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연
1. 개요
하후연은 패국 초현 출신으로 조조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그는 조조가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합류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관도 전투, 황건적 토벌, 서황과 함께 태원에서의 반란 진압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군수 물자 수송을 제때 수행하여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관중 전투와 한중 공방전에서도 활약했으나,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하후연은 용맹함으로 칭찬받았지만, 조조는 그의 자만을 경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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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하후연 |
|---|---|
| 로마자 표기 | Hahu Yeon |
| 자(字) | 묘재(妙才) |
| 로마자 표기 | Myojae |
| 시호 | 민후(愍侯) |
| 로마자 표기 | Minhu |
| 작위 | 박창정후(博昌亭侯) |
|---|---|
| 직위 | 정도호장군(征西將軍) |
| 임기 시작 | 216년 |
| 임기 종료 | 219년 |
| 군주 | 헌제 |
| 승상 | 조조 |
| 기타 직위 | 도호장군 (都護將軍, 대행) |
| 임기 시작 | 215년 |
| 임기 종료 | 216년 |
| 군주 | 헌제 |
| 승상 | 조조 |
| 기타 직위 | 호군장군 (護軍將軍, 대행) |
| 임기 시작 | ? |
| 임기 종료 | 215년 |
| 군주 | 헌제 |
| 승상 | 조조 |
| 출생지 | 예주패국 초현 |
|---|---|
| 사망일 | 219년 1월 (음력) 또는 219년 2월 (양력) |
| 사망지 | 한중군 정군산 |
| 사인 | 전사 |
| 가족 | 하후돈(사촌) 하후씨(조카딸) |
| 자녀 | 하후형 하후패 하후징 하후위 하후융 하후휘 하후화 |
| 별명 | 백지장군(白地將軍) |
|---|---|
| 관련 활동 | 동관 전투 농우 평정 한중 공방전 |
| 주요 적수 | 마초 황충 |
| 소속 | 조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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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저우시 출신 -
장자
장자는 중국 전국 시대의 철학자로, 《장자》를 저술하여 개인의 자유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했으며 노장사상으로 도교에 영향을 미쳤다. -
보저우시 출신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2세기 출생 -
구수왕
구수왕은 백제의 제6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말갈,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로 패배하고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반왕을 아들로 두었으나 비류왕과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고, 그의 치세는 백제 초기 왕권 경쟁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시기로 평가된다. -
2세기 출생 -
루키아노스
루키아노스는 로마 제국 시대에 활동한 시리아 출신 작가로, 다양한 형식을 통해 가벼운 문명 비판과 풍자를 담았으며,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 사상을 드러내고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19년 사망 -
관우
관우는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자 정치인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로서 유비를 보좌하며 뛰어난 무예와 충절로 이름을 알렸으나, 손권의 계략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강직함과 자만심이 정치적 판단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
219년 사망 -
손교
손교는 후한 말 무장으로 손견의 동생 손정의 아들이자 손책, 손권과 친족 관계이며, 호군교위 임명 후 유수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형주 공략전에서 관우를 사로잡는 데 기여했으나 직후 병사하여 그의 공로로 아들이 단양후에 봉해졌다.
2. 생애
조조가 고향에서 죄를 지었을 때, 하후연이 이를 대신 짊어지려 했으나 조조가 용서를 빌어 면하게 되었다. 조조가 거병하자 별부사마와 기도위가 되어 그를 따랐으며, 진류태수와 영천태수를 지냈다. 연주와 예주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하후연의 가족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죽은 남동생의 고아 딸을 위해 자신의 막내 아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190년, 조조가 동탁 토벌전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하후연은 조조에 합류하여 별부사마와 기도위를 지냈다. 이후 진류군과 영천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관도 전투에서 하후연은 독군교위로서 연주, 예주, 서주로부터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조조군은 식량 보급이 부족했지만, 하후연은 제때 물자를 전달하여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1년, 장료와 함께 동해군의 창희를 포위 공격했으나 몇 달간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량이 부족해졌다. 회군하기 전에 장료가 창희와 단둘이 만나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206년 창희가 다시 반기를 들자 우금과 함께 진압하고 전군교위가 되었다. 하후연은 전투에서 부대를 빠르게 움직여 적을 기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조조군에는 "육군 정돈사 하후연은 3일 만에 500 리를 가고 6일 만에 1,000 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207년, 황건적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가 제남과 낙안을 공격하자, 태산, 제, 평원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그 식량을 확보하였다.
