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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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령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원소 휘하에서 조조에게 귀순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조조의 서주 공격에 원군으로 참여하여 조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이후 유비, 마초, 장로 등을 토벌하는 데 참여했다.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수후에 봉해지고 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조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석정 전투에서 조휴를 구원하기도 했으나, 이후 병으로 사망하여 위후의 시호를 받았다. 정사에서는 서황 다음가는 명성을 얻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휘하에서 원술 토벌에 참여하는 등 비교적 비중이 적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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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령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령 |
원어 이름 | 朱靈 |
로마자 표기 | Zhū Líng |
자 | 문박 (文博, Wénbó) |
작위 | 고당정후 (高唐亭侯) |
시호 | 위후 (威侯)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기주청하국 추현 (현재의 더저우, 산둥성) |
사망 | 생년 미상 |
직업 | 군인 |
관직 | |
후장군 (後將軍) | 약 220년 ~ ? |
소속 | |
초기 소속 | 원소 |
이후 소속 | 조조 → 조비 → 조예 |
2. 생애
주령은 청하국 수현 출신으로,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다. 193년 또는 194년경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원소의 명으로 조조를 도왔는데, 이때 조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8] 199년에는 유비와 함께 원술을 요격했고, 200년 관도 전투를 시작으로 조조가 원소와 그의 후계자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 참여했다.
208년, 형주를 점령한 조조에 의해 조엄 휘하의 7개 부대 중 하나를 지휘하게 되었고, 적벽 전투에도 참전했다. 211년 퉁관 전투에서는 서황과 함께 황하의 보반 도하 지점에 교두보를 구축하여 조조의 승리에 기여했다. 212년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간 후에는 장안에 남아 하후연의 부하로 복무하며 군벌들을 공격했고, 215년에는 무도군에서 저족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조조의 한중군 침공을 위한 길을 열었다.
주령은 많은 공을 세웠지만, 조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지 않고 우금의 지휘 아래 두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주령은 불만을 품지 않고 조조를 위해 맹렬히 싸웠으며, 진수가 오대장군 중 한 명으로 꼽은 서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조위를 건국한 후, 주령은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되고 수후(鄃侯)에 봉해지려 했으나, 고당정후(高唐亭侯)를 요청하여 봉해졌다. 228년, 석정 전투에서 조휴가 패배하자 그를 구출하기도 했다. 주령은 석정 전투 이후 알 수 없는 해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시호로 "위후"(威侯중국어)가 추증되었다.
2. 1. 원소 휘하에서의 행적
원소를 섬겼다.같은 군 사람인 계옹(季雍)이 원소를 배반하고 공손찬(公孫瓚)에게 가자, 원소는 주령으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주령의 가족들은 성 안에 있었는데, 공손찬은 주령의 모친과 동생을 인질로 삼았다. 주령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그리고는 계옹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았으나,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초평 4년(193) 혹은 흥평 원년(194),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토벌했을 때, 원소는 주령에게 세 개의 영채를 이끌고 조조를 구원하도록 파견했고, 주령은 전공을 세웠다.[8] 그 후, 다른 부장들은 원소의 밑으로 귀환했지만, 주령은 조조의 그릇에 반하여 그의 가신이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 휘하의 병사들은 그를 따랐고, 병졸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행적
건안 4년(199년), 조조는 유비에게 원술을 토벌하게 하기 위해 주령과 노초를 부하로 두고 파견했지만, 전투 전에 원술은 병사했다. 주령 등은 서주에 유비를 남겨두고 그대로 조조에게 귀환했다.[1]건안 10년경, 기주를 평정한 조조는 주령에게 기주병 5000명과 기병 1000명을 맡겨 허도의 남쪽을 지키게 했다. 조조는 기주병의 처리에 대해 주령에게 충고했지만, 양책(陽翟)[9]에 이르자 중랑장(中郎將) 정앙이 모반했다. 주령은 즉시 그를 참수하고 조조에게 사죄했지만, 조조는 등우의 고사를 인용하여 특별히 죄를 묻지 않았다.
건안 13년,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의 7명의 장군은 장릉 태수 겸 도독호군이 된 조엄에게 통괄되었다.[2]
건안 16년 가을 7월, 조조의 마초 토벌에 종군했다. 이때 조조는 몰래 서황과 주령에게 명하여 밤중에 포판진(蒲阪津)을 건너게 하여 황하 서쪽에 진영을 만들게 했다. 이 때문에 마초는 황하 서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3]
하후연이 유미, 견의 저족을 토벌할 때, 그 부하로서 종군했다. 건안 17년 1월, 조조가 업으로 귀환하자, 하후연의 부하로서 장안에 주둔하여 남산의 유웅을 격파하고 그 병사를 항복시켰다.[4]
건안 20년 봄 3월, 조조의 장로 토벌에 종군했다. 조조가 무도군 방면으로 향하려 하자, 저족에게 진로가 막혔기 때문에 장합과 주령에게 명하여 이를 격파하게 했다.[3]
주령은 조조로부터 항상 미움을 받았다. 그렇기에 자세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조조는 우금에게 주령의 군영을 빼앗게 하고, 주령 자신은 우금의 부장으로 삼았다. 이때 우금이 직접 와서 조조의 명령을 집행했지만, 주령과 그 부하들은 우금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대로 복종했다.
2. 3. 위 건국 후의 행적
황초 원년(220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주령은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수후(鄃侯)에 봉해졌고, 후장군(後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식읍이 늘었다. 조비는 주령의 위광이 주 선왕의 명신인 방숙(方叔)과 소호(邵虎)보다 위이며, 공적은 주발과 관영보다도 크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주령에게 원하는 땅을 주겠다고 하였고, 주령이 고당(高唐) 땅을 원하자 그를 고당정후(高唐亭侯)에 봉하였다.[5]태화 3년(229년) 가을, 조휴, 가규와 함께 오 정벌에 종군하였다. 조휴는 석정에서 패하였고, 주령이 이를 구원하였다.[5] 주령은 이후 사망하였고, 시호로 위후(威侯)가 추증되었다.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이미 사망한 주령은 다른 공신들과 함께 조조의 묘에 배향되었다.[6]
3. 평가
주령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조조 휘하에서 활약하며 관도 대전, 적벽 대전, 동관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조위 건국에 기여했다. 《문제기집해》(文帝紀集解중국어)에서는 주령의 전투 능력을 진수가 조조 휘하의 오대장군 중 한 명으로 꼽은 서황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만큼 활약하지 못한다. 사서의 기록대로 노소(사서의 노초)와 함께 유비의 원술 토벌에 종군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유비의 지시에 따라 군사를 남겨둔 채 노소와 단둘이 허도로 돌아가 조조의 노여움을 사 처형당할 뻔한다. 순욱이 간언하여 두 사람은 용서받는다. 그 후 마초 토벌에도 참여하여, 사서의 기록대로 서황과 함께 황하 서쪽에 진을 친다. 이를 마지막으로 『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蜀書先主伝
[2]
서적
三国志 魏書趙儼伝
[3]
서적
三国志 魏書武帝紀
[4]
서적
三国志 魏書夏侯淵伝
[5]
서적
三国志 魏書満寵伝
[6]
서적
三国志 魏書斉王紀
[7]
간행물
상존호비(上尊號碑)
[8]
문서
혹은 흥평(興平) 원년(194년)으로 보기도 한다.
[9]
문서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의 속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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