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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코만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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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더코만도 사진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 수감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존더코만도가 촬영한 사진에 대한 문서이다. 존더코만도는 가스실에서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 금니 제거 등의 강제 노동을 수행했으며, 이들은 주로 노동 부적격자로 선별된 수감자들로 구성되었다. 사진 촬영은 알렉스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그리스계 유대인 수감자가 주도했으며, 다른 존더코만도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촬영된 사진은 폴란드 저항군에 의해 유출되었으며, 이후 편집 과정을 거쳐 배포되었다. 이 사진들은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 대중문화에서 언급되며,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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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더코만도 사진
개요
가스실의 문 또는 창문가에서 찍은 사진
No. 280, 가스실의 문 또는 창문가에서 찍은 사진
No. 280을 잘라낸 사진
No. 280을 잘라낸 사진
No. 281
No. 281
No. 281을 잘라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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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No. 282,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No. 282을 잘라낸 사진
No. 282을 잘라낸 사진
282번 직후에 찍은 가스실 근처의 나무들. 낮은 곳에서 촬영하던 사진사가 카메라를 너무 높게 조준했다.
No. 283, 282번 직후에 찍은 가스실 근처의 나무들. 낮은 곳에서 촬영하던 사진사가 카메라를 너무 높게 조준했다.

2. 존더코만도

존더코만도("특별 특공대")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에서 운영된 특별 작업반을 가리킨다.[40][7] 이들은 주로 유대인 수감자들이었으며, 일부 소련군 전쟁 포로도 포함되어 화장장가스실 관련 작업을 강제로 수행해야 했다.[40][7] SS는 존더코만도에게 희생자 처리 등 홀로코스트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끔찍한 임무를 강요했다.[43][10][45][12]

2. 1. 역할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특수 부대")는 주로 유대인 수감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일부 소련군 전쟁 포로도 포함되어 화장장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40][7] 화장장에는 Entkleidungskammer|엔트클라이둥스카머de(탈의실), 가스실, 그리고 화로가 있었다.[40][7] 1944년 여름, 수용소에는 4개의 화장장(2~5호)과 "작은 흰 집"으로 알려진 초가 지붕의 벽돌 건물에 추가 가스실이 있는 벙커가 있었고, 이곳에서 최대 1,000명의 ''존더코만도''가 일했다.[41][42][8][9]

SS가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선별"한 수감자들을 ''존더코만도''가 탈의실로 데려갔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목욕 및 소독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속여 가스실로 안내했다.[43][10] 나치는 희생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탈의실에 소지품을 보관할 번호표를 나누어 주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44][11]

학살 이후, ''존더코만도''는 가스실에서 시신을 옮기는 끔찍한 작업을 강요당했다. 그들은 시신에서 금니, 틀니, 머리카락, 보석, 안경 등을 제거하고,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초기에는 집단 매장지에 시신을 묻었으나, 나중에는 화로나 야외 화덕에 던져 넣어 소각했다. 또한 다음 학살을 준비하기 위해 가스실을 청소하는 역할도 맡았다.[45][12]

2. 2. 규모

1944년 여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는 최대 1,000명의 존더코만도가 있었다. 이들은 4개의 화장터(2-5호)와 '작은 흰 집'으로 알려진 별도의 가스실 건물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8][9]

2. 3. 강제 동원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는 대부분 유대인 수감자들이었으며, 일부는 화장터에서 일하게 된 소수의 소련 전쟁 포로도 포함되었다.[7] 수감자들이 SS에 의해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선별된 후, 이들 중에서 존더코만도가 강제로 차출되었다.[10]

존더코만도는 새로 도착한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유인하는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들은 희생자들에게 목욕 및 소독을 위해 탈의실로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가스실로 안내했다.[10] 희생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SS는 탈의실에서 소지품을 보관할 때 번호가 매겨진 고리를 제공했다. 이는 희생자들에게 잠시 후에 돌아와 자신의 물건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11]

