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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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3세는 1039년 독일 왕위에 오른 후, 대관식에서 '로마인의 왕'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교황 임명권을 행사하여 로마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 개혁을 지원했으며,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와 같은 동쪽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하인리히 3세는 바이에른과 하 로렌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독일 왕으로 임명하여 왕권 안정을 꾀했다. 1056년 사망 당시, 그는 강력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부르고뉴, 독일, 이탈리아에서의 권위를 확립했으며, 고슬라 궁전 건설과 같은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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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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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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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인리히 3세 |
독일어 이름 | Heinrich III |
통치 | |
작위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1046년 12월 25일 – 1056년 10월 5일 |
대관식 | 1046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대성당, 로마 |
이전 통치자 | 콘라트 2세 |
다음 통치자 | 하인리히 4세 |
작위 1 | 독일 왕 (공식적으로 로마인의 왕) |
재위 기간 1 | 1028년 4월 14일 – 1056년 10월 5일 |
대관식 1 | 1028년 4월 14일 아헨 대성당 |
이전 통치자 1 | 콘라트 2세 |
다음 통치자 1 | 하인리히 4세 |
작위 2 | 이탈리아 왕 및 부르고뉴 왕 |
재위 기간 2 | 1039년 6월 4일 – 1056년 10월 5일 |
이전 통치자 2 | 콘라트 2세 |
다음 통치자 2 | 하인리히 4세 |
가문 | |
왕가 | 잘리어 왕조 |
아버지 | 콘라트 2세 |
어머니 | 기젤라 폰 슈바벤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군힐트 폰 데네마르크 (1036년 결혼, 1038년 사망) 아그네스 폰 포와투 (1043년 결혼) |
자녀 | 베아트릭스 1세 폰 쿠에들린부르크 아델하이트 2세 폰 쿠에들린부르크 마틸데, 슈바벤 공작 부인 하인리히 4세 콘라트 2세, 바이에른 공작 유디트, 헝가리 왕비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016년 10월 28일 |
사망일 | 1056년 10월 5일 |
사망 장소 | 보트펠트 |
매장 장소 | 고슬라르 황궁 (심장), 슈파이어 대성당 (몸) |
기타 | |
서명 형태 | 서명 (10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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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039년 아버지 콘라트 2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즉위했으며, '로마인의 왕'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그의 통치 아래 신성 로마 제국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다. 특히 1046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세 명의 교황을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2세를 직접 옹립하며 교회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39] 그는 이후에도 교황 임명권을 행사하며 교회 개혁을 지원했으나, 이는 훗날 서임권 투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또한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를 공동 왕으로 세워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4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016년 10월 28일[6] 또는 1017년[7]에 태어난 하인리히는 콘라트 2세와 스바비아의 기젤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콘라트는 프랑켄 귀족 출신으로 라인강 유역에 영지를 소유했으며, 고조모인 리우트가르트를 통해 황가인 오토 왕조와 혈연 관계였다. 어머니 기젤라는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스바비아 공작령과 부르군디 왕국에 대한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콘라트 2세는 문맹이었지만, 학식 있는 기젤라는 아들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하인리히는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8] 1028년 2월 이후 발행된 칙서에서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로 언급되었다.1024년 마지막 오토 왕조 군주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하자, 독일 귀족들은 9월 4일 하인리히의 아버지 콘라트를 새로운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콘라트의 의붓아들인 에른스트 2세를 포함한 반대 세력이 1025년 하반기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말까지 대부분 진압되었다. 1026년 초, 어머니 기젤라의 설득으로 당시 여덟 살이었던 하인리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에른스트 2세의 사면을 중재했다.
