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오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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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알브레히트 오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성이자 경찰 고위 지휘관으로, 1897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31년 나치당에, 1932년 친위대에 가입했으며,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 내 독일 경찰을 총괄하는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탄압을 주도했다. 오베르크는 '파리의 도살자'로 불리며 유대인 학살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관여했으며, 1945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과 사면을 거쳐 196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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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오베르크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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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파리의 도살자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97년 1월 27일 |
출생지 | 함부르크, 독일 제국 |
사망일 | 1965년 6월 3일 |
사망지 | 플렌스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서독 |
사망 원인 | 알 수 없음 |
직업 | 알 수 없음 |
범죄 정보 | |
죄목 | 영국 군사 법정 전쟁 범죄 프랑스 군사 법정 인도에 반한 죄 |
형량 | 영국 군사 법정 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프랑스 군사 법정 사형; 종신형으로 감형; 이후 20년 강제 노역형으로 감형 |
현재 상태 | 사망 |
군 복무 정보 | |
복무 기간 | 1933년 – 1945년 |
계급 | SS-오베르그루펜퓌러 |
병과 | 슈츠슈타펠 |
지휘 | SS 및 경찰 지도자 라돔, 폴란드 (1941년 8월 – 1942년 5월) 고위 SS 및 경찰 지도자 점령된 프랑스 (1942년 5월 – 1944년 11월)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카를 오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군인으로 복무한 후,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전후에는 제조업 분야에서 지점장으로 일했지만 1930년 해고되었다.[1] 이후 1931년 6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당원 번호 575,205)했고,[2] 1932년 4월에는 함부르크 친위대(SS)에 입대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3]
2. 1. 초기 생애
카를 알브레히트 오베르크는 1897년 1월 27일 함부르크에서 의사이자 의학 교수였던 아버지 카를 오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1]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포병에 배속되어 포대장으로 복무했다. 1915년 11월에는 중위로 임관되어 서부 전선에서 싸웠으며,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1]전쟁 후 함부르크로 돌아와 상점에서 일한 후, 플렌스부르크의 공장에서 일했다. 1923년 다섯 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1926년 함부르크로 돌아와 외국 과일 도매 회사에 근무했다. 1930년 가을 이 회사를 퇴직하고 함부르크 시청 근처 상점가에서 담배 소매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2]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1916년 9월에는 소위로 진급했으며, 1계급 철십자훈장과 2계급 철십자훈장을 수훈했다.[1]2. 3. 전후 경력
오베르크는 1945년 5월 오스트리아 키츠뷔엘 근교에 잠복하고 있다가 미군에 체포되었다.[5] 1946년 10월 프랑스로 인도되어 재판을 받았다. 1954년 10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5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 노역형으로 다시 감형되어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5] 드골 대통령의 사면으로 1962년 11월 28일 석방되었다.[5]1965년 6월 3일 플렌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5]
3. 나치 경력
카를 오베르크는 193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1932년에는 친위대(SS)에 가입했다. 1933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나 안전국(SD)에 합류했고, 이후 SS-오버퓌러(Oberführer)로 승진하여 하노버의 경찰 행정관이 되었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 하노버 경찰 행정관, 1941년 말까지 츠비카우 경찰서장, 1941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라돔"의 SS 및 경찰 지휘관(SSPF)을 역임했다. 1942년 4월 20일 SS-브리가데퓌러(Brigadeführer)로 승진했다.[4]
1942년 5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프랑스의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SSPF)으로 근무하며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 내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진압의 최고 책임자였다. 1945년 3월 10일, 무장친위대(바펜-SS) 장군이 되었다.[5]
3. 1. 나치당 및 친위대 입당
1931년 4월 1일, 카를 오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했고(당원 번호 575,205), 1932년 4월 7일에는 친위대(SS)에 가입했다.[2] 1933년 5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나 안전국(SD)에 합류하여 그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3] 1934년 6월 30일, 긴 칼의 밤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3]이후 하이드리히와의 불화로 SD 본부를 떠나 하노버의 제4SS 지역 참모장을 거쳐, 1939년에는 츠비카우 경찰서장이 되었다.
