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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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포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으로 '비장'으로 불리며,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동탁 휘하에서 정원을 죽이고 동탁을 섬겼으나, 왕윤의 계략에 동참하여 동탁을 암살했다. 이후 군웅할거 시대에 여러 세력을 전전하며 조조와 대립하다가 하비에서 패하여 처형당했다. 여포는 배신과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대중문화에서는 그의 용맹함과 파란만장한 삶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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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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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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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여포 (呂布) |
자 | 봉선 (奉先) |
별명 | 비장 (飛將) |
시호 | 없음 |
묘호 | 없음 |
출생지 | 병주 오원군 구원현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시) |
사망일 | 199년 2월 7일 |
사망지 | 서주 하비군 |
봉작 | 온후 |
칭호 및 직책 | 좌장군 · 온후 |
로마자 표기 | Lǚ Bù |
관직 | |
초기 관직 | 주부 → 기도위 |
주요 관직 | 중랑장 → 분위장군 혹은 분무장군 → 영천태수 → 연주목 → 평동장군 → 서주목 (자칭) 겸 좌장군 |
최종 관직 | 좌장군 |
군사 경력 | |
소속 세력 | 정원 → 동탁 → 헌제 → 원술 → 원소 → 장양 → 독립 세력 |
주요 참전 | 동탁 토벌전, 장안 전투, 연주 공방전, 원술 토벌전, 여포 토벌전 등 |
적대 세력 | 조조 |
가족 관계 | |
양아버지 | 동탁 |
2. 생애
여포의 생애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두 가지 주요 역사서에 남아 있다. 첫 번째는 3세기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이다.
5세기 배송지는 다른 사료의 정보를 삼국지 원문에 통합하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주석을 달았다. 이때 참고한 기록으로는 왕찬의 영웅기, 원위의 헌제춘추, 손성의 위씨춘추, 작자 미상의 조만전 등이 있다.
여포에 대한 두 번째 공식 기록은 5세기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이다.
2. 1. 초기 생애와 동탁 휘하
병주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 부근) 출신으로, 처음에는 병주에서 무관으로 활동하며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8] 병주 자사(刺史) 정원이 기도위(騎都尉)가 되어 하내군에 주둔하게 되자, 여포를 주부(主簿)로 삼아 가까이 두고 매우 총애했다.[8]189년(중평 6년), 영제가 세상을 떠나고 정원은 대장군 하진의 부름을 받아 십상시 제거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향하여 집금오에 임명되었다.[173] 그러나 하진은 환관들에게 암살당했고, 이후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정원의 군대를 흡수하기 위해 그의 신임을 받던 여포를 유혹했다. 결국 여포는 동탁의 꾐에 넘어가 상관 정원을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동탁에게 바쳤다.[9] 이 배신 행위로 여포는 동탁의 신임을 얻어 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심지어 동탁의 양아들이 되었다. 이후 중랑장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9] 여포는 완력이 뛰어나고 궁술과 마술에 능해 '비장(飛將)'이라 불렸다.
190년(초평 원년), 원소를 중심으로 한 반동탁 연합군이 동탁의 폭정에 맞서 궐기했다. 191년, 손견이 군대를 재정비하여 양인(陽人, 현재의 허난성 루저우 시 부근)으로 진격해왔다. 동탁은 호진을 대독(大督), 여포를 기독(騎督)으로 삼아 5,000명의 군사로 맞서게 했으나, 호진과 여포의 불화로 인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손견에게 패배했다(양인 전투).[174][10][11] 이후 손견이 낙양으로 진격하자, 동탁이 직접 나섰으나 패했고, 여포 역시 손견을 막지 못했다.[12][13] 결국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수도를 서쪽의 장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여포는 동탁을 따라 장안으로 갔다.[175]


장안에서 동탁은 자신의 방자한 행동 때문에 암살을 두려워하여 여포를 항상 곁에 두어 경호하게 했다. 그러나 동탁은 성격이 포악하여 화가 나면 여포에게 짧은 극을 던지기도 했다. 여포는 재빨리 피했지만, 이 일로 동탁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또한, 여포는 동탁의 시녀 중 한 명과 몰래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될까 두려워했다.[14]
이 무렵, 사도 왕윤은 사손예 등과 함께 동탁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평소 왕윤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던 여포는 그를 찾아가 동탁에게 죽을 뻔했던 일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왕윤은 여포에게 암살 계획을 밝히며 동참을 권유했다. 여포는 처음에는 동탁과의 부자 관계 때문에 망설였으나, 왕윤이 "그대의 성은 여(呂)씨이니 본래 혈연관계가 아니며, 동탁은 그대가 죽을 뻔했을 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설득하자 결국 암살 계획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96][15]
