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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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는 독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재무부에서 고위 관료로 근무하다가,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에서 재무 장관에 임명된 후,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도 재무장관으로 활동하며, 1945년 카를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겸임하고, 히틀러의 후임으로 지명된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하자 총리 대행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특사로 석방되었으며, 이후 경제 서적과 회고록을 저술하다 197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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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전체 이름 | 요한 루드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 출생 | 1887년 8월 22일 |
| 출생지 | 독일 제국, 안할트 공국, 슈타스푸르트, 라트만스도르프 |
| 사망 | 1977년 3월 4일 |
| 사망지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에센 |
| 국적 | 독일 |
| 배우자 | 에렌가르트 폰 플레텐베르크 (1918년 결혼) |
| 자녀 | 9명 |
| 친척 | 베아트릭스 폰 슈토르히 (손녀) |
| 경력 | |
| 소속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37년–1945년) |
| 기타 정당 | 무소속 (1932년–1937년) |
| 학력 | 할레 대학교, 로잔 대학교, 옥스퍼드 오리엘 칼리지 |
| 직업 | 장교, 법률가, 정치인 |
| 군사 경력 |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14년 - 1919년 |
| 최종 계급 | 오버로이츠난트 (중위)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훈장 | 철십자 훈장 1급 |
| 정치 경력 | |
| 직책 | 독일국 수석 장관 |
| 임기 시작 | 1945년 5월 2일 |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 대통령 | 카를 되니츠 |
| 전임자 | 요제프 괴벨스 |
| 후임자 | 직책 폐지 |
| 직책 2 | 외무 장관 |
| 임기 2 시작 | 1945년 5월 2일 |
| 임기 2 종료 | 1945년 5월 23일 |
| 수석 장관 | 자신 |
| 전임자 2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 후임자 2 | 직책 폐지 |
| 직책 3 | 재무 장관 |
| 임기 3 시작 | 1932년 6월 1일 |
| 임기 3 종료 | 1945년 5월 23일 |
| 총리 3 |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 |
| 수석 장관 3 | 자신 |
| 전임자 3 | 헤르만 디트리히 |
| 후임자 3 | 직책 폐지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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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훈 | 독일 독수리 훈장, 황금 당 배지 |
2. 생애
1887년 독일 안할트의 라트만스도르프에서 태어난 크로지크는 할레, 로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육군으로 참전하여 중위로 진급하고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18년 에렌가르트 폰 플레텐베르크 남작 부인과 결혼하여 4남 5녀를 두었다.
1922년 베를린 중앙 정부 재무성에서 고위 정부 관료(Oberregierungsrat)가 되었고, 1929년에는 행정 국장이 되었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에서 재무 장관에 올랐으며, 이후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과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계속 재무장관으로 일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지만, 정치 활동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 카를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서 재무장관과 외무장관을 겸임했다.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수행했다.
독일 항복 후 1945년 5월 23일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특사로 석방되었다. 전후에는 여러 경제 서적과 회고록을 펴냈으며, 1977년 에센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7년 독일 안할트의 라트만스도르프에서 안할트의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 아버지와 폰 슈베린 백작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요한 루트비히 폰 크로지크였으나, 1925년 어머니 가문 쪽에 입양되면서 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로 개명하고 백작 작위를 받았다.[1]1893년부터 로슬레벤의 수도원 학교에 다녔다.[13] 아비투어 합격 후인 1905년부터 할레 대학교, 로잔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13][14]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09년 1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왕국 공무원 수습생으로 일했다.[13] 1910년부터는 슈테틴의 지방 공무원이 되었다.[14] 1914년 최종 시험에도 합격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독일 육군으로 참전하여 중위로 진급하고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4] 전쟁 중이던 1918년, 플레텐베르크 가문의 남작 영애 에렌가르트와 결혼하여 네 아들과 다섯 딸을 두었다.[13]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육군으로 참전하여 중위로 승진하고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14] 크로지크는 제2 폼머른 창기병 연대에 예비역 장교로 입대하여 전상을 입고 1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14]2. 3.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크로지크는 1920년 상실레지엔(Oberschlesien)의 힌덴부르크 시(현재 폴란드 자브제(Zabrze)) 시청에서 수습직으로 근무했다.[13] 같은 해, 베를린 재무부에 고위 관료로 초빙되어 참사관(參事官) 직급을 얻었다.[14][15] 1922년에 상급 참사관으로 승진했고,[13][15] 1924년에는 과장으로 승진했다.[13][15]1925년, 외가 숙부 알프레트의 양자가 되어 슈베린 백작(Graf Schwerin) 작위를 계승하고, 성을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Graf Schwerin von Krosigk)로 개명했다.[13]
1929년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재무부 예산부 부장을 맡았다.[13][15] 1931년에는 배상부 부장을 겸임했다.[13] 그는 재무장관이 될 때까지 정치적으로 별로 활동하지 않았지만,[16]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배상금 지불 부서에 참여했다.
