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농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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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체농법은 북한에서 김일성 시대에 주창된 농업 방식이다. 농업 생산성 부진과 식량난을 개선하기 위해 주체농법의 수정이 이루어졌지만,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변화를 추구하려는 북한 당국의 경직된 태도를 보여주었다. 농민의 의욕과 실정에 맞춰 농업을 행한다는 기조 아래 가족 경영과 자류지 확대 정책이 시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북부는 주로 광공업 지역으로 개발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는 식량 자급과 농업 진흥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지도 아래 농업 정책이 추진되었다.[1]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도 아래 주체사상에 기반하여 추진된 주체농법은 과학적 근거와 경험을 무시하고 정치적 슬로건에 의존한 결과 실패로 끝났다.[3][2] 조선로동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고, 경험에 근거한 전통 농법이나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근대 농법은 무시되었다.[2][3]
2. 주체농법의 배경과 전개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이 추진한 협동농장화 정책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실패로 드러났고, 1950년대 말에는 1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외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1] 북한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외국의 간섭을 배격하는 강력한 민족주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 자본 의존형 근대화 모델을 배제하고 자력갱생을 목표로 하는 주체농법을 실천하였다.[3][2]
주체농법은 외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대신, 북한만의 독자적인 방식을 강조했다. 하지만, '주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농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앙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야 했다.[5]
2. 1. 주체농법의 특징
주체농법은 조선로동당의 지도와 '교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정신력을 강조하는 관념적 슬로건에 의존했다.[2] 경험적, 과학적 지식은 무시되었고, 전통 농법과 근대 농법 모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3]
산림을 개간하여 흙막이 없는 계단식 논밭을 조성하고, 옥수수 등 단일 작물을 연작하는 방식은 토사 유출, 토양 침식, 홍수 피해를 야기했다.[4] 민둥산이 되어 보수력을 잃은 산의 토사가 강으로 흘러 들어가 수위가 높아지고, 하천이 쉽게 범람하여 홍수가 다발하는 원인이 되었다.[3][4]
중국을 모방하여 쌀과 옥수수를 상식을 벗어나는 밀도로 심는 "밀식"과,[3][5] 화학 비료를 기계적으로 대량 투여하는 방식은 일시적인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는 토양의 소모와 생산력 붕괴를 초래했다.[4][5]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의 원조에 의한 화학 비료 공급이 끊기자, 많은 농지가 "사막화"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의 참상을 보였다.[5]
흙막이 없는 계단식 밭과 밀식은 모두 김일성이 현지 지도할 때 발언한 "교시"(말씀)에 근거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농법에서도 벗어나 과학으로서의 농업이라는 관점에서도 불합리하기 그지없다.[3] 생산자 측이 마음대로 식재 방법을 개선하면 "교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고, 최고 지도자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할 수도 없었다.[6] 북한에서는 헌법보다 최고 지도자에 의한 "교시"가 우선되기 때문에,[7] 농업 전문가라 할지라도 "교시"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3][7]
3. 주체농법의 실패와 폐해
주체농법은 흙막이 없는 계단식 밭, 지나친 밀식, 특수한 옥수수 재배법 등 비합리적인 방식을 강요했다.[3][4][5] 이러한 방식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농업 전문가조차 "교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3][7] "교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강제수용소 수감 및 처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7]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선총련) 중진이었던 리우홍은 저서 『밑바닥의 공화국-북한 흉작의 구조』에서 주체농법을 북한 흉작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했다.[8] 와다 하루키는 주체농법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있으며, 흉작은 자연의 반격이라고 비판했다.[4]
