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희
1. 개요
창희는 후한 말의 인물로, 여러 차례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여포, 유비, 조조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맺었으며, 장패 등과 함께 태산군에서 활동했다. 198년 여포에게 귀부했으나, 이후 유비를 도왔고, 조조에게 항복과 배반을 반복했다. 206년 다시 조조에게 반역했으나 우금에게 항복했고, 우금은 창희를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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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년 사망 -
태사자
태사자는 후한 말기의 무장으로, 자는 자의이며,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뛰어난 무예와 용맹을 떨쳤으며, 공융을 구원하고 손책에게 귀순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손책 사후에는 손권 밑에서 오나라의 장수로 공을 세웠다. -
206년 사망 -
고간 (후한)
고간은 후한 말 원소의 외조카로, 원소 사후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켜 패배 후 살해당했으며, 재능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상황 판단 미숙과 잦은 변절로 평가가 엇갈린다. -
후한말의 군벌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후한말의 군벌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사형된 사람 -
전봉준
전봉준은 조선 말기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로, 부패한 관리 처벌과 일본 세력 축출 등을 주장하며 농민 운동을 이끌었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혁명 정신은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
사형된 사람 -
임꺽정
임꺽정은 조선 명종 시기에 양주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관아를 습격하고 빈민을 구제한 의적으로,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힌다.
2. 생애
창희는 198년 여포(呂布)가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서주에서 내쫓았을 때 장패(臧覇) 등과 함께 여포에게 항복했다. 이후 유비가 서주를 차지했을 때 창희는 유비를 도왔으나, 200년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패배했다.
201년 조조는 하후연(夏候淵)과 장료(張遼)를 보내 산동성 지역인 동해(東海)에서 버티고 있던 창희를 공격하게 했으나, 창희는 굳게 방어했다. 군량이 떨어져 회군하려 할 때, 장료가 창희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시켰다. 조조는 창희를 받아들이고 본거지로 돌려보냈다.
206년, 창희는 다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조는 우금(于禁)과 장패를 보내 토벌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창희는 우금에게 항복했지만, 우금은 "포위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되지 않는다"는 법에 따라 창희를 처형했다.
2.1. 초기 활동과 여포와의 관계
198년 여포(呂布)가 소패(小沛)를 공격하여 유비(劉備)를 서주에서 내쫓았을 때, 창희는 장패(臧覇) 등과 함께 여포에게 귀부했다. 여포가 죽은 후, 유비는 조조에게 가 있다가 근거지를 잃고 하북으로 도망가는 원술(袁術)을 공격했으나 원술은 유비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 유비는 함께 온 조조의 장수 주령(朱靈)을 돌려보낸 후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서주를 차지했다. 이때 창희는 유비를 도왔으나, 200년 봄 조조가 서주를 공격했을 때 조조군에게 패배하였다.
199년, 유비가 하비에서 조조에게 반역했을 때, 창희는 동해군에서 유비에게 호응했다.
201년 조조는 하후연(夏候淵)과 장료(張遼)를 보내 동해(東海: 산동성 지역)에서 버티고 있던 창희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창희가 굳게 지켰기 때문에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윽고 군량이 떨어져 회군하게 되자, 장료는 하후연에게 창희를 설득해 보겠다고 하고 직접 창희의 본거지로 찾아갔다. 장료는 창희를 설득해서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청하고, 또 창희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했다. 장료에게 설득당한 창희는 장료를 따라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창희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본거지로 돌려보냈다.
관도 전투 이후, 창희는 다시 조조에게 반역했고, 장료·하후연은 수개월에 걸쳐 이를 공격했으나 격파하지 못했다.
2.2. 조조와의 항복과 배반
198년 여포(呂布)에게 유비(劉備)가 패배하자, 창희는 장패(臧覇)등과 함께 여포에게 귀부했다. 이후 유비는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원술(袁術)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여 서주를 차지했다. 이때 창희는 유비를 도왔으나, 200년 봄 조조의 서주 공격으로 패배하였다.
201년 조조는 하후연(夏候淵)과 장료(張遼)에게 동해(東海: 산동성 지역)의 창희를 공격하게 했다. 창희의 방어로 성과가 없자 군량 부족으로 회군하려던 중, 장료가 창희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순시켰다. 조조는 창희의 귀순을 수용하고 본거지로 돌려보냈다.
206년 창희는 다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조는 우금(于禁)과 장패에게 토벌을 명했다. 궁지에 몰린 창희는 우금과의 친분으로 항복했으나, 우금은 "포위된 후 항복한 자는 사면되지 않는다"는 법을 들어 직접 창희를 처형했다.
2.3. 최후
206년 창희는 까닭이 알려지지 않은 채 다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조는 우금과 장패를 보내 토벌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창희는 우금과의 옛 교분을 생각하고 조조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우금은 "법에 따르면, 포위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되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며 창희를 처형했다. 조조는 이것을 듣고 우금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다만 『삼국지』 주석가 배송지는 죄수로서 조조에게 호송하여 만일의 대사면을 기대했어야 했다고 우금의 행위를 비난했다.
3. 일화
제갈량의 건흥 5년(226년) 11월 상소문에 따르면, 조조가 5번이나 공격했지만 창희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우금과 창희는 친구 사이였으며, 우금이 창희를 처형할 때 직접 만나 작별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내게 오지 않고 우금에게 간 것은 운명이었던가"라고 탄식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창희는 손관, 오돈, 윤례와 함께 태산의 산적으로 등장한다. 다른 산적 두령들과 함께 소관(蕭關)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3만을 이끌고 여포를 치러 쳐들어오던 조조군을 공격했으나, 허저의 용맹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여포가 죽고 그의 세력이 멸망한 후, 조조는 장패를 귀순시키고 장패로 하여금 태산의 다른 장수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조조에게 귀부했으나 창희만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나오며, 그 뒤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포 멸망 후, 손관 등이 조조에게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희는 항복하지 않고 독립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