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츠슈타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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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츠슈타펠(SS)은 나치 독일의 핵심 조직으로, 1925년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부대로 시작하여 점차 권력을 확대하며 국가 조직으로 성장했다. 초기에는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였으나,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아래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며, 경찰 국가 수립, 홀로코스트 주도 등 나치 정권의 주요 정책을 수행했다. SS는 군사 조직인 무장 친위대(Waffen-SS)를 포함하여 다양한 부서를 거느렸으며, 전쟁 중에는 점령 지역에서의 학살과 전쟁 범죄에 깊이 관여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 조직으로 규정되었으며, 주요 간부들은 처형되거나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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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츠슈타펠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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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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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친위대 |
문자적 의미 | 보호 부대 |
약칭 | SS |
별칭 | 검은 제복의 부대 |
표어 | 충성 이야말로 나의 명예 |
군가 | 모두가 불충하게 될지라도 |
조직 | |
창설일 | 1925년 4월 4일 |
해산일 | 1945년 5월 8일 |
이전 조직 | 돌격대 (SA) Stabswache |
관할 | 나치 독일 및 독일 점령하 유럽 |
본부 | 프린츠-알브레히트-슈트라세, 베를린 |
규모 | 약 80만 명 (1944년 경) |
상위 기관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이전 상위 기관 | 돌격대 (1934년 7월까지) |
하위 기관 | 일반 친위대 무장 친위대 SS-Totenkopfverbände (SS-TV) 보안경찰 (SiPo; 1939년까지, 이후 국가보안본부로 통합) 보안대 (SD) 질서경찰 (Orpo) |
지휘부 | |
SS장관 | 율리우스 슈레크 (최초) 하인리히 힘러 (최장수) 카를 항케 (최후) |
군사 정보 | |
병과 | 총군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기타 | |
담당 지역 | 유럽 |
2. 역사
2. 1. 초기 역사 (1925년 ~ 1933년)
1920년의 결성부터 1933년의 정권 획득까지는, 적대 정당에 대한 무력 조직으로서 돌격대(SA)가 있었다.[2]당수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보디가드 집단으로는, 1923년 3월에 "사령부 호위대(Stabswache)"가 창설된 것이 최초이다.[3][4][5] 이 조직은 1923년 5월에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Stoßtrupp Adolf Hitler)"로 개편되었다.[5][6] 충격대의 대원 수는 200명 정도였으며,[6][7] 대장은 돌격대원 율리우스 슈레크 퇴역Hauptmann (Offizier)/대위 (독일)de와 나치 당 재무 담당 요제프 베르히토르트 퇴역Leutnant/소위 (독일)de 두 사람이 맡았다.[3][4]

1923년의 뮌헨 폭동 당시,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는, 경찰의 총격으로 쓰러진 히틀러를 말 그대로 방패가 되어 보호했으며, 5명의 대원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8] 울리히 그라프도 히틀러 특공대 대원으로서 히틀러를 보호했으며, 중상을 입은 인물이다.[5] 이때, 그들의 피로 물든 당기가 남겨졌지만, 히틀러는 그들의 공적을 잊지 않고, 나중에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서, 돌격대와 친위대의 부대에 이 "피로 물든 당기(Blutfahne (NSDAP))"에 닿게 하여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8]
뮌헨 폭동의 실패로, 나치 당도 돌격대도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도 강제적으로 해산되었다.[8][9]
1924년 12월 20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출소한 히틀러는 바이에른주 총리 하인리히 헤르트와 회담하여 두 번 다시 폭동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1925년 2월 25일에 나치당에 대한 비상사태 선언 해제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나치당을 재건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2월 27일에 히틀러는 나치당의 재결당 선언을 했다.[10]
나치당 조직 재건 과정에서 히틀러는 1925년 4월 중순에 율리우스 슈레크에게 자신의 경호 부대를 재건하도록 명령했다. 2주 후인 5월에 이 조직은 "'''친위대'''(Schutzstaffel)"라는 이름을 받았다.[11][12][13] 발족 당시 친위대 대원 수는 불과 8명이었다.[12]
초기 친위대에는 다음과 같은 입대 조건이 있었다.
- 나이 23세에서 35세까지
- 건강하고 건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을 것
- 키 170cm 이상[1]
- "좋은 혈통", 즉 순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것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에 유대인이 없었을 것)[1]
- 나치의 이상으로 하는 독일 민족의 특징을 갖출 것 (외모 요건)[14]
- 긴 머리
- 푸른 눈
- 금발
- 2명 이상의 보증인을 세울 수 있을 것
- 동일한 거주지에 5년 이상 거주했다는 것을 경찰에 신고했을 것
또한, 친위대의 행동 지침에는 알코올 중독자, 수다쟁이, 비행 경력이 있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독일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입대할 수 있었던 돌격대와 달리, 친위대는 설립 초기부터 일정 입대 조건이 존재했다.[13][15][16] 친위대는 설립 직후 드레스덴에서 공산당원 50명에 의한 나치당 집회 습격을 미연에 방지하는 공을 세웠다.[8][16]
슈레크는 친위대 확장에 힘썼고, 1925년 9월에는 모든 지방 당 그룹에 친위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16] 1925년 크리스마스의 친위대 보고에 따르면 대원 수는 1,000명이 되었다고 한다.[17] 1926년 봄에는 "친위대 사령부(SS-Oberleitung)"가 창설되었다.[18]
1926년 4월에 베르히톨트가 망명지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여 슈레크로부터 친위대 대장의 직을 물려받았다.[19][20] 1926년 7월 4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제2회 당대회에서 "피로 물든 당기"가 돌격대에서 친위대의 관리로 넘어갔다.[17][21][22]
1926년 11월 1일에 프란츠 페퍼 폰 잘로몬이 돌격대 최고 지도자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친위대는 돌격대의 산하에 편입되었고, 동시에 베르히톨트는 "친위대 전국 지도자"(Reichsführer-SS)의 직함을 얻었다.[20][21][23]
결국 베르히톨트는 폰 잘로몬과의 갈등이 심해져 사임했다.[24] 1927년 3월에 베르히톨트의 부관 에르하르트 하이덴이 대신 친위대 전국 지도자로 취임했다.[24][25][26] 돌격대 최고 지도자 폰 잘로몬은 각 지역의 친위대원 수를 돌격대원 수의 10% 이하로 하도록 명령했고, 이로 인해 하이덴은 대원 수 감축을 강요받았다. 그 때문에 1928년까지 친위대 대원 수는 280명으로 감소했다.[24][27] 하이덴 역시 폰 잘로몬과의 갈등이 심해져 1929년 1월 6일에 사임하게 되었다.[21][22]
1929년 1월 6일, 하인리히 힘러가 제4대 친위대 전국지도자로 임명되었다.[26][28][29][30][31][32][33] 당시 친위대는 280명 정도의 약소 조직이었으나, 힘러의 지휘 아래 1929년 말에는 1,000명,[22][34] 1930년 말에는 2,700명,[22][34] 1931년에는 1만 5000명,[35] 1932년 4월에는 2만 5000명,[36] 1932년 말에는 5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37][38]
이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과 관련이 있었다. 실업자들이 대거 나치당 및 나치당 조직에 참가를 희망했고, 친위대에도 입대 희망자가 쇄도했다.[39] 물론 돌격대는 친위대보다 더 많은 이 인적 자원을 흡수했다. 이로 인해 독일 각지에서 무리를 지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돌격대원이 증가했다. 급기야 당수 아돌프 히틀러의 통제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난폭해져, 당시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던 히틀러에게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 돌격대의 불법 분자들에 대한 경찰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임무를 수행할 조직으로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에 주목했다.[22][40] 게다가 친위대 확대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돌격대 최고 지도자 폰 잘로몬이 히틀러와의 대립으로 1930년 8월 12일에 사임하게 되었고, 같은 달 말에는 동부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발터 슈테네스가 당 지도부에 반란을 일으켰다.[41]
이러한 정세 속에서 히틀러는 1930년 11월 7일 자 명령으로 정식으로 친위대를 당내 경찰 조직으로 규정하고, 친위대는 돌격대의 지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정했다. 단, 1934년의 "장검의 밤"까지 형식적으로 돌격대의 하부 조직이었다.[42][43]
발터 다레의 『피와 땅』의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힘러는 1929년 4월에 친위대 조직 규정 초안을 히틀러와 폰 잘로몬에게 제출하고, 인종적인 문제를 친위대 입대의 조건으로 삼기 시작했다.[44] 수적으로 압도적인 돌격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친위대를 "엘리트 집단"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힘러와 다레가 말하는 "엘리트"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장신의 북방 인종을 의미했다.[45][46]
힘러는 농업을 배우고 농약 회사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식물의 품종 개량에 비유하며 "잡초"를 제거하고 "혈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신장 5피트 8인치(약 173cm)를 기준"으로 "특정 신장 이상이면, 내가 원하는 혈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44][47]
인적 자원의 공급원은 대공황 실업자나 돌격대로부터의 스카우트 등으로 풍부했다. 다만 채용되는 것은 힘러의 "품종 기준"을 충족하는 자에 한정되었다.[39] 힘러는 1931년 12월 31일 명령으로 친위대원의 혼인 조례를 정하고, 인종·유전의 관점에서 대원의 혼인에 문제가 없는지 조사하기 위한 기관으로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RuSHA)를 창설하고, 다레를 그 장관으로 임명했다.[48] 유대인으로부터 독일을 지키는 세계관 투쟁을 담당하는 것은 친위대라는 자부심을 키워갔다.[18]
1930년 7월 쿠르트 달루게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달루게는 친위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독립하여 지휘하는 것을 히틀러로부터 인정받은 인물로, 친위대 이적 후에도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여 지휘했다.[49] 달루게는 1931년 3월 돌격대원 발터 슈테네스의 재반란을 진압하는 데 활약했다. 이 사건은 친위대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이 때 히틀러는 달루게에게 "SS 대원, 당신의 명예는 충성이다(SS-Mann, deine Ehre heißt Treue)"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때의 말이 후에 "충성만이 나의 명예"라는 친위대의 모토의 원형이 되었다.[36]
한편 슈테네스의 반란에는 프로이센주 내무부 장관 카를 제페링의 정치 경찰이 원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히틀러는 당내 정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힘러에게 친위대 정보부 창설을 지시했다.[50] 1931년 6월에는 해군에서 추방되어 실업 상태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힘러는 이 하이드리히에게 친위대의 첩보부 "IC과"를 맡겼다. 1932년 7월에 이 조직은 SD로 개편되었다. SD는 후에 전 유럽에 감시망을 펼치는 거대한 첩보 기관으로 성장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하이드리히의 아내 리나가 비서를 맡았고, 그의 부하는 3명뿐이었다.[51]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정력적으로 일했고, 그의 색인 카드에는 당 안팎의 정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기재되었다.[52] 하이드리히의 조직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나치당의 각 지부에 하이드리히의 지방 기관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돌격대 첩보부 등 다른 당의 첩보 조직을 제치고, 정권 장악 후 1934년 6월 9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성명에 의해 SD는 당 유일의 첩보 조직으로 정해졌다.[53][54]
1932년 1월 25일에는 뮌헨의 당 본부 "갈색의 집" 경비를 힘러가 전권을 위임받았다.[55] 1932년 7월 7일에는 지금까지의 돌격대와 같은 형태의 제복을 대신하여 친위대만의 제복이 제정되었다. 이것이 친위대의 제복으로 유명한 "검은 옷"이었다. 돌격대와의 독자 노선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36] 힘러는 친위대의 모범으로 예수회를 의식했으며, 그 급속한 세력 확대와 검은 제복으로 인해 친위대는 "검은 예수회"라고 불리기도 했다.[56]
돌격대의 전신 조직 지휘관으로 나치당 고참인 에밀 모리스는 한때 추방되었으나, 1932년 복귀 후 친위대 상급대령 (대원 번호 2번)으로 임명되었다.
2. 1. 1. 친위대 창설과 초기 활동
1920년의 결성부터 1933년의 정권 획득까지는, 적대 정당에 대한 무력 조직으로서 돌격대(SA)가 있었다.[2]
당수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보디가드 집단으로는, 1923년 3월에 "사령부 호위대(Stabswache)"가 창설된 것이 최초이다.[3][4][5] 이 조직은 1923년 5월에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Stoßtrupp Adolf Hitler)"로 개편되었다.[5][6] 충격대의 대원 수는 200명 정도였으며,[6][7] 대장은 돌격대원 율리우스 슈레크 퇴역Hauptmann (Offizier)/대위 (독일)de와 나치 당 재무 담당 요제프 베르히토르트 퇴역Leutnant/소위 (독일)de 두 사람이 맡았다.[3][4]
1923년 무렵,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은 뮌헨에서 열리는 회의의 경호를 위해 '잘-슈츠'(Saal-Schutz, 홀 보안)로 알려진 소규모 자원 경비 부대를 만들었다. 같은 해, 히틀러는 자신의 개인 경호를 위한 소규모 보디가드 부대의 창설을 명령했다. 그는 신뢰하지 못했던 무장 조직인 ''돌격대''(SA)를 포함한 당의 "의심스러운 대중"과는 분리되기를 바랐다. 새로운 조직은 '슈타브스바헤'(Stabswache, 참모 경비대)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부대는 율리우스 슈레크와 요제프 베르히톨트가 지휘하는 8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자유군단이었던 에르하르트 해군 여단(Marinebrigade Ehrhardt)을 모델로 했다. 이 부대는 1923년 5월에 ''슈토스츠루프'' (Stoßtrupp, 충격 부대)로 개칭되었다.
