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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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쩐트어는 13세기 베트남의 쩐 왕조의 개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쩐 리의 장남으로 태어나, 리 왕조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가문의 부상을 이끌었다. 쩐트어의 차남 쩐까인이 리 혜종의 딸 리 소황과 결혼하고, 쩐투도의 주도로 리 소황이 쩐까인에게 선위하면서 쩐 왕조가 개창되었다. 쩐트어는 태상황으로 존봉되었으며, 묘호는 태조, 시호는 휘종이다. 그는 쩐 왕조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쩐 왕조의 초대 황제인 쩐 태종의 아버지이자 쩐흥다오의 할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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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트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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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쩐 왕조의 태상황제 |
휘 | 쩐트어 (Trần Thừa/陳承/진승) |
묘호 | 휘종(Huy Tông/徽宗) → 태조(Thái Tổ/太祖) |
시호 | 개운입극홍인응도순진지덕신무성문수유지효황제 (Khai Vận Lập Cực Hoằng Nhân Ứng Đạo Thuần Chân Chí Đức Thần Vũ Thánh Văn Thùy Dụ Chí Hiếu 황제) |
능호 | 휘릉(Huy Lăng/徽陵) |
생애 | |
출생일 | 리 왕조 찐푸(貞符) 9년 (1184년) |
사망일 | 티엔응찐빈(天應政平) 3년 음력 1월 18일 (1234년 2월 17일) |
가족 관계 | |
부친 | 원조(元祖) 쩐리(陳李) |
모친 | 성자황후(聖慈皇后) |
배우자 | 순자황후(順慈皇后) 레티지에우(黎氏妙) |
자녀 | 쩐리에우, 쩐깐, 쩐녓히에우, 쩐찌엣, Thụy Bà, Thiên Thành |
재위 | |
추존 | (추존) |
태상황제 | 1226년 1월 11일 ~ 1234년 2월 17일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태종(太宗) |
2. 생애
쩐트어는 1184년, 당시 어업으로 큰 부를 쌓았던 쩐리( Trần Lý|진리|hn=陳李vie )의 장남으로 류자 마을(현재 타이빈성 흥하현)에서 태어났다.[1] 그는 리 왕조 말기의 혼란기에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으며, 동생 쩐뜨카인( Trần Tự Khánh|진사경|hn=陳嗣慶vie )이 사망한 후인 1223년에는 보국태위(輔國太尉)에 임명되어 군권을 장악했다.[5]
1225년 12월, 그의 차남 쩐까인( Trần Cảnh|진경|hn=陳煚vie )이 리 소황( Lý Chiêu Hoàng|리 소황|hn=李昭皇vie )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쩐 왕조를 개창하자, 쩐트어는 태상황으로 추대되었다.[7][8] 그는 부천궁(附天宮)에 거처하며 명예적인 지위를 유지했다.[9][10]
1234년 음력 1월 18일, 태상황 쩐트어는 부천궁에서 향년 51세로 승하하였다.[11] 같은 해 8월, 묘호는 '''휘종'''(Huy Tông|휘종|hn=徽宗vie), 시호는 '''개운입극홍인응도순진지덕신무성문수유지효황제'''(Khai Vận Lập Cực Hoằng Nhân Ứng Đạo Thuần Chân Chí Đức Thần Vũ Thánh Văn Thùy Dụ Chí Hiếu Hoàng Đế||hn=開運立極弘仁應道純真至德神武聖文垂裕至孝皇帝vie)로 추존되었다. 이후 1248년에 묘호를 '''태조'''(Thái Tổ|태조|hn=太祖vie)로 고치고 능호를 '''휘릉'''(Huy Lăng|휘릉|hn=徽陵vie)이라고 하였다.[11]
2. 1. 리 왕조 말기의 혼란과 쩐 가문의 부상
1208년, 팜주(范猷)의 난으로 인해 당시 황태자였던 리 삼(李旵, 훗날 리 혜종)이 쩐리(陳李)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209년, 리 삼은 쩐리의 딸이자 쩐트어의 여동생인 쩐티중(陳氏容)과 혼인하기로 결정하면서 쩐씨 가문과 리 왕조의 관계가 시작되었다.[1]이후 쩐 가문은 리 고종과 리 삼이 수도 탕롱(昇龍, 현재의 하노이)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황제는 쩐티중의 숙부인 토쭝뜨(蘇忠詞)와 쩐트어의 동생인 쩐뜨카인(陳嗣慶) 등 쩐 가문의 여러 인물을 왕실의 주요 관직에 임명했다.[1] 1211년, 리 삼이 리 혜종(李惠宗)으로 즉위하면서 쩐 가문의 왕실 내 영향력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2]