콘라트 2세는 1027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하인리히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 1027년 7월 24일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 헝가리 왕자 에머리크의 주장을 물리치고 10살의 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인정하도록 바이에른 귀족들을 설득했다.[31]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1028년 첫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기 전, 콘라트는 하인리히 2세 황제의 동생이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브루노 주교에게 하인리히의 후견을 맡겼다. 브루노는 하인리히에게 "왕실의 개념과 제국의 전통"을 가르쳤으며, 하인리히는 브루노와 함께 로마로 가서 1027년 부활절에 열린 아버지의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1028년 부활절, 아헨에서 "성직자와 백성"의 선출을 통해 하인리히가 공동 통치자(왕)로 즉위했으며, 쾰른 대주교 필그림이 대관식을 집전했다. 이후 하인리히는 비잔틴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인장에 '제국의 희망'(spes imperii|스페스 임페리이la)으로 불렸다. 콘라트 2세는 아들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1027년과 10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냈으나, 비잔티움 제국 황실과의 혼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브루노 주교가 1029년 4월 6일에 사망하자, 프라이징의 에길베르트 주교가 새로운 가정교사가 되었다. 1030년, 바이에른과 헝가리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콘라트 2세는 1030년 6월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보급품 부족으로 후퇴해야 했고, 비엔나에서 헝가리군에게 패배했다. 콘라트는 12세의 하인리히에게 헝가리와의 협상을 맡겼다. 프라이징의 에길베르트 주교는 하인리히를 대신하여 성 이슈트반 1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국경 지대의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하는 대가로 포로 석방에 합의했다. 하인리히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1031년 초 이슈트반 1세와 직접 만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에길베르트의 멘토십은 1033년 6월 말 또는 7월 초 하인리히가 기사 작위를 받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035년 5월 18일, 하인리히는 크누트 대왕의 딸인 덴마크의 군힐다와 약혼했고, 결혼식은 1036년 오순절에 네이메헨에서 열렸다.[13] 1037년 봄,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라노의 아리베르트 대주교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명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10][11]
1038년, 하인리히는 이탈리아에서 아버지를 돕던 중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귀국하는 길에 아내 군힐다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하인리히는 슈바벤 공작위와 부르군트 왕위를 계승받았다.[31]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인리히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다양한 정치적,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32][33]
2. 2. 즉위와 왕권 강화
1039년 아버지 콘라트 2세가 사망하자 독일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대관식 때 프랑크족의 왕이 아닌 '로마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군주였다.하인리히의 아버지 콘라트 2세는 독일 내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1027년 7월 24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바이에른 귀족들을 설득하여 당시 10살이던 하인리히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인정하게 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콘라트 2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처음에는 스트라스부르의 베르너 주교를 통해 비잔틴 황실과의 혼인을 추진했으나 베르너 주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아우크스부르크의 브루노 주교가 사망하자 1029년 프라이징의 에길베르트 주교를 하인리히의 새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콘라트 2세의 주도로 1028년 부활절에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 필그림에 의해 하인리히는 공동 통치자로 왕관을 썼다. 이후 그는 비잔틴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인장에 spes imperii|제국의 희망la으로 명명되었다.
어린 시절 바이에른 공작으로서 하인리히는 헝가리와의 국경 분쟁을 경험했다. 1030년 콘라트 2세의 헝가리 침공이 실패한 후, 12세의 하인리히는 헝가리와의 협상을 맡게 되었다. 가정교사 에길베르트는 하인리히를 대신하여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와 협상했고, 포로 석방의 대가로 국경 지대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하는 평화 조약을 1031년 초에 체결했다. 하인리히는 1033년 기사 작위를 받으며 에길베르트의 멘토십을 마쳤다.
