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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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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도담은 진문찬의 아들로, 남조 양나라에서 동궁직합장군을 지냈다. 548년 후경의 난 당시 건강을 지원하기 위해 노수 2000명을 이끌고 갔으나, 성 안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경제 소방지에 의해 시중, 사지절, 도독 남연주 제군사 등의 관직과 장성현공에 추증되었으며, 소열의 시호가 내려졌다. 동생 진패선이 진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시흥소열왕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아들 진천은 숙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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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소열황
원래 이름소열황(昭烈皇)
본명진도담(陳道談)
시호소열황(昭烈皇)
묘호없음
별명해당사항 없음
생애
출생일불명
출생지해당사항 없음
사망일548년
사망지해당사항 없음
가족 관계
배우자효비(孝妃)
자녀문제
부친태조
모친안황후(安皇后)
왕조 정보
재위(추존)
후임자문제
종교해당사항 없음
가문영천 진씨
왕조남진
목록남진 추존 황제

2. 생애

진문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나라에 출사하여 동궁직합장군이 되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쇠뇌 부대 2000명을 이끌고 건강을 지원했으나, 성 안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1]

2. 1. 양나라 시기 활동

양나라에서 동궁직합장군(東宮直閤將軍)의 직책에 있었다.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쇠뇌 부대를 이끌고 성 중심부를 지켰으나,[1]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557년 경제 소방지에 의해 시중(侍中), 사지절(使持节), 도독 남연주 제군사(南兗州諸軍事) 3개의 관직 및 장성현공(長城縣公)에 추증되었고 소열(昭烈)이라는 시호가 지정되었다.[1] 이후 동생 진패선진나라를 건국하고 진제(陳帝)로 즉위하자 시흥소열왕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진천은 서위에 포로로 잡혀간 진패선의 아들 진창을 대신해 황제로 즉위했다.[1]

2. 2. 사후 추증과 추존

양나라 시기 동궁직합장군(東宮直閤將軍)의 직책에 있었고, 후경의 난이 발발하자 많은 쇠뇌 부대를 이끌고 성 중심부를 지켰다.[1] 557년 경제 소방지에 의해 시중(侍中), 사지절(使持节), 도독 남연주 제군사(南兗州諸軍事) 3개의 관직 및 장성현공(長城縣公)에 추증되었고 소열(昭烈)의 시호가 지정되었다.[1] 이후 동생 진패선이 같은 해 10월 진제(陳帝)로 즉위하자 시흥소열왕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진천은 서위에 포로로 잡혀간 진패선의 아들 진창(陳昌)을 대신해 숙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1]

태평 2년(557년)에 사지절(使持節)·시중·도독남연주 제군사·남연주자사의 지위가 추증되었고, 장성현공(長城県公)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소열(昭烈)이라 했다. 남조 진(南朝陳)이 건국되자, 다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태부·양주목의 지위가 증정되었고, 시흥군왕(始興郡王)으로 개봉되었다. 아들 진훤(陳頊)은 남조 양(南朝梁)의 승성 말년에 서위에 의해 관중으로 연행되었으나, 진패선(陳霸先)은 진훤에게 시흥왕의 봉호를 잇게 하고, 도담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영정 3년(559년) 6월, 진패선이 사망하고 진천(문제)이 즉위했으나, 진훤은 아직 북주로부터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해 10월에 진천은 진훤을 안성왕(安成王)으로 삼고, 진천의 차남 진백무를 시흥왕으로 봉하여 도담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태조
어머니안황후(安皇后)
동생무제
태비(太妃)효비(孝妃)
장남진 문제
차남진욱
신의 장공주 (도중거의 아들 도욱의 처)


4. 후사 문제와 계승

태평 2년(557년)에 사지절(使持節)·시중·도독남연주 제군사·남연주자사 지위가 추증되었고, 장성현공(長城県公)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소열(昭烈)이라 했다. 남조 진(南朝陳) 건국 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태부·양주목 지위가 증정되었고, 시흥군왕(始興郡王)으로 개봉되었다. 아들 진훤(陳頊)은 남조 양(南朝梁) 승성 말년에 서위에 의해 관중으로 연행되었으나, 진패선(陳霸先)은 진훤에게 시흥왕 봉호를 잇게 하고, 도담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1]

영정 3년(559년) 6월, 진패선이 사망하고, 진천(문제)이 즉위했으나, 진훤은 아직 북주로부터 귀국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진천은 진훤을 안성왕(安成王)으로 삼고, 진천의 차남 진백무를 시흥왕으로 봉하여 도담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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