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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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는 1202년 부친 미에슈코 3세의 사망 이후 폴란드 대공위를 계승했다. 그는 크라쿠프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레셰크 1세와의 경쟁, 지지자였던 미코와이 그리피타의 사망, 포메라니아 문제 등으로 인해 4년 만에 크라쿠프 왕위를 상실했다. 이후 포메라니아 종주권 회복을 시도하고, 헨리크 키에틀리치 대주교 및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갈등을 겪었다. 가사와 회의에서 레셰크 1세가 암살된 후 크라쿠프 왕위에 복귀했으나, 콘라트 1세와의 대립과 오도니치의 반격으로 폐위당하고 추방당했으며, 1231년 사망했다.
1202년 아버지 미에슈코 3세가 사망하자 폴란드 대공위를 계승했으나, 1206년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갈등 및 사촌 레셰크 1세의 반발로 대공위를 잃었다. 이후 오도니치와 잠시 화해했으나 1218년에 다시 추방했다.
포메라니아 문제에 관심을 보인 브와디스와프 3세는 두 가지 주요 활동에 관여했다. 첫째,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와 회담을 갖고 양측의 분쟁을 해결하고 세력 범위를 명확히 하려 시도했다. 둘째, 실레시아 공작이자 브로츠와프 공작인 헨리크 1세 브로다티와 합의를 맺었다. 이 합의에 따라 브와디스와프는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상속 재산 일부였던 칼리시 공국을 헨리크 1세에게 넘겨주는 대신 루부시 지역을 얻었다. 이를 통해 브와디스와프는 발트해 연안에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카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및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 키에트리치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의 주요 원인은 칼리시 지역의 소유권 문제였다. 브와디스와프 3세가 다스리던 칼리시가 외세(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 브로다티)의 손에 넘어가자, 이곳을 자신의 상속 영토로 여기던 오도니치는 큰 불만을 품었다. 당시 약 16세였던 오도니치는 대폴란드 귀족들과 키에틀리치 대주교의 지지를 얻어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했다.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이 기회를 통해 지역 교회의 특권을 확보하고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2. 초기 생애 및 통치
1227년 레셰크 1세가 곤사바 학살로 사망하자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했지만, 1229년 레셰크 1세의 동생인 콘라트 1세에게 폐위되고 오도니치에게 비엘코폴스카마저 빼앗겨 추방당했으며, 1231년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1186년경 뤼겐 후작 야로미르 1세의 딸 루치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2. 1. 미에슈코 3세 치하
브와디스와프는 1168년경 옌제유프 의회에서 처음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데, 당시 어린 나이로 지역 시토 수도원에 대한 기증의 증인이었다.
1177년에서 1179년 사이, 카지미르 2세와 이복 형 오돈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브와디스와프는 부모 및 형제들과 함께 폴란드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오돈은 아버지 미에슈코 3세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을 명백히 편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브와디스와프는 1181년에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돌아왔지만,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영지를 받지는 못했다.
1186년경 브와디스와프는 루치아와 결혼했다. 그녀는 뤼겐의 공작 야로마르 1세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서부 포메라니아 지역에서 아버지 미에슈코 3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주된 이유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1194년 4월 20일, 이복 형 오돈이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는 당시 미성년자였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오돈의 아들, 1190년경 출생)의 후견인으로서 오브라 강 유역의 남부 대폴란드 공작령을 다스리게 되었다.
1195년 9월 13일에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동복 형 볼레슬라프마저 모즈가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로써 브와디스와프는 아버지 미에슈코 3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고, 이후 아버지의 옛 영지인 크라쿠프 공작령을 되찾고 폴란드의 고위 공작 지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2. 2. 크라쿠프 공작 및 대폴란드 공작
1194년 이복 형 오돈이 사망하고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어린 나이로 비엘코폴스카를 상속받자,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도니치의 후견인으로서 비엘코폴스카의 섭정이 되었다. 이듬해 1195년에는 동복 형 볼레스와프도 사망했다.
1202년 3월 13일 아버지 미에슈코 3세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는 강력한 보예보드인 미코와이 그리피타의 지지를 받아 크라쿠프, 대폴란드, 소폴란드를 상속받으며 폴란드 대공위에 올랐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의 장남인 레셰크 1세 백공이 곧 크라쿠프 공작위 계승에 반대하고 나섰다. 레셰크 1세는 팔라틴 백작 고보레크의 지지를 받았는데, 고보레크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지지하는 보예보드 미코와이와 적대 관계였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칼리슈 공국을 둘러싼 문제로 조카 오도니치와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1206년에 오도니치를 추방했다. 하지만 같은 해, 사촌인 레셰크 1세에게 폴란드 대공위를 빼앗기면서 크라쿠프 공작 지위도 잃게 되었다.
