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 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왕 신은 한나라 양왕의 후손으로, 전한 고제 유방에 발탁되어 한나라 장수가 되었다. 그는 항우와의 전투에서 유방에게 조언하고, 삼진 정벌에 참여하여 옛 한나라 영토를 공략했다. 이후 초한전쟁에서 초나라에 투항했다가 다시 한나라에 합류하여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와의 갈등으로 흉노에 투항하여 흉노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한나라 장군 시무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진나라의 정치인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 진나라의 정치인 - 수하 (진나라)
수하는 진나라 시기 유방을 도와 영포를 귀순시킨 공신이며, 팽성 전투 패배 후 영포를 설득하여 한나라에 기여하고, 유방의 즉위 연회에서 호군 중위 직책을 받았다. - 한나라 (전국 시대) - 한비자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 법가 사상가이자 『한비자』의 저자로, 법, 술, 세를 핵심으로 하는 통치 이론을 제시하며 법치주의와 효율적인 통치 시스템을 주장하고 군주를 위한 통치술과 정치 전략을 제시하는 동시에 당시 다른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 한나라 (전국 시대) - 한신 (회음후)
한신은 전한 초기의 군인이자 전략가로, 초한쟁란 시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헌했으나, 유방의 경계로 회음후로 강등된 후 모반 혐의로 여후에게 처형당했으며, 그의 삶은 토사구팽, 다다익선 등 고사성어와 관련되어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 기원전 196년 사망 - 한신 (회음후)
한신은 전한 초기의 군인이자 전략가로, 초한쟁란 시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헌했으나, 유방의 경계로 회음후로 강등된 후 모반 혐의로 여후에게 처형당했으며, 그의 삶은 토사구팽, 다다익선 등 고사성어와 관련되어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 기원전 196년 사망 - 팽월
팽월은 창읍 출신의 어부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유방을 돕고 양나라 왕에 봉해졌으나 반란 혐의로 처형당하고 젓갈이 되었으며 사후 무신으로 숭배되었다.
한왕 신 | |
---|---|
인물 정보 | |
이름 | 한신 |
한자 표기 | 韓信 |
로마자 표기 | Han Sin |
다른 이름 | 신, 한왕 신 |
한자 표기 (다른 이름) | 韓王信 |
생애 | |
출생 | 불명 |
사망 | 기원전 196년 |
국가 | |
출신 국가 | 한나라 |
직업 및 역할 | |
직업 | 미상 |
2. 생애
한왕 신은 전국시대 한나라 양왕의 후손으로, 고제가 한왕 성·장량 등의 한나라 부흥군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향하던 중에 발탁되어 한나라의 장수가 되었다.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가 멸망하여 왕족의 신분을 잃었으나, 진나라 말의 혼란기에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여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웠다. 고제에게 항우와 싸울 것을 진언했고, 삼진 정벌 때 한나라의 태위를 맡아 옛 한나라 영토를 경략했다. 기원전 204년, 옛 한나라의 10여 성을 점령하고 정창을 사로잡아 유방에게서 정창 대신 한왕에 봉해졌다. 이후 형양성에서 주가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형양 수비를 맡았으나, 형양이 함락되면서 초나라에 투항하였다가 얼마 뒤 달아나서 전한에 돌아와 다시 항우와 싸웠다. 고제 5년, 부절을 받고 형양을 서울로 삼아 한왕으로 봉해졌다.[5]
전한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 북방의 흉노는 묵돌 선우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오르도스 지역을 병합하는 등 전한을 위협하였다. 고제 6년, 고제는 한왕 신을 영천에서 태원군으로 보내 흉노를 견제하게 하였다. 한왕 신은 진양[6]이 북방 요새와 멀다고 생각하여 수도를 마읍[7]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고, 고제는 이를 허락했다.
