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블랜드 브라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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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1946년 창단된 미국의 프로 미식축구팀으로, 현재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의 AFC 북부 지구에 소속되어 있다. AAFC(All-America Football Conference)에서 시작하여 NFL로 합류했으며, 폴 브라운 코치의 이름을 따서 팀명이 정해졌다. 1960년대까지 강팀으로 군림했으나, 이후에는 1990년대 팀의 볼티모어 이전, 재창단 등의 과정을 겪으며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2020년에는 2002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열성적인 팬덤과 독특한 로고, 유니폼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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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브라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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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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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네임 |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
별칭 | 브라우니즈 |
창단 | 1944년 6월 4일 |
첫 시즌 | 1946년 |
홈 구장 | 헌팅턴 뱅크 필드 |
연고지 |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
본사 | 베레아, 오하이오 크로스컨트리 모기지 캠퍼스 |
웹사이트 |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공식 웹사이트 |
구단 정보 | |
구단주 | 지미 하슬럼, 디 하슬럼 |
단장 | 앤드루 베리 |
감독 | 케빈 스테판스키 |
마스코트 | 촘프스, SJ, 브라우니 더 엘프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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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색상 | 갈색, 주황색, 흰색 |
역사 | |
이전 명칭 |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1946–1995, 1999–현재) |
운영 중단 | 1996–1998년 |
리그 제휴 | 올-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1946–1949) |
NFL 가입 년도 | 1950년 |
리그 기록 | |
리그 우승 | 8회 |
컨퍼런스 우승 | 11회 |
디비전 우승 | 12회 |
플레이오프 진출 | 30회 |
우승 기록 | |
AAFC 챔피언십 |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
NFL 챔피언십 (1970년 이전 AFL-NFL 합병) | 1950년, 1954년, 1955년, 1964년 |
컨퍼런스 챔피언십 | NFL 아메리칸: 1950년, 1951년, 1952년 |
컨퍼런스 챔피언십 | NFL 이스턴: 1953년, 1954년, 1955년, 1957년, 1964년, 1965년, 1968년, 1969년 |
디비전 챔피언십 | AAFC 웨스턴: 1946년, 1947년, 1948년 |
디비전 챔피언십 | NFL 센추리: 1967년, 1968년, 1969년 |
디비전 챔피언십 | AFC 센트럴: 1971년, 1980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9년 |
경기장 정보 | |
이전 경기장 | 클리블랜드 스타디움(1946–1995) |
플레이오프 진출 기록 | AAFC: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
플레이오프 진출 기록 | NFL: 1950년,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7년, 1958년, 1964년, 1965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1년, 1972년, 1980년, 1982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4년, 2002년, 2020년, 2023년 |
역대 구단주 | |
역대 구단주 | 아서 B. 맥브라이드(1944–1953) |
역대 구단주 | 데이브 존스(1953–1961) |
역대 구단주 | 아트 모델(1961–1995) |
역대 구단주 | 알 러너(1998–2002) |
역대 구단주 | 랜디 러너(2002–2012) |
역대 구단주 | 지미 하슬럼 & 디 하슬럼(2012–현재) |
영구 결번 | |
영구 결번 선수 | 14번, 32번, 45번, 46번, 76번 |
디비전 정보 | |
현재 디비전 |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1970–1995; 1999–현재) |
현재 디비전 | AFC 북부(2002–현재) |
이전 디비전 | AFC 센트럴 (1970–1995; 1999–2001) |
이전 디비전 | 이스턴 컨퍼런스 (1953–1969) |
이전 디비전 | 센추리 디비전 (1967–1969) |
2. 역사
1946년, NFL에 대항하여 창설된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ll-America Football Conference / AAFC)의 일원으로서 아서 B. 맥브라이드에 의해 창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도 같은 해에 창설되어 AAFC에 참가했다.
팀명은 처음 클리블랜드의 신문 플레인 딜러에서 실시된 투표에서 "팬서스"가 선정되었지만, 과거에 "클리블랜드 팬서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존재했고, 지역 사업가가 그 이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169] 팀은 별도로 팀명 명명 콘테스트를 실시, 헤드 코치인 폴 브라운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스'''"가 되었다. 브라운은, 실제로는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를 딴 "브라운 봄버스"가 가장 많은 득표수였지만, 나중에 철회되어 브라운 자신의 이름을 따는 것을 승낙했다고 말했다.[169][170] AAFC는 4년간 존속한 후 NFL에 통합되었지만, 브라운스는 4시즌 모두에서 챔피언십을 획득, 4시즌 통틀어 4패밖에 하지 않았다.
NFL과 AAFC의 합병 후, 브라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및 볼티모어 콜츠와 함께 1950년에 NFL로 이동했다. 비평가들은 AAFC의 전반적인 약세가 브라운스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라운스는 첫 NFL 공식 경기에서, 2년 연속 NFL 챔피언이었던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상대로 패스로 346야드, 총 487야드를 획득, 35 대 10으로 승리했다.[171] 그리고 첫 해 NFL 챔피언십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루 그로자의 필드 골로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꺾고 우승했다. 브라운스는 이어진 5번의 타이틀 게임 출전을 이루어냈고, 1954년과 1955년에 연패를 달성했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팀 창설 10년 동안, 브라운스는 매년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처음 4번은 AAFC)하여 7번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시즌 개막 전에, 오토 그레이엄이 부상으로 은퇴하자, 3명의 QB, 조지 라터먼, 베이브 파릴리, 토미 오코넬이 기용되었지만, 모두 터치다운보다 인터셉트 횟수가 많았고, 팀은 5승 7패로 처음으로 졌다.
1957년 드래프트에서 시라큐스 대학교의 풀백, 짐 브라운을 획득했다. 짐 브라운은 1년차부터 12경기에서 942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고, 또한 루키 오브 더 이어에 빛났다. 팀은 9승 2패 1무로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했지만, 2명의 QB, 토미 오코넬과 밀트 플럼이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에게 6번의 턴오버를 허용하며 14-59로 대패했다. 1958년, 짐 브라운은 다른 러닝백 전체의 거의 2배 이상인 1527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다. 브라운은 선수 생활 9년 중 7번 1000야드 러셔가 되었지만, 그동안 팀이 우승한 것은 1964년 한 번뿐이었다.
1961년, 아트 모델이, 1953년부터 구단주를 맡고 있던 데이비드 존스에게서 팀을 인수했다. 1962년, 시즌 7승 6패 1무의 성적을 거두자, 이듬해 1963년 1월 9일, 헤드 코치를 맡았던 폴 브라운과의 계약 해지가 아트 모델을 비롯한 과반수 구단주의 지지로 결정되었다. 결정에 이르는 논의는 지방 신문의 파업 중에 진행되었고,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클리블랜드의 스포츠 작가 프랭크 기번스는 계약 해지에 대해, "터미널 타워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높은 빌딩)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72] 후임 헤드 코치로는 브라운 밑에서 오랫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블랜턴 콜리어가 취임했다.
1963년에 팀은 10승 4패, 짐 브라운은 1863야드를 달렸다. 1964년에는 10승 3패 1무로 7년 만에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 볼티모어 콜츠를 27-0으로 꺾었다. 이 경기의 MVP는 3번의 터치다운 패스 리시브를 기록한 게리 콜린스가 선정되었다. 1965년, 짐 브라운의 은퇴 후 1968년, 1969년에도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이루지 못했고, 1970년 시즌 종료 후 콜리어 헤드 코치는 사임, 오펜스 코디네이터인 닉 스콜리치가 신임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0 시즌 전에 AFL과 내셔널 풋볼 리그(NFL)이 합병되면서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AFC)의 일부가 되었다. 브라운스는 1971년과 1972년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평범한 팀으로 전락했다.[25]
1971년, NFL과 AFL이 통합된 후 첫 시즌이었던 해에 AFC 중부 지구에서 우승했으며, 1972년에는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1973년에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1974년에는 쿼터백으로 마이크 피프스와 루키인 브라이언 사이프가 기용되었지만, 두 사람의 합산 터치다운 패스는 10회였던 반면 인터셉션은 24회나 기록했다. 수비 역시 리그 최악인 344실점으로 팀은 4승 10패로 부진했다. 스콜리치는 해임되었고, 1975년부터 포레스트 그레그가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5년, 정규 시즌은 개막 후 9연패를 기록했지만, 신시내티 벵갈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고, 그 3주 후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경기에서는 3년차 RB 그렉 풀리트가 214야드를 달리며 활약하여 팀은 3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1976년에는 개막전에서 승리했지만, 에이스 쿼터백 마이크 피프스가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었고, 이후 3연패를 기록했지만, 백업 쿼터백 브라이언 사이프가 활약을 보이며, 10월 10일에는 2년 연속 슈퍼볼 우승을 달성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18-16으로 꺾는 등, 최종적으로 9승 5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우수 코치상을 수상했고, 그렉 풀리트도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
1977년에도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브라이언 사이프가 11월 13일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잭 램버트의 히트를 받아 부상당했고, 마지막 5경기에서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해 6승 8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종 주 게임 전에 해고되었고, 딕 마제로우스키가 임시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8년부터 샘 라티글리아노가 헤드 코치가 되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쿼터백 사이프가 2900야드를 던져 21TD 패스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고, 러닝백 그렉 풀리트, 마이크 풀리트가 둘이 합쳐 2500야드를 달렸지만, 패스 수비에서 약점을 보여 8승 8패로 시즌을 마쳤다.
쿼터백 브라이언 시페가 막판 승리를 연출하면서 1979년과 1980년에 일종의 부활이 일어났고, 브라운스는 "카디악 키즈"라고 불리게 되었다.[25]
1979년 시즌에는 개막부터 4연승을 거두었다. 이 중 3경기는 종료 1분 또는 연장전에서 승리했다.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는 경기가 이어진 팀은 "카디악 키즈"라고 불렸다. 사이프는 스티브 글로건과 함께 리그 최다인 28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지만, 26개의 인터셉션 역시 리그 최다였다. 마이크 풀리트는 1294야드를 달려 프로볼에 선정되었지만, 수비는 여전히 약점이었고 특히 런 디펜스는 리그 최저였으며, 팀은 9승 7패로 휴스턴 오일러스,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이어 지구 3위로 시즌을 마쳤다.
1980년에는 사이프가 4000야드가 넘는 패스를 던져 30TD 패스, 인터셉션 14회로 시즌 MVP로 선정되었다. 11승 5패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8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12-14로 아쉽게 패했다[173]
그러나 시페 아래에서 브라운스는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를 넘지 못했다.[25]
1981년, 샌디에고 차저스와의 개막전이었던 먼데이 나잇 풋볼에서 사이프는 57개의 패스를 던졌지만, 14-44로 패배했다[174] 이 해, 사이프는 터치다운 패스 17회, 인터셉션 25회로 마쳤으며,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이 패스 리시브로 1004야드를 획득, 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프로볼에 선정된 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1982년에는 사이프와 폴 맥도날드 두 사람이 선발 쿼터백으로 기용되었다. 파업으로 단축된 이 시즌은 4승 5패에 그쳤지만, 확대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1983년에는 사이프가 부활하여 26TD 패스를 던져 3566야드를 획득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184야드를 달려 10TD를 기록했다. 연장전에서 2번의 승리를 거두는 등 접전을 잘 치렀지만 9승 7패로 아쉽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4년은 재건의 해가 되었다. 쿼터백 사이프는 USFL로 이적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984년 시즌 종료 후 버팔로 빌스로 이적했다. 시즌 1승 7패가 되자 라티글리아노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마티 쇼튼하이머가 남은 경기를 지휘하여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1985년, 브라운스는 마이애미 대학교의 쿼터백, 버니 코저를 서플리멘탈 드래프트로 영입했다. 코저는 시즌 중반에 게리 다니엘슨을 제치고 선발 자리를 차지했다. 코저는 선발 출전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승리했고, 젊은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 케빈 맥은 모두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175] 8승 8패였지만 지구 우승을 차지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한때 21-3으로 앞섰지만 후반에 들어서 댄 마리노가 이끄는 돌핀스의 공격에 터치다운 3개를 내주며 21-24로 역전패를 당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팀은 5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출전했지만 그 중 3번은 덴버 브롱코스에게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패했다.
1986년에는 코저가 패스를 3854야드 던졌고, 수비에서는 5명 (칩 뱅크스, 핸포드 딕슨, 밥 고릭, 클레이 매튜스 주니어, 프랭크 미니필드)이 프로볼에 선출되는 활약을 펼쳐 AFC 최고인 12승 4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홈 필드 어드밴티지를 확보했다. 뉴욕 제츠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남은 4분에서 10-20으로 뒤쳐져 3번째 다운에서 24야드가 남은 위기에 처했지만 마크 개스티노의 러핑 더 패서 반칙으로, 퍼스트 다운을 획득, 그 후 케빈 맥이 TD 런을 성공시키고, 제츠의 공격을 3번 만에 수비가 막아냈으며, 타임 아웃 없이 5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코저가 웹스터 슬로터에게 패스, 남은 7초에 마크 모즐리[176] 가 동점 FG를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 들어서 모즐리는 FG를 한 번 실패했지만, 더블 연장전 끝에 다시 모즐리에게 기회가 돌아와 결승 FG가 성공되면서 브라운스가 승리했다[177][178] 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남은 5분 11초에 상대 공격에 대해 자진 2야드 지점에서 공격을 시작했지만, 존 엘웨이의 이후 '''더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플레이로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전에서 상대 키커 리치 칼리스의 FG가 성공되면서 시즌을 마쳤다.
