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1. 개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는 1942년 앙골라 루안다에서 태어난 앙골라의 정치인이다. 1956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가입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소련에서 석유 공학을 전공했다. 1970년 앙골라로 돌아와 앙골라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1975년 앙골라 독립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9년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 사망 후 앙골라 대통령, 국회의장, 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했다. 2017년까지 앙골라를 통치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부패 혐의와 부정 축재 의혹을 받았다. 2022년 사망했다.
| 직함 | 제2대 앙골라 대통령 |
|---|---|
| 임기 시작 | 1979년 9월 21일 |
| 임기 종료 | 2017년 9월 25일 |
| 총리 | 페르난두 조제 드 프랑사 디아스 반-두넴 마르콜리누 모코 페르난두 다 피에다데 디아스 도스 산투스 파울루 카소마 |
| 부통령 | 페르난두 다 피에다데 디아스 도스 산투스 마누엘 비센테 |
| 전임자 | 아고스티뉴 네투 |
| 후임자 | 주앙 로렌수 |
| 출생일 | 1942년 8월 28일 |
| 출생지 | 루안다, 포르투갈령 앙골라 |
| 사망일 | 2022년 7월 8일 |
| 사망지 | 바르셀로나, 스페인 |
| 정당 |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1958년–2022년) |
| 배우자 | 결혼: 타티아나 쿠카노바, 1966년 결혼, 1980년 이혼 결혼: 아나 파울라 레모스, 1991년 결혼 |
| 자녀 | 10명 (Isabel, José, Coréon 포함) |
| 모교 | 아제르바이잔 국립 석유 아카데미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로마자 표기 | José Eduardo dos Santos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
|---|
| 계급 | 육군 대장 (1986년) |
|---|---|
| 복무 부대 | FAPLA/EPLA (1962년–1991년) FAA/EXE (1991년–2002년) |
| 복무 기간 | 1962년–2002년 |
| 참전 전투 | 앙골라 독립 전쟁 앙골라 내전 제1차 콩고 전쟁 |
| 직함 | 앙골라 해방인민군 사령관 |
|---|---|
| 임기 시작 | 1979년 9월 21일 |
| 임기 종료 | 1991년 10월 9일 |
| 전임자 | 아고스티뉴 네투 |
| 후임자 | 직책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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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의 대통령 -
주앙 로렌수
주앙 로렌수는 2017년부터 앙골라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으며, 군 경력과 정치 경력을 거쳐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
앙골라의 대통령 -
아고스티뉴 네투
아고스티뉴 네투는 앙골라의 정치인이자 시인으로, 앙골라 독립 전쟁을 이끌고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며 시집을 출판하고 앙골라 국가의 가사를 썼다. -
앙골라의 정치인 -
조나스 사빔비
조나스 사빔비는 앙골라의 정치가이자 게릴라 지도자로,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을 창설하여 앙골라 내전을 주도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서 반공주의로 전향, 30년 이상 MPLA와 대립하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낙선 후 다시 내전을 일으켰고 2002년 사망하여 그의 유산은 앙골라 역사에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
앙골라의 정치인 -
마누엘 비센트
마누엘 비센트는 앙골라 국영 석유 회사 소난골 대표를 거쳐 앙골라 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석유 생산량 증대에 기여했으나 자금 세탁 의혹과 자금 유출 주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
21세기 앙골라 사람 -
조나스 사빔비
조나스 사빔비는 앙골라의 정치가이자 게릴라 지도자로,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을 창설하여 앙골라 내전을 주도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서 반공주의로 전향, 30년 이상 MPLA와 대립하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낙선 후 다시 내전을 일으켰고 2002년 사망하여 그의 유산은 앙골라 역사에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
21세기 앙골라 사람 -
마테우스 갈리아누 다 코스타
앙골라 축구 선수 마테우스 갈리아누 다 코스타는 포르투갈 리그의 질 비센테, CD 나시오날, 보아비스타 등에서 활약하고 앙골라 국가대표팀으로도 활동하며 2006년 FIFA 월드컵에 참가, 2019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팀의 주장을 맡았다.
