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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키라 해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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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르키라 해협 사건은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에서 영국 구축함이 기뢰에 의해 손상되고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영국은 알바니아의 책임을 물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고, 국제 사법 재판소는 알바니아의 책임을 인정하여 배상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무해 통항권, 연안국의 의무, 자위권 행사의 한계에 대한 국제법적 선례를 남겼으며, 냉전 초기 동서 진영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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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키라 해협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코르푸 해협 사건
코르푸 해협. 동쪽은 알바니아, 서쪽의 코르푸 섬(케르키라 섬)은 그리스 영토이며, 해협이 국경이다.
위치코르푸 해협
기본 정보
사건명코르푸 해협 사건
일부냉전
날짜1946년 - 1948년
장소코르푸 해협
교전 세력
교전국 1알바니아 인민 공화국
지휘관
알바니아엔베르 호자
메흐메트 셰후
영국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부대
알바니아알바니아 해군
영국영국 해군
피해 규모
알바니아없음
영국사망 84명
부상 42명
구축함 2척 손상 (1척은 수리 불가)
결과
결과세계 법원 소송 1949년 결론
알바니아가 영국에 843,947 파운드 (2019년 기준 2440만 파운드) 배상 명령, 미지급
1992년 알바니아가 영국에 200만 미국 달러 배상금 지급 합의

2. 사건의 전개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영어호와 Volage영어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알바니아 정부에 소해작업을 하겠다는 각서를 통보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영국은 소해 작업을 강행, 독일제 GY형 기뢰 22기를 제거했다. 영국은 이 사건이 알바니아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62]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일방적 제소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미숙한 대응으로 항변을 포기하는 듯한 대응을 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63]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2차세계대전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던 알바니아는 국가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사전허가 하에서는 해협통행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무해통항권을 갖는다고 주장, 국제관습법적으로 국제해협의 경우, 완전히 자유로운 통항은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통항권을 갖는다고 인정하여 왔다. 국제재판소에서는 알바니아의 기뢰를 제거한 것은 주권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단하면서 알바니아 통항권을 갖는 영국에게 위험한 물질이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이라고 판단 하였다.[65]

=== 1차 사건 (1946년 5월 15일) ===

1946년 5월 15일, 영국 해군 경순양함 오라이온과 슈퍼브/HMS Superb (25)영어를 포함한 7척의 함정이 코르푸 해협을 사전 점검 후 통과하던 중 알바니아 해안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2][3] 포탄은 빗나갔고 영국 군함은 반격하지 않았으며, 함선에 물질적 피해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2] 하지만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의 즉각적이고 공개적인 사과"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2] 그러나 알바니아는 영국 함선이 알바니아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거부했다.[2][8] 알바니아는 케르키라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사전 통보를 해야 한다는 경고를 보냈고, 영국 정부는 사전 통보를 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 군함에 다시 포격이 가해지면 반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9]

HMS ''오리온''은 첫 번째 사건에서 포격을 받은 선박 중 하나였다.


=== 2차 사건 (1946년 10월 22일) ===

1946년 10월 22일, 영국 해군 함대는 무해 통항권을 시험하기 위해 케르키라 해협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11] 이 함대는 경순양함 모리셔스와 리앤더, 구축함 소마레스와 볼라지로 구성되었다.[10] 공격을 받을 경우 대응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10]

함대는 모리셔스를 선두로, 소마레스가 그 뒤를 따랐으며, 리앤더는 볼라지와 함께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항해했다.[10] 오후 3시경, 사란다 만 근처에서 소마레스가 기뢰에 접촉하여 큰 손상을 입었다.[10][2][12] 볼라지는 소마레스를 코르푸섬 항구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2]

기뢰에 접촉한 볼라지를 예인하는 소마레스(1946년 10월)


기뢰에 접촉한 볼라지(1946년 10월)


오후 4시 16분경, 예인 도중 볼라지 역시 기뢰에 접촉하여 큰 손상을 입었다.[10][2] 두 함선 모두 함수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악천후 속에서 선미로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3][13] 예인은 어려웠지만, 12시간 후 코르푸 항구에 도착했다.[10] 이 사건으로 44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했다.[10][2]