192년(초평 3년) 4월, 황제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려 궁궐로 들어서는 동탁을 여포와 이숙 등이 막아섰다. 여포는 조서임을 알리며 동탁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94] 동탁 사후, 여포는 왕윤과 함께 조정을 장악했으며, 분위장군(奮威將軍)·온후(溫侯)에 봉해지고 가절(假節)을 받아 삼공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15]
2. 2. 동탁 암살과 장안 탈출
중랑장과 도정후(都亭侯)로 승진한 여포는 늘 동탁을 가까이에서 경호했다. 그러나 동탁은 성격이 거칠고 편협하여 화가 나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176]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동탁이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여포는 재빨리 피하고 사죄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이 일로 동탁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176][14] 또한, 동탁의 집 중문(中閤)을 지키면서 그의 시녀와 몰래 정을 통했는데, 이것이 발각될까 두려워했다.[176][14][95]불안감을 느끼던 여포는 같은 고향(병주) 출신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사도 왕윤에게 이러한 고민과 동탁에게 수극으로 죽을 뻔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당시 왕윤은 상서복야 사손서[93] 등과 함께 동탁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포가 동탁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를 암살 계획에 끌어들였다. 여포는 처음에는 동탁과 자신은 부자 관계라며 거절했지만, 왕윤은 "자네 성은 여씨이니 친아들도 아닐뿐더러, 아들에게 수극을 던지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설득했고, 결국 여포는 동참하기로 결심했다.[176][15][96]
192년 (초평 3년) 음력 4월 23일,[177] 황제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리게 되어 동탁도 입궐하게 되었다. 왕윤과 여포는 이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여포는 기도위 이숙과 공모하여 진의(秦誼), 진위(陳衛), 이흑(李黑) 등[178] 10여 명을 위병으로 위장시켜 궁궐 북액문(北掖門) 안쪽에 매복시켰다. 동탁이 북액문에 도착하여 문을 통과하려 하자, 먼저 이숙이 창으로 동탁을 찔렀다. 그러나 동탁은 조복 안에 갑옷을 입고 있어 팔에 부상만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동탁은 급히 여포를 찾았지만, 여포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 동탁을 치노라!"라고 외치며 창으로 동탁을 찔렀다. 동탁은 "개 같은 놈,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庸狗敢如是邪)"[175]라고 욕하며 죽었다. 이때 동탁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던 주부(主簿) 전의(田儀)와 창고지기 두전(頭前)도 여포에게 살해당했다.[175][94]
동탁 사후 여포는 왕윤과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그는 분위장군(奮威將軍)[179]에 임명되고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에 준하는 의례와 대우를 받았다. 또한 작위는 온후(溫侯)로 올라갔다.[176][15] 여포는 동탁의 잔당을 사면하고 동탁이 쌓아둔 재물을 공경대신과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왕윤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왕윤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심지어 왕윤은 여포를 단순히 '칼잡이'로 여기며 업신여겼고, 이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졌다.[180] 다만 『후한서』「왕윤전」에는 오히려 여포가 양주 군벌들의 사면을 제안했다는 기록도 있다.[100]
이후 여포는 홍농군 섬현(陝縣)에 주둔하던 동탁의 사위 우보를 토벌하려 했다. 처음 이숙을 보냈으나 실패하자 그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 우보는 이후 스스로 도망치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우보가 죽자 그의 부하였던 이각, 곽사, 장제 등 양주 출신 장수들은 장안에 사면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윤이 끝까지 사면을 거부하자, 이들은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했다.[16] 번조 등 다른 세력들도 합류하여 그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여포는 성 북쪽에서 곽사와 일기토를 벌여 그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으나,[17][98] 결국 중과부적으로 밀렸다. 6월(음력), 성 내부에 있던 동조자들이 성문을 열어주면서 이각과 곽사의 군대가 장안을 점령했다.[181]
여포는 왕윤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권했지만, 왕윤은 죽음을 각오하고 헌제를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장안에 남았다.[182] 여포는 어쩔 수 없이 수백 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동탁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단 채 무관(武關)을 통해 남양태수 원술에게로 달아났다.[102] 이는 동탁이 죽은 지 60일[18](혹은 40일[183])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배송지는 《삼국지》 원문의 "60일" 기록에 대해, 동탁이 4월 23일에 죽고 여포가 6월 1일에 장안을 떠났으므로 60일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19]
