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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셰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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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셰위안은 톈진 출신으로, 톈진 육군 사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베이양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1917년 직례파의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갔고, 이후 장쑤, 안후이, 장시성의 군 관련 직책을 역임했다. 1920년 리춘의 사망 후 장쑤 군정 장관이 되었다. 1924년 장쑤-저장 전쟁에서 패배하고, 1925년 우페이푸 휘하에서 활동했으나 북벌 이후 사임했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하여 친일 행적을 보였으며, 1945년 체포되어 1946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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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셰위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Who's Who in China (3rd edition)에 실린 치셰위안의 사진
Who's Who in China (3rd edition)에 실린 치셰위안의 사진
본명치 잉 (齊英)
다른 이름푸완 (甫畹), 야오산 (堯山)
출생일1885년 4월 28일
출생지청나라 직례성 순천부 닝허구 (현재의 톈진시 일부)
사망일1946년 12월 18일 (61세)
사망지중화민국 난징시
직업장군
모교톈진 군사학원
일본 육군사관학교
훈장서훈장
보광가화장
문호장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치셰위안은 현재의 톈진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닝보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 그는 청나라 생원 출신으로, 톈진 육군 사관학교(베이양 육군 사관학교), 육군 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베이양군 제6사단에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고, 1913년에는 제6사단 제12여단 여단장, 제6사단장, 장시성 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1917년, 동료 직례파 인물인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이동하여 장닝(현재의 난징) 군정 장관, 장쑤·안후이성·장시성 부군정 장관 등을 지냈다. 1920년 리춘이 자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장쑤 군정 장관 및 3개 성의 군 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2]

2. 1. 초기 생애

동방잡지 22호 3편 "동남 문제 재점화"에 실린 치셰위안의 사진


현재의 톈진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출처에서는 닝보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는 청나라 과거 제도의 생원(生員)이었다.[1] 톈진 육군 사관학교(베이양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 대학교를 거쳐 졸업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베이양군 제6사단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13년에는 제6사단 제12여단 여단장, 제6사단장, 장시성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17년 7월, 치셰위안은 동료 즈리 파벌 인물인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갔다. 이후 장닝(현재의 난징)의 군정 장관과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의 부군정 장관을 지냈다. 1920년 리춘이 자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장쑤 군정 장관이 되었고, 장쑤, 안후이, 장시의 군 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2]

2. 2. 군 경력 초기



현재 톈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나라 과거 제도의 생원(shengyuan)이었으며,[1] 톈진 무비 학당(베이양 육군 사관학교라고도 함), 육군대학을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군 경력은 베이양군 제6사단(제6진)에 입대하면서 시작되었다. 1913년 이후 육군 제6사단 제12여단 여단장, 제6사단장, 장시성 장군부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1917년, 직례파의 주요 인물인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이동했다. 이후 장쑤 독군 참모장 겸 난징 진수사, 쑤완추(장쑤, 안후이, 장시) 세 성 순열 부사 등을 지냈다.[2] 1920년 리춘이 자살하자, 치셰위안은 그의 뒤를 이어 장쑤 독군 겸 쑤완추 세 성 순열사에 취임하며 직례파의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2]

2. 3. 직례파 합류

1917년 (민국 6년), 치셰위안은 직례파의 주요 인물인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이동했다. 그는 리춘 밑에서 장쑤 독군 참모장 겸 난징 진수사, 쑤완추(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 세 성 순열 부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20년 (민국 9년), 리춘이 갑작스럽게 자살하자, 치셰위안이 그의 뒤를 이어 장쑤 독군 겸 쑤완추 세 성 순열사에 취임했다.[2] 이로써 그는 직례파의 유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1924년 (민국 13년) 9월, 치셰위안은 저장성 독군 루융샹을 상대로 장저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제2차 펑즈 전쟁의 서막이 된 전쟁이었다. 푸젠성 독군 쑨촨팡의 지원을 받은 치셰위안은 루융샹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그러나 제2차 펑즈 전쟁에서 직례파가 펑톈파에게 패배하면서 치셰위안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펑톈파의 장쭝창이 복귀한 루융샹을 지원하며 남하하자, 치셰위안은 쑨촨팡과 '장저 연군'을 조직하여 맞서려 했다. 하지만 쑨촨팡은 중앙 정부의 돤치루이에게 포섭되어 움직이지 않았고, 완전히 고립된 치셰위안은 결국 하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1925년 (민국 14년) 겨울, 치셰위안은 후베이성에서 재기를 노리던 우페이푸 휘하로 들어가 14성 토적 연군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의 북벌군에게 패배하면서 그의 재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한번 하야하게 되었다.