1987년에도 코저는 3000야드 이상을 던졌고, 터치다운 패스 22개를 기록했다. 프로볼에는 코저, 맥, 딕슨, 고릭, 미니필드, 매튜스, 와이드 리시버 제럴드 맥닐, 오펜스 라인의 Cody Risien이 선출되었다. 10승 5패로 시즌을 마친 팀은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를 38-21로 꺾고 2년 연속 브롱코스와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맞붙었다. 전반전에서 3-21로 뒤졌지만 3쿼터에 코저가 어니스트 바이너, 레지 란혼에게 TD 패스를 성공시키고, 4쿼터 초반에 웹스터 슬로터에게 4야드 TD 패스가 성공되면서 경기는 31-31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브롱코스는 새미 와인더가 TD를 기록하며 다시 앞서나갔지만 5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있었고 브라운스는 1분 12초를 남겨두고 적진 8야드까지 진출한 후 어니스트 바이너에게 볼을 넘겨 오픈으로 달리게 했다. 이 플레이 ('''더 펌블'''이라고 불리게 됨)에서 바이너는 상대 선수의 태클을 받고 펌블을 범했다. 그 후 브롱코스는 의도적으로 세이프티를 내주었고, 브라운스는 33-38로 패했다[179]
1988년에는 코저가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개막전에서 부상,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시즌 후반에 결장했다. 코저가 선발 출전한 경기는 6승 3패였고, 다른 쿼터백이 선발 출전한 경기는 4승 3패, 최종 주에 눈보라 속에서, 지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휴스턴 오일러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10승 6패로 시즌을 마치고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80] 플레이오프는 오일러스와 홈에서의 재경기였지만 선발 쿼터백 돈 스트록이 부상으로 퇴장한 후 마이크 페이겔이 등장하여 터치다운으로 따라붙었지만, 마지막 온사이드 킥 3번의 기회 (오일러스의 반칙으로 인해 다시 킥을 함)를 살리지 못하고 23-24로 패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마티 쇼텐하이머 헤드 코치는 팀을 떠나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헤드 코치가 되었고, 후임에는 버드 카슨이 취임했다.
1989년, 부상에서 복귀한 코저가 16경기 모두 선발 출전했다[180] 팀은 7승 3패에서 무승부를 포함하여 3연패를 하면서 플레이오프 출전이 위태로웠지만 마지막 2경기에 승리하여 9승 6패 1무로 시즌을 마쳤고, 9승 7패를 기록한 같은 지구의 오일러스, 스틸러스보다 앞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버펄로 빌스와 대결, 짐 켈리가 경기 마지막 플레이에서 TD를 노린 패스를 클레이 매튜스가 인터셉트하여 34-30으로 승리했다. 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시종일관 리드를 내주며 21-37로 패했다.
1990년에는 코저가 데뷔 후 처음으로 인터셉션 수 (15)가 터치다운 수 (10)보다 많은 숫자를 기록했고, 러싱 오펜스는 리그 최하위, 러싱 디펜스도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여 3승 13패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2승 7패가 되자 카슨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잠정 헤드 코치로 짐 쇼프너가 취임했지만 시즌 남은 7경기 중 1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끝났으며, 1991년부터의 헤드 코치로는 디펜스 코디네이터인 빌 벨리치크가 승격되었다.
1991년, 팀 성적은 6승 10패로 마쳤고, 코저의 성적도 18 터치다운, 9 인터셉션으로 개선되었다. 이 해 러닝백 리로이 호드가 브레이크했다.
1992년에는 코저가 시즌 대부분을 사이드라인에서 보냈고 마이크 톰자크가 선발 출전했다. 팀은 AFC 중부 지구 우승 경쟁에 참가했지만 마지막 3경기를 모두 져서 7승 9패로 마쳤다.
1993년, 벨리치크는 코저를 방출하고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선발 쿼터백이었던 비니 테스타버디를 영입했다. 팀은 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테스타버디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백업 쿼터백 토드 필콕스가 대타를 맡았지만 마지막 9경기 중 2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7승 9패로 시즌을 마쳤다. 한편 팀을 떠난 코저는 이 해에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입단, 슈퍼볼 링을 얻었다.
1994년, 쿼터백은 팀의 약점이었지만, 디펜스는 1 플레이당 상대 공격에 허용한 평균 야드가 NFL 최소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프로볼에 4명의 선수 (롭 버넷, 페퍼 존슨, 마이클 딘 페리, 에릭 터너)를 보냈다. 팀은 11승 5패로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출전,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에서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드류 블레드소를 디펜스가 3번 삭 (sacks, 태클)하여 20-13으로 꺾었지만,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같은 지구의 라이벌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9-29로 패했다. 이 해, 전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쿼터백 마크 리핀과 계약했지만, 1년 만에 세인트루이스 램스로 이적했다.
1995년 11월 6일, 구단주인 아트 모델은 1996년부터, 1983년까지 콜츠가 프랜차이즈를 두었던 볼티모어로 팀을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7일, 클리블랜드 시의회는 1억 7500만 달러를 들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을 개축하기로 결정했지만, 모델의 구상으로는 스타디움을 철거하고 새 스타디움 건설에 3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계산되었다.
브라운스의 팬들은 이 소식에 분노하여 100건 이상의 소송이 클리블랜드 시 등을 상대로 제기되었다. 지역 출신인 드류 캐리는 11월 26일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이전을 막기 위한 팬들의 집회를 열었다. 이전 반대 운동은 라이벌 스틸러스의 지역인 피츠버그에서도 진행되었다. 게다가 팀 스폰서도 이 움직임에 동참하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에서 광고를 철수했다.
이 시즌, 팀은 3승 1패로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전 발표 전 3경기에 연패했고, 발표 후의 성적은 2승 7패,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지역에서의 마지막 경기에는 경비원과 경찰관이 대거 동원되어 불상사에 대비했다. 팀은 홈 최종전이었던 신시내티 벵갈스전에서 승리했다.
이후에도 NFL, 브라운스, 클리블랜드와 볼티모어 양 시 사이에서 협의가 계속되었고, 1996년 2월, "브라운스의 이름, 팀 컬러, 역사, 기록 등은 클리블랜드에 남겨두고[181], 3년 후인 1999년에 신 스타디움 완공과 함께 익스팬션 팀으로 부활시키고, 볼티모어에 생기는 팀은 신생 팀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모델의 팀은 볼티모어로 이전하여 볼티모어 레이븐스가 되었고, 로스터에 있는 선수들은 그대로 신 구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95년, 아트 모델 구단주는 브라운스를 볼티모어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하여 클리블랜드 팬들의 분노를 샀다.[28] 협상과 법적 공방 끝에 모델은 자신의 인력을 볼티모어 레이븐스라는 확장 프랜차이즈로 데려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29] 클리블랜드에는 1999년까지 재활성화될 브라운스 프랜차이즈를 위해 브라운스의 색상, 로고, 유산을 남기기로 합의했다.[30]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헌팅턴 뱅크 필드(당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스타디움)가 건설되면서 3년 동안 활동이 중단된 후, 브라운스는 재활성화되어 1999년에 새로운 구단주 알 러너 아래에서 다시 경기를 시작했다.[37] 1998년에 NFL은 신생 팀의 구단주가 될 알 러너에게 5억 3,000만 달러에 프랜차이즈를 매각했는데, 이는 북미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액이었다.[182] 1999년, 팀은 CEO로 카르멘 폴리시, 제너럴 매니저로 드와이트 클라크를 영입했다. 또한 재규어스의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크리스 파머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영입했다. 팀은 확장 드래프트,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를 영입했으며, 1999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쿼터백(QB) 팀 카우치, 2000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수비 엔드(DE) 코트니 브라운을 지명했다.[183] 헤드 코치 크리스 팔머 아래에서 브라운스는 1999년에 2–14, 2000년에 3–13의 성적을 기록했다.[38] 이 해, 볼티모어 레이븐스(이 해에도 이전 브라운스에서 뛰었던 맷 스토버, 롭 바넷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가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제35회 슈퍼볼에서 우승하면서 팬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2001년 팀은 7승 9패로 마쳤다. 이 해 GM인 클라크는 사임했고, 데이비스 헤드 코치가 GM 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2002년 시즌에는 지구 재편성이 있어, AFC 북부 지구 4팀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 10월 23일, 알 러너 구단주가 사망하고, 아들인 랜디 러너가 구단주가 되었다.[182] 팀은 9승 7패로 와일드카드를 획득하여 1994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33-21로 앞서고 있었지만 33-36으로 패했다.
이후 브라운스는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고전하여 1999년 복귀 이후 101–234–1의 저조한 기록을 세웠다.[39] 브라운스는 NFL로 복귀한 이후 4번의 승리 시즌과 3번의 플레이오프 진출(2002년, 2020년, 2023년)만을 기록했다.[39]
2003년, 2004년은 모두 패배로 시즌을 마쳤다. 2004년 3승 8패가 된 시점에서 데이비스 헤드 코치가 사임[184]했고, 오펜스 코디네이터인 테리 로비스키가 임시 헤드 코치가 되었다. 2004년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쿼터백 루크 매카운을 지명했다.
2005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수비 코디네이터로 크리스 팔머 밑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로메오 크레넬이 신임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 2005년, 팀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185] 2005년 시즌 최종전에는 구단 사장인 존 콜린스가 단장인 필 새비지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이듬해 1월 3일에 팀을 떠난 것은 사장인 콜린스였다.[186] 이때 러너 구단주가 CEO를 겸임하게 되었다.
2006년은 6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187]
2007년, 팀은 다시 태어났다. 개막전에서 스틸러스에 34-7로 승리하고 선발 쿼터백이었던 찰리 프라이를 시애틀 시호크스로 트레이드[188]하면서, 데릭 앤더슨이 에이스 쿼터백이 되었다. 앤더슨은 신시내티 벵갈스와의 경기에서 팀 타이 기록인 5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하며 팀은 51-45로 승리했다. 팀은 1994년 이후 최고 성적인 10승 6패를 기록했지만[189] 승자승에서 밀려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2008년, 팀은 지구 우승을 기대했다. 제42회 슈퍼볼 챔피언인 뉴욕 자이언츠를 꺾었지만,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4승 12패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와 함께 새비지 단장과 크레넬 헤드 코치가 해임되었고, 2009년 1월, 조지 코키니스가 단장으로[191],
2. 1. 창단과 초기 (1944-1969)
1946년, NFL에 대항하여 창설된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ll-America Football Conference / AAFC)의 일원으로서 아서 B. 맥브라이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도 같은 해에 창설되어 AAFC에 참가했다.
팀명은 처음 클리블랜드의 신문 플레인 딜러에서 실시된 투표에서 "팬서스"가 선정되었지만, 과거에 "클리블랜드 팬서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존재했고, 지역 사업가가 그 이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169] 팀은 별도로 팀명 명명 콘테스트를 실시, 헤드 코치인 폴 브라운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스'''"가 되었다. 브라운은, 실제로는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를 딴 "브라운 봄버스"가 가장 많은 득표수였지만, 나중에 철회되어 브라운 자신의 이름을 따는 것을 승낙했다고 말했다.[169][170] AAFC는 4년간 존속한 후 NFL에 통합되었지만, 브라운스는 4시즌 모두에서 챔피언십을 획득, 4시즌 통틀어 4패밖에 하지 않았다.
NFL과 AAFC의 합병 후, 브라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및 볼티모어 콜츠와 함께 1950년에 NFL로 이동했다. 비평가들은 AAFC의 전반적인 약세가 브라운스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라운스는 첫 NFL 공식 경기에서, 2년 연속 NFL 챔피언이었던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상대로 패스로 346야드, 총 487야드를 획득, 35 대 10으로 승리했다.[171] 그리고 첫 해 NFL 챔피언십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루 그로자의 필드 골로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꺾고 우승했다. 브라운스는 이어진 5번의 타이틀 게임 출전을 이루어냈고, 1954년과 1955년에 연패를 달성했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팀 창설 10년 동안, 브라운스는 매년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처음 4번은 AAFC)하여 7번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시즌 개막 전에, 오토 그레이엄이 부상으로 은퇴하자, 3명의 QB, 조지 라터먼, 베이브 파릴리, 토미 오코넬이 기용되었지만, 모두 터치다운보다 인터셉트 횟수가 많았고, 팀은 5승 7패로 처음으로 졌다.
1957년 드래프트에서 시라큐스 대학교의 풀백, 짐 브라운을 획득했다. 짐 브라운은 1년차부터 12경기에서 942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고, 또한 루키 오브 더 이어에 빛났다. 팀은 9승 2패 1무로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했지만, 2명의 QB, 토미 오코넬과 밀트 플럼이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에게 6번의 턴오버를 허용하며 14-59로 대패했다. 1958년, 짐 브라운은 다른 러닝백 전체의 거의 2배 이상인 1527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다. 브라운은 선수 생활 9년 중 7번 1000야드 러셔가 되었지만, 그동안 팀이 우승한 것은 1964년 한 번뿐이었다.
1961년, 아트 모델이, 1953년부터 구단주를 맡고 있던 데이비드 존스에게서 팀을 인수했다. 1962년, 시즌 7승 6패 1무의 성적을 거두자, 이듬해 1963년 1월 9일, 헤드 코치를 맡았던 폴 브라운과의 계약 해지가 아트 모델을 비롯한 과반수 구단주의 지지로 결정되었다. 결정에 이르는 논의는 지방 신문의 파업 중에 진행되었고,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클리블랜드의 스포츠 작가 프랭크 기번스는 계약 해지에 대해, "터미널 타워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높은 빌딩)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72] 후임 헤드 코치로는 브라운 밑에서 오랫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블랜턴 콜리어가 취임했다.
1963년에 팀은 10승 4패, 짐 브라운은 1863야드를 달렸다. 1964년에는 10승 3패 1무로 7년 만에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 볼티모어 콜츠를 27-0으로 꺾었다. 이 경기의 MVP는 3번의 터치다운 패스 리시브를 기록한 게리 콜린스가 선정되었다. 1965년, 짐 브라운의 은퇴 후 1968년, 1969년에도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이루지 못했다.
2. 1. 1. AAFC 시절 (1946-1949)
1946년, NFL에 대항하여 창설된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ll-America Football Conference / AAFC)의 일원으로서 아서 B. 맥브라이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도 같은 해에 창설되어 AAFC에 참가했다.