2. 3. 군웅 할거와 방랑
이각, 곽사 등 동탁의 잔당에게 장안을 빼앗긴 여포는 192년 6월, 수백 기만을 거느린 채 동탁의 머리를 들고 무관을 통해 남양의 원술에게 달아났다.[181][18][102]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씨 일가의 복수를 했다는 공을 내세웠으나, 그의 부하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술은 그를 부담스러워했다.[20][21] 불안감을 느낀 여포는 원술을 떠나 하내의 장양에게 의탁했다. 장양은 이각 등이 여포에게 현상금을 건 것을 알았지만 동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보호해주었다.193년,[184] 여포는 기주의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다. 당시 원소는 흑산적 장연과 싸우고 있었는데, 여포는 원소를 도와 상산국에서 장연을 공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여포는 명마 적토마를 타고 성렴, 위월 등 수십 기와 함께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적진에 돌격하여 많은 적을 베었고, 10여 일 만에 장연 군을 격파했다.[103] 이때의 활약으로 "人中呂布 馬中赤兔|인중여포 마중적토중국어"(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104] 그러나 여포는 공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하며 증원을 요청하고, 그의 부하들은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안량, 문추 등 원소의 부하 장수들을 멸시하여 원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105]
불안한 분위기를 감지한 여포는 낙양으로 간다는 핑계를 대고 원소를 떠나려 했다. 원소는 여포를 사례교위에 임명한다며 장사 30명을 붙여 배웅하게 했으나, 이는 여포를 암살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를 눈치챈 여포는 다른 사람에게 쟁을 연주하게 하여 자신이 막사 안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몰래 빠져나갔다. 원소의 자객들이 밤중에 막사를 습격했지만 여포는 이미 달아난 후였고, 뒤늦게 보낸 추격병들도 여포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105] 여포는 다시 장양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장안의 이각 등은 여포를 회유하기 위해 영천태수 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194년,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느라 연주를 비운 사이, 진류태수 장막과 진궁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했다.[185] 장막은 과거 조조에게 은혜를 입었으나, 원소와의 관계 등으로 조조에게 공격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동군 복양을 점령하고 연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급히 회군한 조조와 복양에서 100여 일간 대치하며 선전했으나, 때마침 황충(蝗蟲, 메뚜기 떼) 피해가 극심하여 식량이 고갈되는 바람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111][112] 조조는 견성으로 물러났고, 여포는 산양군으로 이동했다.
195년, 조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여포는 거야현을 지키던 부하 설란과 이봉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진궁과 함께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역공을 시도했지만 조조의 복병에 패배했다. 결국 제음군 정도현마저 조조에게 함락되면서 연주의 여러 현들을 잃고 근거지를 상실했다. 여포는 장막과 함께 서주의 유비에게 망명했다. 당시 유비는 도겸 사후 서주를 다스리고 있었다.[185] 장막은 원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가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2. 4. 서주에서의 재기와 몰락
196년 (건안 원년), 유비와 회수 유역에서 다투던 원술은 여포에게 연합을 제의하며 하비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원술은 과거 여포가 동탁을 죽여 원씨 가문의 복수를 해준 점, 연주에서 조조를 공격해 자신의 명성을 회복시켜준 점 등을 언급하며 군량과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35][36] 여포는 이를 받아들여 하비를 기습했다. 당시 하비는 장비와 하비상 조표가 지키고 있었는데, 장비가 조표를 죽이려 하자 조표 측에서 여포에게 성문을 열어주어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187][37] 유비의 부하 중랑장 허담(許耽)이 밀통하여 단양병들이 서문을 열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37]하비를 잃은 유비는 광릉군 해서현(海西縣)으로 패주했으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여포에게 귀순했다.[185][38] 마침 원술이 군량 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자, 여포는 유비를 받아들여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여포는 스스로 서주자사[41] 또는 서주목[40]이라 칭하며 하비에 머물렀다.[41] 여포는 유비를 처음 만났을 때 매우 존중하며 "그대와 나는 모두 북방 변경 출신"이라며 동질감을 표하고, 자신의 아내에게 유비에게 절하게 하는 등 환대했지만, 유비는 여포의 변덕스러움을 경계했다.[34]
같은 해 6월, 하내 사람 학맹이 반란을 일으켜 한밤중에 하비의 관청을 습격했다. 여포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고순에게 달아났고, 고순이 이끄는 부대가 화살을 쏘아 학맹을 격퇴했다. 학맹은 자신의 부장 조성에게 팔이 잘린 뒤 고순에게 목숨을 잃었다. 조성은 원술이 배후이며 진궁도 공모했다고 진술했고, 진궁은 얼굴을 붉혔으나 여포는 중요한 장수였기에 처벌하지 않았다. 여포는 반란 모의에 반대했던 조성을 칭찬하고 학맹의 부대를 맡겼다.
