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동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동성은 랴오허 동쪽에 위치하며, 고조선 시대부터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세기 연나라가 점령한 후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요동성이라 불렀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요충지였으나, 645년 당나라에 함락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고구려 유민의 저항으로 인해 요동성을 거쳐 신성으로 옮겨졌다. 요동성총의 요동성도를 통해 성의 구조를 알 수 있으며, 한국사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여당 전쟁 - 고구려-당 전쟁
    고구려-당 전쟁은 7세기 중후반 당나라가 동아시아 강자로 부상하며 고구려에 강경 정책을 펼치고, 연개소문 집권 후 내부 혼란과 당-신라 동맹이 형성된 배경 속에서 645년부터 66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으로, 고구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내부 분열로 멸망했다.
  • 여당 전쟁 -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은 644년부터 645년까지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국왕 시해를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철수하며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
  • 여수 전쟁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수 전쟁은 598년부터 614년까지 수나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네 차례 침공한 전쟁으로, 수나라의 팽창 정책과 고구려의 강경한 외교 정책이 충돌하여 발발했으며 양국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어 수나라 멸망과 당나라 건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여수 전쟁 - 제3차 고구려-수 전쟁
    613년 수 양제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양현감의 반란으로 수나라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어 철군하면서 고구려가 승리한 전쟁으로, 수나라 멸망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요동성 - [지명]에 관한 문서
요동성 (양평성) 정보
명칭요동성 (遼東城)
이칭양평성 (襄平城)
유형
시대


고구려
위치랴오닝성 랴오양시

2. 역사

요동은 요하(遼河)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 랴오둥반도(遼東半島)라는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나라가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진, 한 등의 지배를 거쳤다.

삼국지에 따르면 요동성은 공손연의 조상인 공손도가 다스렸다.[9]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직후 원상원희는 요동성으로 도망갔으나, 요동성에서 참수되었다. 238년 공손연이 독립하여 위나라에 반기를 들자 사마의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연을 참수했다.[9]

이후 요동군은 4세기 전연, 전진, 후연을 거쳐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에 점령되었다.[9] 고구려는 후한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10] 405년(광개토왕 15년) 후연의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직접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612년, 613년, 614년 고구려-수 전쟁 때에도 수나라의 공격을 여러 번 막아냈다. 그러나 645년 고구려-당 전쟁 때 당나라 군은 신무기였던 포차(砲車)·충차(衝車) 등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했고,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때 고구려는 전사자 1만여 명, 포로 1만여 명, 민간인 포로 4만여 명, 양곡 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668년(보장왕 2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에 의해 676년(문무왕 16년)에 요동성으로 이동했으나, 677년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2. 1. 고조선과 연나라

요동은 요하(遼河)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나라가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1]

연 소왕 시대에 연나라 장수 진개는 동호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동호를 크게 격파하고, 연나라의 국경을 확장했다. 이때 연나라 만리장성의 초기 형태가 건설되었는데, 서쪽의 조양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양평에서 끝났다.[1] 기원전 300년, 진개는 요동군을 설치하고 그 수도를 양평에 두었다.

기원전 222년 연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한 후에도,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는 중국을 36개의 으로 나누면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을 유지했고, 그 군의 수도는 양평에 두었다.

2. 2. 진, 한, 삼국시대

기원전 3세기 고조선을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이때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요동성은 진, 한 등의 지배를 거쳤다.[1] 연나라 장군 진개요동군을 설치하고 그 수도를 양평에 두었다. 이후 연나라는 만리장성을 건설했으며, 양평은 그 동쪽 종착지였다. 진나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는 중국을 36개의 으로 나누면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을 유지했고, 그 군의 수도는 양평에 두었다. 서한과 동한 시대 모두, 진나라의 요동군이 유지되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요동성은 공손연의 조상인 공손도가 다스렸다.[9]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직후 원상원희는 요동성으로 도망갔으나, 요동성에서 참수되었다. 238년 공손연이 독립하여 위나라에 반기를 들자 사마의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연을 참수했다.[9] 동한 말기와 삼국 시대 초기의 혼란 속에서, 요동군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군벌과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위치 덕분에 번성했으며, 많은 학자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양평으로 피난했다. 189년, 요동 출신 공손도는 스스로를 요동후이자 신설된 평주의 태수로 칭했다. 공손도는 요동군을 셋으로 나누어 요동, 중료, 요서군을 설치했다. 공손도의 손자 공손연은 237년에 스스로를 연왕이라고 칭했지만, 이듬해 사마의의 요동 정벌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요동군은 4세기 전연, 전진, 후연이 지배하다가 385년 고구려에 점령되었다.[9] 334년, 선비족 지도자 모용황이 양평을 점령했다. 이후 그는 전연 왕조의 연왕을 자칭했다. 380년, 전연은 전진에 의해 멸망했고, 요동은 점령당했다. 384년, 모용수후연 왕국을 건국했다.