팀명은 처음 클리블랜드의 신문 플레인 딜러에서 실시된 투표에서 "팬서스"가 선정되었지만, 과거에 "클리블랜드 팬서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존재했고, 지역 사업가가 그 이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169]。팀은 별도로 팀명 명명 콘테스트를 실시, 헤드 코치인 폴 브라운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스'''"가 되었다. 브라운은, 실제로는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를 딴 "브라운 봄버스"가 가장 많은 득표수였지만, 나중에 철회되어 브라운 자신의 이름을 따는 것을 승낙했다고 말했다[169][170]。AAFC는 4년간 존속한 후 NFL에 통합되었지만, 브라운스는 4시즌 모두에서 챔피언십을 획득, 4시즌 통틀어 4패밖에 하지 않았다.
- 1949년: 리그 우승
- 1948년: 리그 우승
- 1947년: 리그 우승
- 1946년: 리그 우승
2. 1. 2. NFL 합류와 초창기 (1950-1969)
1946년, NFL에 대항하여 창설된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ll-America Football Conference / AAFC)의 일원으로서 아서 B. 맥브라이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도 같은 해에 창설되어 AAFC에 참가했다.
팀명은 처음 클리블랜드의 신문 플레인 딜러에서 실시된 투표에서 "팬서스"가 선정되었지만, 과거에 "클리블랜드 팬서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존재했고, 지역 사업가가 그 이름의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169]。팀은 별도로 팀명 명명 콘테스트를 실시, 헤드 코치인 폴 브라운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스'''"가 되었다. 브라운은, 실제로는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를 딴 "브라운 봄버스"가 가장 많은 득표수였지만, 나중에 철회되어 브라운 자신의 이름을 따는 것을 승낙했다고 말했다.[169][170]。AAFC는 4년간 존속한 후 NFL에 통합되었지만, 브라운스는 4시즌 모두에서 챔피언십을 획득, 4시즌 통틀어 4패밖에 하지 않았다.
NFL과 AAFC의 합병 후, 브라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및 볼티모어 콜츠와 함께 1950년에 NFL로 이동했다. 비평가들은 AAFC의 전반적인 약세가 브라운스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라운스는 첫 NFL 공식 경기에서, 2년 연속 NFL 챔피언이었던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상대로 패스로 346야드, 총 487야드를 획득, 35 대 10으로 승리했다.[171]。그리고 첫 해 NFL 챔피언십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루 그로자의 필드 골로 로스앤젤레스 램스를 꺾고 우승했다. 브라운스는 이어진 5번의 타이틀 게임 출전을 이루어냈고, 1954년과 1955년에 연패를 달성했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팀 창설 10년 동안, 브라운스는 매년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처음 4번은 AAFC)하여 7번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시즌 개막 전에, 오토 그레이엄이 부상으로 은퇴하자, 3명의 QB, 조지 라터먼, 베이브 파릴리, 토미 오코넬이 기용되었지만, 모두 터치다운보다 인터셉트 횟수가 많았고, 팀은 5승 7패로 처음으로 졌다.
1957년 드래프트에서 시라큐스 대학교의 풀백, 짐 브라운을 획득했다. 짐 브라운은 1년차부터 12경기에서 942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고, 또한 루키 오브 더 이어에 빛났다. 팀은 9승 2패 1무로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했지만, 2명의 QB, 토미 오코넬과 밀트 플럼이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에게 6번의 턴오버를 허용하며 14-59로 대패했다. 1958년, 짐 브라운은 다른 러닝백 전체의 거의 2배 이상인 1527야드를 달려 리딩 러셔가 되었다. 브라운은 선수 생활 9년 중 7번 1000야드 러셔가 되었지만, 그동안 팀이 우승한 것은 1964년 한 번뿐이었다.
1961년, 아트 모델이, 1953년부터 구단주를 맡고 있던 데이비드 존스에게서 팀을 인수했다. 1962년, 시즌 7승 6패 1무의 성적을 거두자, 이듬해 1963년 1월 9일, 헤드 코치를 맡았던 폴 브라운과의 계약 해지가 아트 모델을 비롯한 과반수 구단주의 지지로 결정되었다. 결정에 이르는 논의는 지방 신문의 파업 중에 진행되었고,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 클리블랜드의 스포츠 작가 프랭크 기번스는 계약 해지에 대해, "터미널 타워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높은 빌딩)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72]。후임 헤드 코치로는 브라운 밑에서 오랫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블랜턴 콜리어가 취임했다.
1963년에 팀은 10승 4패, 짐 브라운은 1863야드를 달렸다. 1964년에는 10승 3패 1무로 7년 만에 챔피언십 게임에 출전, 볼티모어 콜츠를 27-0으로 꺾었다. 이 경기의 MVP는 3번의 터치다운 패스 리시브를 기록한 게리 콜린스가 선정되었다. 1965년, 짐 브라운의 은퇴 후 1968년, 1969년에도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이루지 못했고, 1970년 시즌 종료 후 콜리어 헤드 코치는 사임, 오펜스 코디네이터인 닉 스콜리치가 신임 헤드 코치가 되었다.
2. 2. 격동의 시대 (1970-1995)
1970 시즌 전에 AFL과 내셔널 풋볼 리그(NFL)이 합병되면서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AFC)의 일부가 되었다. 브라운스는 1971년과 1972년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평범한 팀으로 전락했다.[25] 1973년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1974년에는 쿼터백으로 마이크 피프스와 루키인 브라이언 사이프가 기용되었지만, 두 사람의 합산 터치다운 패스는 10회였던 반면 인터셉션은 24회나 기록했다. 수비 역시 리그 최악인 344실점으로 팀은 4승 10패로 부진했다. 스콜리치는 해임되었고, 1975년부터 포레스트 그레그가 헤드 코치가 되었다.1975년, 정규 시즌은 개막 후 9연패를 기록했지만, 신시내티 벵갈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고, 그 3주 후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경기에서는 3년차 RB 그렉 풀리트가 214야드를 달리며 활약하여 팀은 3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1976년에는 개막전에서 승리했지만, 에이스 쿼터백 마이크 피프스가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었고, 이후 3연패를 기록했지만, 백업 쿼터백 브라이언 사이프가 활약을 보이며, 10월 10일에는 2년 연속 슈퍼볼 우승을 달성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18-16으로 꺾는 등, 최종적으로 9승 5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우수 코치상을 수상했고, 그렉 풀리트도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
1977년에도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브라이언 사이프가 11월 13일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잭 램버트의 히트를 받아 부상당했고, 마지막 5경기에서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해 6승 8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종 주 게임 전에 해고되었고, 딕 마제로우스키가 임시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8년부터 샘 라티글리아노가 헤드 코치가 되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쿼터백 사이프가 2900야드를 던져 21TD 패스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고, 러닝백 그렉 풀리트, 마이크 풀리트가 둘이 합쳐 2500야드를 달렸지만, 패스 수비에서 약점을 보여 8승 8패로 시즌을 마쳤다.
쿼터백 브라이언 시페가 막판 승리를 연출하면서 1979년과 1980년에 일종의 부활이 일어났고, 브라운스는 "카디악 키즈"라고 불리게 되었다.[25] 1979년 시즌에는 개막부터 4연승을 거두었다. 이 중 3경기는 종료 1분 또는 연장전에서 승리했다.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는 경기가 이어진 팀은 "카디악 키즈"라고 불렸다. 사이프는 스티브 글로건과 함께 리그 최다인 28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지만, 26개의 인터셉션 역시 리그 최다였다. 마이크 풀리트는 1294야드를 달려 프로볼에 선정되었지만, 수비는 여전히 약점이었고 특히 런 디펜스는 리그 최저였으며, 팀은 9승 7패로 휴스턴 오일러스,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이어 지구 3위로 시즌을 마쳤다.
1980년에는 사이프가 4000야드가 넘는 패스를 던져 30TD 패스, 인터셉션 14회로 시즌 MVP로 선정되었다. 11승 5패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8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12-14로 아쉽게 패했다[173]。 그러나 시페 아래에서 브라운스는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를 넘지 못했다.[25]
1981년, 샌디에고 차저스와의 개막전이었던 먼데이 나잇 풋볼에서 사이프는 57개의 패스를 던졌지만, 14-44로 패배했다[174]。 이 해, 사이프는 터치다운 패스 17회, 인터셉션 25회로 마쳤으며,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이 패스 리시브로 1004야드를 획득, 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프로볼에 선정된 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1982년에는 사이프와 폴 맥도날드 두 사람이 선발 쿼터백으로 기용되었다. 파업으로 단축된 이 시즌은 4승 5패에 그쳤지만, 확대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1983년에는 사이프가 부활하여 26TD 패스를 던져 3566야드를 획득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184야드를 달려 10TD를 기록했다. 연장전에서 2번의 승리를 거두는 등 접전을 잘 치렀지만 9승 7패로 아쉽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4년은 재건의 해가 되었다. 쿼터백 사이프는 USFL로 이적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984년 시즌 종료 후 버팔로 빌스로 이적했다. 시즌 1승 7패가 되자 라티글리아노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마티 쇼튼하이머가 남은 경기를 지휘하여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1985년에 브라운스가 드래프트한 쿼터백 버니 코사는 1980년대 후반에 팀을 세 번의 AFC 챔피언십 경기로 이끌었지만, 매번 덴버 브롱코스에게 패했다.[25][26][27]
1985년, 브라운스는 마이애미 대학교의 쿼터백, 버니 코저를 서플리멘탈 드래프트로 영입했다. 코저는 시즌 중반에 게리 다니엘슨을 제치고 선발 자리를 차지했다. 코저는 선발 출전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승리했고, 젊은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 케빈 맥은 모두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175]。8승 8패였지만 지구 우승을 차지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한때 21-3으로 앞섰지만 후반에 들어서 댄 마리노가 이끄는 돌핀스의 공격에 터치다운 3개를 내주며 21-24로 역전패를 당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팀은 5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출전했지만 그 중 3번은 덴버 브롱코스에게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패했다.
1986년에는 코저가 패스를 3854야드 던졌고, 수비에서는 5명 (칩 뱅크스, 핸포드 딕슨, 밥 고릭, 클레이 매튜스 주니어, 프랭크 미니필드)이 프로볼에 선출되는 활약을 펼쳐 AFC 최고인 12승 4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홈 필드 어드밴티지를 확보했다. 뉴욕 제츠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남은 4분에서 10-20으로 뒤쳐져 3번째 다운에서 24야드가 남은 위기에 처했지만 마크 개스티노의 러핑 더 패서 반칙으로, 퍼스트 다운을 획득, 그 후 케빈 맥이 TD 런을 성공시키고, 제츠의 공격을 3번 만에 수비가 막아냈으며, 타임 아웃 없이 5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코저가 웹스터 슬로터에게 패스, 남은 7초에 마크 모즐리[176] 가 동점 FG를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 들어서 모즐리는 FG를 한 번 실패했지만, 더블 연장전 끝에 다시 모즐리에게 기회가 돌아와 결승 FG가 성공되면서 브라운스가 승리했다[177][178]。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남은 5분 11초에 상대 공격에 대해 자진 2야드 지점에서 공격을 시작했지만, 존 엘웨이의 이후 '''더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플레이로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전에서 상대 키커 리치 칼리스의 FG가 성공되면서 시즌을 마쳤다.
1987년에도 코저는 3000야드 이상을 던졌고, 터치다운 패스 22개를 기록했다. 프로볼에는 코저, 맥, 딕슨, 고릭, 미니필드, 매튜스, 와이드 리시버 제럴드 맥닐, 오펜스 라인의 Cody Risien이 선출되었다. 10승 5패로 시즌을 마친 팀은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를 38-21로 꺾고 2년 연속 브롱코스와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맞붙었다. 전반전에서 3-21로 뒤졌지만 3쿼터에 코저가 어니스트 바이너, 레지 란혼에게 TD 패스를 성공시키고, 4쿼터 초반에 웹스터 슬로터에게 4야드 TD 패스가 성공되면서 경기는 31-31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브롱코스는 새미 와인더가 TD를 기록하며 다시 앞서나갔지만 5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있었고 브라운스는 1분 12초를 남겨두고 적진 8야드까지 진출한 후 어니스트 바이너에게 볼을 넘겨 오픈으로 달리게 했다. 이 플레이 ('''더 펌블'''이라고 불리게 됨)에서 바이너는 상대 선수의 태클을 받고 펌블을 범했다. 그 후 브롱코스는 의도적으로 세이프티를 내주었고, 브라운스는 33-38로 패했다[179]。
1988년에는 코저가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개막전에서 부상,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시즌 후반에 결장했다. 코저가 선발 출전한 경기는 6승 3패였고, 다른 쿼터백이 선발 출전한 경기는 4승 3패, 최종 주에 눈보라 속에서, 지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휴스턴 오일러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10승 6패로 시즌을 마치고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80]。플레이오프는 오일러스와 홈에서의 재경기였지만 선발 쿼터백 돈 스트록이 부상으로 퇴장한 후 마이크 페이겔이 등장하여 터치다운으로 따라붙었지만, 마지막 온사이드 킥 3번의 기회 (오일러스의 반칙으로 인해 다시 킥을 함)를 살리지 못하고 23-24로 패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마티 쇼텐하이머 헤드 코치는 팀을 떠나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헤드 코치가 되었고, 후임에는 버드 카슨이 취임했다.
1989년, 부상에서 복귀한 코저가 16경기 모두 선발 출전했다[180]。팀은 7승 3패에서 무승부를 포함하여 3연패를 하면서 플레이오프 출전이 위태로웠지만 마지막 2경기에 승리하여 9승 6패 1무로 시즌을 마쳤고, 9승 7패를 기록한 같은 지구의 오일러스, 스틸러스보다 앞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버펄로 빌스와 대결, 짐 켈리가 경기 마지막 플레이에서 TD를 노린 패스를 클레이 매튜스가 인터셉트하여 34-30으로 승리했다. 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시종일관 리드를 내주며 21-37로 패했다.