3. 직례파 군벌 시대

치셰위안은 톈진 무비 학당, 육군대학,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북양 제6진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13년(민국 2년) 이후에는 육군 제6사 제12여단 여단장, 장시 장군서 참모장, 제6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17년(민국 6년), 그는 직례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리춘을 따라 장쑤성으로 이동했다. 이후 치셰위안은 장쑤 독군 참모장 겸 난징 진수사, 쑤완추(蘇皖贛, 장쑤-안후이-장시) 세 성 순열 부사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20년(민국 9년), 리춘이 사망하자 치셰위안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장쑤 독군 겸 쑤완추 세 성 순열사에 취임하며 직례파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이 시기 그는 장쑤 지역을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며 직례파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3. 1. 장저 전쟁

1923년 8월과 9월, 치셰위안은 안후이 군벌 소속이자 저장성 군벌인 루융샹이 의회 내 반직례파 세력을 지원하려 하자 격분하여 전쟁 직전까지 갔다.[3]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직례파 계열 경찰청장 쉬궈량이 루융샹 측근에게 암살당하면서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베이징의 우페이푸가 만류하여 충돌은 피했다.

상하이의 상업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치셰위안과 루융샹은 협상을 진행했다. 상하이는 후베이성, 안후이성, 장시성과 양자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또한 1923년 8월, 치셰위안과 루융샹은 동맹을 맺지는 않되, 서로의 성(省)으로 다른 군벌 군대가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군대를 증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4][5][6]

그러나 1924년 9월 3일, 치셰위안은 군벌 군대 흡수 문제를 빌미로 루융샹을 공격하며 합의를 깨고 장저 전쟁을 일으켰다.[4] 이 전쟁은 제2차 펑즈 전쟁(제2차 직예-펑톈 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띠었다. 푸젠성의 쑨촨팡의 지원을 받은 치셰위안은 전쟁 초기 루융샹 군대를 상하이에서 격파하며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장저 전쟁은 곧바로 제2차 직예-펑톈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북방의 펑톈 군벌은 제1차 직예-펑톈 전쟁 패배 이후 강화된 군사력으로 직례파에 선전포고했다.[7] 펑톈 군벌은 장종창 장군을 남쪽으로 보냈고, 이에 치셰위안과 쑨촨팡은 '장쑤-저장 연합군'을 선포하며 공동 대응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를 장악한 안후이 군벌의 돤치루이가 쑨촨팡을 포섭하자, 쑨촨팡은 치셰위안을 배신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동맹에게 고립된 치셰위안은 결국 펑톈파 군대에게 패배하여 군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3. 2. 제2차 직봉 전쟁과 몰락

1923년 8월과 9월, 치셰위안은 안후이 군벌 소속이자 저장성 군벌인 루융샹이 의회 내 반(직예 군벌) 군벌 세력을 지원하려 하자 격분하여 저장성과 전쟁 직전까지 갔다.[3] 같은 해 11월에는 상하이의 직예 군벌 계열 경찰청장 쉬궈량이 루융샹 측근에게 암살당하면서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베이징의 우페이푸가 만류하여 충돌을 피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특히 상하이의 상업 및 경제 중심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치셰위안과 루융샹은 협상을 진행했다. 상하이는 후베이성, 안후이성, 장시성과 양자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1923년 8월, 치셰위안과 루융샹은 동맹을 맺지 않고, 다른 군벌 군대가 각자의 성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군대를 증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4][5][6]