그해 가을, 묵돌 선우가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신은 흉노와 화친을 시도했다. 고제는 이것을 반란으로 의심하여 한왕 신을 책망했고, 결국 한왕 신은 마읍을 들어 흉노에 투항하고 태원을 공격했다.[5]
기원전 201년 겨울, 유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으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고전했다.[5] 흉노에 투항한 한왕 신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한나라 변경을 침략했다. 그는 백토현 출신인 만구신과 왕황 등을 시켜 옛 조나라 왕족 조리를 왕으로 세우고 자신의 패잔병을 거두어들였다. 이들과 흉노와 연합해 한나라를 공격했고, 흉노는 좌우 현왕과 만여 기를 보내 왕황 등을 지원해 진양까지 진격했다.[5]
이후 한왕 신은 흉노군을 이끌고 전한의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진희에게 왕황과 만구신을 파견하여 진희의 반란을 지원했다.[5] 기원전 196년 참합으로 침입하자,[5] 전한의 대장 시무는 투항을 권유하는 글을 보냈으나,[5] 한왕 신은 자신의 죄를 언급하며 거절했다.
폐하께서 이 종을 여항에서 들어 쓰셔서 남면하여 '고'라 칭하게 하셨으니(곧 왕 노릇하게 하셨으니), 이는 이 종의 행운입니다. 형양에서 죽지 못하고 항적에게 갇혔으니, 이것이 죄 하나입니다. 도적들이 마읍을 치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항복했으니, 이것이 죄 둘입니다. 지금 반역하여 그 도적들의 장수가 되어, 장군과 하루아침에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죄 셋입니다. 문종과 범려는 죄가 없는데도 죽었는데, 저는 폐하에게 죄 셋을 짓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건져 살려 한다면, 이는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저는 산과 골짜기 사이에 숨어 아침저녁으로 만이에게 구걸하고 있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눈먼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만, 형세가 불가합니다.|폐하께서 이 종을 여항에서 들어 쓰셔서 남면하여 '고'라 칭하게 하셨으니(곧 왕 노릇하게 하셨으니), 이는 이 종의 행운입니다. 형양에서 죽지 못하고 항적에게 갇혔으니, 이것이 죄 하나입니다. 도적들이 마읍을 치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항복했으니, 이것이 죄 둘입니다. 지금 반역하여 그 도적들의 장수가 되어, 장군과 하루아침에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죄 셋입니다. 문종과 범려는 죄가 없는데도 죽었는데, 저는 폐하에게 죄 셋을 짓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건져 살려 한다면, 이는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저는 산과 골짜기 사이에 숨어 아침저녁으로 만이에게 구걸하고 있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눈먼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만, 형세가 불가합니다.중국어 [5]
결국 한왕 신은 시무와 싸워 전사했고, 참합은 도륙되었다.[5]
2. 1. 초기 생애와 한나라 건국 기여
한왕 신은 전국시대 한나라 양왕의 후손으로, 자세한 출생 연도는 전해지지 않는다.[4] 기원전 230년, 진나라의 공격으로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왕족의 신분을 잃었다.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한왕 신은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여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웠다. 유방이 관중에 진입할 때 한왕 신은 장량과 함께 한나라 부흥군에 참여했으며, 유방에게 항우와 맞서 싸울 것을 진언했다.[4] 삼진 정벌 때에는 태위로서 옛 한나라 영토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항우는 한성을 한나라 왕으로 봉했으나 유방과의 연고 때문에 의심하여 죽였는데, 한왕 신의 군사 활동을 듣고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삼았다.[4]
기원전 204년(고제 2년), 옛 한나라의 10여 성을 점령했고, 정창을 급히 쳐 사로잡아 유방에게서 정창 대신 한왕에 봉해졌다.[5] 이후 고제가 항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형양성에서 달아나면서 주가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형양 수비를 맡았고, 형양이 함몰되면서 초나라에 투항하였다가 얼마 뒤 달아나서 전한에 돌아와 다시 항우와 싸웠다.[5]
2. 2. 한왕 책봉과 초한전쟁