2. 3. 고구려의 요동 지배

요동은 요하의 동쪽 지역으로, 랴오둥 반도라는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이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고,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이후 진, 한 등의 지배를 거쳤다. 삼국지에 따르면, 요동성은 공손연의 조상인 공손도가 다스렸으며, 원소의 아들 원상원희조조에게 패한 후 요동성으로 도망쳤으나 참수당했다. 238년 공손연위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사마의가 이끌고 온 위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공손연은 참수되었다.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는 전연 · 전진 · 후연으로부터 요동 지역을 점령한 이후, 한나라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9][10] 404년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고 상평을 요동(요동성)으로 개칭하면서 상평이라는 이름은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후연의 대부분 영토는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이후 북연은 요동군을 오늘날 랴오닝 성 서쪽 지역 내에 설치했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중국의 여러 왕조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다.[4]

요동성은 397년 이전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으며,[6]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하 근처에 위치해 있어 막강한 방어 장벽으로 여겨졌다. 이 요새는 한국으로 통하는 길과 요동 및 백암과 같은 인근 고구려 도시를 보호했다. 한 자료에서는 이 요새를 한국 왕국의 국경 방어의 핵심이라고 언급하고 있다.[4]

435년 장수왕북위에 조공을 보냈고, 북위는 장수왕에게 고구려왕이자 요동군공의 칭호를 내렸다. 492년문자명왕은 요동 개국공의 칭호를 받았으며, 519년에는 안장왕이 이 칭호를 다시 받았다. 577년 북주 시대에 고구려 왕은 요동왕의 칭호를 받았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에 의해 676년(문무왕 16년)에 요동성으로 이동했으나, 677년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2. 3. 1. 고구려-수 전쟁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후, 후한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10] 405년(광개토왕 15년) 후연의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직접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598년 고구려는 수나라를 상대로 요하를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612년, 613년, 614년 고구려-수 전쟁 때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요새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고 수나라 군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4] 수나라 군대의 3분의 1은 포위를 풀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진격했으나, 살수 대첩에서 대패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4]

2. 3. 2. 고구려-당 전쟁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가 전연 · 전진 · 후연으로부터 요동 지역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9][10]

405년(광개토왕 15년) 후연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을 직접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612년 ~ 614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수 전쟁 때에도 수나라의 공격을 여러 번 막아냈다. 특히, 612년에 수나라가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요새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고 수나라 군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후 수나라 군대는 살수 대첩에서 괴멸되었고,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종결되었다.[4]

수나라와의 갈등 이후, 고구려는 중국과의 미래 전쟁에 대비하여 국경 방어를 강화했다. 642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고구려-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645년 고구려-당 전쟁 때 당나라 군은 신무기였던 포차(砲車)·충차(衝車) 등 온갖 공성 도구를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했고,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때 고구려는 전사자 1만여 명, 포로 1만여 명, 민간인 포로 4만여 명, 양곡 50만 석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만 명의 군인과 4만 명의 민간인이 주둔하고 있던 요동성은 한동안 당나라 군대를 막아냈지만,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는 전멸했다.[6][7] 당나라는 기병의 신속한 공격으로 요새 성벽을 돌파할 수 있었고, 요동성은 결국 점령되었으며 그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7][8][4] 당 태종은 나중에 개입하여 포로들에게 자유를 제공했다.[8]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을 포위하는 데 실패했고 북중국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4]

2. 4. 당나라의 요동 지배와 안동도호부

요하(遼河)의 동쪽’이란 뜻의 ‘요동’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이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다. 이후 진 · 한 등의 지배를 거쳤다.

385년(고국양왕 2년) 고구려가 전연 · 전진 · 후연의 지배하에 있던 요동군을 점령하였다.[9] 후한 때 양평성이라고 불렀던 성을 고구려는 요동성이라 불렀다.[10] 405년(광개토왕 15년)에 후연왕(後燕王)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을 직접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612년, 613년, 614년 고구려-수 전쟁때에도 수나라의 공격을 여러 번 막아 내었다.

645년 고구려-당 전쟁 때 당나라 군의 신무기였던 포차(砲車)·충차(衝車) 등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자 함락 당했다. 이때 고구려는 전사자 1만여 명, 포로 1만여 명, 민간인 포로 4만여 명, 양곡 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668년(보장왕 2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에 의해 676년(문무왕 16년)에 요동성으로 이동했으나, 677년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당나라는 요동성에 요성주(遼城州)를 설치했다. 676년 요동은 안동도호부의 수도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수도는 다시 옮겨졌다.

3. 고고학적 연구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발견된 요동성총(遼東城塚)의 요동성도(遼東城圖)를 통해 요동성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성은 장방형의 평지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 위에는 여장(女墻)이 있고, 문에는 문루(門樓), 모서리에는 각루(角樓)가 있었다.

참조

[1] 서적 史記
[2] 서적 夫餘本屬玄菟
[3] 서적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4]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5] 웹사이트 CHINA'S IMPACT ON KOREAN PENINSULA UNIFICATION AND QUESTIONS FOR THE SENATE https://www.govinfo.[...] 2020-11-04
[6] 논문 Koguryo: Kingdom or Empire? 2013
[7] 서적 Medieval Chinese Warfare, 300-900 Routledge 2002
[8] 웹사이트 Tang Taizong in Korea: The Siege of Ansi http://www.eastasian[...] 2020-11-04
[9] 서적 삼국사기 1145
[10] 서적 삼국사기 114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