2. 3. 크라쿠프 왕위 상실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의 크라쿠프 공작 및 폴란드 대공으로서의 통치는 1202년 부친 미에슈코 3세가 사망한 후 시작되었다. 그의 크라쿠프 통치는 4년간 지속되었으나, 1206년에 끝을 맺었다.
주요 지지자였던 보이보드 미코와이 그리피타가 사망하고, 그의 사촌인 레셰크 1세가 수도 크라쿠프로 돌아오면서 브와디스와프 3세는 대공위를 빼앗겼다. 그가 권좌에서 밀려난 주요 원인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에 대한 권리 강제 시도와 포메라니아와의 동맹 정책이 지목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실제로는 1202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몇 달 만에 이미 크라쿠프를 상실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시기에 대한 기록 자료가 부족하여 이 주장을 명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3. 포메라니아 종주권 회복 계획
그러나 1209년, 브와디스와프는 라우지츠의 변경백이자 그의 매형이기도 한 콘라트 2세에게 루부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루부시를 빼앗겼다. 하지만 1210년 5월 6일 콘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헨리크 1세 브로다티는 콘라트 2세 사후의 혼란과 베틴 가문 내 상속 분쟁을 이용하여 1210년 8월에서 1211년 3월 사이에 군사 원정을 통해 독일 세력으로부터 루부시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4. 헨리크 키에틀리치 대주교 및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갈등
오도니치와 키에틀리치 대주교가 일으킨 초기 반란은 포즈난 주교 아르놀트 2세가 브와디스와프 3세를 지지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오도니치와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 브로다티 궁정으로 망명해야 했다.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했고, 교황의 개입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고 교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에도 브와디스와프 3세와 오도니치 사이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1206년과 1218년 두 차례에 걸쳐 오도니치를 추방하는 등 우위를 점하는 듯했으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관계는 계속 요동쳤다. 1227년 레셰크 1세가 곤사바 전투에서 암살당하자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지만, 1229년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와 손을 잡은 오도니치에 의해 결국 폴란드 대공위와 비엘코폴스카 영지 모두를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4. 1. 오도니치와의 갈등
칼리시의 상실은 그 땅을 자신의 상속 영토로 여기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다. 당시 약 16세였던 오도니치는 대폴란드 귀족들과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 키에트리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키에트리치 대주교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지역 교회의 특권을 확보하여 지배 가문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도니치와 키에트리치 대주교가 일으킨 반란은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키에트리치가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내린 파문은 포즈난 주교 아르놀트 2세가 브와디스와프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오도니치와 키에트리치는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 브로다티 궁정으로 망명했다.
헨리크 1세는 망명자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오도니치가 자신의 상속 재산을 되찾으면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칼리시 공작령을 내주었다. 한편, 키에트리치 대주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직접 만나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성좌에 항의한 결과, 키에트리치는 자신에게 내려진 파문 조치를 성공적으로 철회시켰고, 교황은 다른 폴란드 공작들에게 키에트리치가 그니에즈노 교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후에도 브와디스와프 3세와 오도니치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206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도니치를 추방했지만, 같은 해 크라쿠프 공작 레셰크 1세에게 폴란드 대공위를 빼앗겼다. 잠시 오도니치와 화해하기도 했으나, 1218년에 다시 오도니치를 추방했고, 오도니치는 포메라니아의 그단스크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에게 망명했다.
1227년 곤사바 전투에서 레셰크 1세가 암살당하자 브와디스와프 3세는 다시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1229년 레셰크 1세의 동생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에게 폐위당했으며, 동시에 오도니치에게 비엘코폴스카마저 빼앗기고 추방당했다.
4. 2. 그워구프 회의 (1208년)
헨리크 1세 브로다티는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중재에 나섰다. 그는 1208년 크리스마스에 두 명의 대폴란드 공작(브와디스와프 3세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그니에즈노 대주교 키에틀리츠, 그리고 브로츠와프, 루부시, 포즈난의 주교들을 Głogów|그워구프pol에서 열린 회의에 초대했다. 오랜 논의 끝에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스핀들생크스)와 키에틀리츠 대주교 사이에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에 따라 키에틀리츠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한 파문을 해제하는 대가로 모든 재산을 돌려받고 그니에즈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삼촌)와 그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사이의 갈등은 이 회의에서 해결되지 않았다.