한나라[4] 양왕의 후손으로, 고제가 한왕 성·장량 등의 한나라 부흥군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향하던 중에 발탁되어 한나라의 장수가 되었다. 고제에게 항우와 싸우도록 진언했고, 삼진 정벌 때 한나라의 태위를 맡아 옛 한나라 영토를 경략했다. 당시 항우는 한성을 한나라 왕으로 봉했으나 유방과의 연고 때문에 의심하여 죽였는데, 한신의 군사 활동을 듣고 정창을 한나라 왕으로 삼았다. 고제 2년(기원전 204년), 옛 한나라의 10여 성을 점령했고, 정창을 급히 쳐 사로잡아 유방에게서 정창 대신 한왕에 봉해졌다.[5] 이후 고제가 항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형양성에서 달아나면서 주가 등과 함께 마지막까지 형양 수비를 맡았고, 형양이 함몰되면서 초나라에 투항하였다가 얼마 뒤 달아나서 전한에 돌아와 다시 항우와 싸웠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 부절을 받고 형양을 서울로 삼아 한왕으로 봉해졌다.[5]기원전 206년 말,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바슈에서 나와 삼진을 공격했다. 이것은 초한 쟁패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중국의 패권을 다투는 4년간의 권력 투쟁이었다. 당시 복원된 한나라는 정창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항우에 의해 한왕으로 임명되었다. 유방은 한신이 한왕이 되도록 돕겠다고 약속하고 그에게 군대를 보내 정창의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다음 해까지 한신은 한나라에서 10개 이상의 도시를 정복하고 정창을 항복하게 하여 정창을 대신해 한왕이 되었다.
기원전 204년, 유방이 성양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한 후, 한신은 항우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강요받았다. 이후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유방의 편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 황제가 된 후, 한신은 다시 한왕으로 임명되었고 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한신은 영천군 주변의 땅을 그의 제후 왕국으로 하사받았으며, 수도는 양재(현재의 위저우 시)에 두었다.
초한 전쟁 초기에 신은 장량의 추천으로 유방에게서 성신후에 봉해져 태위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장군 한신에게 항복한 정창을 대신하여 한왕으로 봉해졌다. 이후 유방의 부하로서 수수 전투 등에 참전했다. 한왕 신은 유방이 처음으로 봉한 제후왕이다.
초한 전쟁이 종결되고 유방이 황제가 되자, 한왕 신은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태원군을 한으로 개명하고 그곳으로 옮겨졌다.
2. 3. 흉노와의 갈등과 투항
전한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 북방의 흉노는 묵돌 선우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오르도스 지역의 백양과 누번을 병합하는 등 전한을 위협하였다.[5] 고제는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한왕 신을 영천에서 북방 태원군으로 보내 흉노를 견제하게 하였다. 한왕 신은 태원군의 중심 도시였던 진양[6]이 북방 요새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여 수도를 마읍[7]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고, 고제는 이를 허락했다.그해 가을, 묵돌 선우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신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흉노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흉노와 화친을 시도했다. 고제는 이것을 반란의 징조로 의심하여 한왕 신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다. 한왕 신은 황제가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자신과 가족을 멸족할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마읍을 들어 흉노에 투항하고 태원을 공격했다.[5]
2. 4. 흉노 장수로서의 활동과 죽음
기원전 201년 겨울, 유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으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고전했다.[5] 흉노에 투항한 한왕 신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한나라 변경을 침략했다. 그는 백토현의 장사꾼 출신인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을 시켜 옛 조나라 왕족이자 장수였던[8]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자신의 패잔병을 거두어들였다. 이들과 흉노와 연합해 한나라를 공격했고, 흉노는 좌우 현왕과 만여 기를 보내 왕황 등을 지원해 진양까지 진격했다.[5]이후 한왕 신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흉노군을 이끌고 전한의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진희에게 왕황과 만구신을 파견하여 진희의 반란을 지원했다.[5] 기원전 196년 참합(參合)으로 침입하자,[5] 전한의 대장 시무는 투항을 권유하는 글을 보냈다.[5]