1923년의 뮌헨 폭동 당시,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는, 경찰의 총격으로 쓰러진 히틀러를 말 그대로 방패가 되어 보호했으며, 5명의 대원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8] 울리히 그라프도 히틀러 특공대 대원으로서 히틀러를 보호했으며, 중상을 입은 인물이다.[5] 이때, 그들의 피로 물든 당기가 남겨졌지만, 히틀러는 그들의 공적을 잊지 않고, 나중에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서, 돌격대와 친위대의 부대에 이 "피로 물든 당기(Blutfahne (NSDAP))"에 닿게 하여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의식을 행했다.[8]
뮌헨 폭동의 실패로, 나치 당도 돌격대도 아돌프 히틀러 특공대도 강제적으로 해산되었다.[8][9] ''슈토스츠루프''는 나치당이 뮌헨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1923년 맥주홀 폭동 실패 이후 해산되었다.
1924년 12월 20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출소한 히틀러는 바이에른주 총리 하인리히 헤르트와 회담하여 두 번 다시 폭동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1925년 2월 25일에 나치당에 대한 비상사태 선언 해제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나치당을 재건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2월 27일에 히틀러는 나치당의 재결당 선언을 했다.[10]
나치당 조직 재건 과정에서 히틀러는 1925년 4월 중순에 율리우스 슈레크에게 자신의 경호 부대를 재건하도록 명령했다. 2주 후인 5월에 이 조직은 "'''친위대'''(Schutzstaffel)"라는 이름을 받았다.[11][12][13] 발족 당시 친위대 대원 수는 불과 8명이었다.[12] 1925년 히틀러는 슈레크에게 새로운 보디가드 부대인 '슈츠코만도'(Schutzkommando, 방호 사령부)를 조직하도록 명령했다. 이 부대는 당 행사에서 히틀러의 개인 경호를 담당했다. 같은 해, ''슈츠코만도''는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어 '슈투름슈타펠'(Sturmstaffel, 폭풍 분대)로, 최종적으로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 친위대; SS)로 개칭되었다. 공식적으로, SS는 1925년 11월 9일(맥주홀 폭동 2주년)을 창설일로 기념했다. 새로운 SS는 독일 전역에서 당 지도자들을 보호했다. 히틀러의 개인 SS 경호 부대는 나중에 전투 부대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초기 친위대에는 다음과 같은 입대 조건이 있었다.
- 나이 23세에서 35세까지
- 건강하고 건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을 것
- 키 170cm 이상[1]
- "좋은 혈통", 즉 순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것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상에 유대인이 없었을 것)[1]
- 나치의 이상으로 하는 독일 민족의 특징을 갖출 것 (외모 요건)[14]
- 긴 머리
- 푸른 눈
- 금발
- 2명 이상의 보증인을 세울 수 있을 것
- 동일한 거주지에 5년 이상 거주했다는 것을 경찰에 신고했을 것
또한, 친위대의 행동 지침에는 알코올 중독자, 수다쟁이, 비행 경력이 있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독일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입대할 수 있었던 돌격대와 달리, 친위대는 설립 초기부터 일정 입대 조건이 존재했다.[13][15][16] 친위대는 설립 직후 드레스덴에서 공산당원 50명에 의한 나치당 집회 습격을 미연에 방지하는 공을 세웠다.[8][16]
슈레크는 친위대 확장에 힘썼고, 1925년 9월에는 모든 지방 당 그룹에 친위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16] 1925년 크리스마스의 친위대 보고에 따르면 대원 수는 1,000명이 되었다고 한다.[17] 1926년 봄에는 "친위대 사령부(SS-Oberleitung)"가 창설되었다.[18]
1926년 4월에 베르히톨트가 망명지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여 슈레크로부터 친위대 대장의 직을 물려받았다.[19][20] 슈츠슈타펠(SS)의 창립 멤버이자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율리우스 슈렉은 1925년 3월 SS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4월 15일, 요제프 베르히톨트가 그의 뒤를 이어 SS의 지도자가 되었다. 베르히톨트는 직함 이름을 'Reichsführer-SS'(제국 지도자-SS)로 변경했다. 1926년 7월 4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제2회 당대회에서 "피로 물든 당기"가 돌격대에서 친위대의 관리로 넘어갔다.[17][21][22]
1926년 11월 1일에 프란츠 페퍼 폰 잘로몬이 돌격대 최고 지도자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친위대는 돌격대의 산하에 편입되었고, 동시에 베르히톨트는 "친위대 전국 지도자"(Reichsführer-SS)의 직함을 얻었다.[20][21][23] 베르톨트는 전임자보다 더 역동적인 인물로 여겨졌지만, SA가 SS에 대해 행사하는 권한에 점차 좌절감을 느꼈다. 이로 인해 그는 1927년 3월 1일에 부관인 에르하르트 하이덴에게 SS의 지휘권을 넘겼다. 하이덴의 지휘 하에 SA에서는 용납되지 않았을 더 엄격한 규율이 시행되었다.
결국 베르히톨트는 폰 잘로몬과의 갈등이 심해져 사임했다.[24] 1927년 3월에 베르히톨트의 부관 에르하르트 하이덴이 대신 친위대 전국 지도자로 취임했다.[24][25][26] 돌격대 최고 지도자 폰 잘로몬은 각 지역의 친위대원 수를 돌격대원 수의 10% 이하로 하도록 명령했고, 이로 인해 하이덴은 대원 수 감축을 강요받았다. 그 때문에 1928년까지 친위대 대원 수는 280명으로 감소했다.[24][27] 하이덴 역시 폰 잘로몬과의 갈등이 심해져 1929년 1월 6일에 사임하게 되었다.[21][22]
1925년과 1929년 사이에 SS는 SA의 작은 ''Gruppe''(대대)로 여겨졌다. 뮌헨 지역을 제외하고, SS는 SA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동안 회원 수가 1,000명에서 280명으로 감소하면서 어떠한 성장 동력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이덴이 SS 해체를 막으려 노력하는 동안, 하인리히 히믈러가 1927년 9월에 그의 부관이 되었다. 히믈러는 하이덴보다 더 나은 조직 능력을 보여주었다. SS는 여러 ''가우'' (지역 또는 지방)를 설립했다. SS-가우는 ''SS-가우 베를린'', ''SS-가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SS-가우 프랑켄'', ''SS-가우 니더바이에른'', ''SS-가우 라인란트-쥐트'', 그리고 ''SS-가우 작센''으로 구성되었다.
2. 1. 2. 하인리히 힘러의 등장과 친위대의 성장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1929년 1월에 ''국가지도자-SS'' 직을 맡았다.[26][28][29][30][31][32][33] 힘러는 SS를 엘리트적이고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 사회주의 조직, 즉 "튜튼 기사단, 예수회, 사무라이의 융합"으로 여겼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SS를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자 당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SS 지도자로 취임한 첫 해에 SS를 3,000명으로 확장했다.
1929년, ''SS-Hauptamt''(SS 본부)는 일반 행정, 인사, 재정, 보안 및 인종 문제를 다루는 5개의 주요 사무소로 확장 및 재편되었다. 동시에 SS-가우는 세 개의 ''SS-Oberführerbereiche'' 지역, 즉 ''SS-Oberführerbereich Ost'', ''SS-Oberführerbereich West'', ''SS-Oberführerbereich Süd''로 나뉘었다. SS의 하위 조직은 대체로 변경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SA의 하위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참모총장''(SA 참모총장)에게 보고했지만, 이 시기에 힘러는 SA로부터 SS의 독립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SS는 히틀러에 대한 독점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규모와 권력이 커졌다. 이는 SA와 대조적인데, SA는 반독립적이며 나치당을 권력으로 이끈 혁명 외에 "두 번째 혁명"을 요구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당에 대한 지배에 위협이 되었다.
1929년 1월 6일, 하이덴의 부관이었던 하인리히 힘러가 제4대 친위대 전국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친위대는 280명 정도의 약소 조직이었지만, 힘러의 지휘 아래 친위대는 그 규모를 급속도로 확대하여 1929년 말에는 1,000명[22][34], 1930년 말에는 2,700명[22][34], 1931년에는 1만 5000명[35], 1932년 4월에는 2만 5000명[36], 1932년 말에는 5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37][38]
이는 1929년 10월 24일의 뉴욕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과 관련이 있었다. 실업자들이 대거 나치당 및 나치당 조직에 참가를 희망했고, 친위대에도 입대 희망자가 쇄도했다.[39] 물론 돌격대는 친위대보다 더 많은 이 인적 자원을 흡수했다. 이로 인해 독일 각지에서 무리를 지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돌격대원이 증가했다. 급기야 당수 히틀러의 통제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난폭해져, 당시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던 히틀러에게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 돌격대의 불법 분자들에 대한 경찰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임무를 수행할 조직으로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에 주목했다.[22][40] 게다가 친위대 확대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돌격대 최고 지도자 폰 잘로몬이 히틀러와의 대립으로 1930년 8월 12일에 사임하게 되었고, 같은 달 말에는 동부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발터 슈테네스가 당 지도부에 반란을 일으켰다.[41]
이러한 정세 속에서 히틀러는 1930년 11월 7일 자 명령으로 정식으로 친위대를 당내 경찰 조직으로 규정하고, 친위대는 돌격대의 지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정했다. 단, 1934년의 "장검의 밤"까지 형식적으로 돌격대의 하부 조직이었다.[42][43]
1933년 말까지 SS의 구성원은 209,000명에 달했다. 힘러의 지도력 아래 SS는 점점 더 많은 국가 및 당 기능을 관할하게 되면서 더욱 큰 권력을 얻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SS는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는 나치 정권 전체의 조직 구조에서 전형적인 발전으로, 법적 규범은 지도자 원칙de (지도자 원칙)에 따라 취해진 행동으로 대체되었고, 히틀러의 의지는 법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발터 다레의 『피와 땅』의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힘러는 1929년 4월에 친위대 조직 규정 초안을 히틀러와 폰 잘로몬에게 제출하고, 인종적인 문제를 친위대 입대의 조건으로 삼기 시작했다.[44] 수적으로 압도적인 돌격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친위대를 "엘리트 집단"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힘러와 다레가 말하는 "엘리트"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장신의 북방 인종을 의미했다.[45][46]
농업을 배우고 농약 회사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힘러는 이러한 기준에 대해 식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품종 개량을 하는 재배자와 같다. 훌륭한 품종도 잡초와 섞이면 질이 떨어진다.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번식시키는 것이지만, 우리는 먼저 식물 선택의 원칙에 따라, 다음에 우리가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 즉 잡초를 제거한다. 나는 신장 5피트 8인치(약 173cm)를 기준으로 시작했다. 특정 신장 이상이면, 내가 원하는 혈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44][47]
인적 자원의 공급원은 대공황 실업자나 돌격대로부터의 스카우트 등으로 풍부했다. 다만 채용되는 것은 힘러의 "품종 기준"을 충족하는 자에 한정되었다.[39] 힘러는 1931년 12월 31일 명령으로 친위대원의 혼인 조례를 정하고, 인종·유전의 관점에서 대원의 혼인에 문제가 없는지 조사하기 위한 기관으로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 (RuSHA)를 창설하고, 다레를 그 장관으로 임명했다.[48] 유대인으로부터 독일을 지키는 세계관 투쟁을 담당하는 것은 친위대라는 자부심을 키워갔다.[18]
1934년 후반기에 힘러는 SS 장교 후보생들이 지도력 훈련, 정치 및 이념적 교육, 군사 훈련을 받는 기관인 ''SS-융커슐레''의 설립을 감독했다. 이 훈련은 SS 가치 시스템의 일부로 무자비함과 강인함을 강조했는데, 이는 이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키우고 자신감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학교는 바트 횔츠와 브라운슈바이크에 설립되었고, 전쟁 중에는 클라겐푸르트와 프라하에 추가 학교가 개설되었다.
1930년 7월 쿠르트 달루게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달루게는 친위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독립하여 지휘하는 것을 히틀러로부터 인정받은 인물로, 친위대 이적 후에도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여 지휘했다.[49] 달루게는 1931년 3월 돌격대원 발터 슈테네스의 재반란을 진압하는 데 활약했다. 이 사건은 친위대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이 때 히틀러는 달루게에게 "SS 대원, 당신의 명예는 충성이다(SS-Mann, deine Ehre heißt Treue)"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때의 말이 후에 "충성만이 나의 명예"라는 친위대의 모토의 원형이 되었다.[36]
한편 슈테네스의 반란에는 프로이센주 내무부 장관 카를 제페링의 정치 경찰이 원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히틀러는 당내 정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힘러에게 친위대 정보부 창설을 지시했다.[50] 1931년 6월에는 해군에서 추방되어 실업 상태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힘러는 이 하이드리히에게 친위대의 첩보부 "IC과"를 맡겼다. 1932년 7월에 이 조직은 SD로 개편되었다. SD는 후에 전 유럽에 감시망을 펼치는 거대한 첩보 기관으로 성장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하이드리히의 아내 리나가 비서를 맡았고, 그의 부하는 3명뿐이었다.[51]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정력적으로 일했고, 그의 색인 카드에는 당 안팎의 정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기재되었다.[52] 하이드리히의 조직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나치당의 각 지부에 하이드리히의 지방 기관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돌격대 첩보부 등 다른 당의 첩보 조직을 제치고, 정권 장악 후 1934년 6월 9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성명에 의해 SD는 당 유일의 첩보 조직으로 정해졌다.[53][54]
1932년 1월 25일에는 뮌헨의 당 본부 "갈색의 집" 경비를 힘러가 전권을 위임받았다.[55] 1932년 7월 7일에는 지금까지의 돌격대와 같은 형태의 제복을 대신하여 친위대만의 제복이 제정되었다. 이것이 친위대의 제복으로 유명한 "검은 옷"이었다. 돌격대와의 독자 노선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36] 힘러는 친위대의 모범으로 예수회를 의식했으며, 그 급속한 세력 확대와 검은 제복으로 인해 친위대는 "검은 예수회"라고 불리기도 했다.[56]
돌격대의 전신 조직 지휘관으로 나치당 고참인 에밀 모리스는 한때 추방되었으나, 1932년 복귀 후 친위대 상급대령 (대원 번호 2번)으로 임명되었다.