2. 생애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 루안다에서 건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6년 학생 시절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참여하면서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 정부의 탄압으로 프랑스를 거쳐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에서 MPLA 부의장이 되었고, 학업을 중단하고 소련으로 건너가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석유 아카데미)에서 석유 화학을 전공해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0년 앙골라로 귀국해 MPLA 군사 조직 앙골라 해방 인민군에 들어갔고, 1974년 MPLA 대외 정책 담당자가 되었다. 1975년 앙골라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지만, 좌우익 세력 간 충돌로 내전이 발발하자 두스 산투스는 MPLA 총재가 되었다. 1979년 아고스티뉴 네투 초대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자, MPLA 선거를 통해 후임 대통령, 국회의장, 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두스 산투스는 포르투갈어 외에 스페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상당한 개인 재산을 모았다.
2013년 12월 15일 딸이 기획한 머라이어 캐리 콘서트에 참석했는데, 머라이어 캐리의 출연료가 백만 달러(약 100)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2016년 3월, 73세에 2년 후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2017년 8월 23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2017년 9월 26일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2020년 1월, ICIJ는 아프리카 최고 여성 부호(자산 약 230)로 불리는 장녀 이사벨이 공공 사업 수주, 조세 회피 등으로 거액의 부를 얻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2021년 9월 14일, 바르셀로나 체류 2년여 만에 귀국했다.
2022년 7월 8일, 심부전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79세로 사망했다. 7월 9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도스 산토스와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를 추모하며 1분간 묵념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는 1942년 8월 28일 현재 루안다의 삼비장가 구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아벨리누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와 자신타 조제 파울리누는 당시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에서 이주해 왔다. 그의 어머니는 하녀였고, 아버지는 건축업자이자 건설 노동자였다.
그는 루안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리세우 살바도르 코레아(오늘날 무투 야 케벨라)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두스 산투스는 학교에 다니면서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가입했다. 1961년 식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인접국 콩고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MPLA와 협력했고 곧 당의 공식 회원이 되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소련의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하여 1969년까지 바쿠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연구소에서 석유 공학 및 레이더 통신 학위를 받았다.
2.2. MPLA 활동과 앙골라 독립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 루안다에서 건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생 시절인 1956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참여하면서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 정부의 탄압으로 1961년 프랑스를 거쳐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로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지에서 MPLA 부의장이 되었고, 학업을 중단하고 소련으로 건너가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석유 아카데미)에서 석유 화학을 전공해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0년, 앙골라로 귀국해 MPLA 군사 조직 앙골라 해방 인민군(FAPLA)에 들어갔고, 카빈다 주 MPLA 제2 정치군사 지역에서 라디오 송신자로 복무했다. 1974년에는 제2 지역 통신 서비스 부사령관으로 진급했다. 1974년 9월 모시코 주에서 MPLA 중앙 위원회 및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자이르,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MPLA 대표였다.
1975년 6월, 도스 산토스는 앙골라 인민해방운동 (MPLA) 외교부 및 보건부의 조정자가 되었다. 1975년 11월 앙골라 독립과 함께 MPLA는 루안다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신생 MPLA 정부는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동맹(UNITA), 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FNLA)과의 앙골라 내전에 직면했다. 같은 해, 도스 산토스는 앙골라의 초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자격으로 1975-1976년에 MPLA 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얻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77년 12월 MPLA 제1차 회의에서 도스 산토스는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에 재선출되었다. 1978년 12월, 그는 정부 내 부총리에서 기획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9년 9월 10일,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아고스티뉴 네투가 사망하자, 도스 산토스는 1979년 9월 20일 MPLA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9월 21일 앙골라 대통령이자 군 최고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980년 11월 9일 1980년 앙골라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일당제 국가에서 앙골라 인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3. 대통령 취임과 내전
1979년 9월 10일,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인 아고스티뉴 네투가 사망하자, 도스 산토스는 9월 20일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9월 21일 앙골라 대통령이자 군 최고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980년 11월 9일에는 일당제 국가에서 앙골라 인민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스 산토스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앙골라의 주요 경쟁 해방 운동인 앙골라 완전 독립 민족 연합(UNITA)과의 지속적인 분쟁이었다. 조나스 사빔비가 이끌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미국이 지원한 UNITA는 앙골라의 집권 정부로서 MPLA의 정당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에 반대하기 위해 수년간 여러 차례 무력 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소련과 쿠바가 MPLA 정부를 지원하고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한하기 위해 UNITA를 지원하면서 격렬한 외세 개입으로 특징지어졌다.
