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링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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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링겐가는 962년 브라이스가우 백작 베르톨트 1세로부터 시작된 알레만니족 출신의 귀족 가문이다. 오스트리아 공작을 배출했으나 3대 만에 공국 영유권을 잃었고, 베르톨트 2세는 슈바벤 대공위를 두고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다투다 체링겐 공작이 되었다. 콘라트 1세는 부르고뉴 동부를 획득하여 스위스로 영토를 확장했고, 스위스 도시 건설에 기여했으나, 1218년 베르톨트 5세의 사망으로 슈바벤계는 단절되었다. 바덴계는 바덴 변경백을 거쳐 바덴 대공국으로 발전하여 독일 제국에 가입했으나,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정이 폐지되었다. 체링겐 가문은 브라이스가우, 부르고뉴 등지에 영토를 소유했으며, 프리부르, 베른 등 도시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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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링겐가 - 베르톨트 5세 폰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5세는 1186년 체링겐 공작이 되어 부르고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베른을 건설하여 팽창 정책을 추진했지만, 울리헨 전투에서 패배하고 1218년 사망하며 체링겐 가문의 남계는 단절되었다. - 체링겐가 - 바덴의 빅토리아
바덴의 빅토리아는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와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의 장녀로 태어나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와 결혼하여 스웨덴 왕비가 되었으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친독일 성향으로 논란이 되었다.
| 체링겐가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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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케른텐 공국 베로나 변경백령 바덴 변경백국 바덴 대공국 |
| 칭호 | 백작, 공작, 후작 |
| 창시자 | 베르톨트 1세 폰 체링겐 |
| 마지막 통치자 | 베르톨트 5세, 체링겐 공작 프리드리히 2세, 바덴 대공 |
| 건립 년도 | 11세기 |
| 해체 | 1218년 (체링겐 공작 가문) |
| 모계 가문 | 알라홀핑거 가문 |
| 분가 | 바덴 (존속) 테크 (1439년 절멸) |
| 독일어 | 헤르초그툼 체링겐 |
| 독일어 | 체링어 |
| 가문 정보 | |
| 원어명 | Zähringer |
| 건립일 | 11세기 |
| 창설자 | 베르톨트 2세, 카린티아의 대공 |
| 해체 | 1218년 |
| 마지막 수장 | 베르톨트 5세 폰 체링겐 공작 |
| 작위 | 백작, 공작, 후작 |
| 관련 가문 | 바덴가 (현) 테크가 (1439년에 소멸) |
2. 역사
체링겐 가문은 알레만니족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962년 브라이스가우 백작으로 등장한 베르톨트 1세를 시조로 한다.[1] 오스트리아 공작이 된 헤르만 6세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공국 영유권은 3대 만에 상실했다.[1]
베르톨트 1세의 증손자 베르톨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슈바벤 공국을 약속받았으나, 하인리히 3세 사후 미망인 아그네스가 약속을 어기고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슈바벤 대공에 봉했다.[1] 베르톨트 1세에게는 케른텐 공국과 베로나가 주어졌지만, 이름뿐인 수여에 반발한 베르톨트 2세는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간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 편에 서서 대립왕 루돌프와 함께 하인리히 4세와 싸웠다.[1] 장남 헤르만 1세는 1074년(1073년 설도 있음) 베로나 변경백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사망했고, 아들 헤르만 2세가 바덴을 상속받아 바덴 변경백 가문으로 이어졌다.[1]
베르톨트 2세는 루돌프 사망(1080년) 후에도 아들이자 처남인 베르톨트 폰 라인펠덴과 함께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 프리드리히 1세와 대공위를 다투다, 1090년 처남 사망으로 라인펠덴 가문이 단절되자 유산을 계승해 슈바벤 대공을 칭했다.[1] 1098년 마인츠 화의 결과, 프리드리히 1세가 슈바벤 대공이 되고, 베르톨트 2세는 체링겐 공작으로서 대공위를 유지하며 브라이스가우 주변 세력을 지켰다.[1]
1127년, 베르톨트의 차남 콘라트 1세는 조카 부르고뉴 백작기욤 3세 암살 후 상속권을 주장, 르노 3세와 다투어 부르고뉴 동부를 획득하고,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에게서 황제 대리직을 받아 부르군트 왕국 옛 영토인 스위스로 영지를 확대했다.[1] 이는 로타르 3세의 대 슈타우펜 가문 정책의 일환이었다.[1] 슈바벤 계열은 프리부르, 베른 등 도시 건설, 취리히 정비 등 스위스 발전에 기여했다.[1]
1218년 콘라트 1세의 손자 베르톨트 5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여 슈바벤 계열은 단절되었고, 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유산이 상속되었다.[1] 콘라트 1세의 아들 아달베르트 1세는 테크 공작을 칭했지만, 이 가문도 1439년 단절되어 영토는 뷔르템베르크 가문에 매각되었다.[1]
바덴 변경백 계열은 1112년 헤르만 2세가 바덴 변경백이 된 후, 신성 로마 제국 영방으로 존속, 분할 상속으로 분열과 합병을 반복하다 1771년 카를 프리드리히가 통일, 1803년 선제후, 1806년 바덴 대공국으로 승격되었다.[1] 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 구성국이 되었고, 1918년 독일 혁명까지 존속했다.[1]
2. 1. 기원과 초기 역사
962년 브라이스가우 백작으로 등장한 베르톨트 1세 (982년 사망)가 시조이며, 알레만니족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베르톨트 1세의 증손자인 베르톨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서 슈바벤 공국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 사후, 그의 미망인 아그네스는 약속을 어기고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슈바벤 대공에 임명했다. 대신 베르톨트 1세에게는 케른텐 공국과 베로나가 주어졌지만, 이름뿐인 수여에 반발한 차남 베르톨트 2세는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 편에 서서 대립왕 루돌프와 함께 하인리히 4세에 대항했다. 한편, 장남 헤르만 1세는 1074년(혹은 1073년) 베로나 변경백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급사했고, 아들 헤르만 2세가 바덴을 상속받아 바덴 변경백 가문으로 이어졌다.
