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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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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마산대는 1920년 최시흥을 중심으로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간 최시흥이 국내 동지들과 함께 결성했으며,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천마산은 근거지로, 일본군과 친일 세력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독립운동 자금 확보, 일제 시설 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광복군 총사령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연계되었으며, 이후 대한통의부와 참의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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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대
개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깃발
지도자 직함장군
지도자최시흥
창립1920년
해산1924년
본부평안북도 삭주군 천마산
이념한국 독립 운동
규모500명
국가한국
일본 제국
소속대한민국 임시 정부
한국통일정부
명칭
한글천마산대
한자天摩山隊
로마자 표기Cheonmasandae
영문 명칭Cheonma Army
한글 (다른 표기)천마대
한자 (다른 표기)天馬隊
로마자 표기 (다른 표기)Cheonmadae

2. 설립 배경

최시흥과 최시찬은 의주군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여의어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1914년 최시흥은 오동진과 함께 단학회의 제1회 천마산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이규엽의 아버지 이관집, 김효운, 이덕수, 박응백, 양승우, 이용담, 이태집, 서청산, 백형규 등이 참여했다.[3] 이후 최시흥은 삭주군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하여 단학회 제3대 회장이 되었다.[3]

1919년 3월 1일, 최시흥은 2천만 인구를 대표하여 한국 각 도를 대표해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의주군 고령 장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군 수비대에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총과 창으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섰으나,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만주로 건너가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했다.[4]

2. 1. 시대적 배경

최시흥과 최시찬은 의주군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여의어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최시흥은 1914년 오동진과 함께 단학회의 제1회 천마산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이관집(독립운동가 이규엽의 아버지), 김효운, 이덕수, 박응백, 양승우, 이용담, 이태집, 서청산, 백형규 등도 참여했다.[3] 이후 최시흥은 삭주군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하여 단학회 제3대 회장이 되었다.[3]

1919년 3월 1일, 최시흥은 2천만 인구를 대표하여 한국 각 도를 대표해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조직하여 의주군 고령 장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군 수비대에 "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총과 창으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섰으나,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그들은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하며 만주로 건너갔다.[4]

2. 2. 주요 인물

천마산대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설명
최시흥의주군 출신.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학업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1914년 단학회 제1회 천마산 회의에 참석했다. 삭주군 구곡면 신풍리로 이주하여 단학의 제3대 회장이 되었다.[3] 3월 1일, 2천만 인구를 대표하여 한국 각 도 대표로 독립을 선언했다. 의주군 고령 장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군 수비대에 만세를 외쳤다.[4]
오동진1914년 열린 단학회의 제1회 천마산 회의에 참석했다.[3]
이관집독립운동가 이규엽의 아버지.[3]
김효운[3]
이덕수[3]
박응백[3]
양승우[3]
이용담[3]
이태집[3]
서청산[3]
백형규[3]
최시찬의주군 출신. 최시흥과 함께 어릴 때 부모를 여의었다.[3]


3. 설립

1920년 3월 최시흥, 최지풍, 박응백, 최천주, 심용준, 김세진, 양봉제 등을 중심으로 평안북도 의주에서 조직되었다. 한말의 군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에 있는 천마산을 근거지로 삼아 천마산대 또는 천마별영(天摩別營), 철마별영(鐵馬別營), 천마대(天摩隊)라고 불렸다.[9]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자 최시흥은 삼원보의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건너갔고, 류하현은 농민의 일원으로서 노동자·농민군에 가담하여 12월 12일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3] 최시흥은 오동진이 이끄는 광복단(당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와 박응백 등과 함께 동지들을 규합하여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1920년 3월부터 활동했다.[2][3]

1920년 3월 최시흥은 동지 수인 등과 함께 중국 류하현에서 하얼빈으로 가서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 했으나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로 만 리의 여정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마침내 그해 12월,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구성에 도착했고, 최지풍이 더 많은 동지를 모집하고 군수 물자를 준비했다. 집결한 인원은 약 30명에 달했다. 그들은 천마산을 근거지로 삼아 인원을 조직하고 동지를 모집하며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4][2]

4. 조직

천마산대는 1920년 3월 최시흥을 지휘관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최대 500명 규모로, 남대문 전투 이후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 군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의병 활동을 하다 독립군으로 전환, 일제에 맞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1][8][3]