209년, 행령군에 임명되어 여강의 뇌서를 격파했다.
211년, 정서호군을 맡아 서황을 지휘하여 태원의 도적 상요(商曜)를 죽였다. 그해 3월(음력), 조조는 종요와 하후연에게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 관중 지역의 세력들은 조조가 자신들을 노린다고 판단하여 동관(潼關)으로 진격했다(동관 전투). 하후연은 위남(渭南)에서 이들과 싸웠고, 서황, 주령과 함께 유미현(隃麋縣)과 견현(汧縣)의 저족을 격파했다. 10월에는 안정에서 조조를 만나 양추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212년, 조조가 업으로 돌아가면서 하후연을 호군장군으로 삼아 장합, 서황, 주령, 노초와 함께 장안에 주둔시켰다. 하후연은 남산(南山)에서 유웅(劉雄)을, 부(鄜)에서 양흥을 격파하고 박창정후에 봉해졌다.
마초가 기(冀)성을 포위하자, 하후연은 구원하러 갔지만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양주자사 위강이 항전하다가 죽었다(8월(음력)). 마초가 200여 리를 나와 요격하고 견저까지 합세했기에 하후연은 퇴각하였다. 214년, 마초가 다시 기산(祁山)을 포위하자,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 9월, 조구(趙衢)와 윤봉 등이 마초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이에 동참한 강서(姜敍)가 노성(鹵城)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마초가 출군한 사이 조구 등이 기성을 닫아걸고 그 처자를 살해하였다. 갈 곳이 없어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조조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지만, 하후연은 업과의 왕복 거리가 4,000리이니 필히 늦을 것이라며 바로 출진하였다. 장합에게 5,000명으로 선봉을 맡기고 자신도 뒤따랐다. 마초는 이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
하후연은 현친현(顯親縣)에 있던 한수를 잡고자 약양성(略陽城)까지 추격하였다. 장수들은 한수 아니면 흥국(興國)의 저 중 하나를 이대로 치자고 하였다. 하후연은 둘 다 공성으로는 이기기 어렵다 보고 장리(長離)를 공격하여 한수를 야전으로 꾀어냈다. 한수에 호응한 강족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를 공격하면 그 강족들이 각자의 가족을 구하러 갈 것이었다. 경무장한 군대로 장리를 습격하니 과연 한수도 흩어지려는 강족을 도와 장리로 나왔다. 그 숫자에 진지를 구축하여 대적하자는 안도 있었지만 1,000리에 걸쳐 거듭 싸워온 병사들이 더 피폐해질 것이라며 바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약양과 흥국마저 휩쓸었다. 흥국저왕 아귀(阿貴)는 죽고 한수는 서평으로, 백항저왕(白項―) 천만(千萬)은 파촉으로 도주하고 남은 자들은 항복하였다. 고평(高平)의 저각(屠各)까지 무찌르고 그 양곡, 소, 말들을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로 가절을 받았다.
10월(음력), 자칭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 송건이 30여 년 동안 다스리던 부한현(枹罕縣)을 1달 만에 함락하고 그와 그 관원들을 참수했다. 장합을 하관(河關)을 경유하여 소황중(小湟中)으로 보내니 하서의 강족들이 모두 투항하였다. 이로써 농우가 평정되었다. 215년 식읍 300호를 더해 모두 800호가 되었다.
216년, 한나라 조정은 하후연에게 그의 제후령에 과세 대상 가구 300가구를 추가로 하사하여 총 800가구가 되었다. 이후 하후연은 무도의 저와 강 부족을 공격하여 하변(下辯)에서 10만 석 이상의 곡물을 빼앗았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군벌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군으로 진격했을 때, 하후연은 양주의 모든 무관과 귀족들을 이끌고 휴정(休亭)에서 조조를 만났는데, 강족과 부족 수장들은 조조와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하후연을 두려워했다.