16년간의 전투로 최대 30만 명이 사망한 후, 1992년 9월 29일과 30일 총선이 유엔의 감독하에 앙골라에서 치러졌다. 도스 산토스는 1차 투표에서 49%를 얻어 선두를 달렸고, 그의 주요 경쟁자인 조나스 사빔비는 40%를 득표했다. 그해 초 채택된 헌법에 따라 도스 산토스가 과반수에 약간 못 미치면서 앙골라의 초대 헌법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사빔비와의 결선 투표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UNITA가 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2차 투표는 치러지지 않았다.
이후 3일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MPLA 군대가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UNITA 시위대를 살해한 핼러윈 학살이 발생했다. 사빔비는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선거를 포기하고 즉시 내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도스 산토스는 계속 재임했다.
1993년, 사빔비와 UNITA가 전투를 통해 얻은 영토를 포기하지 않자, 미국은 UNITA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도스 산토스와 MPLA 정부를 앙골라의 공식 집권 기구로 공식 인정했다.
2002년 2월 UNITA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가 사망하면서 평화 프로세스가 재개되었다. 2002년 4월 4일, 앙골라군과 반군은 휴전에 합의했고 2002년 8월 2일 공식적으로 평화가 선언되었다. 앙골라 정부가 공식 정당으로 인정한 UNITA는 5만 명의 전투원으로 구성된 무장 세력을 해산하고 이들을 국가 안보군에 통합하는 데 동의했다. 그 결정에 따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앙골라에 유엔 사무소를 다시 열고, 앙골라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한 유엔 앙골라 임무단(UNMA)을 설립했다.
2.4. 전후 통치와 논란
2001년, 도스 산토스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2003년 12월,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의 대표로 재선되었지만, 2006년, 그 후 2007년, 마지막으로 2009년에 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대통령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2006년 8월, 카빈다 엑스클레이브 해방 전선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2008년 앙골라 총선 이후 집권 MPLA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2010년 초에 도입된 새 헌법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새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의회와 같은 임기로 단독 다수 투표 동시 이중 투표로 선출되며, 최대 2번의 임기를 수행할 수 있다. 각 정당은 투표 용지에 명확하게 식별되어야 하는 대통령 후보를 명단의 최고위에 지명한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의 최고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보도에 따르면 도스 산토스는 2010년 10월 24일, 가족과 함께 해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차량이 그의 차를 가로막으려 하자 암살 시도를 모면했다. 그의 경호원은 총격을 가해 차량에 탑승한 두 명을 살해했으며, 무기가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다른 출처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다. 2011년 2~3월, 그리고 다시 2011년 9월, 주로 인터넷을 통해 젊은 앙골라인들이 루안다에서 도스 산토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2012년 총선에서 MPLA는 3분의 2 이상을 득표했다. 도스 산토스가 이 정당의 최고 후보였으므로, 2010년에 채택된 헌법에 따라 자동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2014년 9월, 도스 산토스는 주지사의 직무를 MPLA 주 제1서기 직과 결합하는 것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공공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상황과 더 큰 요구에 맞춰 통치 모델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주 행정부와 시 행정부의 운영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였던 두스 산투스는 소련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부분적인 시장 경제를 허용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서방 기업들이 앙골라의 주요 유전에 투자하도록 허용했다. 앙골라는 두스 산투스의 재임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산유국이자 세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 채굴국이 되었다. 2006년 11월, 아프리카 국가 다이아몬드 생산자 협회를 공동 설립했는데, 이 협회는 아프리카 다이아몬드 산업의 시장 협력과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약 20개 아프리카 국가의 조직이다.