4. 1. 지휘 체계

1920년 3월, 천마산대의 지휘관은 최시흥 장군이었고, 부관은 최지풍, 참모는 박응백, 박영찬, 최윤희, 검사 김세진, 중대장은 최의집이었으며, 소대장은 김상옥과 김용택 등이었다.[1][8] 최시흥의 동생인 최시찬은 계급 없이 부대에서 활동하며 단호에 대한 재정 지원에 집중했다.[3]

1920년 6월 16일, 약 130명의 대원들이 천마산대의 군사 협약에 모였다(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 부대 규모는 200명(최대 500명) 정도였으며, 젊은이와 중년 남성이 많았고, 그들 중 다수는 남대문 전투 이후 1907년에 해산된 대한제국군 군인 출신이었다.[1][8]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는 전국 각지의 의병에 합류했으며, 이들은 독립군으로 각지로 흩어져 활동했다. 이들은 자금 모집, 일본 식민 기관 파괴, 일본 헌병과 친일 협력자 처형, 일본과의 무장 충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1][3]

4. 2. 대원 구성

천마산대의 지휘관 최시흥


천마산대 기지 위치


이 부대의 구성원은 구 대한제국군의 군인 출신이었다


1920년 3월, 천마산대의 지휘관은 최시흥 장군이었고, 부관은 최지풍, 참모는 박응백, 박영찬, 최윤희, 검사는 김세진, 중대장은 최의집이었으며, 소대장은 김상옥, 김용택 등이었다.[1][8] 최시흥의 동생 최시찬은 계급 없이 부대에서 활동하며 단호(團號)에 대한 재정 지원에 집중했다.[3]

1920년 6월 16일, 약 130명의 대원들이 천마산대의 군사 협약에 모였다(독립신문, 1923년 3월 14일). 천마산대는 200명(최대 500명) 규모였으며, 젊은이와 중년 남성이 많았고, 그들 중 다수는 남대문 전투 이후 1907년에 해산된 대한제국군 군인 출신이었다.[1][8]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는 전국 각지의 의병에 합류했으며, 이들은 독립군으로 각지로 흩어져 활동했다. 이들은 자금 모집, 일본 식민 기관 파괴, 일본 헌병과 친일 협력자 처형, 일본과의 무장 충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1][3]

5. 주요 활동

천마산대는 1920년대 초, 약 500여 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일제 경찰과 친일파를 암살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거나 일제 시설에 방화를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민국독립단 등 여러 독립단과 연대했으며, 대한광복군총영과도 연락하여 무기와 지령을 받았다. 대한통군부 결성 이후에는 의용군 제3중대로 편제되었다.[1][8]

화승총 등의 재래식 무기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일제의 장비에 비해 낙후되어 전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시흥의 전략과 부대원들의 용맹함으로 많은 업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부대원들의 강한 반일 의식과 재래식 무기의 낙후성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천마산대의 주요 활동 지역은 평안북도의 의주, 구성, 삭주, 창성 등 서부 산악 지대와 광산이었다.[1][8]

천마산대는 남만주에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비롯한 여러 독립 단체와 긴밀히 연락하며 암살, 방화, 독립 선언,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쳤다.[1] 특히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립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히 협력했다.[1]

1920년 8월 7일, 천마산대 대원 김효준, 김봉한, 한치봉은 청산면 용암동 출신 강세흥, 강문섭, 강병정, 그리고 양세봉과 함께 의주, 삭주, 귀성군 경계 지역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창성군 유동경찰서, 금광 사무소, 영림창을 습격했다. 이들은 군수 물자와 금괴를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획득한 군자금은 김봉한을 통해 관전현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달했다.[3][5][6]

이후 천마산대는 서로군정서, 의민단, 백파대, 기원독립단 등 다양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다.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3]

5. 1. 초기 활동 (1920년)

1920년 3월, 천마산대는 선천군 태산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를 살해하고, 순사 주경철과 김명익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을 살해했다.[1] 5월 9일에는 철산군 여한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방화했고, 같은 달 친일파인 유시동, 고관면, 의주군의 친일파들이 처형되었다. 같은 달 18일에는 의창군 신창면 세덕동에서 헌병 1명이 살해되었다.[1]

5월 초, 박정환은 부하 5명을 이끌고 삭주군 수북면에 근거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금했으나, 적에게 포위되어 교전 끝에 박정환과 최윤옥이 사망하고 다른 3명이 체포되었다.[4]

6월 4일,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의 경찰서를 습격하여 순경 1명을 살해했다. 6월 6일에는 강계군 문옥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공금 700JPY을 탈취했다. 같은 달 10일, 독립군의 활동을 보고했던 창성군 대창면장 강창헌이 암살당했고, 이 사건으로 삭주경찰서는 보안수사대를 조직했다.[1] 6월 19일, 수풍면과 삭주군 덕유동에서 활동하던 작전조는 국경수비대 제1소대와 교전했고, 21일에는 안풍동에서도 교전했다. 28일에는 천마산대 28명이 2소대와 약 40분간 교전하여 허기호 부관을 포함한 5명이 사망했다.