2. 1. 3. 당내 경찰 조직으로의 발전
1929년 1월 6일, 하인리히 힘러가 제4대 친위대 전국지도자로 임명되었다.[26][28][29][30][31][32][33] 당시 친위대는 280명 정도의 약소 조직이었으나, 힘러의 지휘 아래 1929년 말에는 1,000명,[22][34] 1930년 말에는 2,700명,[22][34] 1931년에는 1만 5000명,[35] 1932년 4월에는 2만 5000명,[36] 1932년 말에는 5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37][38]이는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세계 대공황과 관련이 있었다. 실업자들이 대거 나치당 및 나치당 조직에 참가를 희망했고, 친위대에도 입대 희망자가 쇄도했다.[39] 물론 돌격대는 친위대보다 더 많은 이 인적 자원을 흡수했다. 이로 인해 독일 각지에서 무리를 지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돌격대원이 증가했다. 급기야 당수 아돌프 히틀러의 통제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난폭해져, 당시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던 히틀러에게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 돌격대의 불법 분자들에 대한 경찰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임무를 수행할 조직으로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에 주목했다.[22][40] 게다가 친위대 확대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돌격대 최고 지도자 폰 잘로몬이 히틀러와의 대립으로 1930년 8월 12일에 사임하게 되었고, 같은 달 말에는 동부 베를린 돌격대 지도자 발터 슈테네스가 당 지도부에 반란을 일으켰다.[41]
이러한 정세 속에서 히틀러는 1930년 11월 7일 자 명령으로 정식으로 친위대를 당내 경찰 조직으로 규정하고, 친위대는 돌격대의 지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정했다. 단, 1934년의 "장검의 밤"까지 형식적으로 돌격대의 하부 조직이었다.[42][43]
발터 다레의 『피와 땅』의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힘러는 1929년 4월에 친위대 조직 규정 초안을 히틀러와 폰 잘로몬에게 제출하고, 인종적인 문제를 친위대 입대의 조건으로 삼기 시작했다.[44] 수적으로 압도적인 돌격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친위대를 "엘리트 집단"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힘러와 다레가 말하는 "엘리트"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장신의 북방 인종을 의미했다.[45][46]
힘러는 농업을 배우고 농약 회사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식물의 품종 개량에 비유하며 "잡초"를 제거하고 "혈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신장 5피트 8인치(약 173cm)를 기준"으로 "특정 신장 이상이면, 내가 원하는 혈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44][47]
인적 자원의 공급원은 대공황 실업자나 돌격대로부터의 스카우트 등으로 풍부했다. 다만 채용되는 것은 힘러의 "품종 기준"을 충족하는 자에 한정되었다.[39] 힘러는 1931년 12월 31일 명령으로 친위대원의 혼인 조례를 정하고, 인종·유전의 관점에서 대원의 혼인에 문제가 없는지 조사하기 위한 기관으로 친위대 인종 및 이주 본부(RuSHA)를 창설하고, 다레를 그 장관으로 임명했다.[48] 유대인으로부터 독일을 지키는 세계관 투쟁을 담당하는 것은 친위대라는 자부심을 키워갔다.[18]
1930년 7월 쿠르트 달루게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달루게는 친위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독립하여 지휘하는 것을 히틀러로부터 인정받은 인물로, 친위대 이적 후에도 베를린 친위대를 힘러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여 지휘했다.[49] 달루게는 1931년 3월 돌격대원 발터 슈테네스의 재반란을 진압하는 데 활약했다. 이 사건은 친위대의 지위를 크게 높였다. 이 때 히틀러는 달루게에게 "SS 대원, 당신의 명예는 충성이다(SS-Mann, deine Ehre heißt Treue)"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때의 말이 후에 "충성만이 나의 명예"라는 친위대의 모토의 원형이 되었다.[36]
한편 슈테네스의 반란에는 프로이센주 내무부 장관 카를 제페링의 정치 경찰이 원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히틀러는 당내 정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힘러에게 친위대 정보부 창설을 지시했다.[50] 1931년 6월에는 해군에서 추방되어 실업 상태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친위대에 참가했다. 힘러는 이 하이드리히에게 친위대의 첩보부 "IC과"를 맡겼다. 1932년 7월에 이 조직은 SD로 개편되었다. SD는 후에 전 유럽에 감시망을 펼치는 거대한 첩보 기관으로 성장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하이드리히의 아내 리나가 비서를 맡았고, 그의 부하는 3명뿐이었다.[51]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정력적으로 일했고, 그의 색인 카드에는 당 안팎의 정적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기재되었다.[52] 하이드리히의 조직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나치당의 각 지부에 하이드리히의 지방 기관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돌격대 첩보부 등 다른 당의 첩보 조직을 제치고, 정권 장악 후 1934년 6월 9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성명에 의해 SD는 당 유일의 첩보 조직으로 정해졌다.[53][54]
1932년 1월 25일에는 뮌헨의 당 본부 "갈색의 집" 경비를 힘러가 전권을 위임받았다.[55] 1932년 7월 7일에는 지금까지의 돌격대와 같은 형태의 제복을 대신하여 친위대만의 제복이 제정되었다. 이것이 친위대의 제복으로 유명한 "검은 옷"이었다. 돌격대와의 독자 노선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36] 힘러는 친위대의 모범으로 예수회를 의식했으며, 그 급속한 세력 확대와 검은 제복으로 인해 친위대는 "검은 예수회"라고 불리기도 했다.[56]
돌격대의 전신 조직 지휘관으로 나치당 고참인 에밀 모리스는 한때 추방되었으나, 1932년 복귀 후 친위대 상급대령 (대원 번호 2번)으로 임명되었다.
2. 2. 나치 정권 장악 이후 (1933년 ~ 1939년)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친위대는 국가 조직이자 정부의 한 부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57] 법 집행은 점차 SS의 권한이 되었고, 많은 SS 조직이 사실상 정부 기관이 되었다.SS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힘러의 통제하에 비밀 국가 경찰과 보안군을 사용하여 나치 독일 내에 경찰 국가를 수립했다. 프로이센 국무총리였던 헤르만 괴링은 1933년에 프로이센 비밀 경찰인 ''게마이네 슈타츠폴리차이''(Geheime Staatspolizei), 즉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루돌프 딜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딜스가 SA의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게슈타포를 사용할 만큼 잔혹하지 않다고 우려한 괴링은 1934년 4월 20일 그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또한 그날 히틀러는 오랫동안 지속된 독일 관행인 법 집행이 국가 및 지방 문제라는 점에서 벗어나 힘러를 프로이센 외 모든 독일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1934년 4월 22일 자신의 부관이자 제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지허어하이트스디엔스트(SD; 보안국)''의 수장직도 계속 수행했다.

게슈타포가 힘러에게 이전된 것은 대부분의 SA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된 장검의 밤의 전주곡이었다. SS와 게슈타포가 대부분의 살인을 저질렀다. 1934년 7월 20일, 히틀러는 숙청 이후 더 이상 영향력이 없어진 SA로부터 SS를 분리했다. SS는 히틀러에게만 복종하는 나치당의 엘리트 군단이 되었다. 힘러의 ''Reichsführer-SS'' 직함은 이제 그의 실제 계급, 즉 육군의 야전 원수와 동등한 SS의 최고 계급이 되었다(그의 이전 계급은 ''오버그루펜퓌러''였다). 힘러의 지위와 권위가 커짐에 따라 그의 계급도 사실상 높아졌다.
1936년 6월 17일, 독일 전역의 모든 경찰력이 힘러와 SS의 관할 아래 통합되었다. 따라서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국가 행정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행정 통제하에 놓인 경찰 및 정보 부서에는 SD, 게슈타포, ''크리미날폴리차이''(Kripo; 형사 수사 경찰) 및 ''오르둥스폴리차이''(Orpo; 정규 제복 경찰)가 포함되었다. 경찰청장 자격으로 힘러는 형식적으로 내무부 장관 빌헬름 프릭에게 종속되었다. 실제로는 SS가 히틀러에게만 복종했기 때문에 SS와 경찰의 사실상 통합으로 경찰은 프릭의 통제를 벗어났다. 1939년 9월, ''지허어하이트스폴리차이''(SiPo; 보안 경찰)와 SD를 포함한 보안 및 경찰 기관(Orpo 제외)은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국가보안본부(RSHA)로 통합되었다. 이는 SS의 집단적 권위를 더욱 강화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의 정권을 장악했다.
기회주의자들이 보신을 위해 속속 입당했기[57] 때문에 친위대 역시 폭발적으로 대원 수가 증가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5만 2000명이었지만[31], 1933년 말에는 20만 9000명의 대원 수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명예 대원이나 주말에만 동원되는 대원들이 많았고, 행사가 있을 때 제복을 입고 참여하는 파트타임의 비상근 대원이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방군으로부터는 퍼레이드 전문의 "아스팔트 병사"라고 멸시받았다[58] 또한 히믈러는 친위대 명예 지도자 제도를 신설하여, 정재계의 요인들을 친위대에 모았다. 명예 지도자는 친위대의 임무는 전혀 부여되지 않는 대신 친위대의 조직이나 대원에 대해 아무런 명령권도 없는 존재였다[59]

한편, 베를린 친위대 지도자인 쿠르트 달뤼게는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으로 취임한 괴링과 접근하여 프로이센 주 경찰 특별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프로이센 주 경찰 중장 계급을 받았다. 2월 22일에는 괴링이 돌격대원 2만 5천 명과 친위대원 1만 5천 명을 프로이센 주의 보조 경찰로 채용했지만, 그 지휘는 달뤼게에게 맡겨졌다[65][66]。 달뤼게는 점점 명목상의 상관인 히믈러를 경시하게 되었다. 1933년 봄에는 하이드리히가 히믈러로부터 달뤼게를 진압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파견되었지만, 게슈타포 (프로이센 주 비밀경찰. 당시에는 괴링이 청장, 루돌프 디엘스가 국장을 하고 있었다)에게 협박을 받아 뮌헨으로 쫓겨났다[67]。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는 일단 프로이센 주나 베를린의 "괴링 왕국"에 손을 대는 것을 포기하고, 바이에른 주에서 반체제파 단속에 힘써 실적을 올렸다. 그들은 1933년 3월에 뮌헨 교외의 다하우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창설했다[68]。
독일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은 독립적인 성향의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괴링에 대항하기 위한 실력을 요구하며, 친위대에 접근했다[69]。 1933년부터 1934년 초에 걸쳐 강제적 동일화와 함께 각 주의 정치 경찰이 히믈러에게 맡겨졌다[69]。 그러나 독일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로이센 주의 경찰은 여전히 괴링이나 디엘스, 달뤼게 등에 의해 지배되었다. 히믈러는 자신과 괴링, 달뤼게 등의 사이를 오갔던 프로이센 주나 베를린의 친위대원들이 자신에게 갈아타도록 끈질기게 흔들어 "괴링 왕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게슈타포의 지휘권을 얻기 위해 디엘스에 대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참언하여 일시적으로 디엘스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실각시켰다[70]。
right으로부터 "게슈타포 총감 겸 청장 대리"로 임명된 히믈러(1934년 4월 20일)]]
돌격대 지도자 룀과도 다투는 점이 많았던 괴링은 친위대와 더 이상 다투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1934년4월 20일, 디엘스가 맡고 있던 게슈타포 국장의 상위 직으로 "게슈타포 총감 겸 청장 대리(Inspekteur und stellvertretender Chef des Geheimen Staatspolizeiamtes)"를 신설하고, 히믈러를 이에 임명했다. 이것으로 실질적인 게슈타포의 지휘권을 히믈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히믈러는 곧바로 디엘스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해임하고, 1934년 4월 22일에 후임으로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 국장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게슈타포의 실질적인 운영을 위임했다[71][72]。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는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베를린의 프린츠 알브레히트 거리의 게슈타포 본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의 정치 경찰은 거의 히믈러와 하이드리히가 장악하게 되었다.
