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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체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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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독일 출신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내이다. 그녀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모차르트의 작품 초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차르트 사후, 빚을 해결하고 남편의 작품을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두 번째 결혼 후에는 남편과 함께 모차르트의 전기를 저술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악처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그녀의 역할이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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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체 모차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제프 랑게가 그린 콘스탄체 모차르트 초상화 (1782년경)
요제프 랑게가 그린 콘스탄체 모차르트 초상화 (1782년경)
본명콘스탄티아 베버
출생1762년 1월 5일
출생지첼 임 비젠탈, 로라흐군,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독일
사망1842년 3월 6일 (80세)
사망지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
직업소프라노 가수
가족 관계
배우자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82년 결혼, 1791년 사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 (1809년 결혼, 1826년 사별)
자녀카를 토마스 모차르트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독일어 이름마리아 콘스탄체 체칠리아 요제파 요한나 알로이지아 모차르트

2. 어린 시절

콘스탄체 베버는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뢰라흐 인근 마을인 첼 임 비젠탈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체칠리아 베버(옛 성은 슈탐)였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는 더블 베이스 연주자, 프롬프터, 악보 필사자로 일했다.[1] 프리돌린의 이복 형제는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아버지였다. 콘스탄체에게는 요제파, 알로이지아, 소피 세 자매가 있었다. 네 자매 모두 성악 훈련을 받았으며, 요제파와 알로이지아는 모두 훌륭한 음악 경력을 쌓았고, 나중에는 모차르트의 여러 작품 초연에 참여했다.

콘스탄체가 성장하는 동안, 대부분의 기간 동안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만하임에 살았는데, 만하임은 중요한 문화, 지적 및 음악 중심지였다.

3. 모차르트와의 결혼

1781년 으로 이주한 모차르트는 베버 가문과 재회했고, 그곳에서 콘스탄체를 다시 만났다. 모차르트는 베버 부인이 소유한 "신의 눈" 관의 방을 빌려 하숙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약혼을 조건으로 베버 부인으로부터 교제를 허락받았다. 당시 모차르트가 서명한 약정서에는 3년 이내에 결혼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콘스탄체는 이 약정서를 찢어 버렸다.

구애는 순탄치 않게 진행되었다. 남아있는 서신에 따르면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질투 문제로 1782년 4월에 잠시 헤어지기도 했다. 콘스탄체가 다른 젊은 남자가 응접실 게임에서 그녀의 종아리를 재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1] 또한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로부터 결혼 허가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

결혼은 결국 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와 동거하게 되면서 당시 풍습에 따라 그녀가 불명예를 얻게 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1782년 7월 31일, 모차르트는 레오폴트에게 "이미 처녀와 너무 멀리 온 남자"에게는 더 이상의 결혼 연기가 불가능하다고 편지를 썼다. 콘스탄체의 여동생 조피 베버는 어머니가 경찰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8월 4일, 모차르트는 발슈테텐 남작부인에게 경찰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그리고 베버 부인이 딸을 데려오려는 속임수일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며, 가능한 한 빨리 콘스탄체와 결혼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썼다.

1782년 8월 4일,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결혼했다. 결혼 계약에서 콘스탄체는 신랑에게 500굴덴을 할당받았고, 모차르트는 이를 1,000굴덴으로 늘릴 것을 약속했으며, 총액은 생존자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결혼 기간 동안의 모든 공동 취득은 둘 다의 공동 재산으로 남아야 했다.[3] 결혼 다음 날, 볼프강 아버지의 동의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


부부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 중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두 명만이 유아기를 넘겼다.

출생일사망일이름
1783년 6월 17일1783년 8월 19일라이문트 레오폴트[4]
1784년 9월 21일1858년 10월 31일카를 토마스 모차르트
1786년 10월 18일1786년 11월 15일요한 토마스 레오폴트[5]
1787년 12월 27일1788년 6월 29일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6][7]
1789년 11월 16일1789년 11월 16일안나 마리아[8]
1791년 7월 26일1844년 7월 29일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콘스탄체는 8년의 결혼 생활 동안 6번의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체력이 소진되었다고 한다.

3. 1. 모차르트의 음악에 미친 영향

콘스탄체는 훈련된 음악가였으며 남편의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음은 두 가지 사례이다.