그러나 1924년 9월 3일, 치셰위안은 군벌 군대 흡수 문제를 둘러싸고 루융샹과의 합의를 깨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장쑤-저장 전쟁의 시작이었다.[4] 푸젠성 지사 쑨촨팡의 지원을 받은 치셰위안은 루융샹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여 상하이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 하지만 장쑤-저장 전쟁은 제2차 직예-펑톈 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직예 군벌은 북방의 펑톈 군벌에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펑톈 군벌은 제1차 직예-펑톈 전쟁 이후 병력과 장비를 크게 증강한 상태였다.[7]

펑톈 군벌이 장종창 장군을 남쪽으로 보내자, 치셰위안과 쑨촨팡은 이에 맞서 '장쑤-저장 연합군'(장저 연군)을 선포했다. 그러나 쑨촨팡은 중앙 정부의 돤치루이(안후이 군벌)에게 포섭되어 치셰위안을 배신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쑨촨팡에게 고립된 치셰위안은 결국 패배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25년 겨울, 치셰위안은 후베이성으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우페이푸 밑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페이푸에 의해 14개 성 토벌 연합군(''타오쩌이 롄쥔'')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의 북벌군에게 패배하면서 치셰위안은 또다시 사임해야 했고, 그의 군벌로서의 경력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3. 3. 우페이푸 휘하 활동

1925년 (민국 14년) 겨울, 치셰위안은 후베이성에서 다시 세력을 모으던 우페이푸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14성 토적 연군 부사령에 임명되었으나, 중국 국민당의 북벌군에게 패배하면서 다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 친일 행적

1930년 옌시산펑위샹 등이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자 치셰위안도 이에 가담하여 장베이 초무사(江北招撫使)에 임명되었으나, 옌시산과 펑위샹이 패배하면서 치셰위안은 톈진의 영국 조계로 피신했다가 이후 베이핑으로 옮겨 은거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같은 해 12월 왕커민 등이 베이징에 친일 괴뢰 정부인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12]. 그는 임시정부에서 치안부 총장 등 요직을 맡았으며, 1940년 임시정부가 난징의 왕징웨이 정권에 흡수되어 화북정무위원회로 개편된 이후에도 위원회 상무위원, 치안총서 독판, 화베이 수정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친일 부역 활동을 지속했다[9][14][15][16].

4. 1. 중화민국 임시정부 참여

1941년 아사히 신문에 실린 치셰위안


1937년 12월, 왕커민 등이 베이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치셰위안은 이에 가담하여 의정위원회 상무위원 겸 치안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12]. 또한 청향총서(清郷総署) 독판도 겸임했다. 1938년 4월 19일에는 육군군관학교 교장직도 겸하게 되었다[13].

1940년 3월 30일, 임시정부가 난징의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하여 화북정무위원회로 개편되자, 치셰위안은 이 위원회의 상무위원 겸 치안총서 독판으로 자리를 옮겼다[14]. 동시에 새로 조직된 화베이(華北) 수정군(綏靖軍)의 총사령관을 맡았으며[9][15][16],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도 초빙되었다[17]. 같은 해 4월 2일에는 국민정부 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18][19]. 1943년 2월에는 화북정무위원회 내무총서 독판에 취임하고 자의회 부의장도 겸임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치셰위안은 국민정부에 의해 반역죄(한간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12월 5일, 톈진에서 장잉화, 리펑투(치셰위안의 처남) 등과 함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에 체포되었다[20][21]. 1946년 5월 27일 난징으로 압송되었고[22], 수도 고등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18일, 난징 위화타이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10][23].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만 61세)였다.

4. 2. 왕징웨이 정권 참여



1937년 12월, 왕커민 등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창설하자, 치셰위안도 이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상무위원 겸 치안부 총장에 임명되었다[12]. 또한 청향총서(清郷総署) 독판을 겸임했으며, 이듬해 1938년 4월 19일에는 육군군관학교 교장도 겸하게 되었다[13].