4. 3. 보르지코바 회의 (1210년)
1210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미에슈코 1세 곰발이의 노력을 지지했다. 미에슈코 1세는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유언에 따라 실롱스크 공작 가문이 폴란드의 정당한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언의 복원을 원했다. 당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피아스트 왕조의 최고령자 중 한 명이었기에, 라치부시 공작 미에슈코 1세가 사망하면 자신이 고공작 칭호와 크라쿠프 공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헨리크 1세 브로다티가 브와디스와프 3세보다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210년 6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 이 칙서는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실롱스크 공작 가문의 모든 세습 권리 복원을 요구하고, 당시 고공작이었던 레셰크 1세 백공을 파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칙서는 익명의 '실롱스크 공작'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미에슈코 1세 곰발이가 라치부시-오폴레 공작 칭호를 사용했으므로, 이 요청자는 헨리크 1세 브로다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폴란드의 권력 구도는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1210년 7월, 레셰크 1세 백공, 헨리크 1세 브로다티, 마조프셰의 콘라트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 주교들과 함께 보르지코바에서 회의(Synod w Borzykowej)를 열었다. 그러나 미에슈코 1세 곰발이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군대와 그리피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크라쿠프로 진격하여 바벨 성을 점령했다.
한편,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기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젊은 군주들과 지역 교회 계층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서 교황 칙서를 철회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1211년 5월 미에슈코 1세 곰발이가 사망하자, 레셰크 1세 백공은 다시 크라쿠프의 고공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에슈코 1세와 그를 지지했던 브와디스와프 3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4. 4. 키에틀리츠 대주교와 오도니치의 부상
1215년,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의 입지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세력을 키운 헨리크 키에틀리츠 대주교와, 볼부르츠에서 열린 소(小) 공작들의 회의 때문에 더욱 약화되었다. 이 회의에는 백공작 레셰크 1세,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그리고 오폴레의 카지미르 1세가 참여했다. 이들은 교회에 대한 경제적, 법적 혜택을 늘리는 데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오도니치가 자신의 정당한 상속 재산을 되찾을 권리를 지지했다.
결국 1216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무력 충돌을 피하고자 조카 오도니치에게 그의 아버지가 소유했던 지역을 넘겨주었다. (어떤 영토를 넘겨주었는지 정확히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일부는 오도니치가 오바 강을 경계로 한 남부 대폴란드를 받았다고 보며, 다른 이들은 젊은 공작이 포즈난 지역 전체와 성까지 받았다고 본다.) 삼촌과 조카 사이의 이 합의는 1217년 2월 9일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내린 교황 칙서로 공식 확인되었다. 또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키에트리츠 대주교와 공식적으로 화해했으며, 대주교는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워치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수입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4. 5. 키에틀리츠 대주교의 몰락과 레셰크 1세와의 협정
1216년에 합의된 화해 조건은 1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키에틀리츠 대주교의 자만심 강하고 야심찬 태도는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고, 피아스트 공작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막았다. 그의 중요성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정책이 실패한 후 더욱 쇠퇴했다.
1217년, 이전의 적대자였던 레셰크 1세 백공과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 사이에 예기치 않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한쪽 또는 양쪽 통치자가 남성 상속자 없이 사망할 경우 다른 쪽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브와디스와프 3세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인 칼리시 공작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게 분명히 불리한 영향을 미쳤다.
4. 6.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폐위
1217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실레지아 공작 헨리크 1세 브로다티(수염공)의 호의적인 중립을 이용하여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는 오도니치의 영토를 점령하고 그를 국외로 추방했다.[1]
브와디스와프 3세와 헨리크 1세 사이의 공식적인 동맹은 1217년 말 또는 1218년 초, Sądowel에서 열린 회의에서 성사되었다. 이 회의는 포즈난의 주교 파베우 2세와 루부시의 주교 바브지니에츠의 중재로 이루어졌다.[1]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 협정의 내용은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오도니치의 영토(1206년 협정에 따라 실레지아에 반환되었던 칼리시의 일부 포함)를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루부시 지역까지 획득했다. 루부시 지역은 1209년 루사티아 변경백 콘라트 2세에게 점령되었으나 1년 후 헨리크 1세가 회복한 땅이었다.[1]
Sądowel 협정은 1218년 5월 9일에 발행된 특별 교황 칙서에 의해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 이는 당시 그니에즈노 대주교였던 헨리크 키에틀리츠의 권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
브와디스와프 3세, 헨리크 1세, 그리고 레셰크 1세 비아위(백공) 사이의 삼두 정치 체제는 1219년 첫 번째 중요한 시험대에 올랐다. 바로 헨리크 키에틀리츠 대주교가 사망한 것이다. 이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자 재상이었던 빈센티 지 니알카를 새로운 대주교로 공동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1]
5.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귀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교도인 프로이센인에 대항하는 국가적인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조카인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오도니치는 포메라니아 공작 스반토풀크 2세(아마도 오도니치의 매형)의 도움을 받아 숙부인 브와디스와프 3세의 권위에 맞서는 투쟁을 시작했다.