특히 쩐뜨카인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국내의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3] 이 공로로 섭정의 지위에 올랐다. 그의 형인 쩐트어 또한 1216년 12월 조정의 시종직(侍從職)에 임명되면서, 왕실의 권력은 점차 쩐 가문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4]
1223년 쩐뜨카인이 사망하자, 쩐트어는 그의 뒤를 이어 보국태위(輔國太尉)라는 최고 군사직을 맡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사촌인 쩐투도(陳守度)는 왕실 경비대의 책임자가 되어 군사적 실권을 장악했다.[5]
1224년 10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 혜종은 당시 6세에 불과했던 자신의 딸 리 소황(李昭皇)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5] 어린 여제가 즉위하자 왕실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쩐 가문, 특히 쩐투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1225년 10월, 쩐투도는 리 소황과 쩐트어의 8살 된 아들 쩐까인(陳煚, 훗날 쩐 태종)의 혼인을 성사시켰다.[6]
결혼이 이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25년 12월 11일, 쩐투도는 리 소황으로 하여금 남편인 쩐까인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하는 선양(禪讓)을 단행했다. 이로써 리 왕조는 멸망하고 쩐 왕조가 새롭게 건국되었다.[7] 쩐까인은 쩐 태종(陳太宗)으로 즉위하였고, 그의 아버지인 쩐트어는 1226년 10월 태상황(太上皇)으로 추대되어 쩐 왕조 최초의 태상황이 되었다.[8][9]
2. 2. 쩐 왕조의 건국
1208년, Phạm Du|팜주vie의 난으로 인해 일부 왕족들이 쩐리( Trần Lývie )의 집에 피신했을 때, 당시 황태자였던 리 혜종이 쩐리의 딸 쩐 티 중과 관계를 맺으면서 쩐씨 가문과 왕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1] 1209년 리 혜종(당시 황태자 리 삼)은 쩐 티 중과 정식으로 혼인했다.[1]이후 쩐씨 가문은 리 고종과 리 삼(리 혜종)이 탕롱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는 것을 도왔다.[1] 1211년, 황태자 리 삼이 리 고종의 뒤를 이어 리 혜종으로 즉위하자 쩐씨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2] 혜종은 쩐 티 중의 숙부인 Tô Trung Từ|토 쭝 뜨vie와 쩐트어의 동생인 쩐뜨카인( Trần Tự Khánhvie ) 등 쩐씨 가문 사람들을 요직에 임명했다.[1] 특히 쩐뜨카인은 뛰어난 무장으로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3] 섭정의 지위에 올랐고, 그의 형인 쩐트어는 1216년 12월 조정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4] 이로써 왕실의 권력은 점차 쩐씨 가문에게 넘어갔다.[4] 1223년, 쩐뜨카인이 사망하자 쩐트어는 그의 뒤를 이어 보국태위(輔國太尉)라는 최고 군사 직책에 올랐고, 그의 사촌인 쩐투도( Trần Thủ Độvie )는 왕실 경비대장의 자리를 차지했다.[5]
1224년 10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리 혜종은 당시 여섯 살이던 둘째 딸 리 소황( Lý Chiêu Hoàngvie )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5] 어린 여제가 즉위하자 모든 권력은 쩐씨 가문, 특히 쩐투도에게 집중되었다. 쩐투도는 이 기회를 이용해 리 소황과 쩐트어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여덟 살의 쩐까인( Trần Cảnhvie )의 혼인을 주선했다.[6] 1225년 10월, 둘은 혼인하였다. 쩐까인이 여제의 남편(부마)이 되자, 쩐투도는 1225년 12월 11일(음력 12월 1일), 리 소황이 남편 쩐까인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도록 일을 꾸몄다.[7] 이로써 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쩐 왕조가 새롭게 개창되었다.
아들 쩐까인이 쩐 태종으로 즉위하자 쩐트어는 상황(上皇)으로서 초기 섭정 역할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군사 및 국정 운영은 쩐투도가 장악했다.[8] 1226년 10월, 쩐트어는 태상황(太上皇)으로 존봉되어 쩐 왕조 최초의 태상황이 되었다.[9] 그는 다른 쩐 왕조의 태상황들과 달리 실제 통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명예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국정 운영과 응우옌 논 및 도안 트엉의 반란 진압 등은 주로 재상 쩐투도가 담당했다.[10] 태상황으로서 거처는 부천궁(附天宮)이었다.