이후 원술이 기령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소패의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여포의 부하들은 원술을 이용해 유비를 제거하자고 했지만, 여포는 "원술이 유비를 없애면 북쪽의 장패, 손관 등과 연합하여 우리를 포위할 것"이라며 거절했다.[188] 여포는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가서 중재에 나섰다. 그는 기령과 유비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나는 싸움보다 화해를 좋아한다"며, 영문에 세운 극의 작은 가지를 활로 쏘아 맞히면 양측이 화해하고, 못 맞히면 싸우라고 제안했다. 여포가 정확히 극의 가지를 맞히자 모두 그의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에 감탄하며 군대를 물렸다. 이 일화는 '원문사극'(轅門射戟)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유비가 소패에서 1만 명 이상 병력을 모으자 위협을 느낀 여포는 유비를 공격하여 몰아냈고, 유비는 조조에게 의탁했다.[185][123]
197년, 원술이 수춘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중(仲) 왕조를 세우자[45] 조정과 여러 군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원술은 이전에 아들과 여포 딸의 혼인을 제안하여 여포의 동의를 얻었으나, 황제를 참칭한 후 사신 한윤을 보내 딸을 데려오려 했다. 하지만 진규는 여포에게 과거 원술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일을 상기시키며 혼인을 반대하도록 설득했다. 마음을 바꾼 여포는 딸을 되찾고 한윤을 사로잡아 허창으로 보내 처형했다.[46]
분노한 원술은 한섬, 양봉과 연합하여 장훈에게 대군을 주어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진규는 한섬과 양봉이 원술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이간책을 쓰자고 조언했다.[52] 여포는 진규의 계책에 따라 한섬과 양봉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는 모두 헌제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인데 어찌 반역자인 원술과 손을 잡는가? 함께 원술을 치고 공을 나누자"고 설득했다.[53] 이에 넘어간 한섬과 양봉은 여포를 도와 장훈의 군대를 대파하고 원술의 장수 교유(橋蕤)를 사로잡았다. 원술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53] 이후 여포는 한섬, 양봉과 함께 수춘까지 진격하여 약탈하고 돌아왔다.[54]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손을 잡았다. 그는 군마 구입 자금을 모으던 중 유비에게 자금을 탈취당하자, 고순과 장료를 보내 소패의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가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지원했지만, 고순은 유비와 하후돈의 군대를 모두 격파했다.[60][61][62]



같은 해 겨울,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하비를 공격했다. 조조가 팽성을 점령하자 진궁은 즉시 반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여포는 듣지 않았다.[63][139] 조조군이 하비성에 이르러 여러 차례 교전했으나 여포는 모두 패배하고 성에 고립되었다.[140] 여포는 허사(許汜)와 왕개(王楷)를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원술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지원을 약속했다.[67] 여포는 원술을 안심시키기 위해 직접 딸을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조조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68]
진궁은 여포에게 "장군께서 기병을 이끌고 성 밖에 진을 치고 조조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면, 제가 성 안에서 수비하겠습니다. 적이 장군을 공격하면 제가 성 안에서 출격하고, 적이 성을 공격하면 장군께서 밖에서 구원하십시오. 열흘이면 적의 군량이 떨어져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계책을 내놓았다.[71] 여포는 동의했으나, 그의 아내가 "진궁과 고순은 사이가 좋지 않은데, 장군께서 나가시면 성을 제대로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변고가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과거 장안에서도 저를 버리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70] 라며 반대하자 여포는 마음을 바꾸었다.[71]
조조군은 순유와 곽가의 제안에 따라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길을 터서 하비를 물에 잠기게 했다.[142][143] 석 달 간의 포위 끝에 여포의 부하 후성, 송헌, 위속이 진궁과 고순을 붙잡아 조조에게 투항했다.[144] 여포는 백문루(白門樓)에서 저항하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결박된 채 조조 앞에 끌려온 여포는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조조는 "호랑이를 묶는데 꽉 묶지 않을 수 없다"고 답했다. 여포는 "이제 천하는 결정되었소. 공께서 보병을 이끌고 내가 기병을 이끌면 천하 통일은 쉬울 것이오"라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옆에 있던 유비가 "공께서는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섬겼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고 말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146] 여포는 유비를 "가장 믿을 수 없는 자는 저 큰 귀를 가진 놈이다!"라고 외쳤으나[146]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진궁, 고순 등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목은 허도로 보내져 효수되었다가 후에 매장되었다.