사망자 대부분은 소마레스 승무원으로 추정된다.[3][12][14] 소마레스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지만, 볼라지는 수리가 가능했다.[2][15] 알바니아 해안 포대는 포격을 하지 않았고, 알바니아 해군 함정이 알바니아 국기와 백기를 게양하고 현장에 접근했다.[2] 당시 알바니아는 기뢰를 부설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10월 20일경 알바니아의 요청으로 유고슬라비아 수뢰정 믈리에트와 멜진이 기뢰를 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16][17]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62]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연금부 장관은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에게 완전한 군인 연금을 지급했다.[18]

|thumb|경순양함 HMS ''리앤더''는 두 번째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 3차 사건 (1946년 11월 12-13일) ===

1946년 11월 12일에서 13일, 영국 해군은 알바니아 영해에서 '리테일 작전(Operation Retail)'이라는 암호명으로 기뢰 제거 작전을 수행했다.[2][19] 이 작전은 ''연합 지중해 사령관''의 지시 하에 이루어졌으며, 알바니아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10][19] 영국은 항해의 위험을 제거하고, 앞선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정당방위 차원에서 행동한다고 주장했다.[10][19]

경순양함 HMS ''모리셔스''는 두 번째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프랑스 해군 장교가 지중해 지역 위원회의 초청으로 옵서버로 참여했다.[10] HMS ''오션''을 포함한 항공모함, 순양함, 그리고 다른 전함들이 엄호를 제공했다.[10] 작전 결과, 22개의 접촉 기뢰가 발견되어 해저 계류 장치에서 제거되었다.[10] 기뢰 배치는 무작위적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10] 제거된 기뢰 중 2개는 추가 조사를 위해 몰타로 보내졌다.[10]

코르푸 해협에서의 소해 작업 모습(1946년 12월 12일)


조사 결과, 기뢰는 나치 독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나, 녹이나 해양 생물의 부착이 없었고, 페인트칠도 새로 되어 있었으며, 계류 케이블은 최근에 윤활 처리된 상태였다.[10] 이는 기뢰밭이 ''사우마레즈''와 ''볼라지'' 관련 사건 직전에 설치되었음을 시사했다.[10] ''볼라지''에서 발견된 기뢰 파편 분석 결과는 몰타로 보내진 기뢰와 일치했다.[10]

세 번째 사건 이후, 엔베르 호자 총리 하의 알바니아는 영국 해군이 알바니아 해안 영해를 침범했다는 내용의 전신을 유엔에 보냈다.[2][20]

2. 1. 1차 사건 (1946년 5월 15일)

1946년 5월 15일, 영국 해군 경순양함 오라이온과 슈퍼브/HMS Superb (25)영어를 포함한 7척의 함정이 코르푸 해협을 사전 점검 후 통과하던 중 알바니아 해안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았다.[2][3] 포탄은 빗나갔고 영국 군함은 반격하지 않았으며, 함선에 물질적 피해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2] 하지만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의 즉각적이고 공개적인 사과"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2] 그러나 알바니아는 영국 함선이 알바니아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사과를 거부했다.[2][8] 알바니아는 케르키라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사전 통보를 해야 한다는 경고를 보냈고, 영국 정부는 사전 통보를 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 군함에 다시 포격이 가해지면 반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9]

2. 2. 2차 사건 (1946년 10월 22일)

1946년 10월 22일, 영국 해군 함대는 무해 통항권을 시험하기 위해 케르키라 해협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0][37][41] 이 함대는 경순양함 모리셔스와 리앤더, 구축함 소마레스와 볼라지로 구성되었다.[40] 공격을 받을 경우 대응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40]

함대는 모리셔스를 선두로, 소마레스가 그 뒤를 따랐으며, 리앤더는 볼라지와 함께 약 1.3해리 떨어진 곳에서 항해했다.[40] 오후 3시경, 사란다 만 근처에서 소마레스가 기뢰에 접촉하여 큰 손상을 입었다.[40][31][42] 볼라지는 소마레스를 코르푸섬 항구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0][31]

오후 4시 16분경, 예인 도중 볼라지 역시 기뢰에 접촉하여 큰 손상을 입었다.[40][31] 두 함선 모두 함수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악천후 속에서 선미로 항해해야 했기 때문에[32][43] 예인은 어려웠지만, 12시간 후 코르푸 항구에 도착했다.[40] 이 사건으로 44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했다.[40][31]