2. 3. 태상황 시기
1225년 12월 11일, 쩐투도에 의해 리 소황이 부마인 쩐까인에게 선양하면서 쩐 왕조가 개창되었다. 쩐트어는 아들이 황제가 되자 태상황으로 존봉되었고, 부천궁(附天宮)에 거처하였다. 이듬해인 1226년 10월, 그는 공식적으로 태상황 칭호를 받아 쩐 왕조 최초의 태상황이 되었다.[9]다른 쩐 왕조의 태상황들이 재위 중인 황제와 함께 국정을 공동으로 운영했던 것과는 달리, 태조는 주로 명예로운 지위를 유지했다.[10]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쩐투도가 주도하여 왕실의 질서를 회복하고 응우옌 논과 도안 트엉 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왕조 초기의 안정을 다졌다.[8][10]
1234년 음력 1월 18일, 태상황 쩐트어는 부천궁에서 향년 51세로 승하하였다.[11] 같은 해 8월,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개운입극홍인응도순진지덕신무성문수유지효황제'''(開運立極弘仁應道純真至德神武聖文垂裕至孝皇帝)로 추존되었다. 이후 1248년에 묘호를 '''태조'''(太祖)로 고치고 능호를 '''휘릉'''(徽陵)이라 하였다.[11]
3. 가족 관계
쩐트어에게는 최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12], 슬하에 네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 중 쩐 까인은 쩐 왕조의 첫 황제인 쩐태종이 되었고, 쩐 리에우는 유명한 장군 쩐흥다오의 아버지가 되었다. 다른 아들로는 쩐 녓 히에우(캄 티엔 공)와 쩐 찌엣(호아이 득 공)이 있다.[12] 딸은 투이 바 공주와 티엔 탄 공주이다. 쩐트어의 가족 관계는 쩐 왕조의 성립과 권력 구조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조부모, 부모, 황후,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조부모와 부모
관계 | 칭호 | 이름 |
---|---|---|
조부 | 영조공황제(寧祖恭皇帝, Ninh Tổ Cung Hoàng Đế|닌 또 꿍 호앙 데vie) | 쩐떠이(陳翕, Trần Tây|쩐떠이vie) |
조모 | 영자황후(寧慈皇后, Ninh Từ Hoàng Hậu|닌 뜨 호앙 허우vie) | (알려지지 않음) |
부친 | 원조소황제(元祖昭皇帝, Nguyên Tổ Chiêu Hoàng Đế|응우옌 또 찌에우 호앙 데vie) | 쩐리(陳李, Trần Lý|쩐리vie) |
모친 | 성자황후(聖慈皇后, Thánh Từ Hoàng Hậu|타인 뜨 호앙 허우vie) | (알려지지 않음) |
3. 2. 황후
- 순자황후(Thuận Từ Hoàng Hậuvie) (順慈皇后) 레 티 지에우(Lê Thị Diệuvie) (黎氏妙) (? ~ 1230년)
3. 3. 황자
쩐트어에게는 성씨가 알려지지 않은 부인 외에 레 씨 성을 가진 부인이 있었으며, 슬하에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황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작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안생왕(安生王) | Trần Liễu|진류vie (陳柳) | 1211년 ~ 1251년 | 쩐흥다오(陳興道)의 아버지이다. 사후 흠명대왕(欽明大王)으로 추존되었다. |
태종(太宗) | Trần Cảnh|진경vie (陳煚) | 쩐 왕조의 초대 황제이다. | |
흠천왕(欽天王) | Trần Nhật Hiệu|진일교vie (陳日皎) | 1225년 ~ 1268년 | |
회덕왕(懷德王) | Trần Bà Liệt|진파렬vie (陳婆列) / Trần Chiêu|진조vie (陳照)[12] | 쩐트어의 다른 부인 소생이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버려졌으나, 1232년 이복형인 쩐까인의 명으로 회덕왕 작위를 받았다.[12] |
3. 4. 황녀
쩐트어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서파공주 (Thụy Bà Công Chúa|瑞婆公主vie)
- 천성공주 (Thiên Thành Công Chúa|天城公主vie)
4. 평가
쩐트어는 리 왕조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키우고 쩐 왕조 개창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1. 긍정적 평가
쩐트어는 리 왕조 말기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가문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업으로 부를 쌓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1], 리 혜종 시기 왕실 내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했다. 특히 동생 쩐 뜨 캉이 군사적 공로로 섭정에 오르고, 쩐트어 자신도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면서[4] 쩐 가문은 리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쩐 뜨 캉 사후 최고 군사직을 맡은 쩐트어는[5] 어린 여제 리 치에우 호앙이 즉위한 혼란한 상황 속에서 가문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비록 실질적인 왕조 교체는 사촌 쩐투도가 주도했지만[6][7], 쩐트어의 아들 쩐 깐이 쩐 태종으로 즉위하여 쩐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력과 가문의 영향력이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쩐 태종 즉위 후, 쩐트어는 쩐 왕조 최초의 태상황(쩐 태조)으로 추존되어[9] 왕조의 상징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다. 다른 태상황들과 달리 실질적인 통치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나[10], 그의 존재 자체는 신생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초기 혼란을 수습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쩐트어는 리 왕조의 쇠퇴와 쩐 왕조의 흥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가문을 이끌고 왕조 교체의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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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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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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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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