장로는 양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조에게 항복했다. 하후연은 임시 도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장합과 서황의 도움을 받아 파군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조는 나중에 예(현재의 한단시, 허베이성)로 돌아갔고, 하후연 등을 남겨 새로 정복한 한중군을 방어하게 했으며, 하후연은 정서장군에 임명되었다.
217년, 유비는 215년에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장악하고, 한중을 조조로부터 빼앗기 위해 공세를 시작했다. 유비의 군대가 양평관(陽平關, 현재의 닝창현, 산시성)에 이르자, 하후연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에게 저항했고, 양측은 거의 1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219년 2월 또는 3월의 어느 날 밤, 유비는 하후연의 진영 주변에 설치된 가시 울타리에 불을 질렀다. 이에 하후연은 장합을 보내 진영 동쪽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남쪽을 방어했다. 장합은 유비에게 공격받았지만 적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고, 하후연은 자신의 병력 일부를 장합에게 보냈다. 유비의 장군 황충은 하후연의 군대보다 전투 경험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후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고, 하후연은 전투 중 사망했다.
하후연은 시호 "민후"(愍侯)를 받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동정심 있는 후작"을 의미한다.
2.1. 초기 생애와 경력
조조가 고향에 있을 때 저지른 죄를 대신 짊어지려 했는데, 조조가 용서를 빌어 면하였다. 조조가 거병하자 별부사마(別部司馬)와 기도위가 되어 따랐고, 진류태수·영천태수를 지냈다. 연주와 예주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하후연의 가족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죽은 남동생의 고아 딸을 위해 자신의 막내 아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190년, 조조가 동탁 토벌전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하후연은 조조에 합류하여 별부사마와 기도위를 지냈다. 이후 진류군(현재의 허난성 카이펑시 일대)과 영천군(현재 허난성 중부)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관도 전투에서는 독군교위(督軍校尉)로서 연주·예주·서주로부터 군량을 조달하였다.
2.2. 관도 대전과 후방 지원
조조가 관도 전투에서 원소와 격돌했을 때, 하후연은 독군교위(督軍校尉)로서 연주, 예주, 서주로부터 군량을 조달하였다. 당시 조조군은 식량 보급이 부족했지만, 하후연은 제때 물자를 전달하여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1년 (건안 6년), 장료와 함께 동해군의 창희를 포위 공격했으나 몇 달간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다. 회군하기 전에 장료가 창희와 단둘이 만나 설득하니 투항하였다.
206년 창희가 다시 반기를 들어 우금과 같이 진압하고 전군교위(典軍校尉)가 되었다. 하후연은 전투에서 부대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적을 기습했다. 조조의 군대에는 이를 묘사하는 말이 있었다. "육군 정돈사 하후연은 3일 만에 500 리를 가고 6일 만에 1,000 리를 간다."
207년, 황건적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가 제남과 낙안을 치므로 태산, 제, 평원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그 식량을 확보하였다.
209년, 행령군(行領軍)에 임명되어 여강의 뇌서를 격파했다.
2.3. 창희 토벌
조조가 거병하자 별부사마(別部司馬)와 기도위가 되어 따랐으며, 진류태수·영천태수를 지냈다. 관도 전투에서는 독군교위(督軍校尉)로서 연주·예주·서주로부터 군량을 조달하였다.
201년(건안 6년), 장료와 함께 동해군의 창희를 포위 공격했으나 몇 달간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다. 회군하기 전에 장료가 창희와 단둘이 만나 설득하니 투항하였다. 206년 창희가 다시 반기를 들어 우금과 같이 진압하고 전군교위(典軍校尉)가 되었다.
황건적 서화(徐和)와 사마구(司馬俱)가 제남과 낙안을 공격하자, 태산·제군·평원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고 그 식량을 확보하였다. 209년 행령군(行領軍)에 임명되어 여강의 뇌서를 격파했다.