3. 2. 친위대 정보부(SD) 활동
1933년 5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난 오베르크는 하이드리히에게 일자리를 요청하여 안전국(SD)에 합류했다. 이후 SS-오베르퓌러(Oberführer)로 승진하여 하노버의 경찰 행정관이 되었고, 1938년 9월부터 1939년 1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1941년 말까지 츠비카우의 경찰서장으로 근무했으며, 1941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는 "라돔"의 SS 및 경찰 지휘관(SSPF)을 역임했다. 1942년 4월 20일, 오베르크는 SS-브리가데퓌러(Brigadeführer)로 승진했다.[3][4]1942년 5월 5일부터 1944년 11월 28일까지, 오베르크는 SD와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관할하는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SSPF) "프랑스"로 근무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와의 투쟁을 관리하는 최고 권위자였다. 1942년 부임 직후, 신분 확인을 위한 유대인 배지 법령을 발표하고,[3] 파리 벨로드롬 디베르(벨 드 위브 대숙청)에서 13,152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명령했다. 그 무렵 그는 "파리의 도살자"로 규탄받았다. 하이드리히의 명령에 따라 오베르크는 르네 부스케가 이끄는 비시 프랑스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5]
1943년 1월 18일, 히믈러는 10만 명을 체포하고 도시의 범죄 지역을 폭파하는 마르세유의 "정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경찰과 협력하여 오베르크는 6,000명 체포, 2만 명 이주, 항만 지역의 부분적인 파괴라는 비교적 소규모의 대응을 감독했다. 1944년, 오베르크는 프랑스에 바펜-SS의 아인자츠코만도(Einsatzkommando)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1945년 3월 10일, 그는 바펜-SS 장군이 되었다.
3. 3. 승진 및 요직 역임
1931년 4월 1일 나치당에, 1932년 4월 7일에는 SS에 가입했다.[3] 1933년 5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만난 후, 안전국(SD)에 합류했다. 이후 SS-오베르푸어러(Oberführer)로 승진하여 하노버의 경찰 행정관이 되었고, 1938년 9월부터 1939년 1월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1941년 말까지 츠비카우의 경찰서장으로 근무했다. 1941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라돔"의 SS 및 경찰 지휘관(SSPF)으로 근무했다.[4] 1942년 4월 20일 SS-브리가데푸어러(Brigadeführer)로 승진했다.1942년 5월 5일부터 1944년 11월 28일까지, SD와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관할하는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SSPF) "프랑스"(Frankreich)로 근무했다. 1945년 3월 10일, 바펜-SS 장군이 되었다.[5]
3. 4. 프랑스 점령기 활동 (1942-1944)
1942년 5월, 오베르크는 SS-브리가데퓌러(Brigadeführer)로 승진함과 동시에, 프랑스의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SSPF)으로 임명되어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 내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탄압을 주도하며 "파리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5]
오베르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명령에 따라 비시 프랑스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5] 또한 벨 드 위브 대숙청으로 알려진 파리 벨로드롬 디베르에서 13,152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는 데에도 관여했다.
1944년, 오베르크는 프랑스에 무장친위대의 아인자츠코만도(Einsatzkommando)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3. 4. 1. 유대인 탄압
1942년 5월 5일부터 1944년 11월 28일까지, 오베르크는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관할하는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öherer SS-und Polizeiführer, HSSPF) "프랑스"(Frankreich)로 근무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와의 투쟁을 관리하는 최고 권위자였다. 1942년 부임 직후 유대인 배지 법령을 발표했고, 파리 벨로드롬 디베르(벨 드 위브 대숙청)에서 13,152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명령했다.[5] 그 무렵 그는 "파리의 도살자"로 규탄받았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명령에 따라 오베르크는 르네 부스케가 이끄는 비시 프랑스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1943년 1월 18일, 하인리히 힘러는 10만 명을 체포하고 도시의 범죄 지역을 폭파하는 마르세유의 "정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경찰과 협력하여 오베르크는 6,000명 체포, 2만 명 이주, 항만 지역의 부분적인 파괴라는 적은 규모의 대응을 감독했다.
