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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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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명영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미술 교육가로, 1941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오리진, 한국아방가르드협회 등 미술 단체에서 활동하며 1970년대 중반 단색화 운동에 참여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미술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작품은 평면성을 탐구하며, 지문, 롤러, 한지 등을 활용한 '평면조건' 연작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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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영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최명영이
"평면조건" 연작 단색화를 작업하는 최명영
이름최명영
출생일1941년 9월 23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해주시
국적대한민국
직업화가
학력
교육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작품 활동
분야회화
사조단색화
대표작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 平面條件)
웹사이트
웹사이트최명영 웹페이지

2. 생애

최명영은 1941년 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1][2] 홍익대학교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1975년부터 2007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영국 울버햄튼대학 교환교수를, 1988년부터 2000년까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이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63년 동기생들과 기하학 경향의 오리진(ORIGIN) 동인회 창립전을 개최하고, 1970~73년 한국아방가르드(A.G)협회에서 실험적인 입체작품을 선보였다. 1967년에는 이수자(李樹子, 1943~)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남 지만(智輓), 차남 지호(智豪), 1녀 지연(智涓)을 두었다.

2. 1. 유년 시절과 월남

(왼쪽) 1935년 아버지 최종철(崔鐘喆) 어머니 전병숙(全秉淑) 약혼사진. (오른쪽) 1959년 국립인천사범학교 미술반 친구들과 기념촬영. 정상화 선생 제자들로 후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각기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활동을 하게 된다. 뒷줄 좌측부터 김창희(조각가, 서울시립대교수 역임), 이반(화가, 덕성여대교수 역임), 앞줄 왼쪽 최명영, 김영배(화가, 충남대교수 역임).


1941년 9월 23일 황해도 해주시 북욱동 397에서 아버지 최종철(崔鐘喆, 1917-2006), 어머니 전병숙(全秉淑, 1916-2001) 사이에 7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월남하여 군산, 용인, 인천 등지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1957년 국립인천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한국 단색화 거장 정상화 선생의 미술지도를 받게 된다.

2. 2. 미술 교육과 초기 활동

1941년 9월 23일 황해도 해주시 북욱동 397에서 아버지 최종철(崔鐘喆, 1917-2006)과 어머니 전병숙(全秉淑, 1916-2001) 사이에서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월남하여 군산, 용인, 인천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57년 국립인천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정상화 선생에게 미술 지도를 받았다. 정상화는 훗날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 된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면서 4.19 혁명을 겪었다. 홍익대 재학 시절 한묵, 이봉상, 이규상, 김환기 교수에게 실기 수업을, 이경성(서양미술사), 최순우(한국미술사), 조요한(미학), 이기영(불교철학) 교수에게 이론 강의를 들었다. 특히 이규상, 김환기 교수가 훗날 최명영의 예술적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3년에는 동기생들과 함께 기하학적 추상 경향의 오리진(ORIGIN) 동인회를 창립하여 창립전을 개최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서 실험적인 입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홍익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일원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했으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1] 1968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받았다. 1970년대에 그는 한국 단색화 화가들의 단색화 운동과 연관되었다.[2]


2. 3. 교육자 및 예술가로서의 삶



1957년 국립인천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한국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선생에게 미술 지도를 받았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여 4.19 학생 의거를 겪었다. 홍익대 재학 시절 한묵, 이봉상, 이규상, 김환기 교수에게 실기 수업을, 이경성(서양미술사), 최순우(한국미술사), 조요한(미학), 이기영(불교철학) 교수에게 이론 강의를 들었다. 특히 이규상, 김환기 교수가 지도한 예술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최명영 예술 지향의 중요 지표'로 삼았다.[1]

최명영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75~2007), 영국 울버햄튼대학 교환교수(1990~199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장(1988~2000)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이다. 1963년 대학 재학 시절 동기생들과 기하학 경향의 오리진(ORIGIN) 동인회 창립전을 개최하고, 1970~73년 한국아방가르드(A.G)협회에서 실험적인 입체작품을 선보였다. 1967년 10월 이수자(李樹子, 1943~)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남 지만(智輓), 차남 지호(智豪), 1녀 지연(智涓)을 두었다.

