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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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라발은 188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정치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이후 우경화되어 여러 차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다. 1930년대에는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외무부 장관으로 이탈리아와 협정을 맺어 독일 견제를 시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프랑스 정권을 수립하고 독일과 협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부총리, 수상으로 활동했으나, 대독 협력 정책과 유대인 추방에 적극 가담한 혐의로 몰락했다. 1945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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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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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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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ieore Labal |
출생 이름 | Pierre Jean Marie Laval |
출생일 | 1883년 6월 28일 |
출생지 | 샤텔동, 프랑스 |
사망일 | 1945년 10월 15일 |
사망 장소 | 프렌느 교도소, 프렌느, 프랑스 |
사망 원인 | 총살형 |
안장 장소 | 몽파르나스 묘지 |
배우자 | 잔 클라우사트 (1909년 결혼) |
자녀 | 조제 라발 |
친척 | 조제프 클라우사트 (장인) 르네 드 샹브룅 (사위) |
정치 경력 | |
정당 | SFIO (1914–23) 무소속 (1923–45) |
공직 | |
임기 시작 | 1942년 4월 18일 |
임기 종료 | 1944년 8월 19일 |
국가 수반 | 필리프 페탱 |
이전 총리 | 필리프 페탱 |
다음 총리 | 샤를 드 골 |
임기 시작 | 1935년 6월 7일 |
임기 종료 | 1936년 1월 24일 |
대통령 | 알베르 르브룅 |
이전 총리 | 페르낭 부이송 |
다음 총리 | 알베르 사로 |
임기 시작 | 1931년 1월 27일 |
임기 종료 | 1932년 2월 20일 |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폴 두메르 |
이전 총리 | 테오도르 스테그 |
다음 총리 | 앙드레 타르디외 |
임기 시작 | 1940년 7월 11일 |
임기 종료 | 1940년 12월 13일 |
총리 | 필리프 페탱 |
이전 부총리 | 필리프 페탱 |
다음 부총리 |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
범죄 정보 | |
유죄 판결 | 반역죄 |
형벌 | 사형 |
상태 | 사형 집행됨 |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피에르 라발은 1883년 6월 28일 오베르뉴 북부 비시 근처 샤텔동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는 카페 운영자, 우체부였으며, 여관, 정육점, 포도원과 말을 소유하는 등 마을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이었다.[5][6] 라발은 샤텔동의 마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파리의 생 루이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01년 7월 바칼로레아를 취득했다.[7] 이후 보르도와 바욘에서 학업을 계속하며 스페인어를 배웠고,[7] 리옹에서 동물학 학위를 받았다.[8] 학비를 벌기 위해 리옹, 생테티엔, 오텡의 여러 ''고등학교''에서 감독관으로 일했다.[7]
라발은 자연 과학 연구를 포기하고 법학으로 전향하여 1909년 CGT에 가까운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가 되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몇 년 동안 노동 불안이 특징이었으며, 라발은 정부의 기소 시도로부터 파업 노동자, 노동 조합원 및 좌익 선동가들을 변호했다.[14] 한 노동 조합 회의에서 라발은 "나는 동지들 사이의 동지이고,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자입니다... (중략) ...동지들, 저는 육체 노동 변호사입니다."라고 말했다.[15] 그를 유명하게 만든 첫 번째 사건은 폭발물 소지 및 아나키스트 교본 혐의로 기소된 혁명적 노동 조합원 구스타브 망에스의 무죄 방면이었다.[14]
1903년 생테티엔에 살면서 사회주의 중앙혁명위원회에 가입했다.[9] 조르주 소렐과 위베르 라가르델의 좌익 교리에 영향을 받았지만,[10]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라고 밝혔다.[11] 그는 사람, 그들의 직업, 불행, 갈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11] 같은 해 징집되었으나 정맥류로 인해 군 면제되었다.[12] 1907년 파리로 돌아와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변호사 시절 "물어뜯는 기술"이라고 불리는 설득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3. 변호사 시절
