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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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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레 전투는 기원전 53년 로마 공화정의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얻고자 했으나, 아들 푸블리우스와 함께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이 전투는 로마의 대패로 기록되었으며, 로마는 많은 병력과 군기를 잃었다. 이 사건은 로마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삼두정치의 붕괴와 로마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통해 비단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실크로드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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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카레 전투
시기기원전 53년 6월
장소카레 근교 (하란)
결과파르티아의 결정적인 승리
관련 전쟁로마-파르티아 전쟁
로마자 표기Karrae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정
교전국 2파르티아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파르티아수레나스
실라케스
병력 규모
로마36,000–43,000명
파르티아10,000명
피해 규모
로마30,000명
파르티아불명, 최소한의 피해
추가 정보
결과의 중요성"수레나스의 놀라운 승리는 막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로마의 확장을 막고, 메소포타미아를 파르티아에게 되돌려주었으며, 유프라테스를 두 강대국 사이의 경계로 굳혔다. 페르시아를 로마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이후 7세기 동안 정치적 라이벌로 만들었다."ShahbaziShahbazi
전투 지도
카레 전투 지도
카레 전투 지도

2. 배경

기원전 5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가 끝났다. 당시 로마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주도하는 삼두 정치 시대였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진압 이후 20년 가까이 눈에 띄는 군사적 활동이 없었던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처럼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자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했다.

로마 원로원은 원정을 반대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찬성하여 결국 승인했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55년 말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지원을 약속하며 아르메니아를 통해 파르티아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직진하여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향했다.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부하 수레나스에게는 소수의 병력을 주어 크라수스를 막게 했다.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스가 로마군을 격파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랐다.

크라수스는 아랍 부족장 아리암네스의 길 안내를 받았으나, 아리암네스는 이미 파르티아에 매수된 상태였다. 아리암네스는 로마군을 칼레 근처의 물이 없고 사방이 트인,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어려운 지형으로 인도했다. 크라수스는 아르타바스데스로부터 파르티아 주력이 도착하여 위급하다는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무시하고 계속 파르티아 영토 내로 진군했다.

2. 1. 로마의 상황

기원전 5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를 마쳤다. 당시 크라수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 정치를 이끌었으나, 제3차 노예 전쟁 이후 20년 가까이 군사적 공적이 없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처럼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자 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군사적 명성을 얻고자 했다.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고, 로마 원로원은 원정을 반대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찬성으로 결국 승인되었다.

크라수스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협력을 받아 아르메니아 산맥을 넘어 파르티아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경로를 택했다. 이는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제안한 경로보다 행군 부담이 컸지만, 빠르게 아르메니아 군과 합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자마자 아르메니아로부터 불참전을 통보받았다.

한편, 크라수스는 아랍 부족장 아리암네스의 길 안내를 받았으나, 아리암네스는 이미 파르티아에 매수된 상태였다. 아리암네스는 로마군을 칼레 근처의 물이 없고 사방이 트인,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어려운 지형으로 인도했다.

2. 1. 1.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5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를 마쳤다. 당시 로마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세 사람이 중심이 된 삼두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2] 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한 이후 거의 20년간 군사적 활동이 없었던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처럼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자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했다.[3]

로마 원로원은 원정을 반대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찬성하자 결국 승인하였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55년 말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지원을 약속하며 아르메니아를 통해 파르티아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직진하여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향했다.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부하 수레나스에게는 소수의 병력을 주어 크라수스를 막게 했다.