1036년, 하인리히는 크누트 대왕의 딸인 덴마크의 군힐다와 네이메헨에서 결혼했으나, 군힐다는 1038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039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하자 하인리히는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영토 순방을 시작하여 로렌의 고틀로 1세 공작으로부터 신종 서약을 받았고, 쾰른에서는 쾰른 대주교 헤르만 2세와 합류하여 작센으로 이동했다. 그는 고슬라를 미래의 황제 거주지로 정했다. 튀링겐에서는 마르크그라프 에크하르트 2세를 만나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 공작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바이에른을 방문하고 울름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잉겔하임 궁전에서는 부르고뉴 사절단과 밀라노의 아리베르트 대주교로부터 인정을 받았다.[13] 이로써 아버지 대부터 이어진 밀라노와의 갈등이 해결되었다.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의해 폐위된 카린티아 공작 아달베로 1세의 뒤를 이어 카린티아 공작령도 상속받아, 독일, 부르고뉴, 이탈리아의 삼중 왕이자 바이에른, 슈바벤, 카린티아의 삼중 공작이 되었다.[14]
하인리히 3세가 즉위할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는 그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 거의 없었다. 이전 왕들과 달리 그의 영토 순방은 왕권을 과시하는 행위였다.[32] 그는 왕위 즉위 직후 바이에른과 슈바벤 공작 지위를 귀족에게 수여했지만, 해당 지역에 기반이 없는 인물들을 임명하여 공작 지위를 사실상 관직화하려 했다.[32][34] 또한 많은 소유지를 교회에 기증하여 지방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왕권 강화 시도는 로렌 공작과의 군사적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으나, 공작령을 상로렌과 하로렌으로 분할하고 각각 다른 가문에 수여함으로써 해결했다.[35] 다만, 빌룽 가문이 세습하던 작센 공작령에는 깊이 개입하지 못하고 지방 귀족과 대립하기도 했다. 동쪽의 이웃 국가인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에 대해서는 이전까지 명목상이었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36][37]
1046년, 하인리히 3세는 로마 교회의 개혁파 성직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로 원정했다. 그는 당시 난립하던 3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자신을 수행했던 독일인 성직자를 클레멘스 2세로 임명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세웠다. 이후 클레멘스 2세로부터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이후에도 3명의 교황을 연이어 지명하며 사실상 교황 임명권을 행사했고, 자신이 세운 4명의 독일인 교황들을 통해 10년간 로마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 개혁을 지원했다.
1053년, 바이에른의 벨프 가문과 하 로렌의 고드프리 3세 등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3세는 이를 진압했다. 같은 해, 그는 3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를 공동 독일왕으로 임명하여 왕위 계승의 안정을 도모했다.
2. 3. 교회 개혁과 교황권 강화
로마 교회는 1045년 교황 베네딕토 9세의 문란한 생활과 이로 인한 로마 폭동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베스테르 3세가 교황좌를 차지하기도 했으나[38], 베네딕토 9세는 곧 복위하여 그 자리를 그레고리우스 6세에게 팔아넘겼다[39]. 심지어 베네딕토 9세와 실베스테르 3세 모두 복위를 노리는 등, 교회 내부는 추한 권력 투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해 줄 인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을 기대했다[39].1046년, 로마 교회의 개혁파 성직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하인리히 3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수트리 교회 회의를 열어 베네딕토 9세, 실베스테르 3세, 그레고리우스 6세 등 3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며 혼란을 수습했다[39]. 하인리히 3세는 당초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를 새 교황으로 세우려 했으나, 그가 북방 선교를 이유로 거절하자 밤베르크 주교였던 수이트거를 교황 클레멘스 2세로 옹립했다[39]. 그리고 1046년 클레멘스 2세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으며 정식으로 황제위에 올랐다[39]. 이때 폐위된 그레고리우스 6세의 측근 중에는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되는 수도사 힐데브란트도 있었다[39]. 하인리히 3세는 1047년 5월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클레멘스 2세가 1047년 10월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다마수스 2세마저 즉위 3주 만에 사망하자, 하인리히 3세는 자신의 친척인 투르 주교 브루노를 교황 레오 9세로 임명했다. 레오 9세는 힐데브란트 등 개혁적인 인물들을 교황청으로 불러들여 시모니아(성직 매매)와 성직자 결혼 금지 등 교회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40]. 하인리히 3세가 임명한 독일 출신 교황들은 이후 10년간 로마 교회를 주도하며 교회 개혁을 이끌었다.
훗날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에 벌어진 서임권 투쟁 때문에 하인리히 3세를 교회 개혁의 반대 세력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하인리히 3세는 이전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개혁의 중요한 추진자였다. 1046년 수트리 교회 회의를 통한 로마 교회 혼란 수습[44]은 교회 개혁 운동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교회 조직 역시 황제의 권력 강화를 일정 부분 환영했다. 황제의 보호 아래 각 지역 제후들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중세 도시들이 황제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제후의 간섭을 피하고 자치를 유지하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또한, 황제가 제후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토지가 교회에 기증되어 교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작센 왕조와 잘리어 왕조 시기의 제국 교회 체제는 황제권과 교회 조직 모두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양측은 협력하며 세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교회와 교황 입장에서는 황제가 강력한 보호자인 것은 좋지만,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아직 정교 분리 개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성속(聖俗) 세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으며, 이것이 서임권 투쟁의 배경이 되었다.