사망자 대부분은 소마레스 승무원으로 추정된다.[32][42][44] 소마레스는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지만, 볼라지는 수리가 가능했다.[31][37][45] 알바니아 해안 포대는 포격을 하지 않았고, 알바니아 해군 함정이 알바니아 국기와 백기를 게양하고 현장에 접근했다.[31] 당시 알바니아는 기뢰를 부설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10월 20일경 알바니아의 요청으로 유고슬라비아 수뢰정 믈리에트와 멜진이 기뢰를 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46][47]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62]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연금부 장관은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에게 완전한 군인 연금을 지급했다.[48]

2. 3. 3차 사건 (1946년 11월 12-13일)

1946년 11월 12일에서 13일, 영국 해군은 알바니아 영해에서 '리테일 작전(Operation Retail)'이라는 암호명으로 기뢰 제거 작전을 수행했다.[2][19][31][37][49] 이 작전은 지중해 함대 사령관의 지시 하에 이루어졌으며, 알바니아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10][19][40][49] 영국은 항해의 위험을 제거하고, 앞선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자위권 차원에서 행동한다고 주장했다.[10][19][40][49]

프랑스 해군 장교가 지중해 지역 위원회의 초청으로 옵서버로 참여했다.[10][40] HMS ''오션''을 포함한 항공모함, 순양함, 그리고 다른 전함들이 엄호를 제공했다.[10][40] 작전 결과, 22개의 접촉 기뢰가 발견되어 해저 계류 장치에서 제거되었다.[10][40] 기뢰 배치는 무작위적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10][40] 제거된 기뢰 중 2개는 추가 조사를 위해 몰타로 보내졌다.[10][40]

조사 결과, 기뢰는 나치 독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나, 녹이나 해양 생물의 부착이 없었고, 페인트칠도 새로 되어 있었으며, 계류 케이블은 최근에 윤활 처리된 상태였다.[10][40] 이는 기뢰밭이 ''사우마레즈''와 ''볼라지'' 관련 사건 직전에 설치되었음을 시사했다.[10] ''볼라지''에서 발견된 기뢰 파편 분석 결과는 몰타로 보내진 기뢰와 일치했다.[10][40]

세 번째 사건 이후, 엔베르 호자 총리 하의 알바니아는 영국 해군이 알바니아 해안 영해를 침범했다는 내용의 전신을 유엔에 보냈다.[2][20][31][50]

3.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

국제사법재판소(ICJ)는 1949년 12월, 1946년 케르키라 해협에서 발생한 영국 군함의 기뢰 피해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53] 영국은 알바니아를 ICJ에 제소하였고,[40][31][51] ICJ는 알바니아가 자국 영해에 부설된 기뢰의 위험성을 영국에 알리지 않은 책임을 물어 영국에 843,947 파운드(2,009,437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64][23][10][2] 이 판결은 알바니아가 기뢰 부설 여부와 관계없이, 기뢰밭이 자국 해안에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인지하고 영국에 경고했어야 했다는 점을 명시했다.[37]

ICJ는 또한 영국 해군이 알바니아 영해에서 수행한 '리테일 작전'(Operation Retail)에 대해 알바니아의 주권 침해라고 판결했다.[37][49] 영국은 자위권 행사를 주장했지만, ICJ는 독립 국가 간 영토 주권 존중이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반이며, 영국의 행위는 무력 정책의 발현이라고 비판했다.[30][60]

이 판결은 국제 해협에서 무해 통항권과 연안국의 권리, 그리고 자위권 행사의 한계에 대한 중요한 국제법적 선례를 남겼다.[65] 알바니아는 배상금 지급을 거부했고, 영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바니아 금괴 반환을 중단했다.[40][31][56][51] 양국은 냉전 종식 이후 관계를 회복하고, 1996년 알바니아가 지연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분쟁을 해결했다.[40][31][37]

