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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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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컬로처는 헝가리 국가만큼이나 유서 깊은 도시로, 헝가리 건국 초 이슈트반 1세 시대에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되었다. 오스만 제국, 칼뱅주의 하이두크, 합스부르크 등의 지배와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쇠퇴하는 시기를 겪었지만, 18세기 임레 차키 추기경의 노력으로 토지를 회복하고 재건되었다. 주요 건축물로는 대주교 성당, 대주교 궁전 등이 있으며, 파프리카 생산지로 유명하다. 또한, 컬로처 자수가 유명하며, 스포츠 클럽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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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로처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대주교 궁전
대주교 궁전
칼로처 문장
문장
칼로처 깃발
깃발
위치헝가리 버치키슈쿤 주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Kalocsa
행정 구역
국가헝가리
버치키슈쿤 주
칼로처 구
지리
면적53.18 제곱킬로미터
인구
2015년16136명
인구 밀도326.42 명/제곱킬로미터
행정 및 기타 정보
우편 번호6300
지역 번호(+36) 78
시간대CET
여름 시간대CEST
UTC 오프셋+1
여름 시간 UTC 오프셋+2
웹사이트칼로처 공식 웹사이트

2. 역사

칼로처는 헝가리 국가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헝가리 건국 초기인 이슈트반 1세 시대에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되었으며, 초대 대주교는 아스트리크였다. 11세기 초에는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나 팔 토모리와 같이 군대 지휘관으로 활약한 대주교들도 있었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도시는 파괴되었고, 1602년에는 헝가리 칼뱅주의 하이두크에 의해 불태워졌다. 1686년 터키군이 철수하면서 칼로처 성을 불태웠고, 이후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봉기로 인해 평화가 지연되었다.

18세기 임레 차키 추기경은 칼로처와 주변 지역의 토지를 회복하고 대규모 영토를 조직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산업 발전에서 소외되었고, 1882년에 철도가 건설되었으나 너무 늦었다. 1886년에는 도시 지위를 잃었지만, 1921년에 다시 부여받았다. 19세기 요제프 군스트와 러요시 하이날드 대주교는 학교를 설립하여 칼로처의 중요성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은 1944년 여름에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이들 대부분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전쟁 후 일부 생존자들이 돌아왔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번성하지 못했다.

성 마리아 대성당


대주교 궁전


컬로처 대성당(en)/hu)


2. 1. 초기 역사

칼로처는 헝가리 국가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헝가리 건국 초기인 이슈트반 1세 시대에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되었으며, 초대 대주교는 아스트리크였다. 11세기 초에는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나 팔 토모리와 같이 군대 지휘관으로 활약한 대주교들도 있었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도시는 파괴되었고, 1602년에는 헝가리 칼뱅주의 하이두크에 의해 불태워졌다. 1686년 터키군이 철수하면서 칼로처 성을 불태웠고, 이후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봉기로 인해 평화가 지연되었다.

18세기 임레 차키 추기경은 칼로처와 주변 지역의 토지를 회복하고 대규모 영토를 조직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산업 발전에서 소외되었고, 1882년에 철도가 건설되었으나 너무 늦었다. 1886년에는 도시 지위를 잃었지만, 1921년에 다시 부여받았다. 19세기 요제프 군스트와 러요시 하이날드 대주교는 학교를 설립하여 칼로처의 중요성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은 1944년 여름에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이들 대부분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전쟁 후 일부 생존자들이 돌아왔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번성하지 못했다.

2. 2. 중세 시대



컬로처는 헝가리 건국 초기 이슈트반 1세에 의해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초대 대주교는 아스트리크였으며,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슈트반 1세에게 왕관을 가져왔다. 11세기 초,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1135년에는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 100여 년 후에는 주교 베네딕투스에 의해 석조 주교성이 축조되었다.

