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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얀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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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르넬리우스 얀센은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로, 루뱅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이페르의 주교를 역임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연구하여 저술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얀센주의를 주창했으나, 예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얀센주의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블레즈 파스칼 등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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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얀센
기본 정보
코르넬리우스 얀센 그림
코르넬리우스 얀센 그림
직함이프르 교구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교구이프르 교구
재임 시작1635년
재임 종료1638년
이전조르주 챔벌랭
이후조스 부케르트
출생일1585년 10월 28일
출생지아코이, 홀란드 백국, 네덜란드 공화국
사망일1638년 5월 6일
사망지이프르, 스페인령 네덜란드
교육뢰번 대학교
서명
이름
로마자 표기Coreneliseu Yanseun
네덜란드어 표기nl

2. 생애

코르넬리우스 얀센은 1602년 루뱅 대학교에 입학하여 예수회와 미셸 바이우스(Michael Baius) 간의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얀센은 미셸 바이우스의 '아우구스티누스파'에 가담했으며, 생시랑 수도원장으로 불리는 장 뒤베르제 드 오란과 친구가 되었다.[1] 학위 취득 후 파리로 가서 그리스어를 배웠고, 바욘 근교 뒤베르제의 주교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회 개혁을 계획했다.[1]

1616년 루뱅으로 돌아온 얀센은 남네덜란드 신학생 기숙 학교를 운영하며 예수회와 대립했다. 예수회의 방해를 막고자 두 번 스페인으로 갔으며, 두 번째에는 종교 재판을 간신히 피했다.[1] 1630년 루뱅 대학교 성서 해석 교수가 되었고, 1636년 이프르 교구 주교로 임명되었다. 2년 뒤 사망했으며, 저서 『아우구스티누스』는 1640년 유작으로 출판되었다.[1]

생전에 출판된 정치 문서로는 『갈리아의 마르스』(1635년)가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코르넬리우스 얀센은 네덜란드 아쿠어이(당시 홀란드주, 현재 헬데를란트)에서 가난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1] 1602년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이 대학은 예수회아우구스티누스를 맹신하는 미카엘 바이우스의 추종자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1] 얀센은 결국 후자인 "아우구스티누스" 파에 강하게 끌렸고, 곧 마음이 맞는 동료 학생이자 나중에 '생 시랑 수도원장'이 된 장 뒤 베르지에 드 오란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1]

2. 2. 루뱅 대학교 교수 시절

1616년 얀센은 루뱅으로 돌아와 신학을 공부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성 풀체리아 대학을 맡았다.[1] 얀센은 예수회가 루뱅 대학교 신학부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는 자체 신학 학교를 설립한 것에 대해 반대하며, 대학의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그는 예수회의 침해를 막기 위해 1624년과 1626년 두 번 마드리드로 파견되었고, 두 번째에는 종교 재판을 간신히 피했다.[1]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가톨릭 선교사인 필리푸스 로베니우스 가톨릭 네덜란드 선교 대주교(교황 대리)를 적극 지지했는데, 로베니우스는 대주교의 뜻을 무시하고 그 나라를 복음화하려 했던 예수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1] 그는 또한 네덜란드 칼뱅주의-장로교의 챔피언인 기스베르투스 포에티우스와도 여러 번 대립했는데, 포에티우스는 르네 데카르트에 대한 공격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1]

예수회에 대한 반감은 얀센을 개신교에 더 가깝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과 똑같은 무기로 그들을 물리치고 싶어했다. 그는 주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똑같이 신비적이고 경건하게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1] 1630년 루뱅에서 성경 해석 정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이것은 그의 강의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1] 그의 저서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죽음 직전에 간신히 완성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관한 방대한 논문이었다.[1] 이 책의 준비는 그가 루뱅으로 돌아온 이후 그의 주된 일이 되었다.