4. 사건의 쟁점 및 법적 쟁점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62]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던 알바니아는 국가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사전허가 하에서만 해협 통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무해통항권을 주장하며, 국제관습법적으로 국제해협의 경우, 완전히 자유로운 통항은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통항권을 갖는다고 인정해왔다.[65]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알바니아 정부에 소해작업을 하겠다는 각서를 통보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영국은 소해 작업을 강행, 독일제 GY형 기뢰 22기를 제거했다. 영국은 이 사건이 알바니아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62]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일방적 제소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미숙한 대응으로 항변을 포기하는 듯한 대응을 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63]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국제재판소에서는 알바니아의 기뢰를 제거한 것은 주권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단하면서 알바니아 통항권을 갖는 영국에게 위험한 물질이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이라고 판단 하였다.[65]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서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은 영토 주권 침해가 정당한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선례를 확립했다. 영국은 자국 사건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1946년 11월 12일과 13일에 알바니아 영해에 진입한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국제 사법 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법원은 그러한 변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법원은 개입의 권리 주장을, 과거에 가장 심각한 남용을 초래했고, 국제 기구에 현재 결함이 있더라도 국제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는, 무력 정책의 발현으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다. 개입은 특히 여기서 취할 방식으로는 더욱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상, 그것은 가장 강력한 국가에만 적용될 것이고, 국제 정의의 실행 자체를 쉽게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 영국 측 대리인은 답변 연설에서 "Operation Retail"을 자위 또는 자조 수단으로 분류했다. 법원은 이 변론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독립 국가 간의 영토 주권 존중은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초이다. 법원은 폭발 이후 알바니아 정부가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지 못했고 외교 문서가 지연된 점이 영국 정부의 행동에 대한 정황상 참작할 만한 사유가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국제법, 즉 법원의 기구인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은 영국 해군의 행동이 알바니아 주권 침해를 구성한다고 선언해야 한다.[30]

4. 1. 무해 통항권 vs. 연안국 주권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62]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던 알바니아는 국가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사전허가 하에서만 해협 통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국은 무해통항권을 주장하며, 국제관습법적으로 국제해협의 경우, 완전히 자유로운 통항은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통항권을 갖는다고 인정해왔다.[65]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알바니아 정부에 소해작업을 하겠다는 각서를 통보했다. 알바니아 정부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영국은 소해 작업을 강행, 독일제 GY형 기뢰 22기를 제거했다. 영국은 이 사건이 알바니아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62]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다. 영국의 일방적 제소로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정부는 미숙한 대응으로 항변을 포기하는 듯한 대응을 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63]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국제재판소에서는 알바니아의 기뢰를 제거한 것은 주권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단하면서 알바니아 통항권을 갖는 영국에게 위험한 물질이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이라고 판단 하였다.[65]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서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은 영토 주권 침해가 정당한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선례를 확립했다. 영국은 자국 사건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1946년 11월 12일과 13일에 알바니아 영해에 진입한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국제 사법 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법원은 그러한 변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법원은 개입의 권리 주장을, 과거에 가장 심각한 남용을 초래했고, 국제 기구에 현재 결함이 있더라도 국제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는, 무력 정책의 발현으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다. 개입은 특히 여기서 취할 방식으로는 더욱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상, 그것은 가장 강력한 국가에만 적용될 것이고, 국제 정의의 실행 자체를 쉽게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 영국 측 대리인은 답변 연설에서 "Operation Retail"을 자위 또는 자조 수단으로 분류했다. 법원은 이 변론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독립 국가 간의 영토 주권 존중은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초이다. 법원은 폭발 이후 알바니아 정부가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지 못했고 외교 문서가 지연된 점이 영국 정부의 행동에 대한 정황상 참작할 만한 사유가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국제법, 즉 법원의 기구인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은 영국 해군의 행동이 알바니아 주권 침해를 구성한다고 선언해야 한다.[30]

4. 2. 기뢰 부설 책임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62]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다.[62]

이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와 관련하여, 알바니아가 직접 기뢰를 부설했는지, 아니면 제3국(유고슬라비아)이 부설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국제 사법 재판소(ICJ)는 알바니아가 기뢰 부설 사실을 인지하고도 영국 함선에 경고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다.[65] ICJ는 알바니아가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4. 3. 영국의 자위권 행사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과하던 영국 구축함이 기뢰에 부딪혀 파손되고, 44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62] 영국은 '리테일 작전'을 통해 자국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고 증거를 수집하려 했으나,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를 알바니아의 주권 침해로 규정했다.[30][60]