1223년 10월, 오도니치는 기습적으로 우이시치에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1225년에는 인접한 지역인 나크워까지 차지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내부 혼란 속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1225년, 그는 튀링겐 방백 루이 4세에게 루부시를 빼앗겼다. 루이 4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조카 오도니치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을 이용하여 이 중요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6. 오도니치와의 전쟁 재개
1227년 브와디스와프 3세와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 사이에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보이보드 도브로고스트(Dobrogost)의 지휘 하에 군대를 보내 우이시체(Ujście)를 포위했지만,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7월 15일, 오도니치는 기습적으로 도브로고스트의 군대를 공격하여 완패시키고 그를 전사시켰다. 이 승리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는 거의 모든 대폴란드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도니치의 동맹이었던 스벤토폴크 2세(Swantopolk II)는 기존의 조약을 깨고 나크워(Nakło)를 점령했으며, 스스로 공작을 선포하고 레셰크 1세 백공(Leszek I the White)에게 표하던 경의를 거부했다.
7. 가사와 회의와 레셰크 1세의 암살
조카 오도니치와 포메라니아 공작의 동맹은 브와디스와프 3세의 통치를 위태롭게 했고, 그는 남은 영토를 잃을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오도니치와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1227년 성 마르틴 축일(11월 11일)에 가사와의 작은 쿠야비아 지역에서 피아스트 통치자, 주교 및 귀족들의 성대한 회의가 소집되어 이 문제와 다른 민감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취했다.
회의를 주도한 레셰크 1세 비아위 외에도 그의 형제인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 브로다티,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역사학자들은 그의 지원 여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전체 주교단 및 폴란드 마그나트 가문의 수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브와디스와프 3세는 가사와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니에즈노의 빈첸티 대주교와 포즈난의 파베우 2세 주교가 그의 이익을 지켰다고 여겨진다.
아무도 11월 24일 아침에 일어날 비극을 예상하지 못했다. 마르친코보 구르네 마을에서 심의 중 짧은 휴식 시간 동안 포메라니아인들이 레셰크 1세 비아위와 헨리크 1세 브로다티를 공격했다. 레셰크 1세는 살해되었고 헨리크 1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가사와 학살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자료와 이후의 역사 기술은 스반토풀크 2세를 범죄의 주모자로 명확히 인식한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공범이었으며, 회의 중에 모든 계획과 대화를 포메라니아 통치자에게 전달했다고 믿었다. 역사학자들은 1227년 스반토풀크 2세가 나크워를 점령한 후 포메라니아 공작과 오도니치 사이의 적대감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추측했다. 오도니치가 가사와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나크워 점령이 스반토풀크 2세와 오도니치의 진정한 의도를 가리는 것에 불과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다른 버전도 있지만, 자료 부족과 모호성으로 인해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가 레셰크 1세의 죽음에 연루되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범죄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은 스반토풀크 2세가 아닌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가 나중에 레셰크의 아들 볼레스와프와 미망인 그르지미스와바 공작 부인의 보호를 맡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공작 부인이 남편의 살해범에게 아들을 맡기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8. 크라쿠프 왕위 복귀
가사와 학살 사건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는 곧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다음 해인 1228년 초, 정확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실레지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조카 오도니치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라스코노기는 크라쿠프 왕좌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소폴란드로 향했다. 그는 1217년 레셰크 1세 백색공과 맺었던 상호 계승 협약을 근거로 내세웠다. 당시 크라쿠프 공작 레셰크 1세는 한 살 된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남겼지만, 아들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다른 누군가가 크라쿠프를 통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레셰크 1세의 형제인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 역시 소폴란드에 나타나 크라쿠프 왕위를 주장했다.
새로운 폴란드 대공을 공식적으로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크라쿠프 주교 이보 오드로봉시, 크라쿠프의 보예보드(voivode, 총독)인 마레크 z 브제지니체, 크라쿠프 총독 및 산도미에르츠의 보예보드인 파코슬라프 더 올드를 비롯한 유력 귀족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의 후보 자격은 거부되었고,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가 폴란드 대공으로 선출되었다.