1990년에는 코저가 데뷔 후 처음으로 인터셉션 수 (15)가 터치다운 수 (10)보다 많은 숫자를 기록했고, 러싱 오펜스는 리그 최하위, 러싱 디펜스도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여 3승 13패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2승 7패가 되자 카슨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잠정 헤드 코치로 짐 쇼프너가 취임했지만 시즌 남은 7경기 중 1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끝났으며, 1991년부터의 헤드 코치로는 디펜스 코디네이터인 빌 벨리치크가 승격되었다.
1991년, 팀 성적은 6승 10패로 마쳤고, 코저의 성적도 18 터치다운, 9 인터셉션으로 개선되었다. 이 해 러닝백 리로이 호드가 브레이크했다.
1992년에는 코저가 시즌 대부분을 사이드라인에서 보냈고 마이크 톰자크가 선발 출전했다. 팀은 AFC 중부 지구 우승 경쟁에 참가했지만 마지막 3경기를 모두 져서 7승 9패로 마쳤다.
1993년, 벨리치크는 코저를 방출하고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선발 쿼터백이었던 비니 테스타버디를 영입했다. 팀은 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테스타버디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백업 쿼터백 토드 필콕스가 대타를 맡았지만 마지막 9경기 중 2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7승 9패로 시즌을 마쳤다. 한편 팀을 떠난 코저는 이 해에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입단, 슈퍼볼 링을 얻었다.
1994년, 쿼터백은 팀의 약점이었지만, 디펜스는 1 플레이당 상대 공격에 허용한 평균 야드가 NFL 최소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프로볼에 4명의 선수 (롭 버넷, 페퍼 존슨, 마이클 딘 페리, 에릭 터너)를 보냈다. 팀은 11승 5패로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출전,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에서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드류 블레드소를 디펜스가 3번 삭 (sacks, 태클)하여 20-13으로 꺾었지만,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같은 지구의 라이벌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9-29로 패했다. 이 해, 전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쿼터백 마크 리핀과 계약했지만, 1년 만에 세인트루이스 램스로 이적했다.
1995년 11월 6일, 구단주인 아트 모델은 1996년부터, 1983년까지 콜츠가 프랜차이즈를 두었던 볼티모어로 팀을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7일, 클리블랜드 시의회는 1억 7500만 달러를 들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을 개축하기로 결정했지만, 모델의 구상으로는 스타디움을 철거하고 새 스타디움 건설에 3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계산되었다.
브라운스의 팬들은 이 소식에 분노하여 100건 이상의 소송이 클리블랜드 시 등을 상대로 제기되었다. 지역 출신인 드류 캐리는 11월 26일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이전을 막기 위한 팬들의 집회를 열었다. 이전 반대 운동은 라이벌 스틸러스의 지역인 피츠버그에서도 진행되었다. 게다가 팀 스폰서도 이 움직임에 동참하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에서 광고를 철수했다.
이 시즌, 팀은 3승 1패로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전 발표 전 3경기에 연패했고, 발표 후의 성적은 2승 7패,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지역에서의 마지막 경기에는 경비원과 경찰관이 대거 동원되어 불상사에 대비했다. 팀은 홈 최종전이었던 신시내티 벵갈스전에서 승리했다.
이후에도 NFL, 브라운스, 클리블랜드와 볼티모어 양 시 사이에서 협의가 계속되었고, 1996년 2월, "브라운스의 이름, 팀 컬러, 역사, 기록 등은 클리블랜드에 남겨두고[181], 3년 후인 1999년에 신 스타디움 완공과 함께 익스팬션 팀으로 부활시키고, 볼티모어에 생기는 팀은 신생 팀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모델의 팀은 볼티모어로 이전하여 볼티모어 레이븐스가 되었고, 로스터에 있는 선수들은 그대로 신 구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2. 2. 1. 카디악 키즈와 좌절 (1970-1984)
1970 시즌 전에 AFL과 내셔널 풋볼 리그(NFL)이 합병되면서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AFC)의 일부가 되었다. 브라운스는 1971년과 1972년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1970년대 중반에는 평범한 팀으로 전락했다.[25]1971년, NFL과 AFL이 통합된 후 첫 시즌이었던 해에 AFC 중부 지구에서 우승했으며, 1972년에는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1973년에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1974년에는 쿼터백으로 마이크 피프스와 루키인 브라이언 사이프가 기용되었지만, 두 사람의 합산 터치다운 패스는 10회였던 반면 인터셉션은 24회나 기록했다. 수비 역시 리그 최악인 344실점으로 팀은 4승 10패로 부진했다. 스콜리치는 해임되었고, 1975년부터 포레스트 그레그가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5년, 정규 시즌은 개막 후 9연패를 기록했지만, 신시내티 벵갈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고, 그 3주 후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경기에서는 3년차 RB 그렉 풀리트가 214야드를 달리며 활약하여 팀은 3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1976년에는 개막전에서 승리했지만, 에이스 쿼터백 마이크 피프스가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었고, 이후 3연패를 기록했지만, 백업 쿼터백 브라이언 사이프가 활약을 보이며, 10월 10일에는 2년 연속 슈퍼볼 우승을 달성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18-16으로 꺾는 등, 최종적으로 9승 5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우수 코치상을 수상했고, 그렉 풀리트도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
1977년에도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유지했지만, 브라이언 사이프가 11월 13일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잭 램버트의 히트를 받아 부상당했고, 마지막 5경기에서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해 6승 8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그레그 헤드 코치는 최종 주 게임 전에 해고되었고, 딕 마제로우스키가 임시 헤드 코치가 되었다.
1978년부터 샘 라티글리아노가 헤드 코치가 되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쿼터백 사이프가 2900야드를 던져 21TD 패스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고, 러닝백 그렉 풀리트, 마이크 풀리트가 둘이 합쳐 2500야드를 달렸지만, 패스 수비에서 약점을 보여 8승 8패로 시즌을 마쳤다.
쿼터백 브라이언 시페가 막판 승리를 연출하면서 1979년과 1980년에 일종의 부활이 일어났고, 브라운스는 "카디악 키즈"라고 불리게 되었다.[25]
1979년 시즌에는 개막부터 4연승을 거두었다. 이 중 3경기는 종료 1분 또는 연장전에서 승리했다.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는 경기가 이어진 팀은 "카디악 키즈"라고 불렸다. 사이프는 스티브 글로건과 함께 리그 최다인 28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했지만, 26개의 인터셉션 역시 리그 최다였다. 마이크 풀리트는 1294야드를 달려 프로볼에 선정되었지만, 수비는 여전히 약점이었고 특히 런 디펜스는 리그 최저였으며, 팀은 9승 7패로 휴스턴 오일러스,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이어 지구 3위로 시즌을 마쳤다.
1980년에는 사이프가 4000야드가 넘는 패스를 던져 30TD 패스, 인터셉션 14회로 시즌 MVP로 선정되었다. 11승 5패로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8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오클랜드 레이더스에게 12-14로 아쉽게 패했다[173]。
그러나 시페 아래에서 브라운스는 플레이오프 첫 라운드를 넘지 못했다.[25]
1981년, 샌디에고 차저스와의 개막전이었던 먼데이 나잇 풋볼에서 사이프는 57개의 패스를 던졌지만, 14-44로 패배했다[174]。 이 해, 사이프는 터치다운 패스 17회, 인터셉션 25회로 마쳤으며,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이 패스 리시브로 1004야드를 획득, 6개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프로볼에 선정된 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1982년에는 사이프와 폴 맥도날드 두 사람이 선발 쿼터백으로 기용되었다. 파업으로 단축된 이 시즌은 4승 5패에 그쳤지만, 확대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1983년에는 사이프가 부활하여 26TD 패스를 던져 3566야드를 획득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184야드를 달려 10TD를 기록했다. 연장전에서 2번의 승리를 거두는 등 접전을 잘 치렀지만 9승 7패로 아쉽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4년은 재건의 해가 되었다. 쿼터백 사이프는 USFL로 이적했고, 마이크 풀리트도 1984년 시즌 종료 후 버팔로 빌스로 이적했다. 시즌 1승 7패가 되자 라티글리아노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마티 쇼튼하이머가 남은 경기를 지휘하여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2. 2. 2. 버니 코사의 시대 (1985-1995)
1985년, 브라운스는 마이애미 대학교의 쿼터백, 버니 코저를 서플리멘탈 드래프트로 영입했다. 코저는 시즌 중반에 게리 다니엘슨을 제치고 선발 자리를 차지했다. 코저는 선발 출전한 6경기 중 4경기에서 승리했고, 젊은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 케빈 맥은 모두 1000야드 러셔가 되었다[175]。8승 8패였지만 지구 우승을 차지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한때 21-3으로 앞섰지만 후반에 들어서 댄 마리노가 이끄는 돌핀스의 공격에 터치다운 3개를 내주며 21-24로 역전패를 당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팀은 5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출전했지만 그 중 3번은 덴버 브롱코스에게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패했다.1986년에는 코저가 패스를 3854야드 던졌고, 수비에서는 5명 (칩 뱅크스, 핸포드 딕슨, 밥 고릭, 클레이 매튜스 주니어, 프랭크 미니필드)이 프로볼에 선출되는 활약을 펼쳐 AFC 최고인 12승 4패로 플레이오프에서 홈 필드 어드밴티지를 확보했다. 뉴욕 제츠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는 남은 4분에서 10-20으로 뒤쳐져 3번째 다운에서 24야드가 남은 위기에 처했지만 마크 개스티노의 러핑 더 패서 반칙으로, 퍼스트 다운을 획득, 그 후 케빈 맥이 TD 런을 성공시키고, 제츠의 공격을 3번 만에 수비가 막아냈으며, 타임 아웃 없이 51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코저가 웹스터 슬로터에게 패스, 남은 7초에 마크 모즐리[176] 가 동점 FG를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 들어서 모즐리는 FG를 한 번 실패했지만, 더블 연장전 끝에 다시 모즐리에게 기회가 돌아와 결승 FG가 성공되면서 브라운스가 승리했다[177][178]。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남은 5분 11초에 상대 공격에 대해 자진 2야드 지점에서 공격을 시작했지만, 존 엘웨이의 이후 '''더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플레이로 동점을 허용했고, 연장전에서 상대 키커 리치 칼리스의 FG가 성공되면서 시즌을 마쳤다.
1987년에도 코저는 3000야드 이상을 던졌고, 터치다운 패스 22개를 기록했다. 프로볼에는 코저, 맥, 딕슨, 고릭, 미니필드, 매튜스, 와이드 리시버 제럴드 맥닐, 오펜스 라인의 Cody Risien이 선출되었다. 10승 5패로 시즌을 마친 팀은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를 38-21로 꺾고 2년 연속 브롱코스와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맞붙었다. 전반전에서 3-21로 뒤졌지만 3쿼터에 코저가 어니스트 바이너, 레지 란혼에게 TD 패스를 성공시키고, 4쿼터 초반에 웹스터 슬로터에게 4야드 TD 패스가 성공되면서 경기는 31-31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브롱코스는 새미 와인더가 TD를 기록하며 다시 앞서나갔지만 5분 남짓한 시간이 남아있었고 브라운스는 1분 12초를 남겨두고 적진 8야드까지 진출한 후 어니스트 바이너에게 볼을 넘겨 오픈으로 달리게 했다. 이 플레이 ('''더 펌블'''이라고 불리게 됨)에서 바이너는 상대 선수의 태클을 받고 펌블을 범했다. 그 후 브롱코스는 의도적으로 세이프티를 내주었고, 브라운스는 33-38로 패했다[179]。
1988년에는 코저가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개막전에서 부상, 그 부상이 원인이 되어 시즌 후반에 결장했다. 코저가 선발 출전한 경기는 6승 3패였고, 다른 쿼터백이 선발 출전한 경기는 4승 3패, 최종 주에 눈보라 속에서, 지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휴스턴 오일러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10승 6패로 시즌을 마치고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80]。플레이오프는 오일러스와 홈에서의 재경기였지만 선발 쿼터백 돈 스트록이 부상으로 퇴장한 후 마이크 페이겔이 등장하여 터치다운으로 따라붙었지만, 마지막 온사이드 킥 3번의 기회 (오일러스의 반칙으로 인해 다시 킥을 함)를 살리지 못하고 23-24로 패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마티 쇼텐하이머 헤드 코치는 팀을 떠나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헤드 코치가 되었고, 후임에는 버드 카슨이 취임했다.
1989년, 부상에서 복귀한 코저가 16경기 모두 선발 출전했다[180]。팀은 7승 3패에서 무승부를 포함하여 3연패를 하면서 플레이오프 출전이 위태로웠지만 마지막 2경기에 승리하여 9승 6패 1무로 시즌을 마쳤고, 9승 7패를 기록한 같은 지구의 오일러스, 스틸러스보다 앞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버펄로 빌스와 대결, 짐 켈리가 경기 마지막 플레이에서 TD를 노린 패스를 클레이 매튜스가 인터셉트하여 34-30으로 승리했다. 브롱코스와의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시종일관 리드를 내주며 21-37로 패했다.
1990년에는 코저가 데뷔 후 처음으로 인터셉션 수 (15)가 터치다운 수 (10)보다 많은 숫자를 기록했고, 러싱 오펜스는 리그 최하위, 러싱 디펜스도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여 3승 13패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2승 7패가 되자 카슨 헤드 코치는 해임되었고 잠정 헤드 코치로 짐 쇼프너가 취임했지만 시즌 남은 7경기 중 1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끝났으며, 1991년부터의 헤드 코치로는 디펜스 코디네이터인 빌 벨리치크가 승격되었다.
1991년, 팀 성적은 6승 10패로 마쳤고, 코저의 성적도 18 터치다운, 9 인터셉션으로 개선되었다. 이 해 러닝백 리로이 호드가 브레이크했다.