헝가리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 (1219년-1241년 재임)와 같이 일부 대주교들이 군대에서 세속적인 경력을 쌓은 후 징집되어 장군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우그린 차크는 1241년 모히 전투에서 타타르족에 대항하는 지도자였으며, 팔 토모리 (1523년-1526년 재임)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헝가리 군대의 지도자로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2. 3. 오스만 제국 시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를 이끌던 팔 토모리 대주교가 전사했다. 1529년 8월 15일, 터키군이 칼로처에 진입했다. 도시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경작이 중단되었고, 대주교의 지위는 중요성을 잃었다. 1602년, 헝가리 칼뱅주의 하이두크가 칼로처를 불태웠다. 1686년 10월 13일, 148년간의 통치 이후 터키군은 칼로처 성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2. 4. 합스부르크 시대

칼로처는 헝가리 국가 초기 이슈트반 1세 국왕에 의해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되었다. 초대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이슈트반에게 왕관을 가져온 아스트리크였다. 11세기 초,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헝가리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 (1219년부터 1241년까지 대주교)와 같이 군대에서 세속적인 경력을 쌓은 후 장군으로 복무한 대주교도 있었다. 팔 토모리 (1523년부터 1526년까지 대주교)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헝가리 군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1529년 8월 15일 터키군이 칼로처에 진입하면서 도시가 쇠퇴하고 대주교 지위는 중요성을 잃었다. 1602년에는 헝가리 칼뱅주의 하이두크가 칼로처를 불태웠다. 1686년 10월 13일, 터키군은 칼로처 성을 불태우고 군대를 철수했다. 이후 임레 차키 추기경 (1710–1732)은 칼로처와 그 주변 지역의 토지를 회복하고, 새로운 거주민을 유치하여 인구를 늘리려 노력했다.

18세기 칼로처는 다시 헝가리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점령 이전의 위상은 회복하지 못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 발전은 칼로처에 늦게 도달했다. 철도는 1882년에 건설되었고, 1886년에는 도시 지위를 잃었다가 1921년에 다시 부여받았다. 19세기의 두 대주교 요제프 군스트 (1851–1866)와 러요시 하이날드 (1867–1891)는 학교를 설립하여 칼로처의 중요성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은 1944년 여름에 모든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대부분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일부 생존자들이 돌아왔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번성하지 못했고, 대부분은 영원히 떠났다. 2009년 6월 시의회는 칼로처 유대인과 그들의 강제 이주를 기념하기 위해 이틀간의 행사를 조직했다.

1135년에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 1529년 오스만 제국 군의 침략으로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2. 5. 근대

컬로처는 헝가리 건국 초기인 이슈트반 1세에 의해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초대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이슈트반에게 왕관을 가져온 아스트리크였다. 11세기 초에는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나 팔 토모리와 같이 군대에서 활약한 대주교들도 있었다. 특히 팔 토모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 군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1529년 8월 15일, 터키군이 칼로처에 진입하면서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 1602년에는 헝가리 칼뱅주의 하이두크에 의해 불태워졌다. 1686년 10월 13일, 터키군이 칼로처 성을 불태우고 철수하면서 148년간의 터키 지배가 끝났지만,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이끄는 봉기로 인해 평화가 지연되었다.

임레 차키 추기경(1710–1732)은 칼로처와 그 주변 지역의 토지를 회복하고, 대규모 영토를 조직하여 인구를 늘리고 새로운 거주민을 유치하려 했다. 18세기에는 농노들이 토지를 소유했고, 장인과 장인들이 그 다음 계급을 이루었다. 1737년에는 첫 번째 법인 인가서가 언급되었고, 1769년에는 90명의 장인들이 도시에 살았다. 성직자와 학교 덕분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칼로처는 다시 헝가리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략 이전의 위상은 회복하지 못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산업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1882년에 철도가 건설되었고, 1886년에는 도시 지위를 잃었다가 1921년에 다시 회복했다. 요제프 군스트와 러요시 하이날드 대주교는 학교를 설립하여 칼로처의 중요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초, 농민들은 대주교를 위해 일하거나 토목 노동자로 일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에는 반혁명 세력 20명이 도시의 주요 거리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대인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어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일부가 돌아왔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다시 번성하지 못했다. 2009년 6월, 시의회는 칼로처 유대인과 그들의 강제 이주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1950년대 공산주의 정권은 대주교직을 이유로 도시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했지만, 1960년대 말부터 산업 발전이 시작되면서 주민들의 삶에 변화가 나타났다.