황제권 강화는 제국 내 제후들에게도 위협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황제권 강화를 견제하려는 교황과 제후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임권 투쟁은 이러한 교황, 황제, 제후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2. 4. 대외 관계
thumb)를 설립하고 고슬라에 정신적 중심지를 세웠다. 여기에는 황제의 궁전, ''성 시몬과 성 유다''의 교회와 ''성 울리히'' 궁정 예배당, 그리고 ''우리 부인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하인리히 3세는 즉위 후 영토 순방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졌다. 저지대 국가에서는 상·하 로렌 공작 고틀로 1세로부터 신종 서약을 받았고, 쾰른에서는 쾰른 대주교 헤르만 2세와 합류하여 작센으로 이동했다. 그는 고슬라를 미래의 황제 거주지로 정하고, 튀링겐에서는 마르크그라프 에크하르트 2세를 만나 보헤미아의 상황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12] 이후 바이에른을 방문했으며, 울름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에서는 이탈리아 공작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잉겔하임 궁전에서는 부르고뉴 사절단과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트의 인정을 받으며 아버지 콘라트 2세 시대의 오랜 제국 내 갈등을 일부 해소했다.[13] 또한 카린티아 공작 아달베로 1세가 폐위되면서 카린티아 공작령을 상속받아, 독일, 부르고뉴, 이탈리아의 삼중 왕이자 바이에른, 슈바벤, 카린티아의 삼중 공작이 되었다.[14]


1041년 크리스마스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후, 그는 자신이 선택한 황궁인 고슬라에서 외국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 자리에는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공작이 직접 참석했으며, 키예프 루스와 폴란드 등에서 온 사절단과의 교류가 있었다. 이후 하인리히 3세는 이부아 근처에서 프랑스의 앙리 1세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는 아키텐 공주였던 푸아티에의 아그네스와의 결혼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1043년, 하인리히 3세는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의 딸인 푸아티에의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당시 그녀의 계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마르텔의 궁정에 있었는데, 하인리히 3세와 아그네스 모두 사냥꾼 하인리히의 후손이라는 혈연 관계 문제와 조프루아 마르텔과의 연관성 때문에 일부 성직자들이 결혼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은 성사되었고 아그네스는 마인츠에서 왕비로 즉위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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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년 로타링기아의 고테로 1세가 사망하자, 하인리히 3세는 공작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장남 고드프리에게 상로타링기아만 물려주고, 차남 고테로 2세에게 하로타링기아를 주는 방식으로 분할 상속을 결정했다. 이는 고테로 1세의 유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제후들의 정치적 개별주의를 억제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반발한 고드프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3세는 고드프리를 아헨으로 소환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상로타링기아 공작령과 베르됭 백작령을 몰수했다. 고드프리는 도주하여 반란을 계속했다.
하인리히 3세는 1045년 로타링기아로 군대를 보내 고드프리의 성들을 공략했으나 보급 문제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부르고뉴로 이동했는데, 고드프리는 그곳에서도 제국 세력과 현지 독립파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 반란을 조장했다. 몽벨리아르 백작 루이가 부르고뉴 백작 레지날드 1세를 공격했으나, 하인리히 3세가 도착하자 레지날드 1세와 제네바 백작 게롤트 등 부르고뉴 제후들은 하인리히에게 경의를 표하며 복종했고, 부르고뉴는 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롬바르드 귀족들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후, 고슬라에서 하인리히 3세는 오토에게 슈바벤 공작령을, 라인 궁정백 하인리히 1세에게 로렌 공작령을,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에게 안트베르펜 변경백령을 수여하는 등 제국 내 영지를 재분배했다. 반란을 일으켰던 고트프리트는 1045년 7월에 항복했고 기비헨슈타인에 투옥되었다.