2. 1. 2. 크라수스의 야망

기원전 5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를 마쳤다. 당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 정치를 행하며 두 번의 집정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실적을 쌓았지만, 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한 이후 거의 20년 동안 군사적으로 뚜렷한 실적이 없었기에 파르티아 원정을 생각했다.[2]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아직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원정하지 않도록 설득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찬성했기에 원로원은 마지못해 승낙했다.[3]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악명 높은 부자였던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침공을 시작할 당시 62세 정도였다. 고대 자료, 특히 그의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코스는 탐욕을 그의 주요 성격적 결함이자 전쟁의 동기로 여겼다.[6] 하지만 역사가 에리히 S. 그룬은 크라수스가 개인적인 부는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목적은 국고를 풍족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믿었다.[7]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끊임없는 탐욕,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질투, 그리고 경쟁심을 그의 동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오래된 군사적 명성은 폼페이우스보다, 그리고 갈리아에서 5년간의 전쟁 후에는 카이사르보다 항상 열등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요 군사적 업적은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를 물리친 것과 10년 전 술라를 위해 콜린 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었다.[8]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크라수스에게 편지를 보내 파르티아 침공 계획을 지지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가 크라수스의 군사 작전을 자신의 작전과 단순히 경쟁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9]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또 다른 요인은 전투의 용이함에 대한 예상이었다. 로마 군단은 폰토스 왕국과 아르메니아와 같은 다른 동방 세력의 수적으로 우세한 군대를 쉽게 제압했고,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가 손쉬운 목표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10]

그러나 키케로는 또 다른 요인을 제시했다. 이는 카이사르 휘하의 갈리아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지휘했던 재능 있는 마르쿠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야망이었다. 높은 훈장을 받은 장교로서 로마로 돌아온 푸블리우스는 자신의 정치 경력을 쌓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로마의 자료들은 카르해 전투를 로마의 재앙이자 마르쿠스 크라수스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촉망받는 경력을 단축시킨 비극으로 본다.[11]

일부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키케로는 파르티아가 로마와 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을 "정당성이 없는" 전쟁이라고 불렀다.[12] 호민관 아테이우스 카피토는 격렬하게 반대했고, 크라수스가 출발을 준비할 때 악명 높게도 공개적인 저주 의식을 거행했다.[13]

항의와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 11월 14일에 로마를 떠났다.[14]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4–53년 겨울에 시리아에서 그와 합류했고, 어린 지도자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한 갈리아 출신 1,000명의 켈트 기병대를 데려왔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55년 말에 시리아 속주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참전을 약속하고, 아르메니아 영내를 통과하여 파르티아를 공격하도록 조언했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남동쪽 사막 지대를 지나 파르티아로 향했다. 이 경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진군하는 것보다 행군의 부담이 컸지만, 빠르게 아르메니아 군과 합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맞이하여 공격할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는 보병과 중장 기병(카타프락토이)과 같은 정규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공격을 감행하고, 부하 수레나스에게 수레나스 자신의 사병으로 크라수스 요격을 명령했다. 이 사병들은 대부분 활을 장비한 경 기병이었다.

크라수스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자마자 아르메니아로부터 불참전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음에도 크라수스는 행군 경로를 바꾸지 않았다. 로마 병사들은 탈수열사병으로 쇠약해졌다. 참고로 이 연락 이후, 로마군의 길 안내를 하던 아라비아인이 모습을 감췄다.

2. 2. 파르티아의 상황

기원전 57년, 파르티아에서는 왕 프라아테스 3세가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에게 살해된 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여 서로 왕위를 놓고 싸웠다. 1단계에서 오로데스가 승리하여 동생을 메디아의 왕(실질적인 총독)으로 임명하여 타협을 보았다.[5] 그러나 또 다른 무력 충돌로 인해 오로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시리아의 로마 총독)에게 도망가도록 강요했다.[4] 가비니우스는 로마가 미트리다테스를 꼭두각시 왕으로 삼아 파르티아를 장악하기 위해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려 했으나,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5]

미트리다테스는 독자적으로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곧 파르티아 사령관 수레나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가비니우스의 후임 크라수스 역시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기원전 54년 파르티아의 속국 오스로에네를 침공했지만, 발리흐 강의 왼쪽 강둑에서 증원군을 기다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수레나가 셀레우키아에서 미트리다테스를 포위, 격파, 처형했다. 오로데스는 이제 자신의 왕국에서 반대 세력이 없었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로마의 동맹국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그곳에서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곧 파르티아 편으로 전향했다.[5]