라발은 1909년 사회주의 정치인인 조제프 클로사 박사의 딸인 잔 클로사와 결혼했다.[14] 그들의 외동딸 조제는 1911년에 태어났고, 르네 드 샹브렝과 결혼했다.[16] 퓌드돔 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과 여관을 운영했고,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장학금을 받아 대학 입학 자격과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법학 학위를 취득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고향의 명사의 딸과 결혼하여 급진사회당의 시장과 주 의원이 친척이 되었고, 고객은 사회주의자와 노동 조합원이 많아졌다. 변호사 시절의 라발은 소송을 실제로 제기하는 것을 피했으며, 그는 "물어뜯는 기술"이라고 불리는, 설득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4. 정치 경력
4. 1. 제1차 세계 대전과 사회당 활동
1914년 4월, 전쟁의 공포가 전국을 휩쓸자, 사회당과 급진당은 평화를 옹호하며 선거 운동을 준비했다. 지도자는 장 조레스와 조제프 카이요였다.[18]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3개월 전인 1914년 입법 선거에서 노동조합은 파리 및 그 교외 지역을 포함하는 센의 사회당 후보로 라발을 찾았다. 라발은 하원의 생-드니 제2선거구에서 하원으로 선출되었다. 31세가 채 안 된 그는 하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18] 사회당의 지원을 받은 급진당은 프랑스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함께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과 1914년 7월 31일 조레스의 암살은 그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라발의 형제 장은 전쟁 초기 몇 달 만에 사망했다.[18]
라발은 동원 노력을 방해할 수 있는 잠재적인 파괴 분자들의 목록인 ''카르네 B''에 등재되었다. 참모총장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내무부 장관 장-루이 말비는 국가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누구도 체포하는 것을 거부했다. 라발은 전쟁 중에도 자신의 평화주의 신념을 지켰다. 1915년 12월, 카를 마르크스의 손자인 장 롱게는 사회당 의원들에게 정부가 협상된 평화를 추진하도록 다른 국가의 사회주의자들과 소통할 것을 제안했다. 라발은 이에 서명했지만 그 안은 부결되었다.[18]
프랑스의 자원이 전쟁에 맞춰지면서 물자는 부족하거나 가격이 폭등했다. 1917년 1월 30일, 국민의회에서 라발은 에두아르 에리오 보급 장관에게 파리의 석탄 부족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에리오는 "할 수 있다면 내가 직접 바지선을 내릴 텐데"라고 말했고, 라발은 "무능함에 조롱을 더하지 마시오"라고 응수했다.[19] 이 말은 의회를 즐겁게 했고 조르주 클레망소의 관심을 끌었지만 라발과 에리오의 관계를 영구적으로 긴장시켰다.[19]
라발은 전쟁의 수행 방식과 전선 부대의 열악한 보급 상황을 비난했다. 1917년 4월 로베르 니벨 장군의 샹 드 당 공세 이후 반란이 발생하자, 그는 반란군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마르셀 카생과 마리우스 무테가 1917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스톡홀름 사회주의자 회의 초청장을 들고 돌아오자, 라발은 평화의 기회를 보았다. 그는 국회 연설에서 대표단의 파견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톡홀름, 러시아 혁명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렇습니다, 평화를 위해 스톡홀름으로... 그렇습니다, 스톡홀름은 북극성입니다."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18]
1917년 봄의 평화에 대한 희망은 매번 말비와 같이, 실재적이고 상상적인 배신자들의 발견에 압도되었다. 말비는 프랑스인들을 ''카르네 B''에 따라 체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라발의 "스톡홀름, 북극성" 연설은 잊혀지지 않았다. 라발의 많은 지인들, 무정부주의 신문 ''본네 루즈''의 발행인들과 다른 평화주의자들이 체포되거나 심문을 받았다. 라발은 평화주의자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그는 레온 트로츠키와 알고 지냈다고 한다), 당국은 그를 추적하지 않았다. 그는 국회의원 신분, 신중함, 그리고 우정이 그를 보호했다. 1917년 11월,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어 라발에게 내각의 자리를 제안했다. 라발은 사회당이 어떤 정부에도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기에 이를 거절했지만, 사회당 국회의원 회의에서 그러한 정책의 현명함에 의문을 제기했다.[18]
4. 2. 전후 정치 활동과 우경화
1919년 총선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평화주의 기록, 클레망소에 대한 반대, 그리고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과격함에서 비롯된 불안감은 보수적인 국민 블록의 승리로 이어졌고, 라발은 하원 의원직을 잃었다. 24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노동 총동맹(CGT)은 1920년에 총파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했고, 정부는 노동 총동맹 해산을 시도했다. 라발은 조제프 폴-봉쿠르를 수석 변호사로 하여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변호했고, 노동조합을 지켜냈다.