9. 치에니아 회의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가 대공으로 선출된 것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치에니아 페르브샤에서 열린 회의에서 두 개의 중요한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첫 번째 문서는 대폴란드 공작이 교회의 기존 특권을 보장하고 나아가 확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문서는 레셰크 1세 백공의 어린 아들인 볼레스와프 5세에 관한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볼레스와프 5세의 후견인이 되고,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약속했다. 동시에 그는 소폴란드 지역의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왕위 계승이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크라쿠프 지역만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산도미에시 지역에 대한 통치 권한은 볼레스와프 5세의 어머니인 그르지미스와바에게 넘어갔다. 다만, 산도미에시는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대공의 통제하에 있었다.
10. 헨리크 1세의 크라쿠프 총독 선출
정치 상황은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때 패배시켜 투옥했던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Płock으로 탈출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오도니치의 새로운 동맹이 된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의 예상되는 침략에 대비할 여력이 부족해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크라쿠프 시민들(특히 오드로봉 가문과 그리피치 가문 주도)의 동의를 얻어 실레지아 공작 헨리 1세 수염공을 크라쿠프의 통치자로 선택했다. 다만, 헨리크 1세에게는 총독이라는 칭호만을 부여했다. 이러한 결정은 헨리크 1세가 제공한 군사적 지원에 대한 대가였을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브와디스와프 3세는 헨리크 1세에게 대폴란드 지역에 대한 상속권을 약속했는데, 이는 이전에 치에니아 회의에서 볼레스와프 5세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던 약속을 어기는 것이었다.
11. 콘라트 1세 및 오도니치와의 전쟁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는 소폴란드를 공격했으나, 수염공 헨리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헨리 2세 경건공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헨리 2세는 미엔지보르쳄, 스카와, 브로치에르즤 전투에서 마조비아 공작인 콘라트 1세를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년 뒤 군사 행동을 재개했으며, 스피트코비체 회의에서 헨리 1세를 사로잡아 감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레셰크 백공의 반대 세력은 힘을 잃었고, 콘라트 1세는 소폴란드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아내인 안데흐스 공작부인 헤드비지의 노력 덕분에 헨리 1세를 풀어주기는 했다. 콘라트 1세는 곧바로 조카 볼레스와프 5세에게서 산도미에시 공작령을 빼앗아 자신의 아들 볼레스와프에게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라트 1세는 동맹인 오도니치와 함께 라스코노기를 상대로 직접 전쟁을 시작했다. 콘라트 1세는 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칼리시 포위에 실패했다. 라스코노기는 북쪽에서 오도니치와 싸우느라 제때 칼리시를 지원하지 못했지만, 견고한 성벽 덕분에 실레시아 공작은 결국 물러나야 했다.
12. 패배와 도피
브와디스와프 3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패배하여 라치부르츠의 공작 오폴레의 카시미르 1세의 궁정으로 도망쳐야 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를 이용하여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와 동맹을 갱신하고,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헨리크 1세에게 공식적으로 양도했다.
13. 대폴란드 회복 시도
1231년 봄, 헨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와 함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에 대항하여 대폴란드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포즈난 주교 파베우와 대폴란드의 귀족 가문인 나우치우프, 워벤지우프, 니아우쿠프 등의 지원을 받아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니에즈노 성벽 앞에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14. 죽음과 계승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의 마지막 정치 활동은 조카 오도닉에 대한 원정이었다. 중세 자료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정보 출처에 의해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시토회 프랑스 수사 알베릭 드 트루아퐁텐의 기록에 의하면, 거의 70세였던 라스코노기는 시로다 실롱스카에서 자신이 강간하려 했던 독일 소녀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라스코노기가 아닌 그의 조카 오도닉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얀 덩고시는 라스코노기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의 신하들이 그의 "매춘부와의 간통" 때문에 그를 경멸했다고 기록하며 그의 부적절한 행실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을 남겼다.
라스코노기의 사망 날짜는 일반적으로 1231년 11월 3일로 받아들여진다. 얀 덩고시가 제시한 8월 18일이라는 날짜도 있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아 역사가들에게 거부되었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공작이 망명 중에 사망했다는 정보를 근거로 실레지아, 아마도 라치부시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한다.[3] 다른 이들은 후기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루빈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묻혔다고 본다.[4]
그가 사망하자, 상속 조약에 따라 헨리크 1세가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모두에 대한 주요 계승 청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들에 대한 그의 권리는 곧바로 도전을 받았고, 그는 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참조
[1]
간행물
Uzupełnienia do genealogii Piastów
1958
[2]
서적
Władysław Laskonogi, książę wielkopolski 1202–1231
Poznań
1998
[3]
서적
Władysław Laskonogi, książę wielkopolski 1202–1231
Poznań
1998
[4]
서적
Władysław Laskonogi, książę wielkopolski 1202–1231
Pozna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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