2. 3. 로마군의 파르티아 침공

기원전 5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역임한 집정관 임기를 마쳤다. 당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 정치를 행하며 두 번의 집정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실적을 쌓았지만, 제3차 노예 전쟁을 진압한 이후 거의 20년 동안 군사적으로 뚜렷한 실적이 없었기에 파르티아 원정을 생각했다.[15]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아직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원정하지 않도록 설득했지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찬성했기에 원로원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기원전 55년 말에 시리아 속주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참전을 약속하고, 아르메니아 영내를 통과하여 파르티아를 공격하도록 조언했지만,[16]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시리아에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남동쪽 사막 지대를 지나 파르티아로 향했다. 이 경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진군하는 것보다 행군의 부담이 컸지만, 빠르게 아르메니아 군과 합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맞이하여 공격할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는 보병과 중장 기병(카타프락토이)과 같은 정규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공격을 감행하고, 부하 수레나스에게는 자신의 사병으로 크라수스 요격을 명령했다. 이 사병들은 대부분 활을 장비한 경 기병이었다.

크라수스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자마자 아르메니아로부터 불참전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음에도 크라수스는 행군 경로를 바꾸지 않았다. 로마 병사들은 탈수열사병으로 쇠약해졌다. 이 연락 이후, 로마군의 길 안내를 하던 아라비아인이 모습을 감췄다.[17][18]

며칠 후, 로마군은 카르해 근교에서 곧바로 파르티아군과 조우했다.

3. 전투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은 초반 탐색전 이후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로마군은 테스투도 대형을 펼쳐 파르티아 궁기병의 화살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파르티아군은 끊임없이 화살을 보급하며 로마군을 압박했다. 또한 로마군이 테스투도 대형을 펼치면 카타프랙트 기병이 돌격하여 대형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결국 로마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밤이 되자 크라수스는 카르해로 후퇴를 명령했고, 다음날 아침 수레나스는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회담 도중 크라수스는 살해당했고, 남은 로마군 병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3. 1.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배치

전투 시작 시 대형


로마 측 지휘관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고, 파르티아 측 지휘관은 수레나스였다.

크라수스는 수레나스 군과 마주치자 당황했다. 그의 장군인 카시우스는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양쪽에 배치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측면과 후방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진형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로마군의 기동성은 크게 떨어졌다.

수레나스는 전투 시작 전에 악기로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 중기병인 카타프락토스가 번쩍이는 갑옷을 드러내는 시위를 벌여 로마군을 흔들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토스로 로마군을 공격하려던 처음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궁기병으로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9천 명의 궁기병이 넓게 퍼져 로마군을 에워싸고 화살을 퍼붓자, 밀집해 있던 로마군은 높은 확률로 화살에 맞았다. 로마군은 방패로 몸을 보호했지만, 팔다리에 화살을 맞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상자는 늘어났고, 병사들은 무거운 방패를 들고 사막에 서 있어야 했으므로 탈수증상과 열사병으로 약해졌다.

크라수스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군을 전진시켰지만, 로마군이 흩어져 궁기병에게 돌격하면 궁기병은 퇴각하며 거리를 벌리고 말 위에서 뒤로 돌아 사격을 가했다. (파르티아식 사격) 그리고 로마군이 화살로부터 완전히 보호하기 위해 방패로 머리 위까지 덮는 테스투도 대형을 짜면 카타프락토스가 즉시 돌격하여 이 대형을 무너뜨렸다.

크라수스는 투창병을 보냈으나, 투창병 역시 화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군의 화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수레나스는 수천 마리의 낙타 부대에 화살을 잔뜩 실어 대기시켰으므로 화살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후 크라수스는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기병대로 구성된 별동군을 조직해 파르티아 군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 별동군은 화살 공격을 당한 뒤 파르티아 궁기병과 카타프락토스에 포위되어 전멸당하고 푸블리우스도 목숨을 잃었다. 창에 꽂혀 높이 들린 푸블리우스의 목을 본 크라수스는 크게 동요했고, 결국 부상자들을 버리고 근처 마을인 카레로 후퇴했다.

