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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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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리장성(고구려)은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요동 지역에 축조한 방어 시설이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동 방어선의 한계를 겪고, 당나라의 위협이 커지자 631년부터 축조가 시작되었다. 천리장성은 요동 지역의 주요 성들을 연결하는 형태로, 기존 학설과는 달리 성벽이 길게 이어진 형태가 아닌, 크고 작은 성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방어망 형태였다. 647년에 완공되었으며, 당나라가 요동 지역을 피해 해로로 평양성을 공격하게 만들 정도로 여당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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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 (고구려)
개요
종류장성
위치만주, 한반도
축조 목적당나라의 침입 방어
축조 기간631년 ~ 647년
관련 국가고구려
관련 인물연개소문
역사
축조 배경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위협
축조 시작631년
축조 완료647년
주요 전투나당 전쟁
구조
특징곳곳에 있는 토성들을 연결하여 쌓은 토축성
구성 요소성문, 누각, 돈대 등의 시설 부족
방어력당나라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부족
중요도영구성보다는 임시방편으로 구축

2. 축조 배경

고구려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기존 요동 방어선의 한계를 경험하였다. 612년 전쟁에서 요동성이 포위되고,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으로 직행하는 등 위기를 맞았다.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초기에는 고조 시기 고구려당나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626년 당 태종 즉위 후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 태종은 주변국에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631년에는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에 와서 경관을 헐어버렸다. 고구려당나라의 위협에 대응하고 취약한 요동 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2. 1. 기존 요동 방어선의 한계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서쪽 경계로 범위를 한정해서 총 4개로 나눌 수 있었다.

번호명칭설명
1요하적의 군사를 가로막는 자연 방해물로 적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2요하와 천산산맥 중간에 위치한 성들신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었다. 요하를 넘어온 적이 천산산맥을 오르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3천산산맥요동반도의 중간 지점을 종단하는 산맥으로, 요하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방해물로서 적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4요택요하 하류의 늪으로 대군은 꼭 이곳을 지나지만 여러 세균으로 인해 지나기 어려운 곳 중 하나라서 기습에 용이했다.



그러나 기존 세 개의 요동 방어선은 612년부터 벌어진 수 양제와의 전쟁에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612년 전쟁에서는 요동성이 수나라 군대에게 포위되기도 하였고, 수나라의 30만 별동대가 곧장 수도 평양성으로도 진격하는 등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2. 2. 당나라의 등장과 위협

618년 수나라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곧 멸망하였다. 당나라 제1대 황제 고조 시기에는 고구려당나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626년 당 태종이 즉위한 후 당나라고구려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은 중국 중심의 천하를 이루고자 하였고, 동돌궐을 침략하는 등 주변 국가에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631년(영류왕 13년) 당나라 사신 장손사는 고구려에 와서 과거 고구려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을 헐어 버렸다. 당나라가 주변국을 침략한다는 정보가 알려지고 있던 터라 고구려당나라에 대해 매우 위협을 느꼈다. 그리하여 취약한 요동 방어선을 보강하고, 새로운 위협 세력인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천리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3. 범위

고구려가 요동 일대의 서쪽 변경 지방에 쌓은 천리장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능안고성, 부여성, 신성, 개모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득리사성, 비사성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름위치
부여성 (扶餘城)창춘시 눙안 현
신성 (新城)푸순 시
현도성 (玄菟城)
개모성 (蓋牟城)선양시
요동성 (遼東城)랴오양 시
백암성 (白巖城)랴오양 시 덩타 시
안시성 (安市城)안산 시 하이청 시
건안성 (建安城)잉커우 시 가이저우 시
비사성 (卑沙城)다롄시 진저우 구


4. 최근 학설

기존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당나라 군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했으나, 실제로는 제1차 여당전쟁이 끝난 645년보다 2년 뒤인 647년에 완공되었다. 이는 천리장성이 제1차 여당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며, 쓸모없는 성이었다면 전쟁 후 노동력을 동원해 쌓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645년 제1차 여당전쟁 이후, 당나라는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와의 육상 전투를 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661년 제2차 여당전쟁과 668년 제3차 여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는 요동을 거치지 않고 해로를 통해 곧바로 평양성으로 향했다. 이러한 당나라의 전략 변화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여당전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4. 1. 새로운 연구 결과

그동안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흔히 생각하는, 성벽이 연속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형태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라 부정되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중국만리장성이나 고려의 천리장성과는 달리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가 서쪽으로부터 침범해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구축했던 요동 방어망 사이에, 크고 작은 성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형태였다.

대신 요동 방어망이 끝나는 신성 북쪽 요하 중상류에서 부여성이 있는 곳에는 흙으로 긴 장벽을 쌓았다. 그동안 학계에서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흙으로 쌓은 치졸한 방어벽이라고 치부해왔던 데에는 요하 중상류와 부여성 사이의 흙 장벽 유적 때문이었다.

또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당나라의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 하였으나, 천리장성이 제1차 여당전쟁이 끝난 645년보다 2년 뒤인 647년에 완공된 것으로 보아 제1차 여당전쟁에서 천리장성의 역할이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무 쓸모 없는 성이었다면 전쟁이 끝난 후까지 노동력을 동원하여 쌓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645년 제1차 여당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당나라는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661년 제2차 여당전쟁, 668년 제3차 여당전쟁에서 당나라는 주력군을 육로로 요동을 통과하게 해서 보내는 것이 아닌, 해로로 곧장 평양성으로 보냈다. 당나라의 이러한 행군 경로 변경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여당전쟁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4. 2. 천리장성의 효과에 대한 재평가

그동안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흔히 생각하는, 성벽이 연속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형태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라 부정되었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중국만리장성이나 고려의 천리장성과는 달리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가 서쪽으로부터 침범해 오는 적들을 막기 위해 구축했던 요동 방어망 사이에, 크고 작은 성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형태였다.

대신 요동 방어망이 끝나는 신성 북쪽 요하 중상류에서 부여성이 있는 곳에는 흙으로 긴 장벽을 쌓았다. 그동안 학계에서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흙으로 쌓은 치졸한 방어벽이라고 치부해왔던 데에는 요하 중상류와 부여성 사이의 흙 장벽 유적 때문이었다.

또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당나라의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 하였으나, 천리장성이 제1차 여당전쟁이 끝난 645년보다 2년 뒤인 647년에 완공된 것으로 보아 제1차 여당전쟁에서 천리장성의 역할이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무 쓸모 없는 성이었다면 전쟁이 끝난 후까지 노동력을 동원하여 쌓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645년 제1차 여당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당나라는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661년 제2차 여당전쟁, 668년 제3차 여당전쟁에서 당나라는 주력군을 육로로 요동을 통과하게 해서 보내는 것이 아닌, 해로로 곧장 평양성으로 보냈다. 당나라의 이러한 행군 경로 변경은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여당전쟁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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