  • 다단조 미사곡의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뛰어난 작곡(예: 키리에 악장의 "자비송" 부분이나 아리아 "그리고 성육신하셨네")은 콘스탄체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그녀는 1783년 잘츠부르크에서 이 곡의 초연에서 노래했다. 메이너드 솔로몬은 그의 모차르트 전기에서 이 작품을 사랑의 헌정으로 묘사한다.[17]

  • 두 사람의 연애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 남작을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남작은 그에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방대한 작품 원고 컬렉션을 검토하게 했다. 모차르트는 이 자료에 흥미를 느꼈고, 여러 작곡에서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중요한 자극은 바로크 대위법에 매료된 콘스탄체였다. 이는 모차르트가 1782년 4월 20일에 그의 누이 난네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려진다. 이 편지에는 작곡가의 환상곡과 푸가, K. 394의 필사본이 동봉되어 있었다. 해당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는 먼저 푸가를 작곡하고 서곡을 구상하면서 이를 적어 내려갔다.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매우 작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리라고 기대한다. 다음번에는 클라비어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보내주겠다. 나의 사랑하는 콘스탄체는 이 푸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진짜 원인이다.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스비텐 남작은 (내가 그에게 연주해 준 후에) 헨델과 바흐의 모든 작품을 집으로 가져가게 해 주었다. 콘스탄체는 푸가를 듣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제 그녀는 푸가, 특히 (이런 종류의 작곡에서) 헨델과 바흐의 작품만 들으려 한다. 그녀는 내가 머릿속으로 푸가를 연주하는 것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전에 그것을 적어 놓은 적이 있는지 물었고, 내가 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이 가장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모든 음악 형식으로 내 작곡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호되게 꾸짖었고, 그녀를 위해 푸가를 적을 때까지 나를 쉬지 않고 간청했다.[17]

4.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가 1791년에 사망하면서 콘스탄체는 빚더미에 앉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때 콘스탄체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황제로부터 연금을 받고, 수익성 있는 기념 공연을 조직했으며, 남편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12] 이러한 노력으로 점차 재정적으로 안정되었고 결국 부유해졌다.[13] 그녀는 카를과 프란츠를 프란츠 크사버 니에메체크에게 교육을 받도록 프라하로 보냈고, 그와 함께 모차르트의 첫 번째 전기 작업에 참여했다.

모차르트 사후 콘스탄체의 음악적 업적 중 하나는 1791년 프라하에서 공연을 위해 준비했던 그의 후기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를 널리 알린 것이었다. 1794년 12월 29일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고, 언니 알로이시아 베버가 섹스투스 역할을 맡았다. 이후 빈과 다른 도시에서 추가 공연이 이어졌고, 콘스탄체는 비텔리아 역할을 맡아 직접 노래를 불렀다.[14]

1797년 말, 그녀는 덴마크 외교관이자 작가인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센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녀의 세입자였다.[15] 두 사람은 1798년 9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1809년에는 법적으로 결혼하기 위해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로 여행을 갔다.[16] 1810년부터 1820년까지 코펜하겐에서 살았고, 이후 유럽,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824년 잘츠부르크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모차르트의 전기 작업을 함께 했으며, 콘스탄체는 결국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한 지 2년 후인 1828년에 이 전기를 출판했다.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에서 마지막 몇 년을 보내는 동안, 과부로 살고 있던 두 언니 알로이시아와 소피와 함께했는데, 이들은 잘츠부르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 말년

1791년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 콘스탄체는 두 아이를 키우고 모차르트가 남긴 빚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레퀴엠의 미완성 악보를 포함한 자필 악보는 바로 처분하지 않고, 1799년에 음악 출판업자 요한 안톤 안드레에게 매각했다.

1809년 콘스탄체는 덴마크 공사 비서이자 외교관인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닛센과 재혼했다. 닛센은 콘스탄체와 함께 모차르트의 첫 번째 전기를 집필했다. 1821년 이 부부는 잘츠부르크로 이사했고, 1826년에 닛센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만년의 콘스탄체는 돔 근처의 미하엘 광장에 면한 주거지에서 살았고, 1841년에는 모차르테움 설립에도 관여했다. 1842년 3월 6일 콘스탄체가 사망하자, 미하엘 광장에는 그해 9월 4일에 뮌헨 조각가 루트비히 슈반탈러(Ludwig Schwanthaler)가 제작한 모차르트 기념상이 세워졌고, 이후 모차르트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콘스탄체의 묘비(중앙)


콘스탄체의 묘는 잘츠부르크 신시가지의 성 세바스티안 교회에 있다. 같은 묘에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 두 번째 남편 닛센, 언니 아로이시아도 묻혀 있다.