사건 후, 프릭 내무장관은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계속 히믈러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보이던 달뤼게와 접근하여 그를 내무성 경찰국장으로 임명했다. 게다가 히믈러를 명목상의 사무직으로 만들고, 달뤼게를 히믈러의 상임 대리로 하여 독일 경찰을 맡기려고 생각했다[75]。 그러나 히틀러의 히믈러에 대한 신임은 이미 확고해져 있었고, 프릭과 달뤼게로는 저항할 수 없어, 1936년 6월 17일에는 프릭은 히믈러를 전 독일 경찰청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후 프릭의 내무장관으로서의 지위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thumb 간부들. 왼쪽부터 프란츠 후버 (게슈타포 고위 간부), 아르투어 네베 (크리포 국장), 히믈러(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이드리히(국가보안본부 장관), 하인리히 뮐러 (게슈타포 국장) (1939년 11월, 뮌헨)]]
히믈러는 경찰 조직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한편, 일반 경찰 업무와 정치 경찰 업무는 명확하게 분리했다. 일반 경찰 업무는 질서경찰 (오르포) 아래로 통합하고, 한편 정치 경찰은 보안경찰 (지포) 아래로 통합했다. 질서경찰은 쿠르트 달뤼게에게 맡겼고, 한편 보안경찰은 하이드리히에게 지휘하게 했다. 보안경찰에는 다음의 중요한 국가 경찰 기관이 포함되었다. 비밀경찰(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이다. 마찬가지로 하이드리히의 지휘하에 있던 SD와 게슈타포는 직무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목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1937년 7월 1일에 하이드리히는 CSSD 명령을 내려 양자의 직무 영역을 구분했다. SD는 당내 문제, 인종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외국 문제, 행정 문제, 프리메이슨 등을 전담하게 하고, 한편 게슈타포는 마르크스주의, 이민, 국사범을 전담하게 했다. 교회, 세계관 문제, 유대인, 과격파, 흑색전선 (나치 좌파의 오토 슈트라써의 분파 조직), 경제 문제, 보도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 관할이 되었다. SD를 정보 분석 기관으로 하고, 게슈타포를 집행 기관으로 하는 것이 이 구분 명령의 목적이었다고 지적된다[72]。
게다가 1937년 11월 13일에 히믈러는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 (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약칭 HSSPF)" 직을 신설했다. 그들은 히믈러의 친위대 전국지도자와 전 독일 경찰청장의 지위를 대행하는 자로서 독일 국내와 점령지의 각지에 배치되었다[76]。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정치 경찰 활동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당 기관인 SD와 국가 기관인 보안경찰을 하나의 산하로 묶었다. 그것이 친위대의 국가보안본부이다. SD는 제III국(SD 국내 첩보)과 VI국(SD 국외 첩보)으로, 비밀경찰(게슈타포)는 제IV국으로, 형사경찰은 제V국으로 배치되었다. III국은 오토 올렌도르프 친위대 중장, IV국은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린 하인리히 뮐러 친위대 중장, V국은 아르투어 네베 친위대 중장, VI국은 30세에 친위대 소장 겸 경찰 소장이 된 발터 쉘렌베르크가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기에는 국방군의 첩보부였을 아프베어가 국가보안본부 VI국에 통합되어, 독일의 대외 첩보 활동은 모두 국가보안본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2. 2. 1. 친위대의 권력 확대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친위대는 국가 조직이자 정부의 한 부서로 간주되기 시작했다.[57] 법 집행은 점차 SS의 권한이 되었고, 많은 SS 조직이 사실상 정부 기관이 되었다.SS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힘러의 통제하에 비밀 국가 경찰과 보안군을 사용하여 나치 독일 내에 경찰 국가를 수립했다. 프로이센 국무총리였던 헤르만 괴링은 1933년에 프로이센 비밀 경찰인 ''게마이네 슈타츠폴리차이''(Geheime Staatspolizei), 즉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루돌프 딜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딜스가 SA의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게슈타포를 사용할 만큼 잔혹하지 않다고 우려한 괴링은 1934년 4월 20일 그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또한 그날 히틀러는 오랫동안 지속된 독일 관행인 법 집행이 국가 및 지방 문제라는 점에서 벗어나 힘러를 프로이센 외 모든 독일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1934년 4월 22일 자신의 부관이자 제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지허어하이트스디엔스트(SD; 보안국)''의 수장직도 계속 수행했다.
게슈타포가 힘러에게 이전된 것은 대부분의 SA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된 장검의 밤의 전주곡이었다. SS와 게슈타포가 대부분의 살인을 저질렀다. 1934년 7월 20일, 히틀러는 숙청 이후 더 이상 영향력이 없어진 SA로부터 SS를 분리했다. SS는 히틀러에게만 복종하는 나치당의 엘리트 군단이 되었다. 힘러의 ''Reichsführer-SS'' 직함은 이제 그의 실제 계급, 즉 육군의 야전 원수와 동등한 SS의 최고 계급이 되었다(그의 이전 계급은 ''오버그루펜퓌러''였다). 힘러의 지위와 권위가 커짐에 따라 그의 계급도 사실상 높아졌다.
1936년 6월 17일, 독일 전역의 모든 경찰력이 힘러와 SS의 관할 아래 통합되었다. 따라서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국가 행정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행정 통제하에 놓인 경찰 및 정보 부서에는 SD, 게슈타포, ''크리미날폴리차이''(Kripo; 형사 수사 경찰) 및 ''오르둥스폴리차이''(Orpo; 정규 제복 경찰)가 포함되었다. 경찰청장 자격으로 힘러는 형식적으로 내무부 장관 빌헬름 프릭에게 종속되었다. 실제로는 SS가 히틀러에게만 복종했기 때문에 SS와 경찰의 사실상 통합으로 경찰은 프릭의 통제를 벗어났다. 1939년 9월, ''지허어하이트스폴리차이''(SiPo; 보안 경찰)와 SD를 포함한 보안 및 경찰 기관(Orpo 제외)은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국가보안본부(RSHA)로 통합되었다. 이는 SS의 집단적 권위를 더욱 강화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의 정권을 장악했다.
기회주의자들이 보신을 위해 속속 입당했기[57] 때문에 친위대 역시 폭발적으로 대원 수가 증가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5만 2000명이었지만[31], 1933년 말에는 20만 9000명의 대원 수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명예 대원이나 주말에만 동원되는 대원들이 많았고, 행사가 있을 때 제복을 입고 참여하는 파트타임의 비상근 대원이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방군으로부터는 퍼레이드 전문의 "아스팔트 병사"라고 멸시받았다[58] 또한 히믈러는 친위대 명예 지도자 제도를 신설하여, 정재계의 요인들을 친위대에 모았다. 명예 지도자는 친위대의 임무는 전혀 부여되지 않는 대신 친위대의 조직이나 대원에 대해 아무런 명령권도 없는 존재였다[59]
한편, 베를린 친위대 지도자인 쿠르트 달뤼게는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으로 취임한 괴링과 접근하여 프로이센 주 경찰 특별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프로이센 주 경찰 중장 계급을 받았다. 2월 22일에는 괴링이 돌격대원 2만 5천 명과 친위대원 1만 5천 명을 프로이센 주의 보조 경찰로 채용했지만, 그 지휘는 달뤼게에게 맡겨졌다[65][66]。 달뤼게는 점점 명목상의 상관인 히믈러를 경시하게 되었다. 1933년 봄에는 하이드리히가 히믈러로부터 달뤼게를 진압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파견되었지만, 게슈타포 (프로이센 주 비밀경찰. 당시에는 괴링이 청장, 루돌프 디엘스가 국장을 하고 있었다)에게 협박을 받아 뮌헨으로 쫓겨났다[67]。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는 일단 프로이센 주나 베를린의 "괴링 왕국"에 손을 대는 것을 포기하고, 바이에른 주에서 반체제파 단속에 힘써 실적을 올렸다. 그들은 1933년 3월에 뮌헨 교외의 다하우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창설했다[68]。
독일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은 독립적인 성향의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괴링에 대항하기 위한 실력을 요구하며, 친위대에 접근했다[69]。 1933년부터 1934년 초에 걸쳐 강제적 동일화와 함께 각 주의 정치 경찰이 히믈러에게 맡겨졌다[69]。 그러나 독일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로이센 주의 경찰은 여전히 괴링이나 디엘스, 달뤼게 등에 의해 지배되었다. 히믈러는 자신과 괴링, 달뤼게 등의 사이를 오갔던 프로이센 주나 베를린의 친위대원들이 자신에게 갈아타도록 끈질기게 흔들어 "괴링 왕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게슈타포의 지휘권을 얻기 위해 디엘스에 대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참언하여 일시적으로 디엘스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실각시켰다[70]。
right으로부터 "게슈타포 총감 겸 청장 대리"로 임명된 히믈러(1934년 4월 20일)]]
돌격대 지도자 룀과도 다투는 점이 많았던 괴링은 친위대와 더 이상 다투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1934년4월 20일, 디엘스가 맡고 있던 게슈타포 국장의 상위 직으로 "게슈타포 총감 겸 청장 대리(Inspekteur und stellvertretender Chef des Geheimen Staatspolizeiamtes)"를 신설하고, 히믈러를 이에 임명했다. 이것으로 실질적인 게슈타포의 지휘권을 히믈러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히믈러는 곧바로 디엘스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해임하고, 1934년 4월 22일에 후임으로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 국장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게슈타포의 실질적인 운영을 위임했다[71][72]。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는 바이에른 주 뮌헨에서 베를린의 프린츠 알브레히트 거리의 게슈타포 본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의 정치 경찰은 거의 히믈러와 하이드리히가 장악하게 되었다.
사건 후, 프릭 내무장관은 히믈러와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계속 히믈러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보이던 달뤼게와 접근하여 그를 내무성 경찰국장으로 임명했다. 게다가 히믈러를 명목상의 사무직으로 만들고, 달뤼게를 히믈러의 상임 대리로 하여 독일 경찰을 맡기려고 생각했다[75]。 그러나 히틀러의 히믈러에 대한 신임은 이미 확고해져 있었고, 프릭과 달뤼게로는 저항할 수 없어, 1936년 6월 17일에는 프릭은 히믈러를 전 독일 경찰청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후 프릭의 내무장관으로서의 지위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thumb 간부들. 왼쪽부터 프란츠 후버 (게슈타포 고위 간부), 아르투어 네베 (크리포 국장), 히믈러(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이드리히(국가보안본부 장관), 하인리히 뮐러 (게슈타포 국장) (1939년 11월, 뮌헨)]]
히믈러는 경찰 조직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한편, 일반 경찰 업무와 정치 경찰 업무는 명확하게 분리했다. 일반 경찰 업무는 질서경찰 (오르포) 아래로 통합하고, 한편 정치 경찰은 보안경찰 (지포) 아래로 통합했다. 질서경찰은 쿠르트 달뤼게에게 맡겼고, 한편 보안경찰은 하이드리히에게 지휘하게 했다. 보안경찰에는 다음의 중요한 국가 경찰 기관이 포함되었다. 비밀경찰(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이다. 마찬가지로 하이드리히의 지휘하에 있던 SD와 게슈타포는 직무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목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1937년 7월 1일에 하이드리히는 CSSD 명령을 내려 양자의 직무 영역을 구분했다. SD는 당내 문제, 인종 문제, 문화 문제, 교육 문제, 외국 문제, 행정 문제, 프리메이슨 등을 전담하게 하고, 한편 게슈타포는 마르크스주의, 이민, 국사범을 전담하게 했다. 교회, 세계관 문제, 유대인, 과격파, 흑색전선 (나치 좌파의 오토 슈트라써의 분파 조직), 경제 문제, 보도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 관할이 되었다. SD를 정보 분석 기관으로 하고, 게슈타포를 집행 기관으로 하는 것이 이 구분 명령의 목적이었다고 지적된다[72]。
게다가 1937년 11월 13일에 히믈러는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 (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약칭 HSSPF)" 직을 신설했다. 그들은 히믈러의 친위대 전국지도자와 전 독일 경찰청장의 지위를 대행하는 자로서 독일 국내와 점령지의 각지에 배치되었다[76]。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정치 경찰 활동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당 기관인 SD와 국가 기관인 보안경찰을 하나의 산하로 묶었다. 그것이 친위대의 국가보안본부이다. SD는 제III국(SD 국내 첩보)과 VI국(SD 국외 첩보)으로, 비밀경찰(게슈타포)는 제IV국으로, 형사경찰은 제V국으로 배치되었다. III국은 오토 올렌도르프 친위대 중장, IV국은 "게슈타포 뮐러"라고 불린 하인리히 뮐러 친위대 중장, V국은 아르투어 네베 친위대 중장, VI국은 30세에 친위대 소장 겸 경찰 소장이 된 발터 쉘렌베르크가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기에는 국방군의 첩보부였을 아프베어가 국가보안본부 VI국에 통합되어, 독일의 대외 첩보 활동은 모두 국가보안본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2. 2. 2. 돌격대 숙청과 친위대의 부상
1933년 1월 30일, 히틀러와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후, SS는 국가 조직이자 정부의 지부로 여겨졌다. 법 집행은 점차 SS의 관할이 되었고, 많은 SS 조직이 사실상 정부 기관이 되었다.
SS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힘러의 통제하에 비밀 국가 경찰과 보안군을 사용하여 나치 독일 내에 경찰 국가를 수립했다. 프로이센 국무총리로서 헤르만 괴링은 1933년에 프로이센 비밀 경찰, 즉 ''게마이네 슈타츠폴리차이''(Geheime Staatspolizei) 또는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루돌프 딜스를 그 수장으로 임명했다. 딜스가 SA의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게슈타포를 사용할 만큼 잔혹하지 않다고 우려한 괴링은 1934년 4월 20일 그 통제권을 힘러에게 넘겼다. 또한 그날 히틀러는 오랫동안 지속된 독일 관행인 법 집행이 국가 및 지방 문제라는 점에서 벗어나 힘러를 프로이센 외 모든 독일 경찰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힘러는 1934년 4월 22일 자신의 부관이자 제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지허어하이트스디엔스트(SD; 보안국)''의 수장직도 계속 수행했다.
게슈타포의 힘러에게로의 이전은 대부분의 SA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된 장검의 밤의 전주곡이었다. SS와 게슈타포가 대부분의 살인을 저질렀다. 1934년 7월 20일, 히틀러는 숙청 이후 더 이상 영향력이 없어진 SA로부터 SS를 분리했다. SS는 히틀러에게만 복종하는 나치당의 엘리트 군단이 되었다. 힘러의 ''Reichsführer-SS'' 직함은 이제 그의 실제 계급, 즉 육군의 야전 원수와 동등한 SS의 최고 계급이 되었다(그의 이전 계급은 ''오버그루펜퓌러''였다). 힘러의 지위와 권위가 커짐에 따라 그의 계급도 사실상 높아졌다.