3. 사진 촬영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내 존더코만도 대원들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외부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사진 촬영을 감행했다.[49][16] 이 사진들은 1944년 8월경, 수용소 내 화장터 V 근처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53][21]

사진 촬영은 주로 '알렉스'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그리스 출신 유대인 수감자가 주도했으며, 그는 알베르토 에레라로 여겨진다.[46][47][13][14] 알터 파인질베르크, 드라곤 형제, 다비트 슈물레프스키 등 다른 존더코만도 대원들이 카메라를 숨기고 SS의 감시를 피하는 등 위험한 촬영 과정을 도왔다.[49][16][51][18] 당시 사용된 카메라는 독일제 라이카로 추정되며, 몰래 숨겨 사용되었다.[52][19][37][20]

촬영된 네 장의 사진은 야외 소각 구덩이에서 시신을 처리하는 모습과 가스실로 향하기 전 옷을 벗는 여성과 남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51][18][58][26] 이 필름은 폴란드 지하 운동 조직원들의 도움으로 치약 튜브 안에 숨겨져 수용소 밖으로 밀반출되었고,[37][20] 크라쿠프의 지하 조직에 전달되었다.[57][25] 이 사진들은 존더코만도 대원들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에 나치 독일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남게 되었다.

3. 1. 촬영자

사진 촬영자는 주로 '알렉스'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그리스 출신 유대인 수감자였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알베르토 에레라(Alberto Errera)라는 이름의 그리스 해군 장교로, SS 장교를 공격한 뒤 총에 맞아 사망한 인물이다.[46][47][13][14] 에레라의 암호명은 알레코스 알렉산드리디스(Alekos Alexandridis)였다.[48][15]

사진 촬영에는 수용소 화장터 V에서 일하던 다른 존더코만도 대원들도 참여했다. 알터 파인질베르크(Alter Fajnzylberg, 스타니스와프 얀코프스키(Stanisław Jankowski)라고도 함), 슐로모 드라곤(Shlomo Dragon)과 요셀 드라곤(Josel Dragon) 형제, 다비트 슈물레프스키(David Szmulewski) 등이 카메라를 구하고 숨기는 것을 도왔으며, 촬영 중 망을 보는 역할을 했다.[49][16] 1943년 7월부터 화장터 V에서 일했던 파인질베르크는[50][17]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진을 찍은 날... 우리는 작업을 분담했다. 우리 중 일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호해야 했다. 즉, 비밀을 모르는 자의 접근, 무엇보다 그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SS 대원들의 접근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우리는 모두 외부에서 화장장 V의 가스실로 이어지는 서쪽 입구에 모였다. 우리는 철조망에서 문을 내려다 보는 망루에서 SS 대원을 볼 수 없었고 사진을 찍을 장소 근처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리스계 유대인인 알렉스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 불타는 시체 더미를 가리키고 셔터를 눌렀다. 이 때문에 사진에는 시체 더미에서 작업하는 존더코만도 수감자들이 찍혔다. 그들 옆에는 SS 대원 중 한 명이 서 있었지만 그의 등은 화장터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건물 반대편에서 찍은 것으로, 나무 사이에서 남녀가 옷을 벗고 있었다. 그들은 화장장 V의 가스실에서 살해될 차를 타고 왔다.[51][18]



파인질베르크는 카메라가 독일 라이카 제품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52][19] 슈물레프스키는 카메라를 양동이에 숨겼고, 알렉스가 사진을 찍는 동안 화장터 지붕 위에서 망을 보았다.[37][20] 파인질베르크는 알렉스가 셔터를 눌렀지만, 다섯 명 모두 현장에 있었고 함께 행동했다고 강조했다.[52][19]