2. 5. 최후
198년 10월, 조조가 팽성국을 함락시키고 하비까지 진군하자 여포는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부하 성렴이 사로잡혔다.[185] 여포는 항복을 고려했지만, 진궁 등은 어차피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성 밖의 여포와 성 안의 진궁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방어하면 조조군의 군량이 떨어져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포는 이를 받아들여 성을 나가려 했으나, 부인이 진궁의 배신 가능성과 남겨질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며 만류하여 그만두었다.[191]조조는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을 끌어들여 하비를 수몰시키고 공성전을 벌였다.[192]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199년 2월 7일,[193] 여포의 부하 후성, 송헌, 위속이 진궁과 고순을 사로잡아 조조에게 투항했다.[75] (후성의 배신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 기록이 있다.) 여포는 남은 부하들과 백문루(白門樓)에 올랐다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76] 《후한서》에는 여포가 부하들에게 자신을 죽여 머리를 조조에게 가져가라고 명했으나, 부하들이 거절하자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7]
조조 앞에 포박되어 끌려온 여포는 묶인 것이 너무 조이니 느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조조는 "호랑이를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하면서도 약간 풀어주라고 명했다.[194] 여포는 조조에게 자신이 기병을, 조조가 보병을 지휘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194] 조조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옆에 있던 유비가 "공께서는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간언했고,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194] 이에 여포는 유비를 가리키며 "저 귀 큰 놈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라고 외쳤다.[194]
또한 여포는 "내가 장수들을 후하게 대했음에도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다"고 말했으나, 조조는 "경은 자신의 아내를 저버리고 부하 장수들의 아내를 탐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고 말하는가?"라고 반문했다.[194] 《영웅기》에 따르면 조조는 여포가 부하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배신당했다고 지적했고, 여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포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머리는 허도로 보내져 효수되었다.[194] 진궁, 고순 등도 조조의 회유를 거부하고 함께 처형되었다. 사마표의 《구주춘추》에는 여포가 유비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나, 조조가 왕필의 권고를 받아들여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성품과 평가
힘이 세고 궁술과 마술에 능숙하여 '비장(飛將)'이라 불렸다. 이는 전한 무제 때의 명장 이광이 들었던 별명이기도 하다.[195] 당시 사람들은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兔중국어)"고 할 정도로 그의 용맹함을 높이 샀다.[196][6] 진궁 역시 장막에게 여포는 장사로서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배잠은 여포가 비록 항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삼국 시대 최고의 장수였기에, 그에게 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송 시대의 군사학자 하거비(何去非중국어)는 조조를 상대로 한 여포의 싸움을 "연주에서는 전전하여 무적이었다"고 칭하며[151], 북송 이전의 뛰어난 무장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명나라 시대의 장부(張溥중국어)는 여포를 한나라 말기 제일의 장군으로 칭했다.[153] 근대의 연구자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개인의 무용이 중요한 기병 지휘관으로서 여포가 으뜸가는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155]
그러나 여포는 성품에 문제가 많아 주변의 신뢰를 잃는 행동을 자주 했다. 특히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 귀순한 일[190], 이후 헌제의 명을 받아 동탁을 죽였으나[22] 이각 등에게 패배한 뒤 의탁한 원소 밑에서 오만하게 굴며 행패를 부린 일[24][25] 등은 그의 평판을 크게 떨어뜨렸다. 진등은 여포가 용맹하기만 할 뿐 계략이 없고 경솔하여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8] 조조는 여포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이리 새끼 같은 야성(狼子野心중국어|낭자야심)이 있다고 평가했다. 훗날 하비 전투에서 여포가 포로로 잡혔을 때,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배신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그를 살려두면 안 된다고 간언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여포를 평가하기를, "호랑이 같은 용맹함을 지녔으나 영웅의 계책은 없었고, 경솔하고 변덕스러우며 오직 이익만을 좇았다. 예로부터 이런 인물이 파멸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149][83] 또한 "용맹하고 강력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남을 쉽게 의심했으며, 부하들을 신임하면서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부하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분열했으니, 이것이 그가 계속 패배한 이유였다."[84]고 덧붙였다. 《후한서》를 저술한 범엽 역시 여포가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85] 중국사 전반적으로 여포는 용맹하고 무예는 뛰어나지만 지략이 없고 무식하며, 색욕이 강해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여포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진수의 《삼국지》 여포전과 범엽의 《후한서》 여포열전이 있다. 5세기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왕찬의 《영웅기》, 원위의 《헌제춘추》, 손성의 《위씨춘추》, 작자 미상의 《조만전》 등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여포에 대한 정보를 보충했다. 역사 기록에는 여포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없으나, 궁술과 기마술에 능하고 힘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3]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 속에서 여포는 더욱 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4세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를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 장엄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태도, 방천화극(方天畫戟중국어)을 휘두르며 [...] 머리를 뒤로 넘기고 금색 머리 장식을 착용하고, 꽃무늬 전투복을 입었으며, 중국 신화 속 사자 같은 생물인 니(猊중국어)의 이미지를 장식한 갑옷을 입고 사자 이미지가 장식된 귀중한 허리띠를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7] 소설 속에서 장비는 여포를 향해 "세 성씨의 종놈(三姓家奴중국어|삼성가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중국의 잡극이나 경극 등 전통극에서는 여포가 미남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며, 가상의 인물인 초선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다루어지기도 한다. 민간 전승에는 여포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습격당하는 꿈을 꾸었고, 여포가 태어나자 산이 무너졌으며, 스스로 탯줄을 끊고 일어섰다는 등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서도 허난상보는 여포를 "후한을 재건한 전신"이라고 평가하는 등[154]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4. 가족 관계
여포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에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부인과 딸이 있었다.