1936년 6월 17일, 독일 전역의 모든 경찰력이 힘러와 SS의 관할 아래 통합되었다. 따라서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국가 행정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행정 통제하에 놓인 경찰 및 정보 부서에는 SD, 게슈타포, ''크리미날폴리차이''(Kripo; 형사 수사 경찰) 및 ''오르둥스폴리차이''(Orpo; 정규 제복 경찰)가 포함되었다. 경찰청장 자격으로 힘러는 형식적으로 내무부 장관 빌헬름 프릭에게 종속되었다. 실제로는 SS가 히틀러에게만 복종했기 때문에 SS와 경찰의 사실상 통합으로 경찰은 프릭의 통제를 벗어났다. 1939년 9월, ''지허어하이트스폴리차이''(SiPo; 보안 경찰)와 SD를 포함한 보안 및 경찰 기관(Orpo 제외)은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국가보안본부(RSHA)로 통합되었다. 이는 SS의 집단적 권위를 더욱 강화했다.
''수정의 밤(1938년 11월 9일~10일)'' 동안, SS, 게슈타포, SD, Kripo, SiPo, 정규 경찰은 유대교 회당과 지역 사회 센터가 파괴되는 동안 유대인 소유의 사업체와 주택을 그대로 유지하여 나중에 압류할 수 있도록 하면서 SS 보안 부서는 유대인에 대한 은밀한 폭력을 조율했다. 결국 수천 개의 유대인 사업체, 주택 및 묘지가 특히 SA 회원들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약 500~1,000개의 회당이 대부분 방화로 파괴되었다. 11월 11일, 하이드리히는 사망자 수를 36명으로 보고했지만, 이후 평가에서는 사망자 수가 최대 2,000명에 달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약 30,00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체포되어 11월 16일까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최대 2,500명이 그 후 몇 달 동안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SS 국가는 "안보, 재교육 또는 예방"을 위해 재판이나 사법 감시 없이 투옥한 정치 및 종교 반대자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공포 캠페인을 시작했다.
1939년 9월, 각 군구의 SS 장교가 경찰청장이 되면서 SS의 권한이 더욱 확대되었다. 이들 SS 및 경찰 지도자 대부분은 SS-''그루펜퓌러'' 이상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 내의 모든 SS 문제에 대해 힘러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들의 역할은 인구를 감시하고 해당 지역 내의 SS 요원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SS, SD, SiPo, ''SS-토텐코프버밴데''(SS-TV; 강제 수용소 경비대), Orpo에 대한 지구 행정 사무소를 우회하여 이러한 집단의 직접적인 작전 통제권을 얻을 수 있었다.
2. 2. 3. 경찰 조직 통합과 국가보안본부 창설
1934년 4월 20일, 헤르만 괴링은 하인리히 힘믈러를 "게슈타포 총감 겸 청장 대리(Inspekteur und stellvertretender Chef des Geheimen Staatspolizeiamtes)"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게슈타포 지휘권을 넘겼다.[71] 히믈러는 4월 22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 국장으로 임명했다.[71][72] 이후 독일의 정치 경찰은 거의 힘믈러와 하이드리히가 장악하게 되었다.1934년 7월 20일 친위대는 장검의 밤 사건의 공로를 인정받아 돌격대로부터 독립했다.[73]
1936년 6월 17일, 빌헬름 프릭은 히믈러를 전 독일 경찰청장으로 임명했다. 히믈러는 경찰 조직 통합을 추진하며, 일반 경찰 업무는 질서경찰 (오르포)로, 정치 경찰 업무는 보안경찰 (지포)로 통합했다. 질서경찰은 쿠르트 달뤼게에게, 보안경찰은 하이드리히에게 지휘하게 했다. 보안경찰에는 비밀경찰(게슈타포)와 형사경찰(크리포)가 포함되었다.
1937년 7월 1일, 하이드리히는 CSSD 명령을 내려 SD와 게슈타포의 직무 영역을 구분했다. SD는 정보 분석 기관, 게슈타포는 집행 기관 역할을 맡았다.[72]
1939년 9월, 하이드리히는 SD와 보안경찰을 통합하여 친위대의 국가보안본부를 창설했다. SD는 제III국(SD 국내 첩보)과 VI국(SD 국외 첩보)으로, 게슈타포는 제IV국, 형사경찰은 제V국으로 배치되었다. III국은 오토 올렌도르프, IV국은 하인리히 뮐러, V국은 아르투어 네베, VI국은 발터 쉘렌베르크가 지휘했다.
1942년 6월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히믈러가 국가보안본부 장관을 겸임했다. 1943년 1월부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후임 국가보안본부 장관이 되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SS는 ''알게마이네 SS(Allgemeine SS)'', ''SS-토텐코프베르반데(SS-Totenkopfverbände)'', 그리고 1934년 SS-페르퓌궁스트루페(SS-VT)로 창설되어 1940년에 명칭이 변경된 무장 SS(Waffen-SS)로 통합되었다.[23] 무장 SS는 국방군과 함께 독일의 두 번째 군대로 발전했으며, 특히 육군(Heer)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무장 SS는 전적인 "지휘의 독립"을 얻지 못했고, 독일 육군의 "심각한 경쟁자"도 아니었다. 무장 SS의 구성원들은 독일 최고 사령부에 합류할 수 없었고, 중무기와 장비는 육군에 의존해야 했다. SS의 계급은 일반적으로 다른 군의 계급과 유사했지만, SS 계급 체계는 국방군의 각 부서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계급을 복제하지 않았다. 대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자유군단(Freikorps)과 SA에서 확립된 계급을 사용했다. 이는 SS가 국방군으로부터 독립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확대되는 전쟁과 점령지의 통제 필요성은 힘러가 SS의 경찰 및 군사 조직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동부 지역의 급속한 확장은 변화하는 안보 문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SS 경찰 조직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64]
SS-TV의 잉여 강제 수용소 경비병들로 구성된 제1, 제2 SS 보병 여단과 SS 기병 여단이 진격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 소련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소련의 유격대와 싸웠지만, 1941년 가을까지는 대유격대 역할을 다른 부대에 맡기고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을 지원하면서, 그들은 소련의 유대인 학살에 참여하는 사격 부대를 구성했다.[9]
1941년 7월 31일, 괴링은 하이드리히에게 독일 통제 하의 지역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정부 부처의 행정 지도자들의 협력을 보장하는 서면 승인을 내렸다. 하이드리히는 이러한 학살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슈타포는 서부에서 추방을 조직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이미 동부에서 광범위한 살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는 이 계획의 실행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반제 회의를 주재했다.
1941년과 1942년 소련에서의 전투 동안 ''무장친위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LSSAH와 ''다스 라이히''는 질병과 전투 사상으로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모집병이 필요해진 힘러는 원래 SS의 인종적 프로필에 맞지 않는 병사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42년 초, ''SS-라이프슈탄다르테'', ''SS-토텐코프'', ''SS-다스 라이히''는 재정비를 위해 서부로 철수하여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전환되었다.[9] SS-기갑 군단은 1943년 소련으로 돌아와 2월과 3월에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여했다.
1943년 7월 5일,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하여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하려 했다. 이 시점에서 무장 친위대는 12개 사단으로 확장되었고, 대부분이 전투에 참여했다. 소련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히틀러는 7월 12일 저녁에 공격을 중단했다. 7월 17일 그는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를 명령했다. 그 후, 독일군은 붉은 군대가 서부 러시아 해방을 시작하면서 방어에 몰두해야 했다. 쿠르스크 전투 중 무장 친위대와 국방군의 손실은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격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독일에게 양면전을 야기했다.
2. 3. 1. 무장 친위대의 활약과 전쟁 범죄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에서, LSSAH와 SS-VT는 별개의 기동 보병 연대로 참전했다.[27] LSSAH는 군사적 정당성 없이 마을에 방화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졌다.[45] LSSAH의 구성원들은 많은 마을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데, 여기에는 브워니에에서 50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살해하고, 즈워체프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200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포함된다. 또한 볼레스와비에츠, 토르제니에츠, 고보로보, M와바, 브워츠와베크에서도 총격이 발생했다. 일부 고위 국방군 장교들은 이 부대가 전투에 완전히 대비되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 부대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했고 육군보다 더 높은 사상자 비율을 보였다. 상급대장 페도어 폰 보크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1940년 4월 SS-토텐코프 사단을 방문한 후 그는 그들의 전투 훈련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82] 히틀러는 그 비판이 육군의 "구식 기사도 개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SS는 자체 무장 부대가 조각조각으로 싸워야 했고 육군에 의해 부적절하게 장비를 갖추어 방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침공 이후, 히틀러는 저항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적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암호명 탄넨베르크 작전과 AB-작전으로 명명된 SS에게 대량 학살을 위임했다. 살인은 지역 준군사 단체의 지원을 받은 Einsatzgruppen (특수 부대; 배치 그룹)에 의해 저질러졌다. ''Einsatzgruppen'' 부대의 병력은 SS, SD 및 경찰에서 차출되었다. 1939년 말까지 활동가, 지식인, 학자, 교사, 배우, 전직 장교 등을 포함한 약 65,000명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육군 지도부가 ''Einsatzgruppen''이 저지르는 잔혹 행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하이드리히는 그들에게 "총통의 특별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알렸다. ''Einsatzgruppen''에 의한 유대인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인 대량 총격은 크라쿠프 공격 중인 1939년 9월 6일에 발생했다.
폴란드에서의 그들의 수행에 만족한 히틀러는 무장 SS 부대의 추가 확장을 허용했지만 새로운 부대는 육군의 작전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SS-라이프슈탄다르테''는 히틀러의 개인 경호원으로 기능하는 독립 연대로 남아 있었지만, 다른 연대인 ''SS-도이칠란트'', ''SS-게르마니아'' 및 ''SS-데어 퓌러''는 결합되어 ''SS 기동사단 다스 라이히''를 형성했다.[32] 두 번째 SS 사단인 ''SS-토텐코프''는 SS-TV 강제 수용소 경비병으로 구성되었고, 세 번째 사단인 ''SS-경찰''은 경찰 자원 봉사자로 창설되었다.[66] SS는 이때 무장 부대에 대한 자체 징집, 물류 및 보급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66] SS, 게슈타포 및 SD는 1939년 10월 26일 한스 프랑크가 총독으로 임명될 때까지 폴란드의 임시 군정을 담당했다.[50]
1940년 5월 10일, 히틀러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에 대한 대규모 공세인 프랑스 공방전을 시작했다.[9] 친위대는 투입된 89개 사단 중 두 개 사단을 제공했다. LSSAH와 SS-VT의 일부는 네덜란드 침공에 지상군으로 참여했다.[61] 동시에 공수 부대가 투하되어 주요 네덜란드 비행장, 교량, 철도를 점령했다. 5일간의 작전에서 LSSAH는 네덜란드 방어군과의 여러 차례 충돌 후 육군 부대 및 공수 부대와 연결되었다.[61]
SS 부대는 아르덴과 뫼즈강을 통과하는 돌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61] 대신, SS-토텐코프는 육군 예비대에서 소환되어 에르빈 롬멜 소장의 제7기갑사단이 영국 해협으로 진격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64] 5월 21일, 영국군은 제7기갑사단과 SS-토텐코프의 측면에 기갑 부대를 동원한 반격을 시작했다. 그 후 독일군은 덩케르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거대한 포위망에 가두었다.[59] 5월 27일, SS-토텐코프 제4중대는 르 파라디 학살을 저질렀는데, 항복한 로열 노퍽 연대 제2대대 병사 97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후, 살아남은 자들은 총검으로 마무리했다. 두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93] 5월 28일까지 SS-라이프슈탄다르테는 덩케르크에서 16km 떨어진 웜후트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제2대대 병사들은 항복한 영국군과 프랑스군 병사 81명을 살해한 웜후트 학살의 책임이 있었다. 역사가 찰스 시드노어에 따르면, 프랑스 침공 당시 SS-토텐코프 사단이 보여준 "공격 시의 광적인 무모함, 적의 공격에 대한 자살적인 방어, 좌절된 목표에 직면한 야만적인 잔혹 행위"는 SS 부대의 전반적인 특징이었다.[102]
작전 종료 시, 히틀러는 SS-라이프슈탄다르테의 활약에 만족감을 표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가진 너희들이 모든 독일의 공격을 이끄는 것이 영광이 될 것이다." SS-VT는 1940년 7월 히틀러의 연설에서 ''무장 친위대''로 개칭되었다. 그 후 히틀러는 힌머가 말했듯이 "관련 혈통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입대를 승인하여 부대를 확장했다. 덴마크인, 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핀란드인은 독일 장교의 지휘 아래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기 위해 자원했다. 그들은 모여서 새로운 사단인 SS-비킹을 형성했다. 1941년 1월, SS-페르퓌궁스 사단은 SS-라이히 사단(기계화)으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재편성되면서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개칭되었다.
1941년 4월,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했다. LSSAH와 ''Das Reich''는 별도의 육군 기갑 군단에 배속되었다. ''Das Reich'' 사단의 중대장인 프리츠 클링겐베르크는 유고슬라비아를 가로질러 수도 베오그라드로 병력을 이끌었고, 선두에 있던 소수의 병력이 4월 13일 도시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며칠 후 유고슬라비아가 항복했다. SS 경찰 부대는 즉시 인질을 잡고 보복을 시작했는데, 이는 흔한 관행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국방군''이 그들과 합류했다.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의 나치 전쟁 정책은 잔혹한 점령과 인종 학살로 이어졌다. 세르비아는 ''유대인 부재''(유대인이 없는)로 선언된 두 번째 국가( 에스토니아 이후)가 되었다.