1987년 장클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과의 인터뷰에서 슈물레프스키는 네 장의 사진이 15분에서 30분 사이에 촬영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영화 감독 크리스토프 코네(Christophe Cognet)는 사진의 그림자와 8월의 빛을 분석하여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자작나무 숲에서 찍힌 사진 283과 282는 오전 10시에서 11시 30분 사이에, 화장 구덩이를 찍은 사진 280과 281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했다.[53][21] 이는 같은 수송 인원이 가스 주입 전후로 촬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54][22] 역사학자 이고르 바르토식(Igor Bartosik)은 항공 사진과 사진 282의 나무 위치, 그리고 알터 파인질베르크의 증언(사진 282와 283이 내부에서 촬영되었다는 내용)을 종합하여, 키가 컸던 에레라가 치클론 B를 투입하기 위해 2m 높이에 설치된 가스실 구멍을 통해 사진을 찍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55][23]

사진 280과 281에는 가스실 창문이나 출입구로 보이는 검은색 틀이 나타난다.[56][24] 특히 사진 281의 왼쪽에는 사진 282의 일부가 보이는데, 이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에서 부여한 번호 순서와 실제 촬영 순서가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자작나무 숲에서 옷을 벗는 장면(사진 282, 283)이 화장 구덩이 장면(사진 280, 281)보다 먼저 촬영되었을 수 있다.

촬영된 필름은 폴란드 지하 운동 조직원들에 의해 수용소 밖으로 밀반출되었다. SS 매점에서 일하던 헬레나 단툰(Helena Dantón)이 필름을 치약 튜브 안에 숨겨 외부로 전달했다. 필름에는 정치범이었던 유제프 치란키에비치(Józef Cyrankiewicz)와 스타니스와프 크워진스키(Stanisław Kłodziński)가 1944년 9월 4일에 작성하고 "스타클로(Stakło)"라고 서명한 메모가 동봉되어 있었다.[37][20] 메모는 사진을 크라쿠프의 지하 운동 조직원인 테레사 워소츠카-에스트라이허(Teresa Łasocka-Estreicher), 암호명 "텔(Tell)"에게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담고 있었다.[57][25]



긴급. 6x9 필름 두 개를 가능한 한 빨리 보내주세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비르케나우의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여기에는 수감자들이 가스실로 보내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진은 화장터에서 모든 시체를 태울 수 없을 때 시체를 태우는 말뚝 중 하나를 보여줍니다. 앞쪽의 시체들은 불에 던져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진은 사람들이 '샤워'를 하기 전에 옷을 벗는 숲 속의 장소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가스실로 갑니다. 필름 롤을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첨부된 사진을 텔에게 보내주세요. 사진을 확대해서 더 멀리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58][26]


3. 2. 촬영 과정

사진 작가는 일반적으로 '알렉스'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그리스 출신 유대인 수감자였으며, 여러 자료에서는 그를 알베르토 에레라(Alberto Errera)로 지목한다. 에레라는 SS 장교를 공격한 후 사살된 그리스 해군 장교였다.[46][47] 그의 암호명은 알레코스 알렉산드리디스였다.[48]

사진 촬영은 수용소 내 화장터 V에서 활동하던 존더코만도 대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 알테르 파인질베르크(Alter Fajnzylberg, 스타니스와프 얀코프스키(Stanisław Jankowski)라고도 함), 슐로모(Shlomo) 및 요셀 드라곤(Josel Dragon) 형제, 다비트 슈물레프스키(David Szmulewski) 등이 카메라 확보 및 은닉, 망보기 등을 도왔다.[49] 1943년 7월부터 화장터 V에서 일했던 파인질베르크는[50]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사진을 찍던 날... 우리는 역할을 나누었다. 일부는 사진 찍는 사람을 보호해야 했다. 즉, 비밀을 모르는 사람, 특히 주변을 배회하는 SS 대원의 접근을 면밀히 감시해야 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우리는 모두 화장터 V의 가스실로 이어지는 서쪽 외부 입구에 모였다. 우리는 철조망 너머 감시탑이나 사진 찍을 장소 근처에서 SS 대원을 볼 수 없었다. 그리스계 유대인인 알렉스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 불타는 시체 더미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래서 사진에는 더미에서 작업하는 존더코만도 수감자들이 찍혔다. 그들 옆에는 SS 대원 한 명이 서 있었지만, 그의 등은 화장터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사진은 건물 반대편에서 찍은 것으로, 나무 사이에서 남녀가 옷을 벗고 있었다. 그들은 화장터 V의 가스실에서 살해될 운송된 사람들이었다.[51]