국제사법재판소는 "개입의 권리 주장"은 "무력 정책의 발현"이며, "국제법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30] 또한, "독립 국가 간의 영토 주권 존중은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초"라고 강조하며, 영국의 자위권 행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0][60] 다만, 재판소는 폭발 사고 이후 알바니아 정부의 미흡한 대응과 외교 문서 지연을 영국 정부의 행동에 대한 참작 사유로 인정했다.[30][60]

이 판결은 자위권 행사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국제 관계에서 영토 주권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5. 사건의 영향 및 역사적 의의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62]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62]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62] 이 사건은 냉전 초기 동서 진영 간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알바니아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영국은 서방 진영의 대표 국가였다.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으나,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63]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2차세계대전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던 알바니아는 국가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사전허가 하에서는 해협통행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무해통항권을 갖는다고 주장, 국제관습법적으로 국제해협의 경우, 완전히 자유로운 통항은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통항권을 갖는다고 인정하여 왔다. 국제재판소에서는 알바니아의 기뢰를 제거한 것은 주권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단하면서 알바니아 통항권을 갖는 영국에게 위험한 물질이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이라고 판단 하였다.[65]

1946년 12월 9일,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에 알바니아가 기뢰를 부설한 것을 비난하며 배상을 요구했다.[40] 영국은 14일 이내의 답변을 요구했고, 알바니아가 배상금 지불을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부치겠다고 명시했다. 12월 21일에 알바니아의 답변을 받았는데, 알바니아 정부는 영국의 주장을 부인했다.[40] 영국 정부는 이러한 대응에 납득하지 못했다. 안보리에 부치려 했지만,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ICJ)에 제소를 권고했다.[40][31][51]

엔베르 호자이오시프 스탈린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이 사건은 영국이 사란다 부근에서 해군 초계 활동을 할 구실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자는 "우리는 이오니아 해에 기뢰를 설치한 적이 없다. 폭발한 기뢰는, 전쟁 중에 독일군이 부설한 것이거나, 후에 영국이 의도적으로 부설한 것이다"라고 썼다.[57]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은 국제 해양법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65] 특히, 이 판결은 무해 통항권, 연안국의 의무, 자위권 행사의 한계 등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확립했다.

ICJ는 케르키라 해협과 같이 국제 항행에 사용되는 해협에서 평시에 군함을 포함한 모든 선박의 무해통항권을 인정했다.[65] 또한 연안국이 자국 영해 내 위험 요소(기뢰)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항하는 선박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65]

한편, 영국이 자국 선박을 보호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알바니아 영해에서 소해 작업을 한 것은 알바니아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보았다.[30][60] ICJ는 "개입의 권리 주장"은 "무력 정책의 발현"이며, "독립 국가 간의 영토 주권 존중은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초"라고 강조했다.[30][60]

케르키라 해협 사건국제 분쟁무력 사용 대신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62][63][64][65] 이 사건은 영국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에서 발생한 구축함 피해에 대한 책임을 알바니아에 묻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를 거쳐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하면서 시작되었다.[10][2][21]

1949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23][11][24][25] 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자국 해역에 기뢰가 부설된 사실을 인지하고 영국에 위험을 알렸어야 했다고 판단했다.[65] 또한, 영국의 기뢰 제거 작업은 주권 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65]

하지만 알바니아가 배상 판결을 오랫동안 이행하지 않아,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실효성에 대한 한계도 드러났다.[10][2][26][21] 냉전 종식 이후 1992년 알바니아와 영국은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고,[10][26] 1996년에야 알바니아가 200만 달러의 지연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하면서 분쟁이 해결되었다.[10][2]

엔베르 호자는 이 사건이 영국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알바니아는 기뢰를 설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7][6]

5. 1. 냉전 초기 긴장 고조

1946년 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을 통항하던 영국의 구축함 Saumarez호와 Volage호가 기뢰에 부딪혀 크게 파손되고, 44명 사망, 42명 부상을 입었다.[62]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가 기뢰를 부설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소했다.[62] 당시 알바니아는 국제 연합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토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UN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처리할 것을 권고했고, 양국은 이를 수용했다.[62] 이 사건은 냉전 초기 동서 진영 간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알바니아소련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영국은 서방 진영의 대표 국가였다.