그리스에서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는 영국 원정군 (BEF)과 그리스 육군의 저항에 직면했다. 산악 지형과 심하게 방어된 좁은 통로로 인해 전투가 격화되었다. LSSAH는 독일군의 진격에 앞장섰다. BEF는 크레타 섬으로 해상 탈출했지만, 독일군이 도착한 5월 말에 다시 도망쳐야 했다. 유고슬라비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정복으로 그리스의 유대인들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나치는 즉시 그들을 상대로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처음에는 게토에 갇혀 있다가 1943년 3월에 대부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도착하자마자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그리스의 유대인 8만 명 중 20%만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확대되는 전쟁과 점령지의 통제 필요성은 히믈러가 SS의 경찰 및 군사 조직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동부 지역의 급속한 확장은 변화하는 안보 문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SS 경찰 조직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64]
SS-TV의 잉여 강제 수용소 경비병들로 구성된 제1, 제2 SS 보병 여단과 SS 기병 여단이 진격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 소련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소련의 유격대와 싸웠지만, 1941년 가을까지는 대유격대 역할을 다른 부대에 맡기고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을 지원하면서, 그들은 소련의 유대인 학살에 참여하는 사격 부대를 구성했다.[9]
1941년 7월 31일, 괴링은 하이드리히에게 독일 통제 하의 지역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정부 부처의 행정 지도자들의 협력을 보장하는 서면 승인을 내렸다. 하이드리히는 이러한 학살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게슈타포는 서부에서 추방을 조직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이미 동부에서 광범위한 살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1942년 1월 20일, 하이드리히는 이 계획의 실행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반제 회의를 주재했다.
1941년과 1942년 소련에서의 전투 동안 ''무장친위대''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LSSAH와 ''다스 라이히''는 질병과 전투 사상으로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모집병이 필요해진 히믈러는 원래 SS의 인종적 프로필에 맞지 않는 병사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42년 초, ''SS-라이프슈탄다르테'', ''SS-토텐코프'', ''SS-다스 라이히''는 재정비를 위해 서부로 철수하여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전환되었다.[9] SS-기갑 군단은 1943년 소련으로 돌아와 2월과 3월에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여했다.
1942년 7월, 소련의 파르티잔에 대처하는 데 육군이 어려움을 겪자 히틀러는 대파르티잔 작전을 경찰에 이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문제는 하인리히 힘러의 관할로 들어갔다. 히틀러가 1941년 7월 8일에 모든 유대인을 파르티잔으로 간주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대파르티잔 작전"이라는 용어는 유대인 학살뿐만 아니라 저항 세력과의 실제 전투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1942년 7월 힘러는 "파르티잔"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대신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강도"로 묘사했다.
힘러는 친위대와 SD에게 추가적인 대파르티잔 전술을 개발하도록 하고 선전 캠페인을 시작했다. 1943년 6월 경 힘러는 ''반덴베캠풍''(Bandit fighting, 강도 소탕) 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반덴캄프페르반데''(Bandenkampfverbände, 강도 소탕 부대)의 존재를 발표했으며, 그 수장으로 ''SS-Obergruppenführer''(SS 상급집단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프스키를 임명했다. 주로 SS 경찰과 무장친위대 병력을 투입한 ''반덴캄프페르반데''는 선전, 보안 작전의 중앙 통제 및 조정, 병력 훈련, 전투 작전 등 4가지 주요 작전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121] ''국방군''이 영토 목표를 확보하면, ''반덴캄프페르반데''는 먼저 통신 시설, 도로, 철도, 수로를 확보했다. 그 후, 그들은 농촌 지역 사회와 공장, 행정 건물과 같은 경제 시설을 확보했다. 추가적인 우선순위는 농업 및 임업 자원 확보였다. SS는 전략 작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수확물 수집을 감독했다. 해당 지역의 모든 유대인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공산주의자와 아시아계 사람들은 소련 요원이라고 추정하여 살해되었다.

1942년 생나제르 습격과 디에프 습격에 놀란 히틀러는 연합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여 스페인에서 노르웨이까지 대서양 연안을 따라 대서양 방벽이라고 부르는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30] 해안을 따라 전략적인 지점에 콘크리트 포 진지를 건설하고, 상륙정의 접근을 늦추고 전차의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 나무 말뚝, 금속 삼각대, 지뢰, 대형 대전차 장애물을 해변에 설치했다. 몇 개의 고정 보병 사단 외에도 11개의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이 인근에 배치되었다. 이 부대 중 4개는 ''무장친위대'' 사단이었다. 게다가 ''SS-다스 라이히''는 남프랑스에 위치해 있었고, LSSAH는 소련에서 전투를 치른 후 벨기에에서 재정비를 하고 있었으며, 전투 베테랑과 경험 많은 부사관의 지원을 받는 17세와 18세의 히틀러 유겐트 단원으로 구성된 신설된 기갑 사단 ''SS-히틀러유겐트''는 파리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SS-히틀러유겐트''의 창설은 더 많은 병력, 특히 의심 없는 복종을 하는 병력에 대한 히틀러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1944년 6월 6일에 시작되었다. 제21 기갑사단은 카앙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에드가르 포이팅거 ''사단장''(Generalmajor) 지휘하에 있었고, 해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유일한 기갑 사단이었다. 이 사단에는 146대의 전차와 50문의 돌격포, 그리고 지원 보병과 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73] 02:00에 제716 고정 보병 사단의 사령관 빌헬름 리히터 ''중장''(Generalleutnant)은 제21 기갑 사단에 반격을 위한 위치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사단은 기갑 예비대의 일부였으므로, 포이팅거는 부대를 투입하기 전에 OKW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포이팅거는 거의 09:00까지 명령을 받지 못했지만, 그 동안 그는 자체적으로 오른 강 동쪽의 영국군과 싸울 전투단(전차 포함)을 구성했다. ''SS-히틀러유겐트''는 6월 6일 오후에 배치되기 시작했고, 다음 날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또한 캉 전투(1944년 6월~8월)에도 참가했다. 6월 7일~8일과 17일에 ''SS-히틀러유겐트''의 일원들은 아르덴 수도원 학살에서 20명의 캐나다군 전쟁 포로를 사살했다.[73]
연합군은 프랑스 해방을 계속 진전시켰고, 8월 4일 히틀러는 비레에서 아브랑슈를 향한 반격(뤼티히 작전)을 명령했다. 이 작전에는 LSSAH, ''다스 라이히'', 제2, 제116 기갑 사단, ''SS-대령집단지도자'' 파울 하우서의 지휘 하에 있는 제17 SS 기갑척탄병 사단 '"괴츠 폰 벨리히겐"''의 지원을 받는 보병과 병력이 포함되었다. 이 부대는 모르탱 근처에서 공세를 펼쳐 아브랑슈를 거쳐 서쪽으로 해안까지 진격할 예정이었다. 연합군은 이 공세에 대비했고, 독일군 연합 부대에 대한 공습은 치명적이었다. 8월 21일, LSSAH의 대부분을 포함한 50,000명의 독일군은 팔레즈 포켓에서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탈출한 LSSAH 잔존 병력은 재정비를 위해 독일로 철수했다. 파리 해방은 8월 25일에 이루어졌고, 마지막 독일군은 8월 말까지 센 강을 건너 철수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이 종료되었다.
여름 작전에서 살아남은 ''무장 친위대''(Waffen-SS) 부대는 재정비를 위해 전선에서 철수했다. 그중 제9SS 사단과 제10SS 기갑사단은 1944년 9월 초 네덜란드 아른험 지역에서 재정비를 했다. 공교롭게도 9월 17일 연합군은 같은 지역에서 낮은 라인강을 장악하기 위한 연합 공수 및 육상 작전인 마켓 가든 작전을 시작했다. 제9, 제10 기갑사단은 이 공격을 격퇴한 부대 중 하나였다.
1944년 12월, 히틀러는 아르덴 지역을 통해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반격을 가하여 앤트워프에 도달하여 이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하려는 목표를 가진 아르덴 대공세, 일명 벌지 전투를 시작했다. 이 공세는 12월 16일 새벽 직전에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격을 이끈 것은 주로 ''무장 친위대'' 사단으로 구성된 두 개의 기갑군이었다. 이 전투단은 겨울 날씨 속에서 아르덴의 숲과 숲이 우거진 언덕을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처음에는 북부 지역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곧 미군 제2 사단과 제99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12월 23일까지 날씨가 개선되어 연합군 공군이 독일군과 보급 부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연료 부족을 야기했다. 점점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일군의 진군은 둔화되어 멈췄다. 히틀러의 실패한 공세는 700대의 전차와 서부의 남은 대부분의 기동 부대뿐만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인력과 물자의 예비군 대부분을 잃게 했다.
전투 중 SS-''상급돌격지도자''(Obersturmbannführer) 요아힘 파이퍼는 파괴의 흔적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그의 지휘하에 있던 ''무장 친위대'' 병사들이 미국 포로와 벨기에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살해한 말메디 학살이 포함되었다. ''캄프그루페 파이퍼''에 소속된 캡처된 SS 병사들은 이 학살과 이 지역의 여러 다른 학살로 인해 전쟁 후 말메디 학살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많은 범인들이 교수형을 선고받았지만 형량이 감형되었다. 파이퍼는 살인 혐의로 1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동부 전선에서 1945년 1월 12일 붉은 군대가 공세를 재개했다.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항공기 20대 1, 보병 11대 1, 전차 7대 1로 열세에 놓였다. 그 달 말까지 붉은 군대는 오데르강을 넘어 베를린 직전의 마지막 지리적 장애물인 교두보를 확보했다.[70] 서방 연합군도 진격을 계속했지만 붉은 군대만큼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다.[83] 기갑군은 2월 17~24일 흐론강에서 성공적인 방어 작전을 수행하여 비엔나로 향하는 연합군의 진격을 늦췄다. 제1 및 제2SS 기갑군단은 오스트리아로 향했지만 손상된 철도로 인해 속도가 늦춰졌다.
부다페스트는 2월 13일에 함락되었다.[82] 히틀러는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에게 동원령을 내려 나지카니저 유전 및 정유소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는데, 그는 이곳을 동부 전선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가치 있는 연료 매장지로 간주했다. 동부에서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프뤼링스에르바흐센''(봄의 각성 작전)은 3월 초에 일어났다. 독일군은 발라톤 호수 인근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제6기갑군은 부다페스트로 북진했고 제2기갑군은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했다. 디트리히의 부대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다뉴브강에 가까워지면서 진흙 지형과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멈춰 섰다. 3월 16일까지 전투는 패배했다. 이 패배에 격분한 히틀러는 관련된 ''무장 친위대'' 부대에게 수치심의 표시로 커프 타이틀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디트리히는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무렵,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모두에서 SS의 활동이 연합군에게 명백해지고 있었는데,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가 함락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병사들은 수용소에서 나치의 잔혹 행위에 대한 증거에 불신과 혐오감을 느꼈다.
1945년 4월 9일, 쾨니히스베르크가 붉은 군대에 함락되었고, 4월 13일 디트리히의 SS 부대는 비엔나에서 쫓겨났다. 베를린 전투는 4월 16일 03시 30분 대규모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일주일 안에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베를린을 방어하는 많은 요소 중에는 프랑스, 라트비아, 스칸디나비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 총통 벙커에 거주하는 히틀러는 남은 SS 병사들이 수도를 구출할 수 있기를 계속 희망했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순찰하는 SS 대원들은 겁쟁이 또는 패배주의 행위로 간주되는 행위로 인해 병사와 민간인을 계속 총살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 베를린 수비대는 히틀러가 자살한 지 이틀 후인 5월 2일에 항복했다. SS 대원들은 붉은 군대로부터 자비를 거의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려고 시도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에서 안슐루스 이후 하이드리히가 조직한 임시 ''Einsatzkommando''에서 유래되었다. 두 개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1938년 10월 수데텐란트에 주둔했다. 뮌헨 협정으로 인해 군사 행동이 필요 없게 되자, ''아인자츠그루펜''은 정부 서류와 경찰 문서를 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정부 청사를 확보하고, 고위 공무원을 심문했으며, 최대 10,000명의 체코 공산주의자와 독일 시민을 체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또한 국방군을 따라다니며 잠재적인 파르티잔을 살해했다. 1939년에는 비슷한 집단이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1945)에 사용되었다.[109]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 계획이 너무 어렵고 중요하여 군대에 맡기기에는 부
2. 3. 2. 홀로코스트와 친위대의 역할



SS는 폭력 문화를 기반으로 구축되었으며, 동부 전선에서 민간인과 전쟁 포로의 대량 학살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크리포, 질서 경찰(Orpo), 그리고 ''무장 친위대'' 인력이 보강되면서, ''아인자츠그루펜''은 총 3,000명의 병력에 도달했다. ''아인자츠그루펜'' A, B, C는 북부, 중앙, 남부에 배속되었고, ''아인자츠그루펜'' D는 제11군에 배속되었다. 특수 목적을 위한 ''아인자츠그루펜''은 1941년 7월부터 동부 폴란드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역사가 리처드 로즈는 그들을 "도덕의 경계 밖에" 있었다고 묘사하며, 그들은 "판사, 배심원, 그리고 사형 집행인을 모두 한 몸"으로, 그들의 재량에 따라 누구든지 죽일 권한을 가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이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는 ''무장 친위대''와 질서 경찰, 그리고 ''국방군''의 지원을 받아 점령된 동부 폴란드와 소련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에 참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은 1941년과 1942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침공 전에 소련 전역에 5백만 명의 등록된 유대인이 있었고, 그 중 3백만 명이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거주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중 2백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활동은 일반적으로 표준 절차를 따랐는데,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은 임박한 작전을 알리기 위해 가장 가까운 ''국방군'' 부대 지휘관에게 연락했다. 이는 처형 장소에 대한 접근을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총으로 쐈지만, 이 방법은 이 규모의 작전에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히믈러는 1941년 8월 민스크에서 100명의 유대인을 총살하는 것을 지켜본 후, 이러한 행위가 자신의 SS 대원들의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다른 학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결정했고, 이는 가스 차량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시신을 차에서 꺼내 묻는 것이 불쾌하다고 여겨져 대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죄수나 보조 인력이 종종 이 작업을 맡아 SS 대원들의 트라우마를 덜어주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히믈러는 독일 내와 나치 점령 유럽에서 친위대의 활동을 강화했다. 유대인과 정치적으로 의심되거나 사회 부적응자로 간주된 독일 시민들의 체포가 증가했다. 나치 정권이 더욱 억압적으로 변하면서,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규모와 치명적인 운영 면에서 커졌고, 친위대의 경제적 야망이 커지면서 그 범위도 확장되었다.