하후연은 전투에서 부대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적을 기습했다. 조조의 군대에는 "육군 정돈사 하후연은 3일 만에 500 리를 가고 6일 만에 1,000 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2.4. 황건적 토벌
206년, 창희(昌狶중국어)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우금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조조는 하후연에게 우금과 함께 다시 창희를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이들은 반란군을 격파하고 10개 이상의 적 수비대를 점령했으며, 창희는 우금에게 항복했다. 하후연은 이 공으로 전군교위로 임명되었다. 하후연은 빠른 부대 이동으로 유명했으며, 적을 기습하는 데 능했다. 당시 조조군에는 "전군교위 하후연은 3일 만에 500 리를 가고 6일 만에 1,000 리를 간다"는 말이 있었다.
207년, 황건적 잔당이 제남(현재의 장추시 산둥성 인근)과 낙안(현재의 산둥성)에서 서화(徐和중국어)와 사마구(司馬俱중국어)의 지휘 아래 도시를 공격하고 관리들을 살해했다. 하후연은 태산(태산 인근), 제, 평원의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서화를 죽였으며, 이 지역의 여러 현을 평정했다. 그는 또한 적의 식량을 징발하여 자신의 부대에 분배했다.
2.5. 여강 평정
209년, 적벽 전투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조조는 하후연에게 안후이성 여강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뇌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뇌서를 격파한 후, 하후연은 임시 정서호군(征西護軍)으로 임명되었고, 서황과 함께 태원군에서 반란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20개 이상의 적 진영을 정복하고 반란 수장 상요(商曜)를 죽였으며, 반란 기지에서 인구를 학살했다.
2.6. 관중 전투와 서방 평정
211년, 하후연은 정서호군(征西護軍)을 맡아 서황을 지휘하여 태원의 도적 상요(商曜)를 죽였다. 그해 3월(음력), 조조는 종요와 하후연에게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 관중 지역의 세력들은 조조가 자신들을 노린다고 판단하여 동관(潼關)으로 진격했다(동관 전투). 하후연은 위남(渭南)에서 이들과 싸웠고, 서황, 주령과 함께 유미현(隃麋縣)과 견현(汧縣)의 저족을 격파했다. 10월에는 안정에서 조조를 만나 양추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212년, 조조가 업으로 돌아가면서 하후연을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아 장합, 서황, 주령, 노초와 함께 장안에 주둔시켰다. 하후연은 남산(南山)에서 유웅(劉雄)을, 부(鄜)에서 양흥을 격파하고 박창정후(博昌亭侯)에 봉해졌다.
마초가 기(冀)성을 포위하자, 하후연은 구원하러 갔지만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양주자사 위강이 항전하다가 죽었다(8월(음력)). 마초가 200여 리를 나와 요격하고 견저까지 합세했기에 하후연은 퇴각하였다. 214년, 마초가 다시 기산(祁山)을 포위하자,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 9월, 조구(趙衢)와 윤봉 등이 마초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이에 동참한 강서(姜敍)가 노성(鹵城)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마초가 출군한 사이 조구 등이 기성을 닫아걸고 그 처자를 살해하였다. 갈 곳이 없어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가 조조의 지시를 기다리자고 했지만, 하후연은 업과의 왕복 거리가 4,000리이니 필히 늦을 것이라며 바로 출진하였다. 장합에게 5,000명으로 선봉을 맡기고 자신도 뒤따랐다. 마초는 이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
하후연은 현친현(顯親縣)에 있던 한수를 잡고자 약양성(略陽城)까지 추격하였다. 장수들은 한수 아니면 흥국(興國)의 저 중 하나를 이대로 치자고 하였다. 하후연은 둘 다 공성으로는 이기기 어렵다 보고 장리(長離)를 공격하여 한수를 야전으로 꾀어냈다. 한수에 호응한 강족들의 가족이 있는 장리를 공격하면 그 강족들이 각자의 가족을 구하러 갈 것이었다. 경무장한 군대로 장리를 습격하니 과연 한수도 흩어지려는 강족을 도와 장리로 나왔다. 그 숫자에 진지를 구축하여 대적하자는 안도 있었지만 1,000리에 걸쳐 거듭 싸워온 병사들이 더 피폐해질 것이라며 바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약양과 흥국마저 휩쓸었다. 흥국저왕 아귀(阿貴)는 죽고 한수는 서평으로, 백항저왕(白項―) 천만(千萬)은 파촉으로 도주하고 남은 자들은 항복하였다. 고평(高平)의 저각(屠各)까지 무찌르고 그 양곡, 소, 말들을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로 가절(假節)을 받았다.