파인질베르크는 카메라가 독일 라이카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52] 슈물레프스키는 카메라를 양동이에 숨겼고, 알렉스가 사진을 찍는 동안 화장터 지붕 위에서 망을 보았다.[37] 파인질베르크는 알렉스가 셔터를 눌렀지만, 다섯 명 모두 현장에 있었고 함께 행동했다고 강조했다.[52]

네 장의 사진이 촬영된 시간 간격에 대해서는 증언과 분석이 엇갈린다. 슈물레프스키는 1987년 장클로드 프레삭과의 인터뷰에서 네 장의 사진이 15분에서 30분 간격으로 촬영되었다고 증언했다.[37] 반면, 영화 감독 크리스토프 코네는 사진의 그림자와 빛을 분석하여, 자작나무 숲에서 촬영된 사진 283과 282는 오전 10시에서 11시 30분 사이에, 화장 구덩이를 촬영한 사진 280과 281은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53] 이는 동일한 수송 인원들이 가스 주입 전후에 걸쳐 촬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54]

사진 282와 283의 촬영 방식에 대해, 역사가 이고르 바르토식은 알테르 파인질베르크가 이 사진들이 내부에서 촬영되었다고 증언한 점, 항공 사진과의 비교, 그리고 사진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에레라의 큰 키를 고려하여, 이 사진들이 자이클론 B를 가스실에 투입하는 구멍(높이 약 2m)을 통해 촬영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하였다.[55]

사진 280과 281에는 가스실 창문의 검은 틀이나 아마도 출입구가 보인다.[56] 사진 281에서는 사진 282의 일부가 왼쪽에 보이는데, 이는 이미지가 촬영된 순서가 주립 박물관의 번호 매기기와 모순됨을 의미한다. 즉, 자작나무 숲에서 옷을 벗는 이미지가 화장 구덩이 이미지보다 먼저 촬영되었다.

3. 3. 사진의 내용

사진 280번과 281번에서는 가스실 창문 또는 출입구로 추정되는 검은색 틀이 보인다.[24] 이 사진들은 야외 구덩이에서 불타는 시신 더미와 그 옆에서 작업하는 존더코만도 대원들의 참혹한 모습을 담고 있다.[18] 당시 나치화장터에서 모든 시신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이처럼 야외 소각 방식을 사용했다.[26] 존더코만도 대원 알터 파이즐베르그의 증언에 따르면, 사진 촬영 당시 SS 대원 한 명이 근처에 있었으나 등을 돌리고 있었다고 한다.[18]

특히 사진 281번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사진 282번의 일부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진들이 국립 박물관에서 부여한 번호 순서(280, 281, 282, 283)와는 다르게 촬영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자작나무 숲에서 사람들이 옷을 벗는 장면(사진 282, 283)이 야외 소각 장면(사진 280, 281)보다 먼저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24]

사진 282번과 283번은 자작나무 숲에서 남녀 희생자들이 옷을 벗는 장면을 보여준다.[18][26] 이들은 '샤워를 한다'는 나치의 기만적인 말에 속아 화장터 V의 가스실로 향하던 길이었다.[18][26] 역사학자 이고르 바르토식은 알터 파이즐베르그의 증언, 항공 사진, 사진을 찍은 알베르토 에레라의 큰 키 등을 근거로 이 사진들(282, 283)이 가스실 벽 약 2m 높이에 있는 치클론 B 투입구를 통해 촬영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23]