살해 작전의 강화는 1941년 말, 친위대가 대량 학살을 위해 ''아인자츠그루펜''(특수 기동 부대)의 사용을 대체하기 위해 고정식 가스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절멸 수용소의 희생자들은 자동차 엔진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 가스를 사용하여 살해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 동안, 비밀 유지를 맹세한 ''토텐코프페르반데''(해골 부대)의 장교들이 운영하면서, 점령된 폴란드에 세 개의 절멸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벨제츠 절멸 수용소 (1942년 3월부터 운영),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1942년 5월부터 운영), 그리고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 (1942년 7월부터 운영). 수백 명의 ''존더코만도'' 수감자들을 감독하는 트라브니키 사람들(동유럽 협력자)의 부대가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후, 그들 또한 살해당했다.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1942년 초까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살충제 치클론 B를 사용하여 희생자를 살해하는 가스실을 추가하여 크게 확장되었다.
행정상의 이유로, 모든 강제 수용소 경비병과 행정 직원은 1942년에 ''무장 친위대''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강제 수용소는 오스발트 폴 휘하의 ''SS 경제행정본부''(SS-Wirtschafts-Verwaltungshauptamt, WVHA)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리하르트 글뤽스는 1942년에 WVHA 산하 "D" 부서가 된 강제 수용소 감찰관으로 활동했다. 군사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착취와 절멸은 균형을 맞춰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숙련된 노동력에 대한 전쟁 경제의 노동 요구는 일부 유대인이 학살을 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2년 10월 30일, 독일의 심각한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히믈러는 나치 점령 소련 영토의 건강한 사람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 독일로 강제 노동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4년까지, SS-TV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강제 수용소, 점령지, 그리고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의 세 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1944년까지, 인력 요구에 따라, 그리고 부상당한 ''무장 친위대'' 대원에게 보다 쉬운 임무를 제공하기 위해, 친위대 대원들을 수용소로 순환 배치하는 것이 표준 관행이 되었다. 이러한 인력 순환은 거의 모든 친위대가 강제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조직 전체가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에서 안슐루스 이후 하이드리히가 조직한 임시 ''Einsatzkommando''에서 유래되었다. 두 개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가 1938년 10월 수데텐란트에 주둔했다. 뮌헨 협정으로 인해 군사 행동이 필요 없게 되자, ''아인자츠그루펜''은 정부 서류와 경찰 문서를 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정부 청사를 확보하고, 고위 공무원을 심문했으며, 최대 10,000명의 체코 공산주의자와 독일 시민을 체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또한 국방군을 따라다니며 잠재적인 파르티잔을 살해했다. 1939년에는 비슷한 집단이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8–1945)에 사용되었다.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 계획이 너무 어렵고 중요하여 군대에 맡기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941년, ''아인자츠그루펜''은 소련으로 파견되어 유대인, 로마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시작했다. 역사가 라울 힐베르크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아인자츠그루펜''과 관련 기관이 13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200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추정한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집단 총격은 키예프 외곽의 바비 야르에서 발생했으며, 1941년 9월 29~30일 단일 작전으로 33,771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룸불라 학살 (1941년 11월~12월)에서는 리가 게토에서 온 25,000명의 희생자가 살해되었다. 또 다른 일련의 집단 총격 사건 (1941년 12월~1942년 1월)에서 ''아인자츠그루페''는 하르코프의 드로비츠키 야르에서 10,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마지막 ''아인자츠그루펜''은 1944년 중반에 해산되었다 (일부는 1945년까지 서류상으로 존재했지만) 독일군의 양면 후퇴와 그에 따른 절멸 활동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인해. 전 ''아인자츠그루펜'' 구성원은 ''무장 친위대'' 또는 강제 수용소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배정되었다. 24명의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은 전쟁 후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SS 의무대는 처음에는 'Sanitätsstaffel'(위생 부대)로 알려졌다. 1931년 이후, SS는 SS 의무대를 위한 중앙 사무소로 본부 사무실 'Amt' V를 설립했다. 1938년 베를린에 '무장 친위대' 의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SS 의무대 학교가 설립되었다. SS 의료진은 실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그들의 주된 책임은 의료화된 집단 학살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약 3/4, 거의 모든 어린이,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 모든 노인, 그리고 SS 의사의 짧고 피상적인 검사에서 완전히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은 도착 후 몇 시간 안에 살해되었다. 'Desinfektoren'(소독자)의 역할을 한 SS 의사들은 또한 기존 수감자들 중에서 노동에 적합한 사람들을 골라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살해를 감독했다. 건강이 악화된 수감자들은 SS 의사들의 검사를 받았으며, 그들은 2주 이내에 회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했다. 그 기간 안에 회복하기에 너무 아프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은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자들에게 가스를 실제로 투입하는 것은 항상 감독하는 SS 의사의 명령에 따라 SS가 처리했다. 많은 SS 의사들은 또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비인간적인 의학 실험을 수행했다. 가장 잘 알려진 SS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는 수용소 의무대 에두아르트 비르츠의 지휘하에 아우슈비츠에서 의무 장교로 복무했다. 멩겔레는 실험 대상자를 찾기 위해 임무가 할당되지 않았을 때에도 선별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특히 쌍둥이 세트를 찾는 데 관심이 있었다. 선별 작업을 가장 스트레스가 많고 끔찍한 의무 중 하나로 여겼던 대부분의 의사들과 달리, 멩겔레는 화려한 태도로 그 임무를 수행했으며, 종종 미소를 짓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전쟁 후, 많은 SS 의사들은 그들의 의학 실험과 가스실 선별에서의 역할로 인해 전쟁 범죄 혐의를 받았다.
2. 3. 3. 친위대 국가의 강화

1934년, 히믈러는 첫 번째 SS 사업인 선전 자료와 SS 훈련 매뉴얼을 발행하는 출판사인 ''노르트란트-페르라크''(Nordland-Verlag)를 설립했다. 그 후, 그는 알라흐 도자기를 인수하여 SS 기념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노동력 부족과 재정적 이득에 대한 욕구 때문에, SS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노예 노동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SS 사업은 히믈러가 1939년 포흘의 ''행정 및 경제 주 본부''(Verwaltung und Wirtschaftshauptamt Hauptamt; VuWHA)의 관할 하에 두기 전까지 손실을 기록했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SS 대원들은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선발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굶주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1940년 7월, 포흘은 모든 SS 사업을 관할하는 지주 회사인 도이체 비르츠샤프트베트리베 유한회사(Deutsche Wirtschaftsbetriebe GmbH, DWB)를 설립했다. 결국, SS는 자사 사업을 위해 약 200개의 지주 회사를 설립했다.
1941년 5월, VuWHA는 SS 사업을 급증하는 강제 수용소 시스템과 통합하기 위해 ''도이체 아우스루퉁스베르케''(Deutsche Ausrüstungswerke GmbH; DAW, 독일 장비 공장)를 설립했다. 그 후 히믈러는 1941년에 아우슈비츠, 그로스-로젠, 나츠바일러-스트루트호프, 노이엔감메 등 4개의 새로운 주요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 각 수용소에는 수감자들이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공장 또는 채석장이 최소 1개 이상 있었다. 히믈러는 특히 IG 파르벤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이 회사는 아우슈비츠 III-모노비츠에 합성 고무 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 공장은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기 직전에 생산을 시작할 준비가 거의 완료되었다. 모노비츠 수용소 수감자들의 평균 수명은 약 3개월이었다. 수감자들은 영양 부족에 시달렸고 비참한 생활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는 다른 수용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의 노동량은 노동을 통한 절멸 정책에 따라 의도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높게 설정되었다.
1942년, 히믈러는 포흘이 책임지고 있던 모든 사무실을 통합하여 SS 경제 및 행정 주 본부(''Wirtschafts- und Verwaltungshauptamt''; WVHA)를 만들었다. 전체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WVHA의 관할 하에 놓였다. SS는 주데텐란트의 광천수 생산업체인 수데텐크벨 유한회사를 소유했다. 1944년까지, SS는 독일의 광천수 생산업체의 75%를 인수했고 독점권을 확보하려 했다.
힘러는 당의 정권 획득 이전부터 친위대 후원 회원(FM)의 확대를 목표로 했다. 후원 회원은 친위대에 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었다. 친위대의 각 연대는 각각의 후원회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대원에게는 최소 한 명의 후원 회원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1932년 시점에서는 후원 회원 수는 1만 3000명에 머물렀지만, 정권 획득 후에 일시에 후원 회원 수가 증대하여, 1933년에는 16만 7000명까지 늘어났으며, 더욱이 1934년에는 34만 2000명에 달했다. 1932년 여름에 히틀러의 경제 고문 빌헬름 케플러()가 창설한 "경제 문제 연구 위원회"는 1934년 중반에 친위대에 편입되어 "친위대 전국 지도자 벗의 모임()"이 되었는데, 이는 친위대의 후원회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IG 파르벤의 간부 하인리히 뷰테피쉬(:de:Heinrich Bütefisch), 거대 재벌 플릭의 프리드리히 플릭(:de:Friedrich Flick), 대형 식품 회사 닥터 엣트커의 리하르트 카제로우스키(:de:Richard Kaselowsky), 드레스너 은행의 에밀 하인리히 마이어(:de:Emil Heinrich Meyer), 도이체 은행의 칼 리터 폰 하르트(:de:Karl Ritter von Halt), 지멘스-슈케르트의 루돌프 빙겔(:de:Rudolf Bingel), J.H. 슈타인 은행()의 쿠르트 폰 슈뢰더 남작(:de:Kurt Freiherr von Schröder), 국영 기업 헤르만 괴링()의 빌헬름 포스(:de:Wilhelm Voss) 등 쟁쟁한 재계 거물들이 모였다. 후원 회원은 히틀러에 대한 선서도 의무화되지 않았고, 친위대에서 명령을 받는 일도 제복 착용 의무도 없었으며, 금전적인 면에서만 친위대와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친위대의 확실한 재원이었고, 중요한 존재였다. 힘러는 후원 회원에게도 종종 친위대 명예 지도자로서 친위대의 계급을 부여하게 되었다.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는 SS 소유의 ''도이체 에르트-운트 슈타인베르케(Deutsche Erd- und Steinwerke, DEST)''를 위해 석재, 벽돌, 시멘트와 같은 건축 자재를 생산했다. 점령된 동부 영토에서, SS는 기존의 벽돌 공장 300개를 모두 압수하여 벽돌 생산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했다. DWB는 또한 ''오스트-도이체 바우슈토프베르케''(Ost-Deutsche Baustoffwerke; ODBS, 동독 건축 자재 공장; GmbH)와 ''도이체 에델메벨'' GmbH(독일 고급 가구)를 설립했다. 이들은 SS가 유대인과 폴란드인으로부터 압수한 공장에서 운영되었다.
SS는 실험 농장, 빵집, 육류 가공 공장, 피혁 공장, 의류 및 제복 공장, 소형 무기 공장을 소유했다. WVHA의 지시에 따라, SS는 수감자 1인당 하루 3~6 라이히스마르크의 요율로 다양한 공장에 수용소 노동력을 판매했다. SS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판매했으며, 투자 포트폴리오와 현금을 몰수하고, 머리카락을 펠트로 만들어서 치아의 금니를 녹여 금을 얻는 방식으로 사망자로부터 이익을 취했다. 오딜로 글로보치니크는 라인하르트 작전(아우슈비츠 제외)의 희생자들로부터 약탈한 자산의 총 가치를 178,745,960.59 라이히스마르크로 기록했다. 압수된 품목에는 금 2,909.68 kg, 은 18,733.69 kg, 백금 1,514 kg, 미국 달러 249,771.50, 다이아몬드 솔리테어 130개, 브릴리언트 2,511.87캐럿, 다이아몬드 13,458.62캐럿, 진주 114kg이 포함되었다. 나치 법률에 따르면 유대인 재산은 국가에 속했지만, 많은 SS 수용소 사령관과 경비병들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다이아몬드나 통화와 같은 물품을 훔치거나, 압수된 식량과 술을 암시장에 판매했다.
이러한 친위대 기업들은 친위대 경제 부문 장관 오스발트 폴(친위대 대장)의 지휘 하에 통합되었다. 친위대는 500개에 달하는 기업의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일 토석 공업사(Deutsche Erde und Steinwerke: 약칭 DEST)"가 친위대 기업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기업이다. DEST의 주요 업무는 채석장 개발 및 천연석 생산, 벽돌이나 클링커 생산, 도로 공사 수주였다. "독일 장비 공업사(Deutsche Ausrüstungswerke: 약칭 DAW)"도 유명하다. 각지의 강제 수용소에 생산 집중화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탄약 상자, 탄창 상자, 화포, 기타 군용품을 생산했다. 1940년 6월에 설치된 "섬유 피혁 사업단(Gesellschaft fur Textil und Lederverwertung)"도 높은 수익을 올렸다. 무장 친위대의 군복을 생산하는 회사로, 주로 여성 죄수를 일하게 했다. 어느 회사든 죄수들의 노동 조건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쓰러질 때까지 혹사시켰다.