3. 나치 정권 하의 활동
1933년 4월, 히틀러의 개입으로 프리츠 라인하르트가 재무부 차관에 올라 실권을 잡았지만, 크로지크는 나치 독일 시대에 계속해서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는 정치 활동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여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2] 1937년 1월 30일, 히틀러에게서 나치당원 명예 금장(Goldenes Parteiabzeichen)을 받았고, 동시에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805,231). 그는 독일 국법 학회(Akademie für Deutsches Recht) 회원이기도 했다. 크로지크는 히알마르 샤흐트와 함께 독일 재군비 계획을 감독했다.[14]
크로지크는 샤흐트와 달리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고 유대인 배제 법률에 관여했다.[14] 1933년 4월 7일에 공포된, 유대인을 공무원에서 배제하는 「직업 공무원 재건법(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에 히틀러 및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과 함께 서명했다.[21] 1938년 11월 19일에는 내무장관 프릭, 노동장관 프란츠 젤테와 함께 유대인을 공적인 복지 사업에서 배제하는 법률에 서명했다.[22]
1938년 8월, 크로지크는 히틀러에게 각서를 보내 독일 경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데텐 위기를 둘러싼 개전에 강력히 반대하며, 공산주의자, 유대인, 체코인이 독일을 조기 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그 대신 "때를 기다려" 군사력과 경제력 강화가 완료된 후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23] 1938년 각료회의 이후 그는 사무만 전담했고, 이후로는 정치 무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13] 1939년 이후 크로지크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자금 세탁도 했다.
1945년 2월, 크로지크는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독일에 남아 있는 산업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서한이 히틀러가 명령한 초토화 작전에 슈페어가 반대하고 실행을 저지한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3. 1. 재무장관 임명
1932년 프란츠 폰 파펜은 크로지크를 국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정권과 나치 통치 기간 내내 그 직책을 유지했다.[2]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대통령 내각으로 구성된 파펜 내각에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는데, 이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개인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16] 이후 크로지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1932년 6월 16일부터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를 의장으로 독일의 배상 문제에 관한 로잔 회의가 열렸고, 크로지크는 총리 프란츠 폰 파펜,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경제장관 Hermann Warmbold|헤르만 밤볼트de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다.[17] 그 결과, 7월 9일에 체결된 로잔 협정에 따라 독일은 배상금을 상당히 줄였지만, 여전히 3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17][18]
1932년 12월 2일, 파펜 총리와 내각의 실력자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방장관의 대립이 심화되자, 크로지크는 각료회의에서 외무장관 노이라트와 함께 슐라이허를 지지하여 파펜의 실각에 기여했다.[19] 1932년 12월 3일에 구성된 슐라이허 내각에도 재무장관으로 유임되었다. 1933년 1월 28일 슐라이허 내각이 몰락했지만, 1월 30일에 구성된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크로지크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밑에서 독일 보수파를 대표했다.