3. 4. 사진 유출

필름은 SS 매점에서 일하던 헬레나 단툰(Helena Dantón)이 치약 튜브 안에 숨겨 폴란드 지하 운동 조직에게 전달하여 수용소 밖으로 밀반출되었다.[37][20] 1944년 9월 4일, 정치범 요제프 치란키에비치(Józef Cyrankiewicz)와 스타니스와프 쿼진스키(Stanisław Kłodziński)가 작성한 "Stakło"라는 서명의 메모가 필름에 첨부되었다.[37][20] 이 메모는 사진을 크라쿠프 지하 조직의 "텔(Tell)"이라는 가명을 쓰는 테레사 와소츠카에스트레이헤르(Teresa Łasocka-Estreicher)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57][25]

:긴급. 6x9 필름 2롤을 가능한 한 빨리 보내주세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비르케나우의 사진을 보내드립니다. 여기에는 수감자들이 가스실로 보내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진은 화장터에서 모든 시체를 태울 수 없을 때 시체를 태우는 말뚝 중 하나를 보여줍니다. 앞쪽의 시체들은 불에 던져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진은 사람들이 '샤워'를 하기 전에 옷을 벗는 숲 속의 장소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가스실로 갑니다. 필름 롤을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첨부된 사진을 텔에게 보내주세요. 사진을 확대해서 더 멀리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58][26]

4. 원본 사진과 편집

존더코만도 사진은 처음 폴란드 저항군에 의해 외부로 알려졌을 때, 원본 그대로가 아닌 편집된 상태였다. 특히 두 장의 화장터 사진은 주변의 검은 프레임이 제거되고 사진 속 인물에 초점을 맞추도록 잘렸다.[59][27] 이러한 편집은 폴란드 사진작가 스타니스와프 무하(Stanisław Mucha)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59][27]

편집된 사진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보고서, 전시, 출판물 등을 통해 알려졌으나,[60][28][61][29] 자르지 않은 원본 사진은 1985년에 이르러서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에 기증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63][27]

사진을 자르는 편집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편집된 이미지는 사진 촬영 당시의 긴박하고 위험했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마치 사진작가가 안전한 환경에서 촬영한 듯한 왜곡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64][30]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편집이 사진 촬영이라는 저항 행위의 의미와 이미지 자체의 현상학적 가치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잘려나간 검은 부분이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사진이 촬영된 가스실이라는 공간과 극한의 상황, 즉 사진 존재의 조건을 증언하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라고 강조했다.[65][31]

4. 1. 편집 과정

사진이 폴란드 저항군에 의해 처음 배포되었을 때, 두 개의 화덕 이미지는 검은색 프레임을 제거하고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잘렸다. 사진 역사가 야니나 스트럭(Janina Struk)은 테레사 와소츠카에스트레이헤르(Teresa Łasocka-Estreicher, 수용소 쪽지에서 "Tell"로 언급됨)가 폴란드 사진작가 스타니스와프 무하(Stanisław Mucha)에게 사진 인화를 요청했으며, 무하가 사진을 자르기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했다.[59][27]

잘린 이미지 중 일부는 1945년 폴란드 판사 얀 셰른(Jan Sehn)이 작성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대한 보고서에 존더코만도 일원 다비트 슈물레프스키(Dawid Szmulewski)의 사진으로 게재되었다.[60][28] 잘린 사진 중 하나는 1947년 아우슈비츠에 전시되었고, 다른 사진들은 1958년 바르샤바에서 스타니스와프 브조스-글린카(Stanisław Wrzos-Glinka), 타데우시 마주르(Tadeusz Mazur), 예지 토마셰프스키(Jerzy Tomaszewski)가 출판한 책 ''1939–1945: Cierpienie i walka narodu polskiego'' (영어판 제목: ''1939–1945: We Have Not Forgotten'')에 실렸다. 일부 사진은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수정되기도 했다.[61][29]

스트럭은 1960년 브제슈체(Brzeszcze)에서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브와디슬라프 피틀리크(Władysław Pytlik)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에 자신의 전쟁 중 경험에 대한 증언을 제공하면서 잘린 사진 세 장을 가져왔다고 기록했다.[62][29] 그러나 박물관 측은 피틀리크가 사망한 후인 1985년, 그의 아내가 자르지 않은 원본 사진을 포함한 그의 사진들을 박물관에 기증하고 나서야 이전에 보았던 사진들이 잘린 버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63][27]