같은 달, 수백 명의 적군이 도룡산을 공격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적군 3명이 즉사했고, 천마산대에서는 허기호, 독고무, 이창근, 유태순, 오원문이 사망하고 3명이 체포되었다. 김상옥 등 5명은 도룡산에 흩어진 동지들을 모았고, 박영찬 등 2명은 외남면으로 파견되어 적의 수장을 암살하고 행정 사무소를 불태웠다.[4]

6월 28일, 최지풍 부관은 부하 약 10명을 이끌고 의주군 옥상면의 적 경찰서와 행정 사무소를 습격하여 불태웠고, 적군 1명이 사망했다.[4] 6월 30일, 고령삭면 천마산에서 제3소대장 한성호와 김옥선이 의주경찰서 사사코 보조 검사 등에게 체포되었다.[1]

7월 26일, 천마산대의 주요 근거지가 약 100명의 적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초산으로 후퇴하면서 가별면의 갑연 행정 사무소를 불태우고 초산군 부송동에서 적군 산림 감시원 2명을 살해했다. 사냥총 1정, 탄환 20발, 망원경 1개, 군용 칼 3개 등 기타 물품을 노획했다. 9월 1일에는 위원군 한탕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소지품을 압수당했다.[4] 이후 대원들은 만주로 이동하여 오동진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 총사령부에 합류했다.[3]

8월 12일, 약 40명의 대원들이 사사코 보조 검사와 대치하다가 불가항력으로 후퇴했다.[1] 8월 18일, 서삼면 원풍동에서 원풍주재소 순찰반장 川原英二|가와바라 에이지일본어를 살해하고 藤原|후지하라일본어에게 부상을 입혔다.[1]

9월 10일, 최지풍 부관은 부하 7명을 이끌고 초산군 사기골에서 적군 1명을 살해했다.[4]

10월 10일, 최시흥 사령관은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 사령부와 협력했다.[4]

12월 8일, 작전을 마치고 귀향하는 병사들이 사사코 보조 검사와 교전을 벌였다.[1]

5. 2. 활동 확대 (1921~1923년)

1921년 1월, 천마산대를 추적하는 수사대가 강화되어 고령삭면, 천마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이어갔다.[1]

1921년 3월, 약 100명의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다음 날, 33명이 손가락을 잘라 혈맹을 맺고, 민회 공천을 통해 최시흥을 적을 토벌하고 근거지를 파괴하는 지도자로 추대했다. 일본군이 산 전체에 불을 질러 삭주군 도롱산으로 이동했다.[4]

1922년 2월, 최지풍(崔志豊) 소위는 부하 3명을 이끌고 화천군 북부 지역의 영동으로 출동했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김봉한이 사망했다. 박응백(朴應百) 참모는 부하 8명을 이끌고 비충군 갑병면 대상동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했다.[4]

8월에는 귀주군으로 출동했던 최의집(崔義集) 대위가 심용준(沈龍俊)을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후 대위로 추천했다. 1923년 3월에는 강계군 화경면 대령현에서 눈을 파고 야영지를 구축했다.[4]

같은 해 3월, 심(沈) 대위는 부하 11명을 이끌고 화천군 서부 지역으로 출동했다. 초산군 태원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김명준이 사망했다. 5월 4일에는 초병이 일본군 6명의 침투를 격퇴했다. 같은 달 15일, 박(朴) 참모는 12명을 이끌고 남양군 구면으로 출동하여 일본군 1명을 사살했다.[4]

같은 해 9월 말, 대대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강계군 안타리 산에 야영지를 구축하고 겨울 식량 수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군수 물자를 포기하고 ○○ 지역으로 이동했다. 3미터 이상 쌓인 눈을 파고 야영지를 재건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4]