2. 4. 1. 보헤미아와의 관계
1040년,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로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이는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독자적인 대주교구 설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3세는 여러 수도원의 개혁 회의에 참석한 후, 스타블로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7월에는 고슬라에서 병력을 합류시켜 레겐스부르크에 전 군대를 집결시켰다. 8월 13일에 출정했으나, 보헤미아 숲의 고개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브루데크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아들을 포함한 보헤미아 인질들을 석방받은 후에야 하인리히 3세는 포로로 잡았던 인물들을 풀어주었다. 평화 조약을 맺은 뒤 하인리히 3세는 서둘러 철수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2세가 되는 수이드거를 밤베르크 주교로 임명했다.[12]같은 해 1040년, 헝가리 왕국에서는 페테르가 사무엘 아바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했다. 하인리히 3세는 이전의 적대 관계에도 불구하고 페테르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이전 동맹을 잃었다. 이에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로의 재침공을 준비했다. 첫 원정 이후 거의 정확히 1년 만인 1041년 8월 15일, 하인리히 3세는 다시 출정하여 승리했고, 레겐스부르크에서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2]
1041년 말, 하인리히 3세는 자신이 선택한 황궁인 고슬라에서 외국 사절들을 맞이했는데, 이때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도 직접 참석했다.
2. 4. 2. 헝가리와의 관계
콘라트 2세 황제 시기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 왕국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 콘라트 2세는 헝가리 국왕 성 이슈트반 1세의 아들 에머리크가 바이에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1] 1030년, 바이에른이 헝가리를 공격하자 헝가리도 반격에 나섰다.[2] 이에 콘라트 2세는 로트링겐, 보헤미아 등 제국군을 동원해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보급 문제와 헝가리군의 효과적인 방어로 인해 비엔나 근처에서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2]콘라트 2세는 당시 12세였던 아들 하인리히에게 헝가리와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겼다.[2] 하인리히의 후견인이었던 프라이징의 에길베르트 주교는 성 이슈트반 1세와 협상을 진행했다.[3] 협상 결과, 헝가리가 제국 포로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제국은 국경 지역의 일부 영토를 헝가리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4] 하인리히는 이 조건을 수락하여 1031년 초 성 이슈트반 1세와 직접 만나 평화 조약을 맺었다.[5] 이때 헝가리에 넘어간 영토는 이후 오랫동안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6]
1040년, 헝가리에서는 페테르 오르세올로가 사무엘 아바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독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인리히 3세는 과거의 적대 관계에도 불구하고 페테르를 받아들였다.[7] 이는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 공작을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1041년, 바이에른이 헝가리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7세를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하고 제국의 제후들과 함께 헝가리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8]
1042년 9월, 하인리히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서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사무엘 아바는 동쪽으로 도피했고, 하인리히가 남긴 관리자는 곧 쫓겨났다.[8] 하인리히는 이후 사무엘 아바에게 압력을 가해, 과거 성 이슈트반 1세가 양도했던 도나우 유역의 영토를 다시 제국에 반환하도록 만들었다. 이 영토는 1030년 콘라트 2세의 패배 이후 헝가리로 넘어갔던 곳이었다.[6]
1044년 7월 6일, 하인리히는 페테르 오르세올로와 함께 다시 헝가리로 진격하여 멘페 전투에서 사무엘 아바의 군대와 맞붙었다. 헝가리 군 내부의 분열로 인해 사무엘 아바의 군대는 하인리히의 군대에 쉽게 패배했다.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페테르 오르세올로는 하인리히 3세의 봉신으로서 헝가리 왕위에 복위했으며, 사로잡힌 사무엘 아바는 처형되었다. 이 승리를 통해 하인리히는 헝가리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헝가리에 정기적인 제국 행정을 시행했다.[7]
2. 4. 3. 폴란드와의 관계
하인리히 3세는 1041년 크리스마스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후, 자신이 선택한 황궁인 고슬라에서 외국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때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공작은 직접 방문했지만, 폴란드의 카지미르 1세가 보낸 사절단은 카지미르 1세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인리히 3세에게 거부당했다. 키예프 루스에서 온 결혼 외교 사절단 역시 거절되었다.2. 5. 결혼과 후계
1043년 하인리히 3세는 아키텐 공작 기욤 5세와 부르고뉴의 아그네스의 딸인 푸아티에의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당시 그녀의 계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마르텔의 궁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조프루아 마르텔은 프랑스 왕에게 골칫거리인 봉신이었는데, 이러한 연관성과 더불어 하인리히 3세와 아그네스 사이에 혈연 관계(두 사람 모두 사냥꾼 하인리히의 후손)가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성직자들이 결혼에 반대하며 우려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아그네스는 마인츠에서 여왕으로 즉위했다.[18]
결혼 직후인 1043년 10월, 하인리히 3세는 트리부르에서 병을 앓게 되었다. 그가 위독해지자 바이에른의 하인리히와 슈바벤의 오토는 오토의 조카이자 팔츠 백작의 후임이었던 로트링겐의 하인리히 1세를 하인리히 3세의 후계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다행히 하인리히 3세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당시까지는 제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1050년, 장남이자 훗날 하인리히 4세가 되는 아들이 태어났다. 이어 1052년에는 차남 콘라트 2세(바이에른 공작)가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1055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인리히 3세는 제위 계승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1053년에는 트리부어에서 열린 집회에서 당시 불과 세 살이었던 아들 하인리히(태어날 때 이름은 콘라트였으나 후에 하인리히로 개명)를 로마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41] 이는 어린 아들에게 미리 왕위를 확보해주려는 조치였다.