2. 6. 현대

칼로처는 헝가리 국가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아르파드 왕조 시대에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이슈트반 1세에 의해 에스테르곰과 함께 대교구로 지정되었다. 초대 대주교는 아스트리크였으며,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슈트반 1세에게 왕관을 가져왔다. 11세기 초에는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시대에는 우그린 차크와 토모리 팔과 같이 군사적 역할을 수행한 대주교들도 있었다. 우그린 차크는 1241년 모히 전투에서 타타르족에 맞서 싸웠고, 토모리 팔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 군대를 이끌다 전사했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도시는 파괴되었고, 1602년에는 칼뱅주의 하이두크에 의해 불타는 등 시련을 겪었다. 1686년 오스만 제국이 물러갔지만,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로 인해 평화가 지연되었다.

18세기 임레 차키 추기경은 칼로처와 그 주변 지역의 토지를 회복하고 대규모 영토를 조직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산업 발전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철도는 1882년에야 건설되었다. 1886년에는 도시 지위를 잃었다가 1921년에 다시 부여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대인들이 나치 강제 수용소로 강제 이주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2009년에는 이러한 역사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1950년대 공산주의 정권은 대주교직 때문에 도시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했지만, 1960년대 말부터 산업 발전이 시작되어 주민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3. 주요 건축물

성 토리니티 광장(Szentháromság tér)은 주요 명소 중 하나이며, 성당 옆에 서 있는 삼위일체 기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기둥은 1786년 리포트 살름이 제작했다. 받침대에는 성 요한 네포무크,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 플로리안을 볼 수 있다. 성당 맞은편에는 성 이슈트반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왕의 서거 950주년을 기념하여 마을에서 세웠다. 카로이 키르치마이어와 죄르지 바다스가 제작했다. 이 동상 뒤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영웅들을 위한 전쟁 기념비가 있으며, 이는 페렌츠 시들로의 작품 중 하나인 청동상이다. 광장의 네 번째 동상은 헝가리의 위대한 작곡가인 리스트 페렌츠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는 여러 번 이 도시를 방문했고, 라요스 하이날드 대주교도 방문했다.

도시의 또 다른 명소는 성 토리니티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대주교 성당의 높은 건물이다. 현재의 교회는 이곳에 세워진 네 번째 교회이다. 첫 번째 교회는 11세기 초, 이슈트반 왕 치세에 아스트릭에 의해 지어졌다. 그는 칼로차에서 스스로 대주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로마에서 성스러운 왕관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이것은 헝가리 왕국과 헝가리 민족이 탄생한 왕관이었다. 두 번째 교회는 1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교회의 석조 조각품 두 점이 알려져 있다. 하나는 석공 마르티누스 라베구의 기억을 기리는 묘석이고, 다른 하나는 빨간 대리석 왕의 머리 조각으로, 조각의 일부분에도 불구하고 아르파드 시대(897–1301)의 가장 주목할 만한 조각 작품이다. 두 번째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헝가리의 러요시 1세 치세에 재건되었으며, 1602년 프로테스탄트 헝가리 하이두크에 의해 불탔다. 이것이 세 번째 교회였다. 17세기 중반, 터키 여행가인 에블리아 체레비는 잔해를 보았는데, 내부 벽은 "아름다운 색채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현재의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 성당의 기초는 임레 차키 대주교가 설계했다. 초석은 1735년 가보르 파타치치 대주교가 놓았다. 기념물 자체는 안드라스 마이어호퍼가 설계했다. 성당의 두 개의 높은 탑은 17세기 말 번개로 인해 불탔다. 19세기의 변화로 인해 죄르지 바로시 대주교(1905–1910)가 교회를 복원하게 되었다. 이는 두 명의 유명한 헝가리 건축가인 에르뇌 페르크와 죄르지 페트로바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하 묘지도 건설했다.