홍익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멤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했으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비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작품이 더욱 실험적이고 미니멀해졌다. 1968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을 받았다. 주로 흰색, 노란색, 검은색 또는 파란색의 단색 팔레트를 사용하며, 손가락, 붓, 롤러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페인트를 적용하고, 종이에 송곳 도구로 드로잉을 제작한다.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라고 여겨진다.[1] 1970년대에 한국 단색화 화가들의 단색화 운동과 연관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단색화는 한국 문화의 과거와 단절하고 서구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한다.[2]

최명영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타이페이 시립 미술관, SPSI 미술관(상하이)에서 전시되었다.[2]

3. 청년기 및 회화관 형성

최명영은 대학교 2학년 때, 그림을 그릴 때 대상 묘사가 갖는 2차원적 회화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이 의문은 ‘회화의 평면성 구현’이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오(悟)’, ‘변질(變質)’, ‘등식(等式)’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환기 교수는 지속적인 수행 자세를 가르쳤으며, 최명영 작가 자신은 근본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 회화의 본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1]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최명영은 1963년 오리진 창립전에 기하학적 경향의 ‘오(悟, Satori)’를 출품하여 평면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후 파리 비엔날레(1967),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1968~69),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등에서 ‘오’ 시리즈는 계속 발전했다. 1970~72년에는 중앙공보관 화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A.G전(한국아방가르드협회전)을 통해 확장과 환원 논리를 수용한 ‘변질’, ‘등식’ 연작을 발표했다.


3. 1.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탐구

최명영은 대학교 2학년 때 그림을 그릴 때 대상 묘사가 갖는 2차원적 회화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이 의문은 ‘회화의 평면성 구현’이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오(悟)’, ‘변질(變質)’, ‘등식(等式)’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규상 교수는 평면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김환기 교수는 지속적인 수행 자세를 가르쳤으며, 최명영 작가 자신은 근본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 회화의 본질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1]

1963년 오리진(Origin) 창립전에 출품한 기하학적 경향의 ‘오(悟, Satori)’는 평면화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후 파리 비엔날레(1967),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1968~69),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등에서 ‘오’ 시리즈는 계속 발전했다. 1970~72년에는 중앙공보관 화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A.G전(한국아방가르드협회전)을 통해 확장과 환원 논리를 수용한 ‘변질’, ‘등식’ 연작을 발표했다. ‘변질’은 색면을 사포로 반복적으로 갈아 물질이 평면 속에 소멸되는 작업이고, ‘등식’은 질료를 지문으로 평면 위에 반복적으로 문질러 물질의 정신화를 꾀하는 지문 작업이다.[1]

1970년대 초 최명영의 이러한 작업은 1975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단색화(Dansaekhwa) 명제 ‘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 시리즈의 바탕이 되는 재료와 물질에 대한 치열한 탐구 시기였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일원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이고 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하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작품에서 "비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실험적이고 미니멀해졌다. 1968년에는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을 받았다.[1]

그는 주로 흰색, 노란색, 검은색 또는 파란색의 단색 팔레트를 사용한다. 페인트는 손가락, 붓, 롤러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적용되며, 그의 드로잉은 종이에 송곳 도구로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라고 평가받는다.[1] 1970년대에 그는 한국 단색화 화가들의 단색화 운동과 연관되었다. 문화적으로 단색화는 한국 문화의 과거와 단절하고 서구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한다.[2]

1976년 서울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 중 일부를 "조건적 평면"이라고 명명했다. 이 시기에는 반복적으로 지문을 찍는 방식과 "캔버스에 단색으로 칠해진 다층색 띠"를 사용하는 방식, 즉 롤러를 이용하여 비환영적이고 평평하며 균일한 표면을 만들고 단색의 획을 겹겹이 쌓는 두 가지 형식의 작업 방식이 나타났다.[3][4]

(Upper image) '' Plane Condition 8016'', 77×53.5cm Silk screen ink on section paper, 1980, (Lower image) ''Plane Condition 8036'', Oriental Ink on Korean Hanji paper, 1980.


이러한 반복적인 흔적 만들기는 회화에 실체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한지를 사용하여 "평면적 조건"을 창조한다. 흰색 한지 시트를 길게 잘라 잉크에 담근 후 수평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흰색 페인트 대신 흰색 한지를 사용했다. 띠로 자르고 붙이는 것은 사각형 분할의 변형이다. 페인트 대신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잉크로 검은 면이 필요했다. 동시에, 그것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바탕'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제거했다."[5][6]

''Plane Conditions 8584'', 140×80 cm Oil on canvas, 1985.