긴 창을 든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토스가 사자와 싸우는 부조

3. 2. 파르티아군의 전술

수레나스는 전투 개시 전에 악기로 시끄러운 소음을 내었고 그의 중기병인 카타프락토스가 번쩍이는 갑옷을 노출하는 시위로 로마군을 동요케 하려 하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를 본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토스로 로마군에 돌격하고자 한 처음의 계획을 단념한다. 그 대신 궁기병으로 화살 공격을 퍼붓는다.[21]

9천 명의 궁기병이 넓게 포진하여 로마군을 에워싸 화살을 퍼붓자 밀집하여 서있었던 로마군은 높은 확률로 이 화살에 맞았다. 비록 로마군은 방패로 몸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노출된 팔다리에 화살을 맞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부상자들은 점점 증가하였다. 또한 병사들은 거대한 방패를 들고 사막에서 서있어야 했으므로 탈수증상과 열사병으로 쇠약해졌다.[22]

로마군이 산개하여 궁기병에게 돌격하면 궁기병은 퇴각하면서 거리를 벌린 뒤 말 위에서 뒤로 돌아 사격을 가했다. (파르티안 샷)[23] 그리고 로마군이 화살로부터 완전히 보호하기 위해 방패로 머리 위까지 덮는 테스투도 대형을 짜면 카타프랙트가 즉시 돌격하여 이 대형을 무너뜨렸다.[24]

수레나는 수천의 낙타 부대에 화살을 잔뜩 실은 채 대기시켰으므로 화살 공격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25]

3. 3. 푸블리우스의 죽음

크라수스는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기병대로 구성된 별동대를 조직해 파르티아 군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별동대는 화살 공격을 받은 뒤 파르티아 궁기병과 카타프랙트에 포위되어 전멸당했고, 푸블리우스도 목숨을 잃었다.[26] 창에 꽂혀 높이 들린 푸블리우스의 목을 본 크라수스는 심하게 동요하였다.

3. 4. 크라수스의 죽음

수레나스가 보낸 사자가 회담을 제의하였다. 사자는 수레나스가 로마군이 시리아로 안전하게 귀국하는 것을 보장할 것이며, 그 대가로 로마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크라수스는 회담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로마군은 크라수스가 회담을 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였다.[29][30][31] 파르티아 군은 회담에 나온 크라수스를 생포하려고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크라수스와 그의 일행은 목숨을 잃었다.

크라수스가 죽은 후, 파르티아인들은 그의 탐욕을 조롱하는 뜻으로 목구멍에 녹인 금을 부었다고 한다.[32]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의 잘린 머리가 왕 앞에서 열린 연회에서 상연된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의 소품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33][34]

카르해에 남은 로마군은 철수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 추격당해 죽거나 생포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약 20,000명이 사망하고 10,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35]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반면 파르티아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4. 전투의 결과

카레 전투는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첫 주요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파르티아는 이후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여러 차례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는 군단병이 개활지에서 지원 없이 파르티아 기병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8]

파르티아 기병


크라수스의 전사로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졌고, 전년인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사망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 이는 곧 기원전 49년의 로마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카레 전투로 인해 비단이 유럽 대륙에 전해졌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 군의 빛나는 깃발(아마도 비단으로 만들어진)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는 유럽에서 비단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여,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서유럽까지 연장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4. 1. 로마의 대패

카레 전투는 로마가 겪은 대패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로마군에게 보여졌다. 크라수스 자신도 살해되어 머리가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하고 왕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해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를 질투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나스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수레나스 사후, 오로데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지만, 전투에 능숙하지 못했고 수레나스의 전법도 활용하지 않았다. 이는 이후 로마군에 의해 약화된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실패로 이어졌다.[46]

크라수스 휘하의 카시우스는 약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리아로 돌아와 2년간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시리아를 지켰다.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키케로에게 칭찬받았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이 된다.

카레 전투를 통해 비단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군의 빛나는 깃발(아마도 비단으로 추정)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는 유럽에서 비단에 대한 관심을 높여 실크로드가 서유럽까지 연장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19년)의 로마 주화로, 카르해 전투에서 포획된 기치를 돌려주는 파르티아 병사가 묘사되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치를 돌려받은 것을 파르티아에 대한 정치적 승리로 여겼다.