두 개의 탑은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그 사이에는 연결된 다리가 있으며, 다리 위에는 세 개의 동상이 있다. 성 베드로와 바울(1755)과 중앙의 성모 마리아(야노스 하트만, 1881)가 있다. 그 아래에는 두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팀파눔이 있다. 팀파눔에는 요제프 안드레카의 부조가 있다. 그 제목은 "헝가리의 수호자"이다. 성당 남쪽에는 1938년 제노 보리가 제작한 아스트릭의 부조가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방문객은 황금색, 분홍색, 흰색의 색상에 매료된다. 천장은 스투코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헝가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 중 하나이다. 오르간에서 시작하여 방문객은 성 제로모(사막에서 살면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성 아고스틴(주교였으며 불타는 심장을 손에 들고 있다), 성 암브로시우스, 성 죄르지(교황이었으며 고대 말에 교회를 통치했다)를 볼 수 있다. 또한 승리의 마차에 대한 프레스코가 있는데, 이는 교회의 상징이며 네 명의 복음사가의 문장이 이끌고 있다. 주요 제단은 1857년 비엔나 출신의 리포트 쿠펠바이저가 그렸다. 여기에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 묘사되어 있다. 개선문의 기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성 이슈트반과 성 라슬로이다. 이슈트반 아래의 부조에는 "아스트릭이 이슈트반에게 왕관을 가져다준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라슬로 아래의 다른 부조에는 "바치 카운티의 챕터 재단"이 묘사되어 있다. 받침대의 부조는 1864년 미클로스 이소에 의해 조각되었다. 설교단은 1752년 바로크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꼭대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 주위에는 4명의 복음사가를 볼 수 있으며, 그 옆에는 그들의 상징(천사, 사자, 뿔, 독수리)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임레 제레르가 제작했으며 헝가리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슈트반은 대관식을, 라슬로는 바위에서 물을 끌어오고, 성 마가렛,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성 엘리자베스, 성 임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성 겔레르트, 터키 군대에 맞서 헝가리 군대를 이끄는 성 요한 카피스트란, 이슈트반에게 세례를 베푼 성 아달베르트도 볼 수 있다. 성당의 장식 중 하나는 1876년에서 1877년 사이에 페치 출신의 앙스터 회사에서 제작한 오르간이다. 리스트 페렌츠도 이 오르간을 연주했다. 이 오르간에는 4668개의 파이프, 64개의 변주곡, 1개의 페달이 있다. 측면 제단도 있다. 순교자 성 피우스의 시신이 있는 고통스러운 성모의 제단. 시신은 1741년 7월 11일 가보르 파타치치의 명령에 따라 로마 지하 묘지에서 칼로차로 옮겨졌다. 제단 옆에는 수호 천사가 있으며, 어린 아이가 뱀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 성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 베드로와 바울의 제단도 있다. 마지막 두 제단에는 체코 왕 앞에서 고해성사를 지킨 성 요한 네포무크와 아들에게 교육을 베푸는 이슈트반 1세가 묘사되어 있다.

성당 뒤편에는 대주교 보물관이 있다. 중세 시대의 풍요로웠던 대주교 보물관은 교회와 함께 파괴되었다. 헝가리 예술의 유물에 관한 사실이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재앙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귀중품을 가차 없이 파괴했다. 터키인들이 헝가리에서 축출된 후 바로크 양식의 예술이 이 나라를 부활시켰으며, 이는 칼로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은 18세기와 19세기의 산물이며, 헝가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이전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메신저로서 극소수의 예술 작품만이 이전 시대의 것이다.

3. 1. 칼로차 대성당

칼로차 대성당은 성 토리니티 광장(Szentháromság tér)에 위치하고 있으며, 1786년에 제작된 삼위일체 기둥이 광장 옆에 서 있다. 받침대에는 성 요한 네포무크,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 플로리안 조각상이 있다. 성당 맞은편에는 성 이슈트반의 동상이 있는데, 왕의 서거 9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카로이 키르치마이어와 죄르지 바다스가 제작했다. 동상 뒤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영웅들을 위한 전쟁 기념비(페렌츠 시들로의 청동상)가 있다. 광장의 네 번째 동상은 리스트 페렌츠를 묘사하고 있다.