2. 4. 종전과 친위대의 해체 (1945년 이후)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친위대는 붕괴되었다. 많은 친위대원들이 나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숨어 지냈지만, 1945년 5월 21일 하인리히 힘러가 영국군에 체포된 후 뤼네부르크 근처 포로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깨물어 자살했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등 주요 친위대원들도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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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친위대원들은 연합군 병사나 수용소 생존자들에게 즉결 처형되거나 보복을 당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는 미군이,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서는 영국군이 친위대 경비병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 미 육군 방첩대는 체포된 친위대원들을 난민 수용소로 보내 즉결 처형되도록 방조하기도 했다.
1945년 4월, 카를 되니츠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수립한 후 5월 6일 힘러를 해임하여 친위대를 사실상 해체했다. 10월 10일에는 연합국 관리 이사회 법령에 따라 친위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자산이 몰수되었다.
전후 많은 친위대원들은 연합국과 유대인 조직의 추적을 피해 오데사 등의 지원 조직을 통해 해외로 도피했다. 일부는 U보트 부대에 숨어 독일을 탈출하기도 했다.
미국은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친위대 과학자들을 망명시켜 군사 기술을 확보했고, 요시프 스탈린에 대항하기 위해 친위대원들을 겔렌 기관에 참여시켰다. 겔렌 기관은 이후 서독의 BND가 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등은 나치 사냥꾼과 모사드를 피해 아르헨티나, 시리아 등지로 도피했다. 이들 중 일부는 현지 정보 기관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완전히 소식을 감추었다.

연합국은 뉘른베르크에 국제 군사 재판소를 설립하고 나치 전범들을 기소했다.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한스 프랑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등 주요 전범 24명에 대한 첫 재판이 1945년 11월에 시작되었다. 칼텐브루너를 포함한 12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칼텐브루너는 1946년 10월 16일에 처형되었다. 아우슈비츠 전 사령관 루돌프 회스도 1947년에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SS 재판은 계속되었고, 많은 피고인들이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7년 11월 크라쿠프에서는 아우슈비츠 관련 SS 장교와 경비병 40명에 대한 재판이 열려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12번의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이 진행되었고, 소련 법원에서도 약 37,000명의 SS 대원이 재판을 받았다. 형벌에는 교수형과 장기간의 강제 노동이 포함되었다. 피오트르 치빈스키는 강제 수용소 범죄에 연루된 SS 대원 70,000명 중 약 1,650명에서 1,700명 정도만이 재판을 받았다고 추산한다. 1946년, 국제 군사 재판소는 SS를 범죄 조직으로 선언했다.

전쟁 후, 많은 나치 당원들이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도망쳤다. 1950년대, 로타르 헤르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거주자 리카르도 클레멘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임을 밝혀냈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모사드에 체포되어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트레블링카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도 남미로 탈출했다가 1967년 독일로 추방되어 1970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71년 사망했다.
요제프 멩겔레는 1949년 독일을 탈출하여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로 도피 생활을 하다 1979년 익사했다.
야콥 라이머 등 수천 명의 나치 당원들은 난민으로 위장하여 미국으로 도망쳤다. 빌헬름 횑틀, 오토 폰 볼슈빙 등 SS 출신들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정보 기관에 고용되었다. 소련도 SS 인력을 활용했다.
시몬 비젠탈 등은 ODESSA라는 나치 도망자 네트워크의 존재를 추측했지만, 기타 세레니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ODESSA의 존재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나치 지원 조직은 분명히 존재했다.
2. 4. 1. 독일의 패망과 친위대의 몰락
나치 독일의 붕괴 이후, 친위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친위대원 중 다수는 여전히 나치 사상을 신봉하며 독일과 유럽 전역에 숨어 있었다. 1945년 5월 21일, 영국군은 변장하고 위조 여권을 소지한 하인리히 힘러를 체포했다. 그는 뤼네부르크 근처의 포로 수용소에서 청산염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다른 여러 주요 친위대원들도 도주했지만, 일부는 즉시 체포되었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는 RSHA의 수장이자 힘러 자살 이후 생존한 최고위급 친위대 본부 책임자였으며, 바이에른 알프스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45~46년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기소된 22명의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thumb
일부 친위대원들은 석방된 수감자, 난민, 또는 연합군 병사들에 의해 즉결 처형, 고문, 구타를 당했다. 1945년 4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진입하여 친위대의 만행을 목격한 미군 제157연대 병사들은 수용소에 남아 있던 일부 친위대 경비병들을 사살했다. 같은 해 4월 15일, 영국군은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 진입했다. 그들은 친위대 경비병들에게 기아 상태의 식량을 제공하고, 휴식 없이 노동을 시켰으며, 남은 시체들을 처리하게 하고, 속도를 늦추면 총검으로 찌르거나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미 육군 방첩대의 일부 구성원들은 체포된 친위대 수용소 경비병들을 난민 수용소에 넘겼는데, 그곳에서 그들이 즉결 처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1945년 4월, 독일의 패전이 시간 문제로 되자, 히틀러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는 종전 교섭을 무단으로 진행한 히믈러의 체포 명령을 무시하는 한편, 군대에 필적하는 무장 친위대를 이끄는 히믈러의 지지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성립된 후, 5월 6일에 되니츠는 히믈러를 정식으로 해임하고, 사실상 친위대는 해체되었다. 히믈러는 친위대원들에게 국방군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도망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5월 8일의 독일의 항복 후, 히믈러를 비롯한 친위대원들의 대부분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히믈러는 취조 중 자살했다.
10월 10일에 연합국 관리 이사회가 성립시킨 관리 이사회법 제2호에 의해, 친위대는 나치 및 그 산하 조직과 함께 완전히 해체되었고, 자산은 몰수되었다.
연합국에 의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추궁과 유대인 조직에 의한 복수를 두려워한 친위대원은 사망을 가장하여 바티칸의 연락 조직이나 오데사라고 불리는 지원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로 도망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조국 독일로부터의 도망을 꾀하는 U보트 부대에 섞여서 모습을 감춘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다양하고도 선진적인 비밀 병기 개발에 관여했던 친위대원이나 친위대 소속 과학자에 대해, 미국의 군수 산업에 의한 망명 지원과 보호도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최첨단 군사 연구 계획의 보안 및 정보 관리를 맡아온 경위도 있어서, 보호를 받은 그들에 의해 제공되는 과학 정보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페이퍼클립 작전).
요시프 스탈린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소련에 통하는 친위대원을 겔렌 기관에 참여하게 했다. 이 겔렌 기관은 친위대원들에게 있어서 독일 국내에 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피처였다. 겔렌 기관은 전후 서독 정부의 첩보 기관인 BND가 되었다.
한편,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에리히 프리브케, 에두아르트 로슈만 등 소련에 통하지 않는 전범들은 나치 사냥꾼이나 모사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친독적인 아르헨티나나 그 외 라틴 아메리카 국가, 또 알로이스 브룬너처럼 반이스라엘 입장을 취하는 시리아 등 아랍 국가로 건너간 자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현지 치안·첩보 기관의 양성에 관여한 자도 있는가 하면, 완전히 소식 불명된 자도 있다.
2. 4. 2. 뉘른베르크 재판과 전범 추적
연합국은 나치 전범들을 상대로 법적 절차를 시작하여 1945년 뉘른베르크에 국제 군사 재판소를 설립했다.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한스 프랑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등 24명의 주요 인물에 대한 첫 번째 전범 재판은 1945년 11월에 시작되었다. 그들은 국제법 위반에 따른 공모, 침략 전쟁 수행, 전쟁 범죄, 반인륜 범죄 등 4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칼텐브루너를 포함한 1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칼텐브루너는 반인륜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16일에 처형되었다. 아우슈비츠의 전 사령관 루돌프 회스는 칼텐브루너 등을 위해 증언했으며, 1947년에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추가적인 SS 재판과 유죄 판결이 이어졌다. 많은 피고인들은 단지 상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이는 그들이 선서와 의무의 일부로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했던 것이라고 변명하며 자신을 변호하려 했다. 법원은 이를 정당한 변호로 인정하지 않았다. 1947년 11월 크라쿠프에서 아우슈비츠 출신 SS 장교와 경비병 40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23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12번의 후속 뉘른베르크 재판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진행되었으며, 또한 약 37,000명의 SS 대원이 소련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형벌에는 교수형과 장기간의 강제 노동이 포함되었다. 피오트르 치빈스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장은 강제 수용소에서 범죄에 연루된 SS 대원 70,000명 중 전쟁 후 재판을 받은 사람은 약 1,650명에서 1,700명 정도라고 추산한다. 국제 군사 재판소는 1946년에 SS를 범죄 조직으로 선언했다.
전쟁 후, 많은 전 나치 당원들이 남미, 특히 후안 페론 정권이 그들을 환영했던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1950년대, 전 다하우 수용소 수감자 로타르 헤르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거주자 리카르도 클레멘트가 1948년, 나치 동조자인 오스트리아 성직자이자 당시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알로이스 후달 주교가 운영하는 조직을 통해 위조 신분증과 아르헨티나 착륙 허가를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포되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이히만은 "나는 500만 명의 유대인[혹은 그가 나중에 말했다고 주장한 '제국'의 적]의 죽음을 내 양심에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엄청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웃으면서 무덤에 뛰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레블링카의 사령관인 프란츠 슈탕글 또한 후달의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탈출했다. 그는 1967년 독일로 추방되었고 1970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71년에 사망했다.
요제프 멩겔레는 체포되면 사형에 처해질 것을 우려하여 1949년 4월 17일 독일을 탈출했다. 전 SS(친위대) 구성원들의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그는 제노바로 가서 국제 적십자 위원회로부터 "헬무트 그레고르"라는 가명으로 여권을 받았다. 그는 7월에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1958년 파라과이로, 1960년 브라질로 이주했다. 두 경우 모두 전 ''Luftwaffe''(독일 공군) 조종사 한스 울리히 루델의 도움을 받았다. 멩겔레는 수영을 하던 중 뇌졸중을 겪고 1979년에 익사했다.
야콥 라이머와 체르케스 협력자 체르림 소브조코프와 같은 전 SS 구성원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당원들은 때로는 위조 문서를 사용하여 난민의 가면을 쓰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소브조코프, SD(보안방첩대) 장교 빌헬름 횑틀, 아이히만의 조력자 오토 폰 볼슈빙, 그리고 전쟁 범죄 혐의자 테오도르 사베케와 같은 다른 SS 출신자들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정보 기관에 고용되었다. CIA 장교 해리 로시츠케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한, 어떤 놈이라도 사용하는 것은 본능적인 일이었다... 협력자를 모집하려는 열정이나 욕망은 물론 그들의 자격증을 너무 면밀히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소련도 전쟁 후 SS 인력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작전 테오는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에서 "파괴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시몬 비젠탈과 다른 사람들은 전쟁 범죄자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을 도왔다고 하는 ODESSA (Organisation der ehemaligen SS-Angehörigen, 전 SS 구성원 조직의 약자)라는 암호명의 나치 도망자 네트워크의 존재에 대해 추측했다. SS 출신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영국 작가 기타 세레니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전후 혼란과 후달의 바티칸 기반 네트워크가 탈출의 원인이라고 본다. ODESSA의 존재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세레니는 "전쟁 후 분명히 다양한 종류의 나치 지원 조직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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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 되자,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는 종전 교섭을 무단으로 진행한 하인리히 힘러의 체포 명령을 무시하는 한편, 군대에 필적하는 무장 친위대를 이끄는 힘러의 지지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성립된 후, 5월 6일에 되니츠는 힘러를 정식으로 해임하고, 사실상 친위대는 해체되었다. 힘러는 친위대원들에게 국방군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도망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5월 8일의 독일의 항복 후, 힘러를 비롯한 친위대원들의 대부분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힘러는 취조 중 자살했다.
10월 10일에 관리 이사회법 제2호/Kontrollratsgesetz Nr. 2de에 의해, 친위대는 나치 및 그 산하 조직과 함께 완전히 해체되었고, 자산은 몰수되었다.
연합국에 의한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한 추궁과 유대인 조직에 의한 복수를 두려워한 친위대원은 사망을 가장하여 바티칸의 연락 조직이나 오데사라고 불리는 지원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로 도망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조국 독일로부터의 도망을 꾀하는 U보트 부대에 섞여서 모습을 감춘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다양하고도 선진적인 비밀 병기 개발에 관여했던 친위대원이나 친위대 소속 과학자에 대해, 미국의 군수 산업에 의한 망명 지원과 보호도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최첨단 군사 연구 계획의 보안 및 정보 관리를 맡아온 경위도 있어서, 보호를 받은 그들에 의해 제공되는 과학 정보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페이퍼클립 작전).
요시프 스탈린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소련에 통하는 친위대원을 겔렌 기관에 참여하게 했다. 이 겔렌 기관은 친위대원들에게 있어서 독일 국내에 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피처였다. 겔렌 기관은 전후 서독 정부의 첩보 기관인 BND가 되었다.
한편,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에리히 프리브케, 에두아르트 로슈만 등 소련에 통하지 않는 전범들은 나치 사냥꾼이나 모사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친독적인 아르헨티나나 그 외 라틴 아메리카 국가, 또 알로이스 브룬너처럼 반이스라엘 입장을 취하는 시리아 등 아랍 국가로 건너간 자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현지 치안·첩보 기관의 양성에 관여한 자도 있는가 하면, 완전히 소식 불명된 자도 있다.
3. 조직
(1933년 나치 권력 장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