''Plane Conditions 99–102'', 182×228 cm Acrylic on canvas, 1999.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수직 및 수평 흔적은 변화하여 "수직 및 수평 교차의 단절된 확산"과 같이 더 많은 임의성을 허용하며, 비연속적인 확산을 보인다. 따라서 수직 및 수평선은 더 미묘해진다. "선의 조건, 즉 수직 및 수평은 유한하고 무한한 공간적 조건을 형성한다."[8] 그의 작품은 '숨결'과 같은 질감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왔는데, "무한한 호흡과 육체적 움직임에 잠겨" 일종의 동양 서예의 정신성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회화'라기보다는 그렇다.[9]

1990년대 중반 이후, 최명영의 ''조건적 평면'' 연작은 '몸을 바치는' 반복적인 수행을 드러내며, 절대적인 행복 속에서 마음을 수련하는 것을 통해 정신적 수행의 '수행성(修行性)'을 언급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명영 회화는 불교의 '사경(寫經)' 과정으로 인식된다.

Young posed in front of ''Plane Conditions'' and ''Fingerprints'' in the studio


독립 큐레이터 김용대는 최명영의 작품을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과는 달리 개념과 대상이 개별적인 소리로 나뉘기보다는 끊임없이 중첩되는 단순화된 역설적 과정으로, 특정 단어 없이 다양한 상황만을 수용하고 포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매일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짧으며 느슨하게 연결되지만, 어떤 두려움을 쫓아낼 때까지 조용히 이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은 그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모든 것을 의심하고, 어떻게 새롭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11]”라고 평가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가장 한국적인 정체성이다. 동시에, 그 DNA는 중첩된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지문'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신체성을 통한 응축과 수렴은 최명영의 '조건적 평면'이다. 이는 한국 후기 조선 시대에 명성을 얻은 한국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 학자, 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획(一橫)'과 깊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일획(一橫)은 단일 폭의 획 안에 309개의 비문을 담았다고 전해지는 추사 김정희 금석 서예의 정수이다."[12] 이 시대에 기호와 상징이 포함되었고, 형태와 이미지의 수사가 증가했으며, 풍부한 질감의 평면 회화가 각각 새겨졌다."[13]

In 1963, the Origin Foundation was held. (From the left in the back row) 김수억, 신기옥, 최창홍, 권영우, 김택화 (From the left in the front row)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이상락.

3. 2. 초기 실험적 작품 활동

1963년 오리진(Origin) 창립전 출품작인 기하학 경향의 ‘오(悟,Satori)’에서 평면화 의지가 드러난다. 이후 파리 비엔날레(1967),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1968~69),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등에서 ‘悟’ 시리즈는 진화한다. 1970~72년 중앙공보관 화랑,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A.G전(한국아방가르드협회전)을 통해 확장과 환원 논리를 수용한 ‘변질’, ‘등식’ 연작을 발표한다. ‘변질(變質)’은 색면을 사포로 반복적으로 갈아 물질이 평면 속에 소멸되는 작업이다. 등식(等式)은 질료를 지문(指紋,fingerprint)으로 평면 위에 반복적으로 문질러 물질의 정신화를 의도하는 작업이다.[1] 1970년대 초 최명영의 이러한 작업은 1975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단색화(Dansaekhwa) 명제 ‘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平面條件)’ 시리즈의 발판이 되는, 소지(素地)와 질료(質料)에 대한 탐구 시기였다.

홍익대학교 졸업 후,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멤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기하학적이고 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했으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작품에서 "비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더욱 실험적이고 미니멀해졌다. 1968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받았다.[1] 주로 흰색, 노란색, 검은색 또는 파란색의 단색 팔레트를 사용하며, 손가락, 붓, 롤러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페인트를 적용하고, 종이에 송곳 도구로 드로잉을 만든다.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라고 여겨진다.[1] 1970년대에 한국 단색화 운동과 연관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단색화는 한국 문화의 과거와 단절하고 서구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한다.[2]