1920년 12월 투르 회의에서 사회주의자들이 SFIC와 SFIO로 이념적으로 분열되자, 라발은 당적을 유지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1923년, 오베르빌리에 시장 선거에서 전직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자신의 명단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사망 직전까지 시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오베르빌리에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인접 도시의 시장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했다.[20]
1924년 입법 선거에서 좌파 카르텔이 승리하자, 라발은 무소속 사회주의자 명단으로 국민 의회 의석을 되찾았다. 그는 조제프 카이요의 사면을 위해 성공적으로 싸웠다. 1927년, 라발은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라발은 지방 신문인 ''르 모니퇴르 뒤 퓌드돔''과 클레르몽페랑에 있는 부속 인쇄소, 그리고 리옹 ''레퓌블리캥'' 등을 인수하며 상당한 개인 재산을 축적했다.[21][22] 1945년, 그는 조사 판사에게 "굳건한 물질적 독립이 ... 정치인에게 훨씬 더 큰 정치적 독립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썼다.[21]
4. 3. 장관 및 총리 재임 (1930년대)
피에르 라발은 1925년 폴 파이레베 정부에서 공공 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여러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30년에는 앙드레 타르디외 정부의 노동부 장관으로서 사회 보험 법안 통과에 기여했다. 1926년 에두아르 에리오가 급진당을 중심으로 하여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라발은 4년간 프랑스 정부에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1927년 라발은 센강의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적 싸움에서 벗어나 제3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제거하기 위한 헌법 개혁을 희망하였다.
1931년 1월, 라발은 처음으로 총리가 되어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협상을 벌였다. 그 해, 그는 후버 모라토리엄 지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프랑스 내외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타임지는 라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1934년, 가스통 두메르그 정부에서 해외 식민부 장관을 역임한 후, 루이 바르투가 암살되자 라발은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1935년,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이탈리아 협정을 체결하고, 스트레사 전선을 구축하여 독일에 대항하려 했다. 같은 해,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전 라발의 주요 목표는 이탈리아를 반독일 세력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코렐리 바넷에 따르면, 라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치 독일이었으며, 아비시니아 문제로 이탈리아를 멀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1935년 6월, 라발은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호어-라발 협정 논란 등으로 1936년 1월 사임했다.
5. 비시 프랑스 정권
1940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항복했다. 라발은 알제리에서 망명 정부를 세워 전투를 계속하려던 대통령들을 상하 양원을 대표하여 설득하여 포기하게 했고, 알제리로 향한 일부는 현지에서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라발은 제3공화국을 해체하고, 필리프 페탱을 국가 원수로 하는 비시 정권을 성립시키고, 부총리에 취임했다. 페탱에게 독재 권력을 부여한 1940년 7월 10일의 헌법적 법률에서는 페탱의 동의 없이 조항을 수정했다.
라발의 친독 성향은 "독일은 프랑스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 유럽을 건설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이 곧 무기를 내려놓는 날(독일 승리의 날)에는 프랑스는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부여받을 것이다"라는 관측에 근거한 타산적인 것이었고, "나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볼셰비즘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반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측에서는 라발의 태도를 간파하고 있었고, 당시 주불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Otto Abetz영어는 "독일의 권위 있는 사람들은 라발을 최대 의혹을 품지 않고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역시 "나에게 한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전형적인 민주주의적 정치인이라는 녀석이다"라고 경계했다. 페탱은 독재 권력을 부여한 라발에게 일종의 거리낌이 있었지만, 최소한의 협력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탱파와 라발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페탱파에게도 독일과의 협상을 수행하는 "더러운 역할"로서, 라발의 존재를 이용하고 있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페탱파의 라발에 대한 불만은 높아졌고, 11월에는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편입되면서, 라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도 높아졌다. 1940년 12월 13일, 부총리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자택 연금되었지만 독일 측의 항의로 취소되었다. 이 이후, 라발과 친했던 아베츠는 페탱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1941년 8월 27일에는 저격을 받아, 총알이 심장에 닿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이때, 그는 암살자의 처형에 반대했다.