10월(음력), 자칭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 송건이 30여 년 동안 다스리던 부한현(枹罕縣)을 1달 만에 함락하고 그와 그 관원들을 참수했다. 장합을 하관(河關)을 경유하여 소황중(小湟中)으로 보내니 하서의 강족들이 모두 투항하였다. 이로써 농우가 평정되었다. 215년 식읍 300호를 더해 모두 800호가 되었다.
2.7. 한중 공방전과 정군산 전투
216년, 한나라 조정은 하후연에게 그의 제후령에 과세 대상 가구 300가구를 추가로 하사하여 총 800가구가 되었다. 이후 하후연은 무도의 저와 강 부족을 공격하여 하변(下辯)에서 10만 석 이상의 곡물을 빼앗았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군벌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군으로 진격했을 때, 하후연은 양주의 모든 무관과 귀족들을 이끌고 휴정(休亭)에서 조조를 만났는데, 강족과 부족 수장들은 조조와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하후연을 두려워했다.
장로는 양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조에게 항복했다. 하후연은 임시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장합과 서황의 도움을 받아 파군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조는 나중에 예(현재의 한단시, 허베이성)로 돌아갔고, 하후연 등을 남겨 새로 정복한 한중군을 방어하게 했으며, 하후연은 정서장군에 임명되었다.
217년, 조조의 경쟁자였던 유비는 215년에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장악하고, 한중을 조조로부터 빼앗기 위해 공세를 시작했다. 유비의 군대가 양평관(陽平關, 현재의 닝창현, 산시성)에 이르자, 하후연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에게 저항했고, 양측은 거의 1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219년 2월 또는 3월의 어느 날 밤, 유비는 하후연의 진영 주변에 설치된 가시 울타리에 불을 질렀다. 이에 하후연은 장합을 보내 진영 동쪽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남쪽을 방어했다. 장합은 유비에게 공격받았지만 적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고, 하후연은 자신의 병력 일부를 장합에게 보냈다. 유비의 장군 황충은 하후연의 군대보다 전투 경험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후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했고, 하후연은 전투 중 사망했다.
하후연은 시호 "민후"(愍侯)를 받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동정심 있는 후작"을 의미한다.
3. 평가
하후연은 매우 빠르게 진군하여 언제나 적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군중에서는 '사흘에 5백 리, 엿새에 1천 리를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조는 농우를 평정했을 때 "송건을 단번에 멸하고 관서를 호랑이처럼 내달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공자도 안회가 더 낫다고 했다."라며 자신보다 낫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장군이라면 겁을 먹고 약해져야 할 때도 있다. 용맹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물론 용맹함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지략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오직 패기만으로는 일개 필부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며 항상 주의도 주었다. 하후연은 본래 용병에 능하지 못하여 군중에서도 백지장군(白地―)이라 불렸다. 총대장이 최전방에서 직접 적과 싸우는 것도 부당한데, 결국 녹채를 보수하다 전사하였다. 유비 역시 장합은 꺼린 반면 하후연은 쉽게 여겼다. 유비는 총대장인 하후연을 죽였음에도 "마땅히 우두머리를 잡아야 하지만 이는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4. 가족 관계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하후연은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용장으로 등장한다. 조조가 동작대를 완공한 기념으로 연 연회에서 조휴, 문빙, 조홍, 장합과 함께 활 솜씨를 뽐냈다. 장로를 정벌할 때 선봉으로 가던 중 양앙과 양임의 기습에 패하기도 했으나, 다시 안개 속에서 습격하여 양평관 점령에 공을 세우고 창기와 양임을 베었다. 정군산 전투에서는 장합의 만류에도 직접 출전했다가 황충과 법정의 계략에 전사한다.
하후연은 코에이(Koei)의 비디오 게임 진・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게임에서 그는 하후돈의 형제로 등장하며, 다소 어리숙하지만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코에이가 제작한 전략 게임 시리즈인 삼국지의 모든 시리즈와 실시간 전략 게임 결전 2에도 등장한다.
토탈 워: 삼국에서도 하후연은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조조의 휘하 장수로 게임에 중요하게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