로마는 이 패배로 굴욕을 겪었으며, 파르티아가 여러 개의 군단 독수리를 포획한 것은 굴욕감을 더했다.[36] 플루타르코스는 파르티아가 크라수스와 가장 닮은 로마 포로에게 여자 옷을 입혀 파르티아 전역을 행진시켰다고 기록했다. 파르티아는 다른 로마 포로들에게 이 가짜 크라수스를 행진하는 동안 임페라토르라고 부르게 하여 로마 개선식을 조롱했다.[37]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를 격파하고 점령했다. 그러나 수레나의 승리는 파르티아 왕의 질투를 불러일으켜 수레나에게 사형을 명령했다. 수레나가 죽은 후, 오로데스 2세는 아들 파코루스를 로마령 시리아로 보냈으나 실패했다.

카르해 전투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첫 주요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승리로 파르티아는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 로마는 군단병이 개활지에서 지원 없이 파르티아 기병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8]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약 10,000명의 생존 병사들을 이끌고 시리아로 갔다. 그는 2년 더 프로퀘스토르로 그 지역을 통치하며 오로데스 2세의 아들 파코루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카시우스는 안티오케이아에 대한 파르티아의 포위를 막았고, 파코루스의 군대가 후퇴했을 때 안티고네아에서 기습하여 파르티아 부사령관 오사케스를 죽였다. 그는 키케로에게 칭찬받았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음모의 핵심 인물이었다.

4. 2. 파르티아의 승리

카레 전투는 로마가 겪은 대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하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로마군에게 보여졌다. 크라수스 자신도 살해당하고, 머리는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하여 왕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해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에게 의심과 질투를 품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수레나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46] 수레나스 사후, 오로데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지만, 수레나스와 달리 전투에 뛰어나지 않았고, 수레나스의 전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이후 로마군에 의해 약해진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실패로 이어졌다.

크라수스 휘하의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약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그 후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이 승리로 키케로에게 극찬을 받았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이 된다.

카레 전투를 통해 비단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군의 빛나는 깃발(아마도 비단으로 추정)을 보았다고 보고했으며, 파르티아 중기병의 붉은 비단옷은 불의 전사처럼 보였다고 한다.[46] 이는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서유럽까지 연장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는 이 패배로 굴욕을 겪었으며, 파르티아가 여러 개의 군단 독수리를 포획했다는 사실은 굴욕감을 더했다.[36] 플루타르크는 파르티아가 크라수스와 가장 닮은 로마 포로에게 여자 옷을 입혀 파르티아 전역을 행진시켰다고 언급했다. 파르티아는 다른 로마 포로들에게 이 가짜 크라수스를 행진하는 동안 임페라토르로 칭하도록 명령하여 로마 개선식을 조롱했다.[37]

카르해 전투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최초의 주요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승리는 파르티아가 여러 차례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는 군단병이 개활지에서 지원 없이 파르티아 기병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8]

4. 3. 정치적 영향

카레 전투는 로마가 겪은 대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했고, 크라수스 자신도 살해되어 그의 머리는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36] 로마는 이 패배로 굴욕을 겪었으며, 파르티아가 여러 개의 군단 독수리를 포획한 것은 굴욕감을 더했다.[36] 파르티아는 포로들을 이용해 로마 개선식을 조롱하기도 했다.[37]

크라수스 휘하의 카시우스는 약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리아로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지켰다.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키케로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된다.

카레 전투의 승리로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를 질투하여 숙청했고, 직접 군대를 지휘했지만 전투에 미숙하여 실패했다. 이 전투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첫 주요 전투 중 하나였으며, 파르티아는 이후 여러 차례 시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로마는 군단병이 개활지에서 파르티아 기병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8]

카레 전투로 비단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군의 빛나는 깃발(아마도 비단)을 보았다고 보고했고, 이는 실크로드가 열리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46]

크라수스의 전사로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졌고,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의 사망과 함께 삼두정치는 붕괴되어 기원전 49년의 로마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5. 영향

카레 전투는 로마가 겪은 대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로마군에게 보여졌다. 크라수스 자신도 이 전투 후 살해당했으며, 머리는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하여 왕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해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에게 의심과 질투를 품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나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약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이후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키케로에게 극찬을 받았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의 중요 인물이 된다.