6. 악처 논란과 재평가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에 따르면, 콘스탄체는 여러 전기 작가들에 의해 가혹하고 불공정하게 다루어졌다고 한다.[1] 콘스탄체에 대한 이러한 불공정한 평가는 브라운베렌스(1990), 솔로몬(1995), 할리웰(1998)의 현대 모차르트 전기에서도 지적되고 있다.[19]

콘스탄체는 많은 모차르트의 전기에서 사랑이 없고, 부실하며, 게으른 인물로 묘사되어 악처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진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있다.

6. 1. 악처설의 내용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에 따르면, 콘스탄체는 여러 전기 작가들에 의해 가혹하고 불공정하게 다루어졌다.[1] 콘스탄체에 대한 불공정함에 대한 불만은 브라운베렌스(1990), 솔로몬(1995), 할리웰(1998)의 현대 모차르트 전기에서도 나타난다.[19]

콘스탄체를 악처로 묘사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모차르트의 전기는 콘스탄체의 시점에서 그려졌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 낭비벽이 심했다.
  • 모차르트가 죽었을 때, 별장에서 놀고 있었다.
  • 모차르트 자필의 악보나 서간을 매각했다. 특히 자신에게 불리한 서간은 파기했다.
  • 모차르트의 장례를 소홀히 하고,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묘가 어디 있는지 현재 알 수 없다.
  • 재혼한 것으로 인해, 부정한 인상을 세상에 주었다.
  • 아들(모차르트 2세)(공식적인 아버지는 모차르트)에게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던 쥐스마이어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아, 남편 생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억측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다:

  • 주변 사람들의 편지 등에서는, 콘스탄체를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이며 쾌활한 딸이라고 평가하고 있어, 게으르고 어리석다는 악처설의 인물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남기고 있다.
  • 모차르트 자신도 상당한 낭비벽이 있었고, 실제로는 만년에도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었으며, 부부의 지출은 수입에 걸맞은 것이었다.
  • 콘스탄체는 원래 병약했고,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콘스탄체도 병에 쓰러졌으며, 모차르트 자신이 별장에서 요양하게 했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기 전에 귀가했고, 별장에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악보 등을 매각한 것은, 남편이 죽은 후, 아이를 안고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였다.
  • 모차르트의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공동묘지에 매장한 이유도, 황제 요제프 2세의 장례 합리화 정책과 관습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재혼 자체도 생활을 위해서였으며, 남편 닛센과 함께 모차르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에 진력했다.


콘스탄체는 "사려 깊고, 경제 관념도 발달했으며, 남편의 작품을 지킨 것은 많은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미셸 파르티)라는 의견도 있다.

6. 2. 반론과 재평가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에 따르면, 콘스탄체는 여러 전기 작가들에 의해 가혹하고 불공정하게 다루어졌다. "20세기 초반의 학자들은 그녀를 지능이 낮고, 비음악적이며, 심지어 불성실한 사람으로, 모차르트에게 무관심하고 부적절한 아내로 혹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며) 근거가 부족했고, 여성 혐오적이며, 아마도 모든 면에서 틀렸을 것이다."[1] 콘스탄체에 대한 불공정함에 대한 불만은 브라운베렌스(1990), 솔로몬(1995), 할리웰(1998)의 현대 모차르트 전기에서도 나타난다.[19]

이 중 일부는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해석이 성립한다. 악녀로 후세에 칭해지는 그녀지만, 다음과 같은 반론도 있다.

  • 주변 사람들의 편지 등에서는 교양이 높고 가사에도 열심이며 쾌활한 딸이라고 평가받고 있어, 게으르고 어리석다는 악처설의 인물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모차르트 자신이 아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편지를 남기고 있다.
  • 모차르트 자신도 상당한 낭비가였고, 실제로는 만년에도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었으며, 부부의 지출은 수입에 걸맞은 것이었다.
  • 원래 병약했고, 모차르트가 죽기 전에 콘스탄체도 병에 쓰러졌으며, 모차르트 자신이 별장에서 요양하게 했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기 전에 귀가했고, 별장에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악보 등을 매각한 것은 남편이 죽은 후, 아이를 안고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이다.
  • 모차르트의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공동묘지에 매장한 이유도 황제 요제프 2세의 장례 합리화 정책과 관습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재혼 자체도 생활을 위해서였으며, 남편 닛센과 함께 모차르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진력했다.