5. 1. 비시 정권 수립 (1940년)
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항복한 후, 피에르 라발은 필리프 페탱을 국가 원수로 하는 비시 정권 수립을 주도했다.[47] 그는 제3공화국을 해체하고 페탱에게 독재 권력을 부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7] 1940년 7월 10일의 헌법적 법률에서는 페탱의 동의 없이 조항을 수정했다.라발은 부총리에 취임하여 적극적인 대독 협력 정책을 추진했다.[47] 그는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며 프랑스가 새로운 유럽 질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47] 이러한 그의 친독 성향은 "독일은 프랑스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 유럽을 건설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이 곧 무기를 내려놓는 날(독일 승리의 날)에는 프랑스는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부여받을 것이다"라는 관측에 근거한 타산적인 것이었다. 또한 "나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볼셰비즘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반공적인 것이었다.

라발은 1940년 10월, 협력을 페탱과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 둘 다, 가능한 적게 내주고 최대한 많이 얻는 것을 의미했다.[48] 그러나 독일 측에서는 라발의 태도를 간파하고 있었고, 당시 주불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Otto Abetz영어는 "독일의 권위 있는 사람들은 라발을 최대 의혹을 품지 않고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역시 "나에게 한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전형적인 민주주의적 정치인이라는 녀석이다"라고 경계했다.
페탱은 독재 권력을 부여한 라발에게 일종의 거리낌이 있었지만, 최소한의 협력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탱파와 라발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페탱파에게도 독일과의 협상을 수행하는 "더러운 역할"로서, 라발의 존재를 이용하고 있던 측면이 있었다. 1940년 11월,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편입되면서, 라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도 높아졌다. 결국 1940년 12월 13일, 라발은 부총리 자리에서 해임되었다.[96]
5. 2. 실각과 복귀 (1940-1942)
1940년 12월 13일, 라발은 필리프 페탱과의 갈등으로 부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51] 페탱은 각료 회의에서 모든 장관에게 집단 사임 서한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고, 라발은 노동부 장관 벨린을 제거하려는 책략으로 ভেবে 서명했다. 그러나 페탱은 라발과 리페르의 사임을 수리한다고 발표했다.[51] 그날 저녁, 라발은 체포되어 샤텔동의 자택에 가택 연금되었다. 페탱은 라발의 업무 방식이 자신의 군대식 사고방식과 맞지 않고, 라발이 자신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는 등의 무례함을 보였다고 밝혔다.[52] 이후 라발은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의 개입으로 석방되어 파리로 이송되었고, 독일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면서 공적 및 정치적 활동에 계속 참여했다.[53]1941년 8월 27일, 라발은 프랑스 의용군 사열에 참석했다가 크루아 드 푀의 일원인 폴 콜레트에게 총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으나, 곧 회복했다.
1942년 4월 18일, 라발은 수상(정부 수석: chef du gouvernement)으로 정부에 복귀했다. 이는 프랑수아 다르랑 부총리의 대독 협력 정책이 교착 상태에 이른 결과였다. 라발은 종전의 부총리가 아닌 자립성과 발의권을 가진 수상으로서 복귀를 요구했다. 라발 수상 시대의 정부는 으로 독일 측에 다수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는 등 대독 협력 정책을 주도했다. 안톤 작전 이후에는 친나치파 세력이 각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라발은 정부 내에서 고립되었다.