베르톨트 2세는 루돌프가 1080년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인 베르톨트 폰 라인펠덴과 함께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이자 하인리히 4세의 사위인 프리드리히 1세와 대공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1090년 처남이 사망하여 라인펠덴 가문이 단절되자 유산을 상속받아 슈바벤 대공을 칭하고, 1098년 마인츠 화의에서 화해할 때까지 분쟁을 계속했다. 화해 결과, 프리드리히 1세가 슈바벤 대공이 되었고, 베르톨트 2세는 체링겐 공작으로서 대공 지위를 유지하며 브라이스가우 주변 세력을 확보했다.
1127년 베르톨트의 차남 콘라트 1세는 조카인 부르고뉴 백작기욤 3세가 암살되자 상속권을 주장하며 르노 3세와 대립했다. 그 결과 부르고뉴 동부를 획득하고,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로부터 부르고뉴 총독(황제 대리직)에 임명되어 부르고뉴 왕국의 옛 영토인 스위스로 영지를 확장했다. 이는 로타르 3세의 대 슈타우펜 가문 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슈바벤 계열은 프리부르, 베른 등의 도시를 건설하고 취리히를 정비하는 등 스위스 발전에 기여했다.

2. 2. 체링겐 공작 시대
1098년 마인츠 화의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화해 결과, 베르톨트 2세는 체링겐 공작 지위를 유지하며 브라이스가우 주변 세력을 지켰다.1127년, 베르톨트 2세의 차남 콘라트 1세는 조카 부르고뉴 백작기욤 3세가 암살되자 상속권을 주장, 르노 3세와 다투어 부르고뉴 동부를 획득했다.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는 콘라트 1세에게 황제 대리직을 부여했고, 부르군트 왕국의 옛 영토인 스위스로 소유지를 확대했다. 이는 로타르 3세의 대 슈타우펜 가문 정책의 일환이었다. 슈바벤 계열은 프리부르, 베른 등의 도시를 건설하고, 취리히를 정비하는 등 스위스 발전에 힘썼다.
그러나 1218년, 콘라트 1세의 손자 베르톨트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슈바벤 계열은 단절되었다. 키부르크 가문이 유산을 상속받았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 이 가문의 융성 기반이 되었다. 콘라트 1세의 아들 아달베르트 1세는 테크 공작을 칭했지만, 이 가문도 1439년에 단절되었고 영토는 뷔르템베르크 가문에 매각되었다.
체링겐 공작 목록(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다.
- 베르톨트 2세 (1100년 - 1111년)
- 베르톨트 3세 (1111년 - 1122년)
- 콘라트 1세 (1122년 - 1152년)
- 베르톨트 4세 (1152년 - 1186년)
- 베르톨트 5세 (1186년 - 1218년)
2. 3. 분가와 계승
962년에 브라이스가우 백작으로 등장한 베르톨트 1세 (982년 사망)가 체링겐 가문의 시조이며, 조상은 알레만니족의 유력 귀족이라고 전해진다. 오스트리아 공작이 된 헤르만 6세도 나왔지만, 오스트리아 공국의 영유권은 3대 만에 잃었다.베르톨트 1세의 증손자 베르톨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하인리히 3세에게 슈바벤의 봉토 수여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자 미망인 아그네스는 약속을 어기고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슈바벤 대공으로 봉했다. 베르톨트 1세에게는 대신 케른텐 공국과 베로나가 주어졌지만, 이름뿐인 수여에 반발한 차남 베르톨트 2세는 하인리히 4세와 교황그레고리오 7세가 서임권 투쟁으로 다투자 교황파로서 대립왕이 된 루돌프와 함께 하인리히 4세와 싸웠다. 한편 장남 헤르만 1세는 1074년 (혹은 1073년)에 베로나 변경백으로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급사했고, 아들 헤르만 2세가 바덴을 상속받아 자손은 바덴 변경백으로 이어졌다.