파르티아인들이 금빛 아퀼라(군단 전투 깃발)를 탈취한 것은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카이사르는 암살당했을 때 보복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42]

로마 공화국이 몰락하고 제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크라수스의 죽음과 그의 군단 손실은 로마의 권력 균형을 재편했다.[43] 크라수스의 죽음과 율리아의 사망으로 제1차 삼두정치가 붕괴되고, 내전이 발발했다는 이론이 있다.

몇몇 역사가들은 크라수스의 죽음과 내전 발발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지적하며,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제1차 삼두정치가 명문 귀족과 맺고 있던 관계가 끊어져 국가 전체가 내전으로 이어진 갈등에 취약해졌다고 주장한다.[44]

하지만 지역적 맥락에서 볼 때, 이 전투는 로마에 장기적으로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파르티아의 기원전 40년 로마 침공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 의해 저지되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기원전 36년 파르티아 침공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비록 실패로 끝났지만).[45]

5. 1.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

카레 전투는 로마파르티아 사이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했고, 지휘관 크라수스는 살해당했다. 그의 머리는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에게 보내졌다. 파르티아군은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하여 왕을 포로로 삼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해 오로데스 2세는 사령관 수레나스를 의심하고 질투하게 되었고, 결국 수레나스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수레나스 사후, 오로데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했지만, 전투에 능숙하지 못했고, 이는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실패로 이어졌다.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약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이후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여 키케로에게 극찬을 받았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의 중요 인물이 된다.

파르티아가 금빛 아퀼라(군단 전투 깃발)를 탈취한 것은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카이사르는 암살당할 당시 보복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크라수스의 생존한 아들이 로마군에 합류할 예정이었다.[42]

아우구스투스 프리마 포르타 흉갑의 세부 묘사, 카레 전투에서 크라수스에게 잃은 ''아퀼라''를 파르티아인이 돌려주는 모습


그러나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제정 시대의 시작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크라수스의 죽음과 그의 군단 손실은 로마의 권력 균형을 재편했다.[43] 크라수스의 죽음과 율리아의 사망으로 제1차 삼두정치가 붕괴되고, 내전이 발발했다는 이론이 있다. 카이사르가 승리하면서 공화국은 독재 체제로 변모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크라수스의 죽음과 내전 발발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지적하며,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제1차 삼두정치가 명문 귀족과 맺고 있던 관계가 끊어져 국가 전체가 내전으로 이어진 갈등에 취약해졌다고 주장한다.[44]

하지만 지역적 맥락에서 볼 때, 이 전투는 로마에 장기적으로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파르티아의 기원전 40년 로마 침공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 의해 저지되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기원전 36년 파르티아 침공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비록 실패로 끝났지만).[45]

카레 전투는 비단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군의 빛나는 깃발(비단으로 추정)을 보았다고 보고했다.[46] 이는 유럽에서 비단에 대한 관심을 높여 실크로드가 열리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5. 2. 비단의 전래

카레 전투로 인해 비단이 유럽 대륙에 전해졌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 병사들은 파르티아 군의 빛나는 깃발(아마도 비단으로 만들어진)을 보았다고 보고했다.[46] 유럽에서 비단에 대한 관심이 커져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서유럽까지 연장되어, 역사상 가장 크고 풍부한 통상로가 열리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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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Cras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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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문서 Roman History: Book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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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서 Life of Crassus
[27] 문서 Life of Crassus
[28] 문서 Life of Cras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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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Roman History: Book 40
[31] 문서 Life of Cras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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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Rome's Wars in Parthia Vallentine Mitchell 2010
[39] 뉴스 Romans in China: The Lost Legions of Carrhae https://www.warhisto[...] 2015-08-31
[40] 서적 China road : a journey into the future of a rising power Random House 2007
[41] 서적 Winter quarters Phoenix 2004
[42] 기타 Pompeius Trogus, in the epitome of Justin
[43] 서적 The Romans: From Village to Empire
[44] 강연 "The Ides of March, Why They Killed Julius" 2008-03-02
[45] 백과사전 ARSACIDS ii. The Arsacid dynasty http://www.iranicaon[...] 1986-12-15
[46] 서적 유라시아 역사기행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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