- 부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여포가 장안에서 도망칠 때 버려졌으나, 부하 방서(龐舒)가 몰래 보호하여 나중에 여포에게 돌려주었다. 하비 전투 때 여포에게 진궁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46]
- 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원술과의 동맹을 위해 원술의 아들과 혼인하기로 했으나, 여포가 약속을 어기고 혼인하러 가는 길에 다시 데려왔다.[46] 하비 전투 당시 조조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여포는 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딸을 성 밖으로 보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하비로 돌아왔다.
여포의 부인과 딸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에게 두 명의 부인과 첩, 딸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여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여포는 키가 한 장에 달하고,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명마 적토마를 타고 다니는 매우 용맹한 장수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정원의 양아들로 등장하지만, 동탁 측 이숙이 적토마와 온갖 보물을 주며 회유하자 의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양아들이 되는 배신을 저지른다.[157]
동탁 토벌전이 배경인 호로관 전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삼 형제와 동시에 싸우면서도 밀리지 않는 무위를 과시하는 장면(삼영전 여포)이 특히 유명하다.[158] 이후 왕윤의 연환계에 빠져 그의 양녀인 절세미녀 초선을 사이에 두고 동탁과 갈등하다 결국 동탁을 죽이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정사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다 발각될까 두려워 왕윤과 공모하여 동탁을 죽인 것과는 다르게 각색된 부분이다.
《삼국지연의》 속 여포는 용맹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의리를 쉽게 저버리고 눈앞의 이익과 여색을 탐하는 등 인격적인 결함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서주를 다스리던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를 차지하는 과정[37]이나, 농성 중 자신만 호의호식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며 술에 취해 지내다 인심을 잃는 모습[163] 등이 대표적이다.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부하 후성이 호의로 바친 술과 고기를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후성을 벌주려다 원한을 사기도 한다. 결국 이 일로 후성, 송헌, 위속 등 부하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술에 취해 잠든 여포를 결박하여 조조에게 넘기게 된다.[144]
조조에게 사로잡힌 여포는 자신을 등용하면 천하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목숨을 구걸한다. 조조가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옆에 있던 유비가 "정원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고 간언하자 조조는 마음을 굳힌다. 이에 격분한 여포는 유비를 향해 "이 큰 귀 가진 놈[145]! 문 앞에서 극을 쏘아 구해준 은혜를 잊었느냐!"[146]라고 외치지만[160][161], 결국 진궁, 고순 등과 함께 처형당한다. 처형 직전, 함께 끌려온 장료에게 "사내답지 못하게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군다"는 질책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삼국지연의》의 여포는 배신을 거듭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지만, 한편으로는 유비의 처자식을 해치지 않고 보호해주거나[162], 마지막 전투에서 진궁의 계책보다 아내 엄씨의 말을 더 중시하는 등[163] 인정에 약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보여준다.[164] 정사에는 없는 허구적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호로관 전투, 초선과의 이야기, 하비 전투에서의 최후 등은 소설 속 여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여포에게는 정실 부인 엄씨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으며, 한때 원술의 아들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165] 민간 전승에서는 여포가 태어날 때 산이 무너지고 호랑이 꿈을 꾸었다는 등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며, 경극 등에서는 미남이자 비극적인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음은 《삼국지연의》에서 여포와 관련된 대표적인 허구적 이야기들이다.
- 호로관 전투
- 여포와 초선 이야기
- 하비 전투에서의 최후
6. 현대 대중문화에서의 여포
역사 소설이나 민간 설화에서 비할 데 없는 무력을 지닌 무사로 묘사되는 여포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뿐만 아니라, 관련 없는 다양한 현대 대중문화 매체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주로 삼국지연의에서 그려진 것처럼 압도적인 무용을 자랑하지만, 배신을 거듭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잡극, 경극 등 전통 공연 예술과 《삼국지평화》, 《삼국지연의》 같은 문학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져 왔다. 특히 잡극이나 경극에서는 미남이자 재능 있는 인물로 묘사되며, 초선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요 소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166][167] 민간 전승에서는 그의 탄생과 관련된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며, 일부 신화에서는 그의 무기인 방천화극이 용의 화신이라는 설정도 존재한다. 중국 역사상 항우와 더불어 무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으며[166][167], 이러한 강력한 무인으로서의 이미지는 현대 창작물에서도 자주 강조된다. 예를 들어 『BB전사 삼국전』이나 『창천항로』 같은 작품에서는 강자와의 싸움을 추구하는 순수한 무인의 모습이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여포는 영화, 드라마, 게임, 만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많은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포 역할을 맡아 그의 이미지를 형상화했으며, 특히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한 작품에서 그의 등장은 거의 필수적이다. 초선을 둘러싼 여성 관계 역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인데,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삼국지』처럼 동탁을 배신한 주된 이유를 초선과의 관계로 설정하는 작품이 있는 반면, 기타가타 겐조의 소설 『삼국지』처럼 아내에게 충실한 인물로 그려지는 등 작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게임과 만화 분야에서도 여포는 매우 인기 있는 캐릭터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이 외에도 수집용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포탈 삼국지》 세트에 "Lu Bu, Master-at-Arms"라는 카드가 포함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여포를 주제로 하거나 주요 인물로 다루는 현대 창작물은 다음과 같다.