1992년에는 코저가 시즌 대부분을 사이드라인에서 보냈고 마이크 톰자크가 선발 출전했다. 팀은 AFC 중부 지구 우승 경쟁에 참가했지만 마지막 3경기를 모두 져서 7승 9패로 마쳤다.
1993년, 벨리치크는 코저를 방출하고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선발 쿼터백이었던 비니 테스타버디를 영입했다. 팀은 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테스타버디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백업 쿼터백 토드 필콕스가 대타를 맡았지만 마지막 9경기 중 2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7승 9패로 시즌을 마쳤다. 한편 팀을 떠난 코저는 이 해에 댈러스 카우보이스에 입단, 슈퍼볼 링을 얻었다.
1994년, 쿼터백은 팀의 약점이었지만, 디펜스는 1 플레이당 상대 공격에 허용한 평균 야드가 NFL 최소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프로볼에 4명의 선수 (롭 버넷, 페퍼 존슨, 마이클 딘 페리, 에릭 터너)를 보냈다. 팀은 11승 5패로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출전, 와일드카드 플레이오프에서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드류 블레드소를 디펜스가 3번 삭 (sacks, 태클)하여 20-13으로 꺾었지만, 디비전 플레이오프에서 같은 지구의 라이벌인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9-29로 패했다. 이 해, 전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쿼터백 마크 리핀과 계약했지만, 1년 만에 세인트루이스 램스로 이적했다.
1995년 11월 6일, 구단주인 아트 모델은 1996년부터, 1983년까지 콜츠가 프랜차이즈를 두었던 볼티모어로 팀을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7일, 클리블랜드 시의회는 1억 7500만 달러를 들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을 개축하기로 결정했지만, 모델의 구상으로는 스타디움을 철거하고 새 스타디움 건설에 3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계산되었다.
브라운스의 팬들은 이 소식에 분노하여 100건 이상의 소송이 클리블랜드 시 등을 상대로 제기되었다. 지역 출신인 드류 캐리는 11월 26일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이전을 막기 위한 팬들의 집회를 열었다. 이전 반대 운동은 라이벌 스틸러스의 지역인 피츠버그에서도 진행되었다. 게다가 팀 스폰서도 이 움직임에 동참하여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에서 광고를 철수했다.
이 시즌, 팀은 3승 1패로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전 발표 전 3경기에 연패했고, 발표 후의 성적은 2승 7패,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다. 지역에서의 마지막 경기에는 경비원과 경찰관이 대거 동원되어 불상사에 대비했다. 팀은 홈 최종전이었던 신시내티 벵갈스전에서 승리했다.
이후에도 NFL, 브라운스, 클리블랜드와 볼티모어 양 시 사이에서 협의가 계속되었고, 1996년 2월, "브라운스의 이름, 팀 컬러, 역사, 기록 등은 클리블랜드에 남겨두고[181], 3년 후인 1999년에 신 스타디움 완공과 함께 익스팬션 팀으로 부활시키고, 볼티모어에 생기는 팀은 신생 팀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모델의 팀은 볼티모어로 이전하여 볼티모어 레이븐스가 되었고, 로스터에 있는 선수들은 그대로 신 구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2. 3. 재창단과 암흑기 (1999-현재)
1995년, 아트 모델 구단주는 브라운스를 볼티모어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하여 클리블랜드 팬들의 분노를 샀다.[28] 협상과 법적 공방 끝에 모델은 자신의 인력을 볼티모어 레이븐스라는 확장 프랜차이즈로 데려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29] 클리블랜드에는 1999년까지 재활성화될 브라운스 프랜차이즈를 위해 브라운스의 색상, 로고, 유산을 남기기로 합의했다.[30]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헌팅턴 뱅크 필드(당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스타디움)가 건설되면서 3년 동안 활동이 중단된 후, 브라운스는 재활성화되어 1999년에 새로운 구단주 알 러너 아래에서 다시 경기를 시작했다.[37] 1998년에 NFL은 신생 팀의 구단주가 될 알 러너에게 5억 3,000만 달러에 프랜차이즈를 매각했는데, 이는 북미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액이었다.[182] 1999년, 팀은 CEO로 카르멘 폴리시, 제너럴 매니저로 드와이트 클라크를 영입했다. 또한 재규어스의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크리스 파머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영입했다. 팀은 확장 드래프트,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를 영입했으며, 1999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쿼터백(QB) 팀 카우치, 2000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수비 엔드(DE) 코트니 브라운을 지명했다.[183] 헤드 코치 크리스 팔머 아래에서 브라운스는 1999년에 2–14, 2000년에 3–13의 성적을 기록했다.[38] 이 해, 볼티모어 레이븐스(이 해에도 이전 브라운스에서 뛰었던 맷 스토버, 롭 바넷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가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제35회 슈퍼볼에서 우승하면서 팬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2001년 팀은 7승 9패로 마쳤다. 이 해 GM인 클라크는 사임했고, 데이비스 헤드 코치가 GM 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2002년 시즌에는 지구 재편성이 있어, AFC 북부 지구 4팀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 10월 23일, 알 러너 구단주가 사망하고, 아들인 랜디 러너가 구단주가 되었다.[182] 팀은 9승 7패로 와일드카드를 획득하여 1994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33-21로 앞서고 있었지만 33-36으로 패했다.
이후 브라운스는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고전하여 1999년 복귀 이후 101–234–1의 저조한 기록을 세웠다.[39] 브라운스는 NFL로 복귀한 이후 4번의 승리 시즌과 3번의 플레이오프 진출(2002년, 2020년, 2023년)만을 기록했다.[39]
2003년, 2004년은 모두 패배로 시즌을 마쳤다. 2004년 3승 8패가 된 시점에서 데이비스 헤드 코치가 사임[184]했고, 오펜스 코디네이터인 테리 로비스키가 임시 헤드 코치가 되었다. 2004년 드래프트 4라운드에서 쿼터백 루크 매카운을 지명했다.
2005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수비 코디네이터로 크리스 팔머 밑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던 로메오 크레넬이 신임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 2005년, 팀은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185] 2005년 시즌 최종전에는 구단 사장인 존 콜린스가 단장인 필 새비지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이듬해 1월 3일에 팀을 떠난 것은 사장인 콜린스였다.[186] 이때 러너 구단주가 CEO를 겸임하게 되었다.
2006년은 6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187]
2007년, 팀은 다시 태어났다. 개막전에서 스틸러스에 34-7로 승리하고 선발 쿼터백이었던 찰리 프라이를 시애틀 시호크스로 트레이드[188]하면서, 데릭 앤더슨이 에이스 쿼터백이 되었다. 앤더슨은 신시내티 벵갈스와의 경기에서 팀 타이 기록인 5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하며 팀은 51-45로 승리했다. 팀은 1994년 이후 최고 성적인 10승 6패를 기록했지만[189] 승자승에서 밀려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thumb|200px|와이드 리시버 브라이론 에드워즈]]
2008년, 팀은 지구 우승을 기대했다. 제42회 슈퍼볼 챔피언인 뉴욕 자이언츠를 꺾었지만,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4승 12패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와 함께 새비지 단장과 크레넬 헤드 코치가 해임되었고, 2009년 1월, 조지 코키니스가 단장으로[191], 뉴욕 제츠의 헤드 코치였던 에릭 망기니가 신임 헤드 코치로 영입되어 4년 계약을 맺었다.[192]
2009년 12월 20일의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경기에서 제롬 해리슨이 짐 브라운의 팀 기록을 갱신하는 286야드를 질주했고[193], 또한 조쉬 크립스가 킥오프 리턴으로 2 터치다운을 기록하여 통산 8 킥오프 리턴으로 NFL 신기록을 세웠다.[194] 11월 2일에 조지 코키니스 단장을 해임하고, 12월에 마이크 홀름그렌이 구단 사장으로 취임했다.[195]
2010년, 시즌 오프에 팀은 데릭 앤더슨, 브래디 퀸 2명의 쿼터백을 방출하고, 제이크 데로움, 세네카 월러스를 영입했으며, 콜트 맥코이를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지명했다. 2시즌 연속 5승 11패로 시즌을 마쳤고, 망기니 헤드 코치는 해고[197]되었으며, 세인트루이스 램스의 오펜스 코디네이터였던 팻 슈머가 취임했다.[198]
2011년, 10월 23일의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경기에서는 필 도슨이 50야드 이상의 필드골을 2개 성공시켜 6-3으로 승리했다.[199] 팀은 마지막 6연패를 기록하는 등, 4승 12패로 시즌을 마쳤다.[202]

2012년 레너 가문이 사업가 지미 해슬람에게 팀을 매각한 이후 팀의 부진은 더욱 심화되었다.[40] 2012년 드래프트에서 트레이드 업을 통해 전체 3순위로 RB 트렌트 리차드슨을 지명했고, 다른 1라운드 지명권을 사용하여 QB 브랜든 위든을 지명했다[203]. 8월에 지미 하슬람이 팀을 인수하여 새로운 구단주가 되었다[204] 마이크 홈그렌 구단 사장은 물러났고, 5승 11패로 시즌을 마친 후, 팻 슈머 헤드 코치와 톰 헤커트 단장은 해임되었다[205]
2013년 1월, 캐롤라이나 팬서스의 공격 코디네이터인 롭 차진스키가 새로운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206] 또한 공격 코디네이터로 전년도까지 샌디에고 차저스의 헤드 코치를 맡았던 노브 터너가 취임했다[207] 2013년 시즌, 팀은 4승에 그치며 1년 만에 차진스키를 해임했다.
2014년에는 버팔로 빌스의 수비 코디네이터였던 마이크 페틴을 헤드 코치로 영입했고,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하이즈먼 트로피 수상자인 QB 조니 만지엘을 영입했지만 7승 9패로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2015년에는 3승 13패로 시즌을 마쳤고, 시즌 종료 후 헤드 코치와 단장이 해임되었으며, 음주와 여자친구 폭행 등 문제가 끊이지 않던 만지엘은 방출되었다.
2016년에는 신시내티 벵골스의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휴 잭슨을 헤드 코치로 영입했고, 로버트 그리핀 3세를 영입했지만 1승 15패로 또다시 지구 최하위에 머물렀고, NFL에서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핀은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2017년에도 개막전부터 연패를 이어가며 일찍이 NFL 최하위가 확정되었고, 시즌 중에 단장이 교체되었다. 정규 시즌은 16전 전패로 마쳤고, 7년 연속 지구 최하위로 마쳤다. 정규 시즌이 16경기로 치러진 이후 전패를 기록한 것은 2008년의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에 이어 두 번째 팀이다[208] 또한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을 2년 연속 획득하게 되었다[209]

2018년 NFL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여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베이커 메이필드를 지명했다.
2019 시즌 전에 프레디 키친스가 헤드 코치로 고용되었다.[73] 키친스는 팀을 6–10의 성적으로 이끌었고 시즌 후에 해고되었다.[74][75]
2020 시즌 전에 브라운스는 케빈 스테판스키를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76] 2020년 브라운스는 17주차에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꺾고 시즌을 11–5로 마무리하여 2002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8]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그들은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48–37로 꺾고 1994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77] 브라운스는 디비전 라운드에서 캔자스시티 치프스에게 22–17로 패하면서 시즌을 마쳤다.[78]
2021년에는 최종전을 남기고 지구 내 4개 팀의 승차가 3경기 이내로 혼전이 펼쳐졌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지구 3위가 되었다. 2022년 3월 18일, 데숀 와트슨과 2024년 5라운드 지명권을 2022년, 2023년, 202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2023년 3라운드 지명권, 그리고 2024년 4라운드 지명권과 교환하여 휴스턴 텍산스로부터 트레이드로 영입했다[212] 2022년 7월, 메이필드를 조건부 2024년 5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과 트레이드하여 캐롤라이나 팬서스로 보냈다[213]
2022년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영입한 와트슨이 성적 학대 문제로 시즌 초반부터 11경기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
2023년에는 6승 3패로 좋은 성적으로 진행되었지만 9경기를 마친 시점에서 와트슨이 어깨 수술로 시즌 아웃되었다[215] 이 때문에, 무소속이었던 베테랑 QB 조 플라코와 계약하여 선발로 기용하여 승리했고, 17주차에는 3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휴스턴 텍산스에 패했다.
2024년에는 부진하여 지구 최하위가 되었다.
3. 라이벌 관계
브라운스는 AFC 북부의 세 팀 모두와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 게다가, 이 팀은 덴버 브롱코스, 디트로이트 라이온스, 샌프란시스코 49ers, 휴스턴 오일러스/테네시 타이탄스와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를 맺어왔다.
=== 지구 라이벌 ===
==== 신시내티 벵갈스 ====
폴 브라운과 아트 모델 사이의 개인적인 반목 때문에 시작된 브라운스와 신시내티 벵갈스 간의 "오하이오 전투"는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의 사회 문화적 차이, 두 팀의 공유된 역사, 그리고 브라운이 브라운스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색상의 오렌지색을 벵갈스에 사용했기 때문에 비슷한 팀 색상에 의해 더욱 불붙었다. (하지만 벵갈스가 더 밝은 색상의 오렌지를 사용하면서 이후에는 변경되었다.)[107] 실제로 모델은 벵갈스와의 라이벌 관계를 갖기 위해 AFL-NFL 합병 이후 브라운스를 AFC로 옮겼다.[107] 이 라이벌 관계는 또한 NFL 역사상 11번째로 점수가 높은 두 경기를 만들어냈다.[107] 신시내티는 역대 전적에서 52승 48패로 앞서고 있다.[107] 벵갈스는 브라운스가 1999년 NFL로 복귀한 이후 28승 21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는 브라운스가 다른 지구 라이벌과의 시리즈보다 더 경쟁적이었으며, 브라운스는 최근 11번의 경기 중 9번을 승리했다.[107]
폴 브라운은 1967년 9월 26일에 AFL의 확장 팀인 신시내티 벵갈스의 주요 주주, 제너럴 매니저, 그리고 헤드 코치로 복귀했으며, 벵갈스는 1970년 NFL과 AFL의 합병으로 NFL에 가입했다. 그는 벵갈스의 헤드 코치를 8년간 역임했고, 팀 창단 3년째를 시작으로 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 시즌들에서 브라운의 벵갈스는 그의 옛 팀인 브라운스와 대결했고, 브라운과 모델 간의 격렬한 대립에 다시 불이 붙었다.