4. 작품 세계의 전개

최명영의 작품 세계는 1970년대 중반부터 '평면조건'이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지문과 롤러를 이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고, 이후 송곳, 방안지, 한지 등을 활용하여 평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규칙적인 수직·수평 구성을 통해 씨줄(역사)과 날줄(현실)의 반복과 부침에 따른 생성과 소멸이라는 실존적 지평을 표현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최명영의 작업은 사경화(寫經畵)와 같은 수행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불규칙적인 수직·수평 선들의 교차, 비연속적인 확산을 통해 유한과 무한의 공간 조건을 형성하는 듯한 화면을 만들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쉼 없는 호흡과 육신의 움직임으로 가득 찬 수행의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 최명영은 지문을 이용한 작업을 통해 평면과 질료, 행위의 반복을 통한 화학적 융합으로 정신화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동양적 사유와 절제미를 바탕으로,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인간의 신체성을 통한 응축과 융합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일횡(一橫)'과도 연결되며, 한국적인 아이덴티티DNA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32]

4. 1. 지문 및 롤러 시기 (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초)

최명영은 1976년 서울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평면조건(Conditional Planes)'이라는 작품 제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최명영은 평면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규명하고자 하는 두 가지 조형 특성을 드러내 보였다. 그중 하나는 지문을 이용한 반복 작업으로, 이는 물성의 정신화와 내면 공간 확장을 보여주는 '지문' 작업이다.[20]

또 다른 하나는 롤러(Roller) 작업으로, 반죽 상태의 오일 칼라를 롤러로 평면 위에 균일하게 반복 도포하여 화폭의 세계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평면 위에 질료를 수십 회 롤러로 반복 도포하여 층위를 구축하고, 평면 공간의 확장성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신체 행동 반경 내에서 규격을 고수하며, 평면적 비평면화라는 회화적 가정을 확인하기 위한 귀납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이 시기 작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균질한 표면의 평면성
  • 일루전(illusion) 배제로 인한 중심의 부재
  • 행위로서 스트로크(stroke)의 반복성
  • 질료의 접촉감인 집적(集積)
  •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중성적 색채로서 단색조
  • 층위에 의한 내면 공간화(레이어)


최명영은 사각형을 실내 공간으로 본다면, 확장성을 지닌 '에지'는 그 주변으로 뻗어 나가며 아우르는 세계가 된다고 보았다. 이는 자신의 세계를 넘어 타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세계를 암시하며, 유물론적 예술관보다는 세상, 나아가 우주와 공명하는 인식을 보여준다.[21]

홍익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그는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멤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했으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에서 "비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작품이 더욱 실험적이고 미니멀해졌다. 1968년, 그는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을 받았다.[1] 그는 주로 흰색, 노란색, 검은색 또는 파란색의 단색 팔레트를 사용한다. 페인트는 손가락, 붓, 롤러를 사용하여 캔버스에 적용되며, 그의 드로잉은 종이에 송곳 도구로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라고 여겨진다.[1] 1970년대에 그는 한국 단색화 화가들의 단색화 운동과 연관되었다.[2]

4. 2. 송곳, 방안지, 한지 작업 시기 (1980년대 초 ~ 1980년대 중반)

1980년대 초반 최명영의 ‘평면조건’에는 한지와 질료의 침투, 촉각적 접촉감으로 구현되는 생성감을 보여주는 ‘송곳작업’이 더해졌다. 주어진 소재(매체)들에 접촉(반응)하는 양자(兩者)는 상호 침투, 용해되어 텅 빈 공간 속에 존재성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절대조건으로서의 평면 본질을 규명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22]

이와 함께 방안지(section paper)는 단위 면적 위에 질료를 손가락으로 연속적으로 메꾸어 나아가는, 몸을 드리는 반복 작업이었다. 또한 한지(韓紙)의 ‘평면조건’을 통한 회화의 시도를 선보였다. 먹물에 담근 한지 위에 흰색 한지를 옆으로 길게 띠 모양으로 잘라 가로로 길게 붙여 가며 만들어졌다. “흰색 물감을 대신해서 흰색 한지를 사용한 것이다. 띠 모양으로 자르고 붙이는 것은 정방형 분할의 변형이다. 물감을 대신해 한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먹에 의한 검은색 면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원래대로라면 '바탕'과 '이미지'의 관계를 없애버린, 그것을 하나로 하는 그 시도가 지속되는 것이다.[22]