해설가들은 사진을 자르는 행위가 사건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제공하며, 마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사진을 찍은 사람과 그 그룹 전체가 발각되어 총살당할 수 있는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특히 282번과 283번 사진은 촬영자가 렌즈를 통해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찍혔다는 것이 분명하다.[64][30]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사진을 자르는 것이 사진을 안전하게 보이게 만들고, 저항 행위로서의 사진 촬영 과정과 이미지의 현상학적 의미, 즉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과정을 지워버린다고 비판했다.
시신과 구덩이의 시야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덩어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덩어리는 실제로 나머지 노출된 표면만큼 가치 있는 ''시각적 표시''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덩어리는 가스실의 공간이다. 장작 더미 위의 외부 존더코만도의 작업에 빛을 주기 위해 후퇴하고 물러나야 했던 ''어두운 방''이다. 그 검은 덩어리는 우리에게 상황 그 자체, 가능성의 공간, 사진 자체의 존재 조건을 제공한다.[65][31]

4. 2. 편집에 대한 비판

사진이 처음 폴란드 저항군에 의해 배포되었을 때, 두 개의 화덕 이미지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검은색 프레임이 제거된 채 잘렸다. 사진 역사가 재니나 스트럭(Janina Struk)에 따르면, 테레사 워소츠카-에스트라이셔(Teresa Łasocka-Estreicher)가 폴란드 사진작가 스타니스와프 무차(Stanisław Mucha)에게 인화를 요청했으며, 사진을 자르기로 결정한 사람은 무차로 추정된다.[59][27]

이렇게 잘린 이미지 중 일부는 1945년, 폴란드 판사 얀 셰른이 작성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보고서에서 존더코만도 일원 다비트 슈물레프스키(Dawid Szmulewski)의 사진으로 소개되었다.[60][28] 잘린 사진 중 하나는 1947년 아우슈비츠에 전시되었고, 다른 사진들은 1958년 바르샤바에서 스타니스와프 브조스-글린카(Stanisław Wrzos-Glinka), 타데우시 마주르(Tadeusz Mazur), 예지 토마셰프스키(Jerzy Tomaszewski)의 저서 ''1939–1945: Cierpienie i walka narodu polskiego'' (영어판 제목: ''1939–1945: We Have Not Forgotten'')에 실렸다. 일부 이미지는 더 명확하게 보이도록 수정되기도 했다.[61][29]

1960년, 브제슈체(Brzeszcze)의 저항 운동가 브와디스와프 피틀리크(Władysław Pytlik)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에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며 잘린 사진 세 장을 제출했다.[62][29] 박물관 측은 1985년 피틀리크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가 자르지 않은 원본을 포함한 사진들을 기증하면서 비로소 이전에 보았던 사진들이 편집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63][27]

사진을 자르는 행위는 사건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제공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편집된 이미지는 마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발각될 경우 총살당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282번과 283번 사진은 촬영자가 렌즈를 통해 직접 보지 않고 찍었음이 분명하다.[64][30]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사진을 자르는 행위가 이미지를 안전하게 보이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이라는 저항 행위와 이미지 자체의 현상학적 의미, 즉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과정을 지워버린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시신과 구덩이의 시야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덩어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덩어리는 실제로 나머지 노출된 표면만큼 가치 있는 ''시각적 표시''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덩어리는 가스실의 공간이다. 장작 더미 위의 외부 존더코만도의 작업에 빛을 주기 위해 후퇴하고 물러나야 했던 ''어두운 방''이다. 그 검은 덩어리는 우리에게 상황 그 자체, 가능성의 공간, 사진 자체의 존재 조건을 제공한다.[65][31]

5. 대중문화 속 사진

존더코만도가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언급되거나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66][67][32][33]

5. 1. 영화

사진들은 2015년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언급되었고,[66][32] 2021년 프랑스 다큐멘터리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에서 분석되었다.[67][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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