두스 산투스가 사망한 2022년에는 앙골라 인구 3천만 명 중 절반 이상이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생활했으며, 이는 그의 퇴임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020년, 두스 산토스의 후임인 조앙 로렌수는 두스 산투스 재임 기간 동안 24 이상이 횡령 또는 유용되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석유 수입 유용, 정실주의 및 정부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앙골라는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앙골라 국민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두스 산투스는 막대한 부가 두스 산투스 가문으로 흘러 들어가는 약탈 정치를 감독했다.
2.5. 퇴임과 사망
두스 산투스는 2016년 3월 11일에 2018년에 은퇴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 일정에 따르면 그는 2017년에 예정된 다음 선거 이후에 퇴임하게 된다. 2016년 12월,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은 국방부 장관이자 MPLA 부회장인 주앙 로렌수를 당의 최고 후보이자 2017년 총선의 대통령 후보로 선택하여, 두스 산투스가 2018년 이전에 물러날 것을 시사했다. 두스 산투스는 2017년 2월 3일에 2017년 후반에 있을 선거 이후에 퇴임할 것이며, 로렌수가 그의 뒤를 이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MPLA의 대통령으로 남아 있었고, 따라서 집권당의 지도부를 통해 앙골라 정치의 최고위층에서 핵심 역할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의 자녀인 이자벨 두스 산투스와 조제 필로메노 두스 산투스는 각각 소난골과 앙골라 국부 펀드에서 중요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아버지가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2017년 중반, 두스 산투스는 건강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수 주간의 방문을 위해 두 차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다. 정부는 첫 번째 방문이 그의 건강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했다. 7월 3일부터 19일까지의 두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설명이 없었다.
두스 산투스는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암을 앓았다. 2022년 6월 23일 심폐 정지를 겪은 후 위독한 상태였으며, 코로나19 양성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2022년 7월 8일, 바르셀로나의 테크논 메디컬 센터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2022년 8월 28일,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열린 국장에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포르투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4. 비판 및 논란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족의 부를 축적하고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는 데 집중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패한 정권을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인구의 거의 7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했다.
두스 산투스는 권력을 잡은 초기부터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앙골라 내전 중과 이후에 더 많은 자산을 모았다. 투명성 국제기구에 따르면 앙골라는 두스 산투스 통치 말기에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4.1. 부정 축재 의혹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족의 부를 축적하고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는 데 집중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패한 정권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인구의 거의 7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했다.
두스 산투스는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부유해졌고, 앙골라 내전 중과 이후에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휴전이 발생하고 경제의 상당 부분이 부분적으로 사유화되었을 때, 그는 여러 신생 기업과 산업을 차지했다. 그는 다른 여러 천연 자원 산업의 유사한 인수를 주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투명성 국제기구에 따르면 앙골라는 두스 산투스 통치 말기에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라는 평판을 받았다.
결국 앙골라 의회는 대통령이 기업 및 조직에 대한 재정적 지분을 갖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응하여 두스 산투스는 그의 딸이 이러한 기업으로부터 재정적 뇌물과 자산을 받도록 준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두스 산투스는 정부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이익을 얻었으며 대리인을 통해 대규모 기업 자산을 유지하는 뇌물로 제공된 기업의 지분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소위 루안다 유출로 알려진 사건에서 400개 이상의 은행, 기업 및 컨설턴트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두스 산투스 가문을 위해 돈세탁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두스 산투스 가문의 억만장자 동료 아메리쿠 아모림이 설립한 Banco BIC, 보스턴 컨설팅 그룹, 맥킨지 앤 컴퍼니, PwC, 유로비크, 그리고 Athol Limited라는 유령 회사 등이 포함된다. 앙골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미술상 이브 부비에가 운영하는 Brave Ventures도 두스 산투스가 공공 보건 시스템 개발을 감독하기 위해 고용한 프랑스 컨설팅 회사의 하청업체로서 돈세탁 활동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정부 예산은 유류 수입을 통해 2012년에는 69로 10년 이상 증가했다. 국제 통화 기금은 32의 석유 수입이 정부 장부에서 사라졌고 "준재정 활동"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고했다.
