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노 폰 베스타르프
1. 개요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의 법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독일 보수당과 독일 국가 인민당에서 활동했다. 그는 독일 제국 의회 의원, 당 대표, 그리고 당 의장을 역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주전파로 활동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국가 인민당 당수로 활동했으나, 당내 갈등으로 탈당 후 보수 인민당을 창당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국가 문학원의 멤버였으며,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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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인민당 당원 -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독일의 기업인이자 정치가로서, 범게르만 연맹 공동 설립자이자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를 역임하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우익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히틀러 내각에서 경제 및 농업 장관을 지냈으나 팽창주의적 야망으로 실각했다. -
독일 국가인민당 당원 -
발터 부흐
발터 부흐는 독일 제국의 판사 아들로 나치당 최고재판장, 친위대 명예지도자 등을 역임하며 당내 분쟁 조정, 반유대주의 활동을 펼치다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살했다. -
독일의 백작 -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은 독일의 장군이자 항공기 제조자로, 특히 체펠린 비행선 개발로 명성을 얻었으며, 루프트쉬프바우 체펠린을 설립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비행선을 공급하는 등 항공기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독일의 백작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재무관료로,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재무장관직을 역임하며 여러 내각에서 활동했고,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히틀러 사후에는 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서 재무장관 겸 외무장관을 역임한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경제 관련 저서와 회고록을 출판했다. -
1945년 사망 -
존 커틴
존 커틴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이자 노동당 소속 총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독자적으로 선전포고하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 징병제 도입, 사회 복지 제도 확대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1945년 사망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20세기 중반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을 4번 연임하며 뉴딜 정책으로 경제 회복과 사회 안정을 추구하고, 연합국을 이끌어 추축국에 맞서 승리하며 전후 국제 질서 형성에 기여했다.
2. 생애와 경력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 포젠 프로빈스의 루돔 (현재의 폴란드 Ludomy (wieś w województwie wielkopolskim)폴란드어)에서 수석 임업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츠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교, 브레슬라우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885년에 에 합격했다. 1886년에 1년 의용병으로 브레슬라우에서 근무했다. 그 후 의 예비역이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란트베어로 전속되었다.
1887년부터 의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891년에 두 번째 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의 이 되었다. 1902년부터 에서 근무했으며, 1904년부터 1908년까지 및 의 경찰 청장을 역임했다.
1890년대부터 융커가 구성하는 보수적 정치 단체인 에 참여했으며, 1908년 12월에 제국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독일 보수당(DKP)에 소속되어 1913년 11월부터 1918년까지 동당 의원단의 대표를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주전파로 행동했으며, 1917년에 사민당과 중앙당 및 진보 인민당의 찬성으로 제국 의회에서 결의된 에 강력히 반대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찬성했으며, 또한 제국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가 제창한 의 개정에 반대했다.
패전 후인 1918년에 독일 보수당은 자유 보수당(FKP) 주류파 및 국민자유당(NLP) 우파 등과 합류하여 독일 국가 인민당(DNVP)으로 개편되었고, 베스타르프도 동당에 소속되었다. 1919년부터 의 편집자가 되었고, 1925년에는 주주가 되었다. 1920년 6월의 총선거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6년에 국가 인민당 당수에 취임했다. 1927년 1월에는 국가 인민당, 중앙당,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를 받아 제4차 마르크스 내각을 발족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앙당이 기초한 정권 강령을 수용하여 로카르노 조약과 바이마르 헌법의 법적 정당성을 인정했지만, 이는 국가 인민당에게 대의를 상실하는 것이었고, 당내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한편 베스타르프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와의 관계를 좋게 해나갔다.
국가 인민당은 1928년 5월의 총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로 인해 당내 반정부파의 대표 격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대두하게 되었고, 1928년 가을에 베스타르프는 사임하게 되었다. 그를 대신하여 후겐베르크가 국가 인민당 당수가 되었고, 동당은 보수 야당의 입장으로 회귀했지만, 베스타르프는 계속 친정부파로 행동했다. 또한 베스타르프는 독일 황실에 깊이 심취하여 황실의 부흥을 항상 원했던 반면, 후겐베르크는 국수주의적 우파라고 불리는 반군주제론자로 황실 부활의 의지가 없었다. 1929년 9월에 후겐베르크가 발표한 "독일 민족 노예화 반대 법안"은 힌덴부르크마저 국사범으로 규탄하는 내용이었고, 베스타르프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당내 반정부파와 친정부파의 균열은 커졌고, 1930년 7월 1일에 브뤼닝 내각이 발동한 대통령 긴급령의 국회에서의 폐기 투표에서, 베스타르프 등 친정부파는 후겐베르크의 방침에 반하여 반대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국가 인민당의 결렬은 공공연해졌고, 베스타르프 등은 국회 해산 후에 (KVP)을 결성하여 탈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9월의 선거에서 보수 인민당은 겨우 4석밖에 얻지 못하고 泡沫政黨이 되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정권 하에서는 의 멤버였다.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가택 수색을 받았지만, 체포나 처형은 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 후인 1945년 6월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음 달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법조 경력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 포젠 프로빈스의 루돔 (현재의 폴란드 Ludomy (wieś w województwie wielkopolskim)폴란드어)에서 수석 임업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츠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교, 브레슬라우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86년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브레슬라우와 포츠담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제1 근위 보병 연대의 예비 장교로 임명되었다.