현재의 대성당 건물은 이 자리에 세워진 네 번째 건물이다. 최초의 성당은 11세기 초 아스트릭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는 칼로차에서 스스로 대주교라 칭한 최초의 인물이다. 두 번째 교회는 13세기 초에 세워졌으나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세 번째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헝가리의 러요시 1세 치세에 재건되었으나 1602년 프로테스탄트 헝가리 하이두크에 의해 소실되었다. 17세기 중반, 터키 여행가 에블리아 체레비는 "아름다운 색채 그림"으로 장식된 내부 벽의 잔해를 보았다.

현재의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 성당은 임레 차키 대주교가 설계하였고, 1735년 가보르 파타치치 대주교가 초석을 놓았으며, 안드라스 마이어호퍼가 설계를 맡았다. 17세기 말 번개로 인해 성당의 두 개의 높은 탑이 불탔으며, 19세기에 죄르지 바로시 대주교(1905–1910)가 에르뇌 페르크와 죄르지 페트로바츠에게 복원을 맡겼고, 지하 묘지도 건설했다.

두 개의 탑 사이에는 연결된 다리가 있으며, 다리 위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1755)과 성모 마리아(야노스 하트만, 1881) 동상이 있다. 그 아래에는 두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받치고 있는 팀파눔이 있고, 팀파눔에는 요제프 안드레카의 "헝가리의 수호자" 부조가 있다. 성당 남쪽에는 1938년 제노 보리가 제작한 아스트릭의 부조가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은 헝가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 중 하나인 스투코로 장식되어 있다. 성 제로모, 성 아고스틴, 성 암브로시우스, 성 죄르지, 네 명의 복음사가의 문장이 이끄는 승리의 마차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다. 주요 제단은 1857년 비엔나 출신의 리포트 쿠펠바이저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묘사하고 있다. 개선문의 기둥에는 성 이슈트반과 성 라슬로 동상이 있으며, 받침대의 부조는 1864년 미클로스 이소에 의해 조각되었다. 설교단은 1752년 바로크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꼭대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 주위에는 4명의 복음사가와 그들의 상징(천사, 사자, 뿔, 독수리)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임레 제레르가 제작했으며 헝가리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1876년에서 1877년 사이에 페치 출신의 앙스터 회사에서 제작한 오르간은 4668개의 파이프, 64개의 변주곡, 1개의 페달을 가지고 있으며, 리스트 페렌츠도 이 오르간을 연주했다. 측면 제단에는 순교자 성 피우스의 시신이 있는 고통스러운 성모의 제단, 수호 천사, 성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 베드로와 바울의 제단 등이 있다.

성당 뒤편에는 대주교 보물관이 있다. 중세 시대의 풍요로웠던 대주교 보물관은 교회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현재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은 18세기와 19세기의 산물이다.

3. 2. 대주교 궁전

대주교 궁전은 14세기에 지어진 성이 있던 자리에 1760년대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컬로처 대성당 북쪽에 위치해 있다.

궁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의례실과 대주교 도서관이다. 의례실에는 중세 시대의 천문학적 장치와 지도가 있으며, 헝가리의 성스러운 왕관의 첫 번째 인증된 복제품이 있다. 의례실과 예배당 천장의 회화는 1783-84년 프란츠 안톤 마울베르츠의 작품이다.

칼로차의 대주교 도서관


대주교 도서관은 아담 파타치치 대주교의 유산을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150,0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파르티투스, 필사본, 인큐나불라, 성경 등이 포함된다. 책들은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쓰여졌으며, 신학적 주제와 세속적 주제를 모두 다룬다. 마르틴 루터가 쓴 성경과 메달 및 동전 컬렉션도 소장하고 있다. 희귀한 책으로는 1540년의 가장 오래된 헝가리 성경 번역본인 Vizsolyi 성경(가슈파르 카로이 번역)이 있다. 19세기에 리포트 콜로니치 대주교는 장서 수를 늘리고 모든 사제의 책을 대주교 도서관이 상속하도록 명령했다.

궁전 뒤에는 대주교 정원이 있다. 다양한 식물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라이오스 하이날드가 도시에 선물한 것이다. 1962년부터 야외 극장이 설치되어 있다.