2020년, 두스 산투스의 후임인 조앙 로렌수는 두스 산투스 재임 기간 동안 24 이상이 횡령 또는 유용되었다고 추정했는데, 이는 석유 수입 유용, 정실주의 및 정부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앙골라는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앙골라 국민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두스 산투스는 막대한 부가 두스 산투스 가문으로 흘러 들어가는 약탈 정치를 감독했다. 두스 산투스가 사망한 2022년에는 앙골라 인구 3천만 명 중 절반 이상이 하루 1.90달러 미만으로 생활했으며, 이는 그의 퇴임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4.2. 루안다 유출 사건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를 무시하고 자신의 가족의 부를 축적하고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는 데 집중하면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패한 정권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인구의 거의 70%가 하루 2USD 미만으로 생활했다.
두스 산투스는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부유해졌고, 앙골라 내전 중과 이후에 더 많은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휴전이 발생하고 경제의 상당 부분이 부분적으로 사유화되었을 때, 그는 여러 신생 기업과 산업을 차지했다. 그는 다른 여러 천연 자원 산업의 유사한 인수를 주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투명성 국제기구에 따르면 앙골라는 두스 산투스 통치 말기에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 중 하나라는 평판을 받았다.
결국 앙골라 의회는 대통령이 기업 및 조직에 대한 재정적 지분을 갖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응하여 두스 산투스는 그의 딸이 이러한 기업으로부터 재정적 뇌물과 자산을 받도록 준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두스 산투스는 정부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하고 그 이익을 얻었으며 대리인을 통해 대규모 기업 자산을 유지하는 뇌물로 제공된 기업의 지분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루안다 유출로 알려진 사건에서 400개 이상의 은행, 기업 및 컨설턴트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두스 산투스 가문을 위해 돈세탁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두스 산투스 가문의 억만장자 동료 아메리쿠 아모림이 설립한 Banco BIC, 보스턴 컨설팅 그룹, 맥킨지 앤 컴퍼니, PwC, 유로비크, 그리고 Athol Limited라는 유령 회사 등이 포함된다. 앙골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미술상 이브 부비에가 운영하는 Brave Ventures도 두스 산투스가 공공 보건 시스템 개발을 감독하기 위해 고용한 프랑스 컨설팅 회사의 하청업체로서 돈세탁 활동에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정부 예산은 유류 수입을 통해 2012년에는 69로 10년 이상 증가했다. 국제 통화 기금은 32의 석유 수입이 정부 장부에서 사라졌고 "준재정 활동"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고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6. 수상 및 서훈
* Angola영어
* Cuba스페인어
* Portugal포르투갈어
* Russia러시아어
* Serbia세르비아어
* South Africa영어
도스 산투스는 앙골라 독립 기여, 내전 종식을 위한 야당과의 협상 등 앙골라의 평화와 민주주의 증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10년 O. R. 탐보 동반자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인종 정의 전국 위원회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아프리카 월드는 2014년 도스 산투스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는 전쟁 종식 이후 앙골라의 경제 및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그의 기여 때문이었다.
나미비아 대학교 옹구에디바 캠퍼스(공학 및 정보 기술)는 나미비아의 자유를 지원한 도스 산투스(공학자)의 공로를 기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포르투갈은 1988년 도스 산토스에게 엔히크 왕자 훈장 그랜드 칼라, 1996년 성 야고보 군사 훈장 그랜드 칼라를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