이러한 반복적인 흔적 만들기는 회화에 실체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한지를 사용하여 "평면적 조건"을 창조했다. 이것은 흰색 한지 시트를 길게 잘라 잉크에 담근 후 수평으로 붙여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흰색 페인트 대신 흰색 한지를 사용했다. 띠로 자르고 붙이는 것은 사각형 분할의 변형이다. 페인트 대신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잉크로 검은 면이 필요했다. 동시에, 그것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바탕'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제거했다."[5][6]

4. 3. 규칙적 수직·수평 시기 (1980년대 중·후반)

1980년대 중·후반, 최명영의 ‘평면조건’은 수직·수평 반복 작업으로 집중된다. 이는 씨줄(역사)과 날줄(현실)의 반복과 부침에 따른 생성과 소멸이라는 실존적 지평을 의도한 것이다. 이 시기 작품들은 중심의 부재, 비이미지, 반복성, 질료의 집적, 단색조, 그리고 몸을 사용하는 수행적 층위를 통해 내면 공간(레이어)을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24]

최명영은 검은색 바탕 위에 수많은 흰색 붓질을 겹쳐 쌓아 바탕을 지워나가면서 흰색을 쌓아 올리는 작업을 한다. 화면의 검은 선들은 흰색 물감을 겹치는 과정에서 남은 최소한의 여백이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흑색과 백색은 다른 색의 본질을 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색이며, 작가가 추구하는 평면성을 이루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색이라고 할 수 있다.[24]

최명영은 중성적인 백색조에 대해 "색채 자체가 스스로 자신에게로 수렴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색채는 그 성격적인 측면보다는 질료 자체의 추이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마치 수직, 수평으로 가득 찬 미로의 숲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반복하듯, 부단히 이어지는 소지와의 접촉, 노증(露證)되는 감정의 진폭에 따라 점진적으로 균질로 축적되어 부침하는 평면적 매스"를 통해 "일상, 정신구역을 통과한 하나의 세계로서의 평면구조"와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25]

최명영에게 평면조건은 평면으로서의 구조화를 의미한다. 1980년대 작업에서는 화면을 고르게 덮고 있는 의도적이고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네모꼴 틀을 통해 이를 이루었다.[26]

반복적인 흔적 만들기는 회화에 실체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한지를 사용하여 "평면적 조건"을 창조한다. 흰색 한지 시트를 길게 잘라 잉크에 담근 후 수평으로 붙이는 방식으로, "흰색 페인트 대신 흰색 한지를 사용했다. 띠로 자르고 붙이는 것은 사각형 분할의 변형이다. 페인트 대신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잉크로 검은 면이 필요했다. 동시에, 그것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바탕'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제거했다."[5][6]

4. 4. 수행성의 수직·수평 시기 (1990년대 중반 ~ 현재)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최명영의 수직·수평 작업은 불규칙적인 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는 동일 패턴의 반복이 아닌, 무작위적으로 단절된 수직과 수평의 교차, 비연속의 확산으로 나타난다. 화면 또한 균질적인 평면이 아니며, 수직·수평 선들은 유한과 무한의 공간 조건을 형성하는 듯하다.[27]

최명영의 작업에서 '호흡'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겹겹이 쌓인 물감 층 안의 선들은 마치 숲속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새싹처럼 느껴진다. 이는 '그린다'기보다는 '획(劃)'처럼 인식되며, 쉼 없는 호흡과 육신의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28]

이 시기 '평면조건'은 몸을 들이는 반복 작업의 수행성, 즉 사경화(寫經畵)로 인식된다. 최명영의 수직·수평 붓 자국이 만들어낸 단색조(모노크롬) 화면은 과정을 통해 나타난 평면화된 지층이며, 몸을 몰입하는 수행성이다. 추사체(秋史體)가 평면 위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시방(十方)의 세계라면, 최명영의 작업은 반복과 수행 속에서 시방(十方)적 층위를 이루는 비이미지 회화이며, 끝없는 질문으로서의 철학적 행위이다.[29]

최명영의 작품은 "개념과 대상이 개별적인 소리로 나뉘기보다는 끊임없이 중첩되는 단순화된 역설적 과정"으로, "매일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단순하고 짧으며 느슨하게 연결되지만, 어떤 두려움을 쫓아낼 때까지 조용히 이어진다." 이를 통해 그의 자유로운 사고방식,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보여준다.[11]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한국적인 정체성이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지문'이라는 인간의 신체성을 통한 응축과 수렴은 최명영의 '조건적 평면'의 특징이다. 이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일획(一橫)'과도 깊이 연결된다. '일획(一橫)'은 단일 폭의 획 안에 309개의 비문을 담았다고 전해지는 추사 김정희 금석 서예의 정수이다.[12]