콘스탄체는 "사려 깊고, 경제 관념도 발달했으며, 남편의 작품을 지킨 것은 많은 자료가 증명하고 있다"(미셸 파르티)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서인지 작품아마데우스』에서는 생활고에 빠져도 남편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작품의 굴욕적인 취급에 분개하는 일면이 그려졌다.

7. 1840년 사진 논란

1958년에 학계의 주목을 받은 다게레오타입 사진은 78세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니스센을 찍은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이 사진은 1840년 10월 독일 바이에른 주 알퇴팅에서 작곡가 막스 켈러의 집 밖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러 모차르트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첫째, 그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필요한 렌즈는 콘스탄체가 1842년에 사망한 이후 요제프 페츠발에 의해 발명되었기 때문에 사진은 야외에서 촬영될 수 없었다.[20] 둘째, 콘스탄체는 말년에 심한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상태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기 작가 아그네스 셀비는 "신문에 실린 내용과는 달리, 콘스탄체는 1826년 이후 켈러와 연락한 적이 없었으며, 사진이 찍힌 시기에 막시밀리안 켈러를 방문할 수 있었을 리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20][21] 셋째, 작가이자 역사가인 션 멍거는 콘스탄체가 1840년에 78세였을 것이고, 사진 속에서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했다.[22]

1840년 10월경 촬영된 78세의 콘스탄체로 추정되는 인물이 찍힌 은판 사진이 남아있다. 이 사진은 바이에른 왕국 알토팅(Altötting)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체는 앞줄 왼쪽에, 바이에른 작곡가 막스 켈러(Max Keller)는 앞줄 중앙에, 켈러의 아내 요제파는 오른쪽에 찍혀있다. 이 복사본은 2004년 알토팅 자료실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이 사진이 콘스탄체를 찍은 것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다게레오타입의 감도와 렌즈의 밝기에서는 노출 시간이 오래 걸려 이처럼 깨끗한 초상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3] (선명한 초상 사진 촬영이 가능한 밝기의 페츠발 렌즈가 등장한 것은 콘스탄체 사후이다). 또 다른 이유는 만년의 콘스탄체는 관절염 (류마티스)을 앓아 이동이 어려워 켈러를 방문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24]

참조

[1] 서적 article "Mozart", section 4
[2] 서적 p={{page needed|date=September 2019}}
[3] 웹사이트 Mozart Day by Day – 1783 http://www.mozarteum[...] 2016-03-05
[4] 웹사이트 Mozart Day by Day – 1786 http://www.mozarteum[...] 2016-03-05
[5] 웹사이트 Mozart Day by Day – 1787 http://www.mozarteum[...] 2016-03-05
[6] 웹사이트 Mozart Day by Day – 1788 http://www.mozarteum[...] 2017-10-09
[7] 웹사이트 Mozart Day by Day – 1789 http://www.mozarteum[...]
[8] 웹사이트 some excerpts are available https://www.themargi[...]
[9] 서적
[10] 서적
[11] 웹사이트 fun-facts-in-videos https://mozarteum.at[...] Mozarteum in Salzburg
[12] 서적 The Book of Women https://archive.org/[...] Bob Adams, Inc
[13] 서적
[14] 웹사이트 La Clemenza di Tito: Mozart's Operatic Failure? https://www.earlymus[...] 2008
[15] 서적
[16] URL http://michaelorenz.[...]
[17] 서적 Text of letter http://www.schilleri[...]
[18] 간행물 Zu einer unbekannten Photographie Constanze Mozarts.
[19] 문서 The earlier critics accused of unfairness variously include [[Alfred Einstein]], [[Wolfgang Hildesheimer]], and {{ill|Arthur Schurig|de}}
[20] 뉴스 Photo of Mozart's wife a hoax https://www.latimes.[...] 2006-07-16
[21] 웹사이트 10 Mozart myths http://www.classical[...] 2016-01-27
[22] 웹사이트 Historic photo, and a mystery: is this Mozart's wife? https://seanmunger.c[...] 2014-02-23
[23] 뉴스 Mozart Experts Claim Picture of Constanze is a Hoax http://www.playbilla[...] 2006-07-12
[24] 서적 Constanze, Mozart's Beloved Turton & Armstrong Pty. Ltd. 19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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