알바니아 정부는 1949년 12월 9일 선결적 항변을 제출하였으나, 국제 사법 재판소는 15대 1로 이를 각하했다.[63] 이 소송은 영국의 제소로 시작되어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국제 사법 재판소는 12대 2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

2차세계대전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던 알바니아는 국가보안 문제 등을 이유로 사전허가 하에서는 해협통행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무해통항권을 갖는다고 주장, 국제관습법적으로 국제해협의 경우, 완전히 자유로운 통항은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통항권을 갖는다고 인정하여 왔다. 국제재판소에서는 알바니아의 기뢰를 제거한 것은 주권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단하면서 알바니아 통항권을 갖는 영국에게 위험한 물질이 있음을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이라고 판단 하였다.[65]

1946년 12월 9일, 영국은 알바니아 정부에 알바니아가 기뢰를 부설한 것을 비난하며 배상을 요구했다.[40] 영국은 14일 이내의 답변을 요구했고, 알바니아가 배상금 지불을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에 부치겠다고 명시했다. 12월 21일에 알바니아의 답변을 받았는데, 알바니아 정부는 영국의 주장을 부인했다.[40] 영국 정부는 이러한 대응에 납득하지 못했다. 안보리에 부치려 했지만, 안보리는 국제 사법 재판소(ICJ)에 제소를 권고했다.[40][31][51]

엔베르 호자이오시프 스탈린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이 사건은 영국이 사란다 부근에서 해군 초계 활동을 할 구실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자는 "우리는 이오니아 해에 기뢰를 설치한 적이 없다. 폭발한 기뢰는, 전쟁 중에 독일군이 부설한 것이거나, 후에 영국이 의도적으로 부설한 것이다"라고 썼다.[57]

5. 2. 국제법 발전 기여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은 국제 해양법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65] 특히, 이 판결은 무해 통항권, 연안국의 의무, 자위권 행사의 한계 등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확립했다.

ICJ는 케르키라 해협과 같이 국제 항행에 사용되는 해협에서 평시에 군함을 포함한 모든 선박의 무해통항권을 인정했다.[65] 또한 연안국이 자국 영해 내 위험 요소(기뢰)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항하는 선박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부작위에 의한 위법(Wrongful act)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65]

한편, 영국이 자국 선박을 보호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알바니아 영해에서 소해 작업을 한 것은 알바니아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보았다.[30][60] ICJ는 "개입의 권리 주장"은 "무력 정책의 발현"이며, "독립 국가 간의 영토 주권 존중은 국제 관계의 필수적인 기초"라고 강조했다.[30][60]

5. 3.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케르키라 해협 사건국제 분쟁무력 사용 대신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62][63][64][65] 이 사건은 영국알바니아 영해인 케르키라 해협에서 발생한 구축함 피해에 대한 책임을 알바니아에 묻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를 거쳐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하면서 시작되었다.[10][2][21]

1949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영국에 843,947 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64][23][11][24][25] 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자국 해역에 기뢰가 부설된 사실을 인지하고 영국에 위험을 알렸어야 했다고 판단했다.[65] 또한, 영국의 기뢰 제거 작업은 주권 침해에 해당하지만, 군함도 통항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65]

하지만 알바니아가 배상 판결을 오랫동안 이행하지 않아,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실효성에 대한 한계도 드러났다.[10][2][26][21] 냉전 종식 이후 1992년 알바니아와 영국은 케르키라 해협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고,[10][26] 1996년에야 알바니아가 200만 달러의 지연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하면서 분쟁이 해결되었다.[10][2]

엔베르 호자는 이 사건이 영국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알바니아는 기뢰를 설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7][6]

6. 관련 인물

6. 1.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6. 2.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7. 한반도에의 시사점

8.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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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Europe Since 1945: An Encyclopedia Taylor & Francis 201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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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간행물 'Corfu Channel Case’ in Rüdiger Wolfrum (ed), Max Planck Encyclopedia of Public International Law, vol III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https://papers.ss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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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웹사이트 Corfu Channel case, Judgement of 9 April 1949: I.C.J. Reports 1949 http://www.icj-cij.o[...] 2021-07-06
[61] 문서 케르키라의 영어 이름을 따라 '코르푸 해협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2] 논문 코르프 해협 사건 1988
[63] 논문 코르프해협 사건 1988
[64] 논문 코르프해협 사건 1988
[65] 문서 부산대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박찬호 교수님 수업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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