4. 5. 정신화의 지문 시기 (2015년 이후 ~ 현재)

최명영의 ‘평면조건’은 2015년 이후 평면(素地)의 바탕을 드러내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지문(指紋) 작업은 평면과 질료, 행위의 반복을 통한 화학적 융합(融合)으로 정신화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30]

최명영은 자신의 작업을 "물질세계의 정신화"라고 표현하며, 캔버스를 하나의 장(場)으로 생각하고 물질성과 정신성의 호흡 관계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보았다. 그는 손이 닿을수록 다른 세계로 옮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30]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문자와 달리 개념과 사물들이 겹쳐지면서 단순해지는 역설적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구체적인 발언 없이 다양한 상황들을 수용하고 담아내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개념과 사물을 새롭게 생각하는 법과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제공한다.[31]

최명영의 ‘평면조건’에는 동양적 사유와 절제미로 내재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정신이 배어 나온다. 이는 시공을 초월하여 이어져 오는 가장 한국적인 아이덴티티DNA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디지털미디어시대에 ‘지문’이라는 인간의 신체성을 통한 응축과 융합의 ‘평면조건’은 추사 김정희의 ‘일횡(一橫)’과 깊게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32]

5. 미술 운동

최명영은 오리진회화협회(1962-2006),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1975), 에꼴 드 서울(1975~1999) 등의 미술단체 운동과 함께 70년대 중반 단색화 형성에 참여하여 한국 현대미술 전개에 동참하였다.[33]

홍익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60년대 한국 미술사의 두 단체인 "오리진"과 "AG"의 멤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기하학적이고 조화로운 스타일의 논리적으로 정돈된 작품을 제작했으며, "비실재성"의 개념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에서 "비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작품이 더욱 실험적이고 미니멀해졌다. 1968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상에서 인정을 받았다.[1] 1970년대에는 단색화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문화적으로 단색화는 한국 문화의 과거와 단절하고 서구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하였다.[2]

5. 1. 오리진 회화 협회 (1962-2006)

4.19혁명 이후, 제도와 권위의 부조화에 대한 억압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1962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들이 '오리진(Origin)' 미술운동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동인 성격의 단체이다. 최명영, 권영우, 이승조, 서승원, 이상락, 김수익, 김택화, 신기옥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오리진 동인들은 충동적인 표현 본능 대신 기하학을 회화의 중심으로 삼았다. 오리진회화협회는 1960년대에는 기하학적 추상을, 1970년대에는 단색화를 이끌었으며, 1980년대에는 한·일, 한·중 교류전을 통해 극사실계열 회화를, 1990년대에는 다양한 평면회화를 추구하며 회원 수를 205명까지 늘렸다.[33]

5. 2.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1969-1975)

최명영은 오리진회화협회(1962-2006), 한국아방가르드협회(1969~1975), 에꼴 드 서울(1975~1999) 등의 미술단체 운동과 함께 70년대 중반 단색화 형성에 참여하여 한국현대미술 전개에 동참하였다.

1960년대 중반 앵포르멜의 쇠락과 함께 전위적이고 실험정신이 강한 개념미술을 근간으로 1969년 창립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는 1975년까지 활동했던 한국현대미술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 미술그룹운동이다. 최명영 회화관의 단초와 성립 계기는 1970년대 초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운동 등을 통한 개념 논리 성향이나 조형에 있어서의 환원의식, 탈 이미지 경향, 오브제 작업을 통한 물적 체험의 평면적 적용 시도와 그 정신화의 지향 등으로 요약 가능하다.[33]

6. 평가

최명영의 작품은 평면성과 물질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물질적 요소를 통해 정신적인 표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34]

평론가 변종필은 최명영이 어떠한 서사도 배제하고 평면을 공간에 배치하여, 궁극적으로 공간과 하나가 되는 평면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또한, 오랫동안 회화의 평면성에 몰입할 수 있었던 힘은 물질의 정신적 환원이었으며, 이는 평면 조건들의 조화와 절제를 바탕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최명영의 작품 세계에 담긴 물질 간의 관계는 작가의 지성과 관객의 지성이 상호 이해할 수 있는 물질의 근원적 형질에 다가선 작품의 진정성에 있다고 보았다.[14]

