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식 (수학자)
1. 개요
최윤식은 대한민국의 수학자이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전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해방 후 경성광산전문학교 학교장, 국립 서울대학교 수학과 초대 주임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1946년 조선수물학회(현 대한수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54년에는 대한수학회 회장을 지냈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자유당 의원들의 질문에 답한 일로 논란이 있었다. 저서로는 《대수학》, 《미분 방정식론》, 《입체 해석 기하학》 등이 있다.
| 한글 이름 | 최윤식 |
|---|---|
| 한자 이름 | 崔允植 |
| 로마자 표기 | Choe Yunsik |
| 분야 | 수학 |
|---|
| 출생 | 1901년 2월 15일 |
|---|---|
| 사망 | 1974년 2월 17일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 학교 | 경성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 |
|---|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연세대학교 교수 |
|---|
| 씨족 | 경주 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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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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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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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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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박일경
박일경은 일제강점기에 학위를 받고 함평군수, 서울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법제처장,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2. 경력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국립 서울대학교 수학과 초대 주임 교수와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46년 조선수물학회(후일 대한수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54년에도 대한수학회장을 맡았다.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2.1. 생애 초기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1917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관비 유학을 갔으며, 1922년 도쿄 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했다.
2.3. 해방 후 교육 및 학술 활동
광복 후 경성광산전문학교 학교장을 역임했다. 1946년에는 신설된 국립 서울대학교 수학과의 초대 주임 교수로 부임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1년간 맡았다. 1946년 10월, 수학 및 물리학 분야의 학술 단체인 조선수물(수학·물리)학회(후일 대한수학회로 발전)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54년에는 다시 대한수학회 회장을 맡았고,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3. 사사오입 개헌 관련 논란
소위 사사오입 개헌 당시 자유당 의원들이 최윤식을 찾아와 "203의 3분의 2를 사사오입하면 얼마가 됩니까?"라고 질문했고, 최윤식은 수학적 계산에 따라 그 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질문이 당시 국회에서 부결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최윤식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최윤식의 답변은 이승만 정권의 개헌안 강행 처리를 위한 논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4. 사망
1960년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