5. 3. 대독 협력 정책과 유대인 추방 (1942-1944)


라발은 1942년 4월에 권력을 되찾았다.[54] 프랑수아 다르랑의 대독 협력 정책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라발은 수상(정부 수석: chef du gouvernement)으로서 정부에 복귀했다. 자립성과 발의권을 가진 수상으로서의 복귀는 라발이 요구한 것이었다. 1942년 6월 22일 라디오 연설에서 라발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정상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재건"하고, "볼셰비즘이 모든 곳에 자리 잡을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승리를 원한다"고 밝혔다.[54] 이러한 연설은 비시 정부가 독일에 종속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여 여론에 악영향을 미쳤고, 페탱과 다른 장관들 또한 라발의 대담함에 분개했다.[55]
라발 정부는 을 통해 독일 측에 다수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병력 보충을 위해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했고, 프랑스에 30만 명 이상의 숙련된 노동자를 요구했다. 라발은 프랑스 전쟁 포로 1명당 노동자 1명을 교환하는 제안으로 지연시켰고, 독일로 도착하는 노동자 3명당 전쟁 포로 1명을 송환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56]
라발 정부는 유대인 추방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독일은 수용소에 대해 비시 프랑스 당국에 알리지 않고, 유대인들이 추축국의 전쟁 노력을 위한 강제 노동으로 추방되고 있다고 알렸다. 라발은 프랑스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만 독일의 통제를 받도록 허용하는 절충안을 협상했지만,[57] 16세 미만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추방에 포함시키면서 독일이 내린 명령을 넘어섰다.[58] 모르데카이 팔디엘의 저서 『교회와 홀로코스트』에 따르면, 개신교 지도자 마르크 뵈그너가 항의했을 때 라발은 가족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아이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고,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8] 뵈그너가 아이들이 거의 확실히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라발은 "한 명의 [유대인 아이]도 프랑스에 남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59] 라발은 또한 미국 친구 봉사 위원회가 마련한 유대인 어린이들의 미국 비자 취득을 막으려 했다.[59]
1942년 11월, 연합군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상륙(토치 작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안톤 작전으로 자유 지역을 점령하여 비시 정부는 프랑스 본토에 대한 실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정부가 그의 편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계속 물었고, 비시 정부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도록 요구했다. 라발과 페탱은 초협력주의 장관들에 맞서 완강히 거부하는 데 동의했다.
1943년, 라발은 새로 창설된 민병대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었지만,[61] 실질적인 권한은 사무총장인 조제프 다르낭에게 있었다.[61] 페탱파는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친나치 세력이 대두하여 오히려 라발이 친나치파에 의한 과도한 대독 협력에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10월의 안톤 작전 이후에는 이념적으로 나치즘에 공명하는 친나치파의 세력이 각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라발은 정부 내에서 고립되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동안 방송된 연설에서 라발은 국민에게 "전쟁이 우리 영토로 옮겨졌을 때, 당신의 훌륭하고 규율 잡힌 태도로 당신이 프랑스를 생각하고 프랑스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62]
1944년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라발은 샤를 드골이나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독일의 허가를 받아, 국회를 소집하여 합법적인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 오토 아베츠의 지지를 받아 하원 의장인 에두아르 에리오를 투옥에서 석방하여 파리로 데려와 의회를 재소집하도록 했다.[63][64] 상원 의장 쥘 잔네니도 연락을 받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65] 라발의 책략은 실패했다. 에리오는 처음에는 협력했지만 잔네니가 부재했기 때문에 계획을 진행하는 것을 거부했고,[66] 독일은 초협력주의자 마르셀 데아와 페르낭 드 브리농의 개입 이후 마음을 바꿨다. 8월 17일 에리오는 독일군에 체포되어 라수로, 그 다음 포츠담으로 추방되어 국회 소집의 가능성은 사라졌다.[67]
5. 4. 몰락과 망명 (1944-1945)
1944년 8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침공하자 라발은 파리 해방 전에 독일로 탈출했다.[71] 그는 벨포르로 이송되었다가[68] 연합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지자 1944년 9월 7일 비시 정부 잔존 세력과 함께 독일의 지크마린겐 앙클라베로 이동했다.[69] 1945년 4월, 조지 S. 패튼 미군이 지크마린겐에 접근하자 라발은 스페인으로 피신했다.[71]그러나 90일 후, 샤를 드골은 스페인에 라발을 추방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결국 그는 미국 점령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이송되었다.[71] 리히텐슈타인에 피난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70] 미국 당국은 즉시 라발과 그의 아내를 체포하여 자유 프랑스군에게 넘겼고, 이들은 프레센 감옥에 수감되었다.[71] 라발 부인은 나중에 석방되었지만, 피에르 라발은 반역죄로 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에 남았다.[71] 체포되기 전, 라발은 신트라, 포르투갈로 이주할 계획이었다.[72][73]
1945년 7월, 라발은 대역죄 (국가 반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97] 페탕파 증인들은 모두 "나쁜 것은 피에르 라발이다"라며 협력의 죄를 라발에게 떠넘겼다.