1887년 브란덴부르크의 프라이엔발데 행정구 (란트크라이스) 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당시 책임자는 나중에 총리가 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였다. 1891년 두 번째 국가고시를 통과한 후, 베스타르프는 포젠의 고스틴과 봄스트, 그리고 슈테틴에서 어세서로서 경력을 이어갔다. 1902년 프로이센 주 정부에 입사하여 베를린의 쇤베르크와 빌머스도르프 교외의 경찰청장이 되었고, 1908년에는 프로이센 행정 법원의 수석 판사로 임명되었다.
2.2. 정치 입문과 독일 보수당 활동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 포젠 프로빈스의 루돔에서 수석 임업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츠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교, 브레슬라우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86년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브레슬라우와 포츠담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제1 근위 보병 연대의 예비 장교로 임명되었다.
1887년 브란덴부르크의 프라이엔발데 행정구(란트크라이스) 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당시 책임자는 나중에 총리가 된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였다. 1891년 두 번째 국가고시를 통과한 후, 포젠의 고스틴과 봄스트, 그리고 슈테틴에서 어세서로서 경력을 이어갔다. 1902년 프로이센 주 정부에 입사하여 베를린의 쇤베르크와 빌머스도르프 교외의 경찰청장이 되었고, 1908년에는 프로이센 행정 법원의 수석 판사로 임명되었다.
1890년대에 독일 농업 연맹에 가입했으며, 1908년 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서 독일 보수당 소속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의원 단체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1917년 국회 평화 결의안에 반대하고, 무제한 잠수함 전쟁의 사용을 옹호했으며, 프로이센 삼계급 선거권 개혁을 거부했다.
2.3. 독일 국가인민당(DNVP) 활동과 당수 역임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 포젠 프로빈스의 루돔에서 태어나, 여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886년 국가고시를 통과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라이엔발데 행정구 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밑에서 일했다. 1891년 두 번째 국가고시 통과 후 포젠의 고스틴과 봄스트, 슈체친에서 어세서로 경력을 이어갔다. 1902년 프로이센 주 정부에 입사, 베를린의 쇤베르크와 빌머스도르프 교외의 경찰청장을 거쳐 1908년 프로이센 행정 법원의 수석 판사로 임명되었다.
1890년대 독일 농업 연맹에 가입, 1908년 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독일 보수당에 소속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의원 단체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1917년 국회 평화 결의안에 반대하고 무제한 잠수함 전쟁 사용을 옹호했다.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1919년부터 보수적인 신문 크로이츠차이퉁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1925년에는 신문의 주주가 되었다. 1920년 퇴직으로 공무원 경력이 끝났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회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당 내 극우적이고 반민주적인 세력의 대변인이었지만, 1920년대 중반 보다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1926년 DNVP 의원 단체 대표와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DNVP는 한스 루터 총리가 이끄는 자유-보수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일시적으로 반공화주의적 태도를 버렸다. 그러나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당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고, 헤르만 뮐러 총리 하의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의 형성을 받아들여야 했다. 베스타르프는 의장직에서 사임했고, 1930년 하인리히 브뤼닝 정부에 대한 지지가 당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반공화주의적 경향이 드러나면서 결국 1930년 DNVP를 탈당했다. 같은 해 고트프리트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와 함께 온건파인 보수 인민당(KVP)을 창립, 1932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했다.
1932년 독일 연방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나치당의 승리였다. 1933년 권력 장악 이후 사생활로 은퇴했다. 나치 독일 당국은 그가 7·20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했지만, 예비 조사에서는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소련 점령군에 의해 베를린에서 잠시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고 그 직후 사망했다.
2.4. 보수인민당(KVP) 창당과 탈당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1890년대 독일 농업 연맹에 가입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08년 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독일 보수당에 소속되었으며,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의원 단체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회 평화 결의안에 반대하고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옹호했다.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베스타르프는 독일 국가 인민당(DNVP)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1919년부터 보수적인 신문 크로이츠차이퉁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1925년에는 신문의 주주가 되었다.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초기에는 당내 극우적이고 반민주적인 세력의 대변인이었으나, 카프 반란 실패 후 1920년대 중반 보다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며 1926년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DNVP는 한스 루터 총리의 자유-보수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반공화주의적 태도를 일시적으로 버렸다. 그러나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당이 참패하고 헤르만 뮐러 총리의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 형성을 받아들여야 했다. 베스타르프는 의장직에서 사임했고, 1930년 하인리히 브뤼닝 정부에 대한 지지가 당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1929년 독일 국민투표 동안 후임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반공화주의적 경향이 드러나면서, 결국 1930년에 DNVP를 탈당했다. 같은 해, 고트프리트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와 함께 온건파 보수 인민당(KVP)을 창립했다.
2.5. 나치 시대와 말년
쿠노 폰 베스타르프는 프로이센 포젠 프로빈스의 루돔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886년 국가고시를 통과했다. 1890년대에 독일 농업 연맹에 가입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1908년 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독일 보수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보수당 의원 단체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베스타르프는 국회 평화 결의안에 반대하고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옹호하는 등 주전파로 활동했다.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독일 국가 인민당 (DNVP) 창립 멤버가 되었고,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6년에는 DNVP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DNVP는 한스 루터 총리의 자유-보수 연립 정부에 참여했지만,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베스타르프는 당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후임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반공화주의적 경향에 반발하여 1930년 DNVP를 탈당하고 보수 인민당 (KVP)을 창립했다. 1932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했다.
1932년 독일 연방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에는 사생활로 은퇴했다. 나치 독일 당국은 그가 7·20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심했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소련 점령군에 의해 잠시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고 그 직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