1923년 3월 초, 대대 전체는 무기를 재정비하고, 부대를 분할하여 동원 준비를 했다. 소대장 김상옥은 부하 3명과 함께 운산군 문경 주재소를 습격했다. 심용준 참령은 부하 5명과 함께 화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약 2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김준원 부관은 부하 7명과 함께 초산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후 화천 동창 주재소를 습격했으나 지형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박응백 참모는 부하 4명과 함께 남양군 구영면 척곡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병사 5명을 사살하고 7명을 부상시켰다.[4]

8월 초, 김상옥 소대장은 부하 5명을 이끌고 운산군 문경 인근에서 100명 이상의 일본군과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다. 최재경 부관은 부하 4명을 이끌고 위원군 한당면에서 일본군 1명을 사살하고 권총 1정, 탄약 등을 획득했다. 박응백 참모는 부하 4명을 이끌고 강계 지역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들은 동면 마사리에서 약 2시간 동안 일본군과 교전했다.[4]

8월 말, 부대 전체는 최의 귀환을 기다리며 강계 지역에 집중했다. 그들은 대한광복군총영 특사 이한준으로부터 긴급 소식을 받아 지원 계획을 즉각 수립했다. 김준원 소대장과 그의 부대는 본진에 주둔했고, 이 참령 휘하의 두 개 소대는 일본군 추격대 35명과 약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여 마침내 격퇴하고 통일 정부와 통신을 개시했다.[4]

9월 15일, 평안북도 고성군 천안에서 북진경찰서 수사대와의 전투에서 다카무라를 포함한 여러 명이 사망했다.[1]

이후,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남만주로 이동하여 관전과 집안을 거점으로 국내로 잠입했다.[1]

최시흥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과 직접 연락하거나 최지풍 등을 파견하여 무기와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광복군 총사령부의 별동대라는 의미로 천마별령이라고도 불렸다.[1]

5. 3. 장비

천마산대는 창설 당시 20정의 조총과 같은 재래식 무기를 주로 사용하였다.[1][8] 이는 일제의 장비에 비해 낙후된 것이어서 전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20년 7월 19일, 심 소령은 부하 19명을 이끌고 장성군 대유동의 일본군 군사 기지를 공격하여 소총 16정, 탄약 300발, 수류탄 10개, 기타 물품을 획득했다. 같은 해 9월 9일, 김상옥 소대장과 박영찬 서기는 부하 16명을 이끌고 초산군 태원면의 일본 경찰서를 공격하여 일본군 4명을 사살하고 연금 100JPY, 소총 3정, 탄약 300발, 군사 지도, 군복을 획득했다.[4][6]

6.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1923년 초, 일본 제국은 천마산대에 대한 이른바 '토벌 계획'을 통해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공격하고 방화하는 등 독립군 기지를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의 유하현으로 이동했다. 이후 천마산대는 그곳에서 무장 활동을 벌이던 광복군 총사령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철마별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최시흥은 불량 군인들을 지도하여 군기를 확립하고,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훈련을 강화하여 총사령관 오동진으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에서 창설된 무장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부대였으며 북한을 관할했다.[6] 이후 천마산 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되었다.[7]

천마산대는 통일정부에 편입되었으며,[8] 광복군 총사령부, 대한통의부, 참의부에 참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대한통의부로 개편될 때 의용군 제3중대로 조직되었다.[3]

1920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 최시흥은 광복군 총사령부에 합류하여 제4대대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용군 제3중대장도 역임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천마대 (天摩隊)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2-04
[2] 웹사이트 잊혀진 단체, 단학회檀學會를 아시나요? https://www.daehansa[...] Daehan History and Korean Culture 2023-10-17
[3] 웹사이트 3대 단학회장 최시흥 장군과 천마산대 독립운동 http://www.hmhtimes.[...] Korean Cultural Times 2023-10-17
[4] 웹사이트 천마산대 약력 http://www.hmhtimes.[...] Korean Cultural Times 2023-10-16
[5] 뉴스 조선 총독 사이토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양세봉 장군 https://www.ohmynews[...]
[6] 웹사이트 양세봉 https://e-gonghun.mp[...]
[7] 뉴스 "[아! 만주⑦] 양세봉 흉상: 조선혁명군의 위대한 사령관, \"軍神\"으로 숭앙받다" https://www.worldkor[...]
[8] 웹사이트 "(2) 국내의 독립 전쟁"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0-16
[9] 웹인용 천마대(天摩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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