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 (흉노)
1. 개요
조신은 흉노의 상국 출신으로 전한에 투항하여 흡후에 봉해진 인물이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위청과 함께 흉노를 공격했으나, 이지사선우의 군대와 교전 중 흉노에 재투항했다. 이후 흉노에서 선우 다음가는 왕의 지위에 올랐으며, 전한과의 화친을 중재하기도 했다. 조신은 기원전 111년에 사망했다.
-
기원전 107년 사망 -
유현 (교동애왕)
유현은 전한 시대 교동국의 마지막 왕인 교동애왕 유기의 아들로, 교동국이 폐지될 때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각각 교동대왕으로 추존되거나 온수후에 봉해졌다. -
흉노 사람 -
이릉
이릉은 전한의 무장으로 이광의 손자이며 기마궁술에 능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 후 흉노의 우교왕이 되어 20여 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 병사했고 그의 항복은 조국을 배신했다는 비판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옹호론이 있다. -
흉노 사람 -
한왕 신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조신은 본래 흉노의 상국이었으나, 기원전 131년경 전한에 투항하여 흡후(翕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23년, 그는 전한의 전장군으로서 위청 등과 함께 흉노 정벌에 나섰으나, 전투 중 불리해지자 다시 흉노에 투항하였다. 흉노의 이지사선우는 조신을 선우 다음가는 왕으로 삼고 누이와 혼인시키는 등 우대했으며, 조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막북(漠北)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나라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요새인 조신성(趙信城)이 항가이 산맥 근처에 건설되기도 했다.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대표하여 한나라와의 화친을 위한 공주와의 결혼을 중재하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조신의 사망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07년 또는 기원전 111년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2.1. 전한 투항과 흡후 책봉
본래 흉노의 상국이었던 조신은 기원전 131년 전한에 투항하여 흡후(翕侯)에 봉해졌다. '조신'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에서 복무하는 동안 사용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봄, 조신은 전장군으로서 위청, 공손오, 공손하, 소건, 이광, 이저 등과 함께 한나라의 흉노 정벌에 참여했다. 그는 소건과 함께 기병 3천여 명을 이끌고 별도로 이동하던 중, 이지사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주력 부대와 마주쳤다.
조신과 소건의 부대는 흉노군과 하루 남짓 격렬하게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신은 휘하의 8백여 기병을 이끌고 다시 흉노에 투항했다. 반면 소건은 부대를 모두 잃고 홀로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갔다.
흉노로 돌아간 조신은 이지사선우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았다. 선우는 그를 선우 다음가는 지위의 왕으로 삼고 자신의 누이와 혼인시켰다. 또한 조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막북(漠北)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나라 군대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이로 인해 한나라 군대는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조신은 흉노의 고위직으로서 활동하며,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를 대표하여 한나라와의 화친 결혼을 중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한나라 조정 내 논의 끝에 거부되었다.
조신이 흉노에 투항한 직후, 그의 이름을 딴 요새인 조신성(趙信城)이 항가이 산맥 근처에 건설되었다. 이 성은 원수 4년(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 당시 위청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진격하여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신은 기원전 111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인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가을, 한나라에서는 흉노가 약화되었다고 판단하여 양신(楊信)을 사신으로 보내 오유선우를 회유하려 시도했다.
2.2. 흉노와의 전투와 재투항
원삭 6년(기원전 123년) 봄, 전장군이 된 조신은 대장군 위청이 이끄는 흉노 원정군에 합류했다. 그는 공손오, 공손하, 소건, 이광, 이저 등 다른 장군들과 함께 출진했으며, 소건과 함께 기병 3천여 명을 이끌고 별동대로 움직였다.
별동대는 이지사선우가 직접 이끄는 흉노 주력군과 마주쳤고, 하루 남짓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신은 휘하의 8백여 기병을 이끌고 다시 흉노에 투항했다. 반면, 함께 했던 소건은 병력을 모두 잃었으나 홀로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갔다.
흉노로 돌아간 조신은 이지사선우로부터 선우 다음가는 왕으로 봉해졌으며, 선우의 누이와 결혼하는 등 환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흉노에게 [[막북(지리)|막북]](幕北)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고, 이지사선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전략은 한나라 군대의 보급선을 길게 만들어 진격을 어렵게 했고, 결국 한군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신의 투항 직후, 그의 이름을 딴 조신성(趙信城)이라는 요새가 항가이 산맥 근처에 건설되었다. 이 성은 훗날 원수 4년(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 당시, 위청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이곳까지 진격하여 파괴하였다. 같은 해(기원전 119년), 조신은 흉노를 대표하여 한나라와의 화친 결혼을 중재하려 시도했으나, 한나라 조정 내부의 반대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2.3. 흉노에서의 활동과 한나라와의 관계
본래 흉노의 상국이었던 조신은 기원전 131년경 전한에 투항하여 흡후(翕侯)에 봉해졌다. '조신'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에서 활동하며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봄, 조신은 전장군으로서 위청, 공손오, 공손하, 소건, 이광, 이저 등과 함께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는 소건과 함께 기병 3천여 명을 이끌고 별도로 이동하던 중 이지사선우가 이끄는 흉노 주력군과 마주쳤다.
조신과 소건의 부대는 흉노와 하루 남짓 치열하게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졌다. 결국 조신은 8백여 기병을 이끌고 다시 흉노에 항복했고, 소건은 병력을 모두 잃고 홀로 탈출했다. 이지사선우는 투항한 조신을 선우 다음가는 지위인 왕으로 삼고 자신의 누이를 아내로 주었으며,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막북(漠北)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한나라 군대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로 인해 한나라 군대는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신이 흉노에 투항한 직후, 그의 이름을 딴 요새인 조신성(趙信城)이 항가이 산맥 근처에 건설되었다. 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 당시 위청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이곳까지 진격했으나, 전투 막바지에 이 성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조신은 흉노를 대표하여 한나라에 화친 정책의 일환으로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하며 중재에 나섰으나, 한나라 조정 내 논의 끝에 거부되었다.
조신의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한서》 <흉노전>에는 구체적인 시기가 없으나, <무제기>에 따르면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가을, 한나라에서 조신이 죽자 흉노가 쇠약해졌다고 판단하고 사신 양신(楊信)을 보내 오유선우를 회유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원전 111년에 사망했다는 연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