폐하는 너그럽고 어지시니, 제후들이 비록 반역하고 달아났지만 돌아오면 옛 자리와 칭호를 돌려주시고 주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도 아시리이다. 지금 왕께서 패망하고 흉노로 달아났지만, 죄가 없으시니, 빨리 돌아오십시오!|폐하는 너그럽고 어지시니, 제후들이 비록 반역하고 달아났지만 돌아오면 옛 자리와 칭호를 돌려주시고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패망하고 흉노로 달아났지만, 죄가 없으시니, 빨리 돌아오십시오!중국어[5]
이에 한왕 신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폐하께서 이 종을 여항에서 들어 쓰셔서 남면하여 '고'라 칭하게 하셨으니(곧 왕노릇 하게 하셨으니), 이는 이 종의 행운입니다. 형양에서 죽지 못하고 항적에게 갇혔으니, 이것이 죄 하나입니다. 도적들이 마읍을 치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항복했으니, 이것이 죄 둘입니다. 지금 반역하여 그 도적들의 장수가 되어, 장군과 하루아침에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죄 셋입니다. 문종과 범려는 죄가 없는데도 죽었는데, 저는 폐하에게 죄 셋을 짓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건져 살려 한다면, 이는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저는 산과 골짜기 사이에 숨어 아침저녁으로 만이에게 구걸하고 있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눈 먼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만, 형세가 불가합니다.|폐하께서 이 종을 여항에서 들어 쓰셔서 남면하여 '고'라 칭하게 하셨으니(곧 왕 노릇하게 하셨으니), 이는 이 종의 행운입니다. 형양에서 죽지 못하고 항적에게 갇혔으니, 이것이 죄 하나입니다. 도적들이 마읍을 치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항복했으니, 이것이 죄 둘입니다. 지금 반역하여 그 도적들의 장수가 되어, 장군과 하루아침에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죄 셋입니다. 문종과 범려는 죄가 없는데도 죽었는데, 저는 폐하에게 죄 셋을 짓고 이 세상에서 목숨을 건져 살려 한다면, 이는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저는 산과 골짜기 사이에 숨어 아침저녁으로 만이에게 구걸하고 있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눈먼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만, 형세가 불가합니다.중국어 [5]
결국 한왕 신은 시무와 싸워 전사했고, 참합은 도륙되었다.[5]
3. 가계
한왕 신은 한나라 양왕의 후손으로, 최소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5]
한퇴당과 한영은 모두 문제 재위 기간 동안 한나라로 돌아왔다.[1][2]
한왕 신의 후손으로는 다음 인물들이 있다.
인물 | 시기 | 비고 |
---|---|---|
한릉(韓棱) | 후한 | 한퇴당의 후손[3] |
한기(韓曁) | 후한 말, 조위 | 한왕 신의 후손, 서진 관료 가충의 상속자 한밀(韓謐)의 증조부. 한밀은 팔왕의 난에 휩쓸려 301년에 처형됨. |
한유(韓愈) | 당나라 | 한퇴당의 후손, 고문 운동 주도[3] |
4. 평가
한왕 신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흉노와의 관계에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려 유방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안위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한왕 신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실리 외교를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역사서에서는 한왕 신과 이름이 같은 또 다른 영웅인 회음후 한신(淮陰侯 韓信)과 구분하기 위해, 주로 '한왕 신'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 「한신노관열전」의 「한신」은 한왕 신을 가리킨다. (한신은 「회음후열전」에서 다루어진다). 반고의 『한서』에서는 「한왕신전」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권33, 위표전담 한왕신전).
참조
[1]
서적
Shi Ji
[2]
서적
Han Shu
[3]
문서
全唐文
[4]
문서
한나라
[5]
서적
한서
[6]
문서
타이위안 시
[7]
문서
숴저우 시
[8]
서적
사기
[9]
문서
제천나라
[10]
문서
작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