던 시절부터 몽골과 회흘 귀족 자제들과 교류하며 퇴폐적인 일상에 익숙해진 영향이 컸기에 품행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충혜왕을 싫어했던 승상 바얀은 몽골어로 건달을 뜻하는 '바르피(撥皮)'라고 조롱하며 경멸했다.[21]
상식 밖의 난행, 즉 간음 행위가 충혜왕이 가장 비난받는 이유로 꼽힌다. 『고려사』에는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기세로 경화공주와 억지로 정을 통했다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선왕 충숙왕의 왕비 수비 권씨나 외삼촌 홍융의 후처를 포함해, 용모가 아름다운 여성이면 근친 관계, 혼인 여부, 신분 등에 상관없이 함부로 빼앗아 강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난행은 복위 후에 집중되었다는 특징이 있으며, 단순한 성적 일탈인지, 수계혼의 일환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항상 정력에 좋은 약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 중 임질에 걸린 자가 많았다.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도중에 체포되었을 당시, 사신단을 이끌었던 인물은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였다. 이미 한 번 폐위된 경험이 있었기에, 이례적으로 사신들이 잇따라 도착하자 이를 의심하여 접견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고용보가 "황제는 항상 국왕이 불경하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혹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라고 경고하여, 마지못해 나갔다가 체포되었다. 충혜왕의 체포는 정동행성에서 이루어졌으며, 조서가 낭독되는 동안 국왕을 발로 차고 포박하는 한편, 호위병과 사신단이 서로 난전을 벌여 창검에 찔린 자가 속출할 정도였다. 함정에 빠진 충혜왕이 자신을 부르자, 고용보는 오히려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22]
유배지로 떠나기 전 "너는 국왕이 되었음에도 백성을 심하게 착취했으니, 네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니, 너를 계양으로 보낼 것이니, 짐을 원망하지 말고 떠나라"라는 순제의 유시를 받았다.[23]
7. 대중문화
忠惠王중국어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고려 역사상 가장 왕답지 않고 기이했던 왕 이야기
https://www.huffingt[...]
2016-10-13
[2]
서적
事大與保國 ── 元明之際的中韓關係
https://books.google[...]
香港教育圖書公司
[3]
서적
History of Goryeo
https://ctext.org/wi[...]
1451
[4]
뉴스
고려 역사상 가장 왕답지 않고 기이했던 왕 이야기
https://www.huffingt[...]
Huffington Post Korea
2016-10-13
[5]
서적
History of Goryeo
https://ctext.org/wi[...]
1451
[6]
웹사이트
'기황후'의 실제 주인공 충혜왕…패륜과 막장, 그 비극적 운명 - 머니투데이
https://news.mt.co.k[...]
2014-06-14
[7]
웹사이트
충혜왕
https://www.doopedia[...]
2022-09-12
[8]
문서
불, 길상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1]
서적
고려사
[12]
서적
고려사
[13]
서적
고려사
[14]
서적
고려사
[15]
서적
고려 충혜왕의 행적과 그 정치적 입장
한국인물사연구회
2010-03
[16]
서적
고려사절요
[17]
서적
고려사
[18]
서적
고려사
[19]
서적
고려사
[20]
서적
고려사절요
[21]
서적
고려사
[22]
서적
고려사
[23]
서적
고려사
[24]
문서
고려사 충숙왕 15년 2월 24일일
(율리우스력 4월 4일) 필요시 추가정보 제공
[25]
서적
事大與保國 ── 元明之際の中韓關係
https://books.google[...]
香港教育圖書公司
[2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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