6. 재판과 처형 (1945년)
1945년 7월, 피에르 라발은 대역죄(국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97] 필리프 페탱 재판과는 달리 라발의 재판은 사법 시스템의 부적절성과 숙청 재판 시대의 유독한 정치적 분위기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4][75] 페탱파 증인들은 "나쁜 것은 피에르 라발이다"라며 협력의 죄를 라발에게 떠넘기는 발언을 했다.
라발은 자신이 항상 프랑스 국민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 왔다고 믿었다.[77] 그는 변론 준비, 증인 소환, 정보 및 문서 획득을 통해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77] 그러나 1945년 10월 4일에 시작된 재판에서[78]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와 적과의 협력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세 명의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법정은 변호사 없이 진행되었다. 법원장과 검사는 배심원들의 적대적인 행동을 통제하지 못했고, 라발과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라발은 침묵을 지키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가 부재한 상태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83][84]
1945년 10월 15일, 라발은 프렌 감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될 예정이었다.[85] 그는 처형 직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반복적인 위세척으로 소생했다.[85]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고 총살당했다.[86]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티에의 무명 묘지에 매장되었다가,[87][88] 1945년 11월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샹브렝 가족 묘소에 안장되었다.[87][88]
7. 평가와 유산
피에르 라발은 적극적인 대독 협력 정책으로 인해 프랑스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던 현실주의적인 정치인이었지만, 그의 선택은 도덕적, 윤리적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정책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93]
샤를 드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라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본래부터 아래에서부터 문제를 접근하는 데 익숙했던 라발은 무슨 일이 있어도 권력을 잡는 것이 중요하며, 어느 정도의 기민함이 항상 상황을 통제하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없고, 다룰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재앙 속에서 국가의 불행을 느꼈지만, 동시에 고삐를 잡고 자신이 무엇이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광범위하게 적용할 기회를 느꼈다. 그러나 승리한 독일 제국은 타협할 의도가 없는 파트너였다. [...] 그는 프랑스의 재앙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이용하고, 노예 상태의 지점까지 활용하고, 침략자와 연대하고, 가장 끔찍한 억압의 자산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국가의 명예, 국가의 독립, 그리고 국가적 자긍심을 포기했다. [...] 라발은 도박을 했다. 그는 졌다. 그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정부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모든 계략의 자원, 모든 끈기의 자원을 동원하면서, 그는 자신의 국가에 봉사하려고 했다."[95]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였던 오토 아베츠는 회고록에서 라발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 한 명이었으며, 어쨌든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94]
라발은 적극적으로 독일 협력을 추진한 인물로서, 극도로 비난받고 있다. 필리프 페탱 지지자들조차 대독 협력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경향이 있다.
또한 어떤 의견이든 다 받아들이는 인물이라 하여 "이건 인간이 아니다. (조미료를 넣는) 작은 병이다"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7.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피에르 라발의 정치 역정은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과 번영을 모색해야 했던 한국의 근현대사와 유사한 점이 많아, 그의 외교 전략은 성공과 실패 사례를 모두 보여준다. 특히, 그의 친독 협력은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결정으로 비판받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한국의 진보 진영 관점과 상반된다. 반면,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실리적인 외교 정책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라발은 적극적으로 독일과의 협력을 추진하여 극도로 비난받는 인물이며, 심지어 페탱 지지자들조차 대독 협력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의견이든 다 받아들이는 그의 성향은 "인간이 아니다. (조미료를 넣는) 작은 병이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8. 라발을 다룬 작품
- 성에서 성으로/D'un château l'autre프랑스어 -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소설로, 라발을 일종의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셀린은 비시 정부의 지지자였으며, 라발과 함께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등 극히 친밀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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