평론가 치바 시게오는 최명영의 '조건적 평면' 연작에 대해, 기존 회화를 극복하고 좁은 가능성의 길을 걷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좁은 지평과 한정된 긍정의 지평 안에서 '회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했다.[15]

7. 주요 연혁


  • 1941년 황해도 해주시 북욱동 397에서 아버지 최종철(崔鐘喆, 1917-2006)과 어머니 전병숙(全秉淑, 1916-2001) 사이에서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월남하여 군산, 용인, 인천 등지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 1957년 국립인천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정상화에게 미술 지도를 받았다.
  • 1960년 국립인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여 4.19 혁명을 겪었다.
  •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한묵, 이봉상, 이규상, 김환기에게 실기 수업을, 이경성(서양미술사), 최순우(한국미술사), 조요한(미학), 이기영(불교철학)에게 이론 강의를 들었다.
  • 1963년 동기생들과 기하학 경향의 오리진(ORIGIN) 동인회 창립전을 개최했다.
  • 196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 1967년 이수자(李樹子, 1943~)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지만, 지호, 지연)를 두었다.
  • 1970~1973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서 실험적인 입체작품을 선보였다.
  • 1975~200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 1976년 제8회 까뉴국제회화제 코미서너를 역임했다.
  • 1978년 한국미술대상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1983년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 1990~1991년 영국 울버햄튼대학 교환교수를 지냈다.
  • 1995년~현재 한국미술협회 자문위원이다.
  • 2007년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 2007년~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이다.

7. 1. 개인전


  • 2024 테파프(부스개인전), 뉴욕. 도쿄화랑, 도쿄
  • 2023 아트조선스페이스, 서울. 알민 레쉬 갤러리, 파리
  • 2022 갤러리 비선재, 서울
  • 2022 더 페이지갤러리, 서울
  • 2019 더 페이지갤러리, 서울
  • 2017 갤러리 신라, 대구
  • 2015 더 페이지갤러리, 서울
  • 2000 도쿄화랑, 도쿄
  • 1997 조현화랑, 부산
  • 1986 이낙스 갤러리, 도쿄
  • 1986 동산방 갤러리, 서울
  • 1981 관훈미술관, 서울
  • 1980 무라마쓰 갤러리, 도쿄
  • 1976 서울갤러리, 서울

7. 2. 주요 단체전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대구미술관2021더 페이지갤러리형영, 시방
(추사 김정희, 이우환, 최명영, 최인수)더 페이지갤러리2017뮤지엄 산한국미술의 산책Ⅱ-단색화전뮤지엄 산2017한국의 추상-단색의 리듬일본 도쿄오페라시티 아트갤러리2016뻬로탱 갤러리ORIGIN
(최명영,이승조,서승원)뻬로탱 갤러리2014텅빈충만:한국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상하이 SPSI 미술관2014뮤지엄 산사유로서의 형식-드로잉의 재발견뮤지엄 산2012국립현대미술관 과천한국의 단색화국립현대미술관 과천2011대구미술관대구미술관 개관 주제전:기(氣)가 차다대구미술관2010공간퍼플수행과 시방
(추사 김정희, 윤형근, 최명영)공간퍼플, 헤이리2009샘터화랑한국 단색화전샘터화랑, 상하이2008서울시립미술관한국의 추상회화:1958~2008서울시립미술관2006국립현대미술관한국미술 100년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2002국립현대미술관사유와 감성의 시대국립현대미술관, 과천2000부산시립미술관정신으로서의 평면전부산시립미술관2000광주시립미술관광주비엔날레: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광주시립미술관1998부산시립미술관부산국제아트페스티발부산시립미술관1996현대갤러리19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현대갤러리1987국립현대미술관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흑과 백국립현대미술관, 과천1986~99서울시립미술관서울미술대전서울시립미술관1984동경화랑휴먼도큐멘타 84/85전동경화랑, 도쿄1983~85국립현대미술관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1981뉴욕 브루클린미술관한국현대드로잉전뉴욕 브루클린미술관1975~87관훈미술관에꼴드서울관훈미술관1975인도트리엔날레뉴델리1972~79국립현대미술관앙데팡당전국립현대미술관1971까뉴국제회화제까뉴슐메르1970~72한국아방가르드협회한국아방가르드협회전중앙공보관화랑, 국립현대미술관1969상파울로비엔날상파울로1968~69조선일보사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1967파리비엔날레파리1963~93오리진회화협회전서울