크로지크의 가족 구성원 일부는 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에 가담했지만, 크로지크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고, 히틀러는 정기적인 내각 회의를 열지 않았다. 1938년 히틀러 내각의 마지막 회의 이후 크로지크는 어떠한 공개적인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부처 운영에 집중했다.[2]
크로지크는 독일 보수 운동을 대표하여 슐라이허와 히틀러 모두 하에서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는 나중에 "더 나쁜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했다고 주장했지만, 나치당의 집권을 환영했으며 많은 정책에 동의하고 기여했다. 여기에는 독일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조치도 포함되었다. 크로지크가 독일의 재정 정책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은 독일제국은행 총재와 헤르만 괴링 (4개년 계획 전권 대표)의 영향력에 의해 제한되었지만, 그는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3] 1938년 8월, 크로지크는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데텐 위기로 인한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각서를 보냈고, "공산주의자, 유대인, 체코인"이 독일을 시기상조의 갈등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자신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완전히 구축한 후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3. 2. 나치 경제 정책 관여
1932년 프란츠 폰 파펜은 크로지크를 국가 재무장관으로 임명했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정권과 나치 통치 기간에도 그 직책을 유지했다.[2] 크로지크는 독일 보수 운동을 대표하여 슐라이허와 히틀러 밑에서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는 나중에 "더 나쁜 일"을 막기 위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했다고 주장했지만, 나치당의 집권을 환영했으며 많은 정책에 동의하고 기여했다. 여기에는 독일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조치도 포함되었다.[3]1933년 4월, 히틀러의 개입으로 프리츠 라인하르트가 재무부 차관에 올라 실권을 잡았지만, 크로지크는 나치 독일 시대에 계속해서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는 정치 활동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여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2] 1937년 1월 30일, 히틀러에게서 나치당원 명예 금장(Goldenes Parteiabzeichen)을 받았고, 동시에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805,231). 그는 독일 국법 학회(Akademie für Deutsches Recht) 회원이기도 했다. 크로지크는 히알마르 샤흐트와 함께 독일 재군비 계획을 감독했다.[14]
크로지크는 샤흐트와 달리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고 유대인 배제 법률에 관여했다.[14] 1933년 4월 7일에 공포된, 유대인을 공무원에서 배제하는 「직업 공무원 재건법(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에 히틀러 및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과 함께 서명했다.[21] 1938년 11월 19일에는 내무장관 프릭, 노동장관 프란츠 젤테와 함께 유대인을 공적인 복지 사업에서 배제하는 법률에 서명했다.[22]
1938년 8월, 크로지크는 히틀러에게 각서를 보내 독일 경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데텐 위기를 둘러싼 개전에 강력히 반대하며, 공산주의자, 유대인, 체코인이 독일을 조기 분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그 대신 "때를 기다려" 군사력과 경제력 강화가 완료된 후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23] 1938년 각료회의 이후 그는 사무만 전담했고, 이후로는 정치 무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13] 1939년 이후 크로지크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인 자금 세탁도 했다.
1945년 2월, 크로지크는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독일에 남아 있는 산업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서한이 히틀러가 명령한 초토화 작전에 슈페어가 반대하고 실행을 저지한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부터 크로지크의 장관직은 유대인 박해와 재산 몰수, 불법 자금 세탁에 점점 더 집중되었다.[3]1945년 2월, 폰 크로지크는 군수부 장관 슈페어에게 보낸 서한에서 독일의 남은 산업 능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연합군의 독일 폭격이 소련에 점령당하지 않도록 독일의 산업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그의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산업 능력을 유지하면 전후 서방 연합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히틀러가 명령한 "초토화 작전"의 실행을 막기 위한 슈페어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히틀러는 최후의 유언장에서 사후에도 크로지크가 재무장관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지명했다.[3] 그는 총리(Reichskanzler)인 괴벨스가 이끄는 정부에서 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벨스 자신은 그로부터 하루 후인 1945년 5월 1일에 자살했다. Reichspräsident 카를 되니츠는 크로지크에게 총리직을 승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거절했지만 다음 날 "수반 장관"직을 수락했다.[5][6] 1945년 5월 2일, 독일 국민에게 방송을 통해 그는 유럽 전역에 걸친 "철의 장막"을 언급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요제프 괴벨스의 기사에서 이 표현을 가져왔으며,[7] 이후 윈스턴 처칠에 의해 유명해졌다.
급속히 진군하는 연합군 때문에 새 독일 정부의 관할권은 덴마크 국경 근처 플렌스부르크와 미르빅에 있는 되니츠의 본부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이 정부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로 불렸다.[8] 되니츠와 크로지크는 소련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면서 서방 연합군과 휴전을 협상하려 했다.[9] 1945년 5월 7일, 되니츠는 연합군에게 독일 항복 문서에 서명할 것을 승인했고, 이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앞에서 랭스에서 이루어졌다. 되니츠는 나중에 베를린에서 소련이 주재하는 의식에서 독일 국방군이 또 다른 항복 문서에 서명하도록 승인했다. 1945년 5월 23일,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령에 따라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해체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10]
3. 4. 플렌스부르크 정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히틀러가 자살한 뒤, 카를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 구성원이 되었다. 크로지크는 이 정부에서 재무장관직과 외무장관을 겸임했고, 히틀러의 후임 총리로 지명되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하자 그의 후계를 이었다.[24]소련군이 베를린을 압박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해군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 원수를 대통령으로,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총리로, 폰 크로지크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한 후 자살하였다.