베르톨트 2세는 루돌프가 1080년에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이자 아내의 오빠인 베르톨트 폰 라인펠덴과 함께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하인리히 4세의 사위인 프리드리히 1세와 대공위를 놓고 다투었고, 1090년에 의붓오빠가 사망하여 라인펠덴 가문이 단절되자 유산을 물려받아 슈바벤 대공을 칭하고, 1098년 마인츠 화의에서 화해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화해 결과 프리드리히 1세가 슈바벤 대공이 되었고, 베르톨트 2세는 대신 체링겐 공작으로서 대공위를 유지하며 브라이스가우 주변의 세력을 지켰다.
1127년, 베르톨트의 차남 콘라트 1세는 조카 부르고뉴 백작기욤 3세가 암살된 것으로 인해 상속권을 주장하며 르노 3세와 다투어 부르고뉴 동부를 획득,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로부터 황제 대리직을 부여받아, 부르고뉴 왕국의 옛 영토에 해당하는 스위스로 소유지를 확대했다. 이 조치는 로타르 3세의 대 슈타우펜 가문 정책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슈바벤 계열은 스위스의 발전에 헌신하여 프리부르, 베른 등의 도시를 건설하고, 취리히의 정비도 했다. 그러나 1218년에 콘라트 1세의 손자 베르톨트 5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여 슈바벤 계열은 단절되었고, 혼인 관계에서 키부르크 가문이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더 나아가 키부르크 가문과 혼인 관계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 동 가문의 융성의 기초가 되었다. 콘라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 아달베르트 1세는 테크 공작을 칭했지만, 이 가문 역시 1439년에 단절되었고, 영토는 뷔르템베르크 가문에 매각되었다.
바덴 계열은 1112년에 헤르만 2세가 바덴 변경백이 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으로서 존속했으며, 분할 상속으로 여러 번 분열과 합병을 반복했지만, 1771년에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가 소유지를 통일하여 바덴 변경백이 되었고, 1803년에 선제후로 승격,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대공이 되어 바덴 대공국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바덴 대공국은 독일 연방에 가입한 후 1871년에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고, 1918년 독일 혁명까지 존속했다.
3. 주요 영지 및 도시
체링겐 가문은 브라이스가우, 투르가우, 오르테나우, 바르 등 여러 지역에 영지를 소유했다. 1098년, 체링겐 가문의 창시자인 베르톨트 2세는 체링겐 성과 취리히에 대한 재판권을 받았다.[1] 라인펠덴 백작령과 부르크도르프구의 소유권도 대략 1198년에 시작되었다.[1]
1127년에는 부르군디 백국의 '감독권'이 부여되었으나, 쥐라 산맥 동쪽과 제네바 호 북쪽의 상부 부르군디 지역으로 제한되었다.[1] 1156년, 제네바 호 남쪽 영토는 사보이 백국과 프로방스에 양도되었고, 그 대가로 베르톨트 4세는 제네바, 시온, 로잔의 주교에 대한 서임권을 받았는데, 이는 로잔에서만 실현되었다.[1]
체링겐 공작(Zähringerstädte|체링겐슈테트de)들은 영토 확장 대신 기존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봉건적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여기에는 요새화된 마을이나 도시로의 정착지 확장과 새로운 성 건설이 포함되었다.[1]
체링겐 공작이 설립하거나 확장한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 지역 | 도시 | 설립 연도 |
|---|---|---|
| 바덴 (검은 숲 서쪽)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 1120년 |
| 바덴 (검은 숲 서쪽) | 오펜부르크 | 1148년 이전 |
| 바덴 (검은 숲 서쪽) | 노이엔부르크 암 라인 | 1175년 |
| 뷔르템베르크 (검은 숲 동쪽) | 장크트 페터 | 1093년 |
| 뷔르템베르크 (검은 숲 동쪽) | 빌링겐 | 1119년 |
| 뷔르템베르크 (검은 숲 동쪽) | 브로일링겐 | 1200년경 |
| 뷔르템베르크 (검은 숲 동쪽) | 바일하임 안 데어 테크 (림부르크 성) | 1060년경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라인강 | 라인펠덴 | 1150년경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아레 분지 | 프리부르 (프라이부르크 임 위흐틀란트) | 1157년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아레 분지 | 베른 | 1191년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아레 분지 | 부르크도르프 | 1175년 이전 (성)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아레 분지 | 무르텐 | 1180년경 |
| 부르고뉴 (서부 스위스 고원) - 아레 분지 | 툰 | 1190년경 |
이 외에도 졸로투른(1127년 획득), 취리히(1173년 획득), 샤프하우젠(1198년 획득), 슈타인 암 라인 등이 체링겐의 소유 또는 관할권 아래에 있었다.
1218년 체링겐 가문이 단절된 후, 영토는 분할되었고, 이는 베른과 취리히의 제국 직속과 구 스위스 연방의 성장 등 중세 코뮌 운동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1]
4. 가계도
wikitext
| 범례 |
|---|
참조
[1]
간행물
2015
[2]
서적
Münzgeschichte des Zähringen-Badischen Fürstenhauses
https://books.google[...]
1846
[3]
문서
Geschichte und Beschreibung des Badischen Wappens von seiner Entstehung bis auf seine heutige Form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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