3. 4. 2. 레지스탕스 탄압
1942년 5월부터 1944년 11월 28일까지, 오베르크는 안전국(SD)과 게슈타포를 포함한 프랑스의 모든 독일 경찰 부대를 관할하는 고위 SS 및 경찰 지휘관(Höherer SS-und Polizeiführer, HSSPF) "프랑스"(Frankreich)로 근무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반유대 정책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와의 투쟁을 관리하는 최고 권위자였다. 1942년 부임 직후, 신분 확인을 위한 유대인 배지 법령을 발표했고,[4] 파리 벨로드롬 디베르(벨 드 위브 대숙청)에서 13,152명의 유대인을 체포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명령했다.[4] 그 무렵 그는 "파리의 도살자"로 규탄받았다.[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명령에 따라 오베르크는 르네 부스케가 이끄는 비시 프랑스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4][5]1943년 1월 18일, 하인리히 힘러는 10만 명을 체포하고 도시의 범죄 지역을 폭파하는 마르세유의 "정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경찰과 협력하여 오베르크는 6,000명 체포, 2만 명 이주, 항만 지역의 부분적인 파괴라는 적은 규모의 대응을 감독했다. 1944년, 오베르크는 프랑스에 무장친위대의 아인자츠코만도(Einsatzkommando)를 설립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3. 4. 3. 마르세유 정화 작전 (1943)
1943년 1월 18일, 하인리히 힘러는 10만 명을 체포하고 도시의 범죄 지역을 폭파하는 마르세유의 "정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경찰과 협력하여 오베르크는 6,000명 체포, 2만 명 이주, 항만 지역의 부분적인 파괴라는 적은 규모의 대응을 감독했다.[4]3. 4. 4.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연루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는 반히틀러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신병이 구속되었으나, 사건 실패로 구속이 해제되고 "반역자" 체포에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였다.[5]4. 전후 체포, 재판 및 사망
오베르크는 1945년 6월 키츠뷔엘 근처 산악 지대에서 미군에 체포되어 영국과 프랑스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대통령 뱅상 오리올에 의해 무기징역, 르네 코티 대통령에 의해 20년 강제 노역형으로 감형되었다. 1962년 샤를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석방된 후, 플렌스부르크로 송환되어 1965년 그곳에서 사망했다.[5]
4. 1. 체포 및 재판
오베르크는 1945년 6월 미군에 의해 키츠뷔엘 근처 산악 지대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 병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54년 10월에는 프랑스로부터 또 다른 사형 선고를 받았다.[1] 1958년 4월 10일, 프랑스 대통령 뱅상 오리올은 그의 형기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그의 후임인 르네 코티 대통령은 1959년 이를 20년 강제 노역으로 다시 감형했다. 1962년 11월 20일, 오베르크는 샤를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고 11월 28일 석방되었다.4. 2. 감형 및 석방
오베르크는 1945년 6월 미군에 의해 키츠뷔엘 근처 산악 지대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군 병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54년 10월에는 프랑스로부터 또 다른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58년 4월 10일, 프랑스 대통령 뱅상 오리올은 그의 형기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그의 후임인 르네 코티 대통령은 1959년 이를 20년 강제 노역으로 다시 감형했다. 1962년 11월 20일, 오베르크는 샤를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고 11월 28일 석방되었다.[1]그 후 오베르크는 당시 《디 차이트》에 따르면 전 나치와 SS 간부들의 거점이었던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북부의 플렌스부르크로 송환되었다.
4. 3. 사망
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키츠뷔엘 근교에 잠복하고 있었으나, 1945년 5월 미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다.[5] 1946년 10월 프랑스로 신병이 인도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5] 1954년 10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5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그 후 20년의 노역형으로 감형되어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5] 샤를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1962년 11월 28일 석방되었다.[5]1965년 6월 3일 플렌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5]
5. 친위대 경력
- 1933년 7월 1일, 친위대 소위(SS-Untersturmführer)가 되었다.[6]
- 1935년 11월, 친위대 대좌(SS-Standartenführer)로 승진하였다.[7]
- 1939년 4월, 친위대 상급대좌(SS-Oberführer)가 되었다.[8]
- 1942년 5월, 친위대 소장(SS-Brigadeführer) 및 경찰 소장(Generalmajor der Polizei)으로 승진하였다.[9]
- 1943년 4월, 친위대 중장(SS-Gruppenführer) 및 경찰 중장(Generalleutnant der Polizei)이 되었다.[9]
- 1944년 8월,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 및 경찰 대장(General der Polizei)으로 승진하였다.[9]
- 1945년 3월, 무장친위대 대장(General der Waffen-SS)이 되었다.[9]
참조
[1]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2]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3]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4]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5]
웹사이트
Carl Oberg: Nazi Germany
http://www.spartacus[...]
2009-04-28
[6]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7]
서적
Allgemeine-SS
Schiffer Publishing
[8]
서적
ゲシュタポ・狂気の歴史
講談社学術文庫
[9]
서적
Allgemeine-SS
Schiffer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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