2. 3. 이프르 주교 임명과 사망

얀센은 예수회에 반감을 가졌지만, 개신교에 가까워지기보다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도 성경을 신비적이고 경건하게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들과 같은 무기로 그들을 물리치고 싶어했다.[3] 1630년 루벤에서 성경 해석 정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강의에서 가장 큰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3]

얀센은 플랑드르가 스페인의 속박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공화국과 같은 모델로 통치되는 독립적인 가톨릭 공화국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스페인 통치자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 그는 필리피카인 《갈리아의 마르스(1635)》를 썼다.[3] 이 책은 프랑스의 야망, 특히 리슐리외 추기경이 국제 가톨릭 이익에 무관심한 태도를 격렬하게 공격했다.[3]

《갈리아의 마르스》는 프랑스에서 박해받는 얀센의 신학적 친구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마드리드의 분노를 얀센에게 돌렸다.[3] 1636년, 얀센은 교황과 스페인 궁정에 의해 이프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3] 그러나 2년 후인 1638년, 5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고,[3] 그의 역작인 《아우구스티누스》는 1640년에 사후 출판되었다.[3]

3. 얀센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

1640년 출판된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 표지


얀센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1641년 초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교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파리에서 예수회는 그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으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매우 해로운 저작'임을 선언했다.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에 못이겨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정하는 대칙서인 〈인 에미넨티〉를 공포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대칙서에서이다. 하지만 대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죄한 이유는 단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임을 지적했을 뿐, 책의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양측의 불만과 갈등을 부채질했다.[3]

3. 1. 집필 배경과 목적



얀센이 사망한 후, 1641년 초에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교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파리의 예수회는 이 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들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매우 해로운 저작'이라고 선언했다.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지정하는 대칙서 〈인 에미넨티〉를 발표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는 이 대칙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이 대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단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만 지적했을 뿐, 책의 내용이나 은총론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양측의 불만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3]

3. 2. 주요 내용과 구성



얀센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1641년 초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파리에서 예수회는 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으로 구성된 소르본의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매우 해로운 저작'임을 선언했다.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에 못이겨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정하는 대칙서인 〈인 에미넨티〉를 공포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대칙서에서이다. 하지만 대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죄한 이유는 단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임을 지적했을뿐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 침묵했다. 이 때문에 양측의 불만과 갈등을 부채질하게 되었다.[3]

3. 3. 출판과 논쟁의 시작



1641년 초, 얀센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교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예수회는 즉각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들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매우 해로운 저작'으로 규정했다.[3]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지정하는 교황 칙서 〈인 에미넨티〉를 발표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칙서에서였다. 그러나 이 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만 언급하고, 책의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양측의 불만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3]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회로부터 이단으로 공격받은 후에도, 생시랑 수도원장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교황의 유리한 결정을 받아내고 이를 강요하려는 예수회에 맞서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예수회와, 스스로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 칭한 드 오란의 제자 앙투안 아르노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뒤베르지에, 앙투안 아르노, 블레즈 파스칼 등은 얀센의 주장에 동조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리와 도덕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예수회는 이들을 공격하고 이단으로 몰아붙였으며,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옹호한 아르노를 변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르본 대학교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4. 얀센주의 논쟁



얀센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1641년 초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예수회는 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으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매우 해로운 저작'으로 선언했다.[3]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지정하는 대칙서 〈인 에미넨티〉를 공포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는 이 대칙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대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죄한 이유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만 지적하고,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양측의 불만과 갈등을 심화시켰다.[3]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회에 의해 이단으로 공격받은 후에도, 생시랑 수도원장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도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예수회 제수이트들과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인 앙투안 아르노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뒤베르지에, 아르노, 파스칼 등은 얀센의 주장에 동조했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의와 도덕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공격받고 이단으로 지목되는 등 수난을 받았는데,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주장한 아르노를 옹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소르본대학교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4. 1. 논쟁의 발단과 초기 전개