3. 1. 환경 파괴
"식량이 부족하면 산림을 농지로 바꾸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로 북한 전역에 걸쳐 산림이 개간되고 산 정상까지 계단식 논밭이 만들어졌다.[5] 그러나 전국토 경지의 70%가 경사 15도 이상의 산비탈이었기 때문에 농업 생산은 어려웠다.[5] 김일성이 흙막이가 없는 밭을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밭이 무너져 내렸다.[3][4] 계단식 밭에는 과일이나 차와 같은 다년생 식물이 적합하지만, 옥수수와 같은 일년생 식물을 재배하여 토사 유출은 피할 수 없었다.[4] 민둥산이 된 산은 보수력을 잃었고, 유출된 토사는 강으로 흘러들어 수위를 높여 하천의 범람과 홍수를 유발했다.[3][4] 또한, 홍수로 인해 대량의 토사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 연안 생태계를 파괴하여 어업 생산량도 감소하였다.[3] 1990년대 북한은 폭우로 인한 수해를 입었지만, 주체농법이 피해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인재였다.[3]
3. 2. 식량난 심화
연작과 밀식, 과도한 화학 비료 사용은 장기적으로 농업 생산성을 저하시켰다.[4][5] 특히 빽빽하게 심는 밀식은 토양의 소모를 가속화시켜 농지의 생산력을 붕괴시켰다.[4][5]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의 원조로 공급되던 화학 비료가 끊기자, 많은 농지가 사막화될 정도로 황폐해졌다.[5]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1985년 이후 급속히 감소했다.[5]
1990년대 북한은 폭우로 인한 수해를 입었지만, 주체농법이 피해를 더욱 심화시킨 인재였다.[3] 1995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북한은 역사적인 대홍수로 많은 논밭과 비축 식량이 유실되어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5] 세계 식량 계획(WFP) 등의 조사 결과, 북한은 쌀과 옥수수만 재배하는 단일 작물 재배를 하고 있었다.[5] 전문가들은 겨울철 보리 재배를 제안했지만, 김일성의 "교시"에 없다는 이유로 1년 이상 논의한 후에야 보리 재배가 허용되었다.[5]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 등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으며, 그 원인은 주체농법에 있었다.[3][4][5][8]
3. 3. 사회적 영향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대기근을 겪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로 주체농법이 지목된다.[3][4][5][8] 1995년 대홍수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고 식량난이 심화되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농업 정책의 실패와 주체농법에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5]
세계 식량 계획(WFP) 등의 조사 결과, 북한에서는 쌀과 옥수수만을 주식으로 재배하고 있었다.[5] 전문가들은 겨울철 보리 재배를 제안했지만, 김일성의 "교시"에 없다는 이유로 1년 이상 논의한 후에야 보리 재배가 허용되었다.[5]
1990년대에 식량 배급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2002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영양실조는 유아 사망률 증가, 발달 장애, 인지 장애 등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했다.
4. 주체농법의 수정과 한계
1997년, 김일성 사망 후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주체농법에 몇 가지 수정 조치가 이루어졌다.[3] 이러한 수정 조치에는 농민들이 가족 단위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가족 경영과 친족 경영, 그리고 농민이 자유롭게 작물을 처분할 수 있는 자류지 확대가 포함되었다.[3] 과거 자류지는 매우 좁았지만, 그곳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매우 비옥하고 잘 자랐다고 한다.[1]
그러나 이러한 정책 수정은 "김일성 주석이 현지 지도한 농장에서의 지시를, 그대로 전토에 적용한 것에 실수가 있었다"는 식으로 제한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다.[3] 즉, '교시'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문제의 원인을 현지 지도 적용의 문제로만 돌렸다.[3]
참조
[1]
문서
李英和(1996)pp.151-153
[2]
문서
李英和(1996)pp.87-90
[3]
문서
礒﨑・澤田(2010)p.169
[4]
문서
和田(2012)pp.156-157
[5]
문서
重村(2002)pp.170-171
[6]
뉴스
金日成氏のデタラメな指示に歯向かった農場支配人の悲惨な運命
https://dailynk.jp/a[...]
DailyNK Japan(デイリーNKジャパン)
[7]
문서
礒﨑・澤田(2010)p.168, 170-171
[8]
문서
李佑泓(1989)
[9]
문서
礒﨑・澤田(2010)pp.110-114
[10]
문서
重村(2002)pp.172-173
[11]
뉴스
黄長燁氏による政府関係者等向け講演会記録
https://www.rachi.go[...]
内閣官房拉致問題対策本部事務局
2010-04-06
[12]
뉴스
金正日政権下の大量餓死について-餓死者300万人の根拠
https://nippon.zaida[...]
東京財団政策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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