8. 미술관 소장

최명영의 작품은 다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술관명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6]
부산시립미술관 [17]
서울시립미술관 [18]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워커힐 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도쿄도 미술관 (일본) [19]
미에현립미술관 (일본) [19]
시모노세키 시립미술관 (일본) [19]


참조

[1]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Biography https://ocula.com/ar[...] 2023-06-06
[2]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https://www.widewall[...] 2023-06-06
[3] 문서 Lee-il, art critic-A reductive world, 1976
[4] 문서 Seong Rok Seo, art critic-The rhythm and pattern of existence, the plane as its buoy
[5] 문서 Chiba Shigeo(千葉成夫) art critic-The Space of Mind, Sensation, and Body: Choi Myung-young's Painting, 2015.
[6] 문서 The Status of Contemporary Art, Written by Shin Hang-seop, of Hwaseong Culture History 1982
[7] 문서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 exhibit-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an exhibition book, 2012
[8] 문서 Lee-il, art critic-the world of painting as a 'space of margin',1992
[9] 문서 Seong Rok Seo, art critic-The rhythm and pattern of existence, the plane as its buoy.
[10] 문서 Yongdae Kim-the director of the 'Daegu Art Museum', 'Asceticism and Sibang:Kim Jeong hui-Yun Hyong keun-Choi Myoung Young'exhibit, gonggan purple, 2010
[11] 문서 Kim Yong-dae, independent curator, former director of the Daegu Museum of Art-Plane Conditions, 2019.
[12] 뉴스 "Plane Conditions" of Chusa Kim Jung-hee( 一橫) and traces, The Page Gallery-Choi Myung-young Exhibition Economic Review 2022-04-26
[13] 문서 The Return and Spread of Contemporary Art-Origin Painting Association 1962–2006' Exhibition Book, Book Publishing Art Now
[14] 문서 Byun Jong-pil, art critic-Choi Myoung Young, Exploring flatness for the spiritual return of material.
[15] 문서 Art critic Shigeo Chiba-Space of 'mind, sense, and body': Choi Myoung Young's painting, 2015.
[16]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https://www.mmca.go.[...] 2023-07-04
[17]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Surface Cause https://art.busan.go[...] 2023-07-04
[18]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Conditional Plane https://sema.seoul.g[...] 2023-07-04
[19] 웹사이트 Choi Myoung Young https://www.art1.com[...] 2023-07-04
[20] 문서 이일 미술평론가-還元的 置換의 世界,1976.
[21] 문서 서성록 미술평론가-존재의 리듬과 무늬, 그 부표로서의 화면.
[22] 문서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미술평론가-‘마음·감각·신체’의 공간: 최명영의 회화,2015."
[23] 문서 現代美術의 位相, 申恒燮 著,화성문화사,1982
[24] 문서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 도록,2012.
[25] 문서 최명영 작가노트,1986.
[26] 문서 "[[이일]] 미술평론가-‘余白 空間’으로서의 회화세계,1992."
[27] 문서 "이일 미술평론가-‘余白 空間’으로서의 회화세계,1992."
[28] 문서 서성록 미술평론가, 존재의 리듬과 무늬 그 부표로서의 화면.
[29] 문서 김용대 대구시립미술관장, ‘修行수행과 十方시방:김정희-윤형근-최명영’展,공간퍼플,2010.
[30] 문서 김복영 미술평론가-작가와의 대화 중, 本質的 還元의 彼岸-平面의 場과 方法의 誕生, 1981.
[31] 문서 김용대 독립큐레이터, 전 대구미술관장-平面條件, 2019.
[32] 뉴스 추사 김정희 ‘一橫’과 흔적의 ‘평면조건’,더 페이지갤러리-최명영展 "[[:ko:이코노믹리뷰|이코노믹리뷰]]" 2022-04-26
[33] 문서 ‘현대미술의 환원과 확산-오리진회화협회 1962-2006’展 도록, 도서출판 아트 나우.
[34] 문서 변종필 미술평론가-최명영, 물질의 정신적 환원을 위한 평면성 탐구.
[35] 문서 치바 시게오 미술평론가-‘마음·감각·신체’의 공간 : 최명영의 회화,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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