; 영화
- 《삼국지 여포 귀신전》 (2020년, 출연: 찰스 린)
; 텔레비전 드라마
- 《삼국지 여포와 초선》 (2002년, 출연: 황 레이)
; 소설
- 《여포 맹장전》 (2010년, 저: 츠카모토 세이시)
; 만화
- 《명탐정 여포》 (저: 나가사와 카츠히로, 그림: 우동) - 지력 1, 무력 100의 명탐정 여포가 조수인 고순, 진궁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개그 만화.
- 《종말의 발키리 이문 여포 봉선 비장전》 (작화: 오노 타케오) - 《종말의 발키리》의 스핀오프 작품.
6. 1. 게임
여포는 소설과 민담에서 그려진 강력한 무사의 이미지 덕분에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비디오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며, 주로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강력한 캐릭터로 묘사된다.코에이의 게임들에서 여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초기부터 등장하여 높은 무력 능력치를 자랑하는 장수로 등장한다. 액션 게임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자 동시에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며, "여포에게 맞서지 마라"(Do not pursue Lu Bu)라는 게임 내 메시지가 유명할 정도로 강력함을 상징한다. 크로스오버 작품인 《무쌍OROCHI》 시리즈에서도 강력한 성능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코에이 테크모 산하 Team Ninja가 개발한 액션 RPG 《Wo Long: Fallen Dynasty》에서는 위협적인 보스 캐릭터로 등장하여 플레이어들을 시험한다. 코에이 게임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여포의 이름이 분음 부호 없는 "Lu Bu"로 표기된다.
코에이 외에도 다양한 게임에서 여포를 만나볼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전략 게임 《토탈 워: 삼국》에서는 강력한 세력의 지도자이자 장수로 등장하며, 플레이어가 직접 여포 세력을 운영할 수도 있다. 캡콤의 고전 액션 게임 《천지를 먹다》 시리즈에서도 강력한 보스로 등장한다. 네오지오 플랫폼으로 출시된 대전 격투 게임 《월드 히어로즈 2 제트》(ADK 개발)에서는 '료후'라는 이름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로 참전했다. 모바일 게임인 《퍼즐앤드래곤》과 《AOV》(한국 서비스명: 펜타스톰)에서도 여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전략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타입문의 페이트 시리즈에서도 여포는 서번트로 등장한다. 《페이트/엑스트라》에서는 라니 VIII에 의해 소환된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하며, 이후 모바일 게임 《페이트/그랜드 오더》에서도 주인공이 소환할 수 있는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액션 게임 《페이트/엑스텔라》와 그 후속작 《페이트/엑스텔라 링크》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서번트로 등장하여 직접 조작할 수 있다.
일부 게임에서는 여포를 모티브로 한 스킨이 등장하기도 한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오버워치》에서는 리퍼 영웅의 스킨으로,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자르반 4세 챔피언의 스킨으로 여포의 모습이 구현되었다.