얀센이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1641년 초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리 대학 신학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자 예수회는 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으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매우 해로운 저작'으로 선언했다.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지정하는 대칙서 〈인 에미넨티〉를 공포했다. 얀센주의라는 용어는 이 대칙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대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단죄한 이유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이라고만 지적하고,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양측의 불만과 갈등을 심화시켰다.[3]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회에 의해 이단으로 공격받은 후에도, 생시랑 수도원장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예수회 제수이트들과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인 앙투안 아르노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뒤베르지에, 아르노, 파스칼 등은 얀센의 주장에 동조했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의와 도덕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공격받고 이단으로 지목되는 등 수난을 받았는데,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주장한 아르노를 옹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소르본느대학교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4. 2. 교황청의 개입과 얀센주의자들의 저항

1641년 6월 20일, 리슐리외 추기경의 측근들로 구성된 소르본 위원회는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매우 해로운 저작'으로 선언했다.[3] 1642년 3월, 교황청은 예수회의 압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서로 지정하는 대칙서 〈인 에미넨티〉를 발표했다. 이 칙서에서 얀센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론에 대한 함구령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금서로 지정했을 뿐, 책의 내용이나 은총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양측의 불만과 갈등은 더욱 커졌다.[3]

예수회가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단으로 공격했지만, 생시랑 수도원장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도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계속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교황의 결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낸 후 이를 강요하려는 예수회에 맞서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예수회와 스스로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칭한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 앙투안 아르노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뒤베르지에, 아르노, 파스칼 등은 얀센의 주장에 동조하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리와 도덕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예수회로부터 공격받고 이단으로 몰리는 고난을 겪었다.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옹호한 아르노를 변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소르본대학교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4. 3. 우니제니투스 칙서와 얀센주의의 쇠퇴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요청에 따라 얀센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하는 내용의 칙서 《우니제니투스》를 발표하였다.[4] 이 칙서는 얀센주의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관용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얀센주의는 프랑스 내에서 정치 세력으로 존속했으며, 예수회 추방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4]

5. 얀센주의의 유산과 영향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회에 의해 이단으로 공격받았으나, 생시랑의 수도원장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4]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고, 앙투안 아르노를 중심으로 예수회와의 투쟁이 시작되었다.[4] 뒤베르지에, 앙투안 아르노, 블레즈 파스칼 등은 얀센의 주장에 동조하며 예수회를 비판했다.[4] 블레즈 파스칼은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아르노를 옹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4] 그러나 소르본느대학교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5. 1. 가톨릭 교회 내부에 미친 영향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회에 의해 이단으로 공격받은 후에도, 생시랑의 수도원장인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4]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교황의 결정을 받아낸 뒤 그것을 강요하려고 한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4] 그 때부터 예수회의 제수이트들과 스스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부른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인 앙투안 아르노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4] 뒤베르지에, 앙투안 아르노, 블레즈 파스칼 등이 얀센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의와 도덕에 관한 비판을 하였다.[4] 이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공격을 받고 이단으로 지목되는 등 수난을 받았는데,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주장한 아르노를 옹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4] 하지만 소르본느대학교의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5. 2.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회에 의해 이단으로 공격받은 후에도, 생시랑의 수도원장인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녀원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교황의 결정을 받아낸 뒤 그것을 강요하려고 한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4] 그 때부터 예수회의 제수이트들과 스스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부른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인 앙투안 아르노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4] 뒤베르지에 드 오란, 앙투안 아르노, 블레즈 파스칼 등이 얀센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예수회의 교의와 도덕에 관한 비판을 하였다.[4] 이 때문에 예수회로부터 공격을 받고 이단으로 지목되는 등 수난을 받았는데, 블레즈 파스칼은 얀세니즘을 주장한 아르노를 옹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기 위해 《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4] 하지만 소르본느대학교의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http://www2.fiu.edu/[...] 2012-05-02
[2] 서적 The Jansenists and the Expulsion of the Jesuits from France 1757–1765
[3] 논문 얀센주의와 프롱드난 : 아르노 당딜리의 마자리나드를 중심으로
[4] 간행물 얀센 http://premium.brita[...] 201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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