1940년 3월 30일, 임시정부가 난징의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하여 화북정무위원회로 개편되자, 치셰위안은 이 위원회의 상무위원 겸 치안총서 독판으로 임명되었다[14]. 동시에 새롭게 조직된 화베이 수정군(華北綏靖軍) 총사령관 역할도 맡았다[9][15][16]. 또한 왕징웨이 정권의 중앙정치위원회 빙칭(聘請) 위원[17]군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18][19]. 1943년 2월에는 화북정무위원회 내무총서 독판과 자의회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23].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치셰위안은 반역죄(한간죄) 혐의로 국민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5일, 톈진 특별시에서 장잉화, 리펑투 등과 함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에 체포되었고[20][21], 이듬해 1946년 5월 27일 난징으로 호송되었다[22]. 수도 고등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 같은 해 12월 18일 난징 위화타이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10][23]. 향년 62세(만 61세)였다.

5. 체포 및 처형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치셰위안은 한간(반역죄) 혐의로 국민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10] 같은 해 12월 5일, 그는 장잉화 및 리펑투(치의 의제)와 함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에 의해 톈진 특별시에서 붙잡혔다.[20][21]

이듬해인 1946년 5월 27일 난징으로 호송되었고[22], 수도 고등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18일, 난징 위화타이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10][23] 향년 62세(만 61세)였다.

참조

[1] 간행물 BDDRC, vol. 1, p.297-299
[2] 서적 History of the Beiyang Clique 2001
[3] 서적 Wu Peifu
[4] 서적 Beiyang
[5] 간행물 Dongfang Zazhi 1923-08-10
[6] 뉴스 North China Herald 1923-08-25
[7] 서적 Chang Tso-lin in Northeast China, 1911-1928: China, Japan, and the Manchurian Ideal 1977
[8] 서적 The Chronology of the Officials of the Republic of China 1995
[9] 뉴스 Our Newest Supporter from China Asahi Shimbun 1941
[10] 서적 Dictionary of the Republic of China (Revised Version) 2007
[11] 문서 『最新支那要人伝』は[[1879年]]生まれとするが、本記事は徐友春主編『民国人物大辞典 増訂版』、来新夏ほか『北洋軍閥史』に従う。
[12] 간행물 『同盟旬報』1巻18号通号18号、昭和12年12月中旬号 同盟通信社 1937-12
[13] 간행물 臨時政府令、令字第175号、民国27年4月19日(『政府公報』第14号、民国27年4月25日、臨時政府行政委員会公報処、1頁)。
[14] 간행물 国民政府令、民国29年3月30日(『華北政務委員会公報』第1-6期合刊、民国29年6月9日、華北政務委員会政務庁情報局、国府1頁)。
[15] 간행물 国民政府令、民国29年3月30日(『華北政務委員会公報』第1-6期合刊、民国29年6月9日、華北政務委員会政務庁情報局、国府2頁)。
[16] 간행물 華北政務委員会の人事自体は、発令前の同月22日における中央政治会議で議決された(『外交時報』94巻2号通号849号、昭和15年4月15日、外交時報社、182-185頁)。
[17] 간행물 第2期以降は「延聘委員」。なお、中央政治会議を改組した中央政治委員会の人事は、発令前の同月24日に決定・公表されている(『外交時報』94巻2号通号849号、昭和15年4月15日、外交時報社、185-186頁)。
[18] 간행물 国民政府令、民国29年4月2日(『国民政府公報』第19号、民国29年5月13日、国民政府文官処印鋳局、1頁)。
[19] 간행물 斉燮元の軍事委員会委員就任自体は、発令前の前月22日における中央政治会議で、すでに議決されていた(『外交時報』94巻2号通号849号、昭和15年4月15日、外交時報社、182-185頁)。
[20] 논문 李(2002)、616頁。
[21] 논문 益井(1948)、132頁では「[[北京市|北平]]で逮捕」としている。
[22] 논문 益井(1948)、19頁。
[23] 논문 益井(1948)、13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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