3. 3. 기타 건축물

성 토리니티 광장(Szentháromság tér)은 삼위일체 기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786년 리포트 살름이 제작했다. 받침대에는 성 요한 네포무크,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 플로리안을 볼 수 있다. 광장에는 성 이슈트반의 동상(카로이 키르치마이어와 죄르지 바다스 제작), 제1차 세계 대전 전쟁 기념비(페렌츠 시들로), 리스트 페렌츠의 동상이 있다.

대주교 성당은 현재 자리에 세워진 네 번째 교회이다. 11세기 초 아스트릭이 최초의 교회를 지었고, 그는 칼로차에서 스스로 대주교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두 번째 교회는 13세기 초에 세워졌으나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교회의 석조 조각품 두 점 중 하나는 석공 마르티누스 라베구의 묘석이고, 다른 하나는 빨간 대리석 왕의 머리 조각이다. 두 번째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1602년 프로테스탄트 헝가리 하이두크에 의해 불탔다. 17세기 중반 터키 여행가인 에블리아 체레비는 잔해를 보았는데, 내부 벽은 "아름다운 색채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 성당은 임레 차키 대주교가 설계하고, 1735년 가보르 파타치치 대주교가 초석을 놓았으며, 안드라스 마이어호퍼가 기념물 자체를 설계했다. 19세기 죄르지 바로시 대주교는 에르뇌 페르크와 죄르지 페트로바츠에게 교회 복원을 맡겼다.

두 개의 탑 사이에는 연결된 다리가 있으며, 다리 위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1755)과 성모 마리아(야노스 하트만, 1881) 동상이 있다. 그 아래 팀파눔에는 요제프 안드레카의 "헝가리의 수호자" 부조가 있다. 성당 남쪽에는 1938년 제노 보리가 제작한 아스트릭의 부조가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은 스투코로 장식되어 있다. 주요 제단은 1857년 비엔나 출신의 리포트 쿠펠바이저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묘사하고 있다. 개선문의 기둥에는 성 이슈트반과 성 라슬로의 동상이 있다. 설교단은 1752년 바로크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꼭대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 주위에는 4명의 복음사가와 그들의 상징(천사, 사자, 뿔, 독수리)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임레 제레르가 제작했으며 헝가리 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1876년에서 1877년 사이에 페치 출신의 앙스터 회사에서 제작한 오르간은 4668개의 파이프, 64개의 변주곡, 1개의 페달이 있다. 측면 제단에는 순교자 성 피우스의 시신이 있는 고통스러운 성모의 제단, 수호 천사, 성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 베드로와 바울의 제단 등이 있다.

성당 뒤편에는 대주교 보물관이 있다. 전시된 유물의 대부분은 18세기와 19세기의 산물이며, 헝가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은 극소수이다.

4. 문화

칼로차는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 지역으로, 국내 유수의 파프리카 생산지이다. 그 외 와인, 과일, 아마, 옥수수가 재배된다. 도나우강 크루즈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 체류자가 늘면서 관광업이 성장하고 있다.

컬로처 주변에서 성행하는 컬로처 자수(hu)가 유명하다.

4. 1. 칼로차 자수

칼로차는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 지역으로, 국내 유수의 파프리카 생산지이다. 그 외 와인, 과일, 아마, 옥수수가 재배된다. 도나우강 크루즈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 체류자가 늘면서 관광업이 성장하고 있다.

컬로처 주변에서 성행하는 컬로처 자수(hu)가 유명하다.

4. 2. 파프리카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의 지역으로, 국내 유수의 파프리카 생산지이다. 그 외 와인, 과일, 아마, 옥수수가 재배된다. 컬로처 자수가 유명하다.

5. 스포츠


  • 컬로처 FC는 컬로처의 축구 클럽이다.
  • TFSE 칼로차는 컬로처를 연고로 하는 배구팀이다.

6. 자매 도시

컬로처는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2]

참조

[1] 서적 Kalocsa
[2] 웹사이트 Kalocsa testvérvárosai https://www.kalocsa.[...] Kalocsa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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