==== 볼티모어 레이븐스 ====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연고지 이전 논란의 결과로 만들어진 브라운스와 볼티모어 레이븐스 간의 라이벌 관계는 팀 자체보다는 아트 모델에게 더 집중되었으며, 볼티모어에서는 단순히 같은 지구 내의 경기 정도로 여겨진다. 이 경기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의 드래프트 픽이 2000년에 레이븐스가 슈퍼볼 XXXV에서 우승하는 로스터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다른 경기보다 클리블랜드에게 더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만약 모델이 팀을 옮기지 않았다면, 단장 겸 전 브라운스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에 의해 드래프트된 이 팀들은 35년의 가뭄 끝에 브라운스에게 우승을 안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108] 2023 시즌 기준으로, 레이븐스가 전체 전적에서 36승 14패로 앞서고 있다.[109] 두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없다.
=== 기타 라이벌 ===
==== 덴버 브롱코스 ====
더 드라이브와 더 펌블도 참조하십시오.
브라운스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세 번의 AFC 챔피언십 게임으로 인해 덴버 브롱코스와 짧은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 1986년 AFC 챔피언십에서 쿼터백 존 엘웨이는 더 드라이브를 이끌어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동점을 만들었고, 브롱코스는 연장전에서 23–20으로 승리했다. 1년 후, 두 팀은 1987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다. 덴버는 21–3으로 앞서나갔지만, 브라운스의 쿼터백 버니 코사는 4쿼터 중반에 4번의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31–31 동점을 만들었다. 긴 드라이브 끝에 존 엘웨이는 러닝백 새미 윈더에게 20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덴버가 38–31로 앞서나가게 했다. 클리블랜드는 경기 종료 1분 12초를 남기고 덴버의 8야드 라인까지 진출했지만, 브롱코스의 세이프티 제레미아 캐스틸은 2야드 라인에서 브라운스의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로부터 공을 빼앗았다. 이 플레이는 브라운스 팬들에게 더 펌블이라고 불린다. 브롱코스는 공을 회수했고, 클리블랜드에 의도적인 세이프티를 허용했으며, 38–33으로 승리했다. 두 팀은 1989년 AFC 챔피언십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고, 브롱코스가 37–21로 손쉽게 승리했다.[116]
이 짧은 라이벌 관계는 또한 1989년 정규 시즌에서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브라운스가 16–13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경기는 경기 종료와 함께 매트 바의 48야드 필드 골로 결정되었다. - 크로스바를 간신히 넘긴 킥이었다. 바의 필드 골은 톰 둘리 심판이 4쿼터 중반에 팀들에게 경기장 양쪽 끝을 바꾸도록 명령한 후에 나왔다. 이는 거친 도그 파운드 팬들이 브롱코스에게 개 비스킷, 달걀 및 기타 파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교체는 브라운스에게 경기 마무리에 유리한 작은 바람의 이점을 주었다.[116]
더 최근에는 브롱코스가 1991년부터 2015년까지 11번 연속 승리를 거두면서 라이벌 관계가 식었고, 클리블랜드는 2018년에 17–16으로 좁게 승리하여 그 연승을 깨뜨렸다. 2023 시즌 현재, 덴버가 전체 시리즈에서 25–7로 앞서고 있다.[116]
====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AAFC 시대에 가장 경쟁적인 팀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리그가 진행된 4시즌 동안 매번 브라운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브라운스가 해당 시대에 기록한 4번의 패배 중 2번은 49ers에게 패한 것이었다(브라운스의 29경기 무패 행진을 끝낸 패배 포함). 이 라이벌 관계는 NFL 시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데, 특히 1970년에 두 팀이 서로 다른 컨퍼런스로 배치된 이후였다. 이 라이벌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는데, 1999년 브라운스가 재창단될 당시 많은 49ers 출신 인물들이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전 49ers 사장 겸 CEO 카르멘 폴리와 부사장 겸 풋볼 운영 이사 드와이트 클라크가 확장된 브라운스에 같은 역할로 고용되었다. 또한, 49ers 구단주 존 요크와 데니스 데바톨로 요크는 클리블랜드에서 동남쪽으로 96.5km 거리에 위치한 영스타운에 거주한다. 브라운스의 오랜 키커이자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던 필 도슨과 백업 쿼터백 콜트 맥코이는 2014년에 49ers와 계약했다. 2023 시즌 현재, 브라운스가 20승 10패로 역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다.[117]
==== 휴스턴 오일러스/테네시 타이탄스 ====
휴스턴 오일러스/테네시 타이탄스와의 라이벌 관계는 1970년 AFL-NFL 합병 이후 브라운스와 당시 오일러스가 AFC 센트럴에 배치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두 팀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두 차례씩 경기를 치렀으며, 2002년에는 디비전 재편으로 브라운스가 AFC 북부에, 현재의 타이탄스가 AFC 사우스에 배치되었다(브라운스가 활동을 중단했던 1996-98년 제외). 2002년 이후 두 팀의 만남은 훨씬 줄어들었다. 브라운스는 전체 상대 전적에서 37승 32패로 앞서 있으며, 오일러스/타이탄스와의 69번의 만남은 클리블랜드의 상대 팀 중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신시내티 벵갈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118]
이 라이벌 관계의 정점은 1980년대였다. 오일러스의 헤드 코치 제리 글랜빌과 마티 셔튼하이머는 10년 동안 여러 번 격렬한 설전을 벌였으며, 브라운스와 오일러스는 1988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서 만났고, 오일러스가 24–23으로 신승을 거두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기억에 남는 경기가 몇 차례 있었다. 2014년에는 브라운스가 28–3으로 뒤지던 경기를 뒤집고 29–28로 승리했다. 2020년 12월, 두 팀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경기에서 브라운스는 전반에 38–7로 앞서며 구단 역사상 전반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테네시는 후반에 반격했지만, 브라운스가 41–35로 승리했다.
3. 1. 지구 라이벌
폴 브라운과 아트 모델 사이의 개인적인 반목 때문에 시작된 브라운스와 신시내티 벵갈스 간의 "오하이오 전투"는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의 사회 문화적 차이, 두 팀의 공유된 역사, 그리고 브라운이 브라운스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색상의 오렌지색을 벵갈스에 사용했기 때문에 비슷한 팀 색상에 의해 더욱 불붙었다. (하지만 벵갈스가 더 밝은 색상의 오렌지를 사용하면서 이후에는 변경되었다.)[107] 실제로 모델은 벵갈스와의 라이벌 관계를 갖기 위해 AFL-NFL 합병 이후 브라운스를 AFC로 옮겼다.[107] 이 라이벌 관계는 또한 NFL 역사상 11번째로 점수가 높은 두 경기를 만들어냈다.[107] 신시내티는 역대 전적에서 52승 48패로 앞서고 있다.[107] 벵갈스는 브라운스가 1999년 NFL로 복귀한 이후 28승 21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는 브라운스가 다른 지구 라이벌과의 시리즈보다 더 경쟁적이었으며, 브라운스는 최근 11번의 경기 중 9번을 승리했다.[107]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연고지 이전 논란의 결과로 만들어진 브라운스와 볼티모어 레이븐스 간의 라이벌 관계는 팀 자체보다는 아트 모델에게 더 집중되었으며, 볼티모어에서는 단순히 같은 지구 내의 경기 정도로 여겨진다. 이 경기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의 드래프트 픽이 2000년에 레이븐스가 슈퍼볼 XXXV에서 우승하는 로스터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다른 경기보다 클리블랜드에게 더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만약 모델이 팀을 옮기지 않았다면, 단장 겸 전 브라운스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에 의해 드래프트된 이 팀들은 35년의 가뭄 끝에 브라운스에게 우승을 안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108] 2023 시즌 기준으로, 레이븐스가 전체 전적에서 36승 14패로 앞서고 있다.[109] 두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없다.
3. 1. 1. 피츠버그 스틸러스
(요약 및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3. 1. 2. 신시내티 벵갈스
폴 브라운과 아트 모델 사이의 개인적인 반목 때문에 시작된 브라운스와 신시내티 벵갈스 사이의 "오하이오 전투"는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의 사회 문화적 차이, 두 팀의 공유된 역사, 그리고 브라운이 브라운스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색상의 오렌지색을 벵갈스에 사용했기 때문에 비슷한 팀 색상에 의해 더욱 불붙었다. (하지만 벵갈스가 더 밝은 색상의 오렌지를 사용하면서 이후에는 변경되었다.)[107] 실제로 모델은 벵갈스와의 라이벌 관계를 갖기 위해 AFL-NFL 합병 이후 브라운스를 AFC로 옮겼다.[107] 이 라이벌 관계는 또한 NFL 역사상 11번째로 점수가 높은 두 경기를 만들어냈다.[107] 신시내티는 역대 전적에서 52승 48패로 앞서고 있다.[107] 벵갈스는 브라운스가 1999년 NFL로 복귀한 이후 28승 21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 시리즈는 브라운스가 다른 지구 라이벌과의 시리즈보다 더 경쟁적이었으며, 브라운스는 최근 11번의 경기 중 9번을 승리했다.[107]폴 브라운은 1967년 9월 26일에 AFL의 확장 팀인 신시내티 벵갈스의 주요 주주, 제너럴 매니저, 그리고 헤드 코치로 복귀했으며, 벵갈스는 1970년 NFL과 AFL의 합병으로 NFL에 가입했다. 그는 벵갈스의 헤드 코치를 8년간 역임했고, 팀 창단 3년째를 시작으로 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 시즌들에서 브라운의 벵갈스는 그의 옛 팀인 브라운스와 대결했고, 브라운과 모델 간의 격렬한 대립에 다시 불이 붙었다.
3. 1. 3. 볼티모어 레이븐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연고지 이전 논란의 결과로 만들어진 브라운스와 볼티모어 레이븐스 간의 라이벌 관계는 팀 자체보다는 아트 모델에게 더 집중되었으며, 볼티모어에서는 단순히 같은 지구 내의 경기 정도로 여겨진다. 이 경기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의 드래프트 픽이 2000년에 레이븐스가 슈퍼볼 XXXV에서 우승하는 로스터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다른 경기보다 클리블랜드에게 더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만약 모델이 팀을 옮기지 않았다면, 단장 겸 전 브라운스 타이트 엔드 오지 뉴섬에 의해 드래프트된 이 팀들은 35년의 가뭄 끝에 브라운스에게 우승을 안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108] 2023 시즌 기준으로, 레이븐스가 전체 전적에서 36승 14패로 앞서고 있다.[109] 두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없다.3. 2. 기타 라이벌
더 드라이브와 더 펌블도 참조하십시오.브라운스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세 번의 AFC 챔피언십 게임으로 인해 덴버 브롱코스와 짧은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 1986년 AFC 챔피언십에서 쿼터백 존 엘웨이는 더 드라이브를 이끌어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동점을 만들었고, 브롱코스는 연장전에서 23–20으로 승리했다. 1년 후, 두 팀은 1987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다. 덴버는 21–3으로 앞서나갔지만, 브라운스의 쿼터백 버니 코사는 4쿼터 중반에 4번의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31–31 동점을 만들었다. 긴 드라이브 끝에 존 엘웨이는 러닝백 새미 윈더에게 20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덴버가 38–31로 앞서나가게 했다. 클리블랜드는 경기 종료 1분 12초를 남기고 덴버의 8야드 라인까지 진출했지만, 브롱코스의 세이프티 제레미아 캐스틸은 2야드 라인에서 브라운스의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로부터 공을 빼앗았다. 이 플레이는 브라운스 팬들에게 더 펌블이라고 불린다. 브롱코스는 공을 회수했고, 클리블랜드에 의도적인 세이프티를 허용했으며, 38–33으로 승리했다. 두 팀은 1989년 AFC 챔피언십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고, 브롱코스가 37–21로 손쉽게 승리했다.[116]
이 짧은 라이벌 관계는 또한 1989년 정규 시즌에서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브라운스가 16–13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경기는 경기 종료와 함께 매트 바의 48야드 필드 골로 결정되었다. - 크로스바를 간신히 넘긴 킥이었다. 바의 필드 골은 톰 둘리 심판이 4쿼터 중반에 팀들에게 경기장 양쪽 끝을 바꾸도록 명령한 후에 나왔다. 이는 거친 도그 파운드 팬들이 브롱코스에게 개 비스킷, 달걀 및 기타 파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교체는 브라운스에게 경기 마무리에 유리한 작은 바람의 이점을 주었다.[116]
더 최근에는 브롱코스가 1991년부터 2015년까지 11번 연속 승리를 거두면서 라이벌 관계가 식었고, 클리블랜드는 2018년에 17–16으로 좁게 승리하여 그 연승을 깨뜨렸다. 2023 시즌 현재, 덴버가 전체 시리즈에서 25–7로 앞서고 있다.[116]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AAFC 시대에 가장 경쟁적인 팀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리그가 진행된 4시즌 동안 매번 브라운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브라운스가 해당 시대에 기록한 4번의 패배 중 2번은 49ers에게 패한 것이었다(브라운스의 29경기 무패 행진을 끝낸 패배 포함). 이 라이벌 관계는 NFL 시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데, 특히 1970년에 두 팀이 서로 다른 컨퍼런스로 배치된 이후였다. 이 라이벌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는데, 1999년 브라운스가 재창단될 당시 많은 49ers 출신 인물들이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전 49ers 사장 겸 CEO 카르멘 폴리와 부사장 겸 풋볼 운영 이사 드와이트 클라크가 확장된 브라운스에 같은 역할로 고용되었다. 또한, 49ers 구단주 존 요크와 데니스 데바톨로 요크는 클리블랜드에서 동남쪽으로 96.5km 거리에 위치한 영스타운에 거주한다. 브라운스의 오랜 키커이자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던 필 도슨과 백업 쿼터백 콜트 맥코이는 2014년에 49ers와 계약했다. 2023 시즌 현재, 브라운스가 20승 10패로 역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다.[117]
휴스턴 오일러스/테네시 타이탄스와의 라이벌 관계는 1970년 AFL-NFL 합병 이후 브라운스와 당시 오일러스가 AFC 센트럴에 배치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두 팀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두 차례씩 경기를 치렀으며, 2002년에는 디비전 재편으로 브라운스가 AFC 북부에, 현재의 타이탄스가 AFC 사우스에 배치되었다(브라운스가 활동을 중단했던 1996-98년 제외). 2002년 이후 두 팀의 만남은 훨씬 줄어들었다. 브라운스는 전체 상대 전적에서 37승 32패로 앞서 있으며, 오일러스/타이탄스와의 69번의 만남은 클리블랜드의 상대 팀 중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신시내티 벵골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118]
이 라이벌 관계의 정점은 1980년대였다. 오일러스의 헤드 코치 제리 글랜빌과 마티 셔튼하이머는 10년 동안 여러 번 격렬한 설전을 벌였으며, 브라운스와 오일러스는 1988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서 만났고, 오일러스가 24–23으로 신승을 거두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기억에 남는 경기가 몇 차례 있었다. 2014년에는 브라운스가 28–3으로 뒤지던 경기를 뒤집고 29–28로 승리했다. 2020년 12월, 두 팀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경기에서 브라운스는 전반에 38–7로 앞서며 구단 역사상 전반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테네시는 후반에 반격했지만, 브라운스가 41–35로 승리했다.