2. 6. 죽음
1056년, 독일로 귀국한 하인리히 3세는 이부아(Ivois)에서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와 회견했다. 이 만남에서 두 군주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하인리히 3세는 밤중에 자리를 떠났다.[22] 이후 그는 마이센의 빌헬름이 사망한 후 발생한 슬라브족의 봉기를 처리하기 위해 북동쪽으로 향하던 중 병에 걸려 보트펠트(Bodfeld)의 제국 사냥터에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죽음을 앞둔 하인리히 3세는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딸 마틸다를 풀어주었다. 또한, 당시 그와 함께 있던 교황 빅토르 2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측근들에게 아직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먼 친척이기도 한 교황 빅토르 2세에게 하인리히 4세의 후견을 부탁했으며[41], 이전에 폐위했던 로렌 공작 고트프리트 3세에게 그의 아내와 영지를 돌려주었다.
1056년 10월 5일, 하인리히 3세는 보트펠트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심장은 고슬라로 옮겨졌고, 시신은 10월 28일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장되어 아버지 콘라트 2세 곁에 묻혔다.[43]

하인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중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부르고뉴, 독일, 이탈리아에서의 왕권은 거의 도전을 받지 않았으며, 교회에 대한 그의 강력한 영향력은 교황 임명권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정책과 교황 임명은 훗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 시대에 서임권 투쟁이라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7] 그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유산 중 하나는 고슬라의 황궁(Kaiserpfalz Goslar)이다.[16]
그가 사망했을 때 아들 하인리히 4세는 겨우 6살이었고, 왕비였던 아그네스가 모후로서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적으로 유능하지 못하여 제국의 왕권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1065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아버지에 비해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서임권 투쟁 과정에서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은 황제권과 교황권 사이의 오랜 권력 투쟁에서 교황권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3. 유산과 평가
1056년, 하인리히 3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여섯 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왕비였던 아그네스가 모후로서 섭정을 맡았으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왕권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친정을 시작한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 하인리히 3세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이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은 황제권과 교황권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 동안 부르고뉴, 독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왕권은 거의 도전을 받지 않았으며, 제국 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도 상당했다. 그는 교회 개혁을 후원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을 직접 임명하는 등 교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의 교회 정책과 잦은 교황 임명은 역설적으로 그가 후원했던 개혁 세력이 훗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투쟁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27]
그는 작센을 제외한 모든 주요 공작령을 한때 자신에게 통합시켰으나, 결국 이를 다시 분할해주었다. 이처럼 그의 강력했던 통치에도 불구하고, 어린 후계자와 불안정한 섭정 체제, 그리고 교회와의 갈등 소지 등 그가 남긴 문제들은 후계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의 통치를 실패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27]
하인리히 3세는 1056년 10월 5일, 하르츠 산맥의 보트펠트 황제 사냥터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심장은 고슬라에 안치되었고, 시신은 슈파이어 대성당의 가족 묘지에 아버지 콘라트 2세 곁에 묻혔다. 그의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시적인 유산으로는 고슬라에 세운 인상적인 황궁(''Kaiserpfalz'')을 꼽을 수 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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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당시에는 아직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는 없었고, 고대 로마 제국 내에서 로마인과 혼교한 게르만 여러 나라 및 그 후계 국가들의 총칭을 막연하게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고, 황제는 고대 제국의 잔재인 로마 교회의 교황에 의해 임명되어 즉위했다. 또 신성 로마 황제나 독일왕은 역사학적 용어로 실제 칭호는 아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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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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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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