제작사/배급사 | 게임 시리즈/제목 | 장르 | 역할/특징 |
---|---|---|---|
코에이 | 《삼국지》 시리즈 | 전략 시뮬레이션 | 주요 무장 (높은 무력) |
코에이 | 《진·삼국무쌍》 시리즈 | 액션 | 플레이 가능 캐릭터, 강력한 적장 |
코에이 | 《무쌍OROCHI》 시리즈 | 액션 | 플레이 가능 캐릭터 |
코에이 (Team Ninja) | 《Wo Long: Fallen Dynasty》 | 액션 RPG | 보스 캐릭터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 / 세가 | 《토탈 워: 삼국》 | 전략 시뮬레이션 | 플레이 가능 세력 지도자/장수 |
캡콤 | 《천지를 먹다》 시리즈 | 액션 | 보스 캐릭터 |
ADK / SNK | 《월드 히어로즈 2 제트》 | 대전 격투 | 플레이 가능 캐릭터 (료후) |
타입문 / 마벨러스 | 《페이트/엑스트라》 | RPG |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 |
타입문 / 애니플렉스 (라스엔글) | 《페이트/그랜드 오더》 | 모바일 RPG |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 (소환 가능) |
마벨러스 | 《페이트/엑스텔라》 | 액션 | 플레이 가능 서번트 |
마벨러스 | 《페이트/엑스텔라 링크》 | 액션 | 플레이 가능 서번트 |
겅호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 《퍼즐앤드래곤》 | 모바일 퍼즐 RPG | 몬스터 |
텐센트 (TiMi Studio Group) | 《AOV》 (펜타스톰) | MOBA | 영웅 |
릴리스 게임즈 | 《라이즈 오브 킹덤즈》 | 모바일 전략 | 플레이 가능 사령관 |
6. 2. 만화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여포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일기당천》, 《료후코 쨩》, 그리고 《연희무쌍》과 같은 작품에서는 여포가 여자아이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서 여포는 보통 일본식 이름인 呂布奉先|료후 호센일본어으로 알려져 있다.
만화 《종말의 발키리》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영웅"으로 등장하며, 인류 측의 첫 번째 전투원으로서 신 토르와 대결한다. 작품 속에서 그는 자신의 힘에 필적할 경쟁자가 없어 지루함을 느끼는 인물로 재해석되었다. 또한, 여포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만화 《료후 호센 비쇼덴》도 존재한다. 《종말의 발키리》의 애니메이션 각색판에서는 일본어 원판 성우로 세키 토모카즈가, 영어 더빙판 성우로 카이지 탕이 목소리를 연기했다.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는 등장인물 유미라가 사용하는 차력(빌린 힘)의 근원으로 여포가 등장한다. 이 힘은 유미라에게 향상된 신체 능력과 여포의 전설적인 말인 적토마를 소환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6. 3. 기타
역사 소설이나 민간 설화에서 비할 데 없는 무사로 묘사되는 여포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뿐만 아니라 관련 없는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여포를 연기한 배우들은 다음과 같다.
작품 | 배우 | 연도 |
---|---|---|
《미인도》 | 퉁춘충 | 1987 |
삼국지 | 장광북 | 1994 |
《여포와 초선》 | 황뢰 | 2001 |
삼국 | 하윤동 | 2010 |
무신 조자룡 | 고이정 | 2016 |
삼국지: 엇갈린 운명 | 시로타 유 | 2020 |
진·삼국무쌍 | 고천락 | 2021 |
대만 오페라 《초선과 여포》 | 양려화 | 1991 |
광둥 오페라 《전쟁 속의 사랑》 | 왕즈량 | 2022 |
여포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비디오 게임에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동명의 전략 게임 시리즈, 액션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 《무쌍OROCHI》가 있으며, 《Wo Long: Fallen Dynasty》에서는 보스로 등장한다. 이 게임들에서는 그의 이름이 "Lu Bu"로 표기되며, "Lu"의 "u" 위에 분음 부호는 사용되지 않는다. 코에이 외의 게임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토탈 워: 삼국》, 캡콤의 《천지를 먹다》, 네오지오의 《월드 히어로즈 2 제트》, 《퍼즐앤드래곤》, 《AOV》 등이 있다. 또한, 게임 《오버워치》(리퍼 스킨) 및 《리그 오브 레전드》(자르반 4세 스킨)에서 캐릭터 스킨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 《페이트/엑스트라》에서는 라니 VIII에 의해 소환된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이후 모바일 게임 《페이트/그랜드 오더》에서도 주인공이 소환할 수 있는 같은 클래스의 서번트로 등장하며, 《페이트/엑스텔라》와 《페이트/엑스텔라 링크》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서번트로 다시 등장한다.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인 《일기당천》, 《료후코 쨩》, 그리고 《연희무쌍》에서는 여자아이로 등장하며, 보통 일본식 이름인 료후 호센(呂布奉先)으로 불린다. 만화 《종말의 발키리》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영웅"으로 등장하여 인류 측 첫 번째 전투원으로 신 토르와 대결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힘에 필적할 경쟁자가 없어 지루함을 느끼는 인물로 재해석되었으며, 스핀오프 만화 《료후 호센 비쇼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종말의 발키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어 원판에서 세키 토모카즈가, 영어 더빙에서는 카이지 탕이 목소리를 연기했다.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는 등장인물 유미라가 사용하는 차력(빌린 힘)의 근원으로 등장하며, 향상된 힘과 적토마를 소환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수집용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의 《포탈 삼국지》 세트에는 "Lu Bu, Master-at-Arms"라는 이름의 카드가 있다.
모바일/PC 게임인 《라이즈 오브 킹덤즈》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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