3. 2. 1. 덴버 브롱코스
더 드라이브와 더 펌블도 참조하십시오.브라운스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세 번의 AFC 챔피언십 게임으로 인해 덴버 브롱코스와 짧은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 1986년 AFC 챔피언십에서 쿼터백 존 엘웨이는 더 드라이브를 이끌어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동점을 만들었고, 브롱코스는 연장전에서 23–20으로 승리했다. 1년 후, 두 팀은 1987 AFC 챔피언십 게임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다. 덴버는 21–3으로 앞서나갔지만, 브라운스의 쿼터백 버니 코사는 4쿼터 중반에 4번의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31–31 동점을 만들었다. 긴 드라이브 끝에 존 엘웨이는 러닝백 새미 윈더에게 20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던져 덴버가 38–31로 앞서나가게 했다. 클리블랜드는 경기 종료 1분 12초를 남기고 덴버의 8야드 라인까지 진출했지만, 브롱코스의 세이프티 제레미아 캐스틸은 2야드 라인에서 브라운스의 러닝백 어니스트 바이너로부터 공을 빼앗았다. 이 플레이는 브라운스 팬들에게 더 펌블이라고 불린다. 브롱코스는 공을 회수했고, 클리블랜드에 의도적인 세이프티를 허용했으며, 38–33으로 승리했다. 두 팀은 1989년 AFC 챔피언십에서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다시 만났고, 브롱코스가 37–21로 손쉽게 승리했다.[116]
이 짧은 라이벌 관계는 또한 1989년 정규 시즌에서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에서 브라운스가 16–13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승리를 거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경기는 경기 종료와 함께 매트 바의 48야드 필드 골로 결정되었다. - 크로스바를 간신히 넘긴 킥이었다. 바의 필드 골은 톰 둘리 심판이 4쿼터 중반에 팀들에게 경기장 양쪽 끝을 바꾸도록 명령한 후에 나왔다. 이는 거친 도그 파운드 팬들이 브롱코스에게 개 비스킷, 달걀 및 기타 파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교체는 브라운스에게 경기 마무리에 유리한 작은 바람의 이점을 주었다.[116]
더 최근에는 브롱코스가 1991년부터 2015년까지 11번 연속 승리를 거두면서 라이벌 관계가 식었고, 클리블랜드는 2018년에 17–16으로 좁게 승리하여 그 연승을 깨뜨렸다. 2023 시즌 현재, 덴버가 전체 시리즈에서 25–7로 앞서고 있다.[116]
3. 2. 2. 디트로이트 라이온스
(내용 없음)3. 2. 3.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가 AAFC 시대에 가장 경쟁적인 팀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리그가 진행된 4시즌 동안 매번 브라운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브라운스가 해당 시대에 기록한 4번의 패배 중 2번은 49ers에게 패한 것이었다(브라운스의 29경기 무패 행진을 끝낸 패배 포함). 이 라이벌 관계는 NFL 시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는데, 특히 1970년에 두 팀이 서로 다른 컨퍼런스로 배치된 이후였다. 이 라이벌 관계는 우호적인 관계로 바뀌었는데, 1999년 브라운스가 재창단될 당시 많은 49ers 출신 인물들이 도움을 주었다. 특히 전 49ers 사장 겸 CEO 카르멘 폴리와 부사장 겸 풋볼 운영 이사 드와이트 클라크가 확장된 브라운스에 같은 역할로 고용되었다. 또한, 49ers 구단주 존 요크와 데니스 데바톨로 요크는 클리블랜드에서 동남쪽으로 96.5km 거리에 위치한 영스타운에 거주한다. 브라운스의 오랜 키커이자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던 필 도슨과 백업 쿼터백 콜트 맥코이는 2014년에 49ers와 계약했다. 2023 시즌 현재, 브라운스가 20승 10패로 역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다.[117]4. 로고와 유니폼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서 유일하게 헬멧 로고가 없는 팀이다. 로고가 없는 헬멧 자체가 브라운스의 공식 로고 역할을 한다.[83]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선수들의 등번호가 헬멧에 그려졌었고, 1965년에는 사용되지 않은 "CB" 로고가 제작되기도 했다.[83] 그러나 브라운스 헬멧은 역사상 대부분 기간 동안 아무런 장식이 없는 번트 오렌지색에 흰색 줄로 나뉜 짙은 갈색(씰 브라운) 줄무늬가 상단에 있었다.
팀은 수년 동안 "브라우니 엘프" 마스코트나 흰색 풋볼 안의 갈색 "B"와 같은 다양한 홍보 로고를 사용해 왔다. 아트 모델은 1960년대 중반에 엘프가 너무 유치하다는 이유로 사용을 중단했지만, 1999년 팀이 복귀한 이후 그 사용이 부활했다. 헌팅턴 뱅크 필드의 Dawg Pound 구역의 인기로 인해 갈색과 오렌지색 개가 다양한 브라운스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오렌지색, 로고 없는 헬멧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주요 상표로 계속 남아 있다.[85] 브라운스는 1999년 NFL 복귀, 2006년 시즌 60주년, 2021년 75주년 기념 로고와 같은 개별 시즌 동안 특별 기념 로고를 사용해 왔다.[85]
현재 로고와 워드마크는 2015년 2월 24일에 도입되었으며, 헬멧 디자인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유일한 차이점은 헬멧에 사용된 오렌지색 음영의 미세한 색상 변경과 페이스마스크가 회색에서 갈색으로 변경된 것이다.[11][12][86] 새로운 보조 "도그" 로고가 2023년에 도입되었다. 불 마스티프 개를 특징으로 하는 이 로고는 그래픽 디자이너 휴스턴 마크가 제작했으며 팬 투표에서 우승했다. 이 로고는 클리블랜드 시, 오하이오 주, 팀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작은 오마주를 담고 있다.[87][88]
2022 시즌부터 팬 투표를 통해 브라우니 엘프 로고의 한 버전이 헌팅턴 뱅크 필드 미드필드에 등장한다.[89]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유니폼은 1946년 창단 이후 헬멧을 제외하고는 디자인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헬멧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2015년에 유니폼은 큰 변화를 겪었다.[98][99]
저지는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된다.
# 씰 브라운: 오렌지색 숫자와 글씨, 소매에 오렌지-흰색-오렌지 줄무늬가 있다.
# 흰색 (원정): 오렌지색 숫자와 글씨, 갈색-오렌지-갈색 줄무늬가 있다.
# 오렌지색: 흰색 숫자와 글씨,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다.
바지 또한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된다.
# 갈색: 오렌지-흰색-오렌지 줄무늬가 바지 길이의 2/3를 차지하고, 나머지 1/3에는 오렌지색으로 "BROWNS"가 적혀 있다.
# 흰색: 갈색-오렌지-갈색 줄무늬가 있고, "BROWNS"는 갈색으로 적혀 있다.
# 오렌지색: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고, "BROWNS"는 갈색으로 적혀 있다.
양말은 단색 갈색, 흰색, 오렌지색 세 가지이다.
헬멧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단색 흰색이었다가,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주간 경기에는 단색 흰색, 야간 경기에는 단색 오렌지색을 사용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흰색 단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흰색 단색 줄무늬와 측면에 갈색 숫자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했다. 1960년에는 갈색-흰색-갈색 줄무늬와 측면에 갈색 숫자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했고, 1961년부터 1995년, 그리고 1999년부터 현재까지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하고 있다.
브라운스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홈 경기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는 기간이 있었다. 최근까지 더 많은 NFL 팀들이 홈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기 전까지, 브라운스는 메이슨-딕슨 라인 북쪽에 있는 팀 중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홈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는 비아열대 팀이었다.
1961년에는 보조 숫자("TV 숫자")가 저지 소매에 처음 등장했다. 소매 줄무늬는 1968년과 1969년에 약간 수정되었는데, 줄무늬가 서로 분리되어 색 번짐을 방지했다. 2002년에는 팀 소유주 앨 러너를 기리기 위해 이니셜 "AL"이 추가되었으나, 2013년 지미 해슬람이 팀 소유권을 인수하면서 제거되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 바지를 착용했으며, 이는 "카디악 키즈"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오렌지 바지는 2003년과 2004년에 다시 착용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헬멧을 제외한 유니폼이 완전히 재설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1985년에 원래 디자인으로 돌아왔다. 1999년 확장된 브라운스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TV 숫자가 어깨로 옮겨지고 바지 줄무늬가 넓어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2002년에는 대체 오렌지 저지가 도입되고 단색 갈색 양말이 등장하는 등 유니폼 디자인에 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회색 페이스 마스크가 특징인 이전 유니폼 스타일로 돌아갔다.
2008년에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갈색 바지를 착용했다.[91] 2009년에는 갈색 바지를 계속 착용했으나,[93] 팬들의 반발로 2010년에 다시 흰색 셔츠와 흰색 바지로 돌아갔다.[95] 2011년에는 홈에서 흰색을 착용하기로 결정했다.[96]
2013년에는 목요일 밤 축구에서 갈색 저지와 함께 갈색 바지를 다시 착용했다.[97] 2015년에는 새로운 유니폼 조합이 공개되었고,[98][99] 2016년 NFL 컬러 러시 프로그램에서는 올 브라운 룩을 다시 가져왔다. 2019년에는 이 유니폼을 주요 홈 유니폼으로 승격시켰다.[100]
2020년에는 새로운 유니폼 디자인이 공개되었는데, 이는 이전 브라운스의 클래식 유니폼 디자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101][102] 2023년에는 흰색 헬멧이 특징인 완전 흰색 유니폼인 "화이트 아웃" 유니폼이 도입되었다.[103][104]
4. 1. 로고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헬멧 로고가 없는 유일한 내셔널 풋볼 리그(NFL) 팀이다. 로고가 없는 헬멧은 브라운스의 공식 로고 역할을 한다.[83]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선수들의 등번호가 헬멧에 그려졌고, 1965년에는 사용되지 않은 "CB" 로고가 제작되었다.[83] 그러나 브라운스 헬멧은 역사상 대부분 기간 동안 아무런 장식이 없는 번트 오렌지색에 흰색 줄로 나뉜 짙은 갈색(씰 브라운) 줄무늬가 상단에 있었다.팀은 수년 동안 "브라우니 엘프" 마스코트나 흰색 풋볼 안의 갈색 "B"와 같은 다양한 홍보 로고를 사용해 왔다. 아트 모델은 1960년대 중반에 엘프가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여 사용을 중단했지만, 1999년 팀이 복귀한 이후 그 사용이 부활했다. 헌팅턴 뱅크 필드의 Dawg Pound 구역의 인기로 인해 갈색과 오렌지색 개가 다양한 브라운스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오렌지색, 로고 없는 헬멧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주요 상표로 계속 남아 있다.[85] 브라운스는 1999년 NFL 복귀, 2006년 시즌 60주년, 2021년 75주년 기념 로고와 같은 개별 시즌 동안 특별 기념 로고를 사용해 왔다.[85]
현재 로고와 워드마크는 2015년 2월 24일에 도입되었으며, 헬멧 디자인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유일한 차이점은 헬멧에 사용된 오렌지색 음영의 미세한 색상 변경과 페이스마스크가 회색에서 갈색으로 변경된 것이다.[11][12][86] 새로운 보조 "도그" 로고가 2023년에 도입되었다. 불 마스티프 개를 특징으로 하는 이 로고는 그래픽 디자이너 휴스턴 마크가 제작했으며 팬 투표에서 우승했다. 이 로고는 클리블랜드 시, 오하이오 주, 팀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작은 오마주를 담고 있다.[87][88]
2022 시즌부터 팬 투표를 통해 브라우니 엘프 로고의 한 버전이 헌팅턴 뱅크 필드 미드필드에 등장한다.[89]
4. 2. 유니폼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유니폼은 1946년 창단 이후 헬멧을 제외하고는 디자인이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헬멧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2015년에 유니폼은 큰 변화를 겪었다.[98][99]저지는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된다.