그러나 되니츠는 히틀러의 유언을 무시하고 수뇌부를 구성하여,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의 추천으로 폰 크로지크를 임시 정부의 총리 대행(수반)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히틀러의 유언에서 외무장관으로 지명된 인물은 아르투르 자이스-인크바르트였다.[25]
급속히 진격하는 연합군에 의해, 독일 신정부의 관할 구역은 덴마크 국경 근처 플렌스부르크 주변으로 한정되었고, 항복 직전의 혼란 속에서 실질적인 직무와 권한은 거의 없었지만, 되니츠에게 "조약에 의한 항복"을 권유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다. 1945년 5월 7일, 되니츠는 랭스에서 아이젠하워 장군 앞에서 이루어진 연합국에 대한 독일 항복 문서에 서명을 승인하였다. 5월 2일 독일 국민에 대한 라디오 연설에서 괴벨스의 원고를 인용하여 "철의 장막"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는 이 말이 널리 퍼지게 된 윈스턴 처칠의 풀턴 연설(1946년 3월)보다 더 이른 사용례이다.[26]
4. 전후 활동
1945년 5월 23일 크로지크는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에서 재무부 책임자로서 반 유대인 재무 정책과 독일 군비 관여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27]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에서, 미국은 독일 전범들에 대한 대량 사면을 실시했고, 크로지크 또한 1951년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여러 권의 경제 서적과 회고록을 펴냈으며, 1977년 에센에서 사망하였다.
4. 1. 뉘른베르크 재판
1945년 5월 23일, 크로지크는 연합군에 체포되었고,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에서 재무부 책임자로서 반 유대인 재무 정책과 독일 군비 관여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11] 1949년 장관 재판에서 나치 희생자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세탁하고 강제 수용소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형량은 "펙 패널"에 의해 재검토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에서, 미국은 독일 전범들에 대한 대량 사면을 실시했고, 크로지크 또한 1951년에 특사로 석방되었다.[27]4. 2. 말년
1945년 5월 23일, 크로지크는 연합군에 체포되었고, 뉘른베르크 부속 재판에서 재무부 책임자로서 반 유대인 재무 정책과 독일 군비 관여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11] 그러나 미소 냉전 속에서 미국은 독일 전범의 대량 사면을 실시했고, 크로지크 또한 1951년 특사로 석방되었다.이후 서독 에센에서 거주하며 경제 관련 서적과 회고록을 출판했다. 1977년 에센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7]
5. 가족 관계
크로지크는 1918년에 에렌가르트 폰 플레텐베르크 (Ehrengard von Plettenberg) 남작 부인과 결혼하여 네 아들과 다섯 딸을 두었다.[12]
| 배우자 | 자녀 |
|---|---|
| 에렌가르트 폰 플레텐베르크 (1895~1979) |
그녀는 프리드리히 폰 플레텐베르크-헤렌 백작(1863~1924)과 그의 아내인 에렌가르트 폰 크로지크 백작 부인(1873~1943)의 딸이었다.
6. 저서
| 제목 | 연도 | 비고 |
|---|---|---|
| Es geschah in Deutschland|독일에서 일어난 일de | 1951년 | |
| Die große Zeit des Feuers - Der Weg der deutschen Industrie|불의 위대한 시대 – 독일 산업의 길de | 1959년 | 전 3권 |
| Alles auf Wagnis - der Kaufmann gestern, heute und morgen|모든 것을 위험에 걸다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상인de | 1963년 | |
| Persönliche Erinnerungen|개인적 회상de | 1974년 | 회고록, 전 3권 |
| Staatsbankrott|국가 파산de | 1975년 | 192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재정 정책에 관한 연구 |
| Memoiren|회상록de | 1977년 | Persönliche Erinnerungen|개인적 회상de의 단축판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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