# 씰 브라운: 오렌지색 숫자와 글씨, 소매에 오렌지-흰색-오렌지 줄무늬가 있다.
# 흰색 (원정): 오렌지색 숫자와 글씨, 갈색-오렌지-갈색 줄무늬가 있다.
# 오렌지색: 흰색 숫자와 글씨,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다.
바지 또한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된다.
# 갈색: 오렌지-흰색-오렌지 줄무늬가 바지 길이의 2/3를 차지하고, 나머지 1/3에는 오렌지색으로 "BROWNS"가 적혀 있다.
# 흰색: 갈색-오렌지-갈색 줄무늬가 있고, "BROWNS"는 갈색으로 적혀 있다.
# 오렌지색: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고, "BROWNS"는 갈색으로 적혀 있다.
양말은 단색 갈색, 흰색, 오렌지색 세 가지이다.
헬멧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단색 흰색이었다가,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주간 경기에는 단색 흰색, 야간 경기에는 단색 오렌지색을 사용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흰색 단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흰색 단색 줄무늬와 측면에 갈색 숫자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했다. 1960년에는 갈색-흰색-갈색 줄무늬와 측면에 갈색 숫자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했고, 1961년부터 1995년, 그리고 1999년부터 현재까지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색 헬멧을 사용하고 있다.
브라운스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홈 경기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는 기간이 있었다. 최근까지 더 많은 NFL 팀들이 홈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기 전까지, 브라운스는 메이슨-딕슨 라인 북쪽에 있는 팀 중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홈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는 비아열대 팀이었다.
1961년에는 보조 숫자("TV 숫자")가 저지 소매에 처음 등장했다. 소매 줄무늬는 1968년과 1969년에 약간 수정되었는데, 줄무늬가 서로 분리되어 색 번짐을 방지했다. 2002년에는 팀 소유주 앨 러너를 기리기 위해 이니셜 "AL"이 추가되었으나, 2013년 지미 해슬람이 팀 소유권을 인수하면서 제거되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갈색-흰색-갈색 줄무늬가 있는 오렌지 바지를 착용했으며, 이는 "카디악 키즈"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오렌지 바지는 2003년과 2004년에 다시 착용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헬멧을 제외한 유니폼이 완전히 재설계되었으나, 팬들의 반발로 1985년에 원래 디자인으로 돌아왔다. 1999년 확장된 브라운스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TV 숫자가 어깨로 옮겨지고 바지 줄무늬가 넓어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2002년에는 대체 오렌지 저지가 도입되고 단색 갈색 양말이 등장하는 등 유니폼 디자인에 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회색 페이스 마스크가 특징인 이전 유니폼 스타일로 돌아갔다.
2008년에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갈색 바지를 착용했다.[91] 2009년에는 갈색 바지를 계속 착용했으나,[93] 팬들의 반발로 2010년에 다시 흰색 셔츠와 흰색 바지로 돌아갔다.[95] 2011년에는 홈에서 흰색을 착용하기로 결정했다.[96]
2013년에는 목요일 밤 축구에서 갈색 저지와 함께 갈색 바지를 다시 착용했다.[97] 2015년에는 새로운 유니폼 조합이 공개되었고,[98][99] 2016년 NFL 컬러 러시 프로그램에서는 올 브라운 룩을 다시 가져왔다. 2019년에는 이 유니폼을 주요 홈 유니폼으로 승격시켰다.[100]
2020년에는 새로운 유니폼 디자인이 공개되었는데, 이는 이전 브라운스의 클래식 유니폼 디자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101][102] 2023년에는 흰색 헬멧이 특징인 완전 흰색 유니폼인 "화이트 아웃" 유니폼이 도입되었다.[103][104]
5. 팬 베이스
2006년 ''비즈저널''의 연구에 따르면, 브라운스의 팬들은 NFL에서 가장 충성도가 높은 팬들로 밝혀졌다. 이 연구는 과학적이지는 않았지만, 승리 및 패배 시즌 동안의 팬 충성도, 경기 참석률, 그리고 팬들이 직면한 어려움(악천후 또는 팀의 장기간 부진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119] 이 연구는 브라운스 팬들이 지난 7시즌 동안 헌팅턴 뱅크 필드의 좌석을 99.8% 채웠으며, 이 기간 동안의 팀 성적은 36승 76패였다고 언급했다.[120]
가장 눈에 띄는 브라운스 팬들은 Dawg Pound에서 찾아볼 수 있다.[121] 원래는 오래된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의 동쪽 끝에 위치한 스탠드석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헌팅턴 뱅크 필드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수백 명의 주황색과 갈색 옷을 입은 팬들이 다양한 개 관련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팬들은 1984년 브라운스 수비진의 멤버들이 팀의 수비를 묘사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한 후 그 이름을 채택했다.[122]
브라운스에서 선수 경력 전체를 보낸 (1981–1989) 은퇴한 코너백 핸포드 딕슨은 1980년대 중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수비진의 이름을 'The Dawgs'라고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딕슨과 팀 동료 프랭크 미니필드, 에디 존슨은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의 스탠드석에 있는 서로와 팬들에게 짖어 그들을 흥분시켰다. 딕슨의 작명에서 'Dawg Pound'가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123] 그 후 몇 년 동안 팬들은 그 이름을 채택했다.[122] 이러한 별명 때문에, 팀이 부활한 이후 브라운스는 불독을 대체 로고로 사용해 왔다.[124]
브라운스 팬 조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브라운스 백커스 월드와이드''(Browns Backers Worldwide, BBW)이다.[125] 이 조직은 약 305,00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125] 브라운스 백커스 클럽은 미국 내 모든 주요 도시와 전 세계 여러 군 기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클럽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다. 또한 이 조직은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리랑카, 남극 대륙의 맥머도 기지와 같은 먼 곳에도 상당한 해외 지부를 두고 있다.[126]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공식 팬 클럽에 따르면, 가장 큰 두 개의 국제 팬 클럽은 서안 지구의 알론 슈부트와 캐나다 나이아가라에 있으며, 알론 슈부트는 129명, 나이아가라는 31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127]
전 브라운스 구단주 랜디 러너가 잉글랜드 축구 클럽 애스턴 빌라를 인수한 후, 빌라의 공식 판매점에서 저지, NFL 풋볼과 같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에서 관심을 높이고 두 스포츠 클럽 간의 관계를 강화했다. 애스턴 빌라 서포터들은 버밍엄에 애스턴(빌라) 브라운스 백커스라는 조직을 설립했다.[128]
5. 1. Dawg Pound
가장 눈에 띄는 브라운스 팬들은 Dawg Pound에서 찾아볼 수 있다.[121] 원래는 오래된 클리블랜드 시립 경기장의 동쪽 끝에 위치한 스탠드석을 지칭하는 이름이었지만, 현재는 헌팅턴 뱅크 필드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수백 명의 주황색과 갈색 옷을 입은 팬들이 다양한 개 관련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팬들은 1984년 브라운스 수비진의 멤버들이 팀의 수비를 묘사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한 후 그 이름을 채택했다.[122]브라운스에서 선수 경력 전체를 보낸 (1981–1989) 은퇴한 코너백 핸포드 딕슨은 1980년대 중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수비진의 이름을 'The Dawgs'라고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딕슨과 팀 동료 프랭크 미니필드, 에디 존슨은 클리블랜드 스타디움의 스탠드석에 있는 서로와 팬들에게 짖어 그들을 흥분시켰다. 딕슨의 작명에서 'Dawg Pound'가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123] 그 후 몇 년 동안 팬들은 그 이름을 채택했다.[122] 이러한 별명 때문에, 팀이 부활한 이후 브라운스는 불독을 대체 로고로 사용해 왔다.[124]
5. 2. Browns Backers
브라운스 팬 조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브라운스 백커스 월드와이드''(Browns Backers Worldwide, BBW)이다.[125] 이 조직은 약 305,00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125] 브라운스 백커스 클럽은 미국 내 모든 주요 도시와 전 세계 여러 군 기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클럽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다. 또한 이 조직은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스리랑카, 남극 대륙의 맥머도 기지와 같은 먼 곳에도 상당한 해외 지부를 두고 있다.[126]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공식 팬 클럽에 따르면, 가장 큰 두 개의 국제 팬 클럽은 서안 지구의 알론 슈부트와 캐나다 나이아가라에 있으며, 알론 슈부트는 129명, 나이아가라는 31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127]전 브라운스 구단주 랜디 러너가 잉글랜드 축구 클럽 애스턴 빌라를 인수한 후, 빌라의 공식 판매점에서 저지, NFL 풋볼과 같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에서 관심을 높이고 두 스포츠 클럽 간의 관계를 강화했다. 애스턴 빌라 서포터들은 버밍엄에 애스턴(빌라) 브라운스 백커스라는 조직을 설립했다.[128]
6.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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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브라운스에서 활약한 선수들을 기준으로 총 17명의 선수를 헌액시켰으며, 브라운스에서 최소 1년 이상 활약한 선수나 코치 9명이 추가로 헌액되어 있어 헌액 선수 수가 네 번째로 많다.[129] 1963년 첫 헌액 클래스에는 브라운스 선수가 없었다. 오토 그레이엄은 1965년 클래스의 멤버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브라운스 선수였다.[130]
최근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포함된 브라운스 선수는 2023년 클래스의 멤버인 조 토마스로, 21세기에 활약한 선수 중 최초로 헌액된 선수이다.[130]
헌액 연도 | 등번호 | 선수 이름 | 활동 기간 | 포지션 |
---|---|---|---|---|
1965 | 60, 14 | 오토 그레이엄 | 1946–1955 | QB |
1967 | — | 폴 브라운 | 1946–1962 | 헤드 코치 |
1968 | 76, 36 | 매리언 모틀리 | 1946–1953 | FB |
1971 | 32 | 짐 브라운 | 1957–1965 | FB |
1974 | 46, 76 | 루 그로자 | 1946–1959 1961–1967 | OT K |
1975 | 56, 86 | 단테 라벨리 | 1946–1956 | WR |
1976 | 53, 80 | 렌 포드 | 1950–1957 | DE |
1977 | 30, 45, 60 | 빌 윌리스 | 1946–1953 | T, OG |
1981 | 77 | 윌리 데이비스 * | 1958–1959 | DE |
1982 | 83 | 더그 앳킨스 | 1953–1954 | DE |
1983 | 49 | 바비 미첼 | 1958–1961 | WR, RB, HB |
42 | 폴 워필드 | 1964–1969 1976–1977 | WR | |
1984 | 74 | 마이크 매코맥 | 1954–1962 | OT |
1985 | 22, 52 | 프랭크 개츠키 | 1946–1956 | C |
1987 | 18 | 렌 데이슨 | 1960–1961 | QB |
1994 | 44 | 리로이 켈리 | 1964–1973 | RB |
1995 | 72 | 헨리 조던 | 1957–1958 | DT |
1998 | 29 | 토미 맥도날드 | 1968 | WR |
1999 | 82 | 오지 뉴섬 | 1978–1990 | TE |
2003 | 64 | 조 델라미엘루 | 1980–1984 | OG |
2007 | 66 | 진 히커슨 | 1958–1960 1962–1973 | OG |
2020 | 58, 88 | 맥 스피디 | 1946–1952 | 엔드 |
2023 | 73 | 조 토마스 | 2007–2017 | OT |
6. 1.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헌액자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는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브라운스에서 활약한 선수들을 기준으로 총 17명의 선수를 헌액시켰으며, 브라운스에서 최소 1년 이상 활약한 선수나 코치 9명이 추가로 헌액되어 있어 헌액 선수 수가 네 번째로 많다.[129] 1963년 첫 헌액 클래스에는 브라운스 선수가 없었다. 오토 그레이엄은 1965년 클래스의 멤버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브라운스 선수였다.[130]최근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포함된 브라운스 선수는 2023년 클래스의 멤버인 조 토마스로, 21세기에 활약한 선수 중 최초로 헌액된 선수이다.[130]
헌액 연도 | 등번호 | 선수 이름 | 활동 기간 | 포지션 |
---|---|---|---|---|
1965 | 60, 14 | 오토 그레이엄 | 1946–1955 | QB |
1967 | — | 폴 브라운 | 1946–1962 | 헤드 코치 |
1968 | 76, 36 | 매리언 모틀리 | 1946–1953 | FB |
1971 | 32 | 짐 브라운 | 1957–1965 | FB |
1974 | 46, 76 | 루 그로자 | 1946–1959 1961–1967 | OT K |
1975 | 56, 86 | 단테 라벨리 | 1946–1956 | WR |
1976 | 53, 80 | 렌 포드 | 1950–1957 | DE |
1977 | 30, 45, 60 | 빌 윌리스 | 1946–1953 | T, OG |
1981 | 77 | 윌리 데이비스 * | 1958–1959 | DE |
1982 | 83 | 더그 앳킨스 | 1953–1954 | DE |
1983 | 49 | 바비 미첼 | 1958–1961 | WR, RB, HB |
42 | 폴 워필드 | 1964–1969 1976–1977 | WR | |
1984 | 74 | 마이크 매코맥 | 1954–1962 | OT |
1985 | 22, 52 | 프랭크 개츠키 | 1946–1956 | C |
1987 | 18 | 렌 데이슨 | 1960–1961 | QB |
1994 | 44 | 리로이 켈리 | 1964–1973 | RB |
1995 | 72 | 헨리 조던 | 1957–1958 | DT |
1998 | 29 | 토미 맥도날드 | 1968 | WR |
1999 | 82 | 오지 뉴섬 | 1978–1990 | TE |
2003 | 64 | 조 델라미엘루 | 1980–1984 | OG |
2007 | 66 | 진 히커슨 | 1958–1960 1962–1973 | OG |
2020 | 58, 88 | 맥 스피디 | 1946–1952 | 엔드 |
2023 | 73 | 조 토마스 | 2007–2017